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초에 파종한 가을무 싹이 잘 틔워졌다.
키케로(BC 106~BC 43)는 로마의 학자, 작가, 정치가입니다.
'인문학'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만들었으며, 인문학을 유행시킨 첫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의 궁극적 목적
인문학은 젊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르게 지켜주고,
나이 든 사람들의 마음을 행복으로 안내합니다.
또한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우리가 역경에 처해 있을 때, 마음의 안식과 평화를 줍니다.
- 강신주 지음『강신주의 다~상담 2』중에서 -
일·정치·쫄지 마편
지은이 강신주
사람을 사랑하고 시대와 호흡하는 철학자. 폐부를 찌르는 직구, 동서양 인문학을 종횡하며 끌어올린 인문정신으로 '지금, 여기'의 수많은 질문들에 답해 왔다. 삶의 고민과 불만족을 해소하기 위해 철학을 찾는 사람들과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나누고 공감하는 일을 즐긴다. 지은 책으로《철학, 삶을 만나다》,《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철학 VS 철학》,《김수영을 위하여》등이 있다.
"위대한 작품을 남겼던 작가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다른 누구도 흉내 내지 않고 자기만의 목소리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남겼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야 할 인문정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문정신을 회복하는 순간, 우리는 정치가나 자본가, 혹은 멘토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저 자신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문정신을 제대로 갖춘 사람은 우리에게 항상 물어봅니다. 스스로 주인으로 사유하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은 용기가 있는가? 당신은 주인으로서의 삶을 감당할 힘이 있는가?"
일 ― 상담
돈은 필요하지만 일은 하고 싶지 않은 노예예비군
몇 달 전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의 한 문장을 봤습니다. "돈은 필요하지만,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노동 위에서 편히 지내며 이런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제가 스스로를 책임져야 할 나이이고 나중에는 부모님에게도 보탬이 되어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일을 하고 싶지가 않아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 지 모르겠네요.
참 예리하신 분입니다. "돈은 필요했지만,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여러분도 확 와 닿죠? 고민의 내용을 보니 부모님을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절대 부모님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분들은 알아서 잘 사세요. 이럴 때 부모까지 생각하면 일이 복잡해져요. 지금부터 아이 키우시는 분들은 아이에게 일일부작 일일불식을 가르치셔야 돼요. 애가 뒹굴고만 있으면 밥 먹이지 말아야 해요. 절대 밥 먹이면 안 돼요. 그러면 내 자식이 나중에 누구 착취하는 놈이 되고, 어떻게 하면 날로 먹을까를 생각한다고요. 날로 먹는 놈이 힘이 생기면 다른 사람은 두 배, 세 배로 일해야 됩니다. 나중에 혁명이 일어나면 여러분 자식은 욕을 먹거나 죽는 거예요. 항상 일하게 해야 돼요. 일일부작 일일불식, '나는 네가 공부를 안 해도 된다. 나는 많은 거 바라지 않는다. 개중에 네가 제일 하고 싶은 걸 하면 조금 있다 수제비를 끓여 주겠다'는 식으로 키워야 돼요.
여러분들 각자의 삶의 시간은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 이 둘로 할당이 될 거예요. 노동하는 시간은 대부분 그 자체로 목적은 아닙니다. (물론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람들이 있어요. 저 같은 사람이요.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거죠. 저는 글을 안 써도 됩니다. 누가 시키는 건 아니예요. 제가 쓰고 싶을 때 쓰는 거예요.) 대개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이 따로 있어요. 이건 원시인들도 지키고 있었던 겁니다. 원시인들이 나가서 사냥을 합니다. 사냥을 해 와서 마을에서 잔치를 열든가 가축들한테 주려는 거예요. 이렇게 두 가지 시간이 있는 거죠. 인간의 행복은 아주 쉬워요. 노동하는 시간을 극단으로 줄이고 향유하는 시간을 넓히는 데 행복이 있어요. 그러니까 직장에서 노동하는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한 사회가 쓰레기 같으면 향유하는 시간을 줄입니다. 야간에 일을 많이 해서 돈을 벌어도, 에너지를 다 소비해서 지치면 집에 와서 퍼져 자요. 가족들 얼굴도 못 봐요. 이런 인간은 삶을 못 사는 겁니다. 왜 예전에 노동시간을 보장하자는 이야기를 했는지 아세요? 마르크스의《자본론》을 보면 마르크스는 노동을 돈으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노동을 시간으로 계산해요. 시간은 절대적이거든요. 하루 8시간 노동은 보장이 되어야지 나머지 시간이 남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더 해야 할 건 뭐예요? 직장에서 정해진 노동 시간이 8시간이면, 8시간이되 8시간을 다 노동하면 안 되는 거예요. 대충해서 실질적으론 2시간만 하면 돼요. 노동 강도가 세면 지쳐요. 우리 사회는 사실 결혼을 할 필요가 없는 사회예요. 노동 강도가 너무 세기 때문에요. 부인이랑 남편 있으면 뭐해요. 자식은 낳으면 뭐해요? 아이는 놀이방에 보내요. 아이를 놀이방으로 보내니까 놀이방 선생님이 가정에서 나와서 아이들을 돌봐야 돼요. 그럼 놀이방 선생님 아이는 누구 돌보냐고요.
여러분께 지혜를 하나 알려 드릴게요. 보통 사람들은 최저임금을 이야기하거나 가급적 많은 임금을 생각합니다. 이제 '죄적임금'을 생각할 때입니다. 최저임금이 아니라 최적임금입니다. 나의 최적임금은 얼마인지, 이 정도 벌면 됐다는 걸 정할 수 있어야 해요. 그걸 아는 사람은 내가 돈을 버는 목적이 향유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젊었을 때 뼈빠지게 고생해서 돈 모으면 뭐해요? 나이 들면 다리 아파서 여행도 못 가요. 한 사회가 얼마나 나쁜지의 척도는 노동시간의 길이입니다. 노동 시간이 늘어나는 사회는 나쁜 사회예요. 노동을 더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 개인이 향유하는 시간을 줄이는 사회는 나쁜 사회예요.
향유하는 시간이 없는 분들은 노동하는 이유를 못 찾아요. 애인이라도 있어야 돼요. '애인한테 짜장면을 사 줘야지', 뭐 이런 각오라도 있어야죠. 애인이 입에 짜장 묻혀 가며 먹는 게 너무 귀엽잖아요. '그럼 내일은 더 열심히 일해서 짬뽕을 사 줘야지!', 뭐 이런 식으로 말예요. 그게 아니라도 좋아요. 나 아닌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으면 됩니다. 여행, 공연, 친구랑 시간 보내기, 이런 게 있어야 해요. 평생 사냥만 하다가 그냥 죽을래요? 그냥 아예 쿨하게 죽으면 돼요. 우리는 노동을 하려고 사는 건 아니에요. 물론 노동은 해야 합니다. 향유하기 위해서요. 어떨 때 내가 가장 행복한지를 점검해 보세요. 이렇게 이야기 하셨죠? "나중에는 부모님에게도 보탬이 되어야 할 때가 올 거라고 생각해요.……제가 저를 책임져야 할 나이이고……." 모두 먹고사는 고민만 있어요. 생존만 있고, 향유는 없어요. 거기에는 의무만 있어요. 부모님을 돌봐야 하는 의무.
여기에 무슨 살 이유가 있어요? 즐거운 것이 있어야 된다고요. 노동은 힘들어요. 유사 이래로 인간이면 다 그래요. 그런데 우리가 정말 슬픈 게 뭔지 아세요? 여러분들은 예술 활동하는 게 있어요? 집에 벽화 그리시는 분? 원시인은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그렸어요. 자본주의가 들어오기 전에 시골에선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했어요. 여러분이 진보한 사회에서 산다고요? 개처럼 일만 하면서, 향유를 못 하잖아요. 살 이유가 뭐가 있냐고요. 알타미라 동굴벽화도 그렸던 원시인보다 못해서 어떡해요. 내가 왜 일을 해야 되는지 의구심을 갖는 분은 향유하고 싶은 게 없는 겁니다. 사람일 수도 있고, 장소일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어요. 사랑하는 게 있으면 됩니다. 나 아닌 무언가를 향유하고 즐길 게 있으면 돼요. 나에게 이것이 있는지 점검해 보셔야 됩니다. 그런데 내가 향유할 것을 찾는 게 문제죠? 이것도 노동하는 시간을 줄여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건, 노동을 아예 하지 않으면 이걸 꿈꾸지 못해요. 우리의 딜레마는 직장에 다니면 돈을 모으는데, 직장을 다니면 돈 쓸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혼자 집에서 쉬게 되면 돈은 없는데 돈 쓸 게 많아요. 그런데 직장에 다니면 돈은 생기는데 일하느라 돈을 쓸 시간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게 헷갈리죠? 그러니까 다음 공식을 머릿속에 넣어 놓으세오. '삶의 행복은 노동하는 시간보다 향유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커진다'라는 공식 말이에요. 여러분이 제로로는 만들 수 없어요. 일을 안 하고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일일부작 일일불식'이라고 했잖아요. 사실 일을 안 한다는 건 누구 걸 빼앗아 먹고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가장 이상적인 건, 직장에서 필요한 만큼 적당히 할 수 있는 일도 있고, 집에 가서는 무엇인가 향유할 것이 있는 겁니다. 저는 글을 쓸 때 행복해요. 하지만 이런 사람은 많지 않죠. 저는 화학공학과 출신이에요. 전공으로 취업도 됐어요. 하지만 제가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으면서 가장 먼저 돈을 포기했어요. '대충 어떻게 먹고살겠지'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지금까지 스무 권 가까이 책을 썼는데, 가장 처음에 썼던 대여섯권은 전문가 몇 명을 빼고는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어떤 책을 알게 됐죠. 그런데 저는 단 한 번도 책을 많이 팔아 먹으려고 글을 썼던 적은 없어요. 저는 글 쓸 때 정말 좋아요. 처음에 주변에서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 몰라요. 돌아가신 아버지도 정말 싫어하셨어요. 장남이라는 새끼가 지금 뭐하는 거냐고 하시면서요. 그때 제가 그냥 죄송하다고 했어요. 사실 철학과 대학원 합격해 놓고서 뻥쳤죠. 대학원 떨어지면 다시 취업하겠다고요. 저는 이렇게 출발했어요. 가장 행복한 삶은 스스로 하는 일, 지금 땀을 흘리고 하는 일이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면서도 즐거운 일이면 됩니다.
물론 일 자체가 행복한 사람들도 있어요. 예술가나 작가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프리랜서로 하면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지요. 이건 극소수의 사람만이 누리는 축복이에요. 그러니 현실적으로 일 자체가 행복인 경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러니까 일 좋아하는 사람을 흉내 내진 말자고요. 그건 진짜 비범한 일이에요. 더군다나 취업을 한다는 건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들이 원하는 일이잖아요. 그러니 힘들 수밖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을 조절하게 되면 여러분이 일하는 것이 의미가 있어요. 열심히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제 일을 하는 목적을 아니까 에너지를 낭비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보낼 시간, 내가 좋아하는 연극 볼 시간을 없애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돈을 많이 줘도 너무 일이 많으면 직장을 옮기세요. 이게 누구를 위한 일인지 금방 자각에 이를 수 있을 겁니다. 머릿속에 이 공식만 넣어 두면 여러분의 시간을 적절히 할당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될 거예요.
일에 대한 열정이 식어 걱정인 노예
서른두 살의 직장인입니다. 20대에는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일도 의욕적으로 하는 편이었는데 어쩐지 30대가 된 이후에는 모든 게 시들해지고 귀찮기만 합니다. 직장에서도 빨리 퇴근해서 집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만 들고 일을 할 때 집중도도 많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 보통 일에 대한 열정이 식는 것인가요? 꿈을 잊고 사는 게 당연해지는 것 같고 꿈을 갖는 것조차 욕심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이가 들면 내 삶이 누구를 위한 삶인가라는 자각에 이르죠. 멍청하지 않으면, 일을 그만두세요.〔일 그만뒀어요.〕잘 하셨어요. 드디어 남자친구를 시험에 들게 할 시간이 온 겁니다. 이 새끼가 치사하게 내 돈을 보고 나를 사랑한 것인지 아닌지 확인을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이렇게 부부나 커플이 맞벌이면 빨리 그만 두는 게 좋아요.(웃음) 일하는 상대방을 요단강 건너 이끌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해요.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제대로 살기 위해서요. 둘 다 일하는 커플들 보면, 둘이 충분히 사랑을 못 나눠요.
이걸 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셔야 돼요. 사표 잘 내고 오셨어요. 사표는 왜 내셨어요?〔회사에서 일이 너무 없어서요. 세 달 동안 놀았거든요. 죄책감 때문에요.〕잠깐만, 회사에서 일이 없는데 왜 그만둬요? 월급은 나오는데? 잘못하셨어요. 근면 콤플렉스를 가지시면 안 돼요. 근면의 콤플렉스는 노예의 덕목이란 말이에요. 다음 주에 직장 가셔서 잘못했다고 그러세요. 다시 그 회사 다녀요. 일거리가 없다고 주인한테 나를 쏴 죽여 달라고 이야기하는 충실한 노예인 거예요.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이게 노예의 죄책감이에요.
어쨌든 잘 그만두셨어요. 남자친구가 일을 하니까, 상관 없어요. 그리고 남자친구 사랑하죠?〔네.〕나중에 일해요. 일할 수 있어요. 이건 전혀 문제가 아니에요.
중요한 건 이거예요. 나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라고요. 제일 허무한 게 이런 거예요. 일을 너무나 열심히 하는 노예라서 자기자식이나 자기 가족도 못 돌보면 정말 완벽한 노예죠. "이 일 안 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은 사랑이에요. 우리가 자본에 저항할 수 있는 건 사랑 아닌가요? 사랑할 시간, 향유할 시간을 왜 빼앗겨요. '너희들이 뭔데 뺏어!'라고 저항해야죠.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좋아하는 취미,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어야 되니까 저항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게 없으면 동력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찾을지 우리가 고민을 해 봐야 합니다. 박수 한번 쳐 주세요.(박수)
직급이 불편한 짬밥 많은 노예
16년차 직장인이고 워킹맘입니다. 법률 사무소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어요. 일의 특성상 기일을 넘기면 안 되기 때문에 절대 실수를 범하면 안 되고, 제가 일 처리를 검수하고 관리하는 입장이다 보니 실수하는 팀원은 용납하기가 힘듭니다. 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팀원들은 저와의 갈등으로 여럿이 퇴사를 했고요. 고생 끝에 남아 있는 팀원들은 모두 일을 잘하고 있지만 이제 팀원들이 절 왕따를 시킵니다. 전 잔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혹 팀원들의 잡담에 끼어들라치면 분위기가 싸늘해지거든요. 그래서 팟캐스트 방송을 들으면서 소외당한 채 일을 하고 있습니다. 팀장직을 수행하는 것이 두렵고 힘들고 외롭습니다.
이분의 고민은 갓 취업한 분들의 고민은 아니네요. 그러니까 짬밥이 많은 노예인 거죠. 이분 고민이 공감이 되는 분들도 있고 전혀 안 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왜 법률 사무소 일을 자기 일 하듯이 하세요? 기일만 맞추세요. 본인 일하듯히 일을 못하는 사람들이 눈에 걸리는 거예요. 그리고 눈에 걸리는 걸 다 표를 내니까 팀원들이 싫어하는 거죠.
팀원들이나 나나 향유하는 시간 때문에 노동하는 건 똑같다고 생각을 하셔야 해요. 그런데 본인은 일을 열심히 하잖아요. 에너지를 일에 다 쓰는 거죠. 그런데 팀원들은 에너지를 다 안 쓰니까 그게 못마땅하신 겁니다. 그들을 본인처럼 만들지 마시고, 본인이 그들처럼 되세요. 그런 팀장이 되세요. 직장 상사가 일을 열심히 하면, 후배들이 퇴근을 못 해요. 잔소리 안 하고 일 열심히 하는 상사가 제일 무서워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솔선수범하는 사람이거든요. 그게 압력이에요. 팀원들 편하게 해 주려면 팀원들 있을 때 농땡이 부리는 척하다가 팀원들 나간 다음에 본인 일을 하세요. 상사가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어떻게 데이트를 나가겠어요? 잔소리를 안 하신다고 했는데, 잔소리보다 더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팀원들 빨리 퇴근시키려고 하고, 팀원들 일도 제가 좀 많이 하는 편이에요. 지금도 팀원 한 명이 출산 휴가로 들어갔는데, 사람을 안 뽑아서 그 사람 업무까지 제가 하고요.〕그걸 하지 마세요. 절대 하면 안 됩니다. 사람을 뽑으면 돼요. 누군가 빠졌을 때 그 사람 대신 그 일을 너무 열심히 하면 상대방한테 부채감을 안겨 주는 것이기도 해요. 그럼 그 대가를 요구하는 걸로 느껴져요. 좋은 마음으로 하신 일이지만 팀원들은 그렇게 읽을 거란 말이에요. 팀원들이 보기엔 너무 완전한 팀장인 거죠. 완전한 신처럼, 그러니 거리가 멀 수 밖에요.
워킹맘이라고 하셨는데 아이랑 남편이랑 관계는 좋아요?〔나쁘진 않아요.〕좋지도 않네요.(웃음) 에너지를 세이브하세요. 일을 하다 보니까 에너지가 방전되고, 그러면 가족이랑 지내는 시간이 점점 힘들어지고, 회사에 있는 게 편해져요. 그래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일을 줄이셔야 해요. 일을 줄이고 에너지를 세이브해서 집에 가셔서 남편이랑 아이와의 관계를 복원하세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본인이 계속 일에 탐닉하면 팀원들도 향유하는 시간 다 버리고 본인처럼 노동만 하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아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부지불식간에 압박을 받는 거지요. 그래서 욕먹는 거예요. 향유하는 시간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팀장이 된다면 분명 존경받는 팀장이 될 겁니다.
일터에서 인간관계를 갈구하는 노예
8년째 같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2년 전 저보다 네 살 어린 후배가 입사했고 처음에는 친해야 한다는 마음에 사적인 이야기도 많이 하며 가깝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감정싸움이 크게 한 번 있었고 표면적으로 화해는 했지만 그 뒤로는 말을 하지 않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업무와 관련된 대화 말고는 전혀 대화를 하지 않고 있어요. 앞으로 후배와 대화 없이 지내는 게 옳은 것일까요? 아니면 과하지 않은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옳은 것일까요?
친하게 지내려고 오버해서 생긴 문제예요. 뭔가 바람이나 기대가 있었던 거죠. '우리는 직장에서 만났지만 이해관계를 가진 게 아니라 인간적인 관계일 거야.' 이건 상당히 오버하고 있는 겁니다. 그 후배는 돈 좀 벌어서 애인이랑 지내고 싶은 사람이에요. 선배가 자꾸 친하게 구는 거 싫어해요. 직장에서 공과 사를 구별해야 해요. 직장 후배한테 친한 척하면서 사적인 관계를 터놓으려고 하면 그게 후배에게는 폭력으로 다가와요. 굉장히 부담스럽거든요. 시시콜콜 다 알려고 하면서, 네 남자친구는 버릇이 안 좋은 것 같다는 둥 오만 이야기를 다 해요. 이러면 문제가 시작되는 거예요. 아마 그 후배에게 너도 나를 인간적으로 대해 달라는 무의식적인 압력을 넣었을 거예요. 그 다음은 보나 마나죠. 그 후배는 다른 사람이니까 내게 한 번은 상처를 줬겠죠. 그리고 관계를 닫았고, 지금까지 온 거죠. 그 상태로 그냥 계셔요. 후배와 대화 없이 지내는 게 옳은지, 과하지 않은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옳은지 물으셨죠? 다 틀렸어요.
직장에 왜 다니죠? 그 친구랑 사귀려고? 본연의 의무에 충실하도록 합시다. 사무적인 이야기만 하세요. 혹여 직장 동료들이 너무 좋고 즐겁다면 그건 요단강 건너간 겁니다. 그리고 사람이 감정 상하는 것은 대나무 쪼개지는 것 같아요. 파죽지세라는 말 있죠? 대나무를 위에서부터 탁 쪼개면 쫙 갈라져요. 다시 합쳐지기 힘들어요.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 처음에 친하게 지내야겠다는 의도가 좋지 않았던 것 같아요. 자연스러워야 했어요. 친하게 지내자고 했지만, 본인은 '나를 언니처럼 대해'라고 바란 거예요. 그래서 삐친 겁니다. 본인이 동기예요. 이런 것 요구하지 않았나요? 본인이 먼저 사적 고뇌 같은 것들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너는 나한테 이야기 안 해?' 이런 식 말예요. 스토커랑 크게 차이가 없어요. 후배가 본인을 더 두려워 할 거예요. 그런데 이럴 때는 시간이 약이기도 하거든요. 가만히 시간을 보내세요. 아물 때까지.
회사 생활 힘드셨어요? 집에서 행복해요? 애인과는 사이가 좋아요? 본인이 회사에서 행복을 찾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후배들이랑 애정을 나누고 싶었던 것이고요. 향유해야 하는 시간에 향유가 안 되는 게 이 모든 문제의 본질이에요. 함께 향유할 사람들이 마땅치 않으면 일하는 곳에서 찾을 수밖에 없고, 그러다 상처를 받으신 거예요. 그런데 일하는 곳에서 찾지 말아요. 그곳은 향유하는 곳이 아니고 노동하는 곳이잖아요. 향유하는 시간이 충만하면 노동하는 시간에 만나는 사람에게 향유하는 시간을 요구하지 않아요. 어쩌면 후배는 이렇게 느꼈을지도 몰라요. '이 선배는 왜 이러지? 동성애자인가? 왜 나한테 사랑을 얻으려고 하는 거지? 좀 지나친 거 아니야?' 그러니까 오히려 향유하는 시간이 충분히 있는 사람들이 노동하는 시간이나 일하는 시간에 타인들을 만나면 문제가 없어요.
직장 상상의 가정이 화목하지 않으면, 그 후배들의 직장 생활은 굉장히 피곤해져요. 집에도 안 들어가려고 하고 자꾸 회식하고 그러잖아요. 이럴 때는 해법이 그 상사한테 있는 게 아니라 그 상사의 파트너한테 있는 거예요. 좋게 지내는 게 좋은 거 아니냐고 생각하시겠지만, 본인이 향유하는 시간이 충분하고 충만하면 후배한테 인정받을 필요가 없어요. 후배한테 인정받아서 뭐해요? 내 남자친구가 날 사랑해 주는데요? 자꾸 노동하는 시간, 일하는 시간에 애정을 찾고 향유를 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후배 입장에서는 헷갈리는 거죠. 직장은 일하는 곳이고, 직장에서의 시간은 향유하느 시간도 아닌걸요. 후배 잘못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고민을 해결하려면 회사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의 시간이 행복한가를 본인이 점검을 해 보셔야 합니다. 향유를 한다는 건, 퇴근하고 기꺼이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가고 싶은 장소가 있다는 겁니다. 후배와의 관계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밥값 못하는 잉여 노릇이 고역인 노예
회사를 관두고 좀 놀면서 다음 회사를 찾아볼까 고민하는 싱글녀입니다. 회사 경력 14년차입니다. 싱글녀라고 밝힌 것은 '스스로 벌어먹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예요. 현재 회사에 일이 별로 없어서 그만두려고 합니다. 밥값 못하는 잉여 노릇은 고역이에요. 잉여 노릇한지1년 가까이 되어 갑니다. 다들 잉여 노릇은 고역인 것 아닌가요?
이런 회사라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제가 단언컨대 회사에서 본인을 자를 거예요. 그런데 잘리는 게 무서운 거죠. 아주 상태 안 좋은 사람이 겪는 유명한 패턴이 하나 있어요. 비가 올까 봐 무서워서 센 강에 뛰어내려요. 미리 강물에 젖으면 비에 젖을 걱정이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회사가 어려워 나중에 해고될 테니까 미리 그만두려는 거예요. 해고당하기보다 스스로를 해고하는 거죠. 멋지고 비장해 보이지만, 이런 식의 비장함을 선택하는 건 약한 사람들만 하는 거예요. 부모님한테 혼나는 게 너무나 무섭기 때문에 일어나는 기묘한 현상입니다. 그 무서움을 감내하는 방법 중 하나가 자학을 하는 거예요. 부모님에게 혼날 때 '나는 죽일 새끼야. 나는 맞아 죽거나 칼에 찔러 죽어야 돼'. 이러면서 벽에 머리 막 부딪치고 피 흘리고 자기한테 고문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부모님을 만나도 담담해요. 어디서나 가중처벌은 없거든요.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처벌하는 사람이 있어요.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죠? 지금 그만두시는 건 사실은 실직이 무서워서 미리 그만두는 거예요. 회사가 곧 문 닫을 것 같죠? 그때까지 그냥 편하게 계속 월급을 받으세요. 미리 그만 두는 건 아니에요. 잉여를 즐기세요. 일도 하지 않고 월급이 나온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축복 아닌가요? 뻔뻔스러워지세요. 그리고 직장 상사에게 말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놀고 있지만, 일만 주어져 봐요. 정말 치열하게 일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인터네서 서핑을 하든가 손톱 손질이나 하세요. 저녁 때 남자를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일이 없다고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일이 없어서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은 사장의 일이니까요. 스스로 그만두다니요! 아니면 사장에게 요구하세요. "심심하니까, 일거리 좀 가져오세요. 사장이 그것도 못해요?" 명심하세요. 일이 없는데 돈이 나온다는 행운은 그리 자주 오는 것은 아닙니다. 즐기세요.
자발적 업무 처리로 지쳐 버린 노예
사회 초년생인 스물일곱 살의 남성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내 일도 네 일도 아닌 일들이 있더군요. 보통은 '눈치를 보다 다른 사람이 하겠지'라며 넘기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제가 처리할 수 있는 부분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처리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과부하에 걸린 것 같아요. 안 그래도 바쁜 시기인데 그런 일까지 떠안다 보니 정말 돌아 버릴 지경입니다. 주말까지 나와 잔업을 하니 정신적, 체력적으로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강신주 박사님, A/S 신청합니다.
이럴 때 내가 그 일을 하게 되면 나만 하게 돼요. 이건 처음에 잘해야 됩니다. 처음에 버텨야 돼요. 공동생활을 하면서 집이 더럽다고 먼저 치우면 안 돼요. 그런데 저분은 치우신 거예요. 치우기 시작하니 계속 저분이 치우게 된 거예요. A/S 신청하신다고 했는데 A/S가 어디 있어요? 다 자기 복이죠. 그냥 저분이 착한 거예요. 착한 사람은 원래 힘들어요. 이건 해결이 안 돼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본인이 그 일을 안 해도 누군가 또 그 일을 하게 돼요. 그런데 이렇게 자기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하는 그 시간은 사실 노동하는 시간이 아니라 향유하는 시간에 속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향유하는 시간을 보낼 줄 모르니까, 그 시간에 뭘해야 할 줄 모르니까, 자신이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을 하는 거죠.
정상적인 인간은 향유하는 시간을 누리려고 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내 일도 네 일도 아닌, 어정쩡한 일은 안 해요. 내 일도 줄이려는 판에 그걸 왜 해요? 본인이 바보인 거예요. 본인도 향유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일을 하면 안 되죠. 누가 더 향유하는 시간을 누릴 것인지 싸우는 거예요.다 안 하면 어떻게 되냐고요? 충원을 합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이 태도가 중요해요. 제가 출판사 편집자들을 많이 만나는데 편집자들이 너무 힘들어요. 한 달에 받는 월급은 너무 적고 출판사 사장들은 직원을 안 뽑아요. 그럼 이 편집자들이 퇴근하고 원고를 들고 집에 가져가요. 편집자들이 이걸 안 해야 직원을 뽑는다고요.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고용이 창출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계세요. 그리고 좀 더 물어 볼게요. 본인은 비정상 아닌가요? 왜 그 일을 하셨어요? 조직을 위해서 하셨죠? 그러니까 주인이 좋아하죠.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아시겠죠?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을 일치시키고 싶은 노예
4년차 편집 디자이너라는 직함으로 살아가고 있는 서른 살의 여성입니다. 마지막 회사에서는 2년간 근무하고 퇴사했습니다. 보다 발전가능성이 기대되는 곳을 찾기 위해 퇴사했지만, 구직이 쉽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조건은 작업의 매력도, 근로기준법에 맞는 복지 조건, 연봉 이 세 가지입니다. 어느 한 가지를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불만을 견디면서 근무할 자신이 없습니다. 백수 생활이 반년 이상 지속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돈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살다 보니 사람 만나는 것도 기피하게 되고, 놀아도 노는 것이 아니고, 가족들에게 신경질이 부쩍 느는 등 마음의 여유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원하는 회사에는 진즉 연락을 해 보았지만 채용 계획이 없다는 응답이 다수였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철저한 기다림뿐인데 자신도 없어지고 두렵기도 합니다. 이 불안한 시기를 어떻게 지내야 할까요? 결국 제가 원하는 근무조건 가운데 어떤 부분을 타협해야 하는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갑을 관계라고들 하죠? 자본주의가 별게 아니에요. 자본이 갑이고, 인간이 을이지요. 이건희가 우리보다 위대한 건 우리보다 돈이 많다는 거예요. 우리보다 아주 많아요. 우리는 돈이 없어요. 자본주의는 우리가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도록 만든 체제입니다. 돈이 있어야 짜장면도 사 먹죠. 배고프다고 해서 자기 살을 파먹을 수는 없잖아요. 짜장면을 만든 사람도 돈이 없다면, 음료수를 사 먹을 수 없습니다. 무조건 돈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의 가치가 강력한 겁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갑을 관계는 자본과 인간 사이에 있는 겁니다. 이건희와 우리 사이가 갑을 관계로 보이지만, 본질적인 갑을 관계는 아니죠. 이건희가 돈이 없어지고 우리가 돈이 생기면, 바로 갑을 관계가 뒤집어지니까요.
이렇게 돈이 없으면 생계마저도 위험한 사회, 돈에 팔리지 않으면 자신이 가진 기술도 의미가 없는 사회,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이러다 보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이 아니라 자본가가 원하는 것을 익히게 되겠지요. 능숙한 외국어 능력을 요구하니, 학원에 다니는 것처럼 말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즐거운 일, 향유할 수 있는 일을 하기보다는 자본가가 좋아하는 일, 자본가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일을 하게 되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주인이고, 타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노예 아닌가요? 그렇지만 누가 노예의 삶을 살고 싶겠어요. 그러니까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기 위해 투쟁하는 겁니다. 100여 년간 '우리는 인간이다. 우리는 향유할 시간도 필요한 인간이다'라며 자본과 싸워 왔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본인이 편집디자인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그건 굉장히 좋은 조건입니다. 이런 분들은 노동하는 시간에 향유를 찾을 수 있어요. 연애를 안 해도 됩니다. 일하면서 충분히 행복하니까요. 이분은 일을 할 때 돈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노동을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힘드신 거예요. 사실은 가장 큰 욕심을 내고 계시는 겁니다.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을 일치시키고 싶으신 거니까요. 그런데 그거 하지 마세요. 가장 이상적인 걸 선택하셔서 힘든 겁니다. 포장마차라도 하시고, 집에서 디자인을 하세요. 복지, 작업의 매력도, 연봉이라는 조건을 말씀하셨는데 앞에 두 개는 치우시고 연봉에만 올인하세요.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이 일치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이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힘든 기간을 거쳐야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일단 지금은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을 분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디자인 작업을 정말로 본인이 향유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고민을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 배워왔고, 일했고, 칭찬 받았던 것이 디자인이기 때문에 디자인을 좋아하시는 것일 수 있어요. 본인의 삶에서 향유할 수 있는 다른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착이 어려운 노예
스물여섯 살의 직장인 여성입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최대한 부모님께 손을 안 벌리고 살아 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일을 길게 해 본 적은 없어요. 대학을 졸업하면서도 운이 좋게 취직이 되었지만 지금 직장이 벌써 세 번째 직장입니다. 아직 젊기 때문에 3, 4년 정도는 제가 좋아하는 일을 찾고 싶지만, 한 직장에서 2년 이상 진득하게 일을 할 자신은 없습니다. 또 다른 재미있는 일이 보이면 옮겨 갈 것 같아요. 이렇게 한 직장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저, 병일까요?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건, 부모와의 관계입니다. 부모님을 우려먹을 수 있을때까지 다 우려먹어야 돼요. 왜냐면 그 이상으로 여러분이 부모님께 하게 되어 있거든요.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장례비 제가 다 내더라고요. 그리고 한 직장에 정착하지 못하는 건, 병이 아닙니다. 욕심이 있는 거죠. 매시간을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야 해요. 왜 일하는 노예가 주인의 집에서 가장 즐거운 일을 찾아요? 다행히도 본인은 향유하는 시간이 중요하고 좋다는 의식은 갖고 있습니다. 행복해야 된다는 것, 직장을 이렇게 자주 옮기는 건 굉장히 당당하고 용기 있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쫄아서 못하잖아요.
본인은 정상적일 뿐만 아니라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예요.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감각은 있는 거예요. 이런 생각하는 분들 있을 거예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어떻게 살아?' 전형적인 노예들이죠. 싫어하는 일만 하는 게 인생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거든요. 죽어야 되는 사람들이죠.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왜 살아요? 제일 불쌍한 삶이잖아요. 그래도 '이건 내가 좋아한다. 이건 좋아하는 일이 아니다'라는 감각이 있으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막연한 감은 있는 거예요. 이런 정도의 감각은 있어야 진짜 좋아하는 것을 만났을 때 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오는 거라고요. 그런데 '어른은 싫어하는 것도 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좋아하는 걸 미리 줄겨 버리면 어떡해요? 본인은 괜찮은 상태입니다. 병이 아니에요.
무시당하는 직업을 존중받고 싶은 노예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일하는 조건으로 월 130만 원을 받고 찜닭 가게의 홀 서빙 직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식당 직원 모두가 제대만 기다리는 병장들이더라고요. 한 동료는 "누나, 얼마나 일할거야? 여기 그만두면 갈 데는 있어? 학교는 안 다녀?"라고 말하며 저를 맨붕에 빠뜨리더군요. 식당 일이라는 게 정말 너무 쉽습니다. 아무나 와서 대충하다 보면 금방 적응해서 일을 잘합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이걸 아르바이트 정도로 생각하지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장기적인 직업으로 이 일을 삼으려는 사람에게는 제대로 된 일 좀 하라고 하더군요. 급여가 적고 남들 쉴 때 못 쉬며 힘들게 일하는데도 인정을 못 받는 것이죠. 사람들의 인식 때문도 있지만 정작 이 직업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이런 문제를 그다지 고민해 보지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관리자 직함을 달고 있는 사람도 일하는 사람을 일회용으로 착각하고 쉽게 생각합니다. 일을 하는 본인도 동료도 타인도 경시하는 일을 어떻게 존중받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허영에서는 벗어나야 할 것 같아요. 정규직,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와 같은 구분들이 있죠? 그런데 우리가 특히 아르바이트라는 용어를 함부로 쓰는 것 같아요. 너무 자조적으로 폄하하듯이 '나 요즘 알바해'라는 식으로 쓰고 있죠. 일은 어느 것이나 모두 굉장히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존과 향유를 가능하게 하니까요. 그러니 고맙고 소중한 것이죠. 향유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연봉이 높은 정규직이라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향유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면 차라리 아르바이트가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정규직이면 뭐해요? 밤새도록 야근하고 돈을 많이 벌면 뭐하냐고요. 그 돈으로 향유할 시간도 없는데 말예요. 다 정규직에서 일한다는 허영뿐이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생존과 향유를 동시에 고려하면서 일자리를 고민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향유할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은 있기 때문이에요.
반대로 향유는커녕 생존도 보장하지 않는 일자리들이 늘어 간다면, 치열하게 정권이나 자본가와 투쟁을 해야겠죠. 자기 밥그릇을 챙기는 것은 동물도 하는 일이에요. 만물의 영장인 우리가 동물도 하는 행동을 못한다고 해서야 말이 돼요? 그러나 혼자서는 사회 시스템을 바꾸기 힘드니, 우리가 단결하고 연대해야 할 겁니다. 물론 이런 투쟁은 밥그릇 자체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밥그릇이 확보되고 어느 정도 그것이 넘쳐야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투쟁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갈수록 정권과 자본은 밥그릇을 걱정하게 하는 사회를 만들려고 하죠. 그래야 우리가 자기들의 말을 잘 듣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배고프면 시키는 대로 다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쁜 놈들이죠.
지금 우리 사회는 노동하는 시간을 더럽게 많이 늘려 왔어요. 이분은 지금 하루에 12시간을 일하고 130만 원을 받습니다. 심각한 문젱. 생존하기 위해서 200만 원 정도가 필요하다면, 이분은 18시간은 일해야 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향유하는 시간을 갖고 싶고 무언가를 향유하고 싶어도 지쳐서 못 해요. 가령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가서 보살펴 주고 싶잖아요. 그런데 내가 오늘 18시간을 일하면 보살피기도 전에 지쳐요. 이게 우리의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구조적인 문제예요. 항상 이 문제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나는 아니다'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여러분 후배들, 여러분 아이들이 이 구조에 다시 또 편입되기 때문입니다. 삶의 질은 엉망이 되겠죠.
12시간 일하고 130만 원을 받고 산다면 결혼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여행갈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예쁜 강아지 한 마리 키울 수 있을까요? 이 문제는 우리가 같이 고민해 줘야 되는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들이 힘을 좀 많이 내야 하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노숙자를 봤을 때, '저 놈의 노숙자'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 노숙자 한 명을 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노숙자라는 형식을 없애야 하는 거죠. 한 명의 노숙자가 사라지면 또 노숙자가 들어오잖아요. 이것이 인문학적 감수성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의 노동 구조 속에 여러분의 증손자가 증손녀가 들어가는 모습을 봐야 돼요. 집세도 오르고 연금도 올라갈 거고, 몸 아플 때 돈 없으면 고치지도 못하는 세상이 될 거라고요. 돈 많은 놈만 살게 되는 겁니다.
직장 다니시는 분들 고민을 좀 해 보세요. '회사 일을 사랑해' 절대 이런 생각하지 마세요. 불행히도 일을 사랑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퇴근 후에 낙이 없는 분들, 그러니 그나마 친숙한 회사에 나와 있는 게 더 좋으신 분들도 있어요. 사람은 더 편한 곳에 가 있으려고 하거든요. 주말에 아이만 보면 졸리고, 아이가 놀러 나가면 잠이 깨요. 과도한 노동 때문에 피곤해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무 피곤해서 아이랑 놀 시간이 없으니까 아이랑 노는 방법을 모르죠. 그러니까 더 피곤한 거예요. 사람은 친숙한 것을 수행하는 데는 에너지가 적게 들지만 친숙하지 않은 것을 할 때는 에너지가 많이 들어요.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계속 낯설어지니까 계속 적응을 해야 되죠. 그러니까 사실 아이가 자라는 걸 따라갈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하면 자식과의 관계는 붕괴됩니다. 돈으로 처바를 수밖에 없죠. 나중에 아이가 돈 벌기 시작하면 끝나는 관계인 거예요. 이 불행이 계속 반복됩니다. 이건 사회적 조건들의 문제예요.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이 있는데, 향유하는 시간을 극도로 줄이면 사회가 보수화되는 겁니다. 연금으로 퉁쳐서 20만 원 주는 게 복지가 아닙니다. 향유하는 시간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향유하는 시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일 근처에 가도록 취업과 이직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우리는 지금 개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들을 모색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바뀌어야 해요. '왜 그렇게 열심히 해요?' 그런 얘기하는 사람들 있죠? 어차피 잘리거나 그만둘 거고 내가 좋아하는 일도 아니니 미리 그만둘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일이 싫어서 그렇게 된 건 아니에요. 보수화된 사회구조 탓이고 사람들을 생계에 연연하게 만들면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람들 탓이죠. 정 붙이면 정 붙인 일을 그만두는 건 너무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스스로 정을 안 두는 거예요.
백장 스님 얘기를 다시 한 번 드리고 싶습니다. 일하는 동안에는, 무슨 일을 하든간에 우리는 살아 있는 겁니다 우리의 가장 큰 착각은 우리가 자본가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나의 일을 돈이 되는 일과 돈이 안 되는 일로 스스로 나누고, 좋아하는 일이지만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버렸던 겁니다. 그 죗값을 지금 치르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본이 원하지 않아도 내가 행복하다면 기꺼이 그 일을 하고, 내가 행복한 일을 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면 또 사냥을 떠나면 됩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이 향유이자 동시에 노동이가도 한 사람이겠죠. 제작하고 창조하고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이죠. 홀로 하는 직업일 때만 가능해요.
하지만 어떤 회사에서 그 성원으로 노동자로 취업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이제 아시겠죠? 최대한 여러분이 에너지를 아끼면서 월급을 받는 지혜를 가질 것. 근면의 신념은 절대 가져서는 안 될 것. 근면해서 좋은 게 아니라 여러분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부지런해집니다. 연애가 좋으면 우리가 얼마나 근면하게 연애를 해요? 근면의 가치를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이 있으면 근면하게 되지만 근면하다고 해서 내가 그 일을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가져야 할 지혜는 시간에 대한 것입니다. 삶의 시간은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 둘로 양분됩니다. 우리의 행복은 가급적 노동하는 시간을 줄이는 데 있는 것이죠. (하지만 노동하는 시간을 아예 없애고 향유하는 시간만 있다고 하면, 그건 누군가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어쨌든 우리의 삶에서 일과 노동은 뺄 수 없어요.)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면, 우리는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사회철학자나 정치가들도 모두 이 삶의 시간을 기준으로 주어진 사회를 분석하고 도래할 사회를 꿈꾸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봤을 때 사람들이 노동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향유하는 시간이 없다고 하면 그 사회는 나쁜 사회인 거예요. 이런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불행이자 남루함이지요. 학교에서 학생들이 자기가 원하지도 않았던 과목을 공부하고, 쉬지도 못할 때 불행한 것처럼 말예요.
노동만 하는 노예의 삶은 우리를 자살로 이끌어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하나도 없는데 왜 살아요? 결정적인 순간에 죽을 수 있어요. 하지만 주인은 자살하지 않아요. 내가 좋아하는 게 있고, 내가 향유하는 게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취미가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가,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왜 죽어요?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얻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에 학창 시절을 보냈던 분들은 굉장히 쪼이는 삶을 살았고, 최고급 노예가 되었습니다. 노예가 되는 것조차 힘들어질 것 같은 불안감 속에서, 노예가 되는 게 최상의 삶인 것 같은 경제적·사회적 조건에서 살아오신 겁니다. 취업을 못하면 아예 노예도 못되는 불쌍한 인간이라고 취급을 받았던 거죠.
하지만 잊지 말자고요. 이 자리에 많은 고민들이 나왔잖아요. 나의 삶에 일이란 무엇인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더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언제 지금 있는 직장을 떠나 다른 직장을 구해야 하는지도 분명해질 겁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마세요. '대학 졸업하면 누구나 직장에 가니 나도 가야지'라는 식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낼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잘 살아서 나중에 눈감을 때 '참 재밌었다'며 돌아가셔야 돼요. 내세를 기대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을 기대하는 삶 말고 지금 여기에 젖과 꿀이 흐르도록 합시다. 항상 이걸 명심하자고요. 그러니까 앞으로 사냥 잘 하시고, 사냥이 어느 정도 됐으면 빨리 빨리 먹이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여러분이 좋은 사냥을 하시고, 잘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추신 우리는 왜
죽도록 일만
하는가?
워커홀릭의계보학
만일 행복이 눈앞에 있다면
그리고 큰 노력이 없이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등한시되는 일이
도대체 어떻에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
-스피노자 Baruch Spinoza,《에티카》
독재자의 생각에 따라
소처럼 묵묵히
근면, 자조, 협동,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구호일 겁니다. 개발 독재 시절 농촌 지역을 근대화하려는 목적으로 정부 주도하에 시작된 새마을운동의 슬로건이지요. 당시 새마을운동은 <잘살아보세>라는 배경음악과 함께 위풍당당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해묵은 가난과 배고픔을 극복해 보자는 것이 표면적인 명분이었지요. 그렇지만 지금 돌아보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빠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슬로건 자체가 그저 소처럼 일만 하자는 취지 아닌가요? 더군다나 정부가 주도했던 운동임에도 모든 책임, 즉 가난의 책임을 국민들에게 전적으로 돌리고 있는 논리도 문제이지요. 부지런하지 않기 때문에, 정부나 타인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서로 도와주지 않기 때문에 가난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저 소처럼 묵묵히 열심히 일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언젠가 우리도 잘 살게 될 테니까요.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인지, 그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다는 것, 아니 생각하지 말아야 했었다는 것, 그것이 박정희의 지배가 독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생각은 오직 최고 통치자만 하면 됩니다. 그의 탁월한(?) 영도에 따라 그저 묵묵히 일하면 됩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생각마저 대신 해 준다는 최고 통치자의 배려가요.
여기서 억압적인 사회를 정당화하는 해묵은 관념이 떠오르지 않나요? 사회에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란 분업이 존재해야 하며, 당연히 정신노동은 육체노동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입니다.《맹자》의 <등문공·상上> 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등장합니다.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지배를 받는다.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신을 지배하는 사람을 먹이고, 지배하는 사람은 지배를 받는 사람에게서 먹을 것을 얻는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맹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심자勞心者'와 '노력자勞力者'라는 구분은 동서양 할 것 없이 모든 권위주의적인 체제의 핵심적 공리로 반복됩니다. 이것이 박정희 개발독재가 우리에게 혹은 민주주의에 안겨 준 치명적인 상처의 핵심일 겁니다. 그는 우리를 마음은 쓰지 않고 육체를 쓰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쓰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운명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와 같은 가축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요? 생각의 자유가 없다면 우리가 짐승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어떻게 민주주의가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각 개인이 자신의 자유로운 판단에 따라 공동체의 규칙을 결정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란 불가능한 법이니까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양심의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 그리고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자신만이 생각하겠다는 박정희의 오만에 대해 국민들이 저항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생각의 능력을 가진 인간이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렇지만 박정희는 1972년 유신헌법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그러니까 스스로 생각하겠다는 국민들의 염원을 좌절시키고 맙니다. 그러나 과연 1945년 해방된 이래, 독재자는 박정희만 있었던 것일까요? 불행히도 절대 아닙니다. 박정희의 독재 이전에 권력을 위해 부정선거를 꾀하던 이승만의 독재가 있었고, 박정희 이후에도 광주를 피바다로 만든 전두환의 독재가 있었지요. 그러나 시선을 더 확장해 보세요. 20세기 초반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였습니다. 식민지의 주민만큼 폭압적인 독재에 시다렸던 사람이 또 있을까요? 결국 우리의 20세기는 독재의 세기,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숨을 쉴 수도 없었던 독재와 폭정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며 살 수가 없었던 겁니다. 너무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아, 스스로 생각하는 것마저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 되고 말았던 겁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던 겁니다. '독재자만이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주민들은 그저 독재자의 생각에 따라 소처럼 묵묵히 일해야 하낟'라고 말입니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독재 치하에서는 하나의 반역행위일 수밖에 없으니, 어쩌면 생존을 위한 이런 우리의 선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산업자본이 명령하는 불가피한 사명:
자기 계발과 자기 혁신
산업자본주의를 떠나서 우리는 근대사회의 핵심을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산업자본은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과거의 낡은 제품을 폐기처분하는 힘으로 작동합니다. 그래서 산업자본은 상업자본과는 그 작동 원리 자체가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상업자본은 공간의 차이, 정확히 말해서 가격 차이가 나는 두 지역을 전제로 해서 이윤을 얻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바닷가에서는 해산물의 가격이 싸지만, 내륙 깊은 곳에서는 동일한 해산물이 훨씬 더 비싼 가격에 팔립니다. 그러니까 상인은 우선 바닷가 근처 어촌에서 해산물을 삽니다. 그렇지만 어촌의 그 누구도 상인에게 싸게 팔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겁니다. 제 가격을 주고 팔았으니까요. 해산물을 들고 상인은 내륙 마을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상인은 해산물을 팝니다. 그렇지만 마을의 그 누구도 상인이 비싸게 팔았다고 투덜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곳의 해산물 가격으로 팔았으니까요. 이렇게 가격 차이가 발생하는 지역들이 존재하는 한, 상인, 그러니까 상업자본은 항상 발생할 수 있습니다.
상업자본과는 달리 산업자본은 시간의 차이를 통해서 이윤을 남깁니다. 상업자본의 경우 공간의 차이, 그러니까 지역에 따른 가격 차이가 미리 정해져 있다면, 시간의 차이는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자본 자체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상품을 시중에 내놓으면서 산업자본은 우리에게 시간이 흘러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합니다. 산업자본이 신제품으로 만든 새로운 시간 차이가 바로 '유행'이지요. 유행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고 싶은 인간의 허영을 매우 강하게 자극합니다. 새로운 옷을 입거나 새로은 차를 몰 때, 우리는 자신보다 유행에 뒤떨어진 옷이나 차를 가진 사람을 보고 우월하다는 느낌을 갖기 쉬우니까요. 유행을 선도하는 산업자본은 살아남아 번성할 테지만, 그렇지 않고 한때의 영화에 취해 있는 산업자본은 무자비하게 도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때 휴대폰 시장을 장악했던 노키아라는 회사가 스마트폰의 유행 앞에서 도태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결국 새로운 유행을 만드는 데 중요한 계기인 기술혁신은 산업자본으로서는 사활을 건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분업화의 논리가 중요한 관건으로 대두합니다. 그러지만 분업화는 전문화의 과정이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기술혁신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전문화가 더 유리할 테니까 말입니다. 이런 산업자본의 내적 메커니즘에 부응하기 위해 대학을 포함한 연구기관도 세분화되고 더 효율적으로 전문화된 인력을 양산하는 방향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좌우지간 10개를 한꺼번에 연구하는 것보다 1개만을 연구할 때, 기술혁신은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요. 당연히 산업자본이 발달할수록 종합적이며 전인적인 교육, 혹은 인문학적 교육은 와해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산업자본은 분업 체계의 한 구석을 담당할 수 있은 전문교육을 선호하니까 말입니다. 산업자본 사이의 경쟁이 치열할수록, 이런 경향은 강화될 수밖에 없지요. 그 부작용이 아마도 인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인문학의 퇴조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대학에서도 그리고 직장에서도 이제 우리는 새로운 기술혁신을 강요받은 존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당연히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연구실에서 아니면 회사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에너지 부분은 우리가 맡고 있는 전문화된 분야에 투여됩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별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대학에서부터 우리는 자본이 요구하는 것만을 배워 왔기 때문이지요. 이미 자신이 전공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나머지 분야에 문외한이 된 지 오래된 셈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기술혁신이라는 자본의 명령을 생존의 명령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 계발과 자기 혁신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사명이 되어 버린 겁니다. 면접 때 우리는 자신이 자본이 원하는 능력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고해성사를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고해성사는 이제 상시적인 일이 되어, 별로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매번 우리는 자신이 월급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향유의 시간을 강탈당한
워커홀릭의 탄생
오래된 독재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생각하는 걸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인지 조금만 생각하고 반성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더 행복했을 텐데 말입니다. 불행한 일이지요. 설상가사상으로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자본주의는 우리를 한 치 앞도 생각할 수 없는 치열한 경쟁 속으로 더 무섭게 몰아넣어 버리고 맙니다. 이제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축복이 되어 버렸지요. 그러니 일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고, 여력도 없습니다. 한눈을 팔았다가는 그나마 있는 일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일에 몰입하게 됩니다. 일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 혹은 일할 수 있을 때 실직의 공포를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침내 우리는 일에 중독된 워커홀릭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왜 일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일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과거 원시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지헤로웠다고 할 수 있지요.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우리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겁니다. 자신의 삶은 사냥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으로 양분된다는 사실을, 당연히 그들은 사냥하는 시간은 향유하는 시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향유하는 시간은 사냥하는 시간이 아니라 사랑하는 시간, 공유하는 시간, 그리고 창조하는 시간입니다. 물론 그들은 사냥하는 시간을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냥을 하지 않는다면 향유도, 사랑도 창조도 불가능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사냥하는 시간을 통해 아무리 많은 사냥감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일정 정도의 사냥감이 모이면 신속하게 부족과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요. 그들은 생각보다 빨리 사냥감을 확보한 것에 대해 자기가 믿고 있는 신에게 고마움을 표시했지요. 그렇지만 신에게 고마워하는 이유는 그만큼 그들에게 향유하는 시간이 많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원시인들의 삶을 엿보게 해 주는 동굴을 들어가 보세요. 그들은 자기의 주거지에 온갖 벽화를 새겨 넣었습니다. 생존을 위한 경제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가능한 예술 활동을 그들은 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분명 우리는 양적으로 원시인들보다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문명의 헤택을 누리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불행하기만 합니다. 지금 우리는 향유하는 시간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까먹고 있기 때문이지요. 일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것에 젬병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하나에 능숙하다는 것은 다른 것에는 서툴다는 것을 함축하니까요. 그러니 아이들과 노는 것, 아내와 산책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 심지어 가족과 함께 공연장에서 연주에 몸을 맡기는 것, 어느 것 하나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한다는 것은 항상 과도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일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다시 일에 몰입하게 됩니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일밖에 없고, 그래서 일할 때 편안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식으로 마침내 우리는 구제할 수도 없는 워커홀릭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 용기가 필요한 시간
'왜 한국인은 죽도록 일만 하는가?' 이제야 우리는 대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일만 했던 오래된 독재의 경험, 그리고 치열한 생존 경쟁으로 일자리 자체를 지상의 가치로 만들었던 산업자본의 압력, 이 두 가지 요소가 서로를 강화시키면서 우리를 워커홀릭으로 만들었던 겁니다. 마침내 일만 하는 가축과도 같은 삶이 탄생했고, 사랑하고 창조하는 향유의 시간은 철저하게 망각되어 버린 겁니다. 푸코Michel Foucault의 지적처럼 지배와 억압이 관철되는 최종 장소가 주체인 것처럼 자유와 행복이 실현되어야 하는 장소도 주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시대에 인문학이 필요한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문학은 수동적이고 관습적인 주체를 능동적이고 성찰적인 주체로 변형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제 깊게 생각할 때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그리고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는 어떤 덕목이 필요한지. 이제 눈에 들어오시나요?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진정한 덕목이 바로 용기라는 것이, 사랑하고 창조하는 시간, 즉 향유하는 시간을 위해 일하는 시간을 줄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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