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 속에서 찾는 기쁨의 오월은 늘 푸르다.
- 법륜 지음 『 깨달음 』중에서 -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은
'모든 것이 다 내 탓이고, 내가 지은 대로 돌아온다'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지겠다는 생각을 하면
이미 부처의 길로 한 발 다가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매순간 삶은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조건 좋은 날이든 조건 나쁜 날이든,
그 매일매일이 모여 내 인생이 된다.
자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사람들은 내가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때 하지 않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계는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자유가 속박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어떠한가? 어떠한 상황이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싫다, 좋다'는 생각이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속박하고 있다. 좋다 싫다는 관념에 휩싸여 있는 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속박하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속박한다고 착각한다. 이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내 괴로움이 없어야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내가 자유로워야 다른 사람도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 이런 자유로운 힘이 있어야 나뿐만이 아니라 내가 사는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다.
지금 이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조건을 나쁘다고 생각하고 오늘 하루를 괴롭게 보낸다면, 내 인생에서 오늘은 병으로 보낸 하루가 된다. 매순간 삶은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조건이 좋은 날이든 나쁜 날이든 그 매일매일이 모여 내 인생이 된다. 불행은 늘 사람들 스스로가 만든다. 즉, 주어진 자기의 현실을 외면하는 데에서 불행이 싹튼다.
지금 이대로 좋은가?
언제나 지금 이대로 좋은 삶이어야 한다. 그래야 나를 괴롭히는 데 내 에너지를 쓰지 않게 된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불 한 번 밝히면 어둠이 사라지듯,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 한 생각 돌아봄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금 이대로의 인생 자체가 훌륭하고 가치 있으며 귀중하다.
비록 현재의 삶이 힘들지라도 이 모습 이대로 좋아야 한다. 나는 해탈해서 부처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자기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자기를 아낀다는 것은 자기를 괴롭히지도 속박하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내가 나를 속박하고 괴롭히는데 누가 나를 해방시켜 주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겠는가! 나 자신도 꽁꽁 묶여 괴로움에 빠져 있는데 그 누구를 해탈시키고 기쁘게 해줄 수 있겠는가! 모든 일의 시작은 언제나 나로부터 출발한다.
내 안에서 행복하라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니네.
우리 몸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세균이 있다. 그런데도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사는 걸 보면 그 많은 세균이 우리 몸에 반드시 해가 되는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단지 몸이 약해져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그 세균들로 말미암아 병이 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몸에 결핵귱이 있다고 해서 다 폐결핵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몸에 결핵균이 있다 하더라도 건강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마음의 병은 어떠한가? 우리는 괴로울 때 누군가를 탓한다. 아이가 공부를 안 해서, 남편이 술을 먹어서, 직장 상사가 꾸중을 해서…,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괴롭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그런 일이 안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마음 관리를 잘하면 괴로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건강하면 병균이 있어도 병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마음의 병을 치료하려면 병의 원인을 알고 그 뿌리를 뽑아야 한다. 뿌리를 뽑는 방법은 이 병이 밖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깨우치는 순간 마음의 병은 단박에 낫는다. 나를 괴롭히는 모든 괴로움에서 즉시 벗어날 수 있다.
이렇듯 환경에서 조건에 따라 생기는 마음의 병은 제멋대로 바뀌는 꿈과도 같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의 행복과 불행이 밖에서 왔다고 착각하고 바깥에 의존해서 행복을 구하고자 애쓴다. 이런 노력이 얼마나 헛되고 부모한 것인지를 모른다. 바깥에 의존해서 잠깐 단맛을 보았더라도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잠시 고통이 멈춘 것이며 새로운 고통의 시작일 뿐이다.
괴로움의 실체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순간순간 미망에 휩싸여 괴로움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괴로움의 바다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간단하다. 괴로워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본래 없다는 이치를 알면 된다.
참회
나는 길가에 핀 풀 한 포기와 같다.
내가 특별한 존재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인생이 괴롭고
그 때문에 결국 특별하지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마음의 상처가 깊은 사람에게 제일 쉽고 근원적인 치료 방법은 참회다. 참회란 단지 잘못을 뉘우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본래 잘하고 잘못한 바가 없는 도리를 아는 것이다. 내가 어리석고 무지해서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모든 일은 나로부터 나에게 돌아온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 이치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분별해서 괴로움을 만들어놓고 상대가 나한테 괴로움을 주었다고 착각한다. 내 괴로움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바로 알고, '내가 생각을 잘못해서 당신을 미워했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참회의 길이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당신은 잘하고 내가 잘못했다'는 마음으로 참회하면, 이것은 또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그 대상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아무리 참회의 절을 해도 억울한 마음이 사리지지 않는다. 마음 밑바닥에는 '그래도 내가 잘했는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잘하고 잘못함이 본래 없음을 깨우쳐야 한다.
행복과 불행은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으면 천하 그 어떤 것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세상 그 어떤 것을 보아도 부럽지 않다. 자신이 이미 스스로 온전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용서할 일도 용서받을 일도 더 이상 없게 된다.
용서할 사람이 남아 있다는 것은 내가 옳다는 것을 아직 움켜쥐고 있는 것이므로 내 수행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그것은 아직도 꿈에서 덜 깬 상태다. 미워할 사람이 없어야 할 뿐 아니라 용서할 사람도 없어야 한다. 미운 사람도 용서해 줄 사람도 본래 없기 때문이다.
억울함이 있다는 것은 내가 지은 바 인연을 알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지, 누가 나를 억울하게 한 게 아니다. 나에게 분함이 있다는 것은 내 허물을 알지 못하고 덮어두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지 누가 나를 분하게 한 게 아니다. 나에게 억울함과 분함이 일어날 때, 내 마음의 뿌리를 잘 살필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에게 참회 시간은 아주 중요하다. 참회를 일상적으로 그리고 정기적으로 하게 되면 마음속에 쌓인 상처의 감정이 오래 가지 않게 된다.
남을 미워하면 누가 괴로울까? 남을 미워하고 화내고 짜증을 내면 내가 괴롭다. 참회는 나를 아름답게 가꿔나가는 방법이다. 내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다. 너와 나의 잘잘못을 따지는 건 참회가 아니다. '옳고 그러다는 것이 본래 없음'을 자각하는 것이 참회다.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괴로움이 생겼으니, 본래 옳고 그른게 없다는 걸 알고 그 자리에서 놓아버리면 괴로움은 즉시 사라진다. 그럴 때 편안함과 행복, 자유의 길이 열린다.
이렇게 참회 수행을 하면 피해의식이 없어진다. 피해의식이란 자기보호 심리에서 생긴다. '나는 길가에 핀 풀 한 포기와 같다' 이렇게 자신이 별 게 아닌 줄 알면 세상사에서 상처받을 일이 없다. 내가 특별한 존재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인생이 괴롭고, 결국 특별하지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빈 마음으로 바라보기
손에 든 컵이 뜨거운 줄 알면 바로 그냥 놓듯이
꿈인 줄 알면
바로 그냥 깨어나면 된다.
모든 현상은 그저 하나의 사건일 뿐 거기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면 거기에는 괴로워할 만한 것이 없다. 다만 그것을 보고 내가 괴로워하거나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킬 뿜이다. 그러니 자기 마음을 잘 관찰해야 한다.
그러나 일단 억울함이나 분함 같은 부정적인 마음이 일어났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정적인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한다고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억울함이나 분함이 일어나면 억울함이나 분함이 일어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그런 마음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한 마음이 이미 일어나 버렸을 때에는 일어난 그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괴로움이 일어날 때에는 괴로움이 일어나는 자기 마음을 잘 알아차려야 하고, 이미 일어나 버렸을 때에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거부한다고 해서 괴로움이 일어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다. 거부하려는 데에서 다시 또 새로운 괴로움이 생길 뿐이다.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쁜게 아니다. 설령 깜빡 내 생각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화를 냈다 해도 그것마저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그렇게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또 현재를 놓치게 되어 점점 더 괴로움에 빠져들게 된다. 늘 현재에 깨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노력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노력하고 애쓰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언제까지 하는 식의 단서가 따라붙게 마련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어떠한 전제나 목적을 두지 않고 '그냥 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괴로움苦고 즐거움樂의 윤회가 끊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되풀이된다. 언제까지 이런 일을 되풀이하며 살아야겠는가.
손에 든 컵이 뜨거운 줄 알면 바로 그냥 놓듯이, 꿈인 줄 알면 바로 그냥 깨어나면 된다. 준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즉시 행하면 된다. 바로 지금 일어나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내려놓으면 된다.
그렇게 하고 안 하고는 모두 자신의 뜻이다. 그렇게 살 것인지 살지 않을 것인지는 자기 선택의 문제다. 지금 사는 그대로 사는 게 좋을 것 같으면 그렇게 살아도 된다. 자기 인생이니 어떻게 살든 괜찮다. 다만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모두 내 스스로 선택한 것임을 알고 자기 인생에 대해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
진정한 기도는
욕망의 불덩어리를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면 불상 앞에서 무릎 아프게 절을 할 필요도 없다.
지금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다른 사람보다 좋은 집에서 살아야 되는데, 더 많은 돈을 가져야 되는데,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야 하는데 그것이 채워지지 않아서 괴로운가? 왜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고 큰집이 있어야 되는가?
괴로움은 물질뿐 아니라 사람 때문에도 일어난다. 부모나 자식, 친구나 애인, 남편이나 아내 때문에 괴롭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은데 부모님과 뜻이 맞지 않으면 부모를 거스르기 어려워 괴롭다. 차라리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대로 하겠는데, 부모님이 나에게 베푼 은혜가 너무 커서 차마 말을 못 할 때가 맣다. 그러나 부처님은 모든 괴로움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려면 '내 아내다, 내 자식이다,내 부모다'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빨갛게 달구어진 쇠공이 예뻐서 손에 쥐었다가도 그 쇠공이 뜨거운줄 알면 '앗 뜨거!'하면서 즉시 손을 뗀다. 그런데 사람들은 뜨거운 쇠공을 갖고 싶은 마음과 그 쇠공이 뜨겁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이 두 가지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쇠공에 대한 집착 때문에 뜨거운 쇠공을 다른 손으로 옮겨 잡는다. 그렇게 하면 한 손은 뜨거움에서 벗어나지만 다른 손이 또 뜨거워질 뿐이다.
그렇게 옮겨가는 건 근본적으로 괴로움을 해결한 게 아니다.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괴로움이 찾아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괴로움은 점점 더 커진다.
사람들은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절에 기도하러 찾아간다. 부모 때문에 괴롭다고 찾아갔다가. 이번에는 남편 때문에 찾아가고, 또 자식 때문에 찾아가고, 이렇게 늘 괴로움을 안고 들락거리게 된다.
그러나 기도하면 이런 문제들이 해결된다는 생각으로 기도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진정한 기도는 욕망의 불덩어리를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면 불상 앞에서 무릎 아프게 절을 할 필요도 없다. 욕망을 내려놓지 않으면 괴로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욕망을 왜 생기고, 왜 그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는가?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세 가지 마음 병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뻐할 일이 있어 기뻐하고 힘든 일이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한 행위에 대한 결과다. 이런 행위에 대한 결과를 업보業報라고 한다.
손바닥이 서로 부딫치면 소리가 나듯 여섯 가지 감각기과인 육근(六根:眼耳鼻舌身意)과 감각대상인 육경(六境:色聲香味觸法)이 부딪치면 느낌이 일어나고, 느낌에 따라 마음이 일어난다. 소리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딪치면 소리가 날 뿐이다.
그런데 내 몸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바깥 경계에 부딫쳐서 일어나는 느낌에 따라 좋고 싫고 하는 갈애渴愛가 일어나고, 좋으면 당기고 싫으면 멀리하는 데서 행行이 일어난다. 그 행에 의해 업장業障이 형성되고, 업장은 또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켜 습관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
물 위로 뜨는 돌을 보았느냐
누구에 의해 천당에 가고, 누구에 의해 지옥에 가고
누구에 의해 괴로워지고, 누구에 의해 기뻐지는 게 아니다.
젊은 제자 가미니가 부처님께 찾아와 물었다.
"부처님, 브라만들이 말하기를, 브라만이 기도해 주면 사람이 죽은 뒤에 좋은 데에 태어난다고 합니다. 설령 그 사람이 살아생전 나쁜 짓을 했어도 브라만이 제사를 잘 제사주면 그 죄가 다 없어져 천국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가미니야. 브라만들이 그렇게 말하더냐? 내가 네게 보여줄 것이 있으니 따라오너라."
부처님은 가미니를 연못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돌을 하나 집어 연못 속으로 던졌다.
"가미니야! 돌이 어떻게 되었느냐?"
"물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그렇다면 말이다. 브라만이 이 연못가게 쭉 둘러서서 '돌아, 물 위로 떠올라라! 물 위로 떠올라라!' 하고 빈다고 돌이 물 위로 뜨겠느냐?"
"안 뜹니다."
"왜 안 뜨느냐?"
"돌이 무거우니까 밑으로 가라앉는 게 당연하지요!"
"그렇다. 무거운 것이 물 밑으로 가라앉는 건 당연한 이치다. 그처럼 어떤 사람이 살아 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고 남의 물건을 훔치고 음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삿된 소견을 갖는다면, 이러한 언행으로 말미암아 지은 업은 검고 무거워서 마치 돌이 밑으로 가라앉듯 저절로 아래로 내려가 지옥에 가게 되느니라! 브라만이 아무리 천국에 나게 해달라고 제사를 지내며 빈다고 천국에 나는 게 아니니라."
그러고는 부처님은 다시 기름 항아리를 연못에 던져 넣고는 긴 막대로 항아리를 쳐서 깨뜨렸다. 그러자 항아리 속에 있던 기름이 흘러나와 물 위로 둥둥 떠나녔다.
"가마니야, 어떠하냐?"
"기름이 물 위로 떴습니다."
"그렇다면 브라만들이 연못가에 둘러앉아서 '기름아, 물 아래로 가라앉아라! 물 아래로 가라앉아라!' 하고 빌면 기름이 물 아래로 가라앉겠느냐?"
"가라앉지 않습니다.
"왜 가라앉지 않느냐?"
"가벼운 것이 위로 뜨는 게 자연의 이치인데 빈다고 가라앉겠습니까?"
"그렇다. 그처럼 사람도 살아 있는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않고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고 음행을 행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삿된 소견을 갖지 않는다면,즉 죽어가는 생명을 보면 살려주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베풀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면 기쁘게 해주고 진실을 말하고 바른 소견을 갖는다면, 그가 지은 업은 희고 가벼워서 마치 기름이 물 위로 떠오르듯 저절로 위로 올라와서 천상으로 가게 되느니라!"
인연법
지은 인연의 과보는
깊은 바다 속에 숨는다 해도
깊은 산속에 숨는다 해도 피할 수 없다.
고통은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고통은 내가 지은 인연따라 일어난다. 부모로부터 시작된 것, 태중에서 시작된 것, 유아기 때 형성된 것, 어릴 때 형성된 것… 어제부터 시작된 것, 방금 전에 시작된 것… 이렇게 수없이 많은 인연이 겹치고 겹쳐 지금 작용하는 것이다. 꼭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이 인연과보因緣果報 즉, 어떤 원인과 조건으로 결과가 왔다는 것을 알면 세상에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된다.
돌은 물에 넣으면 가라앉고 기름은 물 위에 뜬다. 물보다 무거운 것은 가라앉고 가벼운 것은 위로 뜨는 것, 이것이 자연의 이치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이 나는 것,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것… 이런 자연의 원리를 인연과라고 한다.
이런 인연과의 법칙인 인연법은 내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알든 모르든,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법칙이다. 나쁜 짓을 해놓고 좋은 결과를 바라는 것은 인연법에 어긋난다. 콩 심어놓고 팥 나기를 바라는 것, 돌이 물에 뜨기를 바라고 기름이 물에 가랑앉기를 바라는 것은 모두 인연법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인연과에서 '인因'은 직접적인 원인을 말하고 ''연緣'은 간접적인 원인, 조건을 말한다. 콩 씨앗이 인이라면 수분이나 흙, 거름, 햇빛, 공기 등은 연이다. 씨앗은 흙, 물, 공기 등과 만나야 싹이 트는 것처럼 , 인과 연이 만나서 '과果'를 만든다.
무인무연無因無緣도 무과無果요. 유인무연有因無緣도 무과無果라 했다. 씨앗이라는 인이 없으면 아무리 기름진 밭이라도 싹이 날 수 없고, 밭이라는 연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싹을 틔울 수 없다. 인과 연이 화합할 때에야 비로소 과가 생긴다. 어떤 때에는 인이 더 큰 작용을 할 때가 있고, 또 연이 더 큰 작용을 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어느 쪽이든 하나가 없다면 과는 생긱지 않는다.
세상 모든 존재의 연관
나와 너, 우리는 늘 누구와 연기되어 있다.
내가 없는데 너만 따로 있을 수 없고
네가 없는데 나만 따로 존재할 수 없다.
인연과의 법칙이 성립하는 까닭은 이 세계가 '연기緣起'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생겨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함으로 저것이 멸한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이 연기법으로 말미암아 인연법이 성립한다.
삶을 행복하게 살려면 연기법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물론 연기법을 몰라도 착한 행위를 하면 좋은 과보가 오고 악한 행위를 하면 나쁜 과보가 오는 것이지만, '왜 그런 법칙이 성립하는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자식은 부모와 연기되어 있고, 남편은 아내와 연기되어 있으며, 스승은 제자와 연기되어 있다. 나와 너, 우리는 늘 누구와 연기되어 있다. 내가 없는데 너만 따로 있을 수 없고, 네가 없는데 내가 따로 존재할 수는 없다.
너와 내가 인연 화합으로 만나 한쪽은 아내가 되고 다른 한쪽은 남편이 된다. 인연이 다해 흩어지면(사별하거나 이혼하면) 아내 또한 없어진다. 내 몸 자체는 남편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아내와 연관되어야 남편이 되고, 자식과 연관되어야 아버지가 된다.
몸 자체는 무자성無自性이라, 본래의 성품이 없다. 연관해서 성품이 일어나고 연관이 끊어지면 그 성품도 사라지는 것이지, 본래 고정된 단독적이고 불변하는 어떤 성품이란 것은 없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콩의 싹이 트는 거나 내가 태어나는 건 다 인연 따라 이 세상에 오는 것일 뿐이다. 서로 인연 따라 결합해 만나면 하나의 새로운 현상을 이루고 흩어지면 공空으로 돌아간다.
나와 너 또한 인연 따라 아내와 남편이 되어 일정 시간 동안 그 인연을 유지하며 생활한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 물이 되면 일정 기간 물의 상태로 있듯이 일정 기간 동안의 남편과 아내가 유지될 뿐이다. 이 상태는 결코 영원하지 않다. 인연이 다해 흩어지면 그 성품은 사라진다. 인연 따라 세상을 떠나가는것이다. 내 생각, 내 육신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존재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와 같이 인연 소생한다.
좋은 인연, 나쁜 인연
세상살이에는 좋은 인연 나쁜 인연이
따로 있는 것 같지만
깨달음의 길에는 좋고 나쁜 인연이 없다.
여기 콩이 한 알 있다. 이 콩이 책상 위나 모래밭에 떨어지면 싹을 틔우기가 어렵지만, 기름진 밭에 떨어지면 싹이 틀 것이다. 이렇게 좋은 인연으로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만날 때 잘 만나야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잘 만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욕심으로 눈이 어두워진 중생의 눈에는 기름진 밭은 더러워 보이고 거름 없이 잘 다름어진 모래밭은 깨끗하고 좋아 보여 애초에 씨앗을 잘못 뿌리는 경우가 많다. 마치 쥐가 색깔 좋고 좋은 쥐약 넣은 음식을 찾아 먹는 것처럼 우리 중생 사는 모습이 그렇다. 외모다 재물이다 권세다 명예다 그렇게 온갖 것에 욕심을 내어 그 욕심 따라 살아간다.
이렇듯 좋은 인연을 못 맺는 건 욕심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맺는 관계 중 가장 이기적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부부 관계다. 친구는 우리를 보고 사귀고, 사업 동업자를 고를 때는 신용을 따지는데, 결혼할 때에는 이해타산의 명세서가 수도 없이 많아진다.
그렇게 욕심과 이기심으로 온갖 것을 챙기면서 결혼하니 좋은 인연을 만나기 힘들다. 또 이렇게 엄청난 이해관계와 기대를 갖고 만나니 조금만 어긋나도 악연이 되기 쉽다. 행복하려고 결혼했는데 결혼이 도리어 고통과 재앙의 근본이 된다. 그러니 결혼하려면 욕심을 버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수행부터 해야 된다. 수행해서 안목이 열려야 한다.
그렇다면 이미 지어진 인연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콩이 자갈밭에 떨어졌으면 왜 하필 여기 떨어졌냐고 한탄만 하고 있으면 될까? 물론 아니다. 어떤 밭에 덜어졌든 우선 싹을 틔워야 한다. 만난 인연을 풀어가야 된다. 나쁜 인연이면 좋게 풀고, 좋은 인연이면 더 좋게 만들어야 한다.
나쁜 인연이면 '안 되겠구나, 이걸 포기기하고 저쪽으로 가야겠다' 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넘어가야 될 길이다. 행복과 자유를 얻으려면 나쁜 인연이든 좋은 인연이든 양쪽을 다 풀어야 한다. 특히 나쁜 인연을 빨리 풀면 빨리 풀수록 깨달음의 길이 가까워진다.
세상살이에는 좋은 인연 나쁜 인연이 따로 있는 것 같지만, 깨달음의 길에는 좋고 나쁜 인연이 없다. 이왕 만난 인연은 좋든 나쁘든 그 인연을 좇아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서 그 인연을 좋게 풀어야 한다. 인연을 지을 때에는 좋은 인연을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미 맺은 인연에 대해서는 좋네 나쁘네 분별하지 말고 좋은 방향으로 잘 풀어야 한다.
삶은 이미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지겠다고 생각하면
이미 부처의 길로 한 발 다가간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일기예보를 보고 배가 출항하므로 그만큼 사고가 줄어들었다. 해일이나 태풍 자체를 막지는 못할지라도 미리 예상하고 대처할 수 있게 되었으니 자연 재해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줄었다.
마찬가지로 인연과의 법칙을 알면, '이런 마음을 가지면 이런 괴로움이 오겠구나' 하고 미이 예측할 수 있어 인연을 짓지 않아 과보를 피할 수 있게 된다. 또 이미 인연을 지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런 과보를 받고 넘어가야 될 일이다.' 하며 의연하게 대처해 나갈 수도 있다.
삶은 이미 우리 앞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 자신의 모든 문제와 고뇌를 스스로 감싸 안을 생각을 해야 한다. 좋지 못한 인연으로 만난 사람이라도 내가 보살의 마음을 내면 그 인연이 바뀐다. 세상에는 본래 정해져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괴로우면 부모나 남편, 아내, 자식 등 주위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 그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의 행·불행이 좌우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내가 내 살의 주인이 되는 길은 '이 모든 것이 다 내 탓이고 내가 지은 바대로 온다'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지겠다는 생각을 하면 이미 부처의 길로 한 발 다가간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내 책임이다. 내 인연으로 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보살의 마음이다.
기도할 때에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내 앞에 놓은 장벽이 무너진다. 장벽이 무너지면 가려져 있던 실상이 여실히 드러나므로 어떠한 문제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내 모습을 알았다. 내 업장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이미 괴로움에 대한 해결책이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자신의 업장을 소멸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실천의 문제만이 남았을 뿐이다.
자기가 저지대에 살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홍수가 나면 무방비 상태로 수해를 당한다. 또한 자기가 사는 곳이 저지대임을 알면서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수해를 당한다. 저지대에 살면 미리미리 둑을 쌓거나 지대를 높이는 보수를 하면 된다. 아니면 이사를 갈 수도 있다. 그러면 수해를 면할 수가 있다.
그러니 지대가 낮거나 높은 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지대가 낮으면 그에 대한 대비를 미리미리 하면 된다. 또 설령 대비를 다 마치기 전에 비가 오더라도 홍수가 날 걸 미리 알았으미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 훨씬 쉽과 안전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다. 이것이 수행이다.
똥 눌 때 똥 누고, 밥 먹을 때 밥 먹고
더 이상 나는 중생이 아니다.
나는 부처가 될 사람이다.
부처가 매일 걱정이나 하고 아옹다옹하며 살아서야 되겠는가.
인생살이를 신나게 하려면 탁 트인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세상을 사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가. 마치 등산하는 것처럼 인생을 살면 된다. 이 골짜기도 가보고 저 골짜기도 가보며 살면 되는 것을 세상을 내 울타리안에 가두어놓고 바라보려 하니 그토록 살기가 괴롭고 힘든 것이다.
갈까 말까, 할까 말까, 쓸데없이 머뭇거리고 고민할 시간이 없어야 한다. 인생살이가 아파도 아픈 것을 좀 미루어놓을 만큼 재미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 세상을 신나게 살 수 있다. 이렇게 신나게 세상을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또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가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매일매일 인생을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죽고 싶다고 징징거리다가 막상 죽을 때가 되면 죽기 싫어서 또 괴로워한다. 똥 눌 때 똥 누고 밥 먹을 때 먹을 때 밥 먹어야 하는데, 똥 누러 가서는 밥 생각 하고 밥 먹으러 가서는 똥 생각 하는 것처럼 세상을 거꾸로 살아간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이 고통스럽다고 남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인생을 산다.
나도 부처가 되겠다는 원을 한번 세워보라. 더 이상 우리는 중생이 아니다. 우리는 부처가 될 사람이다. 부처가 매일 걱정이나 하고 아옹다옹하며 살아서야 되겠는가. '나는 부처다. 절대 일그러진 모습으로 째째하게 살지 않겠다'는 원을 세우고 힘차게 살아가야 한다.
네 발 밑을 보라
신발을 벗을 때
마음이 신발 벗는 데 있지 않고 방에 먼저 가 있으면,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게 된다.
대학 시험치는 학생에게 수능 시험 실패는 굉장히 큰 사건이다.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를 하게 된다면 하늘이 곧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10년, 20년이 지나서 돌아보면 재수했느냐 안 했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재수하면서 배우는 것도 많다.
또 인생의 길이 꼭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는 것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A대학에 가려고 했는데 B대학에 가서 더 잘될 수도 있고, A대학에 못 가고 재수를 해서 C대학에 간 게 더 잘된 일일 수도 있다. 또 대학에 가지 않고도 자기가 가진 재능을 살려 더 크게 성공할 수도 있다.
이렇듯 길은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성공은 여러 갈래의 길을 통해 긴 시간을 두고 열려 있다.
만약 수능 점수가 낮게 나왔다면 재수할 것인지 말 것인지 지금 당장 선택할 필요가 없다. 일단은 현재 성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학에 응시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도 떨어지면 그때 재수해도 된다.
합격했다면 그 대학에 다녀도 되고, 휴학하고 재수해도 되고, 학교를 안 다녀도 된다. 그 대학에 계속 다닐 건지 안 다닐 건지 그것은 한 달 뒤에도 얼마든지 선택할 기회가 있다. 현재 성적으로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다고 앞뒤 생각 없이 포기하고 재수하기로 작심했다가 다음 해에 수능 성적이 더 떨어지면 '그때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에 갈 걸' 하고 후회하게 된다.
이렇듯 현재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면 그다음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그 대학을 다니는 것과 그만두고 재수하는 것 대학을 아예 다니지 않는 방법 중 어느 하나라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선택하려고 조급하게 굴면 그만큼 선택의 폭도 줄어든다.
'아이고 그때 그럴걸' 하는 것은 현재에 깨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드는 생각이다. 사람들은 흔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과거에 선택을 잘못했음을 깨닫는다. 그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때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외출했다가 돌아와 신발을 벗을 때, 마음이 신발 벗는 데 있지 않고 방에 먼저 가 있으면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게 된다. 이는 내가 현재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네 발 밑을 보라'고 한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왜 하나밖에 없는 내 인생을 희생하는가.
인생을 후회 없이 살기 위해
사물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언젠가 결혼을 앞두고 찾아온 사람에게 '그 사람과 왜 결혼하려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사람이 이러저러해서 결혼하려 한다는 이유를 듣고는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스님은 자기만 결혼 안 하면 되지 왜 남까지 못하게 하냐'며 농담 투로 항의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결혼하기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한 이유는, 그의 배우자 선택이 그가 생각하는 결혼의 목적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혼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사람을 바꾸든지, 그 사람과 결혼하려면 결혼 목적을 바꾸든지 해야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선택이니 그만 두는 게 좋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결혼은 하지 않아야 하는 걸까? 그렇다. 현재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 않으려면 혼자 사는 게 낫다.
하지만 꼭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면 자기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내 고집, 내 생각을 바꾸라는 뜻이다. '내 인생도 내 맘대로 다스리지 못하니 다른 사람 인생에 절대 간섭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거기에 맞게 결혼 생활을 하라는 말이다.
부부가 더 이상은 못 살겠다고 찾아와 상담을 할 때 대개 스스로가 답을 가지고 온다. 스님한테 가봐야 이혼하라는 소리를 안 하고 '어쨌든 참고 살아라' '여자가 참아라'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한다. 천만에, 그렇지 않다. 내가 혼자 사는 사람인데 왜 남에게 억지로 결혼 생활을 하라 하겠는가. 사람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든가 결혼하지 않아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아집일 뿐이다.
이혼하려는 부부는 대개 자식 걱정과 배우자에 대한 원망이 마음 밑바닥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이혼에 이르게 된 갈등의 원인이 부부 한쪽에만 전적으로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이런 자식 걱정과 배우자에 대한 원망과 자기모순의 생각에 빠져 이혼을 하게 되면, 이혼 뒤에 닥치게 마련인 여러 가지 상황과 시련 속에서 '아! 내가 그때 잘못 생각했구나' 하고 후회하게 된다. 이런 후회가 깊어지다 보면 삶이 더욱 괴로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혼하기 전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 마음을 하나하나 깊이 살펴봐야 한다. 그렇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았는데도 도저히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면, 그때는 이혼해도 된다. 그 누구도 행복해지려고 결혼했지 불행해지려고 결혼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에 자기 생각으로 상대를 재단하거나 추측하지 말고, 이런저런 상상으로 그림을 그리며 괴로워하지 말고, 담장 밖에서 다른 집안 일을 바라보듯이 자신의 부부관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배우자를 그렇게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려면 내가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 보아야 한다. 남편은 아내의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 하고, 아내는 남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봐야 한다. 이는 무조건 배우자 입장이 되어 참고 살라는 말이 아니다. 희생하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왜 하나밖에 없는 내 인생을 희생하는가. 내 인생을 희생하라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을 보다 후회 없이 살기 위해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라는 말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제대로 결정해 나중에 후회하는 삶을 살지 말라는 말이다.
이는 부부 관계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식과 부모 관계에서도 , 친구 사이에도, 직장에서도 갈등이 생기면 우선 상대방의 처지에 서서 보라. 상대편 처지에서 보지 못하면 절대 객관적이 될 수 없다.
객관적이라는 것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렇게 객관적으로 제대로 보고 그다음에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상대가 이해되면 화해하고 사는 것이고, 아무리 살펴봐도 이 점만은 꼭 해결해야겠다고 생각되면 해결하면 된다.
사랑이 왜 미움이나 슬픔으로 바뀌는가
나는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내 고집으로 그에게 무엇인가를 윽박지르고 있지는 않는가?
한 아이가 개울에서 게 한 마리를 잡아 다리 하나를 잡아떼었다. 같이 놀던 아이들이 그걸 보며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했다. 친구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아이는 게의 다리를 다 떼어 개울에 던지고는 다른 게을 잡아 다시 다리를 떼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 물었다.
"얘들아, 누군가가 너희 팔이나 다리를 잡아서 뗀다면 어떻겠느냐?"
"그야 굉장히 아프겠죠."
"누군가가 너희 팔과 다리를 잡아떼는 것을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이 본다면 어떻겠느냐?"
"굉장히 슬프겠죠."
"그래, 게에게도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이 있단다. 다리가 다 떼어진 게를 보고 다른 게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느냐."
그제서야 아이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얼마나 나쁜 짓인지 깨닫게 되었다.
"잘못했습니다. 저희가 몰랐습니다. 부처님, 다시는 이런 장난을 하지 않겠습니다."
부처님이 말했습니다.
"잘못한 줄 알면 됐다. 알았으니 이제 앞으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단다."
무지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괴롭히는 어리석은 중생의 삶을 일깨워주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한 마리 게일망정 그 게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를 동반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가? 상대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사랑이기보다는 소유욕, 탐욕, 아집 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랑은 언제든지 미움이나 슬픔으로 바뀌기 십상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사랑은 곧바로 미움으로 바뀐다.
사랑이 왜 미움이나 슬픔으로 바뀌는가? 그것은 사랑이 상대에 대한 이해가 아닌 상대를 자기 식대로 소유하려는 아집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은 아주 쉽게 고통으로 바뀐다.
나는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내 고집으로 그에게 무엇인가를 윽박지르고 있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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