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행복한 사물 감식가 2

오키Oki 2013. 9. 3. 17:54

올여름에 남편과 쉼터를 만들면서 눈에 띈 돌이 재미있어 세워보니 

메부리코를 가진 시인 단테를 닮은 것 같아서 나는 단테라고 이름 붙였다.

 

단테 이탈리아 시인. 1265년에 피렌체에서 태어나 1321 라벤나에서 병사()하였다. 이탈리아 어로 서른 편의 연애시 포함한신생()》, 유랑 철학과 윤리 문제 논한향연()》, 종교적 서사시신곡()》 작품 남겼다.

 

 

 

 

- 장석주 지음철학자의 사물들』 중에서 -

 

 

 

사물들은 '이름'에 갇혀 있다. 사물들의 '이름'은 그것들을 가두는 감옥이다. '이름'은 기표들의 감옥이고, 의미의 감옥이기도 하다. 사물들은 '이름'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상징계로 들어가는데, 나는 우선 사물들을 가둔 '이름'에서 사물들을 꺼낼 것이다. 사물들은 사물 그 자체로 보아야 마땅하다. 우리가 더듬고 헤집어 살펴보아야 할 것은 사물들의 시작과 끝, 재질과 세포들이다. 사물들의 표면을 가로지르고 심연 안으로 들어가보라. 한밤중에 사물들이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사물들은 딱딱한 것과 물렁물렁한 것, 속이 훤히 비치는 투명한 것과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것,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견고한 것과 금세 부서지는 것, 오래 쓰는 것과 쓰고 버려지는 것 따위로 나뉜다. 우리는 사물들과 더불어 살며 사물들의 세계 속에서 살다가 죽는다. 사물을 모른다면 사물들 속에서 살과 피와 뼈를 얻는 삶도 안다고 할 수 없다. 사물의 감식가는 사물의 장엄함을 통해 삶을 맛보고 그 삶의 진경珍景을 들여다보려는 자일 것이다.

 

 

 

텔레비전   올리비에 라작

남한강의 돌밭에서 채집한 수석壽石과는 전혀 다른 물성을 가진 사물이다. 사색의 벗도 아니다. 취향의 숭고함이나 삶의 역동성에 전혀 기여하는 바도 없다. 사람의 미적 욕망에 헌신하지도 않으며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데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다. 이것은 물질문명이 낳은 생활필수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장 비효율적인 도구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가정에서 이것을 사들이고 거실에 모신다. 당신의 거실 한쪽에 놓인 SAMSUNG이나 LG의 로고가 반짝거리는 텔레비전 수상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잘 볼 수 있는 방향으로 거실의 가구들은 재배치된다. 이것은 거실 한쪽 벽면을 차지한다. 작동하지 않을 때 화면은 잿빛을 머금은 채 긴 침묵을 취한다. 사람들은 소파에 앉으면서 리모콘을 들고 텔레비전을 켠다. 이 잿빛을 머금은 판도라의 상자가 순간 빛으로 가득 찬 사물로 변신한다. 누군가 조명 속에서 마이크를 붙잡고 노래를 하거나, 드라마 속 어느 집 거실 풍경을 보여준다. 판도라의 상자가 빛으로 가득 찰 때 이것을 응시하는 눈동자들은 그 빛을 반사한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동물의 신체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 빛을 만나 빛과 같은 신체 기관이 된다."라고 괴테는 말한다. 이 암흑의 입방체가 살아있는 신체 기관 같이 빛과 소리를 방출하자마자 마술이 일어. 죽어있던 사물들이 살아나고, 침묵하던 세계는 아연 활기를 뛴다.

거실, 병실, 음식점, 기차역, 공항 대합실, 군부대, 절간에서도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들여다본다. 이미 문명사회 속에서 삶의 일부지만 이것의 무용함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 무용함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이것을 지배하는 것은 포퓰리즘, 영웅주의, 공리론, 가짜 위안들, 식탐, 뻔뻔한 사생활 폭로, 사소한 악덕과 오류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까발리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소통 시스템"(니콜라스 존스)이지만, 인류를 생각이 없는 바보로 길들이는 상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것의 충성스런 지지자다. 우리는 이것에서 먼 나라들의 이국적 풍물, 자연 생태계의 보고서, 남과 다른 삶을 산 인물의 다큐멘터리, 야구나 축구, 마라톤과 같은 스포츠 게임 중계, 가벼운 오락거리 따위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인류에게 해악이 되는 소비를 부추기고, 자원의 낭비와 물질주의라는 악덕을 퍼뜨린다.

 

 

경제와 생활 방식이 근본적인 변화를 요청하는 이 긴급 상황에서 텔레비전은 무엇을 하는가? 텔레비전은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소통 시스템이다. 모든 가정마다 텔레비전이 있으며, 보통 사람들은 매일 여섯 시간은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무엇을 위해서? 설탕과 고기, 술과 커피, 그리고 중독성 발암 물질에 대한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서, 자동차를 비롯하여 엄청난 에너지를 삼키는 제품들을 구입하고, 모든 면에서 건강을 헤치기 위해 고안한 듯한 생활 방식을 권장하고 소중한 자원을 급격하게 낭비하고, 물질주의라는 정신병을 부추기고, 엄청난 양의 오염 물질과 쓰레기를 생산하고, 자국 내의 불공평한 부의 분배와 그 바깥에서의비도덕적인 분배를 촉진하는 것, 이것이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가 하는 일이다.

 

-니콜라스 존스(E. F. 슈마히,《자발적 가난》

 

 

텔레비전이 시청자들을 계도하는 숭고한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이 참다운 인생의 길과 지표를 제시해 줄 것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이것에서 취할 것은 약간의 오락적 즐거움과 유쾌한 유머, 휴식, 이국적 풍물, 공익 캠페인 따위 정도이다.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자기 역량을 엉뚱한 데 소모하고, 공공적 책임을 아무런 도덕적 고뇌 없이 쉽게 방기한다. 이것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쉬운 것, 유명한 것, 잊히지 않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사람과 역사, 세상의 온갖 심미적인 것들과 기분을 화창하게 해주는 것들, 즉 문학, 책, 풍속, 음식, 스포츠, 시각예술, 연극, 영화, 음악, 춤, 건축, 종고, 외국, 뇌과학, 심리학, 생물학…… 따위이다.

사생활과 스캔들을 화제 삼아 떠들 때, 그리고 자신들의 생각의 얕음, 야비함, 천박함을 폭로하는 그 하찮은 얘기들과 낄낄거림을 하염없이 들여다 볼 때 우리는 왜소해지고 비루해진다. 어쩌자고 이것을 보고 있었단 말인가? 우리는 후회를 하며 맥락없음의 세계 속에 하나의 파편으로 흘러가는 듯 깊은 자괴감에 빠져든다. 지금 텔레비전을 지배하는 것은 시청률이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이고, 반이성적인 괴물이다. "시청률, 그것은 시장과 경제의 제재방식, 즉 순전히 상업적이고 외적인 합법적 제재방식입니다. 그리고 이 마케팅 도구의 요국에 복종하는 것은, 정치에서 여론에 의한 대중 선동장치와 똑같은 문화형식입니다. 시청률에 의해 지배되는 텔레비전은 자유롭고 현명하다고 가정된 소비자들이 시장의 구속을 받도록 영향을 미치는 데 기여합니다. 시장에는 냉소적인 대중 선동가들이 믿게 하려는 현명하고 이성적인 집단 의견, 공중이 이성의 민주적인 표현이 없습니다."(피에르 부르드외,《텔레비전에 대하여》) 시청률이 절대적인 가치 척도가 되어버리니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은 시청률을 높이려고 자극적인 아이디어를 짜낸다. 시청률이라는 우상이 나타나자 방송의 윤리적 함의나 공공적 가치의 고양 따위를 천박한 볼거리와 그 재미가 압도한다. 텔레비전은 우리가 시장의 구속을 받도록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이것에서 오는 나쁜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이 시청률이라는 유령과 싸워야 한다. 우리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치우거나, 공영방송의 시청료 징수에도 저항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텔레비전에서 퍼져나오는 야비하고 어리석은 웃음들이 문 닫는 자영업자들과 노동쟁의와 청년 실업과 북한 주민의 굶주림과 '88만원 세대'가 표상하는 현실의 피눈물 나는 비극들을 대체한다. 이 미디어는 웃음의 강박증에 들려 있는 게 분명하다. 웃는 것은 텔레비전 화면이다. 더 정확하게는, '1박2일' 속의 '강호동'이었거나 '런닝맨' 속의 '유재석'이다. 이 어리석은 웃음들은 현실의 잔혹함을 가리는 가림막이다. 우리는 '강호동'이나 '유재석'의 웃음 앞에서 망연자실한 채 앉아있다. 이미지와 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준 포스트구조주의를 대표하는 문화이론가이자 탈현대적 사유의 거장으로 꼽는 장 보드리야르는 이렇게 쓴다. "미국 텔레비전에서 웃음은 그리스 비극의 합창을 대체했다. 그것은 가차 없는 것이며, 뉴스, 증권 거래 보도, 그리고 일기예보 외에는 웃음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웃음은 그 강박증의 힘에 의해 레이건의 목소리나 베이루트에서의 해상 재난 뒤에서, 심지어 광고뒤에서도 계속 들린다. 그것은 우주선의 복도를 배회하는 <에일리언Alien>의 괴물이다. 그것은 청교도적 문화의 빈정거리는 유쾌함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웃는 배려는 시청자들의 몫이다. 이곳에서는, 그들의 웃음은 볼거리에 통합되어 화면 위에 운반되어 있다. 웃고 있는 것은 화면이고, 즐기고 있는 것은 화면이다. 당신은 망연자실한 채 있을 뿐이다."(장 보드리야르,《아메리카》) 그리스 비극의 합창을 대체해버린 미국 텔레비전의 웃음들, 웃고 있는 것도 화면이고, 그 웃음을 즐기고 있는 것도 화면이다. 그 웃음소리가 모든 프로그램과 광고들의 뒤쪽에서 계속 들린다. 웃고 있는 자본과 시장의 유령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흡혈하는 이 유령들은 노숙자와 실업자들, 굶주리는 인류, 분쟁 지역에서 죽어가는 어린애와 여자들, 지진과 태풍으로 집을 잃고 길에 나앉은 사람들, 이런 다양한 현실의 비극들과 현실의 재앙들을 비웃고 조롱한다.

 

 

동물원과 텔레비전을 견줘 그 공통점을 일일이 지적한 이는 올리비에 라작이다. 라작이 동물원과 견준 것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동물원은 리얼리티 스펙터클의 가능한 모델로서 예속된 몸과 정체성과 인격을 통제하고, 생산하고, 전파하는 장치다. 그것은 감옥과 연구소와 극장을 섞어놓은 복합장치요, 다중기구다. 감옥으로서 그것은 전시된 몸들과 생활과 환경을, 공간과 시간을 제어함으로써 그들의 성향을 형성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를 모방하면서 뒤로 감금상태를 감추고 있는 기이한 감옥이다. 감옥의 성향은 가능한 한 야성의 에토스와 가까운 제2의 자연이 되어야만 한다. 연구소로서 동물원은 생물학과 심리학과 표본들의 관계에 대한 지식을 산출한다. 동시에 그것은 다양한 기능을 가진 혼합된 지식이기도하다. 그것은 관리 규율에 관한 지식이요, 표본들의 삶의 관리에 관한 학문적이고 수의학자이며 동물행동학적인 지식이다.

 

― 올리비에 라작,《텔레비전과 동물원》

 

 

동물원은 야생을 흉내 낸 모조 자연에 동물을 풀어놓고 '전시'한다. 이것은 "감옥과 연구소와 극장"이 뒤섞인 복합장치이고 다중기구이다. 사람들은 동물원에서 "현실 스펙터클, 혹은 스펙터클 현실"(올리비에 라작, 앞의 책)을 보고 소비한다. 예를 들면 에스비에스 방송국의 '정글의 법칙'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김병만과 일단의 연기자들은 아마존 정글로 떠난다. 그들은 낯선 야생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모험을 하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볼 때 우리는 동물원 스펙터클을 보는 것과 같은 정서를 체화한다. 아마존은 '전시된 자연', 곧 동물원이 그렇듯이 일종의 무대다. 아마존에서 사투를 벌이는 연기자들은 그저 동물원 스펙터클을 연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동물원 스펙터클의 매력은 이질성과 야수성과 이국성의 전시에 있다."(올리비에 라작, 앞의 책) 우리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밋밋한 일상성에 가려진 이질성·야수성·이국성들을 엿보고 그것을 취한다. 동물원과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보면서 보이기"라는 같은 원리로 움직인다. '정글의 법칙'을 보는 시청자들은 아마존과 멀리 떨어진 아파트 거실에서 편안하게 이것을 즐긴다. 정글은 자연이 아니라 일종의 무대장치일 뿐이다.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가 제공하는 스펙터클과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접촉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안전한 곳에서 위험한 정글과 그 정글이 만드는 스펙터클을 소비하는 주체다. 이 스펙터클을 보면서 이것에 한없이 길들여지는 우리들, 이제 가려져있던 진실을 폭로하자! 우리가 텔레비전의 주인이 아니라 거꾸로 텔레비전이 우리를 포획하고 길들이는 권력의 대리인이자 능수능란한 조련사였다는 것을!

 

 

 

올리비에 라작

Olivier Razac, 1973~

 

파리 제8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자이다. 프랑스의 여러 저널에 올라와 정치철학에 관한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 국립범죄행정학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이전의 수감자들에 대한 전기 감시에 관해 연구 중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동물원을 견주고 그 공통점을 분석한 책《텔레비전과 동물원》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그의 저서다. 동물원의 동물들은 잘 조련된 '전시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들에게 야생성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마찬가지로 야생을 보여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빠진 우리에게도 야생성은 없다. 동물원의 동물들이 야생에서 사냥꾼들에 의해 포착되어 동물원에 감금되어 구경거리가 되듯 우리 역시 생명정치 권력에 의해 포획되어 갖가지 억압장치들 속에 있다. 동물원이 "전시된 표본들의 진정성과 진실과 강렬함에 따라 스펙터클이 이루어지는 장치"라면,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은 그 동물원과 매우 흡사하게 닮아있다. 동물원에 간 사람들은 우리에 갇힌 동물원과 매우 흡사하게 닮아있다. 동물원에 간 사람들은 우리에 갇힌 동물들을 보지만, 동시에 우리 속에 있는 동물들 역시 바깥의 사람들을 본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텔레비전에 의해 포획되고 길들여진다. 텔레비전을 켜놓을 때, 그 "화면은 주변 공간에 영향을 미치고, 흘러가는 시간의 길이는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지점"이다. 텔레비전은 우리를 빨아들인다. 텔레비전은 우리 환경의 내부이고, 동시에 우리 삶의 부정할 수 없는 일부를 이룸으로써 우리 내면 정서, 의식 활동에 개입하고, 우리 정체성을 조작한다. 이를테면 리얼리티 스펙터클은 우리 안에 잠재된 동물 형태학적 요소들을 들춰낼 뿐만 아니라 우리를 포획한 생명정치 권력들에 맞춰 우리의 정체성과 내면 형질을 길들이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

토트(고대 이집트 종교에서 달의 신이다가 나중에 계산의 신, 학문의 신이 되었다. 문자와 필기법을 발명하고 사회질서를 만들었으며, 언어·서기(書記)·해석법을 창안했다. 아울러 여러 신들의 자문 역할도 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토트를 자신들의 신 헤르메스와 동일시했다)는 고대 이집트에서 문자의 신, 지헤의 신으로 섬김을 받았다. 파라오는 토트에게 문자가 인간의 기억을 무디게 하고 결국은 없애는 악마 같은 장치가 아니냐고 따진다. 파라오의 기우는 지나친 것이었다. 인류 역사를 일별하면, 문자는 인류의 기억을 감소시키는 대신에 기억과 공존하며 풍요롭게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책은 문자로 이루어진 인류 기억의 집적체이다. 책이 나온 이래 인류의 기억과 지식은 엄청나게 확장되고, 비례하여 인류 문명은 빠른 속도록 번성했다.

 

 

책은 사물이고, 그 재료는 종이이다. 전지全紙 한 장을 세번 접으면 16쪽이 되고, 다섯 번을 접으면 64쪽이 된다. 이럴게 접은 종이 여러 묶음을 하나로 묶어 실로 철하고, 여기에 표지를 씌우면 한 권의 책이 탄생한다. 책은 종이의 여러 묶음으로 두께를 갖고 입체로 변신하며, 물성物性을 갖는다. 물론 그 종이의 표면에는 문자나 그림으로 된 지식이나 기억들이 인쇄되는 것이다. 책은 표지, 속표지, 차례, 본문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가진 형태이고, 그 자체로 시간과 공간을 품은 작은 우주이다. 책을 우주로 상상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것은 보르헤스가 처음으로 발견하고 퍼뜨린 보르헤스만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논리철학수고》에서 "세계가 존재하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존재한다는 그 사실이 신비한 것이다."라고 쓴다. 책은 신비한 것들의 문자적 누설이다. 그것은 문자로 구현된 신비기도 한데, 왜 신비인가 하면, 책이 언표言表로서 언표 불가능한 것을 말하고 드러내는 까닭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책들은 그 안에 "갖가지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들과 다양한 날짜와 속도들"을 갖고 있는 "하나의 다양체"(질 들뢰즈·렐릭스 가타리,《천 개의 고원》)라고 말한다. 책, 인류의 부실한 기억력의 대체재, 이것은 세계는《인문우주론》에서 이쑤시개에 대한 논문에 이르기까지 실로 잡다하고 조밀하다.

 

 

책의 전생은 종이이고, 종이는 나무에서 나온다. 종이는 서기 105년 후 원흉元典 원년에 중국 왕실의 관리인이던 채륜이 처음 발명한다. 채륜은 뽕나무 껍질, 삼, 넝마, 어망 등을 써서 종이를 만들었다. 이 재료들을 짓이겨 가느다란 실을 분리해내고 물과 함께 반죽하여 평평한 막 위에 펼쳐 건져내는 방식을 썼다. 이것을 말리면 원재료의 섬유질이 촘촘하게 뒤엉킨 얇고 부드러운 종이가 되었다. 중국 왕실은 이 종이 제지술을 국가 기밀로 보호했다. 채륜 이후 2000년 동안 제지업자들은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섬유질 성분으로 이루어진 종이들을 만들어냈다. 제지 업자들이 종이를 얻기 위해 쓴 재료들은 솔방울, 감자, 엉겅퀴, 개구리 침, 늪 이끼, 사탕수수, 조류藻類, 아스파라거스, 옥수수 껍질, 양배추 밑동, 바나나, 거름, 상아 부스러기, 생선, 먼지 따위로 실로 다양했다. 종이가 나온 뒤 책은 다양하고 정교한 형태를 얻게 되었다.

 

― 리아 코헨.《탁자 위의 세계》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 표지는 두껍고 질긴 종이를 쓴다. 얇고 부드러운 종이를 쓰는 본문을 보호하고 책의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책을 신체로 보자면 본문은 내장內臟 기관이고, 겉표지는 내장을 감싼 피부이다. 표지는 내장의 건강과 밀도가 드러나는 표면이다. 표지는 그 책이 지향하는 철학과 저자의 취향과 교양 정도를 드러낸다. 내가 책으 표지 장정裝幀을 눈여겨 보는 이유이다. 책의 표지는 그것이 감당해야 할 운명의 외시外示이다. 가장 좋은 표지는 책의 내용을 가장 덜 표현한 책, 일체의 장식성을 배제하고 단순함의 미학에 도달한 것들이다.

 

 

책을 펼쳐 보라. 책은 새처럼 좌우 양면을 날개 삼아 펼친다. 책을 펼쳐진 양면은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물과 불, 우레와 바람이다. 아울러 책의 양면은 음양인데, 그 음양 위에 인간들이 이성과 감성이 만든 성채城砦가 세워진다. "책은 작은 존재이다. 하지만 책을 손바닥 안에 멈춘 채 정지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고 서로 대립하며 유동하고 확장하는 역동적인 그릇〔容器〕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풍양력豊欀力으로 가득찬 모태母胎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힘을 삼키고 내뱉은 커다란 그릇, 커다란 항아리라고 생각한다."(스키우라 고헤이,《형태의 탄생》) 놀랍게도 책은 고형물이 아니다. 제 안에 흐르고, 유동하고, 확장하는 역동성을 품은 말랑말랑한 사물-도구이다. 책은 커다랗고 동시에 아주 작다. 책은 팽창과 수축 운동을 하는 존재인 것이다.

 

 

책의 안쪽으로 하나의 선이 흐른다. 하나의 흐름, 이야기와 지식이 흘러가는 선, 본문의 흐름을 보여주는 선, 문자로 기술된 것이 만들어낸 긴 선, 그보다 훨씬 더 다양한 선들, "다른 모든 것들처럼 책에도 분철선, 분할선, 지층, 영토성 등이 있다. 하지만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탈지층화) 운동들도 있다. 이 선들을 좇는 흐름이 갖는 서로 다른 속도들 때문에, 책은 상대적으로 느려지고 엉켜 붙거나 아니면 반대로 가속되거나 단절된다."(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앞의 책) 우리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선과 운동들을 따라 여행을 한다는 것이다. 놀라운 다독가이자 "마를 줄 모르는 백과 사전적 지식의 창고"라고 평가를 받는 움베르토 에코는 "오늘날 책은 바로 우리의 노인이다. 우리는 미처 고려하지 않지만, 문맹인 사람(또는 문맹은 아니지만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우리가 더 풍요로운 이유는, 그 사람은 단지 자신의 삶만 살아가고 또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우리는 아주 많은 삶들을 살았다는 데 있다."(움베르토 에코,《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누구나 책을 통해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삶을 살 수가 있다. 그 시간을 연장하다 보면 결국은 불사에 이를 것이다. 그래서 에코는 이렇게 썼다. "책은 생명보험이며, 불사不死를 위한 약간의 선금이다."(움베르토 에코, 앞으 책) 책읽기가 생명 보험이라니! 영원히 죽지 않으려고 지불하는 선금이라니!

 

 

책은 어떻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과 같은 형태를 갖게 되었을까? 왜 책은 더 크거나 작지 않을까? 에코는 그것이 인류의 해부학적 구조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책의 형식은 우리의 해부학적 구조에 의해 결정되었다. 아주 커다란 크기가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자료나 장식 기능을 가진 것들이다. 표준 책은 담뱃갑보다 작아서도 안 되고 '신문'보다 더 커서도 안 된다. 책의 크기는 우리 손의 크기에 달려 있으며, 그 크기는 최소한 지금으로서는 변하지 않았다."(움베르토 에코, 앞의 책) 책의 형태와 크기가 오늘날과 같이 된 것은 인간의 손이 가진 크기와 구조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결과이다. 책은 기억과 지식의 연장延長이고, 동시에 신체의 진화적 형태이다. 따라서 사람의 몸이 지금과 같은 해부학적 구조가 아니었다면 책 역시 지금과는 다른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개인 장서치고는 꽤 많은 책을 갖고 있다. 이게 자랑할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서가에 꽃힌 책들은 나를 뿌듯하게 만든다. 책 모으기에 아무 보람이나 기쁨이 없었더라도 그 많은 책들을 위해 돈과 시간을 물 쓰듯 썼을까? 앞으로도 나는 많은 책들을 사서 서가를 채우려고 한다. 나이가 들어 내곁에 아무도 없을 때 이 서가의 책들을 느릿느릿 읽어나갈 것이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이렇게 썼다. "책 읽기는 밥을 구하는 노동과 관련이 있으며, 고루함과 독단에서 벗어나는 영혼을 위한 장엄미사, 번뇌를 끊고 열반정적에 나아가기 위한 참선이기도 하다. 먼저 책읽기는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지적인 흥분과 열락감을 준다. 책읽기가 즐겁지 않다면, 기분을 화창하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기꺼이 책 읽기를 그만둘 것이다."(장석주,《비주류 본능》, 열림카디널) 장엄미사, 참선 따위의 말들을 굳이 골라 쓴 걸 보면, 이 무렵 나는 책읽기에 어떤 종교적 신성성을 느꼈나 보다. 저 유년기에서 장년기에 이른 오늘날까지 내 무의식에 꿈틀거리는 죽음에의 두려움이 번쩍하고 떠오른다. 책읽기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무의식의 욕망이 충동한 것은 아닐까? 유년기에 나는 이미 죽음이라는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촉발된 물음의 연쇄 속에 있었다. 생명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왜 나는 저기가 아니고 지금 여기에 있는가? 왜 나는 무가 아니고 말하며 생각하는 존재인가? 우주는 지적 설계로 나온 것인가? 우주는 오메가 순간, 즉 거대한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가? 우주 종말 뒤에 나는 여기가 아니라 어디에 있을까? 무로 돌아간다면 무란 무엇인가? 그 물음의 연쇄들이 거센 힘으로 등을 떠밀어 책을 향하게 했다. 실제로 나는 여러 도서관과 무수히 많은 서점들을 떠돌며 책들을 섭렵했다. 일찍이 책이 삶의 시간들을 겹으로 살게 하고, 삶의 시간을 연장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이 조숙과 영악함은 불행일까, 행복일까?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 1932.1.5~

 

이탈리아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기호학자. 언어학자, 철학자, 미학자, 소설가이다. 아버지 줄리오 에코는 회계사라는 직업을 가졌는데, 세 차례나 전쟁에 징집당했다. 에코는 법학 공부를 원했던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중세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려고 토리노대학에 들어간다. 1954년 대학에서 철학학위를 받았고, 1955년까지 밀라노에 있는 라디오-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문화프로그램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1956년에 첫 책《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문제》를 펴낸다. 이 뒤로 토리노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 이래 여러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80년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다룬 중세를 배경으로 삼은 소설《장미의 이름》이 이탈리아를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에코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무엇보다도 에코는 언의의 천재다. 이탈리아어는 모국어니까, 제쳐놓더라도 그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칼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를 자유자제로 쓰고 해독한다. 현실 세계와 기호와 추상 세계를 종횡으로 가로지르고, 대중문화와 가상현실에 대한 담론, 아퀴나스 철학에서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적 관심이 닿지 않는 것이 거의 없다.

《중세의 미학》《구조의 부재》《기호: 개념과 역사》《일반 기호학 이론》《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기호학과 언어 철학》《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푸코의 진자》《나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등등 에코의 책들 거의 모두 국내에 번역되어 나와 있다. 에코의 이름 뒤에 따라다니는 "플라스틱 코크로 비행기 안에서 콩을 찍어 먹으며 파시즘을 걱정하는 사람", "방대한 중세 세계라는 원자재로 희한한 베스트셀러를 써낸 작가", "마를 줄 모르는 백과사전적 지식의 창고에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위대한 이야기꾼",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역설과 재치, 유머, 때로는 엉뚱함을 지식과 버물릴 줄 아는 학자" 등등의 언급들은 그의 어마어마한 독서량과 경이로운 저서 활동, 그리고 미학·기호학·문학·에세이·문화·비평 등을 아우르는 그가 가진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잘 드러낸다. 에코는 자신의 묘비명으로 토마소 칼라넬라에게서 따온 '기다려, 기다려.' '난 못해'라는 인용문을 쓰기를 바란다고 한다. 현재 볼로냐 대학의 교수이다.

 

 

 

냉장고  질 들뢰즈

누가 처음 고안하고 만들었을까? 피라미드, 타지마할, 파르테논신전, 파르마대성당, 에펠탑, 자유의 여신상, 점보여객기 따위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놀라운 인공물들 중의 하나다. 흰색 에나멜 칠로 매끈하게 마감된 외부와 전기적 기술 시스템의 표본들로 장악된 내부를 가진 이것, 하얀 것으로 도포塗布된 이 사물의 매끈한 표면을 손으로 더듬는다. 이것은 한때 소수의 사람만이 누리던 부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도시건 시골이건 집집마다 주방 한쪽에 직립해 있는 아주 흔한 물건이다. 누구나 다 소유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이것에 덧씌워졌던 특권적 부의 상징은 해체가 되었다.

 

 

현자의 삶은 가방과 단벌 옷, 물에 적신 보리빵, 땅에 꽂은 막대기 하나로 족하겠지만, 먹고 마시는 걸 즐기는 보통 사람에겐 이것이 없는 생활이란 상상하기 어렵다. 이것은 실로 문명사회의 사치품이다. 사치와 낭비를 금하는 수행자들의 공간인 산중 절간에도 놓인 이 사물은 어떻게 사치와 욕망의 잉여에 따르는 죄에 대해 면죄부를 얻은 것일까?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생태주의를 지향하고 그것에 맞는 삶을 살려는 사람에게서조차 이것을 통해 얻는 쾌적함을 배제한 생활방식은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이 세상의 어떤 물건보다 더 아름다운 이것! 온갖 미각의 쾌락 속에서 불순한 행위의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이것! 나는 냉장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냉장고의 내부 공간은 칸칸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 칸칸마다 냉장 보관해야 할 식품들로 채워진다. 냉장고는 식품들을 위생과 신선도를 유지함 관리하는데 그 기능에는 논란의 여기자 없다. 아울러 그 기능에 기대어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에 대해서도 두말 할 게 없다. 채소, 과일, 육류, 생선류, 물, 맥주, 음료수들, 양념들, 먹다 남은 음식물들로 냉장고는 가득 채워진다. 놀라워라. 이것들은 다 우리들의 입과 혀를 거쳐서 위로 들어갈 것들이다. 상온常溫에서 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냉장고 속에 보관한다. 욕망은 속박이요, 버림은 자유라고 한다면, 냉장고 속에 보관되는 식품들은 우리를 속박하는 쾌락에의 욕망에 연결된 그 무엇이다. 냉동실의 붉은 살코기는 딱딱하게 굳어 마치 깨지지 않는 벽돌 같다. 말랑말랑했던 식빵도 냉동실 속에서 얼어붙어 뻣뻣하다. 마치 냉동고에 넣어둔 동물 사체와 다를 바가 없다. 냉장고는 죽은 것들이 얼어붙은 채 견디는 얼음지옥, 혹은 영구보존하려는 사체 보관함이기도 하다. 어떤 식품들은 딱딱하게 냉동된 상태에서 몇 주, 몇 달, 몇 년을 부패하지 않고 너끈히 견뎌낸다.

 

 

냉장고는 차갑게 식은 상태로 보관해야 할 물건들의 저장소다. 이 냉기로 가득 찬 상자는 하나의 수수께끼다. 나는 이 냉기가 어떤 공학 속에서 만들어지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 상자가 금욕이나 검소한 삶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상자는 바깥의 상온보다 낮은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찬 냉기들의 천국이다. 이 상자가 신을 위한 경배와 아무 상관이 없고, 영혼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도움이 되거나 고귀한 이상을 정화시키는 것도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냉기를 내뿜는 이 상자 내부는 사물들, 특히 입안으로 들어오는 음식물들의 부패와 죽음에 대한 차가운 승리를 담보한다. 그 승리를 위해서 냉장고는 자기의 내부 영토에 냉기의 철권통치, 냉기의 전제주의專制主義를 펼친다. 그렇다고 냉장고가 쌓은 냉기의 정의正義라는 이미지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냉장고는 우리 삶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타락에 기여한 바도 전혀 없다. 합법에 따르는 복지재단의 운영과 마찬가지로 냉장고가 공동체적 평화와 형제애를 쌓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냉기의 정의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할 바가 없다.

 

 

한편으로 냉장고는 식품들의 얼음묘지이다. 여기 낭비하는 사회의 생태계가 고스란히 얼음지옥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이 얼음묘지에 모여 있는 것들은 탐욕과 포만에의 욕망에서 잠시 유예된 것들이다. 다음을 기약하고 냉장고 속에 처넣은 어떤 것들은 그대로 잊힌다. 그것은 다만 망각의 결과일 뿐이지 부패와 죽음에 대한 차가운 승리라는 신화는 과장된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냉장고 안에서도 부패는 진행된다. 부패의 진행 속도가 상온에 견줘 늦을 뿐이다. 냉장고 안에 오래 두었던 식품에서 수분이 빠져나가고 메마른 채 곰팡이가 슬기도 한다.

 

 

가금 냉장고가 인공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도 없지 않다. 때때로 나는 냉장고를 공기와 빛, 물과 태양, 하늘과 지구, 편백나무, 현무암 같은 자연물과 동렬에 놓는다. 그러나 냉장고는 사람의 기술로 만들어진 인공물이 분명하지만 기원을 잃어버린 것들의 계열에 속한다. 냉장고는 우리 안에서 그르렁거리는 욕망에게 명령한다. "흰토끼를 따라가라!" 냉장고가 바로《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그 흰토끼가 아닌가! 흰토끼를 따라가면 어떤 세계가 나오는가? '매트릭스'는 헛것, 유령들의 세계, 즉 시뮬라크르이다. 영화<매트릭스>에서 한 인물을 이렇게 외친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그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너희들이 없는 세계를 보여줄 것이다. 규칙과 통제가 없는 세계, 경계나 한계가 없는 세계, 어떤 것이든 가능한 세계."(슬라보예 지젝외.《매트릭스로 철학하기》) 흰토끼가 안내하는 삶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면서 인간의 욕망과 선택을 기술화로 드러낸 인공낙원, 꿈의 세계, 매트릭스의 삶이다. 고달픈 세상에서 지치고 외로움에 찌든 사람에게 전기적 소음을 자장가처럼 들려주는 이것은 어떤 원본과 이데아에 복제와 인용으로 가득 찬 인공낙원, 즉 시뮬라크르라고 할 수 있다. 시뮬라크르를 철학 안으로 가져와서 포스트구조주의 주요 개념으로 정립한 질 들뢰즈는 이렇게 쓴다. "신은 그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만들었으나, 인간은 죄로 인해 신과의 그 유사성을 잃어버리고 타락했으며, 우리는 시뮬라크르가 되었고 감성적 실존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도덕적 실존을 상실했노라고, 이러한 설교는 시뮬라크르의 악마적인 속성을 강조하고 있다."(질 들뢰즈,《의미의 논리》) 시뮬라크르는 그 의미 맥락에서 나타났거나 곧 사라져버리는 것, 사건, 이마주 등을 포괄한다. 파열하듯이 일어났다가 곧 사라지는 것, 지속하지도 않고 자기 동일성도 없지만 삶에 의미 있는 변화를 줄 수 있는 모든 사건들, 시뮬라크르의 기원은 철학의 태초인 플라톤에까지 이른다. 플라톤은 현실 세계가 가치의 원형인 이데아의 복제물이라고 여겼다. 복제의 복제물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시뮬라크르는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를 가르는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다. 냉장고의 구성 요소 중에 마음은 없다.(한 책은 이렇게 말한다. "객체의 모든 특징들은 객체 쪽에서 발견되는 것이지 주체 쪽에서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마음이라는 한계 안에 있으므로 마음은 세계의 구성 성분이 아니다. 마음은 세계의 세계성의 토대이자 세계의 구성 요소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척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스스로 그 토대에 의거할 수 없고 그 스스로의 척도가 될 수 없다. 마음이 세계에 대해 초월적인 특성을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제이슨 홀트《매트릭스로 철학하기》(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한문화. 2003) 마음이 없는 것은 시뮬라크르이다. 사람이 신의 형상에 따라 지어진 시뮬라크르라면, 피조물의 피조물, 즉 냉장고 역시 기원의 신화가 지워진 시뮬라르크가 분명할 것이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생활공간 속에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존재하는 이것은 감성적 실존과 '창자' 경제의 총아가 되었다. '창자'경제의 세계 속에서 냉장고는 돌아갈 기원과의 탯줄이 끊긴 채 끝없이 부유하는 물건들 중의 하나다. 모든 시뮬라크르의 운명을 가진 것들이 그렇듯이 사람도 냉장고도 탐욕의 거품 속에서 도덕적 실존을 잃었다.

 

 

 

질 들뢰즈

Gilles Deleuze,1925.1.18~1995.11.4)

 

1925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철학자이다. 푸코는 "20세기는 언젠가 들뢰즈의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르본느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리용대학 강사를 거쳐서 1970년대 파리 제8대학 교수가 되었다. 대학에서 철학·문학·과학을 강의하고 1987년 퇴임한 뒤로 줄곧 좌파 이념에 힘을 보태는 집필과 방송 활동을 이어갔다. 1995년 갑작스럽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들뢰즈는 살던 아파트에서 뛰어내림으로써 노쇠와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던 삶을 스스로 멈췄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들뢰즈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쓴《천 개의 고원》(새물결, 2001)이다. 1000쪽이 넘는 책을 미욱하게 꾸역꾸역 읽고 난 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그 난해함으로 어지럼증을 한동안 수습할 수가 없었다. 쥐뼘만한 앎의 세계가 여지없이 무너졌으니,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누가 나를 섭치거나 째마리라고 손가락질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이진경의《노마디즘》(휴머니스트, 2002)을 시난고난하며 서너 번 읽고 뒤에야 겨우 맥락을 잡을 수가 있었다. 서동욱의《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 이경우의《천 한 개의 고원》,《들뢰즈와 정치-앙티외디프스와 천의 고원들의 정치철학》(대학사, 2005) 등을 뒤적이며 겨우 작은 깨침을 얻었다. 그 뒤로 들뢰즈의 책들을 부지런히 읽고, 그 해설서들도 눈에 띄는대로 구해서 읽었다.

무엇보다도《천 개의 고원》의 난해함은 지식의 방대함, 자유자재로 빚어서 쓰는 개념들의 낯섦, 발상의 독창성에서 비롯한다. 이진경이 '잡학'이라고 말한 지식의 방대함은 정신분석학, 철학, 문학, 언어학, 신화학, 민속학, 동물 행동학, 경제학, 고고학, 음악, 미술사, 물리학, 분자생물학, 수학으로 방사선을 그리며 펼쳐진다. 나는《천 개의 고원》에 대한 깊은 인상과 형이상학적 울림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니체, 스피노자, 칸트, 베르그송, 프루스트 등을 가로와 세로로 뛰어넘는 들뢰즈의 책들을 읽어내며 그 어느 때보다도 책 읽기의 번뇌와 기쁨을 함께 느꼈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들뢰지언'이다. 들뢰즈/가타리가 함께 쓴 책은《철학이란 무엇인가(현대미학사, 1995),《앙띠 오이디프스》(민음사, 1997),소수 집단 문학을 위하여-카프카론》(문학과지성사, 2001) 등이 있고, 들뢰즈 혼자 쓴 책은《차이와 반복》(민음사, 2001), 《의미의 논(한길사),《감각의 논리》(민음사, 2008),《니체와 철학(민음사, 1998),《프루스트와 기호들(민음사, 2004),《주름-라이프니츠와 바로크》(문학과지성사, 2004),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인간사랑, 2003),《푸코(중원문화, 2010),《칸트의 비판철(민음사, 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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