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골은 매화꽃이 지기 시작하자 물앵두꽃이 활짝 피어...
직장생활을 두달 넘긴 큰딸이 7일(토) 직장 동료들이 경주마라톤대회에 참가하게 되자 동료직원들의 마라톤 응원 도우미를 하게 되었다. 새벽 5시 회사에서 출발한다고 하여 새벽 찬바람을 맞은 보람으로 마라톤 경품추첨에서 가정용 청소기를 탔다고 집으로 보내 주겠단다. 안그래도 우리집 청소기가 18년된 거라서 바꾸고 싶었지만 남편 눈치땜에 참았는데...
- 히로나카 헤이스케지음『 학문의 즐거움 』에서 -
히로나카 헤이스케
1931년생 일본 수학자이며 필드상 수상
왜 배워야 하는가
사람은 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앞에서 사고력을 기르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나도 그 답을 잘 모른다. 모르면서 공부했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하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인간의 두뇌는 과거의 사건들뿐만 아니라 과거에 얻은 지식도 깨끗이 잊어버리게끔 되어 있다. 기억한 것을 잊는 능력은 컴퓨터나 로봇에는 없는 인간 특유의 장점이며 동시에 단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특유의 망각(忘却)이 장점이 되는 경우도 많다. 일상생활을 해나가는데 잊어버려도 아무 지장이 초래하지 않는 사소한 일들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거나, 좋지 않은 사건이나 언짢았던 일들이 잊혀지지 않는다면 사람은 틀림없이 신경쇠약에 걸리거나 심한 경우 그로 인해 정신 병원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잊어버릴 수 있는 능력은 이러한 점에서 대단히 소중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단점으로 나타날까?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 얻은 지식을 대학에 들어가서 잊어버리거나, 대학에서 배운 것을 취직하고 나면 잊어버리는 경우 등일 것이다. 또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힘들게 공부한 지식이 자격증을 따자마자 잊혀진다거나 하는 일도 망각의 단점으로 나타난 예이다. 여기에서, 열심히 공부해도 결국 잊어버리게 되는 것을 왜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문제가 나오게 된다.
나는 그러한 질문을 하는 학생들에게 "그것은 지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닐까?라고 대답할 것이다. 즉 공부하는 과정에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지혜라는 것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이 지혜가 만들어지는 한 공부한 것을 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는 여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배우는 것은 낭비가 아니다. 그러므로 많이 배우고 많이 잊어버리고, 다시 많이 배우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도대체 지혜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대단히 애매하기 때문에 쉽게 분석하기는 힘들지만 인간이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는 확실하다. 지혜는 두뇌에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지혜가 두뇌의 구조와 어떤 관계가 있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인간 두뇌의 특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원숭이 같은 동물의 두뇌보다는 컴퓨터나 로봇과 비교하는 것이 쉽고 빠를 것이다.
앞에서 내가 잊어버린다는 것은 컴퓨터나 로봇에는 없는 인간 특유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의 두뇌는 1백 40억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과거에 일어난 일이나 습득한 지식을 그 속에 축적하고 있다. 다만 컴퓨터는 기억한 것을 자유자재로 100퍼센트 끄집어 낼 수 있는데 인간의 두뇌는 기억한 것의 극히 일부분밖에 끄집어 내지 못한다. 그러나 뇌에 수많은 정보를 축적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사람은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뇌에 축적한 후에 끄집어 내지 못할 뿐'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것을 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여유'라고 생각한다. 이 경우의 '여유'는 수학적인 의미로서의 '여유'다. 즉 '바로 꺼내 쓸 수 있는' 정보는 얼마 되지 않지만 방대한 양의 정보가 '바로 꺼내 쓸 수 없는 형태'로 뇌에 축적되어 있는 것이다. 전자에 대한 후자의 비율의 크기를 '여유'라고 부른다.
지혜라는 것은 사실은 사람의 두뇌에 있는 여유에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문과학생이 졸업 논문을 쓰는데 고등학교 때 배운 수학의 인수분해를 꼭 사용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고 하자. 그런데 그는 그 동안 문과 공부만 해 왔기 때문에 인수분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든지 이과 친구에게 물어보든지 어떤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그가 인수분해에 대해서 다시 공부하자마자 "아, 그렇군, 이건 거로군."하면서 옛날에 배운 것이 생각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머리속에는 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인수분해에 대한 기초 지식이 무의식중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수분해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것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겠지만, 그는 단숨에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바로 꺼내 쓸 수 없는 형태로 뇌에 축적된 지식은 영원히 끄집어 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수고와 기회를 제공하면 얼마든지 꺼내 쓸 수 있다. 인간의 두뇌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지혜에는 이런 측면이 있는데 나는 이것을 '지혜의 넓이'라고 부른다. 이 지혜의 넓이는 계속 공부하고 잊어버리는 사이에 두뇌 속에서 자연스레 키워진다.
인간의 두뇌는 컴퓨터와 달리 일을 광범위하게 보고 생각할 수 있다. 즉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등의 사고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컴퓨터에 영화를 보여 주더라도 컴퓨터는 그것을 감상하지 못한다. 하나하나의 독립된 화면으로 보이고 연속된 장면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의 영상을 보면 그 이미지를 확실히 남기고 영상 사이의 짧은 시간을 무사히여 다음 영상의 이미지와 중첩시킬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두뇌가 어떤 때는 민감하게 움직이고, 어떤 때는 둔하게 일을 하면서 자극에 대한 반응의 여운을 남기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두뇌는 불연속적인 것을 연속적으로 읽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두뇌가 가지고 있는 이 관용성은 사리를 판단할 때도 발휘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연상(聯想)이다. 문장, 특히 시나 격언 같은 것을 읽을 때, 우선 그 말에서 연상되는 다른 말을 생각나는 대로 열거한 다음에 열거된 말 몇 개를 조합(組合)해서 새로운 말을 만들어 본다. 이렇게 한 후 원래의 문장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면 더 깊고 새롭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연상 작용도 말의 뜻과 느낌에 폭을 갖게 하는 뇌의 관용성에서 비롯된다.
또 연상은 여러 개의 다른 것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뇌의 작용과도 관계가 있다. 수학의 간단한 예를 들면 원과 삼각형의 공통점은 평면을 안과 바깥의 둘로 분할하는 성질이다. 'ㄷ'자에는 이러한 성질이 없다. '8'자는 평면을 세부분으로 나눈 것이다. 실생활에서도 의견을 종합할 때에 서로 다른 의견의 공통점을 발현하는 능력은 대단히 유용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폭넓게 생각하게 마련이고 또 그래야만 사고가 발생하고 깊어지게 된다.
앞에서 나는 인생에는 깊이 생각해야 하는 시기가 있고, 사고력을 키우는 것이 공부하는 목적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바꾸어 말하면 '지혜의 깊이'는 공부를 통해서만이 비로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의 두뇌는 인간 특유의 폭넓은 사고의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는 힘, 즉 '지혜의 깊이'가 키워지지 않는다.
지혜에는 '넓이'가 있고, '깊이'가 있고, '힘'이 있다. '지혜의 힘'이란 결단력을 말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은 퀴즈나 테스트처럼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문제는 상당한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진정한 해결이 불가능할 뿐더러 문제 그 자체의 진의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긴 시간을 들여서 모든 것을 알아내기 전에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겠다는 태도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현대 의학의 수준으로는 몇 퍼센트밖에 해명되어 있지 않은 어떤 난치병일지라도 의사는 눈앞에서 고통받는 환자에게 무엇인가 처방을 내려야만 하는 것처럼,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어느 순간에는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한 단계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가는 비약을 해야 한다. 불연속적인 것을 연속적인 것으로 유도하는 두뇌의 관용성은 비약하는 것을 비약이 아닌 것같이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사람은 비약할 수 있다. 이것은 컴퓨터나 로봇에는 없는,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
결단할 수 있는 힘, 어느 순간에 '얏!' 하고 비약할 수 있는 힘, 이러한 지혜의 힘은 인생과는 직접 관계가 없어 보이는 공부하는 가운데서 키워지는 것이다.
지혜에는 내가 말한 것 이외에도 몇 가지 측면이 더 있을 것이다. 어쨌든 "왜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지혜를 닦기 위해서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우리 눈에 보이는 빙산은 빙산 전체로 보면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다 속에는 바다 위에 나타난 부분의 11배 정도가 있다고 한다.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빙산은 바다 속에 잠자고 있는 그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두뇌도 그것과 비슷하다. 두뇌의 불가사의한 특성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지만, 그림으로 나타내면 빙산과 같은 모양이 될 것이다.
인간의 두뇌에는 140억 개의 뇌세포가 있다. 그 140억 개의 뇌세포를 다 쓰려면 234세이라는 긴 수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사람은 방대한 수의 뇌세포를 가지고 있지만 보통 그 10퍼센트, 많아야 20퍼센트 정도밖에 못 쓰고 일생을 마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쓰이지 않은 뇌세포는 마치 바다 속에 숨어 있어서 사람 눈에 띄지 않는 빙산과 같다. 즉, 우리는 잠자고 있는 거대한 뇌세포에 숨어 있는 자기 재능이나 자질을 스스로 알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자기의 재능, 자질은 극히 적다. 또 자기의 눈에 보이는 재능이나 자질도 세포의 거대한 창고에 매장된 것에 비하면 바다 위에 떠오른 빙산처럼 극히 미미하다. 사람은 이렇게 미지의 자기 자신을 다 알지도 못한 채 죽는다.
자기의 재능을 모두 발견하고, 자기라는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은 너무 짧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지의 자기를 알려고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물론 자기의 능력이나 성격을 인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 살아가는 인생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 그럴자격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도전하는 인생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도전이 없는 인생은 놀라움이나 커다란 기쁨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인생에서도 물론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겠지만 내 경험을 통해볼때 자기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하여 "나에게 이런 면도 있었구나!"라고 자기 자신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기쁨이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미지의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사방이 고요한 깊은 밤에 책상 앞에 바로 앉아 자기라는 인간을 직시하거나 , 혹을 책을 읽고 사색하며 자기를 깊이 돌이켜보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미지의 자기를 발견한다면 그 사람은 아마 천재이거나 특수한 훈련을 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면 보통 사람일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미지의 자기와 만날 수 있을까?
자기와 다른 여러 세계의 사람들과 접하여 서로 작용하는 것은 하나의 행동이다. 이와 같이 행동을 스스로 일으키면서 그 가운데에서 자기를 발견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넓은 시야, 다양한 생각
미국으로 유학 가서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많이 있다. 그 중에서 현재까지 도움이 되고 있는, 제일 유익한 것을 말하고자 한다. 먼저 일본 교육과 미국 교육의 기본적인 차이에 대하여 언급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국민학교와 중 · 고등하교 교육을 비교해 보면, 대략적인 표현이지만 일본의 교육이 평균성이나 일률성을중시하는 데 반하여, 미국은 다양성을 중시한다.
문제는 이 '다양성'의 뜻인데, 하나는 지역에 따라서 다른 교육을 하는 지역성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다. 예컨대 일본 북쪽 훗카이도의 학교 교육과 남쪽 규수의 학교 교육이 다른 것은 당연하며,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은 교육을 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미국의 경우는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예산의 90퍼센트가 그 지방의 부동산 세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지방 사람들의 발언이 교육에 많이 반영되는 것이 당연하며 따라서 교육의 지역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실제 교과 과정을 짜는 데 큰 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지방 사람에 의해서 선출된 교육위원장이며, 교장은 그 교육위원장의 교육 정책에 따라야 한다
미국 학교 교육이 중시하는 다양성의 또 다른 측면은 학생의 개성을 될 수 있는 대로 키우려고 하는 성향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각자 다른 개성을 갖고 있다. 아기마다 생김새도 다르고 몸무게도 다르다. 손발을 움직이는 방법도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예컨대 성격이나 재능이나 소질도 사람마다 다르다. 그 차이가 개성의 출발점이다. 그 개성을 존중하려고 하는 것이 미국의 교육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한 반의 학생수를 가능한 한 적게 하는 점(한 반에 30명일 경우가 제일 많다), 교사 한 사람과 장차 교사가 되려고 하는 조교 이렇게 둘이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점, 또 진도에 따라서 학생을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그룹마다 각각 다른 책상에서 공부시키면서 질문이 있으면 교사 또는 조교가 대답하는 방식을 취하는 점(교실에 따라서는 일본과 같이 책상을 나란히 놓고 가르치는 데도 있다) 등이 있으며, 이 같은 점들에서 개성 존중의 특성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대학 입학 제도에서도 그 특성이 나타난다. 월반 제도가 그 하나이다. 월반이라는 것은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학년을 뛰어넘어 진급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예컨대 대학에는 '여름 학기'라는 것이 있어서 고등학교 1학년이라도 나머니 2년을 뛰어넘어서 바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또 입학하여 '어드밴스 스탠딩(advance standking)' 이라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으면 입학과 동시에 2학년에 진급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니까 15, 16세에 대학에 입학하고 약관(弱冠)의 나이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수재도 이따금 나타난다. 실제 내 제자 중에는 20세에 박사 학위를 받은 학생도 있다.
이와 같은 개성 존중의 기풍이 미국 특유의 실용주의와 결합하여 일본의 교육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다양한 교과 과정을 만들고 있다. 수학 교과서를 예로 들면 이과계 학문을 좋아하고 그 분야에 나가기를 원하는 학생을 위해서는 일본같이 '대수', '기하', '해석' 과 같은 교과서가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운 교과서만이 아니라 장래 목공이 되고 싶은 학생을 위해서는 '목공을 위한 수학' 과 같은 교과서가 있고, 농업을 지망하는 학생에게는 '농업 종사자를 위한 수학'이라는 교과서도 있다. 실제로 넓은 농토가 있는 중부 지방 학교에서는 그러한 수학 교과서가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고등학교에서 제일 많이 쓰이는 수학 교과서는 '소비자를 위한 수학'이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에서는 생산자도 필연적으로 소비자가 되므로 물건을 살 때 실제 도움이 되는 수학을 많은 학생이 배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양화된 미국의 교육 방식에는 일장일단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점 하나를 들자면 학생의 능력에 따라서 가르치는 방법은 능력이 있는 학생을 키우는 반면 그렇지 못한 학생을 평균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힘이 약하다는 점이다. 미국 젊은이들의 평균 성적이 일본 젊은이들에 비해 낮은 것은 그 때문이다.
또 월반 제도가 나쁘게 작용한 예도 있다. 진급을 너무 서둘렀기 때문에 오히려 나중에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 치열한 경쟁에 휘말려 거기에서 떨어져서 자신을 잃은 경우 등을 들 수 있으며, 그 결과 심한 경우에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 학생도 결코 적지 않다. 실제 나의 제자 중에도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이 있다. 이런 불행한 사건을 접할 때마다 미국은 좀더 개개인의 격차를 줄이는 교육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미국 교육의 단점은 그렇다치고, 그러한 교육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자연히 하나의 현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보는 습관을 무의식중에 몸에 지니게 된다. 물론 미국 사람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일본 사람은 모두 하나의 현상을 획일적으로 본다고 비난하는 사고방식도 위험하다.
어쨌든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은 남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창조할, 즉 눈부신 비약을 해낼 가능성을 많이 갖고 있다. 새로운 것을 창시하는 사람이 미국에서 많이 배출되는 것이 교육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미국 생활을 통해 갖게 되었다.
수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수학에서 상상도 못했떤 새로운 것을 창조한 미국 수학자를 많이 보았다. 모두가 상아탑에 틀어박혀 수학만을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되는 것뿐이다. 이 같은 창조는 수학이라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를 넓은 시야로, 다양성을 갖고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수학자이자 전 MIT 대학 교수인 새넌의 경우를 보자. 그는 우리가 매일 보고 듣는 정보에 수학을 도입하여 수학에 의한 정보 이론을 만들었다.
새넌 교수가 그러한 정보 이론을 창시한 배경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암호를 푸는 일에 종사하여 암호 풀이에 수학적 방법이 있음을 알아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똑같은 체험을 했더라도 수학을 다른 분야와 연관시켜 보는 눈이 없었더라면 이 이론은 도저히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새넌 교수의 정보 이론으로부터 다른 수학자들에 의하여 가치 있는 응용 이론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응용이 줄이어 발표되기 시작할 무렵 새넌 교수 자신은 이번에는 '주(株)'에 관한 수학이론을 만들고 있었다.
또 어느 대학의 수학 교수가 시작한 것도 일본에서는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억만장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어 온 그는 실제로 수학이라는 학문을 충분히 활용하여 마침내 억만장자가 되었다. 그 교수는 젊고 유능한 수학자를 많이 키워서 컴퓨터 관련 회사를 위한 컨설턴트 회사를 차림으로써 그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다양성에서 비롯된 그 발상에 같은 수학자로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상상돠 못하는 일을 해내는 미국 수학자들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접하는 과정에서 수학뿐만 아니라 학문 그 자체에 대한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것이 미국에 유학하고 그리고 그 나라에서 직장을 가짐으로써 얻은 가장 유익한 경험이라고 하겠다.
학자는 자기 학문만을 연구하면 안 된다. 자기 학문을 중심으로 하여 다른 학문이나 경제 정세나 사회 현상 등과 관련시키는 다양성에 입각하여 새로은 것을 창조해 나가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현대 사회는 바로 그 다양한 길로 나가려 하고 있다. 하나의 명제(국가 목표)가 있어서 그것만 지키고 있으면 된다거나, 오직 그것을 향하여 노력하면 된다는 논리가 통하던 과거의 단순한 시대와는 다르다.
나는 21세기를 맡을 젊은이들이 그러한 넓은 시야를 가지고 학문을 하기에 원한다. 우선 인간은 각자 개성을 가지며 다양한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학구적인 시야로 학문을 전개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의 '학문의 발견'으로 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리 과학자 육성 사업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 본다. 21세기를 맡을 젊은이들에게 이러면 좋겠다. 저러면 좋겠다고 희망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괜찮은 것인지, 반세기에 걸친 나의 인생 경험에서 얻은 지혜나 지식을 환원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 하고, 나는 그러한 충돌 때문에 일련의 인재 육성 사업을 시작했는데, 여기서는 그 배경이 되는 나의생각을 중점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나는 현재 미국에서는 하버드 대학, 일본에서는 교토 대학에서 강의를 하느라 일본과 미국을 왔다갔다하며 생활하고 있다. 그 덕분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금 일본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미국은 지금, 한마디로 말해서 메이지 이후 서구의 문명을 수입하여 그것을 모방하기만 해온 것같이 보이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다시 돌아보고, 그 나라에서 자기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에 유익하고 가치 있는 것을 열심히 배우려고 하고 있다.
그러한 생각이 급속히 퍼진 것은 무엇보다도 일본의 놀라운 경제 성장이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자원이 빈약한 이 작은 섬나라가 어떻게 패전 후 그렇게 급속히 성장을 할 수 있었는가? 또 어떻게 오일쇼크와 인플레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경제 선진국 중에서도 발군의 경제력을 비축할 수가 있었는가? 그것이 미국으로서는 경이이며 큰 의문인 것이다. 미국은 일본 경제의 이와 같은 성공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모든 방면에서 관심을 갖고 일본을 지켜보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일본 관료 기구의 특성이나 재계 또는 기업의 구조 등을 주제로 한 책이 한창 출판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한 책 중에서도 실제 일본의 정계와 재계의 사람을 직접 만나 일본 경제력의 실체를 냉철한 눈으로 보고 일본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서술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에즈라 보겔(하버드 대학 동아시아 연구 소장)의《Japan as number one》은 주목할 만한 책이다. 보겔 씨는 책을 썼을 뿐만 아니라 미국 각지에서 적극적인 강연 활동을 하면서 일본을 다시 보고 일본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일본의 기업 시스템이 이런 식으로 재평가받고 있는 것은 일본 사람으로서는 대단히 좋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직의 구조라든가 시스템만이 일본 경제 성공의 전부는 아니다. 미국 사람들도 그것을 알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일본 기업은 종신 고용제를 성공적으로 운용하고 있지만, 이것을 모방하여 실제로 종신 고용제를 채택한 텍사스 주의 한 회사가 오히려 그것 때문에 경영이 나빠진 경우도 있다. 그래서 시스템뿐만 아니라 시스템 속에서 일하는 일본 사람들 특유의 국민성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아는 사람이 근무하는 오사카에 있는 한 회사의 이야기지만 좋은 예가 되기 때문에 여기에 소개한다.
그 회사의 공장에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사고가 난다는 것은 회사로서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안전 대책을 강구했지만 사고는 여전하였다. 예컨대 한 공원이 다리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에 거기에 손잡이를 설치했다. 그랬더너 손잡이가 있다고 안심하고 몸을 내밀고 일을 하던 사람이 또 떨어지는 사고가 났다. 이번에는 손잡이 밑으로 안전망을 쳤다. 그랬더니 망을 믿고 손잡이에 매달려서 망의 끝까기 갔다가 결국 사람이 또 떨어지는 식으로 아무리 합리적인 대책을 세워도 사고는 끊이지않았다.
그런데 그 사장이 공장 대지를 조사해 보니 예전에 거기에 '이나리(일본의 곡식을 맡은 신)' 사당이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즉 지금까지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공장을 짓기 위해 파괴한 '이나리'의 저주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장은 그 사당을 복원하고 직원 모두를 동원해서 안전 기원을 하는 제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실제로 그 안전 제사를 지낸 후 사고는 완전히 없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보는 관점은 사람에 따라서 천차만별이겠지만, 나는 여기에 일본 사람 특유의 불가사의한 일면이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미국은 일본 사람의 이러한 신비성을 지금 열심히 알아보려고 하고 있다. 일본 위정자의 내면을 묘사한《장군》이란 책이라든가, 일볹거 구도자를 취급한《미야모토 무사시》의 영어 번역판이 비즈니스맨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미국이 얼마나 일본 사람의 정신적인 면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좋은 사례다.
가부키(에도 시대에 발달한 일본의 전통적인 민속극의 하나) 등의 일본 전통 예능, 다도(茶道)나 화도(花道) 같은 전통 예술이나 무도(武道), 또 일본 건축 양식 등이 미국에 흡수되는 현상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이렇게 일본을 배우려고 하고 있다. 그러면 일본은 어떠한가? 먼저 "과연 일본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배울 만한 것이 지금 존재하느냐?"라는 것이 여기서 문제가 될 것이다. 미국의 슈퍼마켓을 시찰한 일본 사람이 "여러 회사를 돌아보았지만 미국 회사는 어수룩하다. 아무것도 배울 게 없다."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 그 사람은 관광을 하듯이 미국 기업 사회의 겉모양만 훑어보고 온듯하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나는 이와 같은 시각이나 사고방식에는 반대이다. 일본은 확실히 경제적으로 미국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성장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곧 다가올 21세기라는 국제화 시대를 생각할 때 , 지금 미국으로부터 배워 두지 않으면 엄청난 위기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유는 이렇다. 미국 회사가 지금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전문가가 아니므로 그것을 분석할 수는 없지만 미국에서 오래 생활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그것이 눈에 보인다.
첫 번째 약점은 우수한 인재가 공업보다 서비스업에 많이 흡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성 면에서도 GNP의 60퍼센트가 서비스산업에 의한 것이며, 노동력의 75퍼센트가 어떤 형태로든 서비스업에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공업의 선행 투자가 줄어들어 그 결과 공업력의 성장이 약화됨은 필연적이며, 실제 미국은 지금 제공업화를 심각하게 꾀하고 있다.
두 번째 약점은 인종 문제, 특히 인국의 12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는 흑인 문제, 더 나아가 여성 고용 문제에 많은 기업이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차별 회사라고 지적당하면 정부로부터 엄한 경고를 받기 때문이다.
세 번째 약점은 미국 기업 사회에서는 인재가 계속 유동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장기적인 계획성이 결여되어 있는 점이다.
예컨대 어떤 회사의 사장을 5년 계약으로 맡은 사람은 그 5년이라는 단기간에 뚜렷한 업적을 올리지 않으면 사직해야 하는 것이 미국 기업의 상식인데, 이러한 단기 결전주의로는 한 기업의 장래를 긴 안목으로 전망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 밖에도 많겠지만 우선 이 세 가지를 도마에 올려놓고 보면 이 모든 약점도 첫 번째 약점의 경우 만일 추진되고 있는 제공업화가 성공하고 공업력이 높아지면 서비스 산업 부문에 유능한 인재가 많이 몰려있는 것이 국제 관계상 미국의 강점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필연적으로 시련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두 번째의 인종 문제 및 여성 고용 문제는 미국의 기업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 중에서도 제일 심각한 문제인지도 모른다. 특히 흑인 문제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뿌리 깊고, 교육 등 여러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서 정부가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는 인상을 준다. 또 흑인을 고용함으로써 생산성이 떨어진 예가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여전히 해결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것은 3백 년에 걸친 흑인 차별의 역사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자손 3대를 통해서라도 현상을 개선하려고 하는 장기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으며, 21세기는 우수한 흑인 인재를 발굴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여성을 고용함으로써 당장은 다소 생산성이 감소되겠지만, 여성들의 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볼 때 장차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재능이 발휘될지도 모른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인재 발굴이 미국 정부의 생각대로 성공한다면 21세기 초반 일본은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특히 스포츠에서 알 수 있듯이 흑인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이 생산성에 돌려지게 되면 일본도 그리 여유를 부릴 수만은 없을 것이다.
세 번째 약점은 기업에 장기성이 없다는 것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기업에 장기성이 없으면 정부가 장기성을 갖게 된다. 실제 미국은 장기적이고 국제적인 전략을 세우고 있다. 일본이 그에 대항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일본도 멍청하게 지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전후 30여 년이 지나서 "경제에서는 미국을 따라잡았다. 지금부터는 추월 할 시대이며 미국에서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따위의 말을 하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미국은 소위 연구 인재를 수입하는 나라인 데 비해 일본은 연구 성과를 수입하는 나라이다. 미국은 외국에서 무언가 새로운 연구, 장래성 있는 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인재를 데려가는 방식을 쓰고 있다.
그런 뜻에서 미국이 지금 일본에서 배우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인재 수입주의가 상식인 미국에 일본 사람이 들어가기 쉬운 여건이 마련되고 있는 셈이다. 일본 사람이 이 사실을 유용하게 이용하여 미국에 가서 미국 사회 속에서 배우면서 생활하여, 일본의 좋은 점을 가르치고 거꾸로 미국의 입장을 익히고 돌아와야 한다. 그렇게 서로 공헌하는 시대가 앞으로 일본에도 찾아와야 할 것이다.
미국 특유의 공동 연구를 위한 팀 편성을, 실제로 그 속에 뛰어들어 경험으로 몸에 익히는 것도 그 예가 될 수 있다. 미국은 국적을 막론하고 여러 나라에서 인재를 수입하는 나라이다. 이 사실이 팀 편성에 반영되고, 거기서 뜻밖의 성과를 얻는 경우가 많다.
일본적인 방식은 우선 사람을 모아서 팀을 만들어 그 구성원들을 신토나이즈(syntonize)시킨다. 신토나이즈란 톤을 같게 한다. 즉 동조, 협조의 분위기를 만든다는 뜻이다. 그리고 구성원들을 싱크로나이즈(synchronize)시킨다. 따라서 전원 통일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미국은 외부에서 여러 인재를 데려왔기 때문에, 더군다나 각 개인들은 우수하고 개성이 강하기 때문에 대단히 다루기 힘들다. 더 나아가 나라가 다르면 습관도 다르고 생활 감정도 다르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을 모아서 팀을 만들 경우 실제로 일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가. 잘못 일치시키면 일부러 모은 각자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최근에는 자주 케미컬라이즈(chemicalize)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 그 배경은 이렇다. 이질적인 것을 모으면 당연히 충돌이 생기고 대립도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활기가 있다. 따라서 서로 개성을 부딪침으로써 화학 반응을 일으키게 하자는 생각이다.
화학 반응이라는 것은 산소와 수소가 결합하여 물이 생기듯이,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것을 탄생시키는 현상이다. 이와 같이 화학 반응의 성과를 기하는 팀을 만드는 것은, 상상 이상의 것을 만들어 내야 하는 상황에 와 있는 오늘날 일본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체험을 통하여 배워야 할 것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이미 말했듯이 앞으로는 일본과 미국이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서로 장점을 배우고 또 공헌할 시대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아직 작은 시도에 불과하나, 나는 그것을 위하여 교육에서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수리 과학자 육성 사업'이 그 하나이다. 이것은 수리 과학(數理科學)에 소질이 있는 학생이나 젊은 연구자를 해외로 유학시켜서 우수한 인재로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1980년부터 실시하고 있다.
왜 그러한 일을 시작했는가? 확실히 전보다는 유학에 대하여 그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이 적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외국으로 나가야만 배울 수 있었던 것들이 지금은 일본에서도 쉽게 배울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유학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미국 교육은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적잖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또한 미국이라는 나라에는 초일류의 인재를 만드는 데 적합한 요소도 있다. 그러한 장점을 다소나마 받아들여서 초일류의 사람이 몇 퍼센트라도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나의 꿈이다.
그 꿈은 실현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현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나는 그 몇 퍼센트의 가능성을 믿고 적어도 앞으로 10년 정도는 수학 분야에서 한 지류(支流)를 만드는데 바치고 싶다. 어차피 사람의 일생은 어떤 면에서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원리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은 교육 입국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확실히 전후 일본의 교육 수준이 상당히 향상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교부가 중심이 되어 학습지도 요령이나 검정(檢定)으로 교과서의 내용이 제약, 통일되는 등 일본 학교 교육의 일반적인 교육 방식에는 큰 차이가 없다. 더 나아가 일반적인 국민 감정으로서 소위 교욱의 기회 평등주의, 즉, "차별을 없애자, 학교 격차를 없애자. 그것이 공평하다."
라는 사고 방식이 서양에 비하여 강하다. 그것이 교육 수준을 높인 원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에서는 성적의 우열로 인간의 평가가 결정되어 버리는 폐단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중학교 동창생 중에 식당을 경영하고, 연쇄점을 운영하는 등 비즈니스에서 대단히 성공한 친구가 있다. 그와 둘이서 은사를 찾아갔을 때 은사가 그에게 "히로나카는 수학을 잘했지만, 자네는 수학을 잘못했지. 더하기는 괜찮았는데 빼기를 자주 틀렸더, 그런 자네가 장사의 천재가 되다니!"라며 감탄하셨다. 그때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즉 "저는 돈을 벌기만 하기 때문에 더하기만 하고 빼기는 전혀 안 씀니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장사에 성공하는 것도 하나의 재능이다. 나 같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와 같은 재능도 있다. 사람의 재능이란 어느 쪽이 위다 아래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각자의 개성이나 재능을 잘 키우는 것이 다양하게 사는 방식이다.
잠자는 가능성을 깨우자
"서양 문명의 몰락은 죽은 사람을 장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작했다."라고 말한 살마이 있다. 그는 큰 절의 스님이면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이 말은 아이들에게 부모나 조부모의 임종을 보여 주지 않고, 꽃으로 장식한 관(棺)에 유해를 담은 후에 비로소 보여 주는 습관이 생기고 나서부터 서양 문명이 계속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족의 죽음에 직면한다는 것은 확실이 아이들에게는 일시적으로나마 대단한 충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은 그것이 인간의 욕망을 자각하는 데 큰 힘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전쟁 중 학도 동원(學徒動員)으로 야마구치 현 히카리 시에 있는 해군 공창(工廠)의 탄환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거기서 공습을 맞았을 때를 대비한 훈련을 가끔 받았는데, 동급생인 친구와 나는 뛰기 싫어서 늘 숨어서 훈련을 안 받고 게으름을 피웠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진짜 공습을 받았다. 굉장한 폭음이 들리면서 소나기 같은 폭탄이 쏟아졌다. 평소 훈련을 안 받고 놀던 우리는 "도망쳐라!" 하는 말을 듣지도 않았는데 필사적으로 방공호를 향해 뛰었다. 나는 뛰는 도중 수많은 시체를 뛰어넘었다. 본능적으로 얼른 머리를 숨겼을 그들 시체 대부분은 엉덩이에 폭탄을 맞아서 비참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죽음이 없으면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삶이 존재한다. 그 철학자가 말했듯이 장식된 관만을 보게 되는 서양의 아이들은 확실히 삶과 그 뒷면에 존재하는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삶의 가치를 인식할 기회를 빼앗겼다고 말할 수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그 값진 삶을 보다 멋지게 사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특권이다. 그 특권을 포기하는 것은 어떤 뜻에서는 죽은 사람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할 수 있기 않을까?
현재 일본의 시대상을 표현하는 데 '다이내믹)dynamic)'이라는 말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다. '다이내믹'이란 '동적'이라는 뜻으로 이해되는데, 나는 거기에 '대단히'라는 부사를 붙이고 싶다.
격렬한 다이내미즘을 내포한 지금과 같은 시대는 과거의 일본에도 있었다. 예를 들면 에도 시대 말기이다. 그러나 에도 시대 말기의 격심한 변동과 현 일본의 그것과 비교할 때 전자는 두 개 또는 세개의 명확한 입장이 각각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서로 부딪친 결과 생긴 격동기이다. 이에 반해 지금 일본은 다양한가치관이 서로 충돌하면서 복잡한 변동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학에는 '고전 해석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이 분야의 기본 이념은 원리와 출발점에서의 조건만 밝혀지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고전 해석학적 방법은 에도 시대 말기의 격변에는 통용되었는지 모르지만 현재 일본에는 적용할 수 없다.
따라서 불과 10년 후에 맞이하게 될 21세기의 일본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현재의 변동이 앞을 내다보기 힘든 변동이기 때문에 수비게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이 특이한 다이내미즘에 계속 박차가 가해져서 변동이 보다 커지고, 빨라지고, 복잡해져서 개개인의 가치관이 지금보다 더 다양화될 것이라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젊은 사람은 물론 나도 그러한 21세기에 돌입하여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와 같은 격동의 시대에 대처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앞으로 가장 많이 요구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판단력(다양한 인생을 살아가는 선택의 지혜)과 생각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원리나 원칙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있어서는 다양성이나 변동에 대처할 수 없다. 변동과 다양성에 대처하기 위한 교과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자신이 소심(素心)으로 돌아가고, 깊이 생각하고, 그 결과 제일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이 마치 험난한 시대같이 들리지만 나는 외히려 좋은 시대라고 생각한다. 변동하고 다양화되는 시대야말로 개인이 자기의 가능성을 발휘하기 좋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십인십색(十人十色)이라고 말하듯이 사람은 태어났을 때 이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르다.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자질 같은 눈에 안 보이는 부분도 모두 다르다. 따라서 사람 각자의 가능성은 당연히 다종다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끔 이 다양성을 보지 않으려 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안주하고 싶고, 고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일류 대학에 들어가 일류 기업에 취직하는 소위 엘리트 코스에 들어가면 고민할 것도 없고 불안에 쫓길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에 대하여 눈을 감고 싶어하는 것이다.
변동은 위는 위, 아래는 아래라고 하는 정해진 진행을 바꾸므로 이제 더 이상 다양성에 대하여 눈을 감을 수 없게 되었다.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열심히 찾아서 독자적인 인생의 보람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회도 또한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될 것이다. 독자적인 인생의 보람을 창조하지 못함으로써 변동에 방치되고, 다양화에서 낙오됟\고 절망하게 되는 사람의 비중이 커지면, 사회는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잘못하면 전복되기 때문이다.
자기 나름대로 보람을 창조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 속에 잠자는 가능성을 찾아내야만 한다. 아무리 어렵고 고생이 뒤따른다 할지라도 시대를 살아나가기 위하여는 그것이 필요하다.
불교에 '인연(因緣)' 이라는 말이 있다. '인'이라는 것은 '근원'이라는 뜻으로 내적인 것이다. 이 내적인 '인'에 대해서 외적인 것이 '연'이다. 내적 조건인 '인'과 외적 조건인 '연'이 결합해서 모든 것이 생겨나고, 이 결합이 해소됨으로써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다.
한 인간의 삶은 인연에 지배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모에게서 이어받은 것, 가까운 친구에게서 배운 것, 또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체험적 지식 등이 눈에 보이지 않는 덩어리로 자기 자신 속에 축적되어 '인'을 만든다. 그 '인'이 '연'을 얻어서 그 사람의 희망이 되고 행동이 되고 결단이 되고 길이 만들어진다.
살아 있다는 것은 부단히 무엇인가를 배우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 한다. 그리고 바로 그 배우고 노력한 것이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절실히 하게 된다.
소심심고(蘇沁沈考) - 마음을 소박하고 겸손하게 가지고 자기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유연한 태도로 남의 말을 잘 귀담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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