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천석 지음『서천석의 마음을 읽는 시간』에서 -
"내가 완벽해야만 나를 믿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부족한 그대로 자기를 믿어야 합니다.
남의 시선에 자신을 너무 맞추려 애쓰지 마세요.
내 수준 그대로, 내 마음 그대로 이야기하면 됩니다."
서천석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일하던 중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어른들의 문제가 그 뿌리는 어린 시절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소아청소년정신과 과정을 밟았다. 그래서 지금은 아이들은 물론 마음속에 상처 입은 아이를 감춰둔 어른을 치료하는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진료실에서는 물론 신문과 방송 등 여러 매체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그는 속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은 의사, 원칙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답을 주는 의사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가 이름을 내걸고 시작한 MBC FM의 <서천석의 마음연구소>는 '진정한 위로는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고, 타인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말뿐인 힐링이나 그럴듯한 위로를 넘어서 객관적인 연구를 기반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마음을 이햐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하지만 그만의 풍부한 감성과 따뜻한 목소리, 가슴으로 직접 파고드는 독특하고 감각적인 문장은 그의 방송을 특별한 위로와 감동의 시간으로 만들어냈고 방송 기간 내내 가장 많은 게시판 조횟수를 기록하는 등 인기프로그램 자리를 유지했다.
현재 그는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서 고정 상담을 맡고 있으며 네이버캐스트와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저서로《하루 10분, 내 아이를 생각하다》와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가 있다.
오늘 집을 나올 때
어떤 말을 하셨나요?
오늘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어떤 말을 하셨나요?
그냥 의례적인 말이었을 수도 있고 사랑을 담은 말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화가 나서 내뱉은 말이었을 수도 있겠지요.
얼마 전 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있었던 한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나누는 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어린 남매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습니다.
동생이 기차에서 신발을 잃어버렸지요.
누나는 동생을 꾸짖었습니다.
"이 바보야. 자기 물건 하나 못 챙기고,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기차가 도착하고 둘은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습니다.
동생은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누나는 운이 좋아 살아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동생을 보내고 살아 나온 누나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내가 남길 마지막 말이 되기에 부족한 말은 앞으로 절대 하지 않으리라."
얼마나 후회를 많이 했을까요?
동생이 죽기 전에 떠올릴 자신의 모습이
바로라고 비난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과거로 돌아가 그 순간을 바꾸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집을 나오기 전
사랑하는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어떤 말이었나요?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말이었나요?
물론 매순간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로 채울 수야 없겠지요.
때로는 거절도 필요하고, 따끔한 한마디도 필요하니까요.
다만 가까운 사람을 대할 때, 우리가 하는 말이 가깝다고
더 함부로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는 있습니다.
원래 가장 상처를 많이 주고받는 관계가 가족관계입니다.
서로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도 가장 많고,
부담을 주는 면도 가장 많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기대가 크지 않으면 실망도 크지 않은 법인데
자기 힘만으로 살아내기가 어려울수록
자신감이 떨어지고 흔들릴수록 우리는 가족에게 더 많이 기대합니다.
그리고 기대가 채워지지 못할 때
내 마음의 괴로움을 가족에게 전달합니다.
상처가 될 말로, 화난 표정으로,
나만 괴로울 수 없으니까 가족들을 괴롭히곤 합니다.
혼자 괴로운 것이 낫다고 하면서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남과 함께 괴롭기를 원합니다.
나만 괴로우면 괴로움에 더해 외롭기까지 하니까요.
하지만 비난한다고, 실먕했다고 가족을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남긴 마지막 말이 비난과 실망의 말이라면
너무 후회스러울 것입니다.
한 번 더 내가 던지는 말을 생각해보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행복을 느끼는 것도
습관입니다
"서글픈 과거를 돌아보니 노숙자 시절이 떠오릅니다.
다행히 그 수렁에서 나와 지금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새벽에는 우유를 배달하고, 낮에는 작은 공장에서 일하죠.
여기서 밀리면 또 노숙자가 된다는 위기감에 잠시도 쉬지 않습니다.
그런데 개미처럼 부지런히 살아가도
때로는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건가 회의가 듭니다.
지금은 흡사 낭떠러지에 서서 최후의 몸부림을 치는 기분이예요."
제게 상담을 한 어느 분의 이야기입니다.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온 이 분의 용기와 삶에 대한 의지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박수를 처드리고 싶습니다.
이 분처럼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더라도
우리 대부분은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건가, 하는 회의에 빠지곤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게 제대로 행복하게 사는 것일까요?
행복은 미뤄두면 나중에 저절로 떨어지는
감이나 밤과 같은 열매가 아닙니다.
행복을 연구한 학자들은 행복이
내 몸에 배어야 할 습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은 삶에서 만나는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더 많이 즐기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주어진다고 해도
행복을 느끼는 습관이 없다면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거죠.
지금이 낭떠러지 앞만 같고 여유가 없다 해도
그럴수록 바위 틈새마다 작은 행복을 끼워넣어야 합니다.
억지로 버티다보면 힘이 빠져 손을 놓게 되고
그렇게 손을 놓으면 추락하게 됩니다.
힘들수록 행복을 절실하게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더 오래 버틸 수 있습니다.
길을 걷다 가을색으로 곱게 물든 나무를 보면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가 웃고 장난치면 눈길을 주며 같이 장난칠 수 있어야 합니다.
불현듯 가까웠던 친구가 생각나면
뜬금없이 보이지만 문자 한 통을 보내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이렇게 작은 행복이 반짝이는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건 순간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보내버립니다.
시간이란 상대적입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영원히 기억으로 남는 시간도 있고
몇 달이나 몇 주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짧은 행복의 순간을 길게 사는 겁니다.
그 시간에 주목하고 머무르며 충분히 느껴보세요.
하루 한 번이라도 그런 시간을 만들 때
삶의 색깔은 달라질 겁니다.
따뜻한 눈으로
타인을 본다는 것
자기를 믿는다는 건 부족한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 모습 그대로 자기를 아끼고,
그 지점에서 출발해 조금씩 발전하려 하는 거죠.
이런 태도는 자기에게뿐 아니라 남을 대할 때도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에 대해 지나치게 평가합니다.
나의 부족한 점을 흉보고, 잘못한 행동에 과하게 화를 냅니다.
그도 나도 실수를 할 수 있고, 잘못하는 부분이 있을 텐데,
관용은 사전 속에나 있는 단어인 듯 행동하죠.
남에게 화를 내는 내 마음의 불편함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이 외출 준비에 시간이 걸리면
만날 늦는다고 화를 내는 경우가 있죠.
화를 내는 것이 지나쳐 즐거운 외출을
완전히 망쳐버리기까지 합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죠.
얼른 외출하고 싶은데 못 가서 초조하고,
나는 준비를 마쳤는데 할 일 없이 기다리는 게 억울해서
마음이 불편했을 겁니다.
그 불편한 마음을 풀어내려 상대에게 화를 내는 겁니다.
상대가 늘 늦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보세요.
아내라면, 여자는 아무래도 준비에 시간이 더 걸리는 법이고,
집안일을 마무리 짓고 떠나야 하니 늦을 수 있죠.
아이들이라면, 아직 시간에 맞추 계획대로 움직이기엔
나이가 어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주목할 부분은
그들과 함께 외출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다른 아닌 나란 사실입니다.
또 이왕 외출을 하면 그 시간을 즐겁게 보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서로에게 즐거움과 보람을 주고받는 가족입니다.
이런 긍정적인 점에 주목할 때
화는 덜 나고, 외출은 더 즐거울 겁니다.
나나 남이나 우린 모두 부족한 점을 가진 인간입니다.
그리고 부족한 대로 괜찮습니다.
상대가 내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말해야겠죠.
하지만 딱 피해를 받은 만큼만 말하면 됩니다.
상대가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안 보면 그만입니다.
내 불편한 마음을 상대에게 다 쏟아부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분노가 전해지고 또 전해지면
분노는 점차 커져 언젠가 내게
폭포수처럼 쏟아질지도 모릅니다.
'나도 부족하고, 남도 부족하다.
하지만 나도 괜찮고 남도 괜찮다'는 마음은
우리를 너그럽고 따뜻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따뜻함의 가장 큰 수혜자는 분명 저 자신입니다.
행복에는 리듬과
악센트가 필요합니다
티베트의 불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자비심을 품어라."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건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좋은 일을 한다고 반드시 행복할까요?
캘리포니아 주립대의 류보머스키 교수가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6주 동안
다섯 개의 친절한 행동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 친절한 행동은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거창한 행동일 수도 있고,
상대가 알아줄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것부터 양로원을 방문하는 것까지,
사람들은 다양한 실천을 하고
매주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친절한 행동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행복을 느낄 수 있었죠.
그런데 이 실험에는 재미난 부분이 있었습니다.
류보머스키 교수는 참가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눴습니다.
한 집단에게는 친절한 행동을 일주일 중 아무 때나 하도록 했고,
다른 집단에게는 일주일 중 하루는 몰아서
다섯 개의 친절한 행동을 하도록 했습니다.
두 집단을 비교한 결과는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하루에 몰아서 친절한 행동을 한 집단에서
행복감이 훨씬 많이 늘어났습니다.
예상외로 매일 조금씩 친절한 행동을 한 사람들에게는
행복감이 그다지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작은 친절을 자주 베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루에 한 번씩 친절을 베푸는 것은
그냥 우리의 보통 일상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하루에 몰아서 다섯 개의 친절한 행동을 하는 것은
본명 특별한 경험입니다.
친절한 행동도 특별한 경험일 경우에만 행복을 늘려준다는 것입니다.
류보머스키 교수는 친절과 행복에 대해
또 하나의 실험을 했습니다.
한 집단은 다양한 친절 행위 중
스스로 정한 세 가지를 매주 자유롭게 바꿔가며 4주간 하도록 하고,
다른 집단은 똑같은 친절 행위를 반복해서 4주간 하도록 했습니다.
친절도 지루하면 별로 도움이 안 되는지
똑같은 친절을 4주간 연속으로 한 집단은
행복감의 증진효과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반면 매주 다양한 친절 행위를 골라서 한 집단은
행복감이 꾸준히 높게 유지되었습니다.
사람이란 참 묘한 존재입니다.
반복되고 지루한 것, 일상적인 것엔
별다른 즐거움을 얻지 못합니다. 물론 친절이 자기만 좋으려고,
자기만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친절도 리듬과 악센트를 갖고 할 때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행복한 삶은
작은 활력소를 모아가는 것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파란만장하고 별일이 다 일어나는 듯싶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지루함의 연속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시간은 필요한 일을 하느라 채워집니다.
비록 처음엔 내가 선택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가면 그저 성실하게 해내야 한다는
의무감만이 나를 지배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지루함을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지루함은 내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죠.
삶에서 새로운 자극이나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지루함을 덜어주어
내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꼭 필요한 요소지요.
오랜 시간 지루함이 계속되고
그 결과 내 삶이 온통 의무감으로만 채워진다고 느끼게 되면
우리 내면에니 나다운 것, 내가 결정한 것을
하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삶에 활기를 주어 삶을 지켜가려는 본능적인 반응입니다.
그래서 택하는 방법은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첫 번째는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입니다.
새로운 일을 벌이면 분명
새로운 기분과 큰 활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어가는 에너지가 만만치 않아 부담도 크죠.
나머지 방법은 보다 부담이 적은 방법입니다.
자신만의 즐거운 의식을 만들어서 반복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저는 일요일 아침에는 녹차를 내려
아이들과 나눠 마시는 시간을 갖습니다.
좋은 녹차를 준비해서 정성껏 우리고
그 맛을 음미하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죠.
이렇게 지난 한 주를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휴일을 시작합니다.
반복적인 의식은 계속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에 비해
크게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안정감 속에서 작은 즐거움을 선사하죠.
어떤 분은 일주일에 한 번 친구들과 등산을 가기도 하고,
보너스를 타면 꼭 아내와 함께 좋은 레스토랑을 찾는다는 분도 있습니다.
제 주변에는 10년도 넘게 월급날엔 꽃과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에 들어간다는 친구도 있습니다.
자신의 일상에서 이와 같이 사소하지만,
즐거운 의식을 많이 만들 때
우리는 살아 있다는 느낌을 얻게 됩니다.
그 느낌은 우리에게 편안한 행복을 전해줍니다.
물론 이처럼 애써 만든 의식도 다시 지루해질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을 즐기려는 마음이 사라지고
더 이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순간,
마치 온갖 기념일들이 그렇듯 습관이나 의무가 되고 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일에 의미를 더하고
더 많은 것을 느끼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어쩌면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란
이처럼 작은 행복을 모아서 자기만의 진열장에 전시하고,
스스로 의미를 음미하며 즐길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위로를
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위로를 잘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아무래도 정신과 의사니까
마음을 녹이는 위로의 말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서겠죠.
하지만 위로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으로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속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 있도록
긴 호흡을 갖고 기다려주는 것이 위로의 시작입니다.
요즘은 다들 바쁜 세상입니다.
그래서 위로도 빨리 하고,
어서 '힐링'해서 새롭게 출발해야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바빠졌다고 해도
상처받은 마음이 아무는 데 걸리는 시간이
줄어들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상처를 제대로 치유할 여유가 없기에
더 오랜 시간 상처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 요즘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로할 땐
내 마음이 조급해서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상대가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상대에게 말하라고 재촉하게 됩니다.
어떤 말이든 마음속에서 준비하고 나온 말과
준비 없이 쏟아진 말은 큰 차이가 납니다.
충분히 마음에서 무르익어서 말이 나오면
그 말과 함께 내 가슴속 묵은 감정도 흘러나갑니다.
그때 우리 마음은 시원해지죠.
하지만 무르익지 않은 채로 말을 하면
말은 뱉은 순간 내 감정은 오히려 자극을 받습니다.
수치스럽고, 화가 나고 더 슬퍼집니다.
그러므로 상대를 위로하기 위해선 상대의 마음속에서
말이 무르익어 나올 때까지
더 많이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상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 어려워서
얼른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대와 함께 자기도 흔들릴까봐 염려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안정적이지 않은 마음 상태라면
아픈 상대를 위로하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마음부터 먼저 돌보는 편이 낫습니다.
물론 내 조급함보다는 괴로워하는 상대가 안쓰러워서
얼른 위로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기억해야 하는 건 내가 얼른 위로한다고
상대가 빨리 위로를 받는 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위로는 상대에게 내 시간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아무 말 하지 못하더라도
함께 충분히 옆에 머물며, 당신이 내게 중요하다는 것을
시간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 위로입니다.
어떤 보상이 없더라도, 당장 기분이 풀리지 않는다 해도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 시간을 기꺼이 쓰겠다는 마음이
상대를 위로해줍니다.
모든 것이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시대이기에
이처럼 계산 없이 주는 마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런 위로이기에 시간을 아끼고
오래 남을 수 있는 겁니다.
뒷걸음 치지 말고
앞을 보고 걸으세요
아침에 약수터에 가면 많은 분들이 나와 계십니다.
제법 쌀쌀한 새벽 공기를 가르고 산에 올라
맨손체조도 하고 심호흡도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분들입니다.
새벽부터 이렇게 산에 오르는 이유가
하루 동안 마실 물이 필요해서는 아닐 겁니다.
이유를 물어보면 건강을 위해서, 또는 건강에 좋기 때문에
운동 삼아 올라왔다는 대답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건강을 챙기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또 물어보았습니다.
'별 실없는 사람 다 보겠네.'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답은 각기 달랐습니다.
한 분의 대답은 '더 활기차고 즐겁게 살기 위해서' 였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몸이 튼튼해야 재미나게 살 수 있고,
놀 때도 여러 가지를 다 할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어떤 분은
"내가 아파서 누우면 누가 챙겨주겠나? 자식들도 다 힘들어한다"며
내 몸은 내가 챙겨야 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두 분 다 건강에 신경을 쓰고 계시지만 이유는 사뭇 달랐습니다.
한 분은 더 즐겁게 살기 위해서 건강을 챙기고,
다른 한 분은 병이 나지 않기 위해서 건강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한 분은 무언가를 원하는 분이고,
다른 한 분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분입니다.
사랑에 대한 질문을 사람들에게 해봐도
이와 비슷한 두 가지 답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왜 하는지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더 행복하고 즐겁기 위해서라고 답하고
어떤 사람은 사는 것이 외로우니까 외롭지 않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더 좋은 상태로 가기 위해,
더 행복해지기 위해 사랑과 건강을 찾는 사람과
안 좋은 상태를 피하기 위해,
불행하지 않기 위해 사랑과 건강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많이 다릅니다.
방향은 같더라도 한 사람은 앞을 보고 걷는 것이고,
한 사람은 뒷걸음질로 걷는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뒤로 걷는 사람이 더 힘이 듭니다.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가다가 돌부리라도 나타나면
앞으로 걷는 사람은 살짝 피할 수 있지만
뒤로 걷는 사람은 걸려 넘어지지 십상입니다.
위기상황에 대응하기 어려워
작은 어려움만 생겨도 계속 진행하기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그 과정이 불편하고 힙겹지요.
그런데 그 힘겨운 시간이 바로 인생 그 자체입니다.
영화는 스릴과 서스펜스가 있어야 재밌지만
인생은 뒷걸음질치며 도망치듯 살아서야 그저 괴로울 뿐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이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삶이라면 곤란합니다.
즐기기 위한 인생, 더 행복하려는 삶을 위해
지금 뒤로 돌아 내 몸이 향하는 방향을 바꿔봅니다.
인생은 답이 없는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
언젠가 새해 첫날 일출을 맞이하러
태백산 정상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에 기대어 산을 오르면서
이 고생을 하고 올라갔는데 일출을 보지 못하면
무척 억울하겠다 싶었습니다.
정상에 오르니 저희 일행 말고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올라와 있었는데 아쉽게도 그날 행운의 여신은
저희에게 미소를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날은 맑았지만 지평선 부근에 구름이 끼어
땅에서 불쑥 해가 솟아오르는 장관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조금 지나서 구름을 뚫고 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새해 첫날의 마음을 다질 수는 있었지만요.
아쉬워하는 저희 일행에게 무거운 사진기를 세워둔 채
촬영에 열중하던 분이 이야기하더군요.
지평선을 뚫고 올라오는 일출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자신은 수십 번 올라왔지만 겨우 한 번 봤을 뿐이라고요.
인생 역시 이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노력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고생해서 산을 오른다고 일출을 본다는 보장이 없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산을 오르지 않는다면 일출을 볼 가능성은 전혀 없겠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다음 좋은 결과가 오기를 기대하는 것.
인생에서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일출을 볼 가능성이 낮다면 아예 오르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이야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합리적인 듯싶고,
더 의미 있는 다른 일이 있다면 충분히 수긍이 가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보장되지 않은 일을 무조건 회피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을 것이고,
스스로 자랑스러울 만한 성취를 이루기만 어려울 것입니다.
'이렇게 고생했는데도 일출을 보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도 우리에겐 당연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불안은 산을 오르는 우리의 발을 무겁게 하고,
자칫 중도에 포기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더욱 아쉬운 점은 오르는 길, 그 긴 시간을
전혀 즐기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죠.
하얀 눈이 덮혀 순결한 모습으로 서 있는 나무들,
내딛는 발자국마다 느껴지는 푹신한 낙엽의 감촉은
불안한 사람의 마음에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직 불안만이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니 과정을 즐길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은 답이 없는 문제를 푸는 과정입니다.
끝이 보장되지 않은 길을 걸어야 하는 여행입니다.
어쩌면 끝을 알 수 없기에 삶은 이토록 다채로울 수 있습니다.
도망가고 불안해하기보다는 도전하고 과정을 즐기는 것이
무력한 우리 인간에겐 어쩌면 최선의 선택입니다.
마음연구 보고서
졸업사진의 인상이 미래를 결정한다?
버클리 대학교 라베나 헬슨 교수는
1959년 기념비적인 연구를 시작합니다.
그해와 이듬해 밀스 대학교를 졸업한 여성 110명을 대상으로
이들의 삶을 50년간 추적·관찰하는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밀스 추적 연구'라고 불리는 이 연구는
여성의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많이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연구의 일환으로 대커 켈튼 교수와 리엔 하커 연구원은
재미난 연구를 실시했는데 110명의 졸업사진 속 인상이
그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연구진은 졸업사진에서
눈 주위 근육과 광대 근육의 움직임을 살핀 뒤
얼마나 밝은 미소를 지었는지 점수로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이 점수와 그들의 삶 사이의 연관성을 살펴보았죠.
과연 졸업사진 한 장이 어떤 대표성이 있겠는지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졸업사진에서 더 따뜻하고 뚜렷한 미소를 보인 사람일수록
이후 30년 동안 내내 좀 더 안정적인 심리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집중력도 높았고 보다 목표지향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더 많은 유대감을 경험했으며
삶에 대한 만족도 역시 높았습니다.
미소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이런 결과가 가능할까요?
바버라 프레드릭슨 교수의 연구는 여기에 팁을 내려줍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짓게 한 뒤 신체반응을 계측하였습니다.
그 결과 미소를 지을 때 심혈관계의 안정성이 좋아져서
스트레스가 줄어든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미소가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져오는 것이죠.
미소로 인한 변화는 뇌에서도 일어납니다.
미소를 짓는 동안 우리의 대뇌에선
목표 지향적인 행동을 하도록 하는 영역이 활성화됩니다.
이 부분이 활성화되면 우리는 좀 더 집중하기 쉬워지고
목표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미소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어
상대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결국 미소는 나와상대의 마음을 모두 말랑말랑하게 해주어
새로운 도전을 가능하게 합니다.
9개월 된 아이를 대상으로 실험을 해보면,
엄마가 전혀 미소를 짓지 않을 경우
아이들은 그 전에 잘하던 새로운 탐색을 하지 않고
장난감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소는 우리가 마음을 열고 외부세계로 나갈 수 있도록
불을 밝혀주는 신호등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난 사실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언급한 미소는 모두
눈 주위의 근육이 움직이는 미소입니다.
입꼬리만 양옆으로 올리는 미소로는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즘 여성들에게 눈가 주름은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주름을 없애주는 주사를 맞기도 하죠.
그런데 어쩌면 이 주사가 주름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미소도 없애고 결국 미소를 지을 좋은 상황까지
다 없애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까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