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이런 삶을 모르고
지금까지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계속 고집하고 있었더라면...
생각만해도 아찔할 때가 있단다.
분명히 딸들한테
'꼰대아빠'로 불리었을지도 모른다며
물질적으로 풍족하게는 못해줬지만
천만다행으로 여긴단다.
― 글·그림 김지연『여보, 나와 살아줘서 고마워』중에서 ―
여보, 당신에게 고마워.
다른 이유는 없어.
그냥 나랑 살아줘서
내 옆에 있어주는 당신이라서
고마워.
꼰대는 되지 말 것
가까운 사람들끼리 가장 상처를 많이 주는 것 같다. 특히 아끼는 마음, 존중하는 마음 없이 그냥 가까이에서 서로 자주 부대껴야 하면 더욱 그러하다.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고부 갈등은 꼰대의 대표적이 예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시어머니니까, 난 이래도 돼. 넘 무조건 다 참아." 이런 식으로 평생을 소모적으로 보내기도 한다. 꼰대의 대표적 특징이 본인은 상대방을 존중할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하면서 상대방에게는 무한한 이해와 포용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집안의어른만 꼰대 짓을 하는 것이 아니다. 새파랗게 어린 시누이나 시동생, 시숙도 그러하다.
꼰대 짓이라는 것이 기묘하게도 할수록 중독성이 생기는데, 당하는 사람의 괴로움도 오죽하려니와 정작 꼰대 짓을 하는 사람도 인생의 만족도 측면에서는 매우 불행하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사위 입장에서는 처가에서 만난 인연에게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서 꼰대가 될 확률이 높다. 아무래도 나이가 어린 사람을 보면 좀 만만하고, "네가 뭘 알아!" 하면서 버럭 훈계부터 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과연 그것이 그 사람에게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큰소리부터 치고 싶어진다.
상대방의 열정을 치기라고 몰아붙이며, 가까스로 쌓아온 소중한 경험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묵살해버리기도 한다. 비록 컴퓨터, 얼리어답터 등을 다룰 때는 좀 약해지지만, 그래도 젊은 이라면 무조건 우위에 서고 본다.
부부간에도 연장자가 꼰대 짓을 하기가 쉽다. "어디 남편한테 감히!" "하늘같이 우러러봐도 모자랄 판에!"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가 하는 오만 진상짓을 합리화시키는 일이 많다.
원래 꼰대의 눈에는 마음에 차는 게 없다. 스스로 거울을 봐도 장점을 못 찾을 정도다. 무엇이든 마음에 안 들고, 부족하고, 단점 밖에 안 보이고, 오만가지 불평불만만 가득하다. 상대방에 듣기 싫어하는 잔소리만, 한낱 영양가없는 잔소리만 늘어놓기 십상이다. 사실상 꼰대랑은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스스로 매우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스스로 많이 갖췄다고 생각하는 사람, 스스로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스스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꼰대다. 특히 한때의 열정으로 스스로 원하는 결과에 강한 성취감을 느낀 사람이 더하다. 그래서 개천에서 난 용이 무섭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꼰대는 상대방이 인정을 안하고 객관적 현실을 지적해주면 불같이 화를 낸다.
나이가 들어도 사람은 꼰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멋지게 늙는다는 것도 꼰대가 아닌, 젊게 나이드는 것이다. 꼰대가 된다는 것은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한 쪽 귀의 청력을 잃는 것과 같다. 상대방의 말이 들리지 않고 상대방으로부터 사랑받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어떤 사람도 타인을 먼저 존중하지 않고 행복에 이를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찍어서 끊임없이 괴롭힌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힘들다고 호소해도 귀에 안 들어오는 것은 아무리 괴롭혀도 부족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엄청난 갈증을 느끼면서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다는 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다.
어떤 성취를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요구된다. 남의 일이라면 사소하게 느껴지는데, 그것이 내 일이라면 심각해진다. 누군가가 숫자보다도 문자가 더 많은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수학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고 하자. 남의 일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내가 당장 이루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보라. 정신이 다 아득해진다. 그래서 밤낮으로 공부해서 난해한 수학 만점을 받았다면, 엄청난 성취감을 느낄 것이고 수학에 관한 꼰대가 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꼰대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걸어온 과정이 험란했기 때문이다. 독한 시집살이를 경험한 며느리가 지독한 시어머니가 되고, 부모의 외도를 겪으며 성장한 사람이 바람둥이가 된다. 가령 아들을 몹시 사랑한 어머니가 며느리를 들여 며느리를 구박하는 것도 그간 살아오는 동안 아들을 양육하는 것이 마음 속 무의식까지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스스로 훌훌 털고 나는 비록 상처받았으나 다른 사람에게만큼은 이런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자기 정리가 부족한 사람들이다.
무언가를 경험하고 그것을 최종적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목표 달성의 쾌감은 잠시일 뿐 그저 모든 것이 고행이라고 생각이 된다면 최종 지점에서는 고독한 꼰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누구나에게 주어지는 인생은 고행길이다. 다른 사람은 다 쉽게 사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예의라는 게 얼마나 편하냐면 다른 사람들이 걷는 가시밭길을 모른 척 할 수 있어서 좋다.
사는 게 힘들어도 그럴 듯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꼰대는 되지 말자. 내가 이 사람의 남편이라서, 내가 이 사람의 아내라서 함부로 행동하지 말자. 나 정도니까 이 정도는 해도 된다는 생각은 버리자. 상대방을 짓누르면서 내가 이렇게 존중받아야 된다는 생각, 내가 이렇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자. 내 모습은 어떤지 모르면서 상대방만 비평하지 말자.
매일 아침 해가 새로 뜨는 것은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다. 머릿속에 남겨둔 지나온 길이 짐이 되지 않게 하자. 컴퓨터도 정기적으로 디스크 조각 모음을 하고 디스크 정리를 해야 빨라진다. 꼰대가 된다는 것, 필요없는 파일이 너무 많이 쌓여서 컴퓨터가 안 돌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언제나 배우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그 사람에게 내 모습이 어떻게 비칠 지 생각하는 그런 설레는 청년이 되자.
가족간의 내면 채우기
세상에는 보여지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특히 보여지는 것은 매우 와닿는데, 말그대로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의 눈을 의식해서 보여지는 것에 치중한다. 소위 노력해서 얻는 명예도 일종의 보여지는 것이다.
출생과 동시에 얻어지는 가족 관계는 혈연으로 운명이지만, 결혼으로 맞이하는 부부는 다르다. 그러다보니 여러 조건과 이해관계가 들어가는 것도 현실적이다.
타인들의 눈에 부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한번쯤 누구나 꿈꾸어본 일이다. 남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며 선망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성공한 삶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소위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물건에 집착하기도 한다. 무리해서 또는 노력해서 얻은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은 나 자신으로 하여금 만족감과 안도감, 교만함을 부르기도 한다.
보여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타인의 이목과 인정을 매우 중요시한다. 어쩌면 모든 판단력의 중심을 타인에게 던져두었기 때문에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생각의 중심이 없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채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남들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삶이 어떤지 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이력서를 쓸 때도, 사람을 소개할 때도 객관적인 근거를 들어야하기 때문에 대부분 눈에 보여지는 것, 겉으로 드러난 것을 위주로 기술한다. 그 사람을 파악하기에는 많은 구멍과 함정이 있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늘 인정 받고 스스로 보여지는 것에 집착을 하다 보면 가족 간에도 그러하다.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을 위주로 생활의 계획을 짠다. 타인으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싶고 떵떵거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서 내면을 가꾸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튼튼하게 할 만한 노력을 지나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과시하고 우위에 있으려고 하는 생활 패턴을 가지게 된다.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도 너무 많아서 인생에 다 채워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바쁘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챙길 여력이 없다. 하지만 외적으로 드러난 요소로만 사람을 대한다면, 대화는 묘하게 겉돌고 오래지 않아 신물이 난다. 또한 외적인 요소에서 밀리는 인상을 받으면 허언도 거침없이 한다. 충분한 감정적 교류를 통해서 내면적으로 강해지는 관계를 만들어갈 때 서로에게 힘이 된다.
남들이 보기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만 해도 상당히 힘이 든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그만한 성취를 이루기도 쉽지는 않다. 하지만 애써 쌓아놓은 소중한 경험들이 시간이 갈수록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겉을 포장하는 데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속을 구멍 없이 채워나가야 한다.
쇼윈도 식으로 타인의 이목에 민감한 부모를 둔 자녀는 그 또한 비슷한 성향을 갖게 되고, 사람 자체로서 인정받기 보다 외적인 요소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내면을 키우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서 승부하려고 하지 못하고 겉모습이라는 거대한 허울에 숨은 채 쉽게 교만해진다. 그러한 교만함은 인성으로서 가장 먼저 드러난다. 또한 그럴수록 인생의 풍파가 찾아오면 맞서지 못하고 힘없이 쓰러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챙기기 어렵다. 명예나 스펙은 뻔히 드러난 것이라서 어떻게 접근은 해보겠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보이는 것에 대한 애착을 조금 뒤로 하고 사람 자체로서 애정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겉으로 조건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 남들 보기에 으쓱한 삶을 살게 되었다면, 그 후광에만 기대어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사람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날 그 사람이 빨리 은퇴하게 되었다고 해도, 어떤 계기로 인해서 실패하게 되었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내게 소중한 사람이어야 한다.
타인의 시선보다도 가족이 더 우선적이고 소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느날 내 곁은 떠난다고 해도 내 삶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끄덕도 없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가진 경우다.
겉이라고 하는 것은 타인과 나를 구분 짓는 요소다. 그리고 내면이라고 하는 것은 오롯한 인생 그 자체다. 내면을 평가받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무심히 지나치는 예가 많다. 아무리 내면적으로 꽉차 있어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초라하면 무시하기 일쑤다.
겉모습에 치중할수록 속은 더욱 비어간다. 나를 판단하는 칼자루를 남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더욱 의미 없는 과시를 한다. 타인의 겉모습만 보고 쉽게 부러워하고 무시하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사람들은 사소한 말에도 잘 흔들린다. 반면 내면을 가꾸는 것은 모든 칼자루를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남한테 자랑하지 않아도 좋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먼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남들이 부러워해주길 바랄 필요가 없다.
내 겉모습이 아무리 화려하다고 한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지금 어떤지 그것부터 생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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