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망초가 허드러지게 핀 육월 집에 다녀간 딸들아!
엄마와 아빠가 10년 넘게 살아보고
귀농하여 살던 어느 날
엄마는 속으로 혼자서 참는 성격을
아빠 덕분에 많이 변화했는데
좋으면 좋다하고, 싫으면 싫다하여
그때그때 얘기하여 살자했더니(요새말로는 감정공유)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즐기게 되고 새로운 경험과 자신감을 만나게 되더라.
- 최광현 지음 『 가족의 두 얼굴 』중에서 -
이상적인 결혼은 배우자들의 문화 수준이 높고
자율성을 갖고 정서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상태이다.
- 머레이 보웬
가족 문제는 1+1 이다
가족은 어머니 품속처럼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아늑한 둥지,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 주는 곳이라고 하지만 과연 오늘날 이런 가족이 얼마나 될까. 가족이라고 하면 편안한보다 굴레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가족은 나의 힘이 되기도 하고 짐이 되기도 하며, 친밀함 뒤에 미묘한 갈등이 숨어 있기도 하고, 한없이 사랑하다가도 한없이 미워지기도 한다. 가족은 이처럼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가족상담을 오래 하다 보니 나는 따뜻함보다는 가족으로부터 비롯된 슬픔과 아픔, 피해의식과 트라우마를 지닌 이들을 훨씬 더 많이 만난다. 나는 독일에서 가족상담에 대해 공부하고 가족치료사로 일했다. 2002년 여름 귀국한 뒤로는 대학에서 가족심리학을 가르치면서 가족상담 활동을 병행해 왔다. 이런 경험 때문에 한국은 물론 유럽 여러 나라의 수많은 가족들이 안고 있는 아픔을 접하면서 서로 아끼고 보듬고 사랑을 키워야 할 가정이 잘못되면 오히려 불행의 싹을 자라게 하는 인큐베이터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았다.
건강하고 행복한 가족은 단지 의지만으로 되는 문제는 아니다. 의지만 있는 가족은 오히려 가족 구성원을 더욱 부담스럽고 힘들게 할 수도 있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건강하고 행복한 가족이 되기 위해서도 배워야 한다.
결혼생활이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일정한 특징이 있다. 대형 마트에 가면 1+1 행사 물건이 많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더 준다는 마케팅인데 힘든 부부와 가족에게도 1+1이 적용된다. 부부관계가 힘들수록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시킨다. 서로 성격이 너무 다르고, 애초 잘못 만났고, 너무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다는 등 상대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불행한 결혼의 1은 바로 상대방의 실망스럽고 상처 주는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힘든 부부와 가족관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 하나가 더해진다. 그것은 각자 배우자가 어린 시절 경험한 부모의 결혼생활과 그때 받았던 상처이다. 이 둘이 합쳐져 1+1을 이뤄 현재 불만과 짜증, 분노로 일그러진 가족이 된 것이다.
상대방에게서만 문제를 찾으려고 하면 그토록 원하는 행복한 가족과는 점점 더 멀어진다. 나의 지난날 상처와 아픔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데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온통 에너지를 쏟는 일은 밑 빠진 족에 물 붓기다. 내가 갖고 있는 나머지 1을 살피고 변화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문제가 있는 부부와 가족을 치료할 때 기본 전제가 있다. 가족 문제의 1+1을 가족 모두가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부부가 서로 각자 어린 시절의 상처와 그것의 영향을 마음으로 공감하고 존중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때 비로소 변화가 찾아온다.
감추고 부정할수록 더 커지는 상처
트라우마(trauma)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마음에 난 정신적 상처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마음의 상처를 모두 트라우마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날카로운 것에 살짝 손을 베었을 때를 떠올려 보면 당장은 아프고 피가 흐르지만, 잘 지혈하고 감싸 준 뒤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상처가 아뭅니다. 그러나 깊이 베인 상처는 쉬 낫지도 않을뿐더러 치료가 끝난 뒤에도 두고두고 흉이 남습니다. 심리학에서 트라우마라고 할 때는 이처럼 지속적이고 어쩌면 항구적일 수도 있는 마음속 깊은 상처를 말합니다.
트라우마는 익명의 대중이 붐비는 전철이나 공공장소보다 가정에서 더 자주 발생합니다. 가족은 한 번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하철에서 접촉한 불쾌한 사람을 다시 만날 확률은 희박하지만, 가족은 싫든 좋든 평생 함께 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족심리학이 별도로 필요한 중요한 이유입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서구에서는 열 살 이전의 네 아이 중 한 명꼴로 트라우마로 힘겨워하며 성인 두 사람 중 한 명이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아주 운이 없거나 극시 예외적인 경우에만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저명한 프랑스 신경정신과 의사 보리스 시륄니크는 트라우마는 피해자의 기억 속에 새겨져 마치 그를 따라 다니는 유령처럼 그 사람의 일부가 된다고 말합니다. 트라우마를 만든 사건은 일회적이었을지라도 피해자에게는 매일, 때로는 하루에도 수십 번 그때의 생생한 감정이 치밀어 오릅니다. 특히 성인기보다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의 경험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보리스 시륄니크는 그의 저서『유령의 속삭임』에서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자세가 상반된 두 인물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기도 한 두 사람을 만나볼까요.
만인의 연인에게 숨겨진 비극
노마진 모턴슨은 36세로 짧은 생을 마감한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16세에 처음 결혼했지만 4년 만에 이혼했고, 두 번째 결혼 상대는 아직까지도 미국인들이 '야구 영웅'으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전설의 타자 조 디마지오였습니다. 야구 영웅과 헤어진 뒤 만난 세 번째 남편은『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유명한 아서 밀러입니다. 결혼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제 누구인지 감이 오지요. 그녀는 바로 마릴린 먼로입니다. 타고난 미모로 사진 모델과 영화배우로 활동하면서 마릴린 먼로로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출연한 영화마다 히트하면서 그녀는 곧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동시대 남성들의 영원한 연인이자 섹스 심벌리이었고 사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름다움과 백치미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놀랄 만큼 비극적입니다. 미혼모였던 먼로의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으로 정상적인 자녀 양육이 불가능했습니다. 먼로는 일찌감치 고아원에 맡겨졌습니다.
최근에 읽은 동물학 책에 따르면 주인이 두 번 이상 바뀐 경험을 한 애완견은 더 이상 애완견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버림받은 충격으로 지나치게 우울하거나 공격적인 성향을 갖기 때문입니다. 강아지도 그러한데 사람은 어떠할까요? 먼로는 어린 시절 생모에게 버림받고 여러 고아원과 몇 곳의위탁 가정에 연달아 맡겨졌습니다. 어느 한 곳에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여러 곳을 전전햇으며 아홉 살 나이에 이웃 아저씨에게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조금 더 성장하자 주위의 남자들은 그녀를 성적 대상으로만 대했습니다. 그녀는 주변 남자들에게서따뜻한 사랑과 돌봄을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를 농락하고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만 주위에 우글거렸습니다
성장기가 불우했을지라도 배우로 성공한 뒤 먼로가 가진 아름다움과 스타로서의 명성은 오히려 남자들을 쥐락피락할 수 있는 놀라운 무기가 될 수도 있었는데 먼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받지 못한 사랑을 남자들에게서 보상받으려 했고 그것은 덫이 되었습니다.
심리학자 앨리스 밀러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채워지지 못한 사랑에 집착한다고 말합니다. 먼로는 집착하면 할수록 더욱 상처를 받았습니다. 숱한 염문에도 불구하고 세기의 연인인 먼로는 끝내 약물 과다 복용으로 힘든 삶을 마감했습니다. 버림받음의 트라우마를 경험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지만 결국 더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여운 여인이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었을까요? 그녀가 상처의 수렁에 빠지지 않고 건강하고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불행으로 인해 손상된 자아상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고 성인이 되어서도 반드시 불행한 것은 아니야!"
"엄마의 외로운 삶에 가슴이 아프고 아버지의 불성실함에 화가 나지만 나는 달라, 나는 엄마와 같은 삶을 반복하지는 않을 거야."
먼로는 스스로 자아상 회복을 위해 이런 주문을 외우며 자기 존중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트라우마를 극복한 미운 오리새끼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 먼로처럼 다 비극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동화 작가 안드레센이 있습니다.
1805년 그는 매춘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포주인 외할머니는 딸을 억지로 길거리로 내보내 돈을 벌게 했습니다. 딸이 안 가려고 하면 뺨을 때려서라도 몸을 팔 것을 강요했습니다. 매춘을 하던 도중 임신이 된 그녀는 집을 뛰쳐나와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인이었던 남편은 광긱의 발작 속에서 자살하였으며 그녀도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합니다. 안데르센의 어린 시절은 중독, 폭력, 매춘, 가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한 인간의 출발점에서 이보다 더 불행한 조건을 갖춘 이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암울한 조건에서 안데르센은 먼로와는 다른 삶을 선택합니다. 비록 불행한 가정사를 가졌으나 글을 배우고 시를 쓰면서 새로운 문화에 눈을 떴습니다. 그에게 관심을 가져중 이들과 교감을 나누고 창작의 기쁨 속에 과거의 그림자를 다스릴 줄 알았습니다.
그는 결코 과거의 불행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문학 작품에는 불행과 행복이라는 두 세계가 모두 공존합니다. 만일 그가 어린 시절의 불행을 저주하는 데만 몰두했다면 그의 아름다운 동화작품들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불행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행복을 향한 날갯짓을 결코 포지하지 않았던 안데르센의 내면을 가장 잘 반영한 작품이 대표작『미운 오리새끼』입니다. 미운 오리새끼는 주변으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무시당하는 슬픈 과거를 지녔습니다. 안데르센은 이 불행을 없는 일로 지우려 하지 않습니다. 불행을 인정하고 행복으로 향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마침내 백조로 변한 '미운 오리새끼' 이야기를 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안데르센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안데르센도 어린 시절의 아픔이 있지만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안데르센은 그의 힘든 어린 시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현실의 고통을 단순히 지워 버리고 싶은 기억으로만 치부하지 않고 행복으로 가기 위한 여정이라는 적극적 관점을 가졌습니다. 자신의 트라우마와 불행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았기에 안데르센은『성냥팔이 소녀』『 미운 오리새끼』 『왕자와 거지』같은 슬프면서도 따뜻한, 깊은 여운을 남기는 명작 동화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안데르센이 자신의 불행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은 일종의 관점의 변화이자 가지관의 변화, 즉 패러다임(paradigm)의 변화입니다. 상처와 불행을 치유하는 데에는 이렇게 패러다임의 변화가 꼭 필요합니다.
똥떡, 상처 치유의 지혜
'똥떡'은 오늘날처럼 과학과 심리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지혜를 엿볼 수 있는 풍습입니다. 똥떡은 어린이가 변을 보다가 똥통에 빠졌을 때 부모가 급하게 만들어 주는 떡을 말합니다. 구덩이를 파서 만든 똥통, 즉 재래식 변소에서 어린아이가 변을 보다가 빠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목숨을 잃는 경우도 생기곤 했습니다. 어린아아기 똥통에 빠지면 얼마나 놀라고 두렵겠습니까. 혐오스러운 냄새, 수치스러움과 불안감까지 뭉쳐져 아이는 변소에 안 갈 수도 없는 일, 변소에 갈 때마다 아이는 똥통에 빠졌을 때의 불쾌하고 공포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트라우마가 증폭되는 과정입니다.
현명한 부모들은 이런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재빨리 집에 있는 재료로 똥떡을 만들었습니다. 똥떡으로 부모들은 제를 올려 부정한 귀신이 타지 않기를 빈 뒤 온 동네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이는 직접 떡을 들고 동네를돌며 '똥 떡, 똥 떡' 하고 크게 소리를 칩니다.
예기치 않은 간식거리를 받아든 이웃들은 아이에게 좋은 덕담을 해주기 마련입니다. '녀석 놀랐겠구나,' 하며 머리도 쓰다듬어 줍니다. 아이는 이웃들로부터 관심과 격려를 받으면서 자연히 똥통에 빠진 황당한 경험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극복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직면'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없었던 일로 애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마주보는 것을 말합니다. 똥떡은 변소에 빠진 아이의 불안, 수치, 공포를 치유하는 놀라운 트라우마 치료 매커니즘이었던 것입니다.
이쯤 되면 왜 똥떡이 특별한 재료나 형식 없이 급하게 만들어졌는지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상들은 사건이 발생한 즉시 똥떡을 만들어 아이의 상처가 더 깊어지기 전에 회복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만들어 준 똥떡을 통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음날 다시 변소에 갈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직면하는 것이 중요하다
트라우마 치료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무엇보다 직면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핵심은 가족의 따뜻한 배려와 공감, 적극적인 관심입니다. 조상들이라고 해서 모든 가정에서 똥떡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녀를 소중하게 여기는 가정에서 내려온 전통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트라우마의 치료에는 이러한 '똥떡'이 필요합니다. 트라우마를 입으면 우리 마음은 자동으로 방어기제를 작동시킵니다. 그런데 이 방어기제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은폐하고 회피시키는 데 불과하기 때문에 근본 해결책이 되지 못할뿐더러 대개 일을 더 키우곤 합니다. 따라서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전에 트라우마에 대한 조기 치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트라우마 피해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공감, 지지는 직면이라는 힘든 과정에서 드러나는 상처를 아물게 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어린 시절의 아픔은 자국을 남긴다
어린 시절 힘들었던 경험은 우리에게 흔적을 남깁니다. 부모와의 관계나 집안 분위기 등 어린 시절 경험은 우리 인생의 안내자 구실을 합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 인생은 이 경험에 따라 방향이 어느 정도 정해집니다. 현재의 감정이나 행동은 과거의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받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나 결핍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상처나 결핍이 심할 경우 그의 인지적 정서적 기능을 마비시키고 부정적 감정이 몸과 마음을 뒤덮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지쳐 쓰러지지 않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속이거나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감정적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심리 의식이나 행위를 방어기제라고 합니다 방어기제에는 원시 방어기제와 중독 방어기제가 있습니다.
나를 지키려는 몸부림
원시 방어기제에는 억압, 부인, 반동형성, 퇴행, 전치, 승화, 분노의 자기에로의 전향 등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어기제를 평소 사용하는지 한번 살펴보세요.
억압 고통이나 불쾌감, 욕구를 무의식적으로 억압합니다. 심한 경위 고통스러운 약속이나 사건을 까먹거나 잊어버립니다. 참석하기 싫은 모임을 잊거나 지각하는 것을 통해 나타나기도 합니다.
부인 부인(否認)은 자신을 속이는 시도입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끝까지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라며 현실을 부인하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배신했을 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동형성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반대의 행동이나 태도를 취합니다. 속으로는 좋으면서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거나 시비를 거는 것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합리화 방어기제 중 가장 흔히 사용되는 방법입니다. 현실에 더 이상 실망을 느끼지 않기 위해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을 정당화할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솝 우화에서 여우가 탐스러운 포도를 먹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지만 실패한 후 '저 포도는 분명히 신포도일 꺼야.' 라고 말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퇴행 심각하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곤경에 처했을 때 불안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어린 시절 행동했던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한 아이가 동생이 생겼을 때 스트레스를 받고 어린아이 같은 짓을 하는 것이 한 예입니다. 성인의 경우 누군가로부터 비난을 받으면 대들거나 몹시 침울해져 혼자만의 공간에 틀어박히려는 성향을 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거나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무언가 얻기 위해 울거나 분노, 발작을 일츠키는 등 성숙하지 못한 방식으로 행동을 합니다.
전치 다른 사람에게 향해야 할 감정을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퍼붓습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속담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대부분 이 방어기제를 흔히 사용합닏. 특히 화를 내어도 별로 되갚을 힘이 없는 약자에게 쏟아붓습니다. 익명성이 유지되는 도로 한가운데서 거칠게 운전하거나 다른 운전자의 실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보복하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부부싸움 후에 괜히 자녀에게 소리 지르고 화풀이를 하거나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집에 들어와 공연히 아내와 자녀에게 풀거나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승화 사회적으로 받아들이 수 없는 성적인 혹은 폭력적 충동을 다른 대상과 표현 방법으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성숙한 방어기제 중 하나로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공격적 에너지를 학문에 쏟아부어 성과를 이루어 내기도 합니다. 프로이트는 승화가 모든 예술과 문화를 가능하게 했던 심리기제라고 봅니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동성애 충동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분노의 자기에로의 전향 자기 안에 있는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 것이 위험하고 허락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분노를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 스스로에게 보복을 하면서 자기를 파괴해 나갑니다. 헛되게 시간을 낭비하고 자신의 재능과 기회를 허비하고 게으름과 방탕으로 자신을 궁지로 몰아갑니다. 끝내는 자신을 없애려는 자살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상처가 깊으면 흉터가 남듯이 몸과 마음에도 해소되지 않은 트라우마가 남아 있습니다. 어린 시절 정서적 신체적 상처를 입으면 비합리적인 생각으로 자신을 방어합니다. "이 일이 내게 일어난 것을 보니 나는 분명히 나쁜 아이야."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분명히 사랑받을 수 없는 아이야." 이러한 생각을 하는 아이는 상처를 더욱 깊게 입으면서 뿌리 깊은 수치심을 갖습니다. 가족치료사인 브래드쇼는 수치심의 감정이 중독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죄책감은 우리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게 해주지만 수치심은 자신 스스로가 실수라고 느끼게 합니다. 이런 수치심의 감정에 외로움, 슬픔, 불안, 두려움, 분노, 우울 같은 다른 감정이 따라붙습니다. 여기서 가장 강력한 감정은 분노입니다. 상처를 받은 아이는 자기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믿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한 깊은 분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분노는 깊이 파묻혀 있다가 중독을 통해 표출됩니다.
크리스틴 콜드웰은 몸과 마음에 남아 있는 트라우마를 해결하려고 '지금 여기'의 몸을 떠나는 현상을 중독이라고 합니다. 중독이란 트라우마 때문에 상처 입은 어린 시절에 형성된 고정된 신체 반응입니다. 트라우마의 고통에서 빠져나오는 욕구충족이란 쾌락의 경험, 즉 중독이 대체물입니다. 알코올, 니코틴, 도박, 게임, 섹스 등에 의존하여 자기 몸을 떠나려고 합니다. 중독의 특성은 반복에 있습니다. 반복을 통해 우리의 몸은 중독에 익숙해집니다. 그러나 문제는 점차 내성이 생기면서 나중에는 고통을 완화시켜 주는 도구가 아닌 자신을 옭아매는 감옥이 됩니다.
현대인 10명 중 7명이 어떤 식으로든 중독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트라우마 전문가인 콜크에 의하면 중독은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이 상처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하는 '자가 치료'입니다. 그러나 중독은 상처를 해결하려는 사람과 그의 가족에게 더 깊은 정서적 심리적 고통을 주고 그 경험 속에서 다시 상처를 줍니다.
중독 방어기제는 우리 내면의 상처 입은 감정을 곧바로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대부분의 중독자들은 저마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감정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어 중독 행위를 선택합니다.
트라우마가 많을수록 스트레스에 민감해진다
심리학은 어린 시절의 경험이 미래의 삶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최근 심리생리학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경험이 뇌 속의 생화학적 작용을 왜곡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결과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되고 점점 더 신경이 예민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성인이 되면 사소한 스트레스까지도 호르몬 방출 체계를 무너뜨리고, 온몸이 경보 태세가 되어 무기력해지고 점점 우울해진다. 이 상태가 지속되거나 빈번해지면 우울증, 공포, 불안, 강박 등 여러 다른 스트레스성 질병에 노출될 수 있다.
다른 사람들보다 스트레스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다. 쉽게 스트레스를 받고 한 번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런 사람은 보통 어린 시절 아주 강도 높은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이다. 트라우마의 경험은 스트레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체질로 바꾸어 놓는다. 트라우마가 많은 사람은 그만큼 상처에 단련되어 그런 경험이 적은 사람보다 상처를 더 잘 극복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상처를 경험한 사람이 더 아프다. 반면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상처를 적게 받으며 자란 사람이 스트레스에 잘 대처한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많이 받은 사람은 스트레스를 잘 해소하지 못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이들은 스트레스 대처 시스템에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미국 나로파 대학의 몸 상담심리학과 교수 크리스턴 콜드웰은 이 분야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우리 몸에 남아 있는 트라우마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이 '자기 몸을 떠나는 방식'을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자기 몸을 떠나는 방식이란 곧 중독을 일컫는다. 중독은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만들어진 고정된 신체 반응이라는 것이다. 알코올, 니코틴, 도박, 게임, 섹스 등에 의존하여 평상시 자신의 몸 상태에서 잠시 벗어남으로써 트라우마의 고통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이다. 중독의 특성은 반복이다. 반복을 통해 우리의 몸은 중독에 점점 더 익숙해진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중독 행위를 선택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중독을 통해 고통스러운 감정을 피하려고 하고 점점 의존하려 든다. 그러나 문제는 내성이 생기는 데 있다. 한 번의 일탈행위로 잠시 고통스런 감정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그다음에는 통하지 않는다. 배고픈 사람이 빵 한 개를 먹을 때의 행복감과 맛이란 그 어떤 진수성찬 부럽지 않다. 그러나 두 개, 세 개… 먹는 빵이 늘어날수록 점점 만족감은 떨어진다. 이것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인데, 중독에도 똑같은 현상이 작용한다. 이윽고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어느 순간 도 하나의 빵이 주어진다면? 중독은 이제 고통을 완화시켜 주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감옥이 된다. 마릴린 먼로가 약물 중독으로 죽음에 이르렀듯이,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끊임없는 약물 과다 복용에도 불구하고 결코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했듯이, 중독은 결국 진정한 치유제가 되지 못한다.
마음 상처에 붕대를 감자
트라우마는 평생 치유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힘들지만 치료가 가능하다. 한때 영화로도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 상영된 적 있는『붕대클럽』이라는 일본 소설이 있다. 이 책은 상처받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와라는 아버지의 불륜으로 부모가 이혼하는 아픔을 겪는다. 그녀는 우연히 디노라는 남학생을 만나서 '붕대클럽'이라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상처 받은 사람들의 사연을 받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일을 한다. 붕대클럽 멤버들은 상처 받은 사람들로부터 의뢰를 받으면 즉시 현장으로 출동해 상처가 발생한 장소에 붕대를 감아 주는 의식을 벌인다. 그 부분을 카메라로 찍어 당사자에게 보내 주면 임무가 끝난다. 한번은 자살골을 넣어 고통받는 소녀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직접 현장을 찾아가 자살골을 넣은 골대와 붕대를 감는다. 실연 당한 여학생을 위해 남자 친구와 헤어졌던 그네에 붕대를 감아 주기도 한다. 붕대클럽 멤버들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사용한 방식은 단순하다. 상처부위에 직접 붕대를 감아 주는 것이다. 이는 트라우마 치료에도 필요한 방식이다. 트라우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처 난 부위를 찾아내고 그 위에 붕대를 감아야 한다. 문제는 골대나 그네와 같이 정확하고 구체적인 장소를 우리 마음에서 찾아내는 일이다.
가족치료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가족치료사인 사티어가 상처 받은 개인과 가족을 상담할 때 사용한 붕대는 '접촉'이었다. 사티어는 대화와 언어를 통해서만 상담을 하는 것이 아닌 직접 몸의 접촉을 통해 문제아와 문제 가족을 회복시켰다. 성격이 예민하고 까칠한 아이가 이유 없이 동생을 미워하고 괴롭혀 상담을 받으러 왔다. 사티어는 부모에게 3주 동안 문제 아이와 몸으로 놀아 주고 마사지를 해주는 신체 접촉을 권하였다. 3주 후, 놀랍게도 아이는 유순해지고 동생과 편안하게 관계를 맺었다. 관계가 악화된 부부에게는 하루에 20분씩 서로의 손과 발을 마사지하고 5분간 손을 잡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게 하자 부부관계에 변화가 왔다. 신체 접촉은 뇌의 접촉이고 뇌의 접촉은 결국 마음의 접촉이다. 마음과 소통하게 해주는 몸의 접촉은 우리 몸에 각인된 트라우마의 기억을 해체시키고, 치유해 주며 회복력을 돋우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 몸에 각인된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클린턴이 르윈스키 사건으로 인해 그의 정치 인생과 결혼생활에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였을 때 클린턴 부부는 함께 부부상담을 받았다. 힐러리가 이혼을 택하지 않은 것을 두고 장래의 대통령을 꿈꾸는 그녀의 정치적 야심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지만 가족상담사로서 봤을 때 부부 상담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우리는 어떤 일에 부딪쳤을 때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 자동차가 고장 나면 정비소로 보낸다. 몸이 아프면 당연히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유독 마음의 상처에 대해서는 스스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동차가 수천 가지 부품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기계라 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소우주인 인체에 비견하기에는 어림도 없다. 또한 우리 몸이 아무리 복잡할지라도 사람의 마음만큼 심오하고 섬세할 수는 없다. 열 길 물 속을 아는 것보다 몸 속 한 뼘 안에 자리 잡은 우리 마음을 이해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트라우마를 혼자서 극복하기 어려울 때는 서둘러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현명하다.
내가 자란 가족으로의 회귀
밤하늘에 조그맣고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빛은 오늘 반사된 빛이 아니다. 수십만 광년 떨어진 별에서 출발한 빛이 지구에 오늘 도달한 것처럼 한 가족이 현재 보여 주는 모습은 이미 과거에 그 기원이 형성된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가족관계는 수세대에 걸친 되풀이 패턴을 갖는다. 가족의 문제와 갈등이 한 세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반복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결혼 전 인사차 처가에 들렀을 때 화장실을 쓴 적이 있다. 처갓집 화장실에는 우리 집에는 없는 물건이 눈에 띄었다. 가지런한 치솔들 옆에 치약이 놓였는데, 치약 하단부에는 짜개가 달려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결혼을 하고 나자 아내는 신혼집 화장실을 자기 집 버전으로 꾸며 놓았다. 낵 처가에서 보았던 화장실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내가 신기하게 보았던 치약 짜개를 붙여 놓은 것까지 똑같았다.
불행하게도 나는 치약을 아랫부분부터 위로 알뜰하게 짜서 쓰는 성격이 못된다. 아래든 위든 손에 닿는 대로 치약을 짜는 나에게 아내는 치약 짜개가 있는데도 왜 그런 식으로 쓰느냐며 신경질을 냈다. 사소한 습관의 차이로 그날 우리는 한바탕 크게 부부싸움을 했다. 사소하다고 했지만 신혼 초에 있었던 치약 사건은 사실 단순한 싸움이 아니다. 바로 결혼 이전의 서로 다른 가족 문화가 부딪힌 문화 충돌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성장한 가족으로 회귀하려고 한다. 설령 그 가족이 비참했고, 늘 외로웠으며 불안했을지라도, 그곳은 너무나 익숙한 곳이기 때문이다.
헝가리 태생으로 1950년대 가족치료 운동을 일으키며 가족치료라는 전문 분야를 탄생시킨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보스조르메니 나지는 새로 탄생한 가족은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부부는 자신이 근본적을 뿌리를 둔 가족 전통과 문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각 배우자는 이전 세대의 가족 문화와 전통을 새로 시작하는 결혼생활로 가져온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불행의 씨앗이든.
자신도 모르게 가족에게 상처를 준다
몇 년 전 은행에서 겪었던 일이다. 월말이기에 은해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내 앞에는 한 엄마가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서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해진 아이는 엄마에게 보채며 칭얼거렸다. 엄마가 아랑곳하지 않자 아이는 응석을 받아 주지 않는 엄마에게 화가 났는지 엄마의 허벅지를 툭툭 치며 떼를 썼다. 그러자 엄마는 바로 정색을 하고 아이의 뺨을 때렸다. 갑자기 뺨을 맞은 아이가 울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엄마는 당황해 하면서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더 때렸다. 엄마에게 계속해서 뺨을 맞는 아이를 은행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그 엄마는 아이를 무시하고 폭력을 일삼는 나쁜 엄마일까? 만일 누군가 아이 엄마에게 "댁의 아이를 사랑하지 않나요?"라고 물었다면, 무슨 소리냐고 발끈하며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내 전부처럼 소중한 아이에요."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사실 아이가 위험에 빠진다면, 은행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기 목숨을 걸고 아이를 위해 뛰어갈 사람은 오직 그 엄마뿐이다.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와 서슴없이 아이의 뺨을 때리는 엄마, 둘 가운데 어느 쪽이 진실일까. 답은 둘 다 진실이라는 것이다.
아일랜드의 토니 험프리스는 저술한 12권의 책이 25개 언어로 출판된 세계적으로 저명한 가족심리학자이다. 그는 30년 동안 폭행과 학대가 있는 수많은 문제 가족들을 상담했는데, 일부러 자녀와 배우자를 해코지하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거의 대부분 자신도 모르게 자녀와 배우자에게 실수를 하고, 상처를 가하여 가족들을 커다란 위기와 갈등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가족을 마음대로 부려먹으려 하고, 자신의 욕구대로 조종하고, 쉽게 짜증을 내고, 꾸짖으며, 무시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조차도 처음부터 그런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왜 자신도 모르게 배우자와 아이들에게 함부로 행동하고, 상처를 주는가? 자신도 어린 시절에 그렇게 당하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가족의 위기와 문제는 그 가족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다. 가족의 한계는 바로 태어나고 자란 가족의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위기에 처한 가족을 살펴보면 많은 경우 자신도 모르게 이전 세대의 불행한 모습을 반복하면서 지금의 가족 안에서 이전 세대의 한계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부모의 불행을 반복하다
어린 시절 부모가 이혼하면서 버림받고 고아로 어렵게 자란 남자가 있다. 인터넷 채팅을 통해 여자를 만나 사귀면서 "나는 부모의 이혼으로 버림받았어. 하지만 나는 가족을 버리지 않고, 절대로 내 부모와 같은 인생을 살지 않겠어."라고 여자에게 진심을 토로하였다. 소중한 가정을 만들고 싶어 하는 남자의 열망에 반한 여자는 집안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한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참담했다. 남자는 결혼 전에는 잘 마시지 않던 술을 매일 마시고 들어왔고 아내를 욕하고 폭행하고 아들을 학대하였다. 더 나아가 아내의 몸을 담뱃불로 지지기까지 하였다. 여자는 이러한 절박한 상황을 친정에 알리지 못하였다. 가족의 격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선택한 결혼이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여자는 결혼 15년 만에 아주 힘들게 이혼하였으나 6개월 뒤에 암 판정을 받고 사망하였다. 진심을 소중한 가정을 꿈꾸던 남자를 믿고 결혼했지만 여자가 얻은 것은 불행한 생활과 암이 전부였다. 아버지를 괴물처럼 여긴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기를 거부하고 외할머니에게 가 버렸다.
고아로 자란 남자는 결국 자신의 소망과는 다르게 어린 시절의 가족 환경을 재현하고 말았다. 그는 지금 다시 한 번 고아가 된 셈이다. 결혼생활의 고통 속에서 암에 거려 죽은 아내,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는 아들, 모두가 그를 떠났다.
어린 시절 불행한 가족관계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성인이 되어 과거의 경험을 재현한다. 불행한 가족관계 안에서 성장한 자녀들은 어릴 적 부모가 물려준 영향이 너무나 크다. 고통스러웠던 가족관계가 주는 스트레스와 불안감이 만성화되어 이런 부정적인 상태에 놓여 있을 때 오히려 편안해한다. 불안하게 매를 기다리기보다 차라리 매를 맞는 순간이 편안한 것처럼 즐거움, 행복감을 느끼면 너무나 불안해하면서 일부러 불행한 느낌, 고통, 불안한 감정으로 달아난다. 의식적으로는 불행한 가족관계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마치 자석에 끌리듯 무의식적으로 불행을 반복한다. 멀쩡해 보이고, 많이 배우고, 전문 지식을 쌓은 사람들도 자신의 가족 안에 흐르는 세대 전수의 굴레를 모른 채 역시 뒤틀린 가족관계를 반복한다.
가족 문제의 세대 전수는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보웬은 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가족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결혼생활이 어릴 적 부모의 생활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지, 화가 나면 침묵하고, 불같이 성질을 내고, 비꼬는 말투로 응수하고, 욕설을 하고, 남과 비교하고, 협박투로 말하는 등 부모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당시 아이로서 경험했던 공포, 수치심, 분노, 무력감 등을 직면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자기도 모르게 나타나는 어린 시절 익숙했던 행동들이 자녀와 배우자에게도 자신이 아이 때 느꼈던 비참한 감정을 심어 주고 있음을 깨닫고, 그런 경험을 누구에게도 물려주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야 한다.
나는 당신의 엄마가 아니야
"여보, 나는 당신의 아내이지, 누나나 엄마가 아니야."
부부 싸움 끝에 성희 씨는 결국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벼르고 있던 말을 꺼냈다. 남편보다 3년 연상인 임성희 씨는 결혼 5년차이다. 주변에서는 젊은 남자와 사니 좋겠다며 호기심 반 부러움 반이지만 성희 씨의 마음은 편치가 않았다. 남편은 4남매 중 막내로 누나만 셋이다. 귀한 아들이었기에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누나들의 보호와 배려 속에서 살아왔다.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와 누나들은 동생을 끔찍이 아끼고 받들고 살아간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 미팅에서 만났다. 여자가 연상이라 남편 집안에서 반대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시댁 식구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성희 씨는 남편과 살면서 어느 순간 남편에게 자기가 누나 또는 엄마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자기 일과 자기만의 취미 생활에 늘 몰두하고 아내와 아이를 위해서는 애써 시간을 쓰지 않는 남편이 야속했다. 한편 남편은 매사에 아내가 자신을 이해해 주기만을 바랐다. 자기가 바라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알아서 챙겨 주고 자기가 하기 싫어하는 것을 알앗 해결해 주기를 원했다. 성희 씨는 그 동안 가급적 남편이 원하는 역할을 맡아 주었다. 그러나 결혼생활이 5년이나 지속되어도 남편은 전혀 변할 기색이 없었다. 마치 동생처럼, 때론 아이처럼 자신에게 기대기만 하는 모습에 성희 씨는 점점 지쳐 갔다.
"저도 남편의 보호와 사랑이 필요한 여자예요. 언제까지 이렇게 일방적으로 남편을 돌보기만 해야 할까요?"
성희 씨는 낙심한 표정으로 하소연했다.
남편이 연상인 아내를 배우자로 선택한 것은 무의식적으로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누나와 남동생의 관계를 재현하기 위해서이다. 늘 보호받고 돌봄을 받아온 남편은 배우자에게도 그러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아무리 괜찮은 여성이라고 자기가 적극적으로 사랑해 주어야 하고, 챙겨 주어야 하는 여성이 배우자라면 이 남편은 불편하기만 했을 것이다. 이런 심리가 밑바닥에 있는 남성은 포근하게 자기를 감싸 주고 이해해 주고 챙겨 주는 그런 여성, 즉 연상의 여자에게 끌릴 확률이 높다.
결혼생활 3년째인 한 부부, 외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회사일로 만나 연애 결혼을 한 지극히 평범한 부부의 모습이다. 그러나 한 꺼풀 벗겨 보면 남에게 털어놓기 힘든 사연이 있다. 남편은 결혼 이후 단 한 번도 아내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시부모는 결혼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다고 걱정하면서 임신에 좋다는 한약을 지어다 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부인은 차마 시어머니에게 속사정을 꺼내 놓지도 못한다. 성관계를 갖4기 위해 여러 번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남편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둘러대고 달아났다. 최근에는 핑계를 대기도 어렵다고 느꼈는지 아예 밤늦게 들어오고 새벽같이 출근을 하면서 아내와의 잠자리를 피한다. 결혼 전에 성관계까지는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스킨십과 애정 표현을 하던 남편이 결혼 후 성관계는 고사하고 스킨십조차 피하는 모습에 아내는 지쳐 갔다.
부부에게 성은 자녀를 출산하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성생활은 친밀감을 표현하고 더 깊은 애정을 공유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순히 성적 만족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닌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나누는 장이다. 오랜 동안 부부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부의 특징은 부부 사이에 잠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어느 한 부인은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 부부는 요셉과 마리아 부부입니다." 피곤하다고,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흥미가 없다고 멀어져 가는 부부의 잠자리는 사실 부부의 위기를 반영한다.
남편은 왜 아내와의 잠자리를 피하였을까? 부부상담을 하면서 남편의 어린 시절을 들어보니 이유가 짐작되었다. 남편인 준기씨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폭력이 일상화 된 가정에서 준기 씨는 어머니와 강하게 밀착되었다. 아들에게 어머니는 어머니 그 이상이었다. 그에게 어머니가 친구이고 애인이었다. 아들은 아내를 사랑해서 결혼을 하였지만 그의 무의식 속에는 여전히 분리되지 못한 어머니와의 관계가 있었다. 어머니와는 친구, 애인 그 이상의 존재였지만 잠자리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에게 성적인 욕구는 지나치게 억압되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결혼 전까지 애인 역할을 했던 어머니에게 느꼈던 성적인 욕구는 허용될 수도 없었고 스스로에게 인정될 수도 없었다. 금기였던 성적 욕구는 내면에서 허용될 수 없는 수치심을 만들어 냈다. 아내에게서 성적인 욕구를 느낄 때마다 내면에서 수치심이 일었고, 마음의 갈등으로 인해 자연히 성적인 욕구를 억압하였다. 남편은 과거 어머니와의 관계를 현재 아내와의 관계에서 반복하는 것이다. 남편은 어머니와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으며 적절하게 부모와 자녀 사이에 경계선이 설정되어 있지 못하고 융합되어 있었다.
서로에게 심하게 의존하는 관계
가족상담사 보웬 교수는 준기 씨와 어머니처럼 주체의 독립성을 갖지 못하고 서로에게 심하게 의존하는 관계를 '공생관계'라고 불렀다. 공생관계 속에 있는 아들을 우리는 '마마보이'라고 부른다. 마마보이는 무엇보다 건강한 남성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다. 어머니가 아들을 손아귀에 꽉 쥐고서 남자로 성장하기보다는 여전히 아들이기를 바라는 느낌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아들은 겉으로는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한 척 보이지만 속으로는 불안하고 어쩔줄 몰라 한다. 마마보이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엄친아'라 할 수 있다.
요새 일반적으로 엄친아는 좋은 뜻으로 쓰인다. 외형을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소위 엄친아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 한켠에 스며 있는 불안감이 느껴진다. 이들은 준비되고 갖춘 것이 많으며 어머니나 부모의 기대감과 절대적인 영향권 속에서 성장하여 외형적으로는 좋은 스펙으로 남들에 비해 훨씬 앞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앞으로 가정과 사회속에서 얼마나 성공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성년으로서 독립적 인생을 막 시작하는 젊었을 때의 좋은 조건이 반드시 중년과 장년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반듯해 보일 정도로 잘 정비된 이들이 갖춘 조건이라는 것들이 스스로의 의지와 목표에 따른 노력의 결실이라기보다는 부모의 기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범생이 같은 생활의 결과물이라면 그러한 우려는 더 커진다.
마마보이는 어머니와는 감정적으로 의존되어 있지만 아버지와는 지나치게 분리되어 있다. 아버지는 자기보다 아내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아들에게 약간의 질투를 느낀다. 늘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있는 아들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 결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서먹하고 거리가 멀어진다. 아버지로부터 긍정적인 관계를 만들 기회를 갖지 못하고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기도 한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아버지로부터 배워야 할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극단적으로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며 아내를 불행하게 만드는 남자들은 놀랍게도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고 어머니와 공생관계를 형성한 아들들인 경우가 많다.
마마보이와 파파걸
골드미스 생활을 정리하고 약간 늦은 나이에 결혼하여 이제 2년째인 지영 씨는 요즘 결혼생활에 힘들어하고 있다. 지영 씨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강하게 밀착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특별히 자기를 더 사랑해 주었고 이런 부녀의 관계를 언니뿐 아니라 엄마까지 질투할 정도였다고 말한다.
"너무나 잘해주는 아버지만 있으면 충분했기에 다른 남자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아버지도 은근히 딸이 결혼해 곁을 떠나기보다는 늘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지영 씨는 결혼에 별 뜻 없다가, 뒤늦게 직장동료인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하였다. 막상 남편과 살고 보니 오랜 세월 굳어진 각자의 서로 다른 생활습관을 맞추는 것도 힘들었고, 자신이 남편을 챙겨 주어야 한다는 사실도 불편했다. 점차 남편이 꼴도 보기 싫어졌고 남편의 손이 자기 몸에 닿는 것마저도 기피하게 되었다.
결혼생활을 유지하다 보면 부부는 서로 많은 것을 양보하고 타협하면서 상대방에게 맞추어 가는 과정을 밟는다. 이 과정은 힘겹고 쉽지 않다. 뒤늦게 결혼한 지영 씨는 오랜 동안 공생관계를 유지한 아버지와 정서적으로 분리되지 못하였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지나치게 정서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딸, 즉 파파걸이다.
파파걸의 아버지에게 딸은 배우자의 대용물이다. 아버지에게 딸은 아내가 되고, 딸에게 아버지는 때로는 남자의 대용물이 된다. 아버지는 딸의 요구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려고 한다. 그럴수록 딸은 점점 아버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 다른 형제들보다, 때로는 엄마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깊이 빠져들어 간다. 아버지는 딸이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거나 특히 남자가 생기면 강하게 화를 내고 질투한다. 딸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죄의식을 갖는다.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파파걸은 남자를 사귀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과정 자체를 힘들어 한다. 남자에게서 자꾸만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늘 마음속으로 아버지와 남편을 비교한다. 두 사람을 비교하면 언제나 승패는 뻔하다. 아버지는 딸에게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주었지만, 어느 남편도 이런 사랑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이런 경우에 아버지를 떠난 사실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그에 비례하여 남편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실망한다.
분리와 독립은 결혼의 전제
지나치게 의존적인 어머니와 아들,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부모로부터의 독립과 분리를 어렵게 만든다. 보웬은 건강하고 행복한 가족이 탄생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혼한 두 남녀가 부모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하고 분리되는 것이다. 부모와 안정적인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분리와 독립을 이룩한 두 남녀만이 행복한 결혼이 가능하다.
그럼 어떻게 자녀가 부모로부터 분리와 독립을 성공시킬 수 있는가? 분리와 독립은 부모가 자녀를 떠나보낼 때 가능하다. 부모로부터 분리와 독립할 때 그 열쇠는 부모가 쥐고 있는 것이다. 부모가 결혼생활의 외로움과 허전함, 실망감을 자녀를 통해서 풀려고 하면 자녀는 더 이상 자녀로 존재하지 못한다. 이때 자녀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배우자나 대리인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부모는 심리적으로 자녀가 자신을 떠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반면에 자녀로 하여금 건강한 분리와 독립을 가능하게 해줄 부모는 건강한 부부관계를 갖고 있는 경우이다. 이들은 자녀를 대리 배우자로 사용하지 않으며, 자녀가 떠나서 독립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자녀의 분리와 독립은 부모가 자녀의 주거, 직업, 재정, 이성, 친구 문제 등 전반적인 생활방식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태도에서 이루어진다.
부모로부터 정서적으로 분리와 독립을 이루지 못한 마마보이와 파파걸은 결혼생활에 어려움을 갖기 쉽다. 이들이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본인들이 더 이상 아들, 딸의 역할만을 갖고 있지않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이들은 남편, 아내 그리고 아빠, 엄마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내면적으로 부부와 부모 되기를 거부하고 사랑만 받고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아이 상태로 남아있으려는 자신을 설득시켜야 한다.
준기 씨와 지영 씨가 결혼생활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스스로 마음속으로 다짐을 해야 한다.
"이제 저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아내이고 남편입니다. 저는 당신을 저의 배우자로 선택했습니다. 이제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키루스라는 소년은 바다 가운데 섬에 갇혀 있다가 아버지가 만들어 준 밀랍으로 붙인 날개를 달고 탈출한다.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다가 그만 밀랍이 녹아 버래 추락하고 마는데 멈추지 않는 인간의 권력에 대한 열망을 잘 보여 준다. 우리 주위에는 권력 지향적인 사람들이 흔하다. 세상 물정 모르고 사교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받는 교수 사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교수가 무슨 권력이냐고 물을지 모르겠으나 학회 등에서 좌장 자리를 차지하려는 열망은 보이지 않게 치열하다.
사실 어느 단체나 장이 되면 일반 회원들보다는 훨씬 더 수고스럽다. 강의 준비와 연구만으로도 부족한 시간을 쪼개서 단체 일에 할애해야 하고 무엇 하나라도 남보다 더 앞장서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사서 고생인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왜 구태여 그런 자리르 맡으려 애쓰는 것일까? 그것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인간은 남들로부터 인정받을 때 자신에 대한 만족감과 안정감을 갖는 특이한 존재다.
"어린 시절 생존하기 위해 부모의 사랑이 필요했다면, 성인에게는 주변의 인정이 필요하다."
캐나다 출신의 정신분석가로 현대 심리 상담의 대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에릭 번의 빛나는 통찰이다.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는 일은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생존에너지다. 따라서 권력욕을 뒤집어 말하면,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권력은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프로이트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열등감, 보상심리, 인정욕구 등을 연구한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인간이해』에서 권력에 대한 욕구가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설명한다. 인간 본성에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 어려서는 부모의 관심과 인정을 받기 위해 부모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도 하고 반대로 싫어하는 것을 함으로써 관심을 끌기도 한다. 아들러는 이를 하나의 권력욕구라고 확대하기도 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로 23세에 상담사가 되어 수많은 상담을 하였고, 현실치료를 창시한 윌리엄 글라써는 폭력롸 분노를 표출하는 가장은 대부분 가정의 테두리 밖에서는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남편은 아내와 아이들을 지배함으로써 권력욕을 채우려 하는데 이 상황에서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은 굴종밖에 없다. 그럼에도 남편의 권력욕은 채워지지 않아 문제가 생긴다.
부부와 가족관계에서도 권력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권력이란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극히 사적인 가족관계에서도 매일, 아니 매 시간 권력을 사용한다. 약속을 누가 정하고, 벽지의 색깔은 누가 선택할 것인지, 가족의 규칙을 누가 만들것인지 등을 통해 권력을 행사한다. 가족 안에서의 권력 행사는 가족의 중요한 일에만 행사되는 것이 아니다. 소소한 일상의 문제들, 이를테면 자녀를 어느 학원에 보내고, 어떤 옷을 살 것인지와 같은 일에서도 가족 간 권력의 역학 관계가 드러난다.
숱한 이유로 부부싸움을 하지만 근원은 하나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주체인 두 남녀는 가정에서 각가 고유의 영역을 책임진다. 남편은 주로 경제 활동을 담당하고, 아내는 집안일과 자녀 양육을 맡는다. 겉보기에는 남편의 역할이 더 중요하고 더 많은 권력을 소유할 것 같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집안일과 자녀 양육을 담당하는 아내는 가정의 모든 일들을 관할한다. 이 관할권은 아내가 가정 안에서 권력을 형성할 수 있는 원천이 된다. 겉보기와 달리 가정의 실제 주인은 아내이다.
독일의 아동심리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부모와 아이의 진실한 만남을 이어주는 '붙들어주기 요법'을 창시한 이리나 프레코프는 아이들과 사이가 좋은 아빠는 단순히 아이들과 잘 놀아 주는 다정한 아빠가 아니란다. 무엇보다 아내와 사이가 좋은 아빠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영역은 엄마의 영역에 속한다. 가족 안에서 늘 외롭고 자기 자신이 단지 돈만 벌어다 주는 존재라고 느끼는 아빠들은 빨리 아내와의 관계부터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아내로부터 허용받아야 할 것이다.
부부는 여러 가지 이유로 수업이 다투지만 실제 다투는 숨은 동기는 누가 더 힘을 가질 것인가에 있다. 내가 잘 알고 지내는 한 부부는 결혼 후 지금까지 6년 동안 싸우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싸웠냐고 물으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때마다 내용이 달랐다.'는 것이 부부의 답변인데, 이것을 특별한 원인 없이 사소한 일로 매일 티격태격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이 부부가 자주 다투었던 근원적인 이유는 가정에서 누가 더 권력을 행사할 것인가 하는 파워 게임에 있기 때문이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협하는 가장 큰 장해는 자신의 권력욕구를 만족시키려고 상대를 밀어붙이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애정 결핍보다 권력의 파워 게임이 더 큰 위협 요소라는 것이다.
권력의 위계를 기준으로 부부관계를 나누면 크게 두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종속적 관계'이다. 부부 중 한 사람이 대부분의 판단을 내리고 결정을 하며, 상대 배우자는 거기에 수긍하고 복종하는 관계이다. 이런 부부는 권력을 두고 다투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감히 싸우지 못하는 것이다. 이 유형은 공개적으로 다투지 않고 부부싸움의 횟수도 적다. 그러나 서로 사랑해서 다투지 않는 것이 아니기에 부부 간 갈등 요소는 안으로 쌓여 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의 '위'에 있는 쪽은 점점 고립됐다는 느낌이 커져 가고, '아래'에 있는 사람은 억압받고 무시당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다. 이 경우 종속적인 배우자는 겉으로 드러나게 자기 의사를 표출하지는 못하지만 수동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한다. 은밀하고 드러나지 않는 방법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다. 자녀들과 편을 짜서 배우자를 왕따시키는 것이 대표적인 방식이다. 더 소극적으로는 몸이 아파서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누워 버리는 방법도 있다. 일종의 파업을 통행 그 동안 자신을 억압한 배우자에게 소심한 복수를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유형은 '대칭 관계'이다. 부부 간 쌍방의 힘이 서로 비슷하면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 지시를 하거나, 비판하고 충고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부부는 자주 싸우고 다툴 수 밖에 없다. 누가 권력의 주도권을 행사할 것인지가 불분명하니 늘 충돌하기 쉽고 서로 가진 힘을 더 확대하려고 견제하고 다투게 된다. 이 유형은 자주 싸우기도 하지만 대등한 관계를 바탕으로 서로 이해하면서 민주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누군가 일방적으로 자기 의견을 밀어붙일 수 없기 때문에 비록 다툼이 있을지언정 서로의 의견을 조율해서 결정을 내린다. 외형적으로는 대칭 관계 유형의 부부가 더 많이 싸우지만, 쉽게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 종속적 부부관계 유형이 더 평온하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가족 질서
가족 문제를 부부 간 파워 게임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략적 가족치료 모델'을 창시한 사람이 미국의 가족상담사인 제이 헤링리이다. 그는 가족 권력 싸움이 지나치거나 또한 한쪽이 불평등한 힘의 배분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가족의 위계질서가 무너지면서 큰 문제를 유발한다고 말한다.
여름 휴가를 앞두고 철수네 가족이 어디로 갈지 계획을 세우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휴가 장소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아버지는 계곡물에 발 담그고 선선한 바람을 즐길 수 있는 산으로 가자고 하고, 어머니는 휴양 시설이 좋은 바닷가로 가자며 서로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이때 철수가 끼어든다.
"아빠, 작년에도 지리산으로 휴가 갔다가 소나기가 와서 얼마나 고생했어요. 하마터면 빗속에 고립되어 뉴스에 나올 뻔 했잖아요. 올해는 콘도가 있는 바다로 가요."
팽팽하게 균형을 유지하던 논쟁이 철수의 가세로 엄마 쪽으로 기운다. 아버지는 할 수 없이 자신의 의사를 접는다. 이것은 어느 집안에서나 일어날 법한 아주 평범하고 작은 일이지만, 권력이란 관점에서 볼 때 가족 간 위계질서에 혼란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가족 안에는 자연발생적인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자녀 세대와 부모 세대 간에는 각각의 일정한 위계질서가 놓여 있으며 먼저 가족에 들어온 순서대로 위계질서의 서열을 갖는다. 시간을 통해 서열을 얻으며 처음 태어난 아이가 그다음 태어난 아이보다 앞선다.
철수네 가족은 부모보다 하위에 속한 자녀가 결정자의 역할을 한 셈이 됨으로써 질서의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어머니가 자녀와 밀착되어 있고 아버지가 소외된 경우 또는 자녀가 부모의 배우자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에도 위계질서에 혼란이 일어난다. 물론 대부분의 가정에서 이러한 혼란은 일시적이지만, 이것이 구조화되면 엄청난 가족 갈등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가족 위계질서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는 어릴 때 아버지를 죽일 운명을 타고 났다는 예언으로 인해 죽임을 당할 뻔하였으나 겨우 죽음을 면하고 버려진 아이가 되었다. 오이디푸스는 어른이 되어 방랑하다가 우연히 사람을 죽이게 되는데 그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다. 오이디푸스는 남편을 잃고 미망인이 된 왕비와 결혼을 한다. 자신의 어머니인지는 꿈에도 모른 채, 그러나 얼마 뒤 모든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아내이자 어머니이기도 한 왕비는 충격으로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빼고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리스의 비극인 오이디푸스 왕의 신화는 위계질서를 어긴 사람이 맞게 될 비극적인 최후를 징계하는 고대인들의 시각을 잘 보여 준다. 고대사회로 갈수록 집단에서는 나이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고 위계질서가 형성된다. 이런 위계질서는 집단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누군가 이 질서를 어기게 되면 그 사람은 전체 집단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프로이트는 정서적 문제를 가진 사람은 이 시대에 존재하는 또 다른 오이디푸스라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내적 갈등의 원천으로 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는 바로 이런 질서의 법칙이 전제되어 있다. 그는 질서 문제에서 갈등하고 절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인간이 질서를 어떻게 잘 극복하고 해결하는가에 따라 가정의 행복이 좌우된다.
겉보기에 지극히 평범한 한 가족이 있었다. 남편은 성실하게 일해서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아내는 열심히 종교 활동에 참여하는, 어떻게 보면 모범적인 가정이었다. 이런 가족 상담실을 찾은 이유는 놀랍게도 첫째 딸의 자살 시도 때문이었다. 남편은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여 언제나 어머니에 대한 마음의 빚을 안고 있었다. 남편이 아내를 택한 것도 착한 여자가 있으니 만나보라는 어머니의 권유와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 부부는 결혼 16년째이지만 여전히 가족의 모든 일은남편과 어머니가 의논을 하고 결정한다. 남편의 배우자 역할을 하는 것은 아내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어머니와 남편 사이에 부인이 낄 자리는 없었다.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오면 먼저 맞이하는 것도 아침 출근 준비도 어머니의 몫이었다. 이런 역할의 혼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아들을 붙잡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아이들 엄마 역할까지 월권을 행사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양육 태도가 마땅치 않다며 늘 비난 섞인 말을 하였다. 초등학생 손주가 말을 안 듣고 떼를 쓰면 달래느라 절절 매는 며느리 보라는 듯이 달려와서 아이의 뺨을 호되게 때리며 야단쳤다.
"애를 이렇게 오냐오냐 키워서 어떻게 하니!"
시어머니는 아이 교육을 위한 시범을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집안이 이렇게 굴러가는 데도 남편은 언제나 어머니 역성을 들거나 침묵하였다. 무기력해진 부인이 숨 막히는 가정의 탈출구로 선택한 것은 종교 활동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을 가장 견디기 힘들어했던 것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온 후 늘 할머니의 잔소리에 시달렸다. 할머니를 점점 싫어하면서 아이들이 방에서 나오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각자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자기 나름대로 손주들을 잘키우려 애쓴다고 생각한 할머니 입장에서는 엄마 편만 들면서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이들이 점점 실망스럽고 버릇없게 느껴졌다. 자연히 할머니와 손주들의 갈등은 심해졌다.
"할머니 제발 우리 남매와 엄마를 그만 괴롭혀요."
견디다 못해 첫째 딸이 편지를 써놓고 자살을 시도하였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나 온 가족이 충격에 빠졌다.
이 가족의 문제는 가족 위계질서의 혼란에 있다. 남편을 잃고 남편 대신 의지해 온 아들을 결혼시킨 뒤에도 여전히 놓아주지 않는 홀어머니들이 많다. 그런데 권력에 대한 욕망은 무한하다. 아들의 아내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아이들이 엄마 역할까지 차지하려던 할머니의 행동이 이 가족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결국 할머니의 지배욕구는 가족의 위계질서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배우자의 역할은 부부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조부모는 조부모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한 사람만 위계질서를 무너뜨려도 온 가족이 혼란에 빠진다. 이 가족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세대 사이의 위계질서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가족의 위계질서가 적절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경계선이 분명하게 있어야 한다. 이 가족의 경우 무너진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경계선 설정 작업이 필요하다. 남편을 아내와 아이들 쪽으로 오게 하고 할머니를 분리시키는 것이 좋다. 그러나 오랜 습관 탓에 할머니를 자신의 위치로 완전히 분리시키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할머니보다는 남편이 움직여 주어야 한다. 남편이 태도를 바꿈으로써 질서가 자리 잡히면서 혼돈의 가정에 안정이 찾아올 것이다.
과거 상처를 해결하려는 무의식의 악순환
무고한 상대를 이용하여 과거의 상처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가족들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파괴적 권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작동되지 않고 가족의 조직과 힘에 의존하여 움직인다. 가족의 규칙, 비밀, 위계질서를 통해 파괴적 권리를 행사하며 여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누설하지 못하고 순응하게 만든다. 이런 가족은 관계가 공허하기 때문에 모두들 내면에 감정 상처를 깊게 입은 채 가족이라는 허울만 가지고 살아간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남편이 빌딩을 포함해 100억이 넘는 자산가인 데도 매일 힘들게 보험설계사로 일한다. 주변에서는 돈 욕심이 끝이 없다는 둥 대체 얼마나 더 재산을 모으려고 그렇게 일하느냐는 둥 말들이 많다. 하지만 정작 이 부인은 결혼 후 남편에게 생활비란 것을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다.
남편은 어린 시절 너무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고 돈 때문에 부모가 이혼하는 아픔까지 겪었다. 모든 고통이 돈 때문에 생긴 거라고 여긴 그는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위해 살았다 젊어서부터 한눈 팔지 않고 일만 하였다. 다행히 사업 수완이 좋아 일찍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힘들게 모은 재산은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외롭게 살아야 했던 과거에 대한 복수일 뿐이었다. 큰딸을 시집보낼 때도 혼수는 고사하고 입던 옷가지를 담은 가방 두 개만 들고 가게 할 정도로 남편은 돈 쓰는 일에 인색했다. 안타깝게도 가족들은 그의 인색함에 지쳐 오직 그가 하늘로 올라가는 날만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가 부당하게 파괴적 권리를 행사하여 고통받은 자녀들은 이로 인해 죄책감, 분노, 수치심, 우울, 격분과 같은 감정들을 내면에 쌓는다. 이 자녀는 사랑받고, 존중받아야 할 자신의 권리가 부당하게 착취되었다고 느끼고 무고한 상대에게, 즉 자신의 배우자 또는 자녀들에게 자신에게 일어났던 똑같은 방식으로 파괴적 권리를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파괴적 권리는 세대 전수로 이어지며 다음 세대로 가정의 불행을 전수시킨다.
우리에게 상처를 준 부모는 괴물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처럼 그들 역시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고 부당한 가족관계에서 피해를 입었던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하다. 우리 역시 이러한 반복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늘 되풀이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은 흔히 순환 과정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곤 한다. 부모에게 당한 파괴적 권리를 다음 세대에게 되풀이하는 행동은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문제를 인식하는 순간 이미 자신이 불행의 악순환에 놓여 있음을 발견한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뒤엉킨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끊어버린 알렉산더 왕의 지혜 또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 충분한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보면서 무의식중 지난날의 상처를 떠올리게 된다. 이 경우 매듭을 끊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양상은 두 가지다. 어린 시절에 자신이 경험했듯이 사랑과 인정을 주지 못하는 어머니가 되거나 반대로 상처를 보상받기 위해 과도하게 아이에게 희생하는 어머니가 된다. 자녀에게 상처를 반복하는 것도 문제지만 과도한 돌봄 역시 바람직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이를 통해 과거에 받지 못한 사랑과 인정을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심리는 자녀에게 큰 부담을 남긴다.
부모가 자녀에게 베푸는 사랑은 아무런 기대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어야 한다. 부모가 자녀에게서 어떤 식으로든지 '본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부모는 자녀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풀고, 자녀는 다시 부모가 되어 그것을 자신의 자녀에게 돌려주면서 돌봄과 베풂이 세대를 통해 내려가는 것이 결국 인류의 삶을 면면히 이어지게 하는 기본 원리이다.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은 아들
우리 부부는 유학 생활을 하느라 아이를 늦게 가졌다. 여동생의 아들인 큰 조카는 벌써 고 3인데 우리 아들은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이다. 나이 많은 엄마 아빠 밑에서 응석받이로 자라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들 녀석은 우리 집에서 왕 노릇을 한다. 나의 가장 큰 고민중 하나는 아들 녀석에게 도통 아빠의 말발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 아들은 나중에 커서 뭐가 될지 여러 가지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중이다.
"엄마 아빠가 다 교수인데 너도 커서 교수가 되면 어떻겠어?"
우리 부부가 은근히 기대를 갖고 물어보지만 아들의 대답은 항상 엉뚱하다.
"교수가 좋기는 한데 공부할 거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 아빠, 난 그냥 동네에서 문방구나 했으면 좋겠어."
하긴, 초등하교 3학년짜리에게 뭘 더 바라겠나 싶으면서도 왜 이리 포부도 없고 꿈이 야무지지 못한지 살짝 실망스럽다.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렴면 꼭 넘어야 할 산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다. 그리스 신화의 정점에 있는 신은 제우스이다. 올림푸스의 지배자인 제우스는 그의 형제 포세이돈, 하데스와 더불어 그리스 신화의 주축을 이룬다. 이들 형제는 세계의 지배자였던 아버지 크로노스를 이기고 그의 몸을 잘라 가짐으로써 신화 속 주인공들이 될 수 있었다. 새로운 세대가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구시대를 상징하는 아버지를 꺾음으로써 가능해진다. 여기서 아버지를 이기는 자가 다음 세대의 주인공이 되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서구에서 발전된 오늘날의 심리학을 보면 그 안에는 여전히 2천여 년 전 그리스 인들의 여러 사고체계들이 남아 있다.
멋지고 매력적인 남자들의 공통점
아들은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어 한다. 딸은 어머니만큼 아니 그보다 더 사랑받는 여인이 되려고 한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표현했다.
너무 뛰어나서 도저히 넘어서기 어려운 아버지를 둔 아들은 절망한다. 아버지를 넘고 싶다는 소망은 일의 성공에서 중요한 무의식적 동기가 되는데 이것을 포기한 아들은 무기력하고 게을러진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룬 성공의 그늘 밑에 안주해 버린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승부욕을 자극하는 경쟁자다. 이를 통해 아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은 경쟁을 뛰어넘는 영원한 동반 관계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뛰어넘으려는 것은 단순히 승부욕 때문만은 아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때 가장 큰 만족감을 갖는다.
독일을 대표하는 가족상담사로 '트라우마 가족치료' 모델을 만든 버트 헬링거는 멋지고 매력적인 남성들에게는 일정한 공통점이 있다고 밝힌다. 매력남들은 대개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은 열망을 지닌다. 이런 존경과 열망은 아들에게 사회적 성취동기를 제공하며 유연하고 풍부한 인간관계를 맺는 능력을 길러 준다.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얻은 신뢰와 안정감이 아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높은 자신삼을 갖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신뢰하는 사람은 자연히 타인들에게 주목과 호평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매력남들은 또 가까운 사람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깊이 있는 우정을 쌓는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관계를 소중히 여길 줄 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진실하며 주변의 기대에 맞추려고 거짓이나 허세로 포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남자는 특히 성장기에 아버지와 맺는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 관계가 어떠한가에 따라 마음의 병을 지닌 성인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일과 사랑에서 당당하고 성공하는 사람으로 자라나기도 한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맺기에서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이다. 이것이 인생의 딜레마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 트라우마 없이 성장한 사람이 아버지가 되면 그만큼 자신의 아들과도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인해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가족 있거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면 본인도 모르게 자신의 경험을 아들에게 대물림할 우려가 있다. 물론 여기에는 예외가 많다. 비록 어린 시절이 원만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자신의 상처를 잘 수용하고 다른 삶의 모델을 추구하려 한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성장기와는 다른 성공적인 부자(父子)관계를 만들 수도 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아들
한국의 아버지들은 좀처럼 '좋은 아빠'가 되기 힘든 여건에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장시간 노동 국가이다. 201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노동시간은 2256시간으로 OECD 국가 평균 1764시간에 비해 492시간이 더 많다. 이건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니다. 24시간 꼬박 일하는 로봇이라도 20일 넘게 일해야 하는 시간이고 하루 8시간 근무를 기준으로 한다면, 60일이 넘은 시간이다. 어디 이뿐인가. 퇴근하고 나면 업무의 연장인 여러가지 모임과 회식이 기다린다. 요즘은 초과 노동시간은 좀 줄었다해도 그 대신 다른 부담이 늘었다. 사회 안전망이 부족한 현실에서 일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기계발에 또 힘을 쏟아야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자녀의 관심사를 함께 소통하고 놀이와 가사 분담을 통해 가정에서의 협력과 배려, 나아가 사회성을 알려 주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지엽적인 일이 되고 만다. 사회 전반적 분위기가 개선되지 못하면 우리의 아들 세대에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다. 가족의 끈이 갈수록 느슨해지면서 청소년 문제 또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한창 사랑이 필요한 때에 아버지의 관심을 받지 못한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별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게 된다. 유명한 발달심리학자인 장 피아제는 아이들을 '인지적 이방인'이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절대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데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의 양극적이다. 아버지가 바빠서 관심을 쏟지 못한 것인데도 아이는 그것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만약 아버지가 나를 버린다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릴 것이라는 식이다. 아이의 성장발달 과정에서 필요한 의존욕구들이 제대로 충족되지 못했을 때 그 아이는 어른이 된 후에도 상처 받은 내면아이에게 영향을 받는다. 세상에 대한 소극적이고 당당하지 못한 태도를 취한다. 부모에게 거부당하거나 자기 존재를 무시당한 많은 이들이 평생 불안해하고 자신의 삶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으로 인생을 힘들게 살아간다.
어린 시절부터 어떤 일을 해도 잘 인정해 주지 않고 무관심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의 눈에 들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애타는 조바심이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변한다. 어머니와 편을 짜서 아버지를 공격하기도 한다. 당연히 아버지 역시 그런 아들이 사랑스럽지 않다. 아들을 악하다고까지 여기게 되면서 둘 사이의 갈등은 깊어 간다. 껄끄러운 부자(父子)관계를 상담하러 오는 가족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유형이다.
심리학자 요하임 마츠는 아웃사이더, 왕따, 울보, 언짢은 투덜이나 항상 화를 잘 내고, 남의 욕을 얻어먹는 행동을 일삼아 미움을 사는 사람들의 근원에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거부당한 경험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부모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거절당한 자녀는 자신을 세상의 부담을 모두 짊어지고 몸을 구부린 채 살아가야 하는 불행한 운명의 '아틀라스'(아틀라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제우스보다 한 세대 앞선 티탄족 '12신(神)가운데 한 명이다. 기골이 장대한 거구롤 기록되어 있다. 티탄족들과 격렬한 전투를 벌인 뒤 승리를 차지한 제우스는 티탄족인 아틀라스에게 '평생 두 어깨에 하늘을 메고 있으라'는 형벌을 내린다.)로 여긴다. 간혹 이런 사람들 가운데 환영받는 인물이 되기 위해 남보다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성공한 사람이 되어 부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무의식에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주변으로부터 밉살맞은 존재로 간주되는 사람이든 마음 깊은 곳의 피해의식으로 인해 오로지 타인의 눈에 들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이든 모두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점을 인식한다면, 한국의 아버지들은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 있다고 하더라도 가족들 특히 자녀를 위한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좀 더 분발해야 할 것이다.
자녁들과 함께하는 시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함께할 때의 역할이다. 자녀들을 자주 접하지 못하다 보니, 어쩌다 같이 보내는 시간에 아버지들은 늘 가르치고 훈계를 늘어놓고 자녀의 행동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부작용을 낳을 뿐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아들은 아버지를 뛰어 넘어서는 법을 터득하므로 당장 가르치려 하기보다 공감하고 지켜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형제가 없는 우리 아들은 나에게 친구 역할을 원한다. 퇴근하고 집에 와 보면 늘 함께 놀거리를 준비해 놓고 기다린다. 아들과의 게임에서 내가 마음속으로 정한 규칙이 하나 있다. 팽이놀이, 축구놀이, 레슬링 등 온갖 놀이를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항상 아빠가 져 준다는 것이다. 어쩌다 내가 이 원칙을 깜빡하고 게임을 이겨 버리면 아들은 대단히 분개하며 다시는 아빠랑 안 놀겠다고 화를 낸다. 아들은 아빠를 이기는 스릴을 체험하면서 게임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우리 아들은 내가 늘 자기와의 게임에서 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져 주는 역할이 나쁘지 않다. 상대가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들과의 게임에서 질 때도 요령이 필요하다. 적당히 리드하거나 팽팽한 접전인 것처럼 게임을 운영하다다 마침내 결정적 순간에 져 주어야 한다. 이때 아들의 기쁨은 배가 된다. 아들은 언제나 아버지를 이기려고 하고 넘어서려고 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져 주는 것은 무능하고 부족해서가 아니다. 언젠가 다가올, 아들이 진짜로 아버지를 넘어설 순간을 위해 적극적으로 아들을 돕는 것이다.
아버지의 눈물
나는 사춘기 시절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아버지는 가부장적이면서 언제나 내게 무척 크고 엄한 존재였다. 자라는 동안 아버지와 한 번도 따뜻한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다. 나는 아버지가 여동생만을 사랑한다고 여겼다. 그 무렵 나는 늘 우울한 아이였지만 여동생은 애교도 많고 쾌활해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다. 당시 여동생은 아침마다 안방으로 출근을 하였다. 전날 아버지가 입었던 양복 주머니를 뒤져서 동전들을 수거해 용돈으로 썼다. 그건 여동생만의 특권이었다. 만일 내가 동생처럼 행동했다면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호되게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집안에 있는 듯 없는 듯 고독한 아이로 힘겹게 사춘기를 보낸 뒤 대학에 들어가고 다시 쏜살같이 시간이 흘러 2학년을 마치자 군 입대 소집 통지서가 날아왔다. 입영하는 날 아침 유행가 가사처럼 짧게 밀어버린 머리를 어색하게 쓰다듬으며 입영 열차에 몸을 실었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저만치에 배웅 나온 가족들이 보였다. 기차가 서서히 출발하면서 가족들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먼저 어머니와 여동생이 눈에 들어왔는데 어머니와 여동생은 매우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제대하고서 듣자 하니 어머니와 여동생은 내가 군대에 가 있던 그 시절이 황금기였다고 하였다. 그만큼 과묵하고 우울한 분위기의 나는 우리 가정에서 결코 편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맨 끝에 서 계시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고 계셨던 것이다. 그것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두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흐느끼며 울고 계셨다.
나는 예상하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에 놀랐다. 아버지가 떠나는 아들을 보며 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 번도 겉으로 표현한 적 없지만 아버지가 나를 많이 사랑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버지는 강한 분으로 평생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전형적인 한국의 아버지들처럼 당신의 감정을 자식에게 표현할 줄도 몰랐다. 특히 아들인 내게는, 아버지는 나를 아들로서 좀 더 강하게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아들이 얼마나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했으며 아버지의 따뜻한 말 한마디를 원했는지는 모르셨다. 내가 어린 시절 겪은 아픔은 사랑의 문제가 아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나 힘들게 지낸 사춘기 시절에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셨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한 번도 표현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아픔은 사랑과 애정의 결핍이 아닌 소통의 문제였다. 나의 상처는 우리나라 가정에서 보편적으로 겪는 문제일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나는 사랑은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대화와 포옹을 통해 전달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깨어진 소통을 회복하기 위한 첫걸음은 경청이다. 내 생각을 잘 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바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소통의 출발이다. 우리는 평소 얼마나 자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는지 곰곰이 되짚어 보자. 과연 자녀가 이야기할 때 하던 일을 멈추고 눈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쓸데없는 말을 한다고 묵살하지는 않았는가. 언제나 내 말을 하려고, 내 생각을 전하려고 하지는 않았는가.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훈계하고 소리치고 아이의 감정을 무시하지는 않았는다. 아이들에게는 훈계하는 부모보다 경청하고 성찰하는 부모가 필요하다는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진실한 소통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것이다. 자신이 느낀 감정을 그대로 왜곡하지 말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사랑한다는 것을, 화가 났다는 것을, 부끄럽다는 것을, 외롭다는 것을, 힘들다는 것을 다른 부정적인 감정으로 덧칠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아버지가 사춘기 시절 내 어깨에 손을 얹고서 "아들아 많이 힘들지, 아빠는 너를 믿고 사랑한다."라고 속마음을 표현하셨다면? 아마도 내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지금보다 훨씬 좋은 방향으로.
항상 진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울의 아들 집에 다니러 온 할머니가 손주를 앉혀 놓고 웃는 얼굴로 묻는다. "할머니, 너희 집에 더 머무르면 싫지? 빨리 갔으면 좋겠지?" 사실 이렇게 묻는 사람이 기대하는 말은 "아니야, 난 할머니가 있어서 좋아, 할머니 가지 말고 여기서 같이 살아."이다. 아직 어린 손자는 이 상활에서 혼란에 빠진다. 밝게 웃는 할머니의 표정은 자신의 말에 수긍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할머니의 말을 부정하는 것이다. 다소 어렵게 표현하자면 비언어적인 소통(표정)은 긍정적인데 언어적 소통은 부정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이런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모녀만 사는 집안에서 직장을 다니는 딸이 퇴근해서 집에 돌아온 시간의 풍경이다. 엄마는 일을 마치고 온 딸에게 말한다.
"얘야, 내가 저녁을 준비할게, 너는 좀 쉬어라."
"아냐 엄마, 나 피곤하지 않아요. 제가 할게요."
"아니다. 직장 일이라는 게 좀 신경 쓰이니, 텔레비전이라도 보고 있어라."
그렇게 대화가 오고 가다 엄마는 저녁을 준비하고 딸은 텔레비전을 보았다. 시간이 지나 엄마가 준비할 식탁에 마주앉는다. 그런데 식사가 끝나갈 무렵 엄마는 작게 혼잣말을 한다. 예기치 않은 엄마의 푸념이 딸의 가슴을 후벼 판다.
"에고, 내 팔자야,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언제까지 집안일을 해야 하니! 아이고 나도 참 지지리 복도 없지."
"……"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로 딸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다. 늦게 퇴근한 딸이 안쓰러운 엄마는 저녁이라도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나이든 몸으로 음식을 만들고 나니 다리도 저리고 어깨도 결린 것이다. 언제까지 혼기 놓친 딸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할지 한숨이 절로 나온 것이다. 엄마가 해준다고 해서 쉬고 있던 딸은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이 사례처럼 한 대상에 대해 애정과 증오, 독립과 의존, 존경과 경멸 등 상반되는 감정을 동시에 갖는 양가감정이 드러나는 소통을 이중메시지 또는 이중구속이라고 한다.
소통을 어렵게 하는 이중구속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발견된다. 한국에 돌아온 초창기에 나는 대학에 자리를 잡기 위해 대학생 과외보다도 수입이 형편없다는 힘겨운 시간강사 생활을 해야 했다. 늘 주머니 사정은 안 좋았고 당연히 가난할 수밖에 없는 유학시절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힘든 시간이었다. 어느 날 모처럼 어머니를 모시고 좀 비싼 식당에서 식사 대접을 하려고 했다. 고급스러운 식당 분위기를 보고 어머니는 "네가 돈도 없을 텐데, 이렇게 비싼 곳에 가나."라며 완강하게 거절을 하셨다. 어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한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집에 돌아와 대충 있는 반찬을 꺼내 어머니와 식사를 하였다. 그런데 식사를 하는 도중 어머니의 표정이 내내 밝지 않아 이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여동생에게 전화를 받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어머니는 처음에 식사를 하려던 식당이 마음에 들었지만 아들의 뻔한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한번 사양해 본 것뿐인데 아들은 몇 번 더 권하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와 서운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문화와 어우러져 일상에서 자주 일어난다. 소소하지만 이 역시 일종의 이중구속이다.
자기 감정을 인정하는 용기
왜 이런 답답한 일이 일어날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솔한 표현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때문에 친밀한 관게일수록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고 그러하기에 그 관계는 더욱 친밀감이 쌓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자기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다. 특히 부모나 다른 사람의 기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성장한 사람일수록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자신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데 어려움을 갖는다. 어렸을 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는데 이기적이라는 경고를 받거나 아직 어려서 모른다며 무시당하거나 배척당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일어나면 솔직한 표현을 거부하고 회피하며 마음과 달리 인위적이고 과장된 표현을 자주 사용하게 된다. 이런 행동은 모두 내면에 있는 불안을 다른 사람에게 숨기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자기의 속마음과 겉으로 표현되는 것 사이에 차이가 발생한다. 이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혼란과 분노를 유발할 수 있다.
둘째 딸의 일탈행동 때문에 40대 후반의 하 씨가 찾아왔다. 집안의 모든 걱정거리의 원인이 둘째 딸이었다. 딸만 둘인 하 씨 집에서 큰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착해서 신경 쓸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둘째는 청소년 시절부터 가출을 시도하였고 늘 엄마와 언니에게 반항하고 대들기 일쑤였다. 공부에도 관심이 없고 삐딱하게 행동하는 둘째가 미울 때도 많았다. 그러나 하 씨는 큰아이에게 정이 더 가면서도 둘째가 토라질까봐 오히려 언니보다 더 신경을 쓰며 키웠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전혀 헤아려 주지 않아 더욱 섭섭해 했다.
"왜 첫째가 더 예쁘던가요?"
"애기 때부터 큰애는 그렇게 유순할 수가 없었어요. 자라면서도 그 기질이 그대로 가더군요. 엄마 아빠가 걱정할 일이 없게 해주니 얼마나 예뻐요."
하 씨가 큰딸을 대할 때, 비록 해주는 것이 없더라도 자연스럽게 사랑스러운 마음이 전해졌을 것임이 어렵지 않게 짐작되었다. 나는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에게 어떻게 더 배려를 하셨다는 건지 좀더 자세히 말해 주세요."
"둘째는 어릴 때부터 까다롭고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어요. 언니에 대한 질투심도 많고 이기적인 성향도 강했지요. 하지만 둘째가 언니만 예뻐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큰애는 잘못하면 엄하게 혼냈지만 둘째한테는 그러지도 않았죠. 둘이 있을 때면 '엄마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는 말도 자주 해주었고요."
전형적인 이중구속 상황이었다. 둘째가 어렸을ㄹ 때는 엄마 아빠가 언니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서 사실은 부모의 애정이 언니에게 기울어 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 결국 둘째 딸은 엄마의 이중성을 접하면서 처음에는 혼란스럽고 실망했을 것이며 이것이 분노와 우울증까지 유발하게 한 것이다. 둘째 딸이 진짜 힘들었던 것은 엄마가 언니를 더 사랑한다는 사실보다 엄마가 자신에게 보인 이중적 태도였다.
진솔하지 못한 표현이 꾸지람보다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남길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이중구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려면 가장 먼저 자기 감정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용기는 자신의 내면상태에 대한 긍정에서 출발한다. 하 씨의 경우에도 설령 둘째 딸이 언니와 비교해서 못난 부분이 있다 해도 자식으로서 예쁘고 사랑스러운 마음은 같았을 것이다. 혼낼 때 혼내고 "너 그렇게 행동하면 엄마가 속상해." 라고 말하면서 부정적인 행동에 대해서 엄마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다면 상황이 악화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 통장
결혼 초 한 새댁이 시어머니의 남편에게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정확히 3년 7개월 전이라며 날짜까지 세고 있었다. 그날 사건은 이러했다. 신혼 초 손님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음식이 모자라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센스 없다고 탓한 게 발단이었다. 정작 부인 입장에서 더 미운 사람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아내를 감싸 주기는커녕 "저 여자가 원래 좀 둔해요. 몰랐어요?"라며 시어머니를 거들었다. 이때 받은 모멸감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따. 이 일로 상처를 입은 사람은 새댁 한 사람뿐일까?
사실 그날 이후 그녀 못지않게 힘든 사람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아내로부터 어리석고, 아무 생각 없는 사람으로 매일 무시당하며 살고 있다. 연애 시절 고분고분하기만 하던 아내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남편은 도대체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더더구나 아무 생각 없이 어머니를 두둔한 그 한 마디 때문이라고는 짐작할 수 없었다.
부부관계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는데 받은 것은 반드시 되돌려 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남편이 서운하게 행동하면 그 순간은 참는다. 그러나 다음 기회에 쌓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때 전에 받은 상처와 서운한 감정을 덧씌워 되갚는다. 의식적으로 "그래, 당신 나에게 그렇게 했지. 두고 봐!"라고 복수를 다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손상당한 감정은 가슴속에 잠복해 있다가 언젠가 반드시 상대에게 되돌려주려는 성향을 갖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상대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복수 심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대개 큰 위기는 이보다는 긍정적으로 받은 것을 돌려주지 않을 때 찾아온다는 것이다.
부부 사이의 관계 통장
보스조르메니 나지는 결혼한 부부 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 통장'이 존재한다는 독특한 이론을 펼쳤다. 관계 통장에 잔고가 얼마나 있는가에 따라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스런 닭살 커플이 되기도 하고, 아니면 '원수가 따로 없는' 사이로 변하기도 한다. 은행 통장과 마찬가지로 관계 통장에도 입금과 출금이 있다. 입금에 해당하는 행동은 상대에 대한 조그마한 배려에서부터 깊은 사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출금에는 사소한 화풀이에서부터 잔소리, 폭력, 경멸 등이 있다. 입금이 쌓일수록 통장 잔고는 넉넉해지고 출금이 잦아지면 잔고가 줄어들다가 마이너스로 변한다.
관계 통장에 잔고를 많이 쌓아 두려면 무엇보다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음이 공평해야 한다. 주고받음이 공평하게 유지되면 둘 사이에는 신뢰가 쌓이고 어떤 위기에도 함께 이겨 낼 수 있는 사랑이 생긴다.
이제 부부 간에 어떻게 주고받음이 이루어지는지 살펴보자.
먼저 선순환 사례를 보자. 남편이 한 달 동안 성실하게 일해서 월급을 받아 왔다. 이때 남편은 아내에게 주고(give) 아내는 받은(take) 것이 된다. 힘들게 돈을 벌어온 남편이 고마워서 아내는 다음날 아침 평상시보다 일찍 일어나서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였다. 이제 아내는 다시 남편에게 받은 것을 돌려주었고 남편은 받았다. 이렇게 주고받음이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질 때 관계 통장에는 잔고가 지속적을 쌓인다. 남편이 식사를 하면서 일찍 일어나서 수고한 아내의 등이라도 두드려 주면 다시 남편은 관계 통장에 입금을 한 것이고 사랑을 돌려받은 아내는 또 남편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행복한 고민을 한다. 이런 부부는 충만한 사랑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악순환의 경우를 보면 선순환과 차이는 간단하다. 남편이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아내는 모처럼 일찍 일어나 솜씨를 발휘한 음식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는 남편이 답답해서 한마디 물어본다. "여보, 음식이 입에 맞아요?"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심드렁하다. "맞기는 뭘, 그냥 먹는 거지!" 아침 시간이 썰렁해진다. 주고받음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받은 것을 돌려주었고, 이번엔 남편이 아내에게 받은 것을 돌려줄 차례였지만 이 순환이 깨지면서 서로에 대한 미운 마음들이 연달아 똬리를 튼다. 이것이 부부관계를 해치는 근본 원인이다.
공평하게 주고받아 관계 통장에 잔고를 많이 쌓은 부부는 어떤 위기가 오더라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반면에 관계 통장에 잔고가 얼마 없고 마이너스 상태로 살아가는 부부는 카드 돌려막기식으로 힘들게 버티다가 조그만 위기나 스트레스 앞에서도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
사랑이 일방통행 되면 관계는 깨어진다
대인관계, 연인관계, 부부관계에서는 주고받음이 공평하게 유지되어야 서로 만족감을 갖는다. 아무리 사랑하는 관계라고 하더라도 공짜는 없다. 내가 상대에게 주는 만큼 받는 것도 있어야 그 관계가 유지되고 사랑과 신뢰를 쌓아 나갈 수 있다.
겉으로 봤을 때는 부부의 주고받음이 공평하게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관계 통장을 잘 유지하는 부부가 있다. 부부가 함께 맞벌이를 하는데 전문적인 아내 쪽이 수입이 더 낫다. 저녁 때 집에 불이 나가면 아내는 먼저 달려가서 두꺼비집을 확인하고 수리한다. 이때 남편은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아이들과 신나게 숨바꼭질 놀이를 한다. 이런 부부를 보면 남편이 아내보다 역할이 적어 공평함이 깨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가 아이들에게 해주지 못하는 부분을 채워 준다. 아내보다 아이들과 잘 놀아 주고 가끔씩 아내가 좋아할 만한 근사한 식당에 데리고 가서 한껏 분위기를 잡고 식사를 한다. 아내고 주고받음 속에서 손해 본다고 느끼는 점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채워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남편의 작은 배려와 관심을 통해서도 만회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오랫동안 주기만 하고 받는 것이 없다고 느끼면 이용당한다는 기분이 들고, 상대방의 노예가 된 듯한 느낌, 텅 비고 고갈된 느낌이 쌓여 불만이 생긴다. 반대로 받기만 하고 주는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죄책감과 빚진 기분에 시달린다. 둘 사이에 주고받음의 공평함이 깨지면 한쪽은 억울하다고 느끼고, 다른 한쪽은 빚진 기분이 된다.
대학에서 만난 두 남녀는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자취생활을 하고 있는 남자는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여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남자에게 주기도 하고 시간이 날때마다 남자의 자취방에 가서 빨래와 청소를 해주면서 사랑하는 남자에게 많은 것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여자가 먼저 취직이 되었다. 남자는 취업이 되지 않자 대학원에 진학하여 사회 진출을 위한 숨고르기를 하였다. 여자는 남자가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학비를 대고 헌신적으로 지원하였다. 드디어 오랜 기다림이 끝내고 남자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업을 하였다. 여자는 이제 고생스러운 시간이 끝나고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얼마 후 여자는 남자로부터 그만 헤어지자는 충격적인 통보를 받았다. 남자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이 수 없어 몇 번이나 그 말을 되뇌었다. 대학에서 만나 서로 사랑을 가꾸고, 지금까지 남자가 자립할 수 있게 헌신적으로 도운 결과가 이별이라니 여자는 믿기지 않았고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어 공항 상태에 빠졌다. 그렇다고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무거웠다. 여자 친구에게 늘 받기만 하는 관계였기에 마음의 빚 때문에 여자 친구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녀 앞에만 가면 빚진 기분에 시달려야 했다. 남자가 원하는 것은 아무런 정신적 채무 관계가 없는 동등한 남녀관계였다. 그는 자신을 오래 믿고 지원해 준 여자 친구에게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부채의식이 따라다녀 괴로웠던 것이다. 부채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그의 마음이었다.
사람의 관계란 묘한 것이어서 한쪽이 지나치게 주기만 해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 받기만 한 쪽은 고마움은 알지만, 관계를 청산함으로써 마음의 부담을 털어내고픈 유혹에 시달린다. 따라서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상대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 사랑에도 요령이 있다는 것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조건 없이, 아낌없이 뻬풀어 주되 상대가 부담을 갖지 않고 다시 내게 돌려줄 수 있는 범위를 생각하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가족으로 산다는 것
예전에는 대여섯 명의 자녀가 이야깃거리도 아니였는데 요즘에는 많지도 않은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우리 집만 해도 달랑 아들 하나이지만 나와 아내는 아들 키우기가 늘 조심스럽고 어렵다.
부모가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우리 아들은 언제나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아이는 주말만 기다리며 산다. 어느 주말 아들은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자고 졸랐다. 우리 부부는 모처럼 맞은 휴일을 사람 붐비는 곳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가 원하니 어쩔 수 없이 그러자고 했다. 집에서 가까운 패밀리 레스토랑까지 걸어서 가면 족히 40분은 걸리는데, 아이는 차를 타는 대신 걸어서 가잔다. 자전거를 타고 싶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걷고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나섰다. 음식을 먹고 집으로 오는데 이번에는 집 근처 슈퍼에서 과자를 사 달라고 떼를 쓴다. 금방 배불리 식사를 했는데 웬 과자냐며 그냥 집에 가자고 했지만 막무가내다. 이런 식으로 주말 내내 아이의 요구는 계속되었고 우리 부부는 한편으로는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달가우면서도 주말이 끝나갈 즈음엔 서서히 지쳐 갔다. 엄마 미소, 아빠 미소로 흐뭇하게 늦둥이를 바라보는 '아들 바보'가 되기는 쉽지만 '좋은 부모' 역할은 녹록하지 않다. 좋은 부모는 아이에게 거절과 좌절을 적절히 경험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우리 인간을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 라고 표현했다. 아무리 헌신적인 부모라도 수시로 바뀌는 아이의 욕구를 다들어줄 수는 없다. 요즘 부쩍 많은 아이들이 다양한 문제를 갖고 있으며 분명히 과거 세대보다 문제를 일으키는 빈도가 늘어났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ADHD)를 가진 아이들은 과거 세대보다 몇 배 증가하였으며 사회성 부족으로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아돌상담과 놀이 치료를 담당하는 기관에는 수많은 아이들로 넘쳐 난다. 상담이라도 받으려면 예약을 하고 대기자 순서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편한 것만 찾으려는 아이들
1973년 의학과 생리학 부문 노벨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 석학 콘라트 로렌츠는 즉각적으로 만족을 얻으려는 태도가 현대 사회의 죄악 가운데 하나라고 설파한 바 있다. 사회가 점차 편리해지면서 즉각 적인 만족은 보편적 욕망이 되었다. 사람들은 즐거움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반면 괴로움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한다. 문제는 괴로움을 기피하다 보니 진정한 즐거움인 희열을 맛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희열은 오르기 힘든 산의 정상에 오른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기쁨이다 부단한 고통과 어려움을 통과했을 때 비로소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 곧 희열이다.
산이 높아야 골도 깊은 법인데 괴로운 일은 피하려고만 하니, 어려운 일을 극복한 뒤에 오는 기쁨을 접하지 못해 인생에 지루함과 무미건조함만 남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루함고 무미건조함 또한 좋아하지 않는다. 무미건조한 일상을 피하려면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 이로부터 새로운 것에 대한 광적인 편애증이 생겨난다.
요즘이야 미국도 서브프라임 사테 이후 좀처럼 경기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문화가 상당히 바뀌었겠지만, 내가 미국에 있을 때만 해도 중산층 가정에는 이사를 갈 때면 사용하던 가구를 모두 처분해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집을 바꾸면서 가구도 완전히 새로 개비하는 것이다. 가구가 낡아서가 아니라 단지 새로운 물건에 대한 탐닉 때문이다. 이런 생활상을 보면서 로렌츠는 경제의 기본 메커니즘인 생산과 소비의 순환 구조가 위기에 직면할 것을 예견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과 열광은 사치 풍조로 이어져 미국 등 서구 국가의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들 것이며 비교적 사치에 덜 물든 건강한 동양의 나라들이 부상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영미권 국가가 크게 위축되고 반면 중국, 인도와 동남아 국가들이 약진하는 작금의 세계 경제는 로렌츠의 분석을 상당 부분 입증하고 있다.
즉각적인 만족, 새로운 것에 대한 광적인 열풍, 약간의 괴로움도 피하려는 삶의 자세는 우리 아이들 세대에 수소 신드롬을 심어 놓았다. 수소 신드롬은 독일어권에서 만들어진 개념으로 즉각적인 만족을 얻으려는 세대를 일컫는다. 즉 부모나 일반적인 사회 규율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책임감도 없이 불안정하며 매사에 무관심한 세대를 말한다. 이들은 책임감과 의무감에는 심드렁하고 자신의 즉각적인 욕구에만 눈을 반짝인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아동, 청소년의 약 30퍼센트 가까운 아이들이 상담이 필요할 정도라고 본다. 요즘 주의의 교사들로부터 이전과 다른 '새로운 아이들'이 출현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새로운 아이들의 요체는 이렇다. 이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지시를 전혀 따르지 않는다. 교사가 똑같은 지시를 여러 번 반복해야 겨우 자신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파악하고 마지못해 지시에 따르는 척할 뿐이다. 이 아이들은 흥미 업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기분이 나빠지면 바로 툴툴거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교사가 보고 있어도 물건을 집어 던지기까지 한다. 이들에게 힘들고 괴로운 일은 기피 대상일 뿐이다. 아이들은 쉽게 되지 않으면 즉시 포기한다. 이 '새로운 아이들'은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게임 활동 외에는 오랫동안 무언가에 몰두해 어떤 일을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교육 전문가들은 점점 이런 '새로운 아이들'이 증가하는 추세에서 기존의 학교 교육 방식은 이미 한계에 왔다고도 말한다. 이런 아이들이 앞으로 선택할 인생길은 가능한 가장 편하고 괴로움을 면하는 경로일 것이다.
이미 이러한 풍조는 20대 이상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20~30대가 늘어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런 은둔형 외톨이의 숫자를 많게는 100만 명까지 예상한다. 이들은 캥거루처럼 부모에게 의존하며 매사에 무관심하고 조금이라도 불편하고 괴로운 일은 피하면서 자기만의 작은 세계 속에 고치를 틀고 산다.
에리히 프롬이 말한 "문제 아이 뒤에는 문제 부모가 있다." 라는 말은 아주 뼈아프게 다가온다. '새로운 아이들'은 물론 급격하게 변하는 현대 사회 체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기증 날 정도의 빠른 변화, 풍부한 소비 생활, 욕망을 부추기는 광고와 매체들 등 많은 요인들이 구조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아이들이 '새로운 아이들'이 되거나 수소 신드롬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가정의 역할에서 그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세상을 향해 나아갈 힘을 주는 곳
발달심리학자들과 사회심리학자들은 한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욕구 충족의 유예'를 매우 중요한 과제로 평가한다. 눈앞의 욕구를 당장 충족하는 데 급급하지 않고 다음에 얻을 보상과 결과를 위해 미룰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를 잘 돕기 위해서 부모는 서로 모순된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어떤 때는아이의 욕구를 즉각적으로 충족시켜 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아이의 자아 기능의 발달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바로 들어주지 않고 잠시 연기한다거나 때로는 단호하게 거절하는 일도 포함 된다. 거부의 경험은 아이에게 몹시 고통스러운 아픔이다. 때문에 부모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거부할 때는 평소보다 사랑과 관심을 더 많이 주어야 한다. 그러면 아이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단지 자기가 원한 어떤 대상이 거부당했을 뿐임을 깨닫는다. 이를 통해 아이는 당장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지만 조금 참고 기다리면 다른 형태로 더 크게 충족될 수 있음을 배운다. 공부 또한 당장의 욕구를 참아내고 더 많은 만족감과 성공을 기대할 수 잇어야 잘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때 필요한 사회성이 형성되며 특히 자아존중감이 발달한다. 부모의 적절한 양육 과정에서 길러진 욕구 통제 능력은 아이가 인생을 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와 위기를 극복하고, 삶의 지루함고 무미건조함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된다. 좌절 없이는 성취가 없는 법이다.
자신의 즉각적인 욕구를 누르고 통제하는 능력은 결국 부모가 아이를 적절하게 좌절시키는 훈련 속에서 만들어지는 셈이다. 물론 지나치면 역효과가 난다. 지나친 좌절은 아이에게 만족에 대한 결핍감과 허기를 불러일으켜 아이가 탐욕적인 욕구 추구에 "빠져들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좌절의 경험이 너무 적다. 이리나 프레코프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좌절을 겪지 않는 교육으로 인해 불행한 노이로제 환자가 되어 간다고 말한다. 매사에 무관심하지만 즉석 만족과 즉흥적인 충동에 익숙한 아이들을 위한 치료법이 많이 개발되고 있는데, 체료법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적정한 수준의 괴로움이다.
독일에서는 권태로운 청소년들에 대한 치료법의 일종으로 해양 구조 훈련을 시키기도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는 일이 청소년의 일상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의하겠지만 의외로 상당한 효과를 나타낸다. 극한 상황에서 마주치는 삶의 진지함은 자아가 허약한 아이들에게 자극과 치료제가 된다. 한국에는 해병대 극기 훈련 과정 등이 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청소년 치료 과정으로 승마 학교가 인기를 끌고 있다. 해병대나 해양 구조보다는 좀 더 세련된 형태의 괴로움을 경험하는 곳이다. 매우 비싼 비용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대기자들이 줄을 서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 입교한 청소년들은 승마장에서 각자 개인 말을 배정받는다. 말의 훈련과 청소 그리고 관리까지 책임을 맡는 것이다. 도시의 깔끔한 환경에 익숙한 아이들이 냄새나는 말똥을 치우고 마구간에 건초를 깔아 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작업을 하는 동안 아이들은 동물과 교감을 하면서 정서적 안정, 책임감과 의무감을 배운다. 아이들은 괴로움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고통을 참아낸 뒤의 희열을 경험하면서 변화해 나간다.
인생은 고해(苦海)라고들 말한다. 비관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삶은 내내 고통의 바다를 지나다가 어쩌다 한 번씩 허리를 펴고 숨을 쉴 수 있는 섬을 만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나 크고 긴 괴로움은 우리의 삶을 파괴시키지만 약간의 긴장과 괴로움은 우리에게 각성을 주고 도전해 볼 마음, 그리고 고생 뒤에 찾아오는 진정한 만족의 가치를 일깨운다. 자아가 형성되는 유소년 및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 이런 경험은 더욱 절실하다. 가족의 화목과 행복 역시 마찬가지다. 작은 좌절과 고통을 달갑게 받아들여야 한다.
쉽게 저절로 얻어지는 평화나 기쁨, 행복은 없다. 우리가 돈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을 때는 마냥 편한 것을 원할지도 모르나 건강한 가족을 꾸려가기 위해서는 욕구의 유예, 고통과 불편함의 인내 모두가 필요하다. 가정은 단지 서로를 보듬어 주는 최후의 보루이자 따뜻한 둥지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 둥지를 떠나 세상을 향해 날갯짓 할 힘을 길러 주는 곳 역시 우리의 가정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가 가족이다.
노력하는 만큼 행복해지는 가족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은 아마도 세상에서 나를 가장 무시하는 사람일 것이다. 아빠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아들을 보며 순간 화가 나서 아내에게 쏘아붙였다.
"엄마가 아동상담 교수라며…." 이때 아내도 내게 응수했다.
"당신, 다른 데에서만 가족상담을 하지 말고 우리 집에서도 좀 하지."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지금까지 여러 가족을 상담해 왔지만 정작 나조차도 행복한 가족을 만들고 있지 못하다. 매일 노력하고 애쓰는 중이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약속한 연인들 모두 장밋빛 미래를 그리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사랑해서 결혼했건만 갈등이 생기고 상처를 남기고 깊은 외로움에 빠지기도 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관계는 더 복잡해지고 갈등 요인도 훨씬 다양해진다.
살다 보면 누구나 문제에 부딪칠 때가 있다. 문제에 정확히 직면하지 못하면 작고 사소했던 사안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도 하는데 특히 가족 문제가 그러하다. 가족의 갈등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고통의 시간이 한없이 늘어나거나 엄연한 갈등을 없는 것처럼 회피하여 치유할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숱하게 보았다. 가족에게 갈등이 있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아는 것이 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사랑을 표현하거나 나눌 여유가 없는 부모를 가진 아이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부모에 대해 슬프거나 외롭거나 화가 나지만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다.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자기의 감정을 억압하고, 부모에 대한 기대감을 낮춘 채 스스로 모든 일을 알아서 함으로써 생존한다.
이제 성인이 된 아이는 어릴 때처럼 감정을 억압하고 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힘이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던 어린 시절에 취했던 생존전략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고수한다. 배우자와 정서적으로 관계를 맺지 못하고 따듯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을 보며 배우자는 실망한다. 자신이 부모에게 당한 그대로를 자녀에게 돌려주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들도 깊은 상처를 받고 자란다.
어린 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그 일이 지금 우리의 생각, 감정,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모르는 사람은 사막에서 물을 구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서로가 갖고 있는 결핍과 아픔이 있지만 들여다보지 못함으로써 충돌이 생긴다. 상담을 통해 남편이 도저히 사랑을 줄 수 없는 사막과 같은 사람이라는 실체를 인정하면서 부부관계에 변화가 찾아온다. 더 이상 남편을 바꾸기 위해 애쓰지 않고,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극적인 반전이다. 그 동안 남편의 사랑을 바라고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했다면 이제 남편이 자기를 바라보게 구체적으로 애를쓰고 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아내는 남편이 늘 바라는 인정과 칭찬을 해준다. 그 동안 남편이 원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속상해서 비난하고 인정하지 않던 자세를 바꾸어 남편을 달래 준다. 각자가 어린 시절의 나를 돌아보는 데서부터 가족관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살펴본 가족 이야기를 마치며 나의 가족을 돌아다본다. 나는 아내와 대학원을 다닐 때 만나 7개월 만에 결혼하였다. 유학생활 도중에 우리에게는 소중한 아들이 태어났고그 아이는 우리 부부의 보물이다. 때로는 가족 안에서 사소한 것으로 싸우고 우리 부부의 보물이다. 때로는 가족 안에서 사소한 것으로 싸우고 우울해하지만 가족이 있기에 세상에 맞설 힘과 용기를 얻는다. 가장 힘든 고통과 아픔을 주는 사람들 또한 가족이지만 우리는 함께 살 수 있다. 가족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참고 배우며 알아가야 할 사람들이니까. 우리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노력일 것이다. "왜, 가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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