2014년 추석연휴 때 지리산 노고단에서...
우리가족의 행복곡물에 being
여봉~~ "행복은 영원히 느끼고 싶은 찰나의 감정이래요"
- 서은국『행복의 기원』에서 -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생존과 번식, 행복은 진화의 산물이다
서은국
현재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세대학교 졸업 후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행복 분야 권위자인 에드 디너 교수의 지도를 받고,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위 후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고, 4년 뒤 이 대학에서 종신 교수직을 받았다.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인용되는 행복 심리학자 중 한 명으로, 특히 행복과 문화 차가 전문 분야다. 그의 논문들은 OECD 행복측정 보고서에 참고자료로 사용되고 있으며, 최근 '세계 100인의 행복학자'에 선정되어『세상의 모든 행복』에 기고했다. 모교인 연세대학교로 돌아와 느끼는 큰 보람은 바로 강의다. '행복의 과학'이라는 저자의 강의는 "이 수업을 들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수강 대기자가 700명을 넘는다. 최근에는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 삼성경제연구소의 SERI CEO 강연 등을 통해 행복에 대한 '차가운' 사실들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일확천금을 얻는 것은
돈에 인생의 수갑을 차는 것과 같다
아이스크림은 달콤하지만 반드시 녹는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은 생각인가
삶은 갈등의 연속이다. 이 갈등은 인간의 양면적 모습 사이의 끝없는 줄다리기다. 무의식적이고 동물적인 우리의 '본능'이 의식적이고 합리적이고자 하는 문명인의 '이성'과 하루에도 몇 번씩, 평생 동안 충돌한다.
시누이가 너무 얄미워 한 방 날리고 싶지만 이성의 목소리가 겨우 말린다. 이성 신승辛勝, 세상이 깜짝 놀랄 정도로 살을 빼겠노라 결심하지만, 결국 늦은 밤 라면을 끓여 먹고 잔다. 밥도 좀 말아서, 본능 압승.
인간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철학자들이 수천 년간 펼친 이 논쟁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다. 양면적 모습을 언급하는 이유는 심리학이라는 학문, 특히 지금까지의 행복 연구는 인간의 '의식' 수준에서 진행되는 상당히 합리적인 모습에만 너무 몰두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런 관점으로 그려진 행복의 청사진에는 정작 결정적인 것들이 빠져 있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감정의 경험인데, 마치 머리에서 만들어내는 일종의 생각 혹은 가치라는 착각이들게 한다.
세상의 많은 책이 행복해지기 위해 '의미를 찾아라' '가진것에 만족해라' '긍정적인 생각을 해라' 같은 조언을 한다. 즉, 생각을 바꾸라는 것이다. 맞는 말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공허한 말장난 같기도 하다.
불행한 사람은 긍정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생각'이 아님에도 불구하도 자꾸만 생각을 고치라고 조언하고 있다. 이런식의 행복 지침서를 읽고 행복해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왜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행복해지기 어려운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행복은 사람 안에서 만들어지는 복잡한 경험이고, 생각은 그의 특성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뜻대로 쉽게 바뀌지도 않지만, 변한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전체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뇌에서 만들어내는 마법과 같은 놀라운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빨간 사과, 빨간색은 사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과 표면에 반사된 빛의 파장이 우리의 시각세포를 흥분시키고, 이 신경반응을 뇌에서 합성해 '빨갛다'는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만약 빨간색이 사과 자체에 묻어 있다면 사과는 항상 빨갛게 보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색명인 내 친구에게 사과는 빨갛게 보인 적이 없다. 즉, 사과의 빨간색은 사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본 사람의 머릿속에서 생겨나는 경험이다.
그렇다면 빨강이라는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을 분석해야 할까. 세상의 모든 사과? 아니다. 외부의 자극을 합성해 빨강이라는 느낌을 만들어내는 그 경험의 주인, 즉 경험자 그리고 그의 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용돈을 받고 즐거워할 때 느끼는 행복 역시 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과의 빨간색처럼 행복감도 뇌에서 합성된 경험이다. 돈이라는 자극이 뇌의 특정 부위들을 흥분시켜 '좋다'는 일시적 경험을 합성해내는 것이다. 돈은 무조건 누구에게나 행복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색깔을 지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복잡 미묘한 경험이 행복이다.
어쨌든 행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경험이 왜, 언제 뇌에서 발생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 뇌의 주인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의 유전자에 박힌 가장 큰 욕망은 무엇인지, 그의 뇌는 무엇을 하기 위해 설계된 생물학적 연장인지.
여기에 대한 본격적인 얘기는 뒤에서 하도록 하고, 우선 여기서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뇌의 대표적인 능력(의식적인 사고)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해보자. 혹시 그 중요성이나 역할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분명 인간은 인간답게 만드는 특성이다. 숙고할 수 있기에 어제의 경험을 통해 뭔가를 배우고, 내일을 준비하고, 이런 책도 사서 읽어본다. 그러나 무엇을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어떤 생명체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일까?
우리보다 지구에 훨씬 오래 전부터 살아온 악어, TV에서 보면 녀석들은 진흙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 도무지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는 표정이 아니다. 인간사회 못지않은 복잡한 위계 구조를 유지하며, 심지어 곰팡이 농장까지 운영하는 놀라운 개미들, 그 녀석들도 생각이란 건 하지 않는다. 겨울이 다가오면 남쪽으로 이동하는 철새, 그중 '반장' 철새가 달력에 출발일을 큰 동그라미로 표시해놓는 것도 아니다. 새의 뇌는 눈에 닿는 일조망과 햇빛의 미세한 각도 변화를 감지해 이동 시기를 본능적으로 결정한다. 즉, 의식적인 생각은 생명 유지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호흡, 소화, 혈액순환,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거의 모든 생리적 기능들은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심장이 몇 번 뛰었는지. 호흡을 몇 자례 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심장은 뛰었고 숨을 쉬었다. 우리의 생명을 꾸려나가는 수많은 기능은 자동으로, 잘 짜인 프로그램처럼 우리 의식 밖에서 돌아가고 있다. 마치 나의 손발이 스스로 알아서 운전을 하는 것처럼.
요약하자면 의식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생존에 절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일상의 경험들을 하기 위한 필요조건도 아니다. 최근 많은 학자가 의식적 사고의 중요성이 과대평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 '생각하는 모습'을 인간의 대표적 특성으로 꼽는다. 왜 우리는 이성의 능력을 이토록 숭배하는 것인가?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 중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부분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보이는' 부분이 실제보다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페르시아 왕들은 패전보를 전해 들고온 병사를 처형했다고 한다. 단지 왕의 눈에 보였다는 죄 아닌 죄로 전령병은 패전의 책임을 과하게 뒤집어썼다.
하지만 페르시아 왕과 우리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왕은 패전의 이유가 전령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우리는 의식적인 부분이 자기 행동의 원인이라고 굳게 믿는다. 큰 오해다. 사실 일상의 수많은 선택과 행동은 의식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레몬 향을 맡으면 사람이 갑자기 청결에 신경을 쓰게 된다. 세척제에 주로 레몬 향이 첨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에서 이 둘(레몬향과 청결)은 연결된다. 두 사건이 연합되는 경우, 하나(레몬향)가 활성화되면 거기에 연결된 고리(창소)도 함께 활성화된다. 이 과정이 본인도 모르게 자동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문제다. 레몬 차를 마시면 엄마가 갑자기 걸레를 찾는다고 하자. 왜 그러냐고 딸이 물으면 엄마는 의식 수준에 떠오르는 가장 그럴듯한 이유를 댄다.
"저녁에 오시는 손님이 먼지 알레르기가 있으시대."
레몬 얘기는 절대 안 나온다. 숨기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이유를 엄마도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말을 덧붙일지도 모른다.
"너희 엄마가 이렇게 현명한 사람이야."
어쩌면 세상 모든 엄마들은 이렇게 현명한지.
착각은 이런 시트콤 같은 장면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훨씬 중요한 판단을 내릴 때도 일어난다. 가령 배우자 선택, 지난번에 선본 남자가 싫은 이유?
"담배를 피워서."
친구들에게 이렇게 설명하고, 자신도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담배라는 이유는 자기도 모르게 만든 사후 설명일 가능성이 크다. 진짜 이유는 훨씬 원초적일 수 있다. 그의 묘한 체취라든지, 쉬지 않고 깜박이던 눈.
'웬지 아니다. 이 사람.'
만난 지 3분 만에 내린 동물적 판단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과정은 뇌에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여자는 엉뚱한 곳에서 이유를 찾게 되고, 그러던 중 그가 피우던 담배가 떠오른다. 담배 피우는 남자… 돈 낭비, 건강 마이너스, 백해무익한 인가.
한 달 뒤 그 남자가 담배를 끊고 진화했다고 치자, 그래도 당연히 'No"다. 남자는 친구들과 술 한잔 하며 푸념을 늘어 놓을 것이다. 도무지 이해 안 되는 게 여자라고, 그럴 수밖에, 그녀도 자신을 모른다.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팀 윌슨은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도 '이방인' 같은 낯선 존재라고 했다.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말 모르는 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멍청해서가 아니고, 우리의 많은 선택과 결정의 의식을 거치지 않고 진행되기 때문이다. 의식은 아주 한정된 용량의 값비싼 자원이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만 선별적으로 기억하고 생각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시어머니의 생일 같은 것.
우리의 머리에 떠다니는 생각은 쉽게 보이는 부분이지만, 그것이 우리 행동의 주 원인이 아닌 경우가 많다. 페르시아 왕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전령병이지만, 그가 패전의 진짜 이유는 아닌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오해를 하면 인간을 그저 '생각하는 단백질 덩어리'로 착각하며 살게 된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문제도 생각이라는 아주 좁은 테두리 안에서 논하게 되고, 결국 행복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게 된다.
이성의 역할을 중시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동물적 본능을 통제하고 다스리기 때문이다. 중요한 기능이다. 이 능력 덕분에 먹고 싶어도 참고, 자고 싶어도 새벽까지 공부하고, 지금이 아닌 먼 훗날을 위해 산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통제된 행위가 본능적 욕구보다 무조건 좋고 바람직한 것인가? 고갱의 그림에 심취하는 것이 먹고, 자고, 성관계를 갖는 것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행위인가? 어떤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느냐의 문제다.
오랜 교육을 통해 학습된 잣대로 본다면 우리의 동물적인 모습보다 합리적 측면이 더 좋아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사회적 가치는 불변의 사실이 아니고, 당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다수의 의견일 뿐이다. 그것은 문화와 시대에 따라 변한다. 프랑스인에게는 한국인이 개를 먹는다는 사실이 놀랍겠지만, 우리는 그들의 달팽이 요리가 거북하다.
가치가 아닌 생존에 기여하는 정도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우리의 본능적 모습을 힘센 '말'이라고 하고, 그것을 통제하는 이성을 말 위에 올라탄 '기수'라고 하자, 야생의 말들이 생존을 목표로 달릴 때 기수가 탄 말이 혼자 달리는 말보다 반드시 더 유리할까? 혹시 기수가 도리어 방해되는 경우는 없을까?
동물은 항상 본능대로 움직인다. 인간의 경우는? 생사를 좌우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더 이성적이 될까, 이니면 더 본능적인 모습이 튀어나올까? 이성적 통제가 항상 생존에 도움이 되었다면, 극도의 위험에 놓인 인간은 더욱 합리적으로 행동하도록 진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1977년 스페인령 캐너리 군도의 작은 섬에서 역사상 최악의 항공 사고가 일어났다. 미국의 팬암과 네덜란드의 KLM 항공사의 747 여객기가 활주로에서 충돌해 583명의 사상자를 냈다. 사고의 원인은 조종사들 간의 커뮤니케이션 문제였지만, 600명에 가까운 사상자까지 발생할 상황은 아니었다. 충돌은 상공이 아닌 활주로에서 일어났고, 기체는 충돌 후 수십 분이 지난 뒤 폭발했다. 비행기에서 탈출할 시간이 있었지만 상당수가 그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왜?
사고 조사 보고서를 주목해보자. 화염에 휩싸인 기체 안에서 사람들이 취할 가장 합리적인 행동은 탈출구를 찾아 뛰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승객은 정반대로 했다. 충돌 후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말 그대로 '언다freezing'고 표현한다. 포식자 앞에서 일시적으로 얼어버리는 것이 동물의 본능 중 하나다. 유구한 시간 동안 생존에 도뭉이 되었더 이 습성 때문에 이날은 불필요하게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생존에 위협을 느끼면 인간은 더 동물스러워진다. 항상 식량난에 시달렸던 인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양을 몸에 비축하도록 설계됐다. 특히 지방이나 당분이 있는 음식으로, 그래서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이들에게 초콜릿과 지방은 무서운 유혹이다. 입에서 당기는 본능의 힘을 막기에 이성은 너무 나약하기 때문에. 이 오랜 습성 때문에 현대인은 성인병과 비만에 시달리지만, 그 버릇 덕분에 지금까지 생존해오고 있다.
최근 한 연구에서는 환경 조건이 열악할 때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찾는지를 관찰했다. 한 곳에는 생존과 관련된 단어들이 쓰인 포스터를 실험실 벽에 붙여놓았고(생존 위협 조건), 다른 곳에는 중립적인 내용의 포스터를 걸어놓았다(중립 조건), 그 뒤 참가자들에게 두 가지 신제품 초콜릿의 맛과 바삭함을 평가하도록 했다. 두 초콜릿의 유일한 차이는 칼로리 양이라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연구의 진짜 목적은 생존과 중립 조건의 참가자들이 칼로리 양이 다른 두 초콜릿을 각각 얼마나 섭취하는지를 보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생존 위협 조건에서는 높은 칼로리의 초콜릿을 낮은 칼로리 초콜릿보다 더 많이 섭취했지만(19g 대 11g), 중립 조건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흥미로운 점은 연구 참가자들은 벽에 걸린 포스터와 자신의 초콜릿 섭취 행위와의 연관성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험 종료 후 모든 사실을 설명해줘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자기가 원래 초콜릿을 너무 좋아한다는 등 이류를 만들어냈다.
이 연구가 시사하는 바처럼 생존 위혐이 커질수록 인간도 본능적인 모습으로 회귀한다. 영양 비축을 위해 칼로리가 높은 초콜릿을 찾게 되는 것이다. 다만 이 과정은 자신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진행된다.
지금까지의 애기를 정리해보자. 이성적 사고를 하는 것은 분명 인간의 탁월한 능력 중 하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모습도 아니고, 그 역할이 생각만큼 절대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의식만이 우리의 눈에 보이기 때문에 생각이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항상 좌우한다고 착각한다.
이성적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행복을 이해하는 데 왜 문제가 되는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방해가 된다. 보다 중요한 원인을 못 보게 만들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주술사의 현란한 기우제 춤 때문에 비가 온다고 믿었다. 춤은 눈에 띄지만, 비의 원인은 아니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단비를 행복하라고 하자. 이 비가 언제, 왜 내리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습도나 풍향 같은 자연 요인들을 이해해야 한다. 주술사의 춤이나 기우제 음식 같은 가식적인 것에 현혹돼서는 행복의 본질을 볼 수 없다.
자, 그럼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인간의 이성적 사고 대 동물적 본능, 무엇이 진짜 모습일까? 인간은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이성의 역할을 상당히 과대 평가하고 있다. 역으로 본능의 '보이지 않는 힘'이 우리를 얼마나 움직이는지는 가소평가하며 산다. 이것이 다음에 다룰 내용이다.
행복에 대한 책에서 왜 이성이나 본능 같은 주재를 굳이 다루느냐고? 이런 비유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행복을 소리라고 한다면, 이 소리를 만드는 악기는 인간의 뇌다. 이 악기가 언제, 왜, 무슨 목적으로 소리를 만들어내는지를 알아야 행복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래서 우선 이 악기의 주인, 즉 인간에 대한 심층적 파악이 필요하다. 생각은 그의 모습 중 아주 작은 일부다. 그는 보면 볼수록 동물스럽다.
인간은 100% 동물이다
삶은 또한 경쟁의 연속이다. 입시, 승진, 전철의 빈자리 하나, 무엇이든 자리 수보다 사람 수가 많으면 경쟁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런 일상의 경쟁들은 자연의 경쟁 앞에서 시시해.
이 자연의 경쟁은 바로 '생존'이다. 우선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 큰 연봉이나 그럴듯한 대학 간판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 아니다. 자연의 생존경쟁은 말 그대로 생명을 건 싸움이다. 승자는 후손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지속하지만, 낙오자는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닌 싸늘한 '물질'로 되돌아간다. 경쟁 중 최고의 경쟁이 바로 생존인 것이다.
행복은 아이스크림이다
행복을 좇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질문이 하나 있다. 내 인생에 무엇이 있어야 행복할까? 저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대부분 돈, 명예, 건강 등 몇 개의 범주 안에 답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창고에 이 행복곡물들을 많이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산다.
주식에 비유한다면 돈과 같은 삶의 조건들이 가장 확실한 행복이윤을 가져다주는 종목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많은 것을 거기에 투자한다. 사실일까? 결국 행복은 무엇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일까?
행복에 대해 가장 흔히 하는 이 생각은 동시에 가장 틀린 생각이기도 하다. 미국 심리학회 회장을 지낸 스콧 릴리언펠드 교수가『심리학에 대해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오해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얼마 전에 출간(한국에서는『유혹하는 심리학』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큰 착각 중 하나도 행복이 외적인 조건에 의해 좌우된다는 믿음이다.
학자들은 무엇을 근거로 이것을 '착각'이라고 말하는가? 간단하다. 지난 30년간의 행복 연구로 누적된 엄청난 양의 지료에서 나온 총체적 결론이다.
인생의 여러 조건들, 이를테면 돈, 건강, 종교, 학력, 지능, 성별, 나이 등을 다 고려해도 행복으 개인차 중 10
~15% 정도밖에 예측하지 못환다. 몇 해전 한국심리학회에서 체계적으로 조사한 한국인의 행복에 대한 결론도 이와 비슷하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차이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의 10%와 관련된 이 조건들을 얻기 위해 인생 90%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돈을 벌기 위해.
톨스토이는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산다'고 했지만 나는 빵도 먹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수도승처럼 살자는 제안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외적 조건에 과도한 기대와 투자를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돈은 비타민과 비슷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비타민 결핍은 몸에 여러 문제를 만들지만, 적정량 이상의 섭취는 더 이상의 유익이 없다.
한국은 이제 돈이나 비타민 결핍에 시달리는 사회가 아니다. "그래도 더 필요해!"라고 고집 피우는 것은 기회비용 차원에서 본다면 자기 삶에 큰 손실을 입히는 것이다. 이 믿음은 행복을 위해 정작 투자해야 할 곳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많이 갖는 것이 행복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연구는 끝없이 많다. 이 방대한 자료 중 몇 가지만 살펴보자. 인생의 외형적 스펙 중 대표적인 돈과 행복의 관계는 한마디로 본인의 경제 수준에 따라 다르다. 하루 세끼 식사를 못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에게 돈은 매우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다. 하지만 세끼 식사를 안 하는 이유가 다이어트 때문이라면, 이 사람에게 돈은 더 이상 행복의 발판이 되지 못한다.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면 국가의 행복과 경제 수준은 서로 손을 놓아버린다. 국가 간 행복수치와 GDP는 분명히 관련이 있지만, 이것은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해결 못하는 극빈의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자료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최빈국들을 제외하면 얘기는 아주 달라진다.
선진국의 경우, 추가적인 경제 발전이 더 높은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예일 대학 경제학자 로버트 레인 교수에 의하면 지난 50년간 미국의 평균 가계소득은 약 2배로 증가했지만, 미국인 중 '매우 행복하다'는 답변을 한 사람은 1957년에는 53%, 2000년도에는 47%다. 그래프에서 선명하게 볼 수 있듯 미국 경제는 성장했지만, 행복수준은 자로 그은 것처럼 그대로다.
부유해질수록 돈으로 사는 것은 점점 어려워진다. 미국 남가주 대학의 경제학자인 리처드 이스틸린이 지적한 이 현상을 '이스틸린의 역설'이라고 한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행복수치는 특히 높다. 흔히 그들의 높은 소득과 사회복지 시스템에서 오는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오해다. 일본이 핀란드보다 국민소득은 높지만 행복수치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낮다.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다. 그들 사회는 돈이나 지위 같은 삶의 외형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상의 즐거움과 의미에 더 관심을 두고 사는 곳이다.
핀란드는 인테리어 소품 등을 디자인했던 알바 알토의 얼굴을 화페에 새긴 나라다. 일상의 작은 경험의 가치를 아는 나라의 상징적인 모습이다. 행복한 사회의 특성 중 하나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도록 하자. 지금 언급하고 싶은 것은, 빈곤을 벗어난 사회에서 돈은 더 이상 행복의 키워드가 아나라는 점이다.
돈과 행복에 대한 가장 유명한 연구는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지금의 화폐 가치로 약 100억 원의 상금을 받았던 복권 당첨자들에 대한 연구다. 복권 당첨 1년 뒤, 21명의 당첨자들과 주변 이웃의 행복감을 비교했더니 놀랍게도 별 차이가 없었다.
나는 대학에서 행복에 대한 강의를 15년째 하고 있다. 매학기 학생들에게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해줄 사건을 적어보라 한다. 독보적인 1위는 복권 당첨이다. 대학생뿐 아니라 많은 일반인도 복권 당첨과 행복을 동일시하지만, 실제로 복권에 당첨된 경우를 보면 이것이 답이 아니다. 왜 그럴까?
우선 감정이라는 것은 어떤 자극에도 지속적인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계속 반응을 해서도 안 된다. 그 이유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어쨌든 이 '적응adaptation'이라는 강력한 현상 때문에 아무리 감격스러운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의 일부가 되어 희미해진다. 2002년 월드컵, 안정환 선수의 기적적인 골, 우리 모두의 심장을 멎게 했던 그 전율도 사실은 며칠은 가지 못했다. 복권도 예외가 아니다.
복 권 당첨, 새 집, 안정환 골, 짜릿하지만 그 어떤 대단한 일도 지속적인 즐거움을 주지는 못한다. 인간은 새로운 것에 놀랍도록 빨리 적응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좌절과 시련을 겪고도 다시 일어서지만, 기쁨도 시간에 의해 퇴색된다. 이런 빠른 적응 과정 때문에 비교적 최근의 일들만이 현재의 행복에 영향을 준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최근?
이를 알아보기 위해 수년 전 나는 대학생들의 행복감을 2년 동안 추적해보았다. 대학생들이 일상에서 겪는 좋은 일들(새로 생긴 남자친구, 대학원 입학 등)과 나쁜 일들(질병, F학점 등)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약 3개월이었다. 다시 말해, 작년에 벌어진 이런저런 사건들은 그들이 4월 1일에 느끼는 행복감에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시간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생각보다 빨리 지운다.
감정의 또 다른 특성은 상재적이라는 점이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UCLA의 알렌 파르두치 교수는 '범위 빈도 이론'이라는 복잡한 개념을 소개했지만 요지는 간단하다. 극단적인 경험을 한 번 겪으면, 감정이 반응하는 기준선이 변해 그 후 어지간한 일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상위권 성적의 학생이 전교 1등을 한 번 하고 나면, 에전 성적을 다시 받았을 때 실망하게 된다. 고깃국 맛을 한 번 보면 예전의 콩나물국이 왠지 밋밋해지는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복권 당첨 같은 일확천금의 경험은 장기적인 행복의 관점에서 보면 저주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위의 복권 연구에서 보면, 복권에 당첨된 자들의 행복더듬이는 둔해진다. 복권 당첨 후 그들은 TV시청, 쇼핑, 친구들과의 식사 같은 일상의 작은 즐거움에서 이전 같은 기쁨을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큰 자극의 후유증이다.
더욱이 최근 연구들에 의하면 돈은 소소한 즐거움을 마비시키는 특별한 '효능'까지 있다. 예를 들어 '음식과 맛'이라는 제목으로 위장한 한 연구에서 대학생들에게 초콜릿을 먹도록 했다. 진짜 관심사는 대학생들의 초콜릿을 얼마나 음미하며 먹는지를 보는 것이었다.
초콜릿을 먹기에 앞서 설문을 했는데, 한 조건에서는 설문지에 선명한 돈 사진을 한 장 끼워넣었다. 돈에 대한 생각을 살포시 하도록, 흥미롭게도 돈 조건의 대학생들은 돈을 보지 않은 동료보다 초콜릿을 덜 음미하며 먹었다. 그들은 초콜릿을 더 빨리 먹었고, 표정을 분석한 결과 덜 웃으면서 먹었다.
돈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그래서 초콜릿 같은 시시한 것에 마음 두지 않게 하고, 이런 자극을 음미하는 능력을 감소시킨다. 심지어 사람이라는 자극에도 관심을 덜 갖게 한다. 돈을 생각할수록 카페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덜 하고, 어려움을 당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사양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하지만 초콜릿을 우습게 생각하는 이들이 꼭 알아야 될 사실이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자료들을 보면 행복한 사람들은 이런 '시시한' 즐거움을 여러 모양으로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다.
행복은 복권 같은 큰 사건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초콜릿 같은 소소한 즐거움의 가랑비에 젖는 것이다. 살면서 인생을 뒤집을 만한 드라마틱한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혹시 생각도 초기의 기쁨은 복잡한 장기적 후유증들에 의해 상쇄되어 사라진다.
돈 이외에도 여러 '인생자원'들이 있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논리는 모두 비슷하다. 그것을(가능하면 많이) 소유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가령 건강이나 외모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한국인의 관심사다.
약효가 증명되지도 않은 아프리카 코뿔소의 뿔을 극성스럽게 찾는 동양인들 때문에 이 동물은 현재 멸종 위기에 있다. 성형외과에는 인생역전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넘쳐난다. 행복한 사람은 이런 인생자원들을 많이 가진 사람일까? 건강하고 예쁜사람? 이것이 사실이라면 운동선수들과 연예인들은 늘 행복해야 하지만, 그들도 울고 좌절하고 심지어 자살도 한다.
외모와 행복의 관계를 더 객관적으로 확인해보기 위해 몇 해전 연세대학교 학생들의 얼굴 사진을 찍어 다른 학생들에게 매력도 평가를 받았다. 최대한 객관적인 미모값을 얻기 위해 매력을 과장시킬 소지가 있는 여러 '오염 요소'들을 제거한 뒤 사진 촬영을 했다. 즉, 참가자들의 화장을 지우고, 액세서리도 빼고, 헤어스타일을 통제하기 위해 샤워캡을 쓰도록 했다. 이 민낯 사진들을 수십 명의 학생들이 한 장씩 보며 얼마나 예쁜지를 평가했다.
이런 절차를 통해 나뉜 외모 상위권과 하위권 사람들의 행복값을 비교해보면, 외모와 행복은 유의미한 관계를 보이지 않는다. 즉, 내가 다른 사람 눈에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느냐(객관적 미모)는 자신이 느끼는 행복감과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결과가 하나 나타났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정도(주관적 미모)는 행복과 관련이 있었다. 외모뿐 아니라 다른 삶의 조건(건강 돈 등)과 행복의 관계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나타난다. 객관적으로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보다 이미 가진 것을 얼마나 좋아하느냐가 행복과 더 깊은 관련이 있다.
중간 정리를 한번 해보자. 사람들은 인생의 좋은 것들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행복의 전제 조건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논문들이 내놓는 결론은 다르다. 결국 둘 중 하나다. '행복은 소유'라는 생각이 틀렸거나 연구들이 엉터리거나.
그러나 연구를 문제 삼기에는 자료의 양이 너무 방대하고 결론도 일관적이다. 지금까지 수백 편의 논문에서 수천 만 명의 행복을 분석한 결론을 의심하는 것보다는 삶의 조건이 곧 행복이라는 생각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이 생각은 몇 가지 맹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의 머리는 '불행하지 않은 것'과 '행복한 것'의 질적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생수 한 병은 갈증의 고통을 없애주지만, 갈증이 가신 사람에게 물은 더 이상 행복을 주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추구하는 돈이나 건강 같은 인생의 조건들은 사막에서의 물과 비슷하다. 일상의 불편과 고통을 줄이는 데는 효력이 있지만, 결핍에서 벗어난 인생을 더 유의미하게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래서 건강과 행복의 관계도 흐릿하다. "오늘은 나의 건강한 다리로 잘 걸어다녔고, 머리도 아프지 않았던 참 행복한 날이었지." 건강한 사람 중에 밤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잠드는 경우는 없다.
예를 들어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중립 상태를 '0'이라 하고, '-10'을 최고 불행한 상태, '+10'을 최고 행복한 상태라고 하자. 정서학자들의 중요한 발견 중 하나는 불행의 감소(예: -4에서 0)와ㅓ 행복의 증가(예:0에서 +4)에 기여하는 요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긍정·부정 정서의 독립성이라고 하며, 정신 병리에 몰두했던 심리학이 행복연구를 시작하게 된 이론적 배경이다. 이 말을 쉽게 푼다면, 불행의 감소와 행복의 증가는 서로 다른 별개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행복을 따뜻한 샤워에 비유한다면, 우리의 정서 시스템은 찬물과 더운물을 조절하는 꼭지가 따로 달려 있는 샤워기와 같다 불행의 요인들을 줄이는 것은 마치 찬물 꼭지를 잠그는 것과 비슷하다. 이것으로 샤워물이 덜 차가워질 수는 있지만 더 따뜻해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많은 삶의 조건들은 이 샤워기의 찬물 꼭지와 비슷하다. 물을 덜 차게, 즉 삶을 덜 불편하게 만드는 효과는 크지만, 물을 뜨겁게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다.
우리 생각이 가진 또 하나의 허점이 있다. 인생의 어떤 변화가 생기는 순간과 그 변화가 자리 잡은 뒤의 구체적인 경험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둘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는다. 꿈꾸던 대학에서 입학 통지서를 받는 것은 분명 기쁜일이다. 하지만 막상 대학생이 되어 낯선 환경에서 학업 스트레스를 받으며 외롭게 보내는 일상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개강 직후 나는 종종 연세대학교 신입생들에게 아직도 입학에서 기쁘냐고 묻는다. 대답도 없이 대부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이 책은 수험생들의 학업동기 유발에 도움이 되지 않음).
영어로 표현한다면,'becoming(~이 되는 것)'과 'being(~으로 사는 것)'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재벌집 며느리가 되는 것(becoming) 과 그 집안 며느리가 되어 하루하루를 사는 것(being)은 아주 다른 얘기다. 하지만 우리는 화려한 변신의 순간에만 주목하지, 이 삶을 구성하는 그 뒤의 많은 시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공하면 당연히 행복해지라는 기대를 하지만, 실상 큰 행복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은 살면서 깨닫게 된다. 그제야 당황한다. 축하 잔치의 짧은 여흥만을 생각했지, 잔치 뒤의 긴 시간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돈이나 출세 같은 인생의 변화를 통해 생기는 행복의 총량을 과대평가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행복의 '지속성' 측면을 빼놓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상가 라 루시프코가 400년 전에 지적한 대로 우리는 "상상하는 만큼 행복해지지도 불행지지도 않는다', 승리의 환희도 패배의 아픔도 놀라울 정도로 빨리 무뎌지지만, 우리의 머리는 이 강력한 적응의 힘을 감안하지 않고 미래를 그린다. 그래서 항상 '오버'를 한다. 이것을 가지면 영원히 행복하고, 저것을 놓치면 너무도 불행해질 것이라고.
한 연구에서는 연애 중인 대학생 커플들을 모아놓고 잔인한 질문을 했다. 현재 사귀는 애인과 헤어진다면 얼마나 불행해질지 예측해보라고 했다. 그들의 예측값은 7점 행복척도에서 3.9 정도였다. 참고로 이 연구가 진행됐던 대학 재학생의 평균 행복수치는 5.4 정도였다. 이들은 이별이 자신의 행복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 것으로 '예측'한 것이다.
과연 애인과 헤어지면 생각하는 것만큼 불행해질까? 확인을 위해 행복예측을 마친 커플들을 강제로 헤어지게 만든뒤 행복수치를 다시 측정해보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차선책은 실제로 최근 이별한 사람들을 모아 행복을 측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실제 경험값과 이별을 상상만 했던 사람들의 행복 예측값을 비교하는 것이다.
결과는 예측과 달랐다. 이별을 실제로 한 이들의 행복은 현재 연애 중인 이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별 후 세상이 끝날 것 같지만, 야속할 정도로 우리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게 미래를 과도하게 염려하고 또 기대하는 것이 우리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산다. 대다수 한국인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고등학생은 오직 대학을 가기 위해, 대학생은 직장을 얻기 위해, 중년은 노후 준비와 자식의 성공을 위해 산다. 많은 사람이 미래에 무엇이 되기 위해 전력 질주한다. 이렇게 'becoming'에 눈을 두고 살지만, 정작 행복이 담겨 있는 곳은'being'이다.
인생은 유한하다. 제한된 시간과 에너지를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가 결국 인생사다. 사람들은 상당 부분을 부와 성공같은 삶의 좋은 조건들을 갖추기 위해 쓴다. 이런 것을 소유해야 행복이 가능하리란 강한 믿음 때문에.
하지만 여기서 기대만큼의 행복결실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수십 년 연구의 결론이고, 이 현상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적응'이라는 녀석이 지목되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이 여전히 남아 있다. 적응이라는 범인은 잡았는데, 그의 정확한 범행 동기(?)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은 왜 그토록 빨리 소멸될까? 꿈꾸던 대학에 입학해도, 소울메이트라고 확신했던 그와 결혼을 해도, 왜 처음의 흥분과 떨림은 지속되지 못할까? 적응이라는 현상에 대한 기록은 많지만, 이에 대한 시원한 설명은 아직도 부족하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앞에서 언급했듯 나는 행복에 대한 생각을 거꾸로 해보았다. 이렇게 배가 하늘을 향하도록 행복을 뒤집어놓고 보면, 적응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일아나야만 하는 현상임을 알게 된다.
간단한 복습을 하자, 특히 챕터4의 내용을. 우리 뇌는 일종의 탐지기라는 비유를 했고, 이 탐지기의 목적은 우리가 생존에 필요한 자원들을 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새우강이 개를 서핑하게 만들 듯이 우리도 어떤 보상이 있어야 사냥과 짝짓기 같은 행위를 한다. 쾌감이 바로 우리 뇌가 고안한 보상이다. 개가 새우깡 맛에 빠져 어느새 서핑까지 하듯 우리도 쾌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존에 필요한 자원들을 손에 쥐는 것이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은, 이런 생존 행위는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오늘 아무리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어도, 살기 위해서는 내일 또 사냥을 해야 한다.
사냥에 대한 의욕이 다시 생기기 위한 필요조건이 있다. 오늘 고기를 씹으며 느낀 쾌감이 곧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쾌감 수준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이런 '초기화' 과정이 있어야만 그 쾌감을 유발시킨 그 무엇(고기)을 다시 찾는다.
창을 들고 동굴 밖으로 다시 사냥을 나서는 이유는 사실 잃어버린 쾌감을 다시 잡아오기 위함이다. 이 무한 반복의 생존 사이클이 지속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 중 하나가 쾌감의 소멸이다. 소멸되지 않으면 동굴에 마냥 누워 있을 것이고, 계속 누워 있다보면 결국 영원히 잠들게 된다.
동전탐지기 비유로 돌아간다면, 쾌감이 소멸되지 않는 것은 심각한 기계 결함이다. 탐지기의 '삐' 소리는 동전으로 유도하기 위해 방출하는 신호다. 이 신호 덕분에 동전을 찾았다고 하자. 또 새로운 동전을 찾기 위해 신호는 꺼져야 한다. 그래서 '삐' 소리 같은 우리의 쾌감전구도 단기적인 목적을 달성하면 일단 꺼지는 것이다. 다음을 위해서.
적응이란 간단히 말하면, 어떤 일을 통해 느끼는 즐거움이 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상이다. 행복이라는 좁은 관점에서 보면 야속한 일이다. 수년 동안 몸과 약간의 영혼까지 팔아서 얻은 승진이 주는 즐거움도 불과 며칠이다. 그래서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는 표현이 오래 전부터 학계에서 쓰여왔다. 적응 때문에, 그 무엇을 얻어도 행복은 결국 쳇바퀴를 도는 것처럼 제자리걸음을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정서의 본질적 관심사는 행복이 아닌 생존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자원을 계속해서 더 많이 비축하고 확장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래서 승진의 즐거움은 며칠 뒤 없어져야만 한다. 그래야 과장을 단 사람이 부장이 되기위해 노력하고, 동메달을 딴 선수가 금메달을 위해 땀을 흘린다.
쾌락은 생존을 위해 설계된 경험이고, 그것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본래 값으로 되돌아가는 초기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이 적응이라는 현상이 일어나는 생물학적 이유다. 그리고 수십 년의 연구에서 좋은 조건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자익적으로 훨씬 행복하다는 증거를 찾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 아무리 대단한 조건을 갖게 되어도, 여기에 딸려왔던 행복감은 생존을 위해 곧 초기화돼버리기 대문이다. 나는 이것이 행복 연구에서 아직까지도 품고 있는 질문에 대한 간명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행복은 '한 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쾌락은 곧 소멸되기 때문에, 한 번의 커다란 기쁨보다 작은 기쁨을 여러 번 느끼는 것이 절대적이다.
유학 시절, 지도 교수가 쓴 논문을 읽은 적이있다. 제목은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나는 이것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은 문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큰 기쁨이 아니라 여러 번의 기쁨이 중요하다.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은 성취하는 순간 기쁨이 있어도, 그 후 소소한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결국 행복은 아이스크림과 비슷하다는 과학적 결론이 나온다. 아이스크림은 입을 잠시 즐겁게 하지만 반드시 녹는다. 내 손 안의 아이스크림만큼은 녹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 행복해지기 위해 인생의 거창한 것들을 좇는 이유다.
하지만 행복 공화국에는 냉장고라는 것이 없다. 남는 옵션은 하나다. 모든 것은 녹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주 여러 번 아이스크림을 맛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 아이스크림은 어떤 맛일까? 명품가방 맛? 고시 합격의 맛? 다음 챕터로 넘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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