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오늘을 위해

오키Oki 2013. 8. 24. 18:10

담양에서 하이킹하는 큰딸

 

 

미래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자신의 미래를 불안해합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미래는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여러 개의 과거가 한데 모여 나의 과거가 되듯, 미래 또한 여러 개의 미래가 모여 나의 미래가 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집니다.

원래 미래로 가는 인생의 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입니다. 원했던 기로 갈 수도 있고 가지 못할 수도 있고, 원하지 않았던 길로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래의 길을 하나라고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내가 원하지 않는 길로 가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 엄습하게 됩니다.

저는 그런 불안이 찾아올 때마다 현재의 삶에 보다 더 충실하려고 노력합니다. 현재야말로 미래로 가는 과정이자 징검다리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현재의 모습에 따라 저의 미래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저의 미래는 저의 현재 속에 숨어 있습니다.  - 시인 정호승,『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중에서

 

 

 

 

언니가 뒤에서 한참을 잡아줄 줄 알았는데 빨리 손을 놓더라며

작은딸은 난생 처음 타는 자전거였는데도 넘어지지 않고

땡볕에서 한 시간을 탔다며 자신이 생각해도 대견하단다.

두려움에 맞서 최선을 다한 모습에 화이팅!

 

초등학생때 딸들이 등하교길에 자전거 타는 것을 원했지만

도로가 좁은데다 관광버스도 다니고 위험해서 일부러 사주질 않았다.

다들 넘어지면서 자전거를 배운다고 하는데

이제 우리집에선 나(엄마)만 자전거 탈 줄 모른다.ㅋㅋ

 

 

 

2박3일의 휴가 여행은 부산출발 광주→ 담양 → 전주 → 곡성을 거쳐

구례구역에 도착한 딸들을 상봉하고선

오디, 오이, 매실원액을 넣어 만든 쥬스를

조금 얼려서 들고가니 더위에 맛있게 먹는다.

 

 

 

 

- 정호승 산문집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중에서 -

 

 

정호승

1950년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으며,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197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었다.

 

 

 

산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내가 산에게도 가면 된다

사람들이 사막에 은거하는 고명한 은수자(隱修者)를 찾아가 물었다.

"믿음이란 무엇인지요? 당신의 믿음을 보여주세요."

은수자가 한참 동안 먼 산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레 뒤에 저기 보이는 산으로 오십시오. 그러면 내가 산을 움직여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주겠습니다."

그날이 되자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들어 은수자가 산을 움직이길 기다렸다.

산 앞에서고 고요히 기도를 마친 은수자가 이윽고 산을 향해 소리쳤다.

"산아, 움직여라!"

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은수자가 다시 외쳤다.

"산아, 움직여라!"

산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용하던 군중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은수자가 다시 산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산아, 내게로 오라!"

산은 여전히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은수자가 한참 동안 산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산아, 네가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가면 되지 뭐!"

웅성대는 군중 사이를 헤치고 은수자는 산을 향해 떠났다.

 

 

은수자란 종교적 완덕을 추구하기 위해 사회를 떠나 어떤 곳에 숨어 살며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공동체를 이루어 수도원 생활을 하는 수도자와는 달리, 은수자는 사막으로 나가 수도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막인' 이라고도 합니다.

이 우화를 읽으며 저는 한 순간 긴장했습니다. 인간이 움직이라고 한다고 해서 산이 움직이는 게 아닌데 은수자가 호언장담을 하기 때문에 그 결과가 궁금했습니다. 그는 결국 산이 자기한테로 오지 않자 "산이 오지 않으면 내가 가면 되지 뭐" 하고 산을 향해 떠납니다. 순간, 긴장이 풀리고 속으로 잔잔한 웃음이 일었습니다.

은수자가 제게 전하는 메시지는 아주 강렬했습니다. 무엇이든지 간절히 원하는 게 있으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그것을 향해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은수자는 정말 산이 움직여 자기한테 온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믿음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믿음을 향해 떠나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신이 내게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신을 찾아가 나를 맡기는 것,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우화가 신앙의 올바른 태도에 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제 삶의 기다림의 자세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다리며 살아가면서도 그 기다림의 자세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기다림을 위해 어떠한 자세를 지녀야 하는가도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그동안 기다림은 그냥 막연히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기다림에도 능동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다림은 끈질기게 참고 기다리는 데에서도 얻을 수 있지만 능동적으로 찾아감으로써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바람개비는 바람이 불지 않으면 돌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내가 앞으로 달려가면 됩니다. 바람개비는 빙글빙글 돌아가야만 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나 스스로 바람을 불러일으키면 됩니다.

달려가다가 넘어졌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넘어진 그곳으로 내가 찾는 보물이 있습니다. 목마를 때도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을 깊게 파보면 바로 그곳에 샘이 있습니다.

인생에는 원래 정해진 길이 없습니다. 내가 걸어가는 길이 바로 인생의 길입니다. 길을 가고자 하는 자에게는 길이 만들어지고, 길을 가지 않고자 하는 자에게는 길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으면 내가 그 기다림을 찾아가면 됩니다. 산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내가 산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면 됩니다.

사랑도 내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이 움직여 내게 오는 것이 아나라, 내가 움직여 사랑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제로 사는 것보다 사제로 죽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늘 기억 하십시오."

사제 서품을 받고 첫미사를 접전한 후배 신부에게 선배 신부가 한 말입니다. 사제의 삶 또는 스스로 사랑을 찾아가는 일이지 사랑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을 짊어지고

우물을 메우는 것처럼

공부하라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동네 우물을 찾아갔습니다. 우물가엔 간밤에 내린 눈이 무릎이 빠질 정도록 수복이 쌓여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눈을 가리키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간밤에 눈이 많이 왔구나. 아들아, 저 눈을 져다 우물을 메우도록 해라."

아버지는 등에 지고 있던 지게를 아들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몹시 못마땅했지만 거역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들은 한 짐 두 짐 눈을 지고 와 우물에 계속 부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부어도 우물은 메워지지 않았습니다. 우물 속으로 들어간 눈은 자꾸 녹아버리기만 했습니다.

"아버지, 우물을 메우려면 흙을 져다 부어야 합니다. 눈을 져다 부으면 우물은 메워지지 않습니다. "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눈을 져다 부으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하는 수 없이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우물에 눈을 계속 져다 부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렸습니다.

'이건 정말 무모한 일이야, 아무리 아버지 말씀이라도 우물에 눈을 더 져다 부을 수는 없어.'

아들은 너무 힘이 들어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고 지게를 팽개친 체 집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들아, 젊을 때 하는 공부도 이와 같다. 눈을 짊어지고 우물을 메우는 것처럼 열심히 공부해라. 아무리 힘들어도 노력엔 끝이 없는 법이다. 우물에 흙을 져다 부으면 우물이 없어지지만, 우물에 눈을 져다 부으면 우물은 그대로 있다."

 

 

이 이야기는 제가 '담설전정(擔雪塡井)' 이라는 말을 우화 형식으로 한번 써본 것입니다. 청주 법인정사 설우스님의 법문을 읽다가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담설전정처럼 해야 한다' 는 부분을 읽게 되었습니다.

순간,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담설전정'은 어깨에 짊어질 담(擔), 눈 설(雪), 메울 전(塡), 우물 정(井) 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눈을 짊어지고 우물을 메우는 것처럼 하라' 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중국 고봉스님의 설법집《선요(禪要)》(출가자라면 누구나 읽고 그 의미를 깨우쳐야 하는 필독서입니다)에 나오는 것으로, 저는 이 말씀을 통해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어느 정도 노력해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학교 다닐 때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저만 해도 공부가 특별히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읽는 것도 공부요, 구입해야 할 도서목록 쪽지를 들고 서점에 가서 책을 사와 읽는 것도 공부요, 어머니 말씀과 아들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도 공부입니다. 지금 제 삶 구석구석은 공부해야 할 목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부한다는 것은 숨 쉬고 밥을 먹는 것과 똑같습니다.

문제는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저는 그동안 어떻게 공부해야 올바로 공부하는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공부한다는 것이 늘 종이를 구기거나 흙을 퍼서 꾸역꾸역 입안에 집어넣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말씀을 통해 비로소 공부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제가 '나'라는 우물에 눈을 붓지 않고 흙을 부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그 우물은 메워지고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우물을 눈으로 메우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눈을 져다 부으면 그 우물은 메워져 존재 자체가 없어집니다. 나 자신이라는 존재의 우물을 메우는 방법은 비슷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는 공부에서 노력은 끝이 없다는 것을 일깨우는 의미도 있지만, 공부한 것을 너무 드러내면 결국 '나'라는 존재성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부를 해도 공부한 바 없는 듯이, 우물 속에 내린 눈이 스스로 녹아 없어지듯이 겸손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부는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럼으로써 인간이라는 나 자신을 더욱 아름답게하기 위하여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땐 집집마다 우물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파트마다 수도를 틀기만 하면 물이 나오지만 예전엔 우물물을 길어 밥하고 빨래학 몸을 씻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대구 신천동에서 보냈는데 그때 살던 일자형 기와집 앞마당에도 깊은 우물이 있었습니다.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 어머니가 일하시는 부엌 독 안에 가득 부어드리는 게 책임이기도 했습니다.

여름이면 학교에 갔다 온 저를 어머니가 우물가에 엎드리게 하고 차가운 우물물로 목물을 해주셨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내 등에 퍼붓는 우물물이 그 얼마나 시원했는지요. 어떤 때는 수박을 우물에 오래 담가두었다가 식구들과 함께 먹기라도 하면 그 차고 시원하기가 지금의 냉장고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대구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는 도시로 눈이 한번 내리면 땅에도 내리고 우물에도 내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물에 눈이 많이 내려도 눈은 녹아 우물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흙으로 메워져 우물로서 더 이상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공부하는 것도 흙으로 우물을 메우는 꼴이라면 결국 나 자신이라는 우물을 메워버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공부를 하더라도 함박눈이 내린 우물처럼 늘 제 존재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물속에 떠 있는 달을 보면서 그것을 건지려는 것처럼 공부하라.'

옛사람들은 공부하는 자세에 대해 이런 말씀도 남겼습니다. 물속에 뜬 달은 아무리 건져도 그 존재 자체가 물속에 그대로 있습니다. 공부가 자신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공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제 노모가 여든아홉이실 때의 일입니다. 어디 특별히 편찮으신데도 없는데 갑자기 입맛이 없다고 통 밥을 드시지 않았습니다. 노인이 통 먹질 않으니 일주일 만에 살이 쏙 빠지고 기력이 없어 누워만 계셨습니다.

저는 저러다가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병원에 모시고 갔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병원에 너무 늦게 왔다고 크게 나무랐습니다. 혈액검사 결과, 염도 수치가 제로에 가까워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 염분이 없으면 뇌가 붓고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하면서 의사가 어머니에게 가장 먼저 내린 처방은 당장 소금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며칠간 약 먹듯이 소금을 입에 털어넣었습니다. 사람이 소금을 못 먹으면 죽는다는 사실이 실감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금' 보다 귀한 게 있다고 합니다. 바로 '황금' 이라고 합니다. 황금을 주면 소금을 살 수 있으니까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황금보다 귀한 게 있다고 합니다. 바로 '지금' 이라고 합니다. 지금 현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넌센스퀴즈 '세 가지의 금' 이야기입니다.

노모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자면 제 어머니는 사진 찍기를 몹시 싫어합니다. "젊을 때면 모를까 다 늙은 얼굴 찍으면 뭐하노" 하고 극구 안 찍으려고 하십니다. 그러면 제가 "어머니, 어머니가 제일 젊으실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바로 지금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최명란 시인은 그의 시 '자명한 연애론' 에서 '지금 이 시간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 중에 가장 젊은 시간' 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나 가장 젊을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 버리면 그만큼 젊음도 지나가버립니다. 그러니까 가족들과 사진도 찍고 행복을 즐겨야 할 시간과 장소는 바로 지금이며 여기입니다.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훨씬 더 나은 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은 현재의 순간을 신나게 즐기거나 누릴 줄 압니다. 아이들한테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현재만 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그렇지 못합니다. 현재에 있으면서도 어느새 과거에 가 고통스러워하거나 미래에 가 불안해합니다.

저는 서울역에서 KTX를 타야 할 일이 자주 있습니다. 예전에는 승차권을 미리 예매합니다. 그런데 KTX를 타고 가다가 '이 기차가 인생이라는 기차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부산이든 여수든 어디에 갔다가도 다시 출발역인 서울역으로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기차는 왕복승차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디로든 한번 타고 떠나면 두 번 다시 출발역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누구나 인생이라는 기차를 타고 지금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기차의 속도는 다 다를 수 있지만 이미 떠나버린 출발역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차를 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기뻐하고, 옆자리에 앉아 나와 함께 가는 이를 소중히 여기고,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 하나하나에도 눈길을 거두지 않는 일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법정스님 입적 2주기를 맞아 스님께서 펴내신 산문집과 강연하신 말씀 등을 다시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스님께서는 불필요한 것은 더 이상 갖지 말라는 의미의 '무소유의 정신' 외에도 산문집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강조하신 말씀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생각하며 열심히 살아라, 지금이 바로 그때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삶은 미래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입니다. 매 순간의 쌓임이 세월을 이루고 한 생애를 이룹니다."

"진정한 행복은 이다음에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닙니다. 다음에, 이 일 먼저 좀 마쳐놓고 어디 시골에 내려가서 집 한 채 지어놓고 행복을 맞이하리라 설계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진정한 행복은 이다음에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겁니다. 지금껏 살아온 시간들을 되돌아보십시오. 행복을 누렸을 때는 한순간이었습니다.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으면서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다른 때가 우리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좋은 날이 어디 따로 있어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순간순간,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좋은 날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법정스님께서는 일일이 다 옮겨 적을 수 없을 정도로 이런 말씀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계셨습니다.

"나는 오늘을 살고 있을 뿐이지 미래에 대해선 관심이 없소."

어느 방송사 기자가 법정스님에게 "스님은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까?" 하고 질문하자 이렇게 대답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이어서 하셨습니다.

"저는 솔직히 내일과 미래에 대해서 전혀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어떤 계획도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그렇게 살아갈 뿐입니다. 바로 지금이자. 그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임제 선사의 법문만이 아니고, 부처님과 조사들이 한결같이 말해온 진리입니다. 21세기가 되었든 또 무슨 세계가 되었든, 그 시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이렇게 살고 있을 뿐입니다. '과거를 따라가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번 지나간 것은 이미 버려진 것,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다만 현재의 일을 자세히 살펴, 잘 알고 익히라,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 수 있으라.' 이는《아함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지나가버린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서 미리 불안해하거나 가불해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만 현재의 일을 자세히 살피고, 잘 알고 익히라는 것입니다."

 

 

구두쇠로 소문난 농부의 집에 한 가난한 사람이 일을 하러 갔습니다.

그는 해가 질 때까지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한 후 농부가 품삯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품삯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다리다 못해 농부에게 품삯을 요구했습니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주겠네."

그는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내일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는 농부를 찾아가 다시 품삯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구두쇠 농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일 준다고 했을 때 자네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는가? 지금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일세, 내일 다시 오게나."

 

 

이 우화에도 '내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의미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데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 인간의 어리석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 유명한 로버트 기요사키도 "삶에서 가장 파괴적인 단어는 내일"이라고 합니다. "내일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은 가난하고 불행하고 실패한다. 오늘은 승자의 단어이고, 내일은 패자의 단어이다. 당신의일생을 바꾸는 말은 오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내일이란 없는 것일까요. 오늘이 힘들 때마다 '그래도 내일은 좀 괜찮아지겠지' 하고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온 저는 어리석은 존재일까요. 도대체 법정스님께서 '내일은 없다. 미래에 매달리지 말라'고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국 오늘과 내일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속에 이미 내일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과 내일이라는 말은 동의어로서 서로 한 몸을 이루는데 그것을 자꾸 구분해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미 오늘 속에 존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내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암수가 한 몸을 이루는 달팽이처럼 우리의 삶의 몸에도 오늘과 내일이라는 암수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면 내일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을 열심히 살지 않으면 내일을 열심히 살지 않는 것과 같고, 오늘을 잃으면 내일을 잃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제 내일을 꿈꾸기보다 오늘을 꿈꾸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제가 내일을 위해 사는 것 같지만 실은 오늘을 위해 산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서 내일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시계는 살 수 있지만

시간은 살 수 없다

시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난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시간이 정확하게 맞는 시간을 시계를 만들기 위해 늘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가 시계를 잘못 만들어서 사람들이 약속시간을 어기게 되면 정말 큰일이야."

그는 늘 그런 생각을 하며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꼼꼼히 살피곤 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는 결혼을 하고 예쁜 딸을 얻었습니다. 딸이 태어난 그날부터 온갖 기술과 정성을 다해 딸에게 줄 특별한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딸은 어엿한 소녀로 자랐습니다.

어느 날 그는 그동안 몰래 만들어왔던 시계를 딸의 손목에 채워주었습니다.

"이 시계는 너만을 위해 만든 소중한 거란다. 잘 간직해야 한다."

그 시계는 다른 시계와 모양은 똑같았지만 초침, 분침, 시침이 각각 금과 은과 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준 시계를 환히 웃는 얼굴로 요모조모 살피던 딸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시침이 금, 분침이 은, 초침이 동이였더라면 더 좋을 뻔 했어요. 시계를 볼 때 맨 먼저 보는 게 시침이잖아요."

그는 잠시 빙그레 웃기만 하다가 딸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지만 초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분과 시를 아낄 수 있겠니. 시와 분은 초가 모여 만들어진다. 초를 허비하는 것은 곧 황금을 버리는 것과 같단다. 초침이 가는 길이 바로 황금의 길이야. 인생의 시간이 초침에 의해 흐른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네."

딸은 아버지의 말씀에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1초가 모여 1분이 되고, 1분이 모여 한 시간이 됩니다. 불가에서는 '1초 전이 전생' 이라고 생각합니다. 1초라는 시간이 현생을 이룰 만큼 1초가 인생에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대부분 1초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1초는 얼마든지 버려도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시계공 아버지는 딸에게 시계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1초라는 시간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체 책상 서랍 속에도 손목시계가 몇 개 있습니다. 기념품이나 선물로 받은 것도 있고 직접 산 것도 있습니다. 예전엔 시계 하나 지니기 어려웠는데 요즘은 사용하지도 않는 시계가 몇 개나 됩니다. 시계가 많다고 해서 시간이 많아지는 게 아닌데도 말입니다.

시계 속에 시간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시계는 시간이 아닙니다. 시계는 시간의 흐름을 확인하고 인지할 수 있는 물건일 뿐 그 속에 제 인생의 시간은 없습니다. 저는 시간 안에 사는 존재이지 시계 안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은 소멸돼가는 본성을 지녔지만 시계는 하나의 물체 그대로 존재합니다.

언젠가 순천에 있는 '정채봉문학관'에 가보았는데 그곳엔 동화 작가 정채봉 씨가 늘 손목에 차고 다니던 시계가 그대로 진열돼 있었습니다. 정채봉의 인생의 시간은 사라졌으나 저와 함께 지하철 손잡이를 잡았을 때 보았던 시계는 그대로 존재해 있었습니다. '시계는 남아 있지만 시간은 사라지고, 시계는 살 수 있지만 시간은 살 수 없다'는 사실이 절감되었습니다. 인생의 시간은 서로 사고 팔 수 있는 게 아니고 시계처럼 물질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흔히 '쇠털 같이 많은 날, 깨알 같이 많은 날'로 인생의 시간을 표현하지만 인생에 그런 날은 없습니다.

연말이 되어 한 해를 뒤돌아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지나온 한 해의 시간이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곰곰 찾아보면 그것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 결과 속에 있었습니다. 열심히 시를 썼으면 그 시 속에, 열심히 꽃을 키웠으면 그 꽃 속에, 열심히 사랑했으면 그 사랑 속에 제 한 해의 시간은 존재해 있었습니다. 시간은 시간으로 존재하지 않고 노력의 결실로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네팔의 '룸비니'에 가보면 황량한 들판 한가운데에 철조망이 돌려쳐져 있습니다. 그 안에 아기부처님을 목욕시킨 연못과 보리수 한 그루가 있습니다. 인도 최최의 통일국가 마우리아 제국을 이룬 아소카왕이 룸비니를 순례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높이 10미터가 넘는 돌기둥도 하나 서 있습니다.

아소카왕은 해외에 사절단을 보내 불교를 세계에 전파시킨 위대한 왕입니다. 인권을 존중하고 평화를 사랑한 그는 동물의 권리까지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왕에게 왕족임을 빙자해 국법을 어기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소카왕은 어느 날 동생을 불러 명했습니다.

"네 죄가 너무 크다. 일주일 뒤에 사형을 시키겠다. 그러나 특별히 불쌍히 여겨 일주일 동안이라도 왕처럼 즐길 수 있도록 해주겠다."

동생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이왕 죽을 바에야 왕처럼 실컷 즐기다가 죽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왕처럼 즐기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이 되자 험상궂게 생긴 장사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와 외쳤습니다.

"이제 죽을 날이 엿새 남았습니다!"

장사는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찾아와 외쳤습니다.

"이제 죽을 날이 사흘 남았습니다.!"

동생은 장사가 찾아와 매일 그렇게 소리치는 바람에 재미있게 즐기지도 못하고 그저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드디어 사형 집행 날이 되었습니다.

"그래, 그동안 잘 즐겼느냐?"

왕이 동생에게 물었습니다.

동생이 대답했습니다.

"저 장사가 눈을 부릅뜨고 시시각각 남은 시간을 말하는데 어떻게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말했습니다.

"보이지 않을 뿐이지 누구나 하루하루 죽을 날짜를 향해 가고 있다. 그러니 어찌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겠느냐?"

이 말을 들은 동생은 크게 깨닫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저는 이 일화를 통해 하루하루 죽을 날짜를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채 살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에게만은 살아갈 날이 한없이 많이 남아 있다고 믿고 있는 저 자신을 만납니다.

요즘 제 주변을 살펴보면 가족도 친구도 스승도 하나둘씩 끊임없이 세상을 떠납니다. 장례식장에 가서 그들의 죽음을 통해 나의 죽음을 생각하지만 그때뿐입니다. 인생의 시간이 한정돼 있는데도 나만은 영원히 살 것처럼 여깁니다. 아소카왕의 어리석은 동생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하면 남은 인생을 가치 있게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법정스님께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무가치한 일에 결코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가정적인 의무나 사회적인 역할을 할 만큼 했으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은 세월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도 강조하셨습니다.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잔고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깨알같이 많은 날' 어쩌고 하는 것은 시간에 대한 모독이고 망언이다. 자신에게 허락된 남은 시간을 의식한다면 순간순간을 아무렇게나 함부로 빠져나가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시한 일이나 무가치한 일에 귀중한 생명의 순간을 흘러보낸다면 인생이 그만큼 소홀해지고 가벼워질 것이다"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동안 저는 가족을 위해 제 인생의 시간을 거의 다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가족은 제가 형성한 것이기 때문에 제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랑은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 사랑하는 가족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법정스님께서는 이제 그런 가정적인 책무에서 벗어나 남은 인생의 시간을 자신을 위해 쓸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가족을 위하는 일이 곧 저 자신을 위하는 일이지만, 이제 스님의 말씀대로 남은 인생의 시간을 저 자신을 위해 쓸 시점이 된 것 같습니다.

"시간은 세 가지의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다. 주저하면서 다가오는 미래, 화살처럼 날아가는 현재, 그리고 멈춰 서서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과거가 그것이다."

독일의 시인 실러는 이렇게 말했지만 이제 제게 미래의 시간은 주저하면서 다가오지 않습니다. 현재처럼 화살같이 다가옵니다. 현재와 미래가 함께, 같은 걸음걸이로 다가옵니다.

저는 젊을 때는 시간이 많다 싶어 시간을 관리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지만 지금은 시간의 절대적 가치를 높이는 데에 중점을 둡니다. 많은 선현들이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소중히 사용하라. 인생은 시간낭비에 의해 더욱 짧아진다'고 한 말씀에 더욱 마음의 귀를 기울입니다. 소멸되는 인생의 시간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합니다.

 

 

 

부모는 활이고

자식은 화살이다

아들이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 준비를 할 때였습니다. 복학 신청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납부기간이 지나도록 아들은 등록금 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등록금 내야 한다는 말을 안 하니?"

내가 궁금해서 묻자 아들은 복학 신청을 했는데도 학교 인터넷 사이트에 등록금 고지 내용이 뜨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은근히 걱정이 되어 자세히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학교 회계 부서에 전화해보더니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복학이 된다고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 이미 등록금을 내고 입대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이 입대 휴학을 하려고 하자 학교 측에서 그 학기 등록금을 미리 내야 한다고 해서 냈다가 되돌려받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집안 형편상 등록금 내기 힘들어 군에 먼저 가려는 학생은 어떡하느냐, 이건 재고해봐야 할 문제다."

저는 그때 학교 측이 일 처리를 잘못한다고 생각돼 항의 전화를 해서 돈을 되돌려받은 적이 있습니다. 학교 측에서는 복학할 때 등록금 인상분은 받지 않는다는 취지에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해명하면서 반환해주었습니다. 그래도 혹시 내가 잘못 기억하는 게 아닐까 싶어 지난 통장을 찾아보자 분명 입금이 돼 있었습니다. 아들이 입대한 뒤 입금되었기 때문에 아들은 그런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니다. 돌려받은 게 분명하다. 등록금을 내야 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순간 제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학교에서 내라고 하지도 않는데 이대로 내지 말고 그냥 지나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 담당자가 등록금을 받은 사실은 기록해놓고 반환한 사실은 누락시킨 게 분명했습니다. 이미 그렇게 전산 처리돼 있기 때문에 잘못이 드러날 까닭이 없었습니다. 안 내면 안 내는 대로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설령 나중에 드러난다 해도 그때 내면 그뿐일 사항이었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들도 한순간 그렇다면 굳이 낼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지워버렸습니다. 아버지인 내가 부정한 모습을 보이면 아들이 앞으로 부정을 긍정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들한테 분명한 태도로 말했습니다.

"이건 담장자의 실수다. 남의 실수를 악이용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내 아들인 네가 복학해서 다시 공부하는데 아버지인 내가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는 없다. 항상 올바른 태도를 지니고 사는 게 중요하다."

저는 아들에게 담당자를 찾아가 언제 얼마가 학교 측 명의로 제 통장에 입금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고 다시 등록금을 납부하도록 했습니다.

지금도 그 때 일만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당연한 결정이지만 얼마나 잘한 일인지 참 다행이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만일 그런 사실을 숨긴 채 등록금을 내지 않고 복학하게 했다면 아들 앞에 두고두고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래서 속여서 대학을 졸업하게 해서 아들이 사회에 나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한때 그것은 일상의 사소한 일로 여겨졌지만 세월이 갈수록 인생의 중요한 일로 느껴집니다.

부모는 활이고 자식은 화살이라고 했습니다.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기 위해서는 활의 정확도가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안정된 자세에서 정확한 방향을 향해 화살을 힘껏 쏘았다 하더라도 그 순간 활이 흔들리면 화살이 제대로 날아갈 리 없습니다. 부모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활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삶의 태도는 곧 자식의 삶의 태도를 결정짓습니다.

저는 화살인 아들에게 아버지라는 화살로서의 바른 자세를 보여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만약 제가 잘못 만들어진 활이라면 아들 또한 잘못 날아가는 화살이 될 게 뻔합니다. 이미 잘못 날아간 화살을 활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부모로서의 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면 화살로서의 아들도 어쩌면 바람직하지 않은 삶의 방향으로 날아가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아들 앞에 항상 떳떳하고 당당합니다. 아들 또한 자기 자신과 이 사회 앞에 늘 당당한 태도를 지니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아들에게 "너라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 것이냐"고 물어보자 아들이 "당연히 등록금을 내야지요"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화살이 멀리 날아가려면 활의 몸이 많이 휘어져야 합니다. 가장 멀리 날아간 화살은 등이 가장 많이 휜 활에 의해 날아간 화살입니다. 부모라는 활이 자식이라는 화살을 성공이라는 인생의 하늘 속으로 멀리 날려 보내려면 부모의 몸과 마음 또한 크게 휘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휘어지면서 힘이 들어도 그 고통을 견뎌내야 합니다.

실제로 늙은 부모의 육체는 등이 활처럼 굽어집니다. 그동안 화살인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노동을 하며 활의 역할을 다해왔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위해 활처럼 깊게 휘어지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식도 그만 자기 자식의 활이 되고 맙니다.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고 알게 되었다

 

 

 

이 시는 아버지의 아들이었던 제가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된 뒤 쓴 '아버지의 나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저는 이 시를 쓰면서 비로소 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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