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
- 달라이 라마 지음『달라이 라마의 행복 찾기』에서 -
"행복은 내 안에 있습니다"
행복은 내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예기치 않던 수많은 난관에 부딪치게 됩니다. 특히 강한 욕망, 이기심, 미움이나 분노에 사로잡히면 인간의 가장 큰 자산인 자제력을 잃고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 막말을 하거나 거친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때때로 인간은 화 때문에 무기로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만큼이나 큰 사고를 내기도 합니다. 이후 화가 진정되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당혹스러워하거나 때늦은 후회를 하곤 하지요.
동물은 정욕이 들고 화가 나도 일시적이거나 겉으로 시늉만 할 뿐 지속적으로 난폭하게 굴지는 않습니다. 또한 동물들은 조금만 보살펴줘도 매우 흡족해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지요. 인간은 성과 지상주의 사로잡혀 그 무언가를 이루고자 끊임없이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다양하고 효율적인 사고력을 가진 인간은 계속 세력을 키워나가며 온갖 선행과 악행을 다 펼칩니다.
인간의 이러한 행동도 결국은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거나 자멸감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삶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무지는 지혜와 자비심을 길러주고 판단력을 맑게 해주는 마음공부를 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공도 결국은 내면의 깨달음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행복과 평화도 마음공부를 통해 스스로 잘못을 깨우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풂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짜증을 잘 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자신의 성격을 스스로 분명히 알아차린다면 더이상 짜증을 내지 않고 이전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잠시 욕망에서 벗어나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평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행복이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위한 준비
나의 착각: 나는 앞으로도 계속 잘 살 수 있을 거야. 지금처럼
죽음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욕망과 미움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는 지나치게 현재의 삶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삶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돈을 벌거나 사회적 명성을 추구하는 등 외적인 데만 집착하게 됩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려면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인간은 기껏해야 100여 년이 지나면 결국 아쉬운 인생을 접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더구나 죽음의 시간은 예고 없이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번영을 누리고 가진 것이 많다 해도 어차피 언젠가는 끝이 납니다. 생명은 돈으로도 살 수 없으며, 그동안 쌓아둔 그 어떤 것도 임종하는 순간 아무런 소용이 없어집니다. 누구나 때가 되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만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부자의 죽음과 한낱 야생 동물의 죽음은 같은 것이지요.
자신이 당장 오늘밤에 죽을지, 죽지 않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자각하게 되면 오늘밤에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내일과 내생 중 어느 것이 먼저 올지는 결코 알 수 없다"고도 합니다.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피상적인 것보다는 현재와 미래에 도움이 되는 일을 우선적으로 처리해나갈 수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므로 현재와 미래에 해로운 일은 되도록 피하면서 안목을 넓히려는 강한 의욕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의욕은 단 하루를 살더라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줍니다.
죽음에 대해 자각을 한 사람들은 유익한 것을 얻고자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도 항상 의미 있는 삶을 지탱해갈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지 않으면 실질적인 삶에서 엄청난 손해를 보겠지요.
재물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재산이 많든 적든 간에 현재 소유한 재물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반면 자비심과 이타심은 무한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마음공부를 했다고 해서 쉽게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이 두가지를 종종 반대로 느낍니다. 다시 말해 마음공부를 적게 하여 마음의 성장은 조금밖에 하지 못했는데도 흡족해하는 반면, 재물은 항상 더욱 많이 갖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마음과 재물에 관해서는 현재 우리가 느끼는 것과 반대로 느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즉 마음공부는 더욱 많이 하고 싶어하고, 현재 가진 재물에 대해서는 만족하고 더이상 욕심을 내지 말아야겠지요.
돈이 많다고 해서 비싼 음식을 먹고 좋은 옷가지를 입으며 자기 치장에 돈을 마구 써도 된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자기 한 몸을 위해 소비하는 대신 건강 유지와 가난한 사람들을 교육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합니다. 이런 태도는 개인의 자발적인 자비심이 있어야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을 얻으려면 현재 자신이 가진 재물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더이상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으면 진정한 부자가 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반면 비록 억만장자일지라도 자신이 가진 재물에 만족하지 못하면 하루하루의 삶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여 스스로를 부자가 아니라, 오히려 가나뱅이로 만들지요. 근본적으로 인간은 재물에서 결코 만족을 찾을 수 없으며, 재물에 대한 욕심 또한그 무엇으로도 다 채울 수 없습니다.
티베트의 불교경전에는 세상을 다 지배한 왕이 신의 땅을 빼앗으려고 했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왕은 한때 선정을 베풀기도 했지만 자신의 한계를 모른 채 더욱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급기야 신의 땅을 넘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재물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왕의 오만한 성품과 무지 때문에 결국 왕국이 멸망하고 말았지요.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는 마음은 행복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선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재물이 있다면 거기에 만족해야 합니다. 또한 보통의 성적 흥분 역시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흥분과 성적 집착은 이혼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성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행동은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매사에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말고 균형감 있는 적절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만물의 근본 이치를 따르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덧없다는 '비영속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일은 무척 중요합니다. 죽음을 자각하지 못하면 이미 얻은 이 특별한 생명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합니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봄으로써 현재의 삶에서 활기를 찾을 수 있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는 주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또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면 실제 죽음이 도래했을 때, 좀더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릴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생각을 고의적으로 회피한다면, 늙는 것을 삶의 일부가 아니라 불쾌한 것으로 받아들여 결국 역효과를 가져오게 되지요. 이러한 태도는 늙음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없어 늙는 것을 아주 힘들어 하게 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될 늙음과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죽음을 인정하는 순간 재물에 대한 욕심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집착은 고통의 씨앗입니다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친구 등의 관계로 똘똘 뭉친 사람들도 언젠가는 뿔뿔이 흩어집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고 해도 결국은 헤어져야만 하지요. 이러한 삶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 집착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착각을 합니다. 집착은 이러한 착각에서 나온 것이며,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을 주는 원인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고통을 주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 음식이나 주거 및 잠자리와 같은 인간의 기본 생활을 무시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말은 "와! 정말 굉장하네!" "이건 내가 꼭 가져야 해!" "어휴, 저걸 가졌더라면!' 등의 과장된 표현을 자제하고, 피상적으로 산만한 생각에서 벗어나라는 의미입니다. 재물을 탐닉하게 되면 정신적인 발전에 힘쓰기보다 예쁜 옷이나 금전 등 물질에 더욱 끌리게 되어 번민이 많아집니다. 그러다 여건이 나빠지면 주변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요. 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버리는 데만 집착하게 되고, 결국 나중에는 어떤 위안도 찾지 못해 스스로 무기력한 상태가 됩니다.
원하는 것에 집착하면 사람들은 대상에서 좋은 면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집착을 하면 사람들은 우선 원하는 대상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찾으려고 듭니다. 집착이 불행을 낳는 것이지요. 집착을 막으려면 관심을 원하는 대상에서 다른 곳으로 미리 돌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일단 집착이 생기고 나면 이후 욕구를 억제하기는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현 상황이 이대로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결국 나 자신부터 먼저 망가지고 맙니다. 현재의 삶에 안주하면 미래가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고 오로지 나를 위하는 일에만 열중하게 됩니다. 그러면 남을 위해 자비시미을 베풀려던 의욕도 점점 줄어들게 되지요.
현재 승승장구하는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행운이 항상 나를 따르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만물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 물론 죽음이 주는 고통도 엄청난 것이지만,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게 될 때 그것은 더이상 고통이 아닙니다. 만물의 실체가 덧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어떤 변화가 닥치더라도 충격을 받지 않으며, 심지어는 늙고 죽는 엄청난 변화까지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구의 수명에 비해 인간의 수명은 극히 짧은 편입니다. 우리는 이 짧은 생을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아내야 합니다. 즉 일생 동안 더욱 건설적인 활동을 하는 데 힘을 쏟고, 적어도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골칫거리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머무는 짧은 기간이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의미 있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여행 중 어떤 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문제를 일으켰다면 무척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문제를 일으킨 여행자가 비록 현지에 머무는 동안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후 언젠가는 "과연 나의 방문은 무엇을 남겼는가?" 하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 짧은 기간이나마 여행하는 동안 남을 기쁘게 해주었다면 매우 현명하게 행동한 것입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준 여행자는 이후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현지에서의 행동에 만족하며 스스로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의미 있는 인생을 살려면 늙고 죽는 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존재가 연속되는 삶에 있어서, 옷이 낡으면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죽음은 우리의 또 다른 삶을 위해 옷을 갈아입는 일과도 같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현실과 매우 동떨어진 것으로 인식하거나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여기는 태도는 탐욕을 불러일으키고, 남에게 고의적으로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역사상 위대한 황제나 군주가 거대한 궁궐과 성벽을 건설한 것도,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자기기만은 궁궐을 건설하느라 피땀 흘린 수많은 사람들에게 더욱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만물이 언젠가는 붕괴된다는 비영속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삶의 덧없음과 죽을 운명에 대한 인식은 매우 과학적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줍니다. 또한 수시로 변하는 인간과 정신세계와 모든 현상에 대해 긍정적인 발전을 가져옵니다.
만약 상황이 더이상 변하지 않는다면 원래 인간이 타고난 고통을 고스란이 겪을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모든 것은 변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면 아무리 상황이 힘들어도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릭에 앞날에 대한 기대로 위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결코 좌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을 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갑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고 육체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 오랜 인류 역사상 죽음에 직면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냉철하게 평가해봐야 합니다. 그러면 현실에 맞이 않는 피상적으로 일시적인 목표를 세워 당혹해하거나 장기적으로 중대한 일을 빠뜨리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결국 죽게 될 것이므로 가치 있는 일을 위한 결심도 가능한 일찍 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생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를 분명히 알면 주어진 시간을 좀더 아끼고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겠지요. 또한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마음공부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마음공부는 원초적으로 먹고 마시는 일이나 단지 즐기기 위한 스포츠나 전쟁, 연예나 루머 등 잡다한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자신의 정신을 스스로 계발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보내게 될 내일은 반드시 온다"는 유명한 인도 속담을 음미해보세요. 만약 우리의 생명이 쇠퇴하지 않고 이대로 영원히 지속된다면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내일로 미뤄도 되겠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생명은 수많은 내적·외적 원인으로 인해 쉽게 쇠퇴합니다.
몸은 서로 다른 수많은 요소가 상반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몸이 편안하다는 것은 단지 이러한 요소들이 잠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일 뿐, 앞으로도 영원히 조화를 이룰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추운 사람에게 열이 처음에는 좋은 느낌을 주지만 지나치게 뜨거우면 불쾌감을 줍니다. 처음에는 좋던 느낌도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그 느낌도 곧 달라지게 마련이지요. 이러한 현상은 질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병에 대해 약을 처방하면 그 약은 다른 부작용을 일으켜, 그것을 치료하기 위한 또 다른 처방을 해야 합니다. 몸이 편안하다는 것은 단지 일시적으로 그러한 부작용과 합병증이 없는 상태일 뿐 항상 편안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음식 역시 영양분을 공급하여 우리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주지만, 과식을 하면 건강을 지탱해주던 음식이 도리어 질병과 고통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식량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굶주림과 기근이 커다란 고통이지만, 한편 음식이 풍부한 나라에서도 과식과 소화불량으로 인해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과하면 아니함만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일은 지나침이 없어 균형을 유지할 때 조화를 이루고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지금 몸이 건강하다고 해서 앞으로 아무런 괴로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지금 당장 질병과 전쟁, 기근이 없다 하더라도 모든 인간은 결국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항상 괴로워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물의 본성은 해체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육신도 때가 되면 죽음 앞에 행복하게 됩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해 분명히 이해하고, 그에 맞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좀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과 자각으로 집착을 내려놓으면 행복으로 가는 문이 열립니다.
삶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습니다
당신은 날마다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삶은 끈질기고 강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붕괴도기 쉽습니다. 단순히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차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며, 공동체 내에서도 엄청난 책임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자신은 물론 남을 위해서도 아주 좋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맡은 당신이 사소한 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린다면 얼마나 큰 손실이겠습니까? 그러니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고 외부의 협조를 받아 현재의 삶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겠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이토록 짧은 생애를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잘 활용해야 합니다. 육신의 안락은 몸의 각 요소가 일시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일 뿐 깊은 조화를 이룬 것은 아닙니다. 살아가는 동안 영원하지 않고 덧없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떠올려보세요. 만물이 덧없다는 것을 이해하면 오늘 우리가 실제로 해야 할 일이무엇인지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반면 만물의 덧없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오늘 못 다한 일을 이다음에는 잘할 수 있을 것으로 섣불리 추정하여 자꾸만 일을 미루게 되지요.
인간은 선행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전체주의는 이러한 자유가 확대되는 것을 억누르지만, 개인주의는 누군가가 자유를 줄 것으로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때를 기다리라고 합니다. 개인주의자는 다른 사람의 계획에 따르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계회기을 세워나갑니다. 부처님은 대규모의 정치·군사적 행동을 통해 성취하기보다는 열반을 의미하는 '개인적 깨달음'을 이룸으로써 완전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열반은 번뇌와 괴로움에서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각 개인도 스스로 계획하고 자각하여 긍정적인 미래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려면 자기 수양이 필요합니다. 수양이 부족하여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는다면 그 결과도 부정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따라서 선행을 하려면 자유를 확대하고 동시에 마음을 길들이는 자기 수양을 해야 합니다.
마음을 바꾸는 명상
죽음의 자각으로 집착 줄이기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지금부터 진지하게 생각해봅니다. 죽음을 아직 먼 남의 얘기라고 생각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이 현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다음과 같이 각 단계별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진전시키면 죽음에 대한 명상의 깊이를 더할 수 있습니다.
-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내 생명은 결국 다 소진되어 더이상 연장할 수 없게 된다.
- 사람의 수명은 각자 다르며 내가 언제 죽을지는 알 수 없다. 죽음의 원인은 많은 데 비해 삶의 원인은 비교적 적으며 육신은 붕괴되기 쉽다.
- 우리 모두는 이처럼 죽음 앞에 한없이 약한 존재이다. 따라서 말다툼과 싸움, 또는 재산을 모으려고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모두 소모하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 수시로 악화되는 상황을 마치 변하지 않는 것인 양 착각하면 나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스쳐 지나가는 상(想)에 대한 집착을 줄여야만 한다.
- 일시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여 생기는 이러한 고통의 악순환을 마음속 깊이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결국 행복을 얻고자 한다면 내가 먼저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만물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려면 마음공부가 필요합니다. 마음공부는 신체적으로 통제하거나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먼 앞날의이득을 위해 눈앞의 이득을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공부는 곧 자기 계발과도 같습니다. 자기 계발은 자기 행동의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마음공부를 하면 항상 마음이 평화롭고 여유로우며 행복해집니다. 하지만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외부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늘 두려움과 걱정으로 괴로워하게 됩니다. 행복과 복지는 평화롭고 잘 길들여진 마음에 달려 있으며, 이러한 마음은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도 큰 도움을 줍니다.
나와 남은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느껴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 바람은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다는, 더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는 우리 모두의 권리이기도 합니다. 고통을 피하고 싶은 바람은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내게 고통을 이겨낼 권리가 있다면 남들도 당연히 그와 같은 권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다른 사람과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요? 종류가 같다면 수(數)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납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은 나보다 훨씬 수가 많습니다. 이 세상에 나는 단 한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할까요? 주위에 열 명의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중 편안함을 원치 않을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몸이 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병이 낫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한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이. 비록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고 다른 사람에게는 등한시하는 행동이 됩니다. 그러니 특정한 사람한테만 치우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두루 잘해줘야 합니다. 이타심을 가꾸는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모두가 나와 같이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이타심입니다.
삶은 '고해(苦海)'와도 같아서 살아가는 데는 항상 고통이 따릅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서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궁핍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서로를 적대시하는 일 또한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감옥 안에서 자신의 최후를 맞게 되겠지요. 만일 그들이 죽기 전에 남은 며칠 동안 서로 옥신각신 다툰다면 과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좀더 크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누구나 삶에는 고통이 따르고,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똑같은 상황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당연히 서로 싸울 이유가 없지요. 세계는 하나의 공동체이고, 그 공동체 내에서 우리 모두는 친구입니다.
모든 사람은 한 가족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가족과도 같습니다. 오로지 내 가족, 내 나라 혹은 내 대륙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인간성이 모두 같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모든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즉 나와 가장 비슷한 몇몇 사람만이 아닌 모든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종교, 이념, 인종, 사회경제체제와 정부는 모두 부차적인 것입니다.
여러 번 강조했지만, 우선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행복을 원하며 고통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나와 남은 모두가 동일합니다. 나를 수많은 사람들과 비교해서 단 한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나라는 한 개인이 수많은 다른 사람의 복지를 등한시하거나, 나만의 쾌락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나보다는 차라리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행위가 훨씬 합리적일 것입니다.
아무리 소중하더라도 나는 단지 한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주어진 상황이 매우 분명해집니다. 물론 남을 위해서 나의 행복을 희생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그것이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한 나머지, 수없이 많은 다른 존재의 행복을 잃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타인의 순수한 친절에 공감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든 사람을 사려 깊게 배려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얼굴이나 이름을 모르는 사람에게 기부하거나 봉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이 순수하게 베푸는 친절에 대해 성찰해보는 것은 모든 사람이 행복을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개인적으로 우리를 돕는 이유나 특별한 동기가 없는 사람들, 혹은 사물들과 연관되어 그들의 덕을 보고 있습니다.
공원의 숲을 산책하고 싶을 때 주위에 공원이 있으면 우리는 행복을 느낍니다. 비록 공원의 나무가 나를 도우려는 의도가 없었을지라도 나무가 고맙고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며 그 가치를 소중히 느끼게 되지요. 이처럼 설령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내게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면 그들은 특별히 나를 돕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현재 내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건물, 도로, 상점 등과 같은 수많은 시설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건설해 놓은 것입니다. 현실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내게 친절을 베푼 것이지요.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분들의 피땀 어린 수고와 어려움, 그리고 순수한 친절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직간접인 도움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처럼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낯선 사람들이 우리에게 베푸는 순수한 친절을 알아차리기만 하더라도 타인의 은혜에 감사하고 행복을 얻게 됩니다.
인간은 완전히 고립해서 살 수 없기 때문에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각 구성원들은 비록 서로 잘 알지 못하더라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서로 돕고 있습니다. 친한 사람은 물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날마다 내게 베풀어주는 순수한 친절을 충분히 공감하고 감사한다면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도 자연스럽게 기여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런 친절을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면 서로 자기 욕심 채우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사회가 병들게 됩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어릴 때는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지만, 늙으면 또다시 남의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유년기와 노년기의 중간에 놓여 있는 우리는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각 개인은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도 이와 같은 자비로운 마음의 바탕 위에서 매순간 발전해야 합니다.
마지막 조언
우리 각자는 타인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위해주어야 하고, 타인의 복지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단순히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복리 증진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의 근원인 욕망, 미움, 무지의 쓰레기 더미에서 자비를 찾았다면 그것을 보석처럼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소중한 자비를 통해 비로소 희망을 얻고 진정한 평안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플 때 휴식을 취하거나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은 처방은 일시적인 안도감만 줄 뿐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진심으로 배려하는 태도는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에게까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면 장·단기적으로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항상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배려심을 키우는 마음공부는 다음의 두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우선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다면 적어도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말아야 합니다."
위의 두 문장은 사랑과 연민에 근거해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면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도와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첫 번째 단계는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나쁜 말이나 행동을 스스로 자제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남을 돕는 선행은 부정적인 감정을 어느 정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때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타심은 남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이타심은 아주 작고 사소한 체험만으로도 이내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따라서 이타심을 가지면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에게도 큰 이득이 됩니다.
앞의 두 단계는 비록 다른 사람을 돕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에게 결코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 바꾸기' 공부의 핵심이지요. 내 종교는 이처럼 단순합니다. 예배 드릴 사원도 굳이 필요하지 않으며 복잡한 철학도 필요 없습니다. 각자의 생각과 마음이 곧 사원입니다. 내 철학은 곧 다른 사람에게 소박한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종교를 믿든 믿지 않든 자비심을 가지라는 겁니다. 마음공부를 통해서 자비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게 가치 있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과 연민이 가득한 환경에서 더욱 행복하고 건강도 좋아져 장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과 연민을 가꾸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전보다 더욱 친절하게 대하면 이웃과 친구, 부모, 배우자와 자녀들도 자연히 화를 덜 내겠지요. 아울러 그들의 마음도 더욱 온정적이며 부드러워져서 주위 사람들까지 조금씩 우호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비록 작은 것이라도 이러한 자비를 한 가지씩 실천하다 보면 삶의 의미와 목적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행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찻잎' 잘따그래이! 2 (0) | 2014.05.06 |
---|---|
'찻잎' 잘따그래이! (0) | 2014.04.27 |
"여기서 내가 뭘 배웠지?" (0) | 2014.04.02 |
삶은 필연적인 것이다 (0) | 2014.03.06 |
내가 머무는 곳이 나를 움직인다 (0) | 2014.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