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잎' 따서 행복한 생각을 우리며 사는 봄날이 되어 "각시야! '찻잎' 잘따그래이!"
새벽부터 우리 부부가 차밭에서 일하면 찻잎을 많이 따라는 말보다 찻잎을 잘(곱게)따라고.ㅋㅋㅋ
- 김형효·한승원 외 지음『 참선 잘하그래이 』에서 -
성철 스님 열반 20주기 추모 에세이
이계진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KBS, SBS 등의 방송국에서 삼십여 년을 아나운서로 활약. 2004년 원주 지역 국회의원에 당선. 법정 스님과 함께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설립하고 이십여 년간 봉사활동에 헌신하였다.
나는 부처가 될 수 없음에
"이게 무슨 소리요?"
어느 여름날 어슴새벽, 잠에서 깨어난 우리 내외는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내 귀에 팽팽한 장판 위로 뭔가가 쉬엄쉬엄 자박거리며 뛰는 소리가 들렸다. 뭘까하고 살며시 일어나 불을 켜보니 어느 틈으로 뛰어들었는지 앙증맞은 청개구리 한 마리가 안방 침실까지 들어와 헤매고 있었다. 어떻게 들어왔담?
빨리 붙잡아서 창밖으로 집어던지라는 아내의 명대로 나는 녀석의 촉촉한 감촉을 손으로 느끼며 창을 열고 잔디밭을 향해 휙 던졌다. 청개구리는 우리 집사람 덕에 갈 길을 제대로 찾았다. 무심이었고,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또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날 아침 그 청개구리는 제 갈 길을 찾아갔지만, 여름 한철이면 나는 방충망을 헤치고 식탁에 날아드는 파리나, 야음을 틈타 집 안으로 날아드는 모기들을 역시 무심히, 아니 당연한 듯 잡아야 한다. 파리, 모기뿐인가? 어떤 때는 현관 앞까지 기어들어 온 뱀을 보면 무서워 몸서리치면서 작대기로 때려서 잡기도 한다. 그리고 그럴 때는 불자로서 살생의 부담을 느끼며 '여기까지 들어온 너희들의 잘못'이라며 일갈한다. 그러나 산목숨을 해하는 죄책감을 어쩔 수 없지만 그것들을 잡지 않고 같이 살 방법 또한 나는 모르겠다. 살생의 이유는 딱 한 가지,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다.
나는 불자로서 산목숨을 마구 죽이지 말라고 배웠다. 잡지 말고 울 밖으로 내쫓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집 가까이에까지 들어온 뱀을 해하지 않겠다고, 울타리 밖으로 쉬쉬 쫓는다는 것은 웬일인지 생각만 해도 '위선' 같아서 하지 않는다. 뱀을 훠이훠이 쫓아낸다?
뱀 문제에 간해서 환경운동가들이 들으면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그들이 사는 아파트 현관 앞에 시도 때도 없이 뱀이 기어들어 오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말일 것이다.
파리, 모기와 뱀뿐인가? 나는 정성으로 심어 가꾸는 정원의 몸통을 조르며 성장을 방해하는 칡덩굴이나 댕댕이덩굴을 그냥 둘 수 없어서 주저하지 않고 잘라버리거나 뿌리를 캐내기도 한다. 그리고 감자밭이나 채소밭에는 작물을 위해 거름을 주고 물도 주면서, 그 밭에 함께 자라는 풀은 '잡초'라는 이유로 김매기하며 뽑아버린다. 알고 보면 채소나 잡초나 생명은 동격인데 말이다. 농사하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게 하듯이 나도 그렇게 한다.
우리 집 앞산은 해발 오백 미터쯤 되는 수미산, 뒷산은 해발 육백팔십 미터쯤 되는 화계산! 이미 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지금2013년 십칠 년째 서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달리면 갈 수 있는 어느 산골에서 꽃과 나무를 가꾸고 적잖은 규모의 농사를 흉내 내며 살고 있다. 앞의 이야기는 모두 그곳에서 일어나는 별로 특별하지도 않은 일들이다.
그곳에서 나는 새소리, 바람 소리를 듣고, 꽃이 피고지고, 눈엽嫩葉이 싹터 활엽闊葉이 되는 것을 보고, 그 너른 잎이 다시 단풍들고 또 낙엽되어 떨어지는 자연의 순환을 보며 즐거움을 느끼고 간혹 그것이 인생공부라 여기며 살고 있다. 그곳에서 그렇게 사는 나를 보고 더러는 '호사' 하며 산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할 이유는 없다.
그 사람들도 '도회의 욕망과 편리함'을 버리고 결단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단지 나는 용기를 내어 먼저 그렇게 결행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곳에서의 그런 삶이 얼마나 힘들고 거칠고 어렵다는 생각은 잘 안 하는 것 같다. 또 전원에서 살려면 부지런해야 하고 가끔은 외롭기도 하다는 것돠 '간과'한 채, 호사하는 거라고만 생각하는 것 같다. 아마도 TV 방송국에서 아름다운 영상으로 찍어다가 잘 편집한 장면만 내보낸 것을 본 탓이리라.
나는 지금 산골에서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 속에서 내가 무엇을 '인생공부'라 여기고, 무엇을 죄짓는 일이라 생각하는지, 무엇이 진정 '산목숨'에 대한 외경이며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사는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법정 스님을 계사戒師로 모시고 살아온 '작은 불제자'인데, 십칠 년 전 내 삶의 터전을 한적한 산골로 옮긴 것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간결한 감동으로 전해주신 계사 스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뜻이었다.
'불제자'라고 말은 했지만 돌아보면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인연이 없는지, 언감 출가수도의 결심은커녕 고민조차 못 했고, 겨우 남들 하는 대로 부처님께 삼배의 예를 드리며 아귀다툼의 세상에서 악다구니를 치며 필부필부匹夫匹婦의 한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 죽는 날까지도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 같다. 겨우 이런 모습으로…… 그렇게 생각하니 스스로 가련하다.
살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일하고, 남보다 일을 더 많이 하면 무언가를 더 얻을 수 있다고 하기에 더 열심히 일하다보니 허명도 날렸다. 그런 나를 보고 꽤 많은 사람들이 성공했다고 말했고 거기에 고무되어 허둥대다보니…… 어느새 초로의 모습이 된 내 인생은 세월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어느 해 어느 순간에 강하게 브레이크를 잡고 내 삶의 궤적을 돌이켜 보면서, 뒤늦은 각성이지만 결코 나는 '성불할 수 없는 존재의 불제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
'성불'을 너무 쉽게들 말하지만, 나는 결코 부처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가끔 '당신도 부처'라거나 '당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말씀을 법문을 듣거나 경전을 통해 읽을 때면 안타깝고 공허한 마음이 든다. 또 가끔은 법회가 끝나고 불제자 대중들이 좌우를 살피며 서로 "성불하세요!"를 외치며 축원할 때, 나는 형편없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성불하세요……"한다.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축원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법당에서 네 가지 서원을 세우는 <사흥서원>을 말할 때마다 나는 혼자서 주저하고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수로 고통받는 중생을 다 건지고, 실타래같이 엉킨 번뇌를 다 끊을 것이며, 어떻게 법문을 다 배우고, 도대체 무슨 재주로 불도를 다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정말 욕망의 세속에서 살며 그렇게 축원처럼 쉽게 법문을 배워 부처가 될 수 있을까? 도저히 불가하다! 그래서 나는 앞서 말한 대로 부처가 되기는 애당초에 글렀음을 안다.
나는 '부처'는 될 수 없으니, 그저 가족을 힘들게하는 미물 정도는 해하되, 그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몇 가지라도 실천하며 살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가 제자인 '법정' 스님의 말씀에 공감해 이 산골에 온 것은 그래서 잘한 일이다.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악업을 덜 쌓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남자가 사는 법'이 아니라 나같이 '부처가 될 수 없는 불자'가 험한 세상에서 사는 법이다.
"삼천 배를 하고 와야 만나주셨다는, 그 스님?" "대통령도 안 만나셨다는, 그 스님?" "잠자지도 눕지도 않고 수행하셨다는 그 스님?"
이런 말들은 보통의 상식으로 믿기지 않는다는 의미의 반문이지만 '성철' 스님을 말할 때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되묻는 스님에 대한 기억의 수식이다. 불교인인 나도 성철 스님은 생전네 뵌 적이 없으므로 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스님 열반 후에 책과 비디오를 통해 스님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존경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감히 말하면, 스님은 지독하게 공부하고 수행하시다 열반하셨다는데,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부처'가 되셨을 것이다. 또 성철 스님 입적 후 십칠 년 만에 열반하신 법정스님도 불제자로서 '부처'가 되셨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몇몇 스님들께서도, 특히 또 한 분, 책 속에만 이름을 남기신 채 현대 한국불교의 전성리 되어버리신 '지허' 스님도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이름 모를 부처'가 되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그' 부처님들은 욕망의 삶을 버리고 출가자가 되셨으니 그것만으로도 존경스럽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혼자 않아 독경하거나 참선 기도를 할 때 차례로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 아득한 옛날의 수많은 부처님, 그리고 저와 동시대를 살다 가신 나무 성철 부처님, 나무 법정 부처님!"을 말하며 그 인연으로 좋은 생각 많이 하고 바른 삶을 살곘다고 서원한다. 나는 부처님 말씀 공부도 별로 하지 못했고, 그래서 악업이나 더 쌓지 않고 살다 죽겠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나마 부처님의 말씀을 믿으며 저잣거리에서 살고 있으므로.
삼천 배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성철 스님의 삼천 배가 온 나라에 화제가 되던 때 나는 삼천배의 의미를 공감한 후 혼자서 삼천 배에 도전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얼마나 힘들더닞 겨우 칠백 배쯤 하고 포기해야 했다. 내가 내 몸 하나를 삼천 번도 똑바로 밀어 올리지 못하다니! 한테 성철 스님은 어떻게 그런 삼천 배를 쉽게 명하셨을까?
그리고 또 글을 읽을 수 있으니 경전이라도 좀 읽자고, 정치판으로부터 숨어버린 삼 년 동안의 일상에《법화경》을 몇 번씩이나 읽고, 손에 잡히는 대로《금강경》해설서를 읽고,《부모은중경》을 읽고 또 읽고,《정토 삼부경》을 읽다가《팔만대장경》까지 읽어보니 말씀은 조금 알겠는데, 부작용이지만, 역시 '나는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성철 스님은 어떻게 그 장구한 세월을 불면하며 수행정진하셨을까?
또 지난겨울, 간화선이 뭔지도 모르면서 한번 체험하라기에 수련 모임에서 꼬박 일주일간 반가부좌를 하고 나니, 다리 '꼬뱅이'가 아파서 너무 힘들어한 적이 있다. 헌데 성철 스님은 어떻게 그 긴 세월을……
결국 그래서 나는 그런 내 삶의 방식을 생각한 것이다. 즉, '작은 불제자가 험한 세상을 사는 법'으로 '부처님 못 보실 때 파리나 모기 같은 생명 좀 죽여야 하고, 그 생명을 죽이고는 마음이 편치 않음을 느끼고, 그 느낌이 싫어서 좀 뉘우치고, 대신 갚을 일이 있으면 찾아서 하고, 일생 석가모니 부처님을 공부하고 수행하셨던 성철 부처님이나 법정 부처님의 말씀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살아야 하겠다'고.
철따라 생명이 순환하는 산골의 자연을 지켜보면서, 제가자로서 좀 어렵고 힘들겠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불심佛心을 실천하면서 말이다. 여기에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드넓은 산골짜기 우리 집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연달아 핀다.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 지나면 집 앞 계곡과 여기저기 웅덩이에는 제일 먼저 산골 개구리와 도롱뇽들이 귀신 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뭉게뭉게 또는 길쭉길쭉 알을 낳아놓는다. 그리고 그것들이 온전히 부화하면 '해마다' 수백 마리의 도롱뇽과 수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계곡에 퍼진다. 그만한 수효면 여름내 뱀들이 먹이사슬로 희생되고, 지난겨울 산 너머 동네 청년들이 잡아 술안주로 먹은 수를 능가할 것이다. 관세음보살!
내가 십칠 년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관심을 두고 보호한, 어느 여름날 어슴새벽의 청개구리 같은 불쌍한 녀석들이다.
그러다가 좀더 봄이 가까이 오면 진달래, 개나리, 민들레가 피고, 야생의 산 벚꽃이 불꽃놀이를 하듯 만발한다. 아름답다. 금생에서 보는 나만의 극락이다. 그 무렵에는 그동안 욕심부려 심어놓은 복숭아꽃, 자두꽃, 살구꽃, 배꽃이 피는데, 그때가 되면 어디서 겨울을 났는지 모를 벌과 나비들이 한껏 역사를 한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보이는 벌, 나비 말고도 꽃술 아래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과일 벌레들이 씨방으로 파고들며 앞으로 커갈 과육을 먹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이때 영악하게 살충 농약을 뿌려서 벌레를 '몰살'하고 열매를 보호해서 다디단 과일을 먹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 벌레와 함께 봄 나비와 벌을 '동시 몰살'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해마다 온전한 과일을 포기하고 차라리 농약을 치지 않는다. 파리와 모기를 야멸차게 잡을 때의 생각과는 다르다. 하지만 새끼들을 먹여야 하는 전업 농부들에게는 이런 생각도 사치에 불과하다.
봄비가 내리고 대지에 생명의 기운이 솟는 4월 하순이나 5월 초면 나는 아마추어 농사일을 시작한다. 해마다 퇴비장에 숙성시켜 준비한 퇴비를 넉넉히 내고 밭을 갈아, 감자와 옥수수를 심고 각종 채소류의 씨앗을 뿌린다. 이때 흙 속의 지렁이가 죽을까봐 살충제도 뿌리지 않고 밭을 가는데, 지렁이가 똥을 싸서 밭에 귀한 자양분을 공급하기 때문이다. 감자를 심으면 햇빛을 싫어하는 두더지들이 감자밭을 적당히 망가뜨리며 헤집고 논다. 두더지 약을 권하는 사람도 있지만 늘 흘려들으면 농사를 흉내 낸다.
거의 모든 사람이 감자를 심을 때 토양 보습과 잡초를 못 나게 하려고 비닐 멀칭을 하지만, 땅도 숨을 쉬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법정 스님의 말씀을 듣고는 늘 노지에 감자를 심었다. 가물면 물을 주고 풀이 나면 김을 매면 되기 때문이다. "비닐을 씌우면 한여름 땅속 온도가 60~70도까지 올라가서 유익한 미생물까지 다 죽어 건강한 농작물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은 후의 실천이다.
나는 그동안 잡초를 몰살하는 제초제를 한 번도 뿌리지 않고 대신 지칠 정도로 들풀을 깎고 김을 맸다. 밭에서 김매기를 할 때마다 나는 잡초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누구에게는 물과 거름을 주면서 누구는 마른 땅에서나마 살아보려고 버둥대는 것을 뽑아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가뭄이 심할 때 농작물에 물주기를 하다가 밭이 아닌 길가 뙤약볕 아래서 새들 새들 말라가는 잡초들을 보면 흥건하게 물을 뿌려주기도 한다. 벨 때 베더라도, 말라비틀어지는 길가 잡초에게 물을 뿌려주고 나면 순간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내가 물을 주지 않아도 살아남겠지만.
나는 해바라기를 좋아한다. 한곳만 바라보는해바라기가 해를 따러 고개를 돌린다는 말은 매우 억울한 오해임 키 큰 해바라기가 무리 지어 노란 꽃을 피워 올리면 여름 한철 산골 마을이 참으로 넉넉하고 아름다운데, 내가 해바라기를 가꾸는 것은 꽃을 보기 위함 외에는 아무 목적이 없다. 씨를 받아 기름을 짠 일도 없다. 다만 해바라기 씨가 익으면 수백 수천 송이 해바라기의 씨를 먹으려고 온갖 산새들이 모여들어 배를 채운다. 그러면서 부리로 쪼아 먹다가 땅에 떨어뜨린 씨들이 땅에 숨어 이듬해 싹이 트면 나는 힘들여 씨를 심지 않고도 다시 해바라기를 즐길 수 있다. 새들은 어쩜 그렇게 골고루 뿌린 듯 알맞게 씨를 흘려놓는지, 말하자면 해바라기 가꾸기는 산새들이 알아서 하는 셈이다. 교과서에는 없는 '산새'와 '해바라기'와 '나'와의 공생관계다. 그래서 우리 집 주변에는 별별 새들이 다 모여 산다. 그 산새들은 먹이에 대한 보답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내게 노래를 들려준다. 이 또한 사랑스럽다.
일하다 힘이 들어 쉴 때, 나는 우리 집 개 모리와 대화를 한다.
"얘, 너는 개지만 웬만한 인간보다 낫다."
그 말에 개는 좋다는 듯 꼬리를 친다.
"너는 사람으로 말하면 군자다. 그런데 말이다. 너한테는 불성이 없다더구나. 그러니 다음 생에 사람 몸을 받을 것 같으면 열심히 공부해서 불성을 찾아보거라. 알았느냐?"
이런 말을 하면서 쓰다듬어주면 두 발을 번쩍 들어 와락 덤빈다. 좋은 모양이다. 사람과의 대화에 지친 터에 개와의 대화는 가끔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내가 다음 생애 또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나도 출가해서 부처님 공부를 할 인연이 될까?
몇 달 전의 일이다. 어느 대찰에서 사미계를 받으려는 출가자 교육 프로그램이 있으니 와서 그분들께 좋은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특강 요청을 받고는 손사래를 치다가 결국 수락한 적이 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자의 길을 나선 분들에게 언감 무슨 말씀을 드릴까만, 속인으로서 영광이니 한 말씀 정도는 드릴 수 있을 것 같앗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강의 말미에 이 세상에 먼저 온 사람의 자격으로 출가자들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여러분, 부디 미래에 성철 스님, 법정 스님 같은 스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큰절로 삼배를 올렸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서재 창 너머 의연히 서 있는 청산을 바라보니 바람이 불고 있다. 그 바람에 푸른 잎이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흔들린다.
그렇다. 저 바람 속에서 성철, 법정 두 스님은 부처가 되셨을 것이다!
김희중
1947년생. 1975년생 천주교 사제품을 받았고, 1986년생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대주교로 광주대교구장을 맡고 있으며, 2007년부터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의원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성속聖俗의 경계가 무색할 정도록 정신세계의 자유를 누리시던 스님의 여러 법어 가운데 한 구절이다. 1981년 성철 스님은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었지만 "수행승으로 산중을 지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종정으로 지켜야 할 확실한 의무"라는 말씀과 함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문이 포함된 종정수락법문을 대신 보냈다고 한다. 개인의 입장이나 가치관, 또는 선입견 등, 개인의 잣대로 세상이나 사물을 왜곡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즉 사물의 실체를 가감 없이 파악할 수 있는 혜안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수행에 정진하다보면 매일매일의 의미가 새롭고 충만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보는 사람의 당시 심정과 상황에 따라서 오늘 바라보는 산이 어제 보던 산과 다르게 보인다. 오늘 바라보는 강물이 어제의 강물과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해나 산의 실체와 본성이 바뀌지않는 이상, 어제 바라보았던 해나 산이 오늘 바라보는 해나 산과 다르지 않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이다. 이렇듯이 성철 큰스님은 자신의 모습도 적나라하게 꿰뚫어보고 진솔하게 드러내는 겸덕을 보였다.
열반송 등 때로는 속인들이 의아하해는 법어를 하신 때도 있었지만, 이는 혹여 속인들이 성철 스님 당신을 부처님보다 더 거룩하게 보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역설적이고 반어법적으로 펴표현하셨다고 생각한다. 또 당신을 만나러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삼천 배를 오구하셨다고 하낟. 이것은 단순히 호기심으로 당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을 다 접촉하면 수행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고, 또한 당신이 머물고 있는 사찰의 수행자 스님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구도자들을 생각하는 배려의 큰 마음이 아니겠는가.
성철 큰스님은, 고려 말기의 고승으로 조선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스승이었던 나옹선사가 남겨놓은 글처럼 생활하셨던 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성철 스님은 1993년 수행자들이 일생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귀한 말씀을 남기시고 열반에 드셨다. 이 말씀은 단순히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에서 실천에 옮길 때 가치가 있을 것이다.
중생들에게 정신적 등불이 되어주셨던 성철 큰스님
그분의 삶을 통한 수행자의 고귀한 정신적 유산이 더욱 큰 믿음으로 다가온다. 탄신 백 주년을 맞이하여 위와 같은 시대의 어려움과 답답함에 방황하고 있는 민중들에게 큰스님의 말씀과 가르침, 그리고 살아생전에 이루셨던 구도자의 삶이 신선함으로 새롭게 퍼져나가기를 바란다.
"참선 잘하그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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