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현재와 미래를 만나다

오키Oki 2014. 8. 19. 19:21

2014년 8월 13일

전남 보성녹차박물관앞 동상은 현재의 내모습이래용 ㅋㅋㅋ

 

 

 

2014년 8월 13일

전남 보성에서 20년 후 녹차부부의 모습을 보았어용 ㅋㅋㅋ

 

 

 

- 쇼펜하우어 인생론 에세이『사랑은 없다』에서 -

 

 

인류의 세 가지 유전병은 명예욕과 허영심과 자부심이다. 그 중 허영심과 자부심은 차이가 있다. 자부심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허영심은 타인이 자신에 대해 그런 신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자부심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지만 허영심은 타인이 자신을 존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자부심은 말이 적지만 허영심은 말이 많다.

자부심은 자신이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이지만 허영심은 남이 자기를 존중케 하기 위해 많은 설득과 위장이 필요하고 때로는 위압도 필요하게 된다.

참된 자부심은 자신의 우수한 가치에 대한 확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만 허영심은 남으로 하여금 자신을 과대 평가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는 몰라도 결국은 밑바닥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거짓말을 하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짐승들은 대체로 진실하고 정직하다. 그들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느끼는 대로 감정을 나타낸다. 그것은 동물들이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 동물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본질도 그처럼 거짓없는 단순함을 좋아하도록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옷을 입으면서 매우 추한 동물로 변질되었다.

옷으로 몸을 감추면서 이미 자연적인 본래의 모습을 위장한 것이다. 더구나 육식, 음주, 끽연, 방탕 등으로 인간은 자연속에서의 삶을 문명으로 오염시켜 왔다.

 

 

 

행복은 내 마음속에 둥지를 틀고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제자인 메트로도루스는 그의 저서에서 '인간의 행복은 대부분 자기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행복은 누구나 자기 자신 속에 깃들어 있다. 그래서 행복은 자기가 만들어내는 것이지 외적 사물이나 환경과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마다 느낌과 경험이 모두 달라서 똑같은 환경과 조건에서도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천차만별인데다가 각자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 세상은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 주거 공간이지만 개개인의 삶은 전혀 다르다. 이것은 똑같은 땅에서도 사람들마다 전혀 딴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공허하고 평범한 삶이 어떤 사람에게는 풍부하고 다채롭고 의미 깊은 세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 사실은 괴테나 바이런 등 유명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면 안다.

그들의 시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뛰어난 관찰력과 상상력이 깃들어 있다. 시인들은 꽃 하나를 보고 그것을 느끼는 감각이나 표현하는 능력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시인들처럼 똑같은 곳에서 아름답고 놀라운 소재를 찾아낼 수가 없다.

시인이 꽃에서 찾아낸 아름다움이 그들의 행복이라면 또 다른 어떤 불행한 사람이 똑같은 곳을 보고 비극의 그림자를 찾아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꽃에서 웃음을 찾아내고, 무관심한 사람은 그 꽃을 그저 무미건조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꽃이라는 외적 조건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마음의 눈으로 꽃을 그려내고 있다는 뜻이며 행복이나 불행 역시 외적 조건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행복은 정신 능력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돈 많은 부자나 유명한 학자도 자기가 맡은 역할 때문에 행복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그들에게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행복과 불행이 존재하고 있다.

물론 고뇌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지만 그들의 고뇌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인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아무리 화려하고 즐거운 일도 바보의 흐리멍텅한 눈에는 초라하고 슬프게 비칠 수가 있다.

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비참한 감옥 생활 중에도 재미있는 돈키호테를 쓸 수가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가 명석한 두뇌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개성을 버릴 수가 없다. 가령 개나 고양이에게 아무리 잘해주려고 해도 그들에게는 동물이라는 본능과 인식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잘해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

또 아무리 잘해주어도 개나 고양이가 만족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바로 그 같은 이치로 인간도 개인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한계 최대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사람들마다 아주 높은 단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도 서로 다르다. 그것은 정신 능력의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정신 능력이 작고 좁은 사람은 저급한 행복과 쾌락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으며, 그 크기를 스스로 넓힐 수 있는 힘도 없다. 그러나 아주 높은 단계의 행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정신 능력도 큰 법이다.

 

 

 

 

유산을 남겨주기 위해 자신의 귀중한 생애를 다 쓰다니

많은 사람들이 정신의 수양보다 재물을 얻는데 더 많은 힘을 기울인다. 우리들 이웃을 보면 저마다 돈벌이에 바빠서 개미처럼 동으로 뛰고 서로 뛰고 급하게 서두르고 악착같다. 돈 아니면 거들떠보지 않는 상태로 자신을 방치해버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돈을 벌면 대부분 쌓아두거나 모든 돈을 통해서 더 큰돈을 벌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번 돈조차도 향락에 기꺼이 써버리고 만다.

다행히 어떤 사람이 생애를 무사히 마칠 때까지 별탈없이 돈을 엄청나게 벌었다 치자. 그 동안 그가 땀흘려 애쓴 보람으로 남은 것은 단지 황금 덩어리일 뿐, 이제 귀중한 세월은 다 써버리고 말았다. 남은 그 황금 덩어리를 남에게 물려줄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런 생애가 혹시 남 보기에는 호화롭고 멋지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는 사실상 인생을 잃기 위해 돈을 벌었으며 남에게 빼앗기기 위해 돈을 번 것이나 마찬가지다.

돈을 벌어서 써보지도 못하고 유산으로 남겨주기 위해 귀중한 인생을 낭비했다면 그는 참으로 허망한 일을 했으며 미친 생애를 살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평생을 의식주의 호화호식을 위해 악전고투를 하며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더구나 대체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순식간에 재산을 탕진하거나 방탕해져서 자신의 생애를 망치는 일들을 주위에서 흔히 보아왔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인생도 돈을 위해 망치고 유산을 물려준 자녀까지 망치는 일을 자행해온 셈이 된다. 명예는 보배롭고 명성은 탐나는 것이지만 그것은 소수의 비범한 자에게만 허용되는 왕관이다. 그리고 그것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값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명예의 월계관보다 재물을 더 선택하고 있다. 과연 페트로니우스의 격언처럼 '돈이 많으면 남들이 떠받들 것이다' 라는 말이 사실이며 그것이 과연 행복을 가져다줄 것인지는 의문이다.

 

 

 

 

명예는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다

명예심에 관한 한 고양이의 비유가 가장 적절하다. 고양이는 등을 어루만져 주면 기분이 좋아서 목울대를 볼록거린다. 사람도 고양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사람도 칭찬을 받으면 그것이 비록 사탕발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흐뭇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이런 속성은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이다.

고양이는 자기를 때리면 금세 눈에 적의를 품는다. 사람도 똑같다. 조금이라도 자기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거나, 멸시를 받으면 불쾌해지고 적의를 품는다.

이렇게 인간의 명예욕은 한상 제3자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남으로부터 칭찬이나 찬사를 받거나 모욕과 경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개인의 역량에 달려있다.

남으로부터 찬사나 아부 받기를 좋아하거나 남의 비난에 대해 지나치게 반응이 심한 사람들, 예컨대 남이 자기를 판단해주는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결국 이웃의 노예에 불과하다.

찬사를 즐기는 자의 영혼을 지배하는 것은 비천하고 설익은 것이다. 우리가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진정한 자아와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을 비교하여 확실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자신에 대한 재3자의 판단이란 아주 불확실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제3자가 돌대가리인 경우가 있고, 어떤 일에 깊은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자신에 대한 큰 오해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소견이 좁고 생각이 빈약한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자신을 악평할 경우, 어떻게 우리는 그 사람의 악평을 가치 있는 견해나 충고로 받아들이 수 있겠는가.

한때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빌기우니스는 자기 딸이 출산을 맡았던 관리 크라티우스에게 능욕을 당하자 평민의 명예와 자유를 존중한다는 뜻으로 자기 딸을 군중들 앞에서 처형했다.

그가 사랑하는 딸을 죽였던 것은 평민의 명예와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행위였다. 즉 남들에게 자신이 평민을 사랑하는 훌륭한 집정관으로 보여지기를 원하는 명예심 때문에 딸을 죽였지만 자기 자신은 불행했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자신의 불행을 감수하면서까지 명예를 지키려는 인간의 욕망은 그처럼 강하다. 그렇다면 그 욕망은 자신의 행복에 공헌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불행을 초래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내가 비릭니우스의 예를 들은 것은 그런 최고의지위에서 권력의 명예와 영광을 누리는 사람들도 자신의 행복이 남의 머리와 손에 달여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남이 몰라주면 소용없다

사람들이 한평생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땀 흘려 노력하는 원인은 무엇보다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데 있다. 남에게 인정받지 않으려면 왜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산단 말인가. 권력은 명예욕이다. 권력을 잡는 것은 남들 앞에서 떵떵거리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최고의 통치자가 되려는 것은 내가 국가를 발전시키고 국민들을 잘 살게 하려는 것이다. 남이 아닌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싶은 것이다.

국민들에게 떵떵거리고 싶지 않다면 왜 권력을 잡으려고 그러게 애를 써야 하는가. 지위를 탐내는 것도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서 선망의 대사잉 되고 남들을 부리고 싶어서이다.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으면 지위를 탐낼 이유도 없다.

지나치게 많은 재산을 원하는 것이나, 먹고살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 갖추어진 후에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원인은 모두가 남들에게 부러움과 존경을 받고 싶은 데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보같은 인간의 뿌리 깊은 본능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대가 그처럼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남들이 몰라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런 시에서 읽을 수 있듯이 자신에 대한 남의 평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관습이 굳어지면 굳어질수록 인간의 행복에는 해롭고 불행해진다. 그래서 지금도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남들이 알아주는 것을 초월해서 사는 사람은 훨씬 행복하다.

'남이 뭐라고 말할까?' 이런 생각을 늘 하는 사람은 이미 남의 시선의 노예일 뿐이다. 노예는 늘 주인의 눈치를 살피고 주인의 명령대로 해야 한다. 자기가 싫어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유가 없어서 불행하다.

따라서 위에서 예를 들었던 로마의 집정관 '빌기니우스의 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남의 평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관습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명예욕은 자신의 불행을 자초하게 한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죽은 후의 명예를 위해 목숨마저 버리는 사람도 있다. 대중들은 그런 사람에게 갈채를 보내고 찬사를 아끼지 않지만 그 자신은 그릇된 욕망의 환상과 관습의 노예가 되어 죽은 비참한 인간일 뿐이다.

 

 

 

 

명예욕을 부추기면 남을 이용할 수 있다

명예욕에 대한 사람들의 강한 욕구와 관심 때문에 남의 명예욕을 북돋아 주는 것은 남을 이용할 수 있는 좋은 미끼가 될 수가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정말 잘 하십니다', '정말 뛰어난 재능을 가지셨습니다' 라고 남의 비위를 맞춰준다.

명예욕을 부추겨 남을 이용하거나 지배할 수가 있기 때문에 아첨이 이루어지고 이 아첨은 좋은 수단과 방법으로 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명예욕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찾는 데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명예욕이라는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의 장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남의 생각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대부분 자기 생각보다 남의 생각에 의존하고 살았으며 나의 참된 자아보다는 남의 자아 속에 깃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더욱 소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올바른 이치를 좇기보다 남의 편견이나 무지나 독선 혹은 오해를 통해 내려진 자신에 대한 평가를 더 가치 있고 권위있는 것으로 여김으로써 간접적인 가치와 직접적인 가치의 혼란을 초래했다.

이것이 다름 아닌 허영이 저지르는 행위, 즉 수전노의 탐욕과 다를 바 없이 수단을 위해 목적을 저버리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우리 인간의 모든 고뇌의 대부분은 바로 이 같은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면 불필요한 불안과 걱정에서 떠나 현재의 물질적 · 정신적 가치의 10분의 1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 것이다.

예를 들면 자기 능력에 버거운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남의 눈 때문이며, 지나치게 큰 집에서 사는 것도 남들이 자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려고 힘들게 사는 것이다.

자기 수입에 비해 너무 비싼 옷을 입거나 고급 차를 타면서 매달 할부금에 시달리는 것도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자기 능력에 과분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모두 처분한다면 훨씬 만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들의 불행은 대부분 남을 의식하는 데서 온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들도 더러운 명예욕에 약하다

우리들의 행복은 주로 안정된 기분과 흐뭇한 만족감을 뜻한다. 지금의 기분이나 상태가 좀더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상태가 행복이다.

그러나 남의 눈을 의식하는 순간 안정된 기분은 흐트러지고 불만감이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행복을 유지하기 우해서는 타인 본위의 허영심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나 자신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법이다.

만일 우리기 이 허영심을 불이면 현재의 불행은 50분의 1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이 허영심을 없애는 것은 우리들의 육체를 괴롭히는 가시를 뽑아버리는 셈이지만 그것은 선천적인 고질병이어서 버리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로마제국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어떠한 현자라도 더러운 명예욕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고 말했다.

이처럼 인간의 허영심이란 불행을 자극하는 허망하고 그릇되고 불합리한 것으로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허영심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김으로써 얼마나 큰 불행을 겪고 있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만일 인간이 바로 남의 눈을 의식하는 타인 본위의 유전적인 고질병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면 자신의 안정과 평화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서 매사에 태연 자약할 수가 있으며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수도자들이 은둔 생활에서 큰 행복을 느끼는 이유는 남의 눈치를 안 보고 타인 본위의 속세 생활에서 자기 본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 생활에서 겪는 불행이나 재앙의 대부분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관념적인 생각, 즉 인간의 불치병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것을 극복하면 우리는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허영심을 없애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행복이라는 대가는 큰 것이다.

 

 

 

자존심과 명예를 지키려면 너무 큰 희생이 필요하다

자존심이나 명예의 모습은 여러 가지지만 그 뿌리는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존심이나 명예를 지기키 위해 엄청난 희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존심 하나 버리면 얼마나 행복해지는가를 사람들은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이것은 나이와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젊은 시절보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의 자존심과 명예욕은 더욱 커진다.

그 이유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체력의 한계를 느끼면서 애욕의 욕구는 줄어드는 대신 허영과 오만은 탐욕과 결부되어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우주가 당장 멸망해도 나만 살면 되는 거야

인간의 이기심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사람들은 예의나 겸손을 통해 자신의 이기심을 감추려고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가면의 껍질을 뚫고 나와서 남들과 어울릴 때만 작동을 시작한다.

사람은 남을 만나면 그가 우선 먼저 나에게 어떤 이득을 줄 수 있을까를 저울질하기 사작된다. 이 사람은 내게 도움이 될까? 내가 이 사람을 좀 써먹어 볼 기회가 있을까? 선한 사람이 되겠다고 애써 노력하지 않는 한 누구나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 아니라면 거짓말이다.

만일 그가 내게 이득이 안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는 금세 무시해버린다. 반면에 조금이라도 이득이 된다는 느낌이 들면 쉽게 바라지 않는다. 이기심은 끝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고통이나 고민을 피하려는 절대적인 욕구를 본능적으로 갖고 있고, 안락과 평화를 누리고 즐거움과 기쁨, 향락을 탐닉하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이기심과 탐내는 대상 사이에 장애물이 나타나면 곧 불쾌하게 여기고 혐오감과 증오와 분노를 일으켜 그것을 제거하려고 한다. 만일 제지할 수 없다면 최소한 그것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싶어한다.

'내게 다 줘! 넌 아무 것도 없어도 돼. 내가 알아서 해줄게.' 이것이 내 마음이다. 사람의 이기심은 너무 커서 그것은 우주도 다 채울 수 없다.

누구에게나 '우주의 멸망과 자신의 멸망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 고 물어보아라.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모든 일을 사소한 일에서 큰 일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과 결부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전쟁이 일어나 국가에 존망의 위기가 닥쳐도 '그럼 나는 어떻게 되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 하고 제일 먼저 자신의 이해 타산을 떠올린다.

이기심에서는 나보다 앞서는 우선 순위는 없다. 남의 입장은 그 다음 문제다. 나만 그런가? 아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축이며 남은 안중에도 없다. 나는 인간의 이기심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을 죽여서 기름을 짜서 자기 구두를 닦으라고 해도 사양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너무 지나친 비유일까?

 

 

 

 

인간의 이기심은 애완용 개 발바리를 연상시킨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존재이다. 어느 누구의 머리 속에 들어가보아도 자신과 관련된 것 이외에는 거의 관심도 없다. 만일 다른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부분을 잘 따져보면 대부분 그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사람들은 귀에 들리는 말을 모두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며, 우연히 귀에 걸리는 한 마디 말이라도 자기와 관련이 되어 있으면 날카롭게 주의를 집중시킨다. 사람들은 남의 말이 진실하거나 교묘하거나 훌륭하거나 위트와 유멍 넘치거나 전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이롭지 못한 말이나 허영심을 건드리는 말이 들리면 반응이 빠르다. 그런 인간의 모습은 애완용 발바리 개를 연상시킨다. 그 개는 너무 작아서 자칫하면 사람들이 그의 앞발이나 꼬리를 밟는 경우가 많다. 그때는 무섭게 짖어댄다.

세상 사람들도 바로 그와 같이 자기 본위의 뿌리가 상당히 깊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재능이나 지식을 과시하거나 잘난 체하면 사람들은 대뜸 자신을 무사힌다고 해서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아도 속으로 적대감을 갖는다.

그런 인간의 속성을 잘 모르는 사람은 '아니, 도대체 왜 그래?' 하고 의아해 할 뿐이다. 상대방이 자기에게 적대감을 드러냈을 때는 그 이유가 반드시 있다. 그런데 점차 본인만 모르고 있는 셈이다.

결국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가 이성보다 강하기 때문에 의지의 지배에서 벗어닐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자기 본위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점성술사이다. 점성술사는 광대한 우주 공간에 떠있는 지구보다 수천 수만 배나 되는 천체들의 운행을 한낱 보잘 것 없는 개인의 운명과 연관시키고 있다.

그래서 혜성이 나타나면 전쟁이 일어난다거나 당신의 별자리의 이동으로 행운이 온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말을 떠든다. 이런 점성술을 사람들이 믿으려고 하는 것은 별이 자기와 관련되었다고 생각하려는 이기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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