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자성自省

오키Oki 2014. 8. 3. 19:33

여름에 태어난 딱새가 홀로서기를 한다.

 

 

 

- 팡차오후이 지음나를 지켜낸다는 것에서 -

"세상은 나를 흔들 수 없다. 절대로!"

 

 

팡차오후이

1965년 출생. 칭화 대학교 인문대학 역사학과 및 사상문화연구소 교수이며 중국인민대학교 공자연구원 겸직 연구원이다. 하버드 대학교 및 서울대학교, 대만의 포광 대학교에서 중국 사상사를 연구 및 강의했다. 젊은 시절, 서양 철학을 공부했으나 박사 졸업 후 점차 중국 사상사로 연구 주제를 전화하고, 유가 사상을 정신적인 귀착지로 삼았다. 개인의 경험에 기초하여 철학과 역사학 학습의 성과를 결합하고, 사회학, 인류학, 심리학 등 다른 분야의 이론적 성과들을 흡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가 칭화 대학교 인문대학에서 강의한 <유가경전입문>은 지난 10년간 칭화 대학교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동시에 가장 주목받는 과목으로 꼽힌다. 송·명 시기 이학을 바탕으로 유교, 도교, 불교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대인이 안은 마음의 문제를 점검한 <유가경전입문>은 수신修身의 참뜻과 당위성을 올바르게 해설한 최고의 강의로 평가받는다.

대표작으로 《문명의 파괴와 탄생: 유학과 중국 현대성 연구》《중국의 학문과 서양의 학문:현대 중국 학술사 다시 읽기》가 있다.

 

 

 

 

잃어버린 재물은 찾으나,

잃어버린 마음은 찾을 줄 모른다. 

 

 

 

사람이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곧 찾을 줄 아나,
잃어버린 마음은 찾을 줄을 모른다.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뿐이다.

-《맹자》<고자>

 

이것이 바로 《맹자》의 명언 '구방심求放心'입니다. '방심放心'이란 '잃어버린 마음'입니다. 맹자가 꼬집고자 한 것은, 만약 집에서 닭이나 개를 잃어버렸다면 지체 없이 그것을 찾아 나설 것인데, 닭이나 개보다 1만 배 더 귀중한 마음을 잃어버렸는데도 우리는 이를 찾아 나설 줄 모른다는 것이지요. 만약 지갑이나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면 여러분은 아마도 뜨거운 가마솥 안의 개미처럼 허둥대며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맹자》는 지갑이나 휴대폰보다 1만 배 더 귀중한 물건을 잃어버렸는데도 몇 년이 됐는지도 모르고 여태껏 찾으려고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맹자는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학문'이란 오늘날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목 같은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공부를 말합니다. 이런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 즉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마음을 찾으려면 그것을 잘 지키고 소중히 여겨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게 해야 합니다. 학문을 하는 배경을 결코 학교에 한정하지 않고, 일과 일상생활에서 매 순간 체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본문 중에서

 

 

차마 드러내지 못한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법

프로이트(1856~1939)는 20세기 위대한 사상가 중의 한 사람으로 현대 심리학의 시조입니다. 그가 젊어서 의식과 잠재의식을 구분하는 학설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심리 활동에는 충분하게 관찰할 수 있는 영역이 있는 반면 관찰할 수 없거나 관찰하기 아주 어려운 지침이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전자는 의식 범주에 속하고 후자는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 범주에 속합니다. 평상시 우리들이 이성적이지 않다고 여기는 욕망이나 사회 규범에 반하는 충동은 항상 그 싹을 드러낼 때마다 곧바로 억압되어 점차 우리의 의식 속에서 소멸하고 잠식된다는 이론입니다.

프로이트는 잠재의식에 남아 있는 것들은 쉽게 관찰하기는 어렵지만 사람들의 성격에는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가장 강력한 욕구를 반영하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람들의 행위 방식을 강하게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개인의 잠재의식 안에 있는 욕망을 풀어놓으면 놓을수록 마음 깊은 곳의 억압은 점차 감소하게 되고 성격이 더욱 건강해진다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한 개인의 잠재의식에 자리 잡은 욕망이 한 차례 좌절과 억압을 받게 되면 그의 성격은 쉽게 왜곡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극단적인 상황이 바로 인격 장애이고, 정신병입니다. 잠재의식에 자리 잡은 욕망은 자주 비정상적인 것, 즉 이성적이지 않거나 사회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겨져 억압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성격에는 어느 정도 건강하지 않는 요소가 있게 마련입니다.

프로이트가 정신병을 치료한 방법 중 하나는 환자가 꿈속에서 지난날 겪었던 일들을 말하게 한 후 환자의 마음을 억압하는 근원을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환자의 속마음을 억압하던 것들이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나는 프로이트가 제시한 것처럼,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오랫동안 감히 직면하지 못하여 풀어지지 않은 응어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억압된 응어리들이 성격의 정상적인 발전을 해치고, 심신의 건강이 파괴되어도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속에서 과거 감히 대면하지 못한 것들을 끄집어내어 의식적으로 그것을 직시하려고 노력하고, 나아가 이성적인 심리 상태로 그것을 대할 줄 알게 된다면, 훌륭한 자성의 방식을 경험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심리치료가 하나의 전문 분야가 되어 유행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프로이트 등이 개창한 현대 심리학의 기초 위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명대 유학자 여곤呂坤의《신음어》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눈이 흐려져서 눈앞이 어른거릴 때는 무엇을 보아도 잘 못 보게 되고,

귀에 병이 있어 귀울림이 있을 때는 무엇을 듣더라도 잘 못 듣게 된다.

마음속에 어떤 사물에 대한 선입견이 있을 때는 무엇을 처리하든지

잘 못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까닭에 마음이라는 것을 비워두는 것이 중요하다.

 

 

여곤(1536~1618)의 자는 숙간叔簡이고, 호는 심오心吾 또는 신오新吾이며 스스로를 포독거사抱獨居士로 불렀습니다. 명대 만력萬曆 연간 진사進士가 되어 관직은 좌시랑左侍郞에 이르렀습니다.《신음어》는 여곤이 수신하는 과정에서 채득한 내용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은 그의 30년간의 피와 땀의 결정체로 '아파 신음할 때마다 항상 고통 받는 바를 스스로 한스럽게 여겨 기록했다.'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이에 근거하면 이 사람은 자나 깨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고, 항상 자신을 살피고 반성하며 매일 느낀 소회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자아를 분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구절은, 우리 인간사에서 그릇된 판단이 계속되는 까닭은 마음속에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위 목중유화目中有花, 이중유성耳中有聲, 심중유물心中有物은 다 '어두워'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에 속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비어 있지 않고 선입견으로 가득 차게 되면 자연히 자신의 문제를 정시할 수 없고, 나아가 마음속 병의 근원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학설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정신병자에게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 쌓인 응어리를 해소하도록 유도하여 마음속의 망견妄見, 망문妄聞, 망의妄意를 제거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동시에 프로이트는 정상인과 정신병자 사이에는 본질적인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무의식 세계의 시달림을 받고 심리적 억압을 느껴, 이로 인하여 모두 망견, 망문, 망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우리 각자는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인식할 줄 알아야 하고 점진적으로 자신의 망견, 망문, 망의를 없애 나가면서 심리적 건강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유가의 '자성' 사상은 현실 생활 속에서 심리학이 맡은 역할과 매우 유사합니다. 오늘날《대학》,《중용》,《논어》,《맹자》등의 유가 경험과《채근담》,《신음어》,《소창유기》,《증국반가서》 등을 반복해서 읽다 보면 중국 고대의 수신 사상이 자신의 심리를 어떻게 분석하고 조절하는가를 이애하기 위한 학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고대 유학자들이 현대의 심리학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가의 자성 학설은 개개인들이 스스로의 심리치료사가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증자나 맹자의 '자성'과 관련된 구절을 읽고,《채근담》의 '야심인정독좌관심夜深人靜獨坐觀心'과 같은 구절을 읽을 때에는 자아를 인식하고 자아를 조정하며 자아를 분석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옛 선비들의 정신세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 스스로 자신의 심리치료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자신의 심리치료사가 되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가장 심하게 아픔을 느끼는 것은 무엇인지, 지난 수년 동안 감히 직시하지 못한 기억은 무엇이고, 어떤 사건이 가장 참기 힘든 일이었는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혹은 관점을 바꾸어 무엇이 지금 가장 강력하게 자신을 지배하는 소망이고, 혹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바람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마음을 다해 생각하고 있는지, 나아가 이성적 태도로 이 문제를 대하고 근원을 찾아내어 정식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자기 성찰은 진정으로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한결 가뿐해질 것입니다.

 

 

 

아직 이를 때 마음은 더 맑다

프로이트 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의 잠재의식은 비록 숨겨져 드러나지 않지만, 바다 밑의 빙산처럼 거대하고 깊이를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현실에 반영되어 드러난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배후에 있는 것들은 등한시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항상 문제가 심각해져야 뭔가 잘못되고있음을 겨우 깨닫게 됩니다. 현실 생활에서 흐트러진 언행이 나타난다는 것은 정신세계의 심각한 문제를 반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정신세계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서도 사안의 엄중함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진지하게 문제를 직시하지 않기도 합니다. 또 사안의 엄중함을 확실히 인식했다고 하더라도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두거나 혹은 오랫동안 자성하는 습관이 몸에 배지 않아 결국 이러한 자각이 일순간 사라지고 더는 자성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투현질능妬賢嫉能'이란 현명한 사람을 시기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뜻의 말입니다. 사람들은 다 투현질능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서 현실 생활에서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누군가를 시기할 때에도 우리는 자신이 그러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사람이 뭐가 그리 잘났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오랜만에 옛 동료들을 만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자리에서 뜻밖에도 동료 중 하나가 큰 집을 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집이 여러분이 사는 집보다 훨씬 크다고 가정합시다. 아마도 여러분은 마음이 편치 않고 평정을 잃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질시인데도 알아채지 못할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집을 산 이상 무슨 질투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어디가 그보다 못한가? 무엇 때문에 그는 나보다 더 좋은 집에 살까?' 여러분은 아마 그가 이룬 성취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돈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한 결과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가 그렇게 엉망인 사람일까요? 설령 그런 분석에 근거가 있다고 해도 여러분은 아직 자신의 성격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 심리 상태 전반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역사상 수많은 간신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들은 어릴 적부터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보면서 이들 간신들이 어떻게 투현질능하여 좋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쳤는지를 이야기하며 멸시했을 것입니다. 사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우리와 이들 간신 사이에 정말로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만약 우리에게 투현질능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설령 차이가 좀 있다고 해도 본질적인 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간신배처럼 더러운 이름을 날리지 않는 이유는 아마 우리에게 간신배와 같은 능력이 없기 때문이고, 그래서 간신이 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몇몇 사람들이 다소 돈을 벌거나 혹은 사업상 조금 성공했다고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우쭐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고 해도, 그 성취는 역사상의 간신들에 비하면 매우 초라한 수준일 것입니다.

다른 에를 들어 봅시다. 여러분은 '문과즉희聞過則喜' 즉 자신의 결점을 지적해 주면 오히려 기뻐하는 미덕에 대해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문과즉희 해야만 끊임없이 자신을 개선할 수 있다고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가요? '문과' 즉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는 일은 아주 난감한 일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비판을 받으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의심하기 마련입니다. 아주 간단한 예로 부모의 잔소리를 들을 때 어떤 때는 부모가 생각이 너무 많아서라고 생각하고,그 잔소리를 대부분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또한 동료나 상사의 꾸지람을 들으면 기분이 심하게 상할 수도 있습니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고, 누군가가 배후에서 흉계를 꾸민다고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상사가 한쪽 말만 듣고 소인배에 의해 오도되었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혹은 상사의 인품에 문제가 있어 사적으로 보복한다는 등의 의심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평소에 자성하는 습관을 기르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의 비평을 들어도 근본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될 것인데, 어떻게 '문과즉희'를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사례들로 보면 진정으로 자성할 줄 아는 일은 결쾨 쉽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인들이 '오경 잠자리에서 성체를 살핀다'(《채근담》)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성체性體'란 사람의 본성, 즉 심성 본래의 모습을 말합니다. '참감參勘'이란 일종의 진지한 자아반성입니다. 왜 오경(하룻밤을 다섯 단계로 나누었을 때 다섯째 부분, 새벽 3시~5시) 잠자리에서 이런 일을 해야 할까요? 선인들은 이때가 '아직 기가 움직이지 않고 정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날이 밝으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마음이 조급할 텐데 언제 마음을 바로하고 자성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자성한다고 해도 기분의 영향을 받아 분별력이 떨어지고 판단착오를 일으키기 쉽습니다. 자성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고, 그래서 고인들은 매일 세 번 반성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에는 자아의식과 심리건강, 인격성장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가 많아서 우리가 자성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현대 심리학에 따르면 자아의식은 개성의 중요 내용이고, 그것은 사람의 성격과 개성의 특징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욕구, 흥미, 기호, 이상, 신념 등 개개인의 성향에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자아의식은 사람을 성공과 실패로 이끄는 방향계이고 나치반입니다. 적극적 자아의식은 정확하게 자신을 인식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 좌절과 실패에 부딪혔을 때에 적시에 자신을 조율하고 상처를 어루만져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합니다. 반면 소극적 자아의식은 실패와 좌절에 부딪혔을 때 낙담하고 기가 죽어 자포자기 하게 합니다. 선인들이 자성을 이야기한 것은 실제로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능력을 배양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 것이었고, 자아의식과 자아조절, 자기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로써 현대 심리학이 제기한 이치가 유가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함을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 걸음 물러서야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인도와 태국에 가면 어디서나 조그만 기둥에 가는 쇠사슬로 1,000킬로그램이 넘는 육중한 코끼리를 붙들어 맨 광경을 볼 수 있다. 코끼리 사육사들은 이들 코끼리를 어렸을 때부터 가는 쇠사슬로 묶어 어린 코끼리가 아무리 힘을 써도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이들 코끼리는 이 쇠사슬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족쇄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후 1,00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로 성장했을 때도 여전히 쇠사슬에 묶여 있게 된 것이다. 사실 이들 코끼리가 조금만 힘을 쓰면 바로 쇠사슬을 끊어 버릴 수 있을 것이지만 이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서 주인들은 코끼리가 쇠사슬을 벗어날 것이라는 걱정을 하지 않고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습관의 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일단 어떤 사고에 익숙해지면 특별한 자극을 받지 않는 이상 보통은 그것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수신 방면에서도 이런 문제가 똑같이 존재합니다. 스스로에게 비교적 높은 기대치를 부여하여 부지런히 생각하고 자성하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어려서부터 양성된 사유 방식에 따라 생활하고 사람들을 대하게 됩니다. 설령 자신의 성격 혹은 사유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꼭 그것을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이를 고칠 생각이 있다고 해도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거나 일이 많다는 이유 등으로 큰 변화를 꾀하지 못하곤 합니다. 특히 성년이 된 이후 생활의 압박이 커지면 성격 수양에 시간을 내기가 더욱 어렵게 됩니다. 이렇게 자성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형성된 생각의 틀과 사유 방식에 한평생 머물게 되어 큰 변화를 꾀할 수 없는 상활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려서부터 형성된 사유 습관에 어떤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고 해도 평생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성격의 한계에 대해 스스로 돌파할 벙법을 찾지 못하고 때때로 스스로 원망하며 탄식하거나, 자신의 운명을 탓할 뿐입니다. 성격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의외로 적습니다.《채근담》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비둘기는 방울소리를 싫어하여 높이 날지만

날개를 접으면 방울소리는 절로 멈춤을 알지 못한다.

사람은 그림자를 싫어해 빨리 달리지만

그늘진 곳에 있으면 그림자가 절로 사라짐을 알지 못한다.

 

 

매우 아름답고 이해하기 쉬운 이 구절은 사유의 급전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 난센스 퀴즈를 풀 때처럼 '자성' 방면에서도 똑같은 사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자아인식이충분하지 않거나 혹은 성격상 결함으로 야기된 문제는 생각을 조금만 바꿔도 극복할 수 있는 대상임을 일깨워 줍니다. 스스로 사유의 고정관념을 바꿀 용기가 없기 때문에 평생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스스로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바로 사유의 급전환입니다. 사유의 급전환을 거쳐야 비로소 더 높은 곳에 설 수 있고 더 멀리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행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재와 미래를 만나다  (0) 2014.08.19
'살아 있는 것은 움직인다'  (0) 2014.08.14
단순함을 위하여!  (0) 2014.07.29
심플하게 2  (0) 2014.07.23
심플하게  (0) 2014.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