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행복 '사람'

오키Oki 2014. 9. 18. 18:54


여봉~~~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며 함께 음식을 먹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이래요" 
딸들이 집에 다니러 오면 아빠는 저절로 딸바보가 된다.

 

 

 

아빠의 달콤한 낮잠을 같이하는 큰딸

 

 

 

 

 

 

 

- 서은국행복의 기원』에서 -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생존과 번식, 행복은 진화의 산물이다

 

 

서은국

현재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세대학교 졸업 후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행복 분야 권위자인 에드 디너 교수의 지도를 받고,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위 후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고, 4년 뒤 이 대학에서 종신 교수직을 받았다.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인용되는 행복 심리학자 중 한 명으로, 특히 행복과 문화 차가 전문 분야다. 그의 논문들은 OECD 행복측정 보고서에 참고자료로 사용되고 있으며, 최근 '세계 100인의 행복학자'에 선정되어『세상의 모든 행복』에 기고했다. 모교인 연세대학교로 돌아와 느끼는 큰 보람은 바로 강의다. '행복의 과학'이라는 저자의 강의는 "이 수업을 들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수강 대기자가 700명을 넘는다. 최근에는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 삼성경제연구소의 SERI CEO 강연 등을 통해 행복에 대한 '차가운' 사실들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한국인의 행복

앞서 행복과 가장 관련 있는 특성을 외향성이라고 했다. 축구로 치자면 외향성은 개인기나 순발력 같은 선수 개인의 특성이다. 행복지수는 외향적적인 사람들이 높고, 축구는 순발력 좋은 선수들이 잘한다. 그러나 우승컵을 들기 위해서는 좋은 선수가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팀의 특성, 이를테면 감독의 지휘력이나 팀 분위기 같은 요인도 한몫한다.

축구의 팀 특성이 행복에 있어서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이 행복을 달성하기에 유리한 조건들을 갖춘 문화도 있고, 그렇지 못한 문화도 있다.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행복한 기질을 가지고 행복감이 높은 문화에서 태어나는 것이지만, 이것은 코가 더 오뚝하면 좋겠다는 여자의 바람 같은 것이다.

아무튼 개인의 행복 수준은 외향성 같은 성격 특성과 깊은 관련이 있지만, 그가 살고 있는 문화도 추가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특성과 행복의 관게를 살펴보고자 한다. 역시 사람이라는 단어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우선 문화라는 것을 잠깐 되짚어보자. 문화에 대한 여러 학문적 정의가 있지만, 핵심적인 개념은 '공유된 이해'다. 생각, 가치, 규범이나 행동 방식에 대한 문화 구성원 간의 암묵적 함의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고 자연스러운 것인가에 대한 공감대가 서로 구축된다.

예를 들어 남들과 식사하면서 맛있는 반찬을 혼자만 먹는 사람, 이런 기본적인 행위에 대한 평가는 문화를 막론하고 일관적이다. 비호감. 하지만 좀 더 복잡한 일들에 대한 해석이나 반응은 문화에 따라 상당히 다를 수 있다.

 

 

프랑스 축구선수 지단의 유명한 '박치기 사건'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2006년 월드컵 결승전,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경기 중 축구사에 남을 만한 기이한 장면이 벌어졌다. 연장 후반, 자기 골문으로 걸어가던 주장 지단이 갑자기 방향을 180도 바꾸더니 뒤에 오던 이탈리아 수비수 마테라치를 박치기 한 방으로 쓰러뜨린 것이다. 지단은 퇴장당했고, 프랑스는 결국 이탈리아에 패했다.

왜 지단은 그 중요한 순간에 격투기 선수로 변했을까?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마테라치가 알제리 출신인 지단과 그의 여동생에 대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며 지단의 기분을 긁었다고 한다. 이 심리전에 한 국가대표팀 주장에서 순식간에 한 여동생의 오빠로 돌변한 것이다.

지단 때문에 경기에 졌다고 단정은 못하지만, 연장전에서의 그의 퇴장이 노장 프랑스팀에 치명적인 전력 손실을 준 것은 분명하다. 그것도 월드컵 결승전 경기에서, 여러분이 프랑스인이었다면 지단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정의의 사나이, 아니면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려 대의를 그르친 한심한 친구?

이 대목에서 문화 차이가 등장한다. 프랑스는 이 사건 후 지단을 영웅으로 대접했다. 그의 박치기 장면을 조각 작품으로 만들어 프랑스 지성의 상징 퐁피두 박물관 앞에 세워 놓았다. 월드컵이 끝난 뒤 축구 선수들과 함께한 만찬 자리에서도 시라크 대통령은 지단에게 "당신은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 그래서 프랑스가 당신을 사랑하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프랑스 축구 선수, 할 만하다. 아니, 무슨 일을 하며 살든 이런 사회가 행복해지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곳이다. 개인의 가치와 감정을 최대한 존중하고 수용하는 문화.

지단의 박치기 동상은 문화 차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소재다. 퐁피두 전시가 막을 내린 뒤, 2022년 월드컵 개최국으로 확정된 카타르에서 이 동상을 구입했다. 그리곤 월드컵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도심 공원에 설치했다. 그러나 이 동상은 카타르의 높으신 분들로부터 또다시 레드 카드를 받고 4주 만에 철거되었다. 공식적인 이유는 한 개인을 영웅시하는 서구의 상징물이 전통적인 이슬람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문화적 정서 차이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 개인을 높이 세우는 문화가 있는 반면, 그를 눕혀 트럭에 싣고 나가는 문화도 있다.

행복 연구에서 문화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대표적 국가가 한국과 일본이다. 높은 경제 수준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행복도는 낮기 때문이다. 경제 수준이 훨씬 떨어지는 여러 중남미 국가들(멕시코, 콜롬비아, 브라질)보다 한국과 일본의 행복감이 낮다. 경제 수준만으로는 국가의 행복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혹시 여기서 방글라데시를 연상하는 독자들도 있을 텐데, 방글라데시 국민이 가장 행복하다는 보도는 학계의 결론과 다르다).

한국, 일본과 함께 다른 아시아의 신흥 경제국들도 행복 부진 그룹에 포함된다. 세계에서 가장 놓은 소득 수준의 싱가포르는 작년 갤럽에서 조사한 150여 개국 비교 자료에서 가장 정서가 메마른 국가 중 하나로 나타났다. 긍정적 정서, 부정적 정서 모두 조사국 중 가장 낮게 나온다.

한국, 일본, 싱가포르, 이런 국가들이 가진 문화적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 문화적 특성은 왜 개인의 행복감과 충돌하는 것일까?

 

 

학자들이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널리 사용하는 개념 중 하나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다. 말 그대로 개인과 그가 속한 집단 간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보느냐가 핵심이다. 어떤 사회에서 살든 개인의 취향과 계획들이 그가 속한 집단(가족, 회사, 국가 등)의 뜻과 한 번씩은 충돌하기 마련이다. 가령 나는 A와 결혼하고 싶은데, 부모님의 선택은 B일 때, 주말에 그냥 찜질방에서 계란 까먹으며 쉬고 싶은데, 부장님에게 북한산 입구로 집결하라는 문자를 받을 때, 오마이 갓.

이처럼 개인과 집단의 뜻이 정면충돌할 대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문화의 핵심적인 차이다. 개인의 뜻대로 선택하고 표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문화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높은 것이다. 가령 미국이나 지단의 프랑스 같은 서구 유럽.

한편 집단이 개인에게 때로 과도한 요구를 하고, 이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은 철없고 이기적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문화는 집단주의저거 성향이 강한 것이다. 한국, 일본, 싱카포르 같은 아시아의 '행복 부진' 국가들이 대표적인 예다.

행복감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성은 개인주의다. 소득 수준이 높은 북미나 유럽 국가들의 행복감이 높은 이유도, 사실은 상당 부분 돈 때문이 아니라 유복한 국가에서 피어나는 개인주의적 문화 덕분이다. 그래서 개인주의적 성향을 통계적으로 제거하면, 국가 소득과 행복의 관계가 거의 소멸된다. 즉, 개인주의는 국가의 경제 수준과 행복을 이어주는 일종의 '접착제' 역할을 한다.

역으로 이 접착제(개인주의)가 부족한 사회는 경제적 발전을 이룩해도 거기에 상응하는 행복감이 뒤따라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한국과 일본이 그 예다.

그렇다면 개인주의 문화의 어떤 점이 개인의 행복 성취를 유리하게 만드는 것일까? 역으로 집단주의 문화의 부족한 점은 무엇일까? 우선, 심리적 자유감이다. 자유감이란 사실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다. 이런 삶을 보편적으로 지지해주는 문화가 있고, 이렇게 살기 위해 세상과 문을 닫고 기인이 돼야 하는 문화도 있다. 행복이라는 씨앗은 개인의 지유감이 높은 토양에서 쉽게 싹을 틔운다.

우리나라의 집단주의적 문화에는 어떤 특성이 있을까? 일장일단이 있을 것이다. 장점은 일단 공동의 표가 생기면 무서운 응집력과 추진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축구 응원을 위해 수만 명이 하나의 붉은 덩어리가 되고, 국가가 경제 위기를 맞으면 금반지 하나씩 십시일반으로 모아 힘을 보탠다. 한국의기적적인 경제 발전도 이 덕분이다. 위기와 어려움에 대처하기에 적합한 구조다.

하지만 만성적인 긴장과 피로가 수반된다. 시각적으로 표현하다면, 일상의 많은 것들이 옆으로 자유롭게 흩어져 있는 모양이 아니라 서열에 의해 위아래로 세워져 있는 식이다. 팀장과 부하 직원, 선배와 후배,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런 수직적인 문화에서는 구성원 각자에게 주어진 뚜렷한 역할이 있다. 자신의 칸 안에서 그 역할만 감당하면 된다. 가족으로서, 혹은 팀원으로서 주어진 역할 수행을 제대로 못하면 주변의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고, 이렇듯 타인중심적인 생각은 행복 성취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이야기는 잠시 뒤 자세히 다룰 것이다.

 

 

자, 이제 중요한 질문을 할 때가 왔다. 여태껏 사람이 행복의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단주의 문화는 사람에 묻혀 사는 문화다. 그런데 왜 한국이나 일본 같은 초집단주의적 문화의 행복감은 오히려 예상치보다 낮을까? 언뜻 보면 모순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면, 모순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중요하다;는 의미를 너무 단순하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이 무조건 좋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이 중요하다는 것은 그에 대한 반응이 민감하고 강렬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것은 더 좋고, 나쁜 것은 더 나쁜 방향으로, 엄마가 마트에서 사온 양말 색깔이 싫다고 거품을 물고 쓰러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복숭아를 먹고 쓰러지는 경우가 있다. 생존을 좌우하는 정도에서 안전한 음식 섭취는 양말 색깔에 비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 양말에 비해 스테이크가 주는 쾌감도 크지만, 썩은 고기가 주는 역겨움 또한 더 강렬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음식만큼 중요한 생존 자원이기에 이에 대한 감정적 반응 역시 강력하다. 그리고 음식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양날의 검과 같은 속성이 있다. 좋은 사람과 대화하고 놀고 손잡는 것만큼 순수한 즐거움을 주는 것도 없지만, 역으로 사람만큼 스트레스와 불쾌감을 주는 자극도 없다. 나를 배척시키고, 해를 가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 또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가장 절대적인 행복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행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타인은 나에게 단맛과 쓴맛을 모두 느끼게 하는 존재다. 행복의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일상에서 주로 어떤 맛으로 나타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문화가 가진 여러 가지 양념은 이 맛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앞에서 언급한 자유감과 타인 중심적 사고가 특히 관련이 있다. 이 특성과 행복과의 관계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우선 개인의 자유감, 개인주의 국가들이 높은 행복을 누리는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집단의 응집력과 통일성을 강조하는 문화에서 이 부분은 뒷전을 밀려나는 경우가 많다. 초등학교 때 소풍 전날 선생님께서 강조하시던 말씀이 나는 아직도 기억난다.

"내일 소풍 가서 즐겁게 놀도록. 단, 개인행동은 하지 말 것."

어린 마음에도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들으며 산다. 위기에 대처하기에는 좋은 전략이지만, 평소에는 뭉치면 피곤하고 흩어지면 자유로운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조직이 그 단단한 위계를 유지하고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모두 하나가 되어 규격화된 행동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다양한 취향, 가치와 감정들은 부수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결과적으로 자유감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조직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개인사를 뒤로 하고 회식에 참석해야 하며, 회식 자리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맞고 틀린지가 이미 정해져 있다. 술이 턱까지 차올라도 먼저 집에 가는 것은 틀린 것이고, 부장님이 8번째 앵콜곡을 부르겠다고 주책을 부려도 환호하는 것은 맞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회식 문화에 그치지 않는다. 매사에 무엇이 맞고 틀린지에 대한 정답이 정해져 있다. 수년 전 한 신문사에서 한국인의 삶을 함축하는 내용의 수필을 공모한 적이 있다. 최우수상을 받은 수필의 제목은 '시험'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평생 정답을 찾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하나로 수렴되는 생각을 하는 데 익숙해지고, 정답에서 벗어난 가치와 행동에 대해서는 불안감을 느낀다.

오죽하면 이적이라는 가수는 왼손잡이의 서러움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불렀을까. 엄살이 아니다. 실제로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회일수록 왼손잡이의 비율이 낮다. 부모들이 왼손잡이 아이들을 후천적 오른손잡이로 바꿔놓기 때문이다.

이런 획일적인 사고는 행복에 큰 타격을 준다. 마치 행복에도 정답이 있고, 이는 몇 개의 잣대로 압축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좋은 대학 간판, 대기업 명함, 높은 연봉, 이런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 인생은 왠지 '행복 시험'에서 낙제한 것 같은, 그래서 불행한 삶이라는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 문화의 이런 획일적인 사고는 개인의 자유감을 저하시키고, 더 나아가 행복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렇지만 문화적 분위기가 심리적 자유감을 무조건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결정적인 것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시선에 얼마나 신경을 쓰며 사느냐다.

물론 사회의 일원으로 살며 타인의 평가와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자세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나침판이 되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보다 그에 대한 타인의 반응이 더 중요해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삶을 경험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살게 된다.

올림픽 메달을 딴 한국 선수들이 기자회견을 마무리할 때 흔히 덧붙이는 말이 있다. "열심히 할 테니 지켜봐 주세요." 연예인들이 결혼 발표를 할 때도 비슷한 말을 한다. 예쁘게 잘살 테니 지켜봐달라고, 한국 사람이라면 이 전형적인 멘트에 담긴 정서를 전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뭔가 순서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운동을 하고 결혼생활을 하는 것은 남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나를 위해서 운동도 결혼도 하는 것이다.

"물론이지"라고 동의하면서도 우리는 늘 나를 지켜보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그래서 나의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든 보여주고 싶어 하고, 그들로부터 좋다는 승인을 받아야 속이 개운해진다. 파스타를 먹기 전에, 록키산맥의 장관 앞에서 우리가 꼭 치르는 의식이 있다. 바로 사진 찍기, 이렇게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보니 영혼의 내용물보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얼굴형과 콧대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나라는 존재에 미치는 타인의 존재감이 너무도 큰 것이다.

이렇듯 과도한 타인 의식은 집단주의 문화의 행복감을 낮춘다. 행복의 중요 요건 중 하나는 내 삶의 주인이 타인이 아닌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아의 많은 부분이 다른 사람으로 채워진 한국인들은 자칫 잘못하면 타인에게 삶의 주도권을 내어주게 된다. 세상을 나의 눈으로 보기보다 남의 눈을 통해 보려고 한다. 이때부터 행복의 걸림돌들을 여기저기서 만나게 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우선 타인의 평가를 의식하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대단한 스트레스다. 인간의 뇌는 철저히 사회적인 뇌라고 했다. 생존과 직결된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뇌의 최우선적 임무 중 하나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과 주의가 자동적으로 집중되고, 집중하는 만큼 피로와 불안도 쉽게 온다.

이런 불안감을 이용해서 만든 심리 자극이 있다 독일 트리어 대학 심리학자들이 개발해 '트리어Trier 처치법'이라 불리는 이 '불안조성 절차'는 매우 간단하다. 피험자에게 당신은 1분 뒤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게 될 것이고, 그들은 당신의 발표 능력을 평가할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은 피험자들은 갑자기 불안해지고, 심장 박동수도 급상승한다. 과도하게 남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일평생 이 무시무시한 트리어 처치를 받으며 사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또 다른 고전적인 심리학 연구에서는 대학원생들의 컴퓨터 화면에 지도교수의 사진이 잠깐 스쳐 지나도록 했다. 그뒤 자신의 연구 아이디어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지 스스로 평가하라고 했다. 교수의 사진을 본 대학원생들은 사진을 보지 않은 동료들보다 자기 아이디어를 더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누군가 위에서 자신을 평가한다는 시선이 느껴지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더 긴장하고 위축하게 된다. 이를 통찰한 알베르 카뮈는 이런 말을 남겼다.

"행복해지려먼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라 To be happy, we must of be too concerned of others."

둘째, 타인을 의식하는 것이 습관이 되다 보면 내가 아닌 타인의 시각을 통해 매사를 판단하고 평가하게 된다. 심지어 자신의 행복마저도.

우리 연구실에서 최근 진행한 문화비교 연구에서는 미국과 한국 대학생들에게 최근 즐거웠던 경험 하나(여행 등)를 써보고 그것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평가하도록 했다. 그 후 이 즐거운 경험에 대해 본인이 쓴 글을 다른 사람들이 읽고 어떤 반응을 했는지를 알려주었다.

한 조건에서는 참가자들이 언급한 일(여행)을 다른 사람들은 그다지 즐거운 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다른 조건에서는 남들도 마찬가지로 여행은 아주 즐거운 경험이라 생각한다고 말해주었다. 시간이 흐른 뒤, 참가자들에게 그 여행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다시 한 번 평가하도록 했다.

예상했던 문화 차가 나타났다. 미국 참가자들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 하든 여행에 대한 원래의 자기 느낌을 고수했다. "내가 즐거웠다는데, 무슨 상관."

반면 한국 참가자들은 흔들렸다. 자기 경험이 남들이 볼 때는 별게 아니라는 피드백을 받은 참가자들은 여행이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즐겁지 않다고 느꼈다. "나만 좋다고?" 왠지 뭔가 착각한 것 같아 뻘쭘해진다. 과도한 타인 의식에서 나오는 혼란이다.

 

 

행복은 나를 세상에 증명하는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잣대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필요도 없고, 누구와 우위를 매길 수도 없는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 행복이다. 내가 에스프레소가 좋은 이유를 남에게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그들의 허락이나 인정을 받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타인이 모든 판단 기준이 되면 내 행복마저도 왠지 남들로부터 인정받아야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행복의 본질이 뒤바뀌는 것이다. 스스로 경험하는 것에거 남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왜곡된다.

이 과정에서 행복의 또 하나의 적이 탄생한다. 과도한 물질주의적 가치, 저 사람 "행복할 만하다"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우선 남들이 볼 수 있는 구체적 증거들이 필요하다. 내용보다 외형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결혼식은 어떤 특급 호텔에서 했는지, 와인은 얼마짜리인지에 더 관심이 쏠린다. 그리고 이런 행복의 외형적이 증거물들을 전시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해진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물질적 풍요다."

이 질문에 "YES"라고 답한 응답자 비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이다. 하루 세끼조차 보장되지 않는 아프리카 사람들보다 한국인이 돈을 더 중시한다. 이것은 경제 상태가 아닌 어떤 문화적 가치가 개입되었다는 뜻이다. 남이 볼 수 있는 화려한 겉옷을 인생에 덧입혀야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과 관련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정도의 경제 수준이 되면,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물질주의적 태도 자체가 행복을 저해한다는 것이 많은 연구의 결론이다. 극단적으로 사랑과 돈, 당신 인생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매우 간단하지만, 이 질문은 행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가르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본인의 경제 수준과 상관없이. 사랑보다 돈을 중요하게 생각할수록 그의 행복도는 낮다. 반대로 사랑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는 사람일수록 행복하다. 혹시 돈이 없어서 불행하고, 또 가난하기 때문에 돈을 중시하는 것이 아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가능하지만, 이 현상의 본질적 설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이 아프리카보다 돈을 더 중시하는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과도한 물질주의와 행복 간의 마찰은 왜 일어날까? 그 이유가 중요하다. 호모사피엔스에게 다른 사람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생존 과정에서 타인의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즉, 타인은 나의 불충분함을 메워주는 절대적 존재였다.

하지만 약 3천 년 전 인류가 돈이라는 것을 만들어내면서부터 인간의 나약함을 보완해줄 수 있는 수단이 하나 더 생겨났다.  즉, 예전에는 생존 보호 장치가 사람뿐이었지만, 문명생활을 하면서부터 돈이 그 역할을 분담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먹을 것이 다 떨어졌을 때 사냥 잘하는 친구가 반드시 필요했지만, 지금은 돈을 가지고 마트에 가면 된다.

그래서인지 앞서 언급했던 돈에 대한 생각을 할수록 사람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다고 한다. 최고의 과학 전문지 <사이언스>에 2006년 실린 논문에 의하면 돈은 사람에게 '자기충만감'이라는 우쭐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돈이 있으면 "너희가 없어도 난 혼자 살 수 있어" 같은 느낌.

이 연구에서는 대학생들을 실험실로 부른 뒤, 약 10분 동안 컴퓨터가 놓인 책상 앞에 대기시켰다. 사실은 대기 시간동안 컴퓨터의 화면 보호기에서 날아다니는 물체가 이 실험의 관건이었다. '돈' 조건의 컴퓨터 화면에서는 말 그대로 돈사진들이 10분간 날아다녔다. 통제 조건의 참가자들에게는 물고기 같은 자연 물체를 보여주었다. 그 후 다른 사람과 도움을 주고받는 행위를 관찰했다.

두 가지 조건은 행동에 커다란 차이를 만들었다. 타인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통제 조건의 사람들은 148초의 시간을 할애한 반면, 돈을 본 사람들은 68초의 시간만을 썼다.

또 남에게 얼마나 도움을 청하는지도 관찰했다. 일부러 해답이 없는 어려운 과제를 풀도록 해서, 17분 동안 몇 퍼센트의 참가자들이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지 기록했다. 돈 조건의 사람들 중에서 30% 미만이, 통제 조건의 사람들은 60% 정도가 도움을 청했다. 즉, 거의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돈을 생각하기만 해도 다른 사람을 덜 도우려 하고, 남의 도움 또한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돈의 존재감이 커지는 만큼 사람의 존재감은 작아졌다.

과도한 물질주의는 행복에 치명적인 결과를 준다. 행복전구를 가장 확실하게 켜지도록 하는 것이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행복해지기 위해 돈에 집착할수록, 정작 행복의 원천이 되는 사람으로부터는 멀어지는 모순이 발생한다.

물론 지금 세상에서는 돈이 있으면 홀로 생존하는 것이 가능하다. 생존만이 목표라면, 사람 없이 돈만 가지고도 살 수 있는 일종의 '신세계'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원시적인 뇌는 아직 이 신세계에 적응이 덜 되었고, 그 안의 행복전구는 돈 자체에 관심이 없다. 그 전구가 켜지도록 하는 스위치는 여전히 사람인데, 돈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새 이 결정적인 스위치가 없는 방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왜 행복하지 못한 걸까? 돈 냄새를 따라 아주 깜깜한 방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과도한 타인 의식의 또 한 가지 문제점은 사람과의 관계를 즐겁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행복을 저해하는 원인이 된다. 사람이 행목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했지만, 여기서 중요한 전제 조건은 그 만남들이 나에게 즐거움과 편안함을 줄 때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행복에 필요한 한정된 자원(입시, 승진 등)을 놓고 다투는 경쟁자로 생각하다 보면, 타인에 대한 불신과 스트레스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 누구 떡이 더 큰지 항상 비교하게 되고, 방심하면 남에게 당할 수 있다는 경계심을 갖게 된다.

실제로 다른 국가와 비교해보면 한국은 타인에 대한 신뢰도 수준이 낮다. 도움이 필요할 때 의지할 만한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덴마크나 미국인들은 96~97%가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한국인은 78%에 그친다. 남들로부터 신뢰와 존중을 받는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미국이나 덴마크인들의 90%가 그렇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은 56%, 일본은 66%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결핍이 나타나는 부분은 더 이상 '경제적인 부'의 측면이 아니다. 행복과 직결된 '사회적인 부'다. 양적으로는 인간관계가 과할 정도로 차고 넘친다. 저녁마다 각종 모임, 회의, 약속이 있지만 즐거움을 나누기 위한 만남이 아니라 대부분 어떤 필요나 목적 때문에 만나는 자리다. 에너지를 얻기보다 빼앗기고 돌아오는 만남들이다.

하버드 대학의 제임스 파울러와 니콜라스 크리스타키스 교수 팀의 연구가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 북동부의 파밍햄이라는 작은 마을 주민들의 인간관계 형태와 그들의 행복 변화를 장기간 추적한 것이다. 연구자들의 예상대로 행복은 전염성이 높았다.

그러나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다. 친구가 무조건 많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몇 명의 '진짜 친구'가 있는지가 중요했다. 만남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자유감의 중요성이 또다시 등장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사람들보다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문화는 공기와 같다"는 말을 남겼다. 문화는 공기처럼 절대적이지만, 그 익숙함 때문에 눈에 잘 보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 한국인인 우리는한국 문화의 독특한 점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문화와 비교해보면, 우리 사회는 눈에 띄게 집단주의적이다. 장점도 있지만 개인의 행복 차원에서 보면 만만치않은 어려움을 줄 때도 있다.

자유감의 부족과 과도한 물질주의 등으로 나타나는 증상들의 공통 원인은 너무 예민한 타인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세상과 담을 쌓고 유아독존의 삶을 살자는 말이 아니다. 균형이 필요하다. 나는 누구를 위해 사는가? 우리의 무게추는 남들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을 때가 많고, 이 경우 장기적으로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행복감에도 좋지 않은 결과가 올 수 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한국 문화를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다. 10여 년 전 나는 한국과 미국을 놓고 어디서 살 것이냐를 고민했었다. 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시 서울 생활을 하기로 한 결정에 나는 크게 후회한 적이 없다. 하지만 행복할 수 있는 많은 조건을 가졌음에도, 왠지 한국인의 행복 날개는 접혀 있는 듯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우리는 부러워할 만한 경제 수준의 나라에,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친구들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쾌적한 나라에 산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면 좋겠다. 각자 자기 인생의 '갑'이 되어 살아보는 것에 좀 더 익숙해지는 것이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보다 내 눈에 보이는 세상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이다.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할 당시, 한 여학생과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난다. 이 펑크족 여학생의 외모는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머리는 보라색, 가죽 옷에다 온몸에는 피어싱, 어느날 고등학교에 실습을 나간 이 친구에게 학생들이 몰려와 질문을 했다.

"왜 누나는 남자처럼 옷을 입고 다녀요?"

그녀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내가 남자처럼 하고 다니는 게 아니라 남자들이 날 따라 하는 거야."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행복한 문화에 사는 사람들은 그녀처럼 자신의 삶과 선택에 당당함과 자신감이 넘친다. 인생의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 사는 것이다. 우리가 부족한 부분이다.

사람은 행복의 절대 조건이었지만,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남을 '위해'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각자가 가진 독특한 꿈, 가치와 이상을 있는 그대로 서로 존중하며 이해하는 것, 이것이 사람과 '함께' 사는 모습이다. 그래야 사람의 가장 단맛을 서로 느끼며 살 수 있다.

 

 

 

 

오컴의 날로 행복을 베다

과학자들이 쓰는 용어 중에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표현이 있다. 14세기 영국의 논리학자였던 오컴의 이름에서 탄생한 이 용어는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필요 이상의 가정과 개념들은 면도날로 베어낼 필요가 있다는 권고로 쓰인다. 사고의 절약을 요구하는 이 원리는 좋은 과학 이론의 기본 지침이다.

최근 심리학에 등장한 진화생물학적 견해는 이 날카로운 면도날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 본질에 대한 이해를 전면 개편 중이다. 심리학 전공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아브라함 매슬로우의 '욕수 피라미드'를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인간의 다양한 욕구들은 피라미드 모양의 위계적 단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가장 아래 단계의 생리적 욕구들(식욕 등)이 채워져야 보다 고차원적인 상위 욕구(자아성취 등)에 관심이 생긴다는 전제다. 한마디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메시지다.

하지만 이 철옹성 같던 매슬로우의 이론도 최근 위아래가 뒤바뀌고 있다. 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지휘자가 되려 하고, 가장 빠른 직구를 던지려고 할까? 즉, 왜 자아성취를 하려고 할까? 그동안 심리학자들은 온갖 철학적·도덕적 이유를 더한 장황한 설명을 했다. 하지만 진화생물학적 해석은 모든 것을 간명하게 만들었다.

금강산 구경을 하기 위해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욕구(식욕, 성욕)을 채우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금강산 유람(자아성취)을 한다는 것이 최근 심리학적 설명이다. 혁명적이다.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학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피카소나 칭기즈칸뿐 아니라, 자아성취의 교과서적 인물인 간디나 마틴 루터 킹 목사도 사실은 대단한 여성 편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많은 경우, 금강산을 찾아가는 이유를 본인도 모른다. 그래서 본인뿐 아니라 심리학자들까지도 지나치게 긴 설명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자아성취와 마찬가지로 행복에 대한 논의들은 필요 이상으로 거창하고 추상적이다. 오랫동안 철학자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복의 정신적 교주로 일컬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정확히 말하면 행복에 대한 논의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칭송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삶'에 대해 말했던 것이고, 또 그것은 '유데모니아eudaimonia'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했던 것이다. '좋은eu'과 '정신daimon'의 합성어인 유데모니아는 앞에서 언급한 자아성취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지금까지 많은 서양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가치 있는 삶이 곧 행복이라는 해석을 해왔다. 그 결과, 행복을 필요 이상으로 거창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이 거창한 이유가 있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귀족 가문에서 최고만을 누리며 살았던 인물이다. 그의 스승은 플라톤, 제자는 알렉산더 대왕, 인류 역사에 이렇게 화려한 이력서를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그래서 그의 행복관도 매우 엘리트주의적이다.

그에 의하면 여자나 노예들은 행복을 누릴 최소한의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누리는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은 '칭송받을 만한' 삶의 구성 요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착각'이다.

사실 그가 관심을 둔 것은 정확히 말해 '가치 있는 삶'이지 '행복한 삶'이 아니었다. 우리가 이 둘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초엘리트주의적 행복관의 잔재 때문에 좋은 삶과 행복한 삶이 뒤엉켜 있다.

행복도 오컴의 날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행복은 가치나 이상, 혹은 도덕적 지침이 아니다. 천연의 행복은 레몬의 신맛처럼 매우 구체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쾌럭적 즐거움이 그 중심에 있다. 쾌락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것을 뒷전에 두고 행복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이냐, 행복한 삶을 살 것이냐는 개인의 선택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첫째, 이 둘은 같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삶의 선택과 관심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잣대가 필요하고, 많은 경우 그 잣대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지보다 우선시 되는 것은 내 선택을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느냐다. 내가 지금 좋고 즐거운 것보다 남들 눈에 사려 깊고 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앞으로 설명했듯 여기서 행복은 역풍을 맞기 시작한다.

이런 사고는 쾌락적 즐거움의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미국 시카고 대학 크리스토퍼 씨이 교수의 유명한 초콜릿 연구가 있다. 대학생들에게 커다란 바퀴벌레 모양의 초콜릿(2온스)과 작은 하트 모양의 초콜릿(0.5온스)중 하나를 고르게 했다. 먹는 즐거움은 하트 모양 초콜릿이 더 클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결국 대다수(68%)는 커다란 바퀴벌레 모양 초콜릿을 선택했다.

'일반인의 합리주의'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자신의 선택을 타인에게 정당화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그까짓 모양보다는 객관적인 양의 차이를 비교해서 내리는 선택이 더 '똑똑'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명하게(?) 하트 대신 바퀴벌레를 먹는다.

몇 해 전부터 우리 대학에서는 심리학을 전공하려는 학생수가 급증했다. 그러다 보니 학점이 좋은 학생부터 전공을 선택할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된 적이 있다. 그 당시 심리학 전공을 선택한 한 학생에게 이유를 물어보았다. 의외의 답이 나왔다. 심리학에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 높은 학점이 '아까워서' 심리학을 전공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자주 보는 일이다.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수능 점수가 너무 잘 나와서 의대를 가능 학생들, 더 행복해지기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착각이다. 명분에 행복을 양보하는 습성에 익수해지는 것이다.

행복을 정육점에서 판다면, 현재 시중의 고기들은 기름이 너무 많이 붙어 있다. 오컴의 칼날이 필요하다. 그 칼날로 기름기를 제거하고 나면 행복의 살코기로 남는 것은 주관적인 즐거움과 기쁨이다.

행복하기 위해 쾌락주의자가 되자는 말인가? 다소 그럴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에서처럼 자신을 집단의 일부로 생각할수록 행복의 쾌락적 부분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동안 우리는 내일이 없이 즐겁게 사는 여름 베짱이를 한심하게 생각하도록 세뇌받고 살았다. 두 가지 염려 때문에. 첫째 쾌락주의자들의 즐거움은 저급하다. 둘째, 그런 삶의 말로는 한심할 것이다. 둘 다 근거 없는 염려다. 세상 모든 베짱이들이 루저가 된다는 증거는 없다. 수많은 최근 연구들에서 나오는 결론은 오히려 그 반대다.

행복한 사람들을 오랜 시간 추적한 연구들을 보면 행복한 사람일수록 미래에 더 건강해지고, 직장에서 더 성공하며, 사회적 관계도 윤택해지고, 더 건강한 시민의식을 갖게 된다. 한국과 미국 사회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연구들에서 어떤 사람을 '행복한 사람'으로 정의했을까? 남의 칭송과 칭찬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일상에서 긍정적인 정서(기쁨 등)를 남보다 자주 경험하는 사람이다. 즉, 우리가 온갖 오명을 씌우는 쾌락주의자들의 모습이다. 하루를 보면 이들의 삶이 조금 어설퍼 보일지 몰라도, 10년 뒤는 이야기가 다르다.

 

 

결론을 맺을 때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행복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어서였다. 우선, 행복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쾌락에 뿌리를 둔, 기쁨과 즐거움 같은 긍정적 정서들이다. 이런 경험은 본질적으로 뇌에서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철학이 아닌 생물학적 논리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고혈압 환자에게 혈압을 낮추는 데 도움 되는 생각을 자주 하라는 처방을 내리는 의사는 없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지침들은 대부분 그렇다. "불행하다면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이다. 불행한 사람에게 생각을 바꾸라는 것은 손에 못이 박힌 사람에게 "아프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것과 비슷하다. 생각을 통해 바뀌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생각이다. 행복의 핵심인 고통과 쾌락은 본질적으로 생각이 아니다.

둘째, 행복에 대한 이해는 곧 인간이라는 동물이 왜 쾌감을 느끼는지를 이해하는 것과 직결된다. 인간만큼 쾌감을 다양한 곳에서 느끼는 동물이 없다. 쇼팽과 세익스피어도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쾌감은 먹을 때와 섹스할 때, 더 넓게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 진화의 여정에서 쾌감이라는 경험이 탄생한 이유 자체가 두 자원(생존과 번식)을 확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현상은 한국인의 일상을 실시한 조사한 연구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휴대전화를 이용해 현재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얼마나 즐거운지를 대학생, 직장인, 주부, 노인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한국인이 하루 동안 가장 즐거움을 느끼는 행위는 두 가지로 나타났다. 먹을 때와 대화할 때.

행복의 핵심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의 내용과 지금까지의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총체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것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다. 문명에 묻혀 살지만, 우리의 원시적인 뇌가 여전히 가장 흥분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다. 음식, 그리고 사람.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모든 껍데기를 벗겨내면 행복은 결국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요약된다. 행복과 불행은 이 장면이 가득한 인생 대 그렇지 않은 인생의 차이다. 한마디 덧 붙인다면 "The rest are details." 나머지 것들은 주석일 뿐이다. 

 

 

 

'사랑과 행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랑한 호기심  (0) 2014.09.27
그것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0) 2014.09.25
행복 'being'  (0) 2014.09.18
고요해진 이후에야 편안해진다  (0) 2014.08.24
현재와 미래를 만나다  (0) 2014.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