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살아 있는 것은 움직인다'

오키Oki 2014. 8. 14. 18:30

2014년 8월 13일

봄날에 '찻잎' 따서 행복을 우리며 살다가

여름휴가를 낸 딸들과 전남 강진 다산초당에서...  

 

 

 

 

 

 

 

 

 

 

 

 

 

- 쇼펜하우어 인생론 에세이『사랑은 없다』에서 -

 

 

나는 젊은 시절에 아버지의 회사에서 견습사원으로 일하면서도 성격이 안 맞아서 일을 등한히 하고 늘 책을 감춰두고 읽거나 사색과 공상에 빠졌다. 그리고 유명한 천문학자의 강연을 몰래 들은 후로는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는 절망에 빠졌다. 그런 생각은 내게 큰 고통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나는 큰 충격에 빠져 오래 동안 비통한 시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거의 우울증에 가까운 증세까지 보였다.

하지만 그 시기에 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애인의 여신 시빌라가 타르키나우스의 사람들을 다룬 것처럼 새로운 운명이 나를 이끌고 있다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헛된 시간을 청산하고 바이마르에 사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는 내 심정을 하소연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삶의 목적을 잃고 헛된 세월을 보내고 있으며 젊음도 활기를 잃었다고 편지에 하소연 했다.

그때 어머니의 친구인 유명한 페르노프가 내 편지를 읽고 답장을 보내왔다. 그 편지는 내가 지금까지 산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 그리고 늦깎이로 학문을 시작한 유명한 학자들을 예로 들어주면서 고전어부터 공부를 시작하라고 충고해주었다.

나는 그 편지를 받고 너무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 그 편지는 깊는 회환과 갈등에 사로잡혀 있던 나에게 새로운 결심을 굳히게 만든 편지였다. 나는 곧 사업가를 포기하고 바이마르로 떠났다. 그때가 1807년, 내 나이 18세가 되던 해였다.

 

1819년

베를린 대학에서

쇼펜하우어

 

 

 

고뇌는 인간의 벗

 

불행이라는 장애물이 나타나야

             인간은 비로소 살맛이 난다

사람은 고뇌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고뇌 때문에 허덕이며 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사람이 고뇌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긴 사람들 중에는 몇 가지 특이한 불행을 예외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이 세상을 불행으로 가득차 있다.

강물은 장애물이 없는 한 조용히 흘러간다. 그와 똑같이 인간이나 동물들의 세상도 자신의 의지를 거스르는 장애물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살아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도 세월을 흘러보낼 수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유 의지를 방해하는 불행이라는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그때서야 인간은 자기의 의지를 가로막는 것들과 괴로움을 주는 것들을 뚜렷이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건강한 사람이 건강이라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고 살다가 병든 후에야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이치와 같다.

 

 

 

적극적으로 사는 것은

       만족과 불만이 정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인간에게 해롭고 악한 것을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기쁘고 만족스러운 것보다는 해롭고 악한 것이다. 더 절실하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 삶이 적극성을 띠게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소극적으로 산다는 것과 적극적으로 산다는 것은 만족과 불만이 결정해줄 뿐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살라고 충고하는 말은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들의 즐거움이란 늘 기대에 못 미치며 고통은 실재보다 훨씬 더 괴롭게 느껴지는 법이다.

 

 

 

인생이란 휴전 없는

            끝없는 전쟁이다

모든 불행과 괴로움에 관해 위안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더 비참한 사라믈 보면 된다. 건강한 살마이 비참하다고 느낄 때는 병원의 중환자실을 찾아가보면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위치에 있는가를 깨닫고 가장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때 인간에게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 소백정이 소를 잡기 위해서 들판에서 한가하게 노니는 소 떼들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라. 우리 인간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행을 앞둔 소와 똑같은 신세가 아니겠는가.

오늘은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는 언제 질병과 재난과 전쟁의 재앙이나 슬픔과 고통이 닥칠지 모르는 위기에 방치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평화나 행복은 우연히 차지하게 된 잠시 동안의 휴식에 불과하다. 이제 곧 고통과의 투쟁과 맞서야 하낟. 그리고 그 고통을 벗어날 때까지는 끝없는 함정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지속적인 도전이 필요하다.

인생이란 휴전 없는 고통과의 끝없는 전쟁이 게속되며 행복이나 만족을 느끼는 시간은 그기 순식간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늘 고통과 맞설 무기를 든 채 끝내는 죽어간다는 결론에 이른다.

 

 

 

시간의 그림자는

         누구에게나 똑같다

인간은 이렇게 한없이 시간에 쫓기며 숨돌릴 사이도 없이 산다. 시간은 마치 교도소의 간수처럼 몽둥이를 들고 우리의 등뒤에 서 있다. 시간은 바빠서 쩔쩔 매는 사람이나 시간이 남아 돌아서 지겨운 사람에게나 똑같은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하고 샆은 일이 없다면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

인간의 육체는 압력이 없어지면 파열된다. 그와 똑같이 인간의 정신도 고뇌라는 압력이 없어지면 파괴된다. 배가 항해하려면 압력을 가하는 물체가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게도 육체나 정신에 괴뇌라는 압력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노동과 가난과 정신적 가책이나 고뇌 같은 가압 장치들이 함께 따라다녀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벗어버리고 싶은 것들은 사실상 운명처럼 짊어져야 살 수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원하는 것마다 만족하고 소원마다 성취되어 땀흘려야 할 일도 없다면 도대체 뭘 하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저 밥만 먹고 하늘만 보면서 그 오랜 세월을 뭘 하면서 산단 말인가. 시간도 원 없이 많고 돈도 원 없이 많고, 살고 싶은 큰집을 골라서 살고, 사랑하는 사람은 눈 한번 윙크하면 애인이 될 수가 있고, 회사의 사장도 원하기만 하면 될 수가 있고, 여행은 마음대로 할 수가 있고, 그래서 더 이상 갖고 싶고,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이 없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은 권태로 죽음의 파멸을 스스로 초래하거나 아니면 전쟁과 재난 등 더 큰 고뇌를 스스로 만들 것이다. 이제 우리들에게는 한 가지 결론이 나왔다. 인간에게는 반드시 개인적, 사회적인 괴뇌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 고뇌를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여 즐기자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삶과 죽음을

                선고받은 죄수이다

우리들의 유년 시절을 생각해보면 극장 생각이 난다. 어린이는 자기 앞에 전개될 인생이라는 연극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연극이 재미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다. 하지만 연극이 재미있을지 없을지, 웃게 될지 울게 될지, 무서워하게 될지는 예측이 전혀 불가능하다.

어린이 잎에 전개될 운명 역시 그와 같다. 그 인생이 행복할 것인지 불행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며 예측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아이는 이미 태어나면서 죽는 날까지 이 세상에서 살도록 선고받은 죄수이며 그 선고받은 내용을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우리들의 생애라는 것이 끝내는 허망하기 짝이 없다는 점을 자각한다는 점이다. 그런 자각은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점차 확실해진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토록 탐닉했던 사랑과 우정과 성공과 명예와 권력이 허망하지 않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참으로 모든 것은 허망하구나.'

 

노인들 치고 그런 말을 안 하는 사람이 없다. 노인뿐만 아니라 젊은이들도 이미 허망과 절망은 알고 있다. 우리가 그처럼 찬란한 금빛 미래와 희망을 갖고 살면서도 삶에 대해 끝내는 절망하고 무엇엔가 심하게 속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공연 기간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삶의 공연 기간을 길게 늘려보자. 만일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2백 년이나 3백 년쯤 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은 마치 똑같은 연극을 두 버 세 번 보는 관객처럼, 자기 아들과 손자와 그 다음 세대들의 삶을 싫증나게 바라보는 미친 구경꾼이라는 생각이 들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 인생이라는 것이 결국은 입장료를 내고 딱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연극처럼 속아도 한 번 속는 것으로 족하고, 신기하고 놀라고 기쁘고 슬퍼도 한 번으로 족한 것, 후회도 한 번으로 족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생은 딱 한 번만 살아야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줄 뿐이다.

 

 

 

잘 살기는 바리지도 않아

          그저 아프지 않기만 바라는 거야

우리는 생애의 초반이나 전반부에는 누가나 그렇듯이 행복에 대한 큰 갈망과 희망과 포부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생애의 후반부에 접어들면 다소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가 그처럼 갈망하던 사랑이나 행복이나 야망이 한낱 망상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의 후반부에서도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는 여전히 생의 전반부에 살고 있거나 아니면 바보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강렬한 쾌락보다는 다만 고통이 없기를 바랄 뿐이며, 우리가 흔히 주위에서 보아온 재난이나 불행을 피할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잘 살기는 바라지도 않아, 아프지 않고 살 수만 있으면 좋겠어.'

당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면 당신은 이미 생의 후반부에 살고 있는 셈이다. 나 역시 젊은 시절에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아, 뭔가 좋은 수가 있나 보다' 하고 반가워했지만 나이가 들고, 인생을 겪고 난 후에 문 두르리는 소리를 들으면 '혹시 불길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하고 중얼거리고 했다.

 

 

 

공원 벤치의 거지 노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늙은이가 되면서 나는 점차 일에 의욕을 잃었고, 정열도 욕구도 줄어들었으며, 전에는 그처럼 탐나던 것들도 더 이상 나를 유혹하지 않았다. 게다가 감각도 둔해지고 건망증이 심해졌으며 상상력도 사라지고 환상은 퇴색하고 강열하게 느껴졌던 인상도 지취를 감추게 되었다.

해는 왜 그리 빨리 지는지, 누가 시계의 태엽을 빨리 돌아가도록 감아놓은 것 같이 세월이 빨랐다. 모든 일들은 그것을 내가 꼭 해야 할 이유가 없었고, 무의미해 보였다. 한 마디로 나는 과거 속에 퇴락해 버린 늙은 거지가 되어 혼자 걷거나 벤치에 드러 누워 있었다.

이제 가슴에 남은 것은 깊은 절망과 외로움과 회한뿐이다. 앞으로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죽음밖에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내가 그 동안 그토록 회의하고 믿지 않았던 죽음의 그림자가 여지없이 다가오고 있다.

그게 바로 나만의 운명인가? 당신의 운명은 아닌가? 정말 이것이 인생이라면 삶은 내게 재앙일 뿐이다. 나는 누가 다시 내게 삶을 준다고 해도 사양할 것이다.

 

 

 

내가 태어난 것은 고뇌의

         노예가 되기 위해서였다

우리들 육체의 생리적인 현상은 물리학적으로는 유예된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우리들의 정신 활동은 밤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권태를 물리치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육체나 정신이나 죽음에게 승리를 안겨줄 뿐이다. 삶의 주인은 결국 죽음이다. 따라서 삶은 죽음이 우리를 삼켜버리기 전에 갖고 노는 장난감에 불과한 순간이다.

우리는 늘 삶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의지와 욕구를 불어넣고 투지를 불태우지만 그것은 마치 아이들이 비누 방울을 갖고 노는 것과 같다. 비누 방울이 끝내는 터질 줄 뻔히 알면서도 숨을 불어넣어 크게 만들어 오래 가도록 애쓰는 것처럼.

여기서 나는 철학자 볼테르가 한 말을 인용하겠다.

 

"행복은 꿈에 지나지 않고 고통만이 늘 내 곁에 붙어 있다. 나는 이 사실을 80평생을 경험해서 알고 있으므로지금은 거의 체념한 상태이다. 지금 나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린다. '파리가 태어난 것은 거미에게 잡혀 먹히기 위해서인 것처럼 내가 태어난 것은 고뇌의 노예가 되기 위해서였다.'"

 

 

 

슬픔의 눈물을 흘러본 사람이

           기쁨의 눈물도 흘릴 수 있다

인간은 고통을 느끼지만, 고통이 없다는 것은 느끼지 못한다. 또 걱정은 하지만 걱정이 없다는 것은 못 느낀다. 두려움은 느끼지만 안전은 못 느끼며, 갈증이나 욕망이나 희망은 느끼지만 그것을 손에 쥐게 되면 금새 흥미를 잃는다.

심한 갈증으로 허겁지겁 물을 마신 후에 남은 물은 버리는 것처럼 욕망도 충족되면 손에서 놓는다. 인생에서 중요한 세 가지 선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강과 젊음과 자유조차도 그것을 누리고 있는 동안에는 전혀 느낄 수 없다.

아프지 않은데 병원에 가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젊음은 너무 당연한 얘기고, 자유로울 때는 자유 그 자체가 없다. 그러나 경범죄로 파출소 철창에 들어가는 순간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즉시 느끼게 된다.

인간은 행복할 때는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불행해져야 그때가 행복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내게 현재의 행복이란 없고, 행복은 과거의 기억으로만 존재한다는 얘기다.

향락과 쾌락에 대한 실감도 그것이 강할수록 감퇴되며 습관이 되면 없는 것과 똑같아진다. 그러다가 쾌락이 습관조차 끝나면 괴로움만 남게 된다. 권태는 시간을 느리게 만들고, 쾌락은 시간 관념조차 없애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가 있다.

물이 나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극단의 갈증이 필요한 것처럼 고통스러운 병고는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고, 늙었다는 것은 젊음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극단의 구속은 자유의 소중함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그토록 싫어하고 피해왔던 불행들이란 행복을 느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필수 조건이라는 것이다. 죽음 직전에 살아나야만 삶의 기쁨을 가장 크게 맛볼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불행과 고통을 어찌 마다할 수가 있겠는가.

 

 

 

세상이라는 무대에는

       어떤 배우가 나오는가

낙천주의자들은 세상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나는 시인들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얼마나 눈부신 햇살이 우리를 비추고 있는가. 저 멀리 산과 계곡과 강과 숲이며 꽃과 나무와 짐승들은 하느님이 만들어 놓으셨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인의 말대로라면 이 세상은 마치 마법사의 초롱불에 비친 무대 같이 보인다. 그렇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은 얼마나 조화와 균형 속에 이루어져 있는가.

별들은 충돌하지 않고 운행하고 있고, 바다와 육지는 섞이지 않고 분명한 경계를 지키고 있으며, 지상의 자연과 사물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며, 열과 얼음으로 파괴되지 않고, 제때 꽃이 피고 결실을 맺고 있다. 이 지구는 우주와 함께 영원히 붕괴되지 않을 것이라고 낙천주의자들은 말하고 있다.

적어도 성실한 배우라면 낙천가들이 말하는 바로 그 무대 위에 서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은 동물이지만

            짐승은 아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매우 복잡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주 단순하다. 그것은 육체적으로만 볼 때 쾌적하면 행복한 것이고 고통스러우면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추위와 더위를 잘 피하고 있고, 성적인 만족을 누리면 행복한 것이고, 배고프고 춥고 욕구불만에 차 있으면 불행하다는 뜻이다. 그런 쪽으로만 보면 인간은 짐승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단지 짐승과 다른 점은 신경 계통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고, 쾌락이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하고 짐승에 비해 성욕이 훨씬 강하다는 것뿐, 건강과 의식주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인간의 성욕은 다른 짐승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 선택은 짐승과는 다른 복잡하고 극렬한 심리적 절차를 거친다.

또한 인간은 짐승과 달리 과거와 미래가 기억력과 상상력에 매달려 감정의 동요가 클 뿐만 아니라 불안이나 공포라든가 희망이나 고통이 실제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짐승들에게는 과거의 회상이나 앞날에 대한 상상력이 없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는 우리가 부러울 정도로 침착할 수 있다.

인간은 미칠 듯한 환희에 빠지거나 극도의 절망에 빠져 자살까지 감행하지만 짐승에게는 그런 식의 극단적인 감정은 없다. 더구나 짐승에게는 권태가 없고 죽음이라는 의식도 없다.

짐승들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피하려고 할 뿐,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인간은 짐승에게 없는 죽음에 대한 인식 때문에 더 고통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 의미에서 식물은 크게 만족한 삶을 살고 있고, 짐승은 인간보다 훨씬 단순한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고, 인간 중에는 지적 수준이 낮을수록 삶에 대한 만족도가 크다.

짐승이 인간에 비해 고통이 적고 기쁨이 많은 이유는 근심 걱정에서 오는 고통을 모르며, 희망을 갖고 있지 않으며, 즐거운 미래를 상상하지 않으며, 축복의 환상에도 사로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존재의 무대에서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 인간보다 짐승의 삶이 훨씬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더 행복하기 위해서 짐승의 삶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큰 그늘은 작은 그늘을 덮는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행복을 얼마나 누리는가를 측정해보려면 기쁨보다 괴로움이 얼마나 많은가를 따져봐야 한다. 괴로움의 내용이 적은 것일수록 그가 누리는 행복은 크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아주 사호한 일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그가 지금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뜻이다. 큰 불행이 닥치면 작은 근심 따위는 거들떠볼 경황도 없다. 큰 그늘은 작은 그늘을 덮어버린다.

 

 

 

돈으로는 행복의 집을

              잘 지을 수가 없다

큰돈을 벌어서 그 터전 위에 행복의 집을 지으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은 없다. 돈이 없을 때는 돈만 있으면 만사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돈을 토대로 지은 집처럼 쉽게 무너지는 건축물도 없다. 그것이 다른 건축물과 다른 점이다.

젊어서 너무 큰 야망을 설계하는 것은 불행을 요소요소에 매복시키는 일과 다름없다. 야망이 크고 설계가 거창할수록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자신이 설계하는 큰 목표를 다 이루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은 실패하고 실현이 불가능한 경우가 더 많다.

비록 오랜 세월에 걸쳐서 노력하고 천신만고 끝에 계획이 성공했다고 해도 모든 것이 성취될 때에는 그 성취가 이미 쓸모가 없어질 경우가 많고, 또 그때는 모든 열정과 기력이 소모되어서 결국은 남이 그 모든 것을 차지해버릴 수도 있다.

젊음을 바쳐서 재산을 모든 사람들이 그 돈을 한 번도 써보지도 못하고 자식에게 유산으로 남기는 것이 좋은 예다. 그는 자식의 노예로 평생을 산 셈이다.

특히 작가나 예술가들 중에서 노년기에 예술 세계를 확립한 사람들은 그 영광을 누릴 시간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시대적 풍조에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한 세대가 지나고 새로운 세대가 되면 자신이 이룬 창작의 결실들은 모두 쓸모가 없어지고 어느덧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이 자신을 앞질러 가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과 현실을 토대로 하는 인간의 피나는 노력은 시대와 운명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가버리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시인 호라시우스는 이렇게 노래했다.

 

어찌하여 끊임없는 계획을 세워

연약한 마음의 짐을 만드는 것이냐.

 

젊음의 입구에서 바라보면 인생은 매우 길게 보이지만 노년의 출구에서 바라보면 인생처럼 짧고 허망한 것도 없다. 이것이 우리가 삶에서 겪는 심한 착각 가운데 하나이다. 이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배들의 결론을 예의 주시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명한 사람들은 이미 젊은 나이에 노년기의 지혜를 예견하고 운명의 가르침을 따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허망한 삶을 다 보낸 후에야 선각자의 말을 깨닫고 가슴을 친다. 우리는 쾌락 대신 지혜를, 행복 대신 깨달음을 추구해야 한다.

 

 

 

살아 있는 것은 움직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언 중에 '살아 있는 것은 움직인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육체적인 생명은 끝없이 움직이는 데서 그 명맥이 이어진다.

인간의 정신적인 생명도 끝없는 사유를 요구하고 있다. 동작이 정지되고 생각이 멈추면 인간은 죽는다. 사람이 아무 일이 없을 때 무심코 손가락 마디를 눌러 소리를 내거나 기지개를 켜는 등 동작을 하는 것은 정지 상태에서 오는 권태를 이겨내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육체적 · 정신적으로 움직이는 행위는 삶의 조건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지속적인 동작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려는 본능이 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하루종일 벽돌을 아무 뜻도 없이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옮겨놓거나 땅을 팠다가 메웠다 하라고 하면 그것은 일종의 고문이다. 그것은 그 행위로 성취 욕구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동작, 즉 행위를 통해서 무엇인가 이루려는 성취 욕구가 중요하다.

그 이유는 성취가 우리들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직장 생활이 괴롭고 힘들어도 일이 성취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우리는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직접적인 행복을 주는 것은 자기 손으로 무엇인가 완성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집을 짓거나 하는 것처럼 성취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일거리가 없거나 직장이 없는 사람에게 가장 큰 정신적 손실은 돈이 결핍보다 성취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데 있다.

 

 

 

기뻐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아야 한다

무슨 일에나 지나치게 기뻐해서도 지나치게 슬퍼해서도 안 된다. 세상은 끝없이 변하기 때문에 기쁨이 슬픔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뜻밖에 기쁨으로 변할 수 있다. 우리 머리로 인간사의 길흉 화복을 판단할 수는 없다. 바로 그 점을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쓴맛 단맛을 다 보아서 웬만한 일로는 게집애처럼 질질 짜지 않는다."

 

불행을 당하고도 침묵하고 냉정해질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당한 일이 지금까지 당한 재앙 가운데 가장 사소한 것으로 여길 줄 아는 사람이다. 이미 생존이라는 것이 덧없고 허망하다는 것을 터득하고 있는 사람이 불행을 당했다고 울거나 행운에 날뛸리가 있겠는가.

우리는 동화에 나오는 영악한 여우처럼 교묘한 지혜를 짜내어 모든 불행에서 초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수련이 필요하다. 이런 수련은 우리가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사는 데 필수 조건이다. 특히 불행한 일은 마음속에 담아두어서는 안 된다. 그런 것들은 길을 걷다가 발끝에 질리는 돌처럼 힘껏 차버려야 한다.

 

 

 

행복은 멀리서 보는

         숲처럼 아름다운 것

인간의 행복은 아름다운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풍경과 같다. 이 풍경을 멀리서 보면 놀라울 만큼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가거나 그 안에 들어가면 조금 전 놀라운 아름다움은 어느덧 사라지고 도대체 아까의 그 아름다움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나무 사이에 멍청히 서 있게 된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의 명예나 재산이나 행복을 부러워하는 것도 그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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