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삶의 기술, 맷집을 키우는 힘

오키Oki 2013. 9. 25. 20:51

 

공자의 시론詩論

 

 

詩시, 可以興가이흥  可以觀가이관  可以羣가이군  可以怨가이원  邇之事父이지사부,

遠之事君원지사군  多識於鳥獸草木之名다식어조수초목지명.

 

첫째, 시는 마음으로 느낀 것을 밖으로 표출할 수 있게 한다. 둘째, 시는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알게 해 준다. 셋째, 시는 개인이 어떻게 세상과 조화롭게 소통하며 방종과 타락에 이르지 않을 수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넷째, 시는 온갖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카타르시스 작용을 한다. 다섯째, 시는 인간 존재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준다. 여섯째, 시를 읽으면 새, 짐승, 풀, 나무 등의 생리와 명칭을 알게 해주는 덤도 있다.

 

 

 

 

- 대한민국 대표 인문학자들이 들려주는인문학 명강동양 고전 중에서 -

내 인생에 지식을 뛰어 넘는 지혜를 선물하라!

 

 

스펙보다 더 중요한 자기발견,『격몽요결』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전한학·철학 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철학 박사

서울대학교 철학 학사

저서『근사록』,『왜 동양철학인가』,『조선유학의 거장들』외 다수

 

 

 

"자기가 누군지에 대한 의문을 늘 안고 살면서

한편 그것을 억누릅니다. 유보하고 사는 겁니다.

이 실존적 물음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행복해지려면

우선 내가 누군지에 대한 각성들이 충만해져야 합니다."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어린이들이 읽는 책이라고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동몽선습童蒙先習』이나『동몽수지童夢須知』가 어린이들이 읽는 책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몽夢'자는 어린이를 의미하기보다, '무지몽매無知蒙昧하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무지속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깨우쳐야 하므로『격몽요결』의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격몽요결   1577년 이이가 집필한 책,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가장 기본적인 교과서였다.

동몽선습  조선 중종 36년(1541년) 학자 박세무가 지은 서당 교재.

동몽수지  중국 송나라 때 주자가 쓴 아동교육서, 어린이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와 예절에 대한 내용이다.

육도윤회  불교에서 인과응보에 따라 육도, 즉 중생이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생애를 도는 일.

 

 

현자들의 우화는 대체로 '인간의 무지'를 두고 한 일침, 혹은 풍자인 경우가 많습니다.『장자』를 보면 조삼모사朝三暮四 이야기가 나옵니다. 원숭이들한테 밤을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겠다고 했더니 좋다고 깩깩 댔다지요. 종류랑 개수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일희일비하는 원숭이들은 기실 우리 자신을 가리킵니다.

한편 불교에서는 사람이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한다고 말합니다. 윤회를 하다 보뎜 짐승도 됐다가, 사람도 됩니다.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고, 아수라 싸움꾼이 되기도 하고, 아귀로 늘 허기진 삶을 살기도 하고, 드물게는 천상에 태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섯 가지의 윤회 인생은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는 의식과 삶의 수준을 가리킵니다. 육도라는 게 결국은 인간들의 얘기라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격몽요결』의 취지도 어린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지를 깨는 비결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지금부터 다음 네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지금 왜 이 시대에 인문학이 다시 화두가 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여러분에게 아주 생소한 단어인 '심학心學'에 대해 알려 주고자 합니다. 유교는 독특하게 인간 정신의 개발을 심학이라는 프로젝트로 설정하고 그 방법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그 기초 교과서에 해당하는『격몽요결』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 척박한 시대에 유학의 도를 시대착오적으로 권유해 볼까 합니다.

사람들은 유교에 대해 다양한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정치적 임무, 가부장제, 권위주의, 여성 억압, 제사나 의례, 예절 등을 떠올립니다. 이런 것들은 유교의 전체 내용 중의 일부이고, 유교의 참된 정신이기보다 올바른 인식을 방해하는 고정관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유교의 역사가 그렇게 흘러왔다 하더라도 우리는 현재 탈역사적脫歷史的으로 역사를 넘어서 새로운 사고를 창조해 낼 책임과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옛날 역사가 그랬으니까 새로운 얘기는 못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과거에 갇혀 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심학이 유교의 핵심 코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 인문학인가

"내려올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본/그 꽃"

고은 시인의 시「그 꽃」입니다. 우리 인생도 나이 40, 50에 들어서면 꺾어집니다. 내려갈 때 보면 그동안 올라올 때 봤던 것과는 또 다른 가치, 또 다른 풍경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를 들면 은퇴하고 나면 친구가 더 소중하고 가족들 사이의 관계, 여가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지요. 그동안 열심히 돈 벌고 가족 부양하겠다고 뛰어온 것과 또 다른 삶의 지평, 가치를 만나게 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20세기도 비슷한 도정을 겪어 왔습니다. 20세기 초 식민시대와 해방, 전쟁을 겪었고, 그 다음에는 국부를 창출하고 세계 속의 강국으로 커 나가기 위해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소외된 사람, 그늘진 곳이 없도록 분배와 복지를 부르짓습니다. 이 모든 소란이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안정과 행복입니다.

그런데 20세기의 끝, 놀라운 성공신화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오히려 하락세입니다. OECD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소득수준은 세계 34위인데 행복지수는 103위입니다. 심각한 불균형을 안고 있습니다. 뭔가 중요한 전환 내지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겁니다.

행복이 중심 화두에 놓이면 그동안 우리가 추진해 왔던 가치들을 반성하게 됩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우리가 성장 제일주의로 가다 보면 지구적 환경, 자원 문제, 기후 문제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거라고 경고합니다. 조금 세상을 달리보고 다른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라는 것이 이제 지구적 화두가 됐습니다.

장자는 BC 4세기에 살았던 인물인데, 장자가 인간의 현실을 진단한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깨어나면 주어지는 상황과 날마다 얽히는 씨름질…… 자잘한 걱정거리에 잠 못 들다 거대한 공포에 질리는 우리네 인생, 시비를 가릴 땐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나르고, 붙잡은 것을 지킬 땐 하늘에 맹세한 듯 꿈쩍도 않는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들어간다,…… 마침내 지치고 눌려 낡은 하수구처럼 막힌 죽음 가까이의 정신은 떠오르는 빛을 다시 보지 못한다.

 

 

잠에서 깨어나면 늘 새로운 상황, 새로운 문제에 부딪치며 인생을 소모하면서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잘한 걱정들이 나날이 쌓여 가고, 그러다 큰 걱정이나 재난이 엄습하면 어찌할 줄 모르고 허우적대는 것이 인생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현실을 인지하고 돌파해 행복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가 모든 사람이 해결해야 될 숙제이고 삶의 관건입니다. 그 실존의 문제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13~14세기에 살았던 기독교 신비주의자입니다. 그는 "누구든 존재와 죽음의 기술을 배우지 않고서 어떻게 살 수가 있겠는가?"라며 살아가는 기술과 아울러 죽음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서구의 대학에서는 초기에 이런 지식과 기술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학이 전공 학문을 전수하고 연구하는 곳으로 변해서 이런 류의 '삶의 지혜'는 더 이상 학습되거나 교육되지 않습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삶은 혼란스럽고 길은 잘 보이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휴학계를 내고 산속 암자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 정체를 잘 몰랐지만. 제가 그때 느낀 갈증은 라틴어로 '아르스 비타이ars vitac'라고 부르는 삶의 기술the Art dof Living입니다. 이게 인문학의 핵심이고 우리가 배워야 될 기본적인 것입니다.

19세기 때 철학자 아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인문학을 "고전 작가들에 대한 연구"라고 말했습니다. 고전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 곧 인문학이라 한 이유는 고전을 통해서야 비로소 우리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몸에 병이 들면 의사를 찾아가고, 차가 고장 나면 카센타로 갑니다. 그 방면의 전문가를 찾아가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우리는 현자 혹은 성인, 그리고 고전학자라 부릅니다. 고전을 쓴 사람들은 일찌감치 삶의 진실, 인간의 본질을 통찰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배우고, 그 사람들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고전학이며 곧 인문학입니다.

동서양의 고전들은 무궁하고,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서 유교가 내세운 대표적 고전들은 사서삼경四書三經임은 다들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격몽요결』은 삶의 기술에 대한 유교적 입문, 혹은 기초를 담고 있습니다.

율곡栗谷은 오랜 전통을 따라 '학문學問'을 지금의 분과 지식과는 달리 '삶의 기술'로 정의했습니다.『격몽요결』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 노릇을 하자면 '공부學問'를 해야 한다. '공부學問'라고 하는 것은 무슨 남다른,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다. 일상적 삶에서, 관계와 거래에서, 일을 적절히 처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일 뿐이다. 산에서 한 소식을 하거나 세상을 지배하는 힘을 얻자고 하는 일이 아니다. 공부를 안 하면 마음은 잡초로 뒤덮이고, 세상은 캄캄해진다. 그래서 책을 읽고 지식을 찾는다. 지식이 길을 밝혀줄 것이니 오지 그때라야 정신의 뿌리가 튼튼해지고 활동이 균형을 얻는다.

 

 

人生斯世인생사세,   非學問비학문 無以爲人무이위인.

所謂學問者소위학문자,   亦非異常別件物事也역비이상별건물사야.

只是爲父當慈지시위부당자,   爲子當孝위자당효.

爲臣當忠위신당충,   爲父婦當別위부부당별,   爲兄弟當友위형제당우.

爲少者當敬長위소자당경장,   爲朋友當有信위붕우당유신.

皆於日用動靜之間개어일용동정지간,   隨事各得其當而已수사각득기당이이.

非馳心玄妙비치심현묘,   希覬奇效者也희기기효자야.

但不學之人단불학지인,   心地茅塞심지모색.

以明當行之路然後이명당행지로연후,   造詣得正而踐履得中矣조예득정이천리득중의.

 

 

 

우리가 순간순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를 습득하고 가르치는 것이 학문이라는 겁니다. 다시 학문은 인간으로 살면서 익혀야 될 최초이자 최후의 기술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게 유교식 학문의 정의입니다. 이것을 현대용어로는 인문학이라 부릅니다.

인문학은 몇 가지 효용이 있습니다. 첫째,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하고, 둘째, 삶을 견디는 기술을 습득시킵니다. 사실 최고의 행복은 소수의 사람들한테만 주어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식의 짐이든, 자기 자신의 짐이든, 부모의 짐이든 수많은 짐을 안고 인생이란 항로를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자면 맷집이 튼튼해야 합니다. 맷집이 약하면 쓰러집니다. 인문학은 맷집을 키우는 힘을 줄 것입니다.

얼마 전에 티타늄으로 된 가벼운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자꾸 콧잔등이 옆이 파여서 쓰던 콧받침이 있는 다소 무거운 안경으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편합니다. 티타늄 안경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콧받침이 없이 만들어진 탓에 오히려 코가 안경의 압력에 짓눌려 불편했던 것입니다. 콧받침은 안경의 압력을 분산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일을 통해, 인문학이라는 것이 안경의 콧받침처럼 삶의 무게를 분산시켜 주는 놀라운 효과를 가지고 있는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셋째, 인문학은 의미와 유대를 강화하는 훈련입니다. 우리는 각자 분절된 개인으로 타인과 소통이 잘 안 됩니다. 가족 간에도 잘 안 되고 부모자식 간에도 그렇고 이웃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문학은 이것을 강화시켜 주는 기술을 가르쳐 줍니다.

 

 

 

마음의 훈련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로마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 군대 막사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가 막사에서 쓴『명상록』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일은 없다. 그러나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보지 못하는 자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눈치가 없고 사람의 마음을 못 읽으면 어떤 일에서든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천하를 호령한 황제는 이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조선시대 때 어느 시골 선비가 북경 시내 번화가에 갔습니다. 휘황한 불빛 아래에서 화려한 화장을 한 여자가 말을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곤 순간 넋이 나갔습니다.

 

 

내 마음, 붉은 화장 따라 가버리고, 껍데기만, 쓸쓸히 문에 기대어 섰네.

心逐紅粧去심축홍장거  身空獨倚門신공독의문

 

 

이 말을 듣곤 그 여자가 다음과 같이 화답합니다.

 

 

짐이 무겁다고 나귀가 성질을 부리는데, 사람 하나가 더 올라타서 그랬나보군.

嗔車載重여진거재중  添却一人魂첨각일인혼

 

 

선비와 여인이 주고받은 말에 재치가 넘칩니다. 마음이 사람의 무게에 전부를 싣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과 더불어 살고 있고 마음을 쓰면서 살고 있습니다.

심학은 마음을 개발하겠다는 건데 '우리 마음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이 늘 꼬부라져 있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닭이나 개가 집을 나가면 온 식구가 찾으러 나가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누군지 모르면서 찾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이 굽어 있다고 말합니다. 뒤틀려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이런 비유를 듭니다.

 

 

무명지가 굽은 사람은 이것을 펼 수 있는 용한 의사가 있다면 먼 곳도 마다 않고 집을 팔아서라도 고치러 가지만, 정작 자기 마음이 구부러진 것은 펼 생각을 안 한다.

 

孟子曰맹자왈  今有無名之指금유무명지지  屈而不信굴이불신  非疾痛害事也비질통해사야.

如有能信之者여유능신지자  則不遠秦楚之路즉불원진초지로  爲指之不若人也위지지불약인야.

指不若人지불약인  則知惡之즉지오지.

心不若人심불약인  則不知惡즉불지오,  此之謂不知類也차지위불지류야.

 

 

 

대체로 우리는 내가 누군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또 한편 내가 좀 구부러진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도 인정을 잘 안 합니다. 우리 마음에 무슨 문제가 있냐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은 시인이 젊은 승려 시절 서귀포에서 은거한 적이 있습니다. 일년에 소주를 천 병 마셨다고 하는데, 그때 지은 시 가운데 「여수旅愁35」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서귀읍 앞바다에 비가 내린다/껴안아도/또 껴안아도/아득한 아내의 허리." 여기 '아득한'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부부가 수십 년을 같이 지지고 볶고 살아도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멀어지고 아득해진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각자 자기 우물 속에 자기 감옥 속에 자기 관점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일상은 이렇게 자기중심적이고 스스로가 만든 감옥 속에 갇혀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 용어로는 '나르시시즘'이라고 합니다. 연못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선 사랑에 빠져 죽어 수선화가 된 나르키소스Narcissus라는 미소년의 이름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이렇게 자기 속에 갇혀 있는 '고착'을 치유해야 행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유교나 불교, 노장사상이 똑같이 하는 소리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워낙 힘들기 때문에 수많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위로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영혼의 당뇨병 시대'라 그랬습니다. "하도 설탕을 많이 투여해서, 위로를 너무 해 줘서 지금 당뇨병에 걸리게 생겼다. 설탕을 줄이고 식사도 줄이고 몸으로 근력을 키워야 하는데 계속 설탕만 주입하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격몽요결』에서 율곡은 자기 치유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얼굴은 못난 얼굴을 예쁘게 만들 수가 없고, 작은 키를 키울 수도 없고, 약한 체질을 갑자기 강하게 만들 수도 없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유연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변화,성숙이 가능하다.

 

요새 같으면 아마 "얼굴도 성형외과에 가면 얼마든지 고치고, 키도 뭐 성장판 수술을 할 수 있고, 몸도 헬스장 가서 몸짱으로 만들 수 있는데, 정말 중요한 건 네 마음을 성장시키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는 성형외과에 의사도 없었고 약품도 없었기 때문에 용모, 체질 등은 운명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얼마든지 성장,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으로 희망을 주었습니다.

마음을 성형하고 마음을 치유하고 성숙시키는 이 프로젝트를 그림 열 장으로 정리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퇴계가 편찬한『성학십도』가 그것입니다. 그 가운데 여덟 번째 '심학도'가 핵심 설계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워낙 암호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암호를 풀려면 조금 공을 들여야 합니다.

앞서 우리 마음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그랬습니다. 마음이 굽어져 있다는 것과, 자기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두 번째 항목부터 짚어보겠습니다.

자기가 누구냐는 질문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돌이켜보면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부터 엄마는 아이에게 끝없이 훈육을 하고 명령을 합니다. "깨끗이 씻어, 장난감 입에 물면 안 돼. 빨리 자"에서 시작해서, 좀 자라면 선생님의 훈육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중·고등학교에 가면 "너 대학에 가야 해, 공부 열심히 해"라고 다그칩니다.

부모와 학교는 당대 사회와 문화적 가치들을 대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잘 순종하다가 어느 순간, 회의와 반발에 부딪힙니다. "밥 먹고 학교 가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지겨워질 때쯤 사춘기가 시작됩니다. 부모에게 떠밀려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누구지'라는 물음에 직면합니다. 늦어도 대학 때 쯤, 이른 경우에는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런 고민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은 해결되지 않은 채 평생 동안 지속됩니다. 대학 입학 후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취직하고 직장 다니고 은퇴하고 나서도 여전히 '난 누구지?' 하는 고민을 합니다. 자기가 누군지에 대한 의문을 늘 안고 살면서 한편 그것을 억누릅니다. 유보하고 사는 겁니다. 이 실존적 물음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행복해지려면 우선 내가 누군지에 대한 각성들이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동서양 할 것 없이 현자들은 끊임없이 "너는 누구냐"라고 묻습니다.『성경』에도 보면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라고 했고, 선불교의 실질적 창시자인 육조 혜능慧能도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네 얼굴을 보여다오"라고 다그쳤습니다. 그가 물은 것은 부모에 의해서 훈육되고 사회가 길들이기 전 너의 얼굴은 무엇이냐고 묻는 겁니다. 셰익스피어 또한 "내가 누군지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고뇌했습니다.

자기가 누군지 분명하지 않으면 끝없이 죄와 기만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악의 핵심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자기가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새에 저질러진다는 겁니다.

유교의 최종적이면서도 가장 기초적인 훈련은 늘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그것을 '경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끝엇이 물어야 하고 자기 밖으로 나가 있는 마음을 늘 더불어 있도록 연습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평생해야 할 일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우리가 이렇게 자기 망각, 자기 상실 상태에서 잘못된 성격의 구조로 통해서 뭔가 관계를 망치고 있으니 고쳐야 된다는 겁니다.

 

 

 

성격 교정

공자孔子에게는 '네 가지'가 없었습니다. 이를 "자절사子絶四"라 합니다. 네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의意'입니다. 사족partial인 욕망이나 트라우마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필必'입니다. 의지로 미친듯이 돌진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고固'입니다. 반복되는 경향이나 패턴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아我', 즉 자아나 성격이 없었습니다.

사적인 욕망 혹은 충동이 생기면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데, 그것이 계속 반복되고 패턴이 됩니다.이때 독특한 반응과 충동의 구조가 생기는데 이를 우리는 성격이라고 합니다. 공자는 사람들의 반응과 충동이 오염되어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다들 반응이나 충동이 오염되어 있다는 걸 잘 모릅니다. 특히나 18세기 이후 근대 산업사회에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부르짖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을 최대한 구현시켜 주겠다. 이것을 프롬은 '위대한 약속the Great Promise'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이건 실현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단 자원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욕구 중에는 생물학적으로 필요한 건전한 욕구가 있고 자기 성장에 도움이 되는 욕구가 있는가 하면 불건전한 충동, 반사회적 욕구도 함께 있는데 근대사회에서는 이것의 질을 묻지 않았습니다. 이런 욕구들은 성취한다고 해도 별로 행복 정진에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반사회적인 것들입니다.

권력과 인정을 둘러싼 것들이 특히 위태롭습니다. 유교나 불교에서는 이런 사회적 욕구를 매우 위태롭게 생각합니다. 권력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타자를 지배하고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보하겠다는 것이므로 이를 병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을 지배하는 것과 남에게 복종하면서 편안함을 느끼는 마음이 공생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심리학적 용어로는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이리고 부릅니다. 사디즘sadism과 마조히즘masochism을 통칭하는 표현입니다. 인간들이 다 그렇게 주종관계로 공생적으로 얽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깨야 건전한 자신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사도마조히즘  정신 안에 가학적이고 피학적 소망, 환상 그리고 욕망 파생물이 공존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

사디즘  성적 대상에게 고통으로 줌으로써 성적인 쾌감을 얻는 이상 성행위.

마조히즘  이성으로부터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학대를 받고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만족을 느끼는 병적인 심리상태.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뭔가 꼬여 있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자각이 되면 희망이 있습니다. 늘 자신의 '내부'를 성찰하고, 충동의 숨겨진 매커니즘을 파고 드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정복자인 메난드로스가 인도 서북부를 침공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나기세나라는 승려가 메난드로스와 대담을 나눕니다.

"대왕이시어,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 사이에 뭐가 더 큽니까?" 그러니까 대왕이 "당연히 알고 짓는 죄가 더 크지"라고 대답합니다. 승려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이런 비유를 듭니다. "뜨거운 쇳덩어리가 있다고 할 때, 이것을 모르고 잡을 때, 더 많이 데는 법입니다."

알고 짓는 죄에는 개선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교나 불교, 노장, 동서양의 정신적 전통들이 '각성'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비자각의 결과로 일어나는 왜곡의 메커니즘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굳어진다는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가 살아왔던 세상, 자기 경험체계 안에서 자기 의지, 자기 방어 속에서 계속 점점 더 경화되어 가는 것이지요. 그 정도가 심한 사람을 우리는 속된 말로 '꼰대'라 부릅니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들을 보편적인 가치로 여겨 이웃과 자식들에게 강요하는 막힌 사람을 그런 이름으로 부릅니다.

우리의 욕구 충동 중에 상당히 많은 것이 왜곡되고 병들어 있습니다.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우리가 알고 있는 주관적이 욕망들의 대다수가 객관적으로 유해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병이 생긴다는 겁니다. 소화성 질병 등 '관리자 병manager sickness'이라 불리는 것들이, 가난이나 물질적인 것과 관계없이 우리가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한 대가라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사회적으로 돈을 많이 벌라든가 출세하라는 말을 안 합니다. 오직 자기 속에 있는 탐진치貪瞋삼독三毒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만 가르칩니다. 진정한 열반, 해탈, 평화와 안정은 자기 내부의 적을 깨부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얘깁니다 불교의 성자를 '나한羅漢'이라 부릅니다. 나한은 자기 속의 적을 정복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적이 밖에 있는 게 아니고 자기 속에 있다는 거죠.

 

탐진치  탐욕貪慾과 진에瞋恚, 우치愚癡,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의미한다.

나한  불교의 수행을 완성하고, 사람들로부터 공양과 존경을 받을 값어치가 있는 성자.

 

퇴계가 선조에게 성학십도를 주기 전에 선조에게『서명西銘』이라는 책을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학문은 '돌덩이'의 마음을 풀어 녹이는 작업"이라고 정의합니다.『서명』은 서재의 서쪽에 붙인 잠언이란 뜻입니다. 원래 이름은 '정완訂頑'은 완고함을 교정한다는 뜻인데, 완고함은 모든 사람의 정신적인 경화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동쪽 서재에는 '폄우砭愚'를 붙였습니다. 폄우砭愚는 어리석음에 제대로 된 침을 놔주겠다. 다시 말해 '격몽'이라는 말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퇴계 또한 지금 사적인 불건전한 충동들이 인간을 가로막고 있어서 사람들 사이에 소통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을 삶의 근본문제로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남한테 보여야 할 당연한 관심이나 동정심, 공감이 발휘가 안 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아지사有我之私, 즉 나만 생각하는 우물 안 개구리의 고집을 깨서 무아無我 상태로 만들고 나를 깬 자리에서 일어나는 공공성을 확대시켜 돌처럼 단단해진 마음을 녹여 서로 소통되고 흐르듯이 해야 이 세상이 나와 같은 집안이고 이웃이 나와 같은 식구라는 것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치유의 프로그램을 유교가 개발해 왔습니다. 불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치유 프로그램의 최종 목표는 자기 속에 있는 자연성을 회복시키는 겁니다.

유교에서는 이를 자기가 갖고 있는 내재적 생명력을 최고조로 발휘한다는 뜻에서 '연비어약鳶飛魚躍'이라 합니다. 솔개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날뛰듯이, 인간이 자신의 생명에 감취진 힘과 권능을 최고조로 발양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자연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기 몸과 마음의 근본적인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이때까지 안 했는데 40대, 50대에 어떻게 하겠느냐며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격몽요결』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이치를, 이 근본 진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깨우쳐야 합니다. 오히려 한편으론 어른이 되어서 비로소 시작해야 할 훈련입니다.

 

 

격몽요결은 유교 인문학의 기초

『격몽요결』이 추구하는 목표는 성인이 되는 겁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성인은 기독교의 성인과 다르게 자기 자신의 자연성을 최고조로 발휘한 사람을 말합니다.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된 사람, 자신의 가능성을 최고조로 끌어 올린 성숙한 인간입니다. 이는 종교가 아니라 '인문학' 훈련을 통해서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인의 조건이라는 것이 아주 특별하지는 않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 성인의 조건과 나의 조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격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은 자기가 져야 합니다.

자신을 찾기 위해 외부의 신이나 다른 권위를 빌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게 유교의 핵심입니다. 신에 의존하지 말고 자신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너는 이미 모든 것을 갖고 있다." 율곡이『격몽요결』의 맨 처음에 일러주는 말입니다.

그래서『격몽요결』의 첫 장은 '입지立志'로 시작합니다. 입지는 이 길을 내가 과연 갈 것인가. 나의 내면의 가능성을 끌어올리는 이 프로젝트에 정말 내 인생을 걸 것인가라는 문제입니다. 그러자면 바깥 세상에 너무 연연하지 않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온갖 소비 광고와 매스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새 것이나 명품을 사야 좀 있어 보이는 것처럼 광고를 해대니까 세뇌가 되어서 그런 것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불행한 것처럼 느낍니다. 사회적인 시선을 의식한 가치와 광고에 세뇌되어 매스컴이 권하는 대로 소비하고 살다보니 자기가 정말 뭘 쓰고 있고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게 됐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정신을 차리고 자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 사고방식을 완전히. 혁명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부탄입니다. 부탄의 ,GNP는 1900달러입니다. 우리나라의 1/10밖에 안 됩니다. 물질적인 성장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제2장 '혁구습革舊習'에서 율곡은 익숙한 일상의 혁명을 적고 있습니다. 그는 우선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고 다독입니다. 우리는 남과 달라지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는데 이것을 떨쳐내라는 겁니다. 또한 부귀를 너무 부러워하거나 가난을 혐오하지 말고, 세속잡사에 너무 연연해 하지 말며, 생활태도를 단정히 하고 불건전한 자기 욕구를 다스려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그다음에 아주 중요한 핵심적인 기술을 언급합니다. "외물外物의 영향을 받지 마라!" 타인에게 너무 영향을 받지 말라는 의미인데 이게 관건입니다. 우리는 늘 타인의 의견에 추동되고, 그래서 자신이 아닌 남의 인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라캉이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마음을 수련한다는 것은 외부적 자극을 통제하는 기술에서 출발합니다.

그 첫 번째 요건은 참는 겁니다. 불교에서 인생은 사바세계, 즉 "참고 견뎌야 할 세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두 번째는 타인을 이해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화나게 만들면 그가 살아온 환경, 그가 그런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던 계기를 떠올리면 화가 훨씬 덜 납니다. 세 번째는 그보다 차원이 높은 건데, '세상에는 일어날 일만 일어난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재앙과 수많은 일들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불교에서는 '연기법'이라고 합니다.

『장자』에서도 똑같은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 하류에서 배를 묶고 있는데 위에서 배 하나가 갑자기 떠내려와 자기를 들이받았습니다. 벌컥 화를 내며 일어섰더니, 이런, 빈배였습니다. 주인이 타고 있어야 멱살을 잡고 소리를 칠 텐데 주인이 없으니 화를 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사 모든 일이 주인 없는 배가 풀려가서 그냥 내 배를 들이받았다고 생각하라는 겁니다.

조삼모사 이야기도 그래서 나왔습니다. 어차피 세상에 일어날 일들만 일어나고 다 똑같으니 화를 낼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아침에 네 개 주고 저녁에 세 개 줄게 하면 좋아라 하고 아침에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 줄게 하면 버럭 화를 낸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자기를 성숙시키는 기술

그 다음 자잉 '지신持身', 즉 생활습관입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몸가짐은 단정히 하라 등이 있습니다. 시선의 처리와 신중한 언행, 고요한 평정 등이 기초적으로 요구되는 몸가짐입니다. 이 기초를 유교는 소학小學이라는 이름으로 강조합니다. 이 토대가 없이는 지식과 학습이 모래 위의 누각처럼 부스러질 것이라 경고합니다. 몸이 긴장과 균형을 놓치면 마음 또한 흐트러진다는 것이 유교의 믿음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하는 훈련인데,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입니다.

그 기초 위에서 비로소 인문학의 훈련을 본격화합니다. 제4독서讀書, 즉 책과 지식의 학습이 그것입니다. 그의 주저인『성학집요 聖學輯要』를 보면 책을 읽는 독특하고 상세한 지침이 담겨 있습니다.

책을 읽어도 그때뿐인데, 그 이유는 첫째, 지식을 '소유'하려는 탐욕에서 섭렵涉獵을 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둘째, 책과 내가 구체적인 관계를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책의 내용이 바로 나의 이야기라는 절실한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셋째, 율곡은 독서의 태도로 "허심평기虛心平 숙독정사熟讀精思"를 권합니다. 즉 마음을 비우고 컨디션을 편안하게 유지하며 입에 붙듯이 읽고 정밀하게 사유하라고 말합니다. 독서법의 핵심은 집중입니다.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나는 이 책과 한번 승부를 내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넷째, 어떤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서 "이 친구 뭐 제대로 안 썼네, 내 생각하고 다르네"라며 비평을 합니다. 이걸 경계해야 합니다. 책은 배우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비평을 앞세우는 습성을 고쳐야 합니다. 그래서는 책을 들을 수 없습니다.

또 고전은 본시 어렵고 난해한 것입니다. 주자는 "책은 삼키지 말고 씹어라"고 권합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도 "올바르게 쏟아낸 잠언은 그냥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경게했습니다. 거기 닿기 위해서는 '현대인처럼' 약삭빨라서는 안되고, '소처럼'해야 한다고 경계했습니다.

제 서재에는 책이 몇 권 없습니다. 두 달에 한 번씩 책을 솎아냅니다. 퇴계 두 권, 율곡 두 권, 이 정도면 평생을 해도 새롭고 아직도 가야 될 곳이 있기 때문에 책을 많이 가질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오늘 한 겹을 벗기고 내일 한 겹을 더 벗길 뿐이다"라는 자세로 책을 대한다면 책의 이해는 늘 깊어가는 강물이 될 것입니다.

독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골륜탄조鶻圇呑棗'입니다. 골륜탄조는 새가 대추를 맛도 모르고 통째로 삼킨다는 뜻으로,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읽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껍질을 벗기고 살을 벗기고 뼈를 벗기고 골수가 벗겨질 때까지 고전은 파고들어 씹어야 합니다. 마치 곰탕 국물 우리듯이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떤 상황, 어떤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힘과 기량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실존의 모든 책임은 자기 속에 있기 때문에 세상을 원망하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유교는 정치적 게임이나 의례, 제사 너머에 있다는 것, 권위주의, 연고주의 등의 논의와는 또 다른 지평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유교는 그 모든 외적인 것들의 한 가운데에서, 그 소란을 떠나 상관없이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자기를 성숙시키는 기술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기 바랍니다.

저는 이렇게 적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학은 하드웨어가 필요하지 않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일을 하며, 휴식하는 바로 그 자리가 의미가 구현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나 위계는 거추장스럽다. 서원이나 사당은 없어도 좋다. 족보도 가부장도 필요하지 않다. 단 하나의 조건이라면 자신과 관계하고 동시에 타자와 관계하는 인간 조건이 있을 뿐이다. 서원이든 사당이든 유교의 건축과 상징에 장시과 문양이 극도로 절제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원의 좁은 방, 가구도 없는 무채색의 좁은 방, 그 빈 공간이 바로 유학이 임하고 있는 거소居所이다. 유학은 바로 그 자자랗고 통속적인 일상 속에서 보상도 기대도 없이 올리는 자신을 향한 예배이다.

 

 

유학은 바로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소박한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향해서 대화하는 자기 자신에게 드리는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철학 이야기』라는 책을 쓴 윌 듀랜트Will Durant는 평생에 걸쳐서 초인적 노력으로, 문명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는 철학을 '지혜, 혹은 깨달음의 추구'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지혜는 살아가는 기술이며 그 최종 목표는 행복이라고 말했습니다. 거기 이르는 길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게 아니고 오직 자기 덕성을, 자신을 완성시키는 곳에 있다고 단언합니다. 사회적으로 무엇을 얻고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는 모든 조건이 다 있다 하더라도 자기 내면의 덕성을 기르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붓다Buddha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갖추고 살았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한 별궁에서 살았고, 후궁들도 많았습니다. 부족한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유성출가踰城出家, 성벽을 넘어 출가를 합니다. 그게 인간의 도전입니다.

우리는 일상의 습관에 갇혀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어의 덫에도 갇혀 있습니다. 언어가 삶을 지시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언어와 우리는 단절될 필요가 있습니다. 스님들이 절간으로 산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완전한 단절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함입니다.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언어로 읽고 쓰고 생각하는 법을 익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뜻이 있는 분은 한문을 익혀 보기를 권합니다.

흔히 인류의 문명은 진보가 아닌 타락의 역사를 거쳐왔다라는 말을 합니다. 흡사 시냇물처럼 상류는 맑았는데 점차 아래로 내려오면서 온갖 지저분한 걸 끌어안고서 탁해집니다. 불교나 유교의 관점에서는 고대인들이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봅니다.

윌 듀랜트는 "진리는 오래된 것이다. 다만 오류만이 새롭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류를 진리로 착각하지 말고 오래된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적극적인 연습과 훈련을 해 나가길 바랍니다. 행복은 그 훈련에 달려 있습니다.

유교는 니체의『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운명을 닮은 듯합니다. 저는 가끔 니체가 이 책에 붙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붙인 부제를 떠올려 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자 동시에 그 어는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Ein Buch Fur Alle und Keinen!"

지금까지 유교의 기획을 주마간산격으로, 소략하게 스케치 해 보았습니다. 낡은 습속이나 지나간 에피소드가 아닌 그 '현재성'을 인지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모든 것이 '마케팅'을 지향하는 이 척박한 시대에 길을 나서볼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모두의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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