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8일 첫눈이 내리다.
단샤리(斷捨離)
끊고 버리고 이별하고... 충만한 제2의 인생을 연다.
최근 일본 사회에 불고 있는 단샤리 열풍
일상에서 필요 없는 것을 끊고, 버리고, 이별하자는 나름의 실천법이다.
그러나 단샤리는 단순히 신변의 물건을 정리하는 뺄셈의 정리기술은 아니다.
소유나 집착과 이별함으로써 마음의 여유공간을 마련한다는 덧셈의 철학이다.
보다 행복한 노년을 위해 일본의 50대는 단샤리에서 길을 찾고 있다.
- KBS파노라마 은퇴, 그 후 2부작-2부: 노후난민! 일본, 50代가 흔들린다
- 강창희 지음『당신의 노후는 당신의 부모와 다르다』에서 -
"준비 없이 오래 사는 것은 재앙이다!"
"100세 시대는 오직 준비된 자에게만 천국이다!"
정년 후 80,000시간, 인생설계서를 다시 써라!
강창희 대한민국 최고의 노후설계 전문가
미래와금융 연구포럼 대표, 미래에셋 부회장 겸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장을 역임했다. 활발한 강의와 연구활동을 통해, 젊은이에서 중장년층에 이르기까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이들에게 노후준비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서울대학교 농경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시샤대학 상학연구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서강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 1973년 증권선물거래소에 입사해 대우증권 상무와 도쿄 사무소장, 현대투신운용과 굿모닝투신운용 사장을 거친 국내 금융투자업게의 산 증인이다. 이후 미래에셋으로 자리를 옮겨 약 10여 년간 노후 관련 교육과 100세 시대에 적합한 인생설계를 설파해왔다.
업계에서 '여의도의 소맹자(小孟子)'로 불릴 만큼, 항상 책을 가까이 하고 자신의 분야를 꾸준히 연구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년에 무려 300회 이상의 강연을 소화하는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경험과 이론을 두루 갖춘 '100세 시대 인생설계'의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직장인들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정년'이다.
앞으로 직장인들은 살면서 세 번의 정년을 맞이하게 된다.
첫 번째 정년은 타인(또는 회사)이 정년을 결정하는 고용 정년,
두 번째 정년은 자기 스스로 정하는 일의 정년,
세 번째 정년은 신神의 뜻에 따라 세상을 떠나는 인생 정년이다.
평생 현역? 먼저 체면부터 버려라
가장 중요한 삶의 경쟁력 중 하나가 오래 일하는 것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오래 일하면 삶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고, 돈을 벌어 노후자금에 대한 부담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을 보면, 오래 일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조건이나 나이가 아니라 '체면'인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른 사람들일수록 사정은 더욱 만만치 않다. 대기업의 고위직으로 일하다 돌아가신 분의 자제와 대화를 하다 보니, 퇴직 후 고인이 심정적으로 가장 불편해했던 것은 '자동차와 운전기사'가 사라진 것이었다고 한다. 알게 모르게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를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처럼 사람은 지위가 높은나 낮으나 체면을 중요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준비되지 않은 30~40년'을 살아야 하는 시기에는, 체면을 어떻게 잘 버리는지가 개인의 경쟁력을 크게 좌우할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모모세 히로시 사장을 만나면서부터였다. 모모세 사장은 1933년생으로 1980년대 일본에 근무하던 시절 만나 인생의 멘토로 삼게 된 분이다. 그는 일본의 준대형증권사에서 기업금융 부사장까지 오른 후, 계열사의 벤처캐피털 사장까지 역임했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고문으로 일하며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장까지 올랐던 사람이니 고문으로 일하는 게 아니냐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맞는 얘기다. 하지만 사장으로 일한 사람이라도 모모세 사장처럼 80세가 넘는 나이에 자신의 분야에서 현역으로 활약하는 사람은 일본에서도 매우 드문 편이다. 그가 오래 일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나의 질문에 모모세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재취업한 회사에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젊은 경영진들이 보내는 경계의 눈빛이었습니다. 그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제 인맥이나 경험을 통해 해결해주면 고마워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저를 더 경계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태도가 너무나 섭섭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무능력이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저 사람이 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을 갖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제 공적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고, 가급적 그들이 경계심을 품지 않도록 소리 없이 도와주려 노력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전 직장에서는 자료작성은 물론 스케줄 관리까지 모두 부하직원이 해주고 저는 회의를 주재하거나 사람 만나는 일만 했는데, 새로운 회사에서는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않으면 제가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기보다는 장애물로 비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요."
나는 모모세 사장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았다.
첫째, 후배들에게 경쟁자로 비치지 말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것.
둘째, 체면을 버릴 것.
사실 첫째와 둘째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위계질서가 강하고 연장자를 우대하는 분위기인 우리나라나 일본 같은 경우, 한번 후배는 영원한 후배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모든 조직은 살아 있는 생물과 같아서 신진대사가 일어나기 때문에, 일정 시점이 되면 핵심 업무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예전에 잘나가던 시절만 생각하고 일을 하면, 후배들은 그 사람을 자연스레 경쟁자로 인식하게 된다. 경쟁자로 인식되는 순간,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오래 일하기 위해서는 체면을 버리고 도움을 주는 존재, 경쟁자가 아닌 응원을 해주는 존재로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한다.
체면을 버리는 것은 나이 든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체면을 버리는 것은, 어쩌면 노년 세대보다 젊은 세대에게 더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 어느 교회 목사님이 쓴 책에서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다. 하루는 젊은 청년 한 사람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목사님을 찾아와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의 이야기인즉슨, 청년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자랐다고 했다. 하지만 청년은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의 명문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에 다니면서 자신이 가난에 시달리며 살아온 것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운동권의 일원이 되어 적극적인 투쟁에 나섰고, 결과는 징역살이로 돌아왔다.
사정이 이렇다고 이 청년의 삶이 마냥 우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얼굴 예쁘고 마음씨 착한 여자와 사랑에 빠져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다. 청년은 가진 것이라고는 가난뿐인 자신과 결혼해주기로 한 아내가 정말 고맙고 미안했다. 신부를 위해 결혼만큼은 격식을 갖춰하고 싶었던 그는, 신문광고를 보고 사채를 빌렸다. 그 돈으로 결혼식도 올리고 제법 어울리는 신방도 꾸몄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불안정한 영업사원의 수입으로는 원금은 고사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고이율의 이자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자를 못 내게 되자 사채업자와 연계된 조직 폭력배의 협박이 시작되었다. 청년은 자신에 대한 협박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지만, 갓 결혼한 아내를 해치겠다는 통첩까지 받고 나니 너무도 무섭고 괴로웠다고 한다. 결국 고심 끝에 식은땀을 흘리며 목사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는 자신을 교회의 구제 대상에 포함시켜 빚을 대신 갚아주면, 평생에 걸쳐 반드시 이자까지 교회에 되갚겠노라고 간곡한 부탁을 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간청과 달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만약 당신의 나이가 50대 말이거나 60대라면, 딱한 사정을 교회 안건으로 올려보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20대 청년입니다. 젊은 나이에 자신이 저지른 경제적 잘못을 타인의 도움으로 손쉽게 해결하려하면, 평생 경제적 의타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젊은 나이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성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아내에게 가서 사채로 결혼식을 올리고 신방을 꾸민 사실을 고백하십시오. 지금 살고 있는 신방의 전세금과 돈이 될 만한 가재도구를 처분해 빚을 갚으십시오.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잠잘 곳을 구하지 못하면, 제가 책임지고 교회 공간의 일부를 합판으로 막아 제공하겠습니다. 거기서 주무십시오. 먹을 것이 없으면 저희 집에서 하루 세 끼 저와 함께 식사를 합시다. 숙식에 관해서는 제가 책임지고 돕겠습니다. 단 돈 문제만은 당신 스스로 해결하십시오."
청년은 목사님의 얘기에 전혀 반박하거나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청년은 그 길로 아내에게 달려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전세금을 빼서 빚의 일부를 갚은 뒤, 아내와 함께 서울 근교 농가의 토방을 얻었다. 부채로 시작한, 분수에 넘친 신혼살림을 남의 도움으로 유지하려 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경제적 상황에 비로소 자신을 맞춘 것이다. 청년은 그 토방에서 서울을 오가며 자동차 정체 구간에서 뻥튀기나 오징어를 들고 파는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몸이 으스러지게 일한 끝에 몇 년 지나지 않아 빚을 전부 청산했다고 한다.
이 청년이 곤경에 빠진 것은 바로 체면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남의 눈을 의식한 것이다. 물론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체면을 따지고, 남의 눈을 의식하고, 그것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성인成人으로 영영 바로 설 수 없다. 성인임을 나타내는 표식이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립이라면, 진정한 어른이 되는 길은 체면을 버리고 자신의 상황에 맞게 독립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것이다.
체면을 버리는 것은 최고의 경쟁력이다
평생 현역으로 살기 위해 체면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 계기가 또 하나 있다. 1975년 신입사원 시절, 일본 동경증권거래소에 파견되어 연수를 받을 때였다. 당시 일본 전체 인구 중에서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8%대로, 현재 우리나라(11%)의 비중보다 낮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 노인들은 이미 체면을 버리고 일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연수기간 중 증권 보관기관을 방문한 날이었다. 주시과 채권을 보관하는 시설을 견학하다 놀라운 광경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족히 70세는 되었을 것 같은 노인 100여 명이 둘러앉아 증권을 세거나 분류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IT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아서 수작업이 필요하던 시절이었는데, 저 정도 나이 든 분들이 그런 일을 하다니 한국에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대체 저 노인들은 과거에 어떤 일을 했던 사람들이기에 여기서 일을 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안내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저분들이 지금은 증권을 새고 있지만, 젊었을 때는 공무원이나 기업체 간부로 일했던 분들입니다."라는 게 아닌가.
그들이 받는 보수는 시간당 500엔, 우리 돈으로 6,000원 정도였다. 아주 적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현역 시절 받던 보수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액수일 터, 이 광경은 나중에 내가 은퇴 분야를 공부하는 내내 잊히지 않는 모습이었다.
또 다른 경험도 있다. 당시 비즈니스 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하루 일과가 끝나고 저녁 때 호텔에 돌아가면, 낮 시간에 프런트에서 일하던 젊은 여성들은 모두 퇴근하고, 나이 든 할아버지들이 밤 당번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의 경험은 내 인생에도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나이가 들어서까지 일을 하려면, 좋은 일은 젊은 사람에게 양보하고 허드렛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다. 허드렛일이라는 표현이 조금은 불편하게 들린다면, 눈높이를 낮춘다는 말로 바꾸어보자.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언제나 중심에 서서 일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이 '메인'이 되는 일을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다 해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눈높이를 낮추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다행스럽게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 사회의 분위기도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다. 체면을 버리고 허드렛일이라도 하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은퇴와 투자>라는 잡지에서 남이섬에서 환경 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는 71세의 전직 교장 선생님을 소개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남이섬에는 하루 1만 명 정도의 관광객이 드나드는데, 이들이 버린 쓰레기를 4명의 미화원이 치운다고 한다. 이렇게 힘든 일을 하고 월 100만 원 정도를 받는데다 교장에 비해 대접을 덜 받는 직업일지 모르지만, 그분이 느끼는 자부심은 예전과 똑같다고 했다. 그 전직 교장 선생님은 일하는 즐거움과 환경을 가꾸는 보람을 안고 일터로 향하는 자신을, '행복한 미화원'이라고 소개했다. 그 밖에 지하철 택배 일을 하는 전직 무역회사 사장과 리서치 회사의 전문 조사요원으로 일하는 전직 대기업 간부 등, 체면을 버리고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당당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앞서 말한 전직 교장 선생님은 일하는 데 가장 장애물이 되는 것은 고된 일이 이나라 예전에 함께 일하던동료들의 눈길이라고 했다. 간혹 다른 교장 선생님들로부터 왜 그런 일을 하느냐는 항의전화가 걸려온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는 아무리 세상에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해도, 남의 일에 필요 이상으로 간섭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하지만 후배들에게 내가 하던 일을 물려주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마당에, 귀하고 천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직업에는 본래 귀천이 없는 법이지만, 후반 인생일수록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늘어난 인생을 준비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 아닐까?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볼 때, 노후에 일을 꼭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똑같은 노후자금을 갖고 있더라도, 일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크다. 소일거리라도 하는 사람은 마음이 덜 불안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쓸데없이 욕심을 내거나 겁을 내기 마련이다. 자신의 일에 전념하며 현명하게 수입을 관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라도, 평생 현역이야말로 최고의 노후 대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과 같은 저금리 시대에는 한 달에 50만 원만 벌어도, 은행에 2억 원의 정기예금을 넣어둔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발휘한다. 정기예금 2억 원을 모은다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인가. 월 50만 원의 근로소득이 2억 원의 정기예금과 같은 효과임을 감안한다면, 평생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기에, 체면을 버리고 어떤 일이든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나만의 주특기를 가져라
퇴직자를 채용하려는 회사는 그 사람이 과거에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었느냐보다는, 어떤 일을 잘할 수 있는냐를 중요하게 여기는 법이다. 따라서 재취업을 한다고 무작정 동분서주해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그에 맞는 직장과 업종을 정해 효율적인 구직활동을 해야 한다. 마땅히 내 세울 만한 주특기가 없는 경우에는, 성급하게 취업자리를 알아보기 전에 주특기를 만들 수 있도록 재교육을 받을 각오라도 해야 한다.
삼성물산에서 방수 마스터로 일하는 61세의 강철희 씨는 퇴직 후 소일거리를 찾는 동년배들과 달리, 자기만의 '주특기'를 살려 오히려 대기업에 스카우트된 경우다. 삼성물산은 시공 기술력 향상을 위해, 우수 기능인력을 직접 확보해 주도적으로 품질을 개선하겠다는 취지로 2006년 11월부터 기능 마스터 제도를 도입했다. 지금까지 20개 공조에 140여 명의 마스터를 채용했는데, 55세 이상이 40% 정도고, 60세 이상도 여러 명이라고 한다.
강철희 씨는 방수 전문 건설업체에서 30년 넘게 경험을 쌓은 베테량이다. 그는 모두 3D 업종이라고 기피하는 분야임에도, 새로운 방수기술을 시공현장에 적용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덕분에 삼성의 기능 마스터로 스카우트되었다.
뛰어난 기술을 갖추긴 했지만, 그 역시 마스터 업무에 적응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관리와 현장의 가교 역할에 필요한 행정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30년 넘게 현장에서만 일한 탓에,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고, 결국에는 몇 달 동안 밤새워 공부한 후에야 겨우 행정업무를 터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회사에 기여하고 있음을 실감할 때, 말할 수 없는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주위의 고학력자 친구들이 대부분 퇴직해 놀고 있는데, 상당 기간은 더 일할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축복이라고 덧붙인다.
그가 새로운 회사에 들어가서 자신의 주특기만 믿고 으스댔다면 지금쯤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직장인이 정년 후에도 어느 저어도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일을 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하나는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주특기를 갖는 것이고, 하나는 주위의 시선이나 평판을 의식하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수십 년간 현장에서 터득한 전문 기술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그를 보면서, 가장 확실한 노후 대비는 평생 현역임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주특기를 잘 드러내라
가끔 퇴직자들이 취직자리를 소개해달라며 부탁해올 때가 있다. 그런데 정작 이력서를 살펴보면 어떤 일을 담당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을 정도로, 내용이 부실한 경우가 적지 않다. 자신의 주특기나 담당했던 업무는 물론, 맡은 일의 성과 등을 자세하게 기록해야 하는데 말이다. 채용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재취업자일수록 전 직장에서 이룬 성과 이상을 해낼 수 있는지를 면밀히 검토할 수밖에 없다.
구자삼 수원과학대학교 교수야말로 재취업을 대비해 갈고닦은 이력을 성공적으로 어필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물론 말처럼 쉽게 된 것은 아니다. 구 교수는 증권사 런던 지점장, 국제 본부장, 자산운용사 대표 등의 경력을 갖고 있었는데, 대학교수의 꿈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기 전에 3년 정도 탐색기를 거쳤다고 한다. 증권사의 국제금융분야와 자산운용사에서 일하던 그였지만, 후반 인생에 무엇을 해야 할지가 늘 고민이었다. 임원으로 재취업을 한다 해도 보통 2~3년으로 수명은 길지 않다. 그는 어느덧 50대 중반이 된 자신의 경쟁력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한 결과, 25년 이상 국제금융업계에서 일하면서 쌓은 국제적인 경험과 비즈니스 마인드, 영어 능력이 가장 큰 무기라는 결론을 내렸다. 현역 시절에 익힌 국제금융 지식과 중견 기업에서의 경험을 접목시키면, 대학 강단이나 경영 컨설팅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겠다고 착안한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금융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와 대학교수 임용 시 필요한 박사 학위에 도전하기로 했다. 55세의 나이에 시작한 공부가 만만치는 않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4년 만에 자신의 과거 경험을 체계화한 논문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무 경험이 있는 교수를 채용하는 대학이 늘어나는 추세에 힘입어, 우송 대학교를 거쳐 지금은 수원과학대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교수로 일하고 있다.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박사 학위를 취득해 대학교수에 도전한 데는 운도 따랐겠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강점을 바탕으로 그에 필요한 자격을 준비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작정 재취업에 도전하기보다 퇴직 후 이력서에 써넣을 주특기가 무엇인지, 경력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보자. 딱히 내세울 것이 없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지금분터라도 나아갈 방향을 정해 차근차근 준비해간다면, 준비된 자에게 기회는 얼마든지 찾아오게 되어 있다.
전 직장과 비교하지 마라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중소기업에 재취업하는 경우, 회사의 시스템이나 시설이 아무래도 미흡할 수밖에 없다. 큰 조직에서는 자기가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되겠지만, 작은 회사에서는 심한 경우 화장실 청소까지 이런저런 잡무를 해야 할 때도 적지 않다. 대기업의 시스템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그러한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하청을 주는 이유는, 중소기업이 효율성 면에서 대기업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전 직장과 함부로 비교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 더 유의할 점은 사소한 비용이라도 꼭 필요한 것인지 따져보고 지출하는 습관이다. 가족경영 기업의 효율성이 높은 가장 큰 이유는, 오너들이 회사 돈을 자기 돈처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대기업에서는 당연하게 지불하는 경비도 중소기업에서는 아끼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큰 조직에 근무하다 재취업한 경우라면, 물정 모르고 돈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금 하는 일에서 '최고'가 되자
금융업계에 몸담고 있어서인지 내게 재테크에 밝아서 얼마나 좋겠느냐며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간혹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40년 동안 증권업계에서 일하면서 재테크가 오히려 자신의 직업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숱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재테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IMF 이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환 위기 이후 구조조정이 일상화되면서, 사회는 양극화되고 정년은 짧아지고 노후는 길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불안 요소 등을 해소하고자 재테크에 열심인 직장인들이 많은데, 결과만 놓고 보면 재테크는 커녕 자기 일에서도 성공을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다.
사장으로 일할 때 사무실을 한 바퀴 쭉 돌다 보면, 내가 지나가는 순간에 컴퓨터를 급하게 끄는 친구들이 있다. 대개 둘 중 하나다. 야한 사진을 보고 있거나, 주식을 하고 있거나, 당연한 결과겠지만 그러한 친구들 중에 승진이 빠른 사람은 거의 없다.
직장인이라면 재테크로 돈을 불리기보다, 돈 버는 능력을 지닌 자기 자신도 운용자산의 일부라는 생각을 확고히 해야 한다. 현재 및 장래에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을 현재 가치로 평가한 것을 '인적자산'이라 한다면, 개인의 운용자산은 이 인적자산과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좁은 의미의 운용자산을 합친 것이다. 직장인은 자신의 능력, 즉 인적자산의 대가로 급여와 보너스를 받는다. 다시 말해 지금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은 그만큼의 수입을 발생시키는 금융자산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직장인이라면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곧바로 같은 직업을 찾아 현재 수준에 못지않은 돈을 벌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투자에도 성공할 자질이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인적자산)에게 투자해 일류로 거듭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스스로 능력을 키워 좀 더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있도록, 쉬지 않고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투자의 왕도임을 명심하자.
다만 이때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몸값을 높이는 방법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별 탈 없이 직장생활을 하고 퇴직하는 것이 최고였다면, 이제 직장에서 안정적인 삶을 누리는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샐러리맨에게는 분명 위기의 시대다.
이어령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샐러리맨의 위기는 지식사회로 이행하는 문명사적 전환의 결과'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문명사적 전환이 샐러리맨들의 삶에 불안정성을 증폭시키는 지금, 직장인들은 어떻게 자신의 가치를 높이며 살아야 할까? 나는 후배들에게 자신의 몸값을 높이라는 이야기를 할 때면, 이어령 교수의 조언을 빌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준다.
먼저 조직에서 '오직 한 사람(only one)'이 되어야 한다. 가끔 "그래봤자 회사원이지 뭐."라며 자기 스스로 가치를 떨어뜨리는 이들이 있는데, 회사원도 잘만 하면 전문직보다 훨씬 나을 수 있다. 물론 경제적인 대가가 전부는 아니지만, 수십억 원의 스톡옵션이나 고액 연봉을 받으며 회사에 다니는 이들을 생각해보라.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은 아니더라도, 조직 내에서 나 아니면 못하는 일을 한다면 회사원도 전문가가 될 수 있다.
둘째, 자기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문직이든, 샐러리맨이든 수천 명 중에서 자기 자신을 확실히 차별화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회사원은 사원 누구, 과장 누구, 부장 누구로 기억될 것이 아니라, 김갑돌이면 김갑돌, 김삼순이면 김삼순이라는 이름 석 자로 기억돼야 한다. 회사 이름보다 이름 석 자가 더 유명한 '브랜드 직원'은 구조조정에서도 절대 감원 대상이 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브랜드로 만들려면 윗사람에게 충성을 발휘하기보다, 자신의 일에 대해 남다른 로열티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자기 특허 혹은 지적 재산권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곧 회사를 자신의 파트너로 삼는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한다. 회사에 소속되어 월급을 받더라도, 회사에 많은 돈을 벌어주는 파트너가 된다면 아무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이런 지적 재산권을 하나쯤 갖고 있는 샐러리맨은, 감원이라는 냉혹한 현실에서 자신을 보호해줄 보험을 들어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듭 말하지만, 직장인의 가장 큰 재산은 "나는 현재 하고 있는 일에서 얻는 수입으로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이 재산을 일순위로 생각지 못하고 재테크에 매달리다 보면, 결국 돈도 일도 잃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자녀, 투자인가 비용인가
행복한 후반 인생을 위해서는,
의식을 개혁할 만큼 남다른 각오가 필요하다.
그 의식 개혁의 중심에 존재하는 것이 자녀 리스크다.
자녀 리스크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독립적인 자녀로 키우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인생 2막을 결정짓는 중요한 열쇠일 것이다.
부모의 품으로 귀환하는 자녀들
강의를 하면서 만나는 중장년층의 고민을 들어보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똑같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늘어난 인생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는 있지만, 하나같이 저축을 하거나 투자할 여유가 없다고들 한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녀의 교육비다. 사교육비 문제가 사회 문제로 공론화된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건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이렇다 할 묘안은 없어 보인다.
교육비는 고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한번 나가기 시작하면 좀처럼 줄이기 어렵다. 불안 심리도 어느 정도 작용한다. 옆집 누구누구가 어느 학원에 다녀서 성적이 올랐다면, 괜한 불안감에 휩싸인다. 우리 애만 뒤처지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가계 경제가 골병이 드는 걸 알면서도, 너도나도 사교육 경쟁이라는 폭주 기관차에 올라타게 되는 이유다. 부모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평균수명이 늘어난 시대에는, 좋은 부모, 좋은 자식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부터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좋은 부모란 자식들에게 모든 걸 베풀어주고, 자녀가 사회에 나가서 경쟁에 뒤처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해주는 부모를 의미했다. 물론 수명이 60~70세인 시대에는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이 100세 시대에는 몸에 맞지 않은 옷처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 이상 자녀는 부모를 책임질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런 소득 없이 지내야 하는 노년기에 접어들면, 부모는 그동안 자식에게 베풀었던 사랑을 돌려받기를 원하게 된다. 아무리 사랑으로 키웠다 해도, 어느 정도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다. 그러나 문제는 자녀들의 형편이 만만치 않다는 것, 지금의 중장년층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의 자녀들이 돈을 벌어 부모를 모시기란 더더욱 쉽지 않다. 아니, 어쩌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언젠가 노후설계와 관련된 일본 서적을 읽다가 '자녀 리스크'라는 단어를 보게 되었다. '아니,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어째서 리스크가 된단 말인가?' 하늘 마음에, 저절로 관심을 갖고 꼼꼼히 읽어보았다.
내용인즉슨 아무리 크게 성공해 많은 돈을 벌었다 해도, 자식들을 돕느라 노후에 큰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예를 들어 결혼한 자녀가 갑자기 찾아와 신용불량자가 되게 생겼으니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자녀가 클수록 원하는 자금의 규모가 커지기에, 그만큼 리스크도 커질 수밖에 없다. 이는 비단 일본의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성인이 되면 부모 곁을 떠나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미국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혼이나 재정상의 이유로 부모에게 돌아오는 자녀들이 미국 베이비부머세대의 노후에 걸림돌이되고 있다니 말이다. 한마디로 부모의 품으로 '귀환하는 자녀들'이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 노부부가 노후자금으로 간신히 약간의 돈을 마련해두었더니 아들이나 사위가 와서 도움을 청한다. 부모 입장에서 무작정 외면할 수 없는 노릇, 평생 아끼고 아껴서 모은 돈을 사업자금으로 다 내어주고 노부부가 지하 쪽방에 사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이야기는,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다음은 어느 지방 도시에 강의하러 갔다가 복지담장 공무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요즘은 자식 없는 노인들이 차라리 속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몸이 불편하고 생활이 어려운데 자식이 없는 분들은 괜찮은 요양시설에 들어갈 수 있고, 정부로부터 지원금도 받기 때문에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 문제는 꼭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인데도 자식이 있어서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을 도와드리려고 조사해보면 자식들이 부모 명의로 외제차를 구입한 뒤 할부금을 갚지 않는다거나, 부모 명의로 사업자 등록을 내어 사업을 하다 실패해서 잠적해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도와드리고 싶어도 도무지 방법이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독거노인들의 죽음을 알리는 뉴스는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다. 고독사孤獨死가 아니라 고독생孤獨生이 문제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자식들에게 부양을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꿈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우리보다 비교적 일찍 고령화 시대에 대비해온 일본에서도, 굶어죽는 노인들이 있다고 한다. 얼마 전 일본 규슈에서는 "주먹밥 한번 배부르게 먹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 노인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연인즉슨 나이가 들어 몸이 불편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노인이 구청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담당 공무원이 서류를 살펴보고는 아들이 있으니 아들에게 도움을 청하라며 거절한 것, 하지만 정작 아들은 어디에 있는지 연락도 닿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노인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자녀, 어디까지 도와줘야 할까?
이처럼 냉혹한 현실을 알면서도, 내 자식만은 어떻게든 끝까지 책임져야겠다는 것이 부모들의 속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5060세대 648만 가주 중세서 60%에 가까운 381만 가구가 은퇴 빈곤층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말하는 은퇴 빈곤층이란 부부가 월 94만 원 이하의 돈으로 생활해야 하는 가정을 말한다. 은퇴 빈곤층으로 전락할 위험률이 이렇게 높은 것은 수명 연장, 금리 저하, 조기퇴직 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녀 교육비와 결혼비용의 과다 지출 때문으로 나타났다. 국제적으로 비교한 통제가 있지는 않으나, 세계 주요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처럼 분에 넘치게 자녀 교육비와 결혼비용을 지출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와 일본은 대학 등록금은 부모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미국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부모들이 대학 등록금은 본인들이 융자를 받아서 내고 취직 후에 갚아나갈 거라 믿는다
결혼비용이라는 측면에서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생각이 또 다르다. 일본의 젊은 세대는 부모가 결혼비용을 대줄 거라고 생각지 않는다. 약간이라도 도움을 받으려 할 때도,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 어떻게 조금이라도 도와주실 수 없겠냐는 식으로 도움을 청한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결혼비용도 부모가 거의 책임져줄 거라고 믿는다.
|표1| 자녀 교육비 · 결혼비용비 노후생활에 미치는 영향
현재 | 지금처럼 결혼비용을 대줄 경우 |
5060세대 648만 가구 중에서 271만 가구 (42%)가 은퇴 빈곤층으로 전락할 수 있다 |
추가로 많게는 110만 가구(17%)가 은퇴 빈곤층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
출처: 미래에셋은퇴연구소
문제는 이러한 비용이 부모의 노후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가 55세 이상 퇴직자 500명을 대상으로 퇴직자의 생활실태를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충분한 준비 없이 퇴직해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는 응답이 전체의 60%를 차지했다. 은퇴를 준비하지 못한 이유로는 '자녀 교육비' 때문이라는 답변이 60%로 가장 많았다. 과다한 교육비 지출로 미쳐 노후자금을 챙기지 못한 우리나라 가정의 현실이 조사결과에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결혼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중산층 가정에서 결혼비용으로 쓰는 돈은 아들일 경우 8,300만 원, 딸의 경우에는 3,500만 원이나 든다고 한다. 아들만 둘이라면 무려 1억 6,000만 원이나 든다는 계산이다. 전국 평균이 이 정도라면 수도권 가정에서는 훨씬 더 많은 돈을 쓰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바로 자녀 리스크의 생생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안타깝게도 자녀 리스크를 줄이지 않고서 즐거운 인생 2막을 맞이하기란 요원하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자녀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무리하게 사교육을 시켜 일류 대학에 보내려 할 게 아니라, 자녀가 성인이 된 후 확실하게 자립할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올바른 경제교육을 시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표2| 자녀 1인당 결혼비용
아들 | 띨 | |
저소득층 | 6,000만 원 | 2,600만 원 |
중산층 | 8,300만 원 | 3,500만 원 |
고소득층 | 1억 3,500만 원 | 5,800만 원 |
출처 : 미래에셋은퇴연구소
그러나 간간이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적지 않은 부모들이 이와는 사뭇 다른 길로 가는 것 같다. 소위 일류 대학으로 분류되는 한 대학 관계자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학교의 수강신청 시즌이 되면 자녀들을 대신해 수강신청을 하는 엄마들이 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어떻게 알았는지 꼭 좋은 학점을 받기 쉬운 과목들만 신청한다는 것이다. 학점이 좋아야 나중에 취업이 잘되기 때문이라나.
엄청난 사교육을 받아 일류 대학에 가고, 엄마가 수강신청을 해준 과목에서 높은 학점을 받아서 일류 직장에 들어간다고 치자, 과연 그 학생의 삶은 무조건 행복할까?
성인이 성인으로 대접을 받으려면, 경제적 독립과 더불어 사고의 독립이 필요하다.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하려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람과 관계를 맺는 능력도 중요하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동물이기에, 어찌 보면 인간관계나 협력과 같은 태도가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2009년 국제교육협의회IEA가 전 세계 중학생ㅇ를 대상으로 실시한 '사회적 상호작용 역량 지표'를 보면 , 자녀를 제대로 키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상호작용 역량 지표는, 조사 대상 36개국 중에서 35위에 머물러 거의 꼴찌를 차지했다. 특히 '관계 지향성'과 '사회적 협력' 부문에서는 0점을 받아 최하위를 기록했을 정도라니, 더불어 사는 능력이 크게 부족하다는 얘기다. 한편 '지적인 영역'에서는 핀란드와 중국에 이어 3위를 차지한 것이 눈에 띄었다. 조사결과에 보면 지적인 능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지만,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갖는 능력이나 배려심, 그리고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능력이 크게 부족함을 알 수 있다.
일단은 무엇보다 자녀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무리하게 사교육을 시켜서라도 일단 대학만 보내면, 좋은 직장에 취직해 정년까지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다. 게다가 '사士'자가 붙는 시험에 합격이라도 하면, 앞날은 말 그대로 탄탄대로 였다. 분에 넘치는 사교육비를 들였다 해도, 속된 말로 그만큼 '본전'을 뽑을 수 있었다. 시험만 잘 보면 평생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모든 것이 달라졌다. 평생직장의 시대는 붕괴된 지 오래고, 앞으로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이다. 심지어 사법시험에 합격해도 취직을 못하는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얼마 전 어느 지자체에서 변호사를 7급 공무원으로 선발하겠다고 발표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과거에 변호사가 정부 부처나 지자체에서 5급 사무관으로 채용된 것이 관행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어령 교수는 "이제 일반 직장인들도 자영업자와 같은 자세로 일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 다소 학교 공부에 소질어 없었다 하더라도 창의력, 희생정신, 도전정신, 문제해결 능력을 갖춘 사람이 인정받는 시대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부 부모들은, 자녀들을 '시험 잘 보는 기계'로 만드는 데만 집착하는 것 같다.
행복한 후반 인생을 위해서는, 의식을 개혁할 만큼 남다른 각오가 필요하다. 그 의식 개혁의 중심에 존재하는 것이 자녀 리스크다. 자녀 리스크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독립적인 자녀로 키우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인생 2막을 결정짓는 열쇠일 것이다.
좋은 부모에 대한 생각을 바꿔라
언젠가 일본의 시사지 <아레나ARENA>에서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조금은 자극적인 제목의 이 기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기사는 부모와 자식간의 서글프지만 냉정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자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부모, 다시 말해 사랑과 화목이 넘치는 이상적인 가족을 결정짓는 것은 안타깝게도 '돈'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연금'이다. 일본의 저명한 가족사회학자인 쥬오대학의 야마다 마사히로 교수는 이 기사에서 "오늘날 고령화 사회에서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는 돈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가족관계가 '돈'이라는 변수에 의해 좌우된다는 얘기다.
기사에 의하면, 고령화에 따른 새로운 가족관계에서는 노인의 유형이 다음의 네 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사랑받는 노인, 연금 패러사이트, 독거노인, 무연사無緣死 예비군이다.
사랑받는 노인은 부모가 돈이 있고, 자식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경우다. 부모가 모아둔 돈으로 언제든지 유로 노인요양시설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자녀의 부담이 적다.
연금 패러사이트는 '기생한다parasite'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부모는 돈이 있지만 자녀는 돈이 없는 경우다. 부모가 꼬박꼬박 연금을 받기 때문에, 돈이 없는 자녀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부모에게 기대어 산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 문제가 된 적이 있는데, 연금을 받는 부모가 사망해도 사망신고를 하지 않는 자식들이 있다고 한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연금을 계속 받기 위해서다. 일본에서 120세, 130세의 연금 수령자가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런 배경 때문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자녀와의 관계가 유지되는 부모의 조건이다.
'사랑받는 노인'이나 '연금 패러사이트'에 해당되지 않는 두가지 유형은, '독거노인'이나 '무연사 예비군'으로 분류된다. 독거노인은 자녀들이 부모를 귀찮은 존재로 여기고 부모도 뭐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자진해서 혼자 사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마지막 유형인 '무연사 예비군'은 경제적으로 쪼들리다가 자녀와의 인연이 끊어지는 상황을 뜻한다. 이 기사의 말미에는 어느 할머니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는데, 그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가족관계가 돈으로 좌우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부터는 노인들도 가족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기보다 조금씩 자립심을 키워나가는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할머니의 이야기는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이제껏 자녀와 굳건하게 쌓아온 사랑과 신뢰의 방정식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전통적인 가족관계는 부모가 자녀의 양육을 책임지고, 부모의 노후는 자녀가 책임을 지는 형태였다. 즉 사랑과 효孝에 기반한 부양 시스템인 셈이다. 연금제도도 모양만 다를 뿐, 효를 사회적으로 확장한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일하는 사람들이 낸 세금을 노인들을 부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균수명이 증가할 경우 지금까지의 부양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방식으로 자녀를 바라보기보다. 100세 시대의 눈높이에서 자녀와의 관계를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노노상속, 어째서 문제인가
명절이면 간혹 상속 문제를 놓고 가족끼리 다투다 물의를 일으킨 사건들이 보도되곤 한다. 예전에는 부모님의 재산을 놓고 형제들끼리 싸우는 일이 많았다면, 요즘에는 재산을 물려주는 시기를 두고 부모자식 간에 첨예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듯하다. 아마 목돈이 꼭 필요한 시기에 재산을 조금이라도 더 일찍 물려주었으면 하는 것이 자식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노노老老 상속'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불거진 문제다. 얼마 전 일본인 친구의 이야기를 듣자 하니, 우리보다 훨씬 일찍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일본에서는 노노老老 상속이 커다란 사회문제로 불거진 모양이다. 노노상속이란 말 그대로 노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갖고 있던 재산을 젊은이가 아닌 노인에게 상속하는 것을 말한다.
친구의 큰어머니는 92세라면 일본인의 평균수명을 생각할 때 특별히 오래 살았다고도 볼 수 없는 나이다. 배우자 또한 비슷한 나이일 것이고, 자녀들도 젊어야 50대 후반이나 환갑을 넘긴 나이일 것이다. 즉 노인이 갖고 있던 재산이 곧 노인이 될 자식에게 돌아가는 현상인데, 어째서 이게 사회문제가 된다는 것일까?
이럴 경우 돈이 노인들 수중에서만 돌고 경제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젊은 세대에게 흘러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미래지향적인 벤처 비즈니스가 활성화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것이다. 일본의 오랜 경제불황 역시 마찬가지다. 돈을 쓰지 않는 부자 노인과 돈이 없어 소비하지 못하는 가난한 젊은 세대로 나뉘어진, 이중적인 사회구조가 장기 불황을 불러왔다는 분석이다.
오늘날 일본 전체 가계금융자산의 70% 정도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60세 이상의 노인 세대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100세까지 살아야 하는 시대에 돈이 없으면 노후에 고생할 거라는 불안감 때문에, 현금이 많아도 쓰지 않고 움켜쥐고만 있다. 본인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 물려주지도 않거니와, 생산성 있는 곳에 투자도 하지 않는다. 돈을 가진 세대가 소비도 하지 않고 투자에도 관심이 없으니, 경제가 활성화될 리 없다. 일본 정부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노인들 수중에서 잠자고 있는 돈이 젊은 세대에게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생전에 증여를 하거나, 자녀에게 집을 사 줄 경우 세제상의 혜택도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전체 가계금융자산에서 60세 이상의 고령 세대가 보유하고 있는 비율은 아직 30% 정도밖에 안 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710만 베이비부머가 고령 세대로 편입되는 시점이 되면, 이 비율은 50~60%로 급격하게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그때까지 이렇다 할 대책이 나오지 않거나, 고령 세대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한국판 노노상속도 더 이상 남의 이야기는 아니다.
자녀들에게 많든 적든 재산을 상속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부모라면, 그 재산을 언제 물려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100세에 세상을 떠나면서 70세가 다 된 자녀에게 상속을 한다면, 그 재산이 생산적인 곳에 쓰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자녀가 조금이라도 젊을 때, 자신의 몸값을 높이는 데 투자하거나 평소하고 싶었던 사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자녀의 장래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훨씬 더 바람직할 것이다.
자녀들의 인적자본이나 사업 투자에 도움을 주고 싶어도, 노부부가 몇 살까지 살지 또는 노후 생활비가 얼마나 들지 예측할 수 없어서 지원을 망설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우선, 현역 시절에 가입해둔 3층 연금(국민연금 · 퇴직연금 · 개인연금)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본 생활비 정도를 보장받을 수 있는지 계산해보자. 3층 연금으로 부족한 경우에는 즉시연금이나 주택연금으로 부족분을 보충할 수 있는지도 계산해보야 한다. 그러한 결과 이들 연금으로 기본 생활비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서면, 나머지 재산 중 일부는 안심하고 자녀들이 생산적인 투자를 하는 데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가 됐든 경제력을 보유한 고령 세대는 재산 상속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꾀해야 한다.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자신의 재산을 움켜쥐고만 있으면, 국가졍제를 불황에 빠뜨릴 뿐 아니라 불황의 여파는 다시 자신과 자녀들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자녀 리스크, 해답은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자녀'와 '리스크'는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지만, 나이가 들어서까지 자녀 뒷바라지에 어려움을 겪는 부모들을 보면 자녀가 후반 인생을 좌우하는 쟁점임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자녀 리스크를 줄이는 방법은 무엇일까? 먼저 자녀에게 제대로 된 경제교육을 시키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녀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경제교육을 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몇 번을 강조해도 지니치지 않다. 가능하다면 스스로 돈을 벌어볼 기회를 주는 것도 필요하다. 내가 아는 집은 대학생이 된 아이들에게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시켰더니, 아이가 돈 버는 게 얼마나 힘든지 실감했다며 그 후부터 알아서 돈을 아껴 쓴다고 했다.
또 한 가지 냉정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은 자녀 교육비와 노후자금의 상관관계다. 현재 4050 세대가 노후준비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과다한 사교육비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전에는 자식을 잘 키워놓으면 부모에 대한 효심에서 많든 적든 부모를 모시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장수 시대가 열리면서 더 이상 자깃에게 기대기는 어려워졌다. 노후는 둘째치고라도 그렇게 많은 돈은 학원과 학습지, 과외 등 사교육비로 쓰는 것이 과연 아이들의 장래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자녀교육, 자기만의 철학을 가져라
노후준비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제대로 된 후반 인생을 살려면 단순히 돈을 뛰어넘어 일종의 '의식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엄청난 고소득자가 아닌 다음에야 요즘처럼 아이들 교육에 많은 돈을 쏟아붓는다면, 노후자금 마련이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지금의 시대는 자녀교육와 노후준비가 플러스 게임이 아닌 제로섬 게임이 된 것 같다. 제로섬 게임에서는 어느 한쪽을 늘리면 다른 한쪽은 당연히 줄어들게 되어 있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려면 돈을 더 많이 벌면 되겠지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되는 일이던가.
나 역시 자식을 키워본 입장이기에 자식 문제만큼은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 번은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딸아이와 손자의 교육문제로 다툰 적도 있다.
딸아이가 평범한 직장인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영어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겠다는 것이 발단이었다. 아마도 친하게 지내는 이웃 엄마들이 영어 유치원에 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보면서 왠지 자신의 아이만 뒤쳐진다고 느낀 모양이다. 영어 유치원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자기만의 소신을 갖고 보내는 거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영어 유치원을 보낸다고 해서 애가 훌륭하게 클 거라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평범한 회사원이 매달 감당하기에는 엄청난 비용이 아닌가. 나는 부모가 왜 그리 자녀교육에 소신이 없느냐며, 그럴수록 배짱 좋게(?) 아이를 키워야 한다고 간곡히 딸을 설득했다. 결국 딸아이는 내 설득에 못 이겨 아이를 영어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후 이번에는 아이를 사립초등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나섰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교육환경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은 마음이야 십분 이해하지만, 다시 한 번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처음에는 원서를 넣어도 떨어질 거라고 해서 그냥 두었는데, 딸아이의 말과는 달리 덜컥 붙어버렸다. 그러나 딸아이는 기왕에 붙었으니 아이를 사립초등학교에 보내겠노라고 선언을 했다. 사위의 얼굴을 보니 뭐라고 말도 못하고 딸아이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한 번 총대를 멨다. 이번에는 도무지 말로는 설득이 되지 않아 무려 A4 용지 2장이 넘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뭐라고 썼는지 전부 기억나진 않지만, 내용을 요약해보면 대략 이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요즘처럼 직장인의 정년이 보장되지 않는 시대에는 남편의 어깨를 가볍게 해줘야 한다. 한번 커진 씀씀이는 좀처럼 줄이기 힘든 법이다. 게다가 교육비는 고정비 성격을 띠고 있어서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늘어나기 쉽다. 아이를 잘 가르치고 싶다는 명분과 마음이 있기 하지만, 부모 간에 보이지 않는 경쟁심리도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뚜렷한 교육철학도 없이, 이렇다 할 소신도 없이 무작정 사립학교에 보내서 돈을 많이 드는 지출 구조를 만들어놓으면 정작 어려울 때를 대비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딸아이는 울면서 서운해했지만, 지금은 정말 현명한 결정이었다며 오히려 내게 고마워하고 있다.
씀씀이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하자면, 한번 높아진 생활수준을 낮추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대우증권에서 국제 본부장으로 일할 때였다. 당시 능력 있는 직원들은 외국계 증권사로 스카우트되는게 관행이었다. 외국계 회사로 옮기면 연봉도 2~3배가량 파격적으로 오르는 게 대부분이었다. 얼핏 보면 매우 성공한 월급쟁이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외국계 증권사는 재직기간이 짧아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데 다시 국내 증권사로 들어오면 연봉이 대폭 줄어들기 때문에, 돈 때문에 이직을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터무니없이 적은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직접 목격한 바에 의하면, 연봉이 2~3배 늘어나면 누구나 비슷한 수순을 밟는다. 약속이나 한 듯이 호텔의 헬스클럽 회원권을 사고 자녀 교육비를 늘리고 골프를 치는 등 지출을 늘린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노후 등 미래에 대비한 저축을 늘리는 이는 거의 없다. 평소에는 돈이 생기면 저축을 해야지 하다가도, 돈을 보면 쓰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이렇게 지내다 국내 증권사로 자리를 옮기면, 생활수준을 낮춰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알다시피, 한번 늘린 지출이나 소비는 줄이가가 쉽지 않은 게 사람 마음 아닌가.
게다가 평생 고용의 시대에서 상시 고용의 시대로 바뀐 오늘날에는, 직장생활을 하다 잠시 쉬고 다시 취업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이렇게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시대에 교육비 등 고정 지출을 늘려놓으면, 노후는커녕 당장의 경제적 자유를 얻기도 힘들어진다.
직장인들은 험한 세상에서 살아간다. 본인의 능력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루아침에 구조조정을 당하기도 한다. 이런 시대에 자녀에게 지나치게 많은 투자를 하다가는, 정작 위기가 왔을 때 전혀 대처할 수 없다. 오히려 가족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만 커질 뿐이다. 자녀교육에 모든 자원을 투자하는 열혈 부모보다 자신만의 철학을 가진 소신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자녀교육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다음과 같은 두 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번째 사례는 내가 존경하는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다. 그 목사님의 둘째 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달 동안 영국 학교의 캠프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선생님이 아이의 총명함을 눈여겨보고는 1년 동안 전액 장학금으로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한 모양이다. 그는 아이를 영국에 보내는 대신 한 가지 약속을 했다고 한다.
"1년 뒤에 꼭 돌아와라. 만약 영국에 그대로 눌러앉겠다면 지금 안 가는 게 낫다. 엄마아빠의 철학은, 자식이 성년이 될 때까지는 부모밑에서 자라야 한다는 거야, 그보다 더 중요한 교육은 없단다. 약속할 수 있지?"
그런데 어느 날 국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고 한다. 이대로 공부를 시키면 세계적인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으니,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게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 목사님은 아이를 보내는 대신 정중한 거절의 의사를 전했다.
영국의 옥스퍼드라면 누구나 한 번쯤 보내고 싶은 대학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 목사님은 자신의 교육철학에 따라 아이를 다시 귀국시켰다. 아이는 한국에 돌아와 한 지방대를 다니다가, 다시 연변과학기술대에 들어갔다. 그것도 모자라 재학 중에 1년 간은 신장성의 우루무치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왔다. 그동안에 중국에 있는 조선족, 러시아에서 유학온 고려인 친구, 북한 유학생, 신장성 위그르족 등 여러 소수 민족과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 소중한 경험을 쌓았다. 과연 이 목사님의 이러한 결정이 아들의 미래를 망친 것일까?
또 다른 사람은 아침편지문화재단의 고도원 이사장이다. 나는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할까?'라는 주제로 이야기할 때마다 고도원 이사장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언젠가 읽은 그의 인터뷰에서 대단히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따금 속으로 묻는다. 나에게 책이 없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늘의 내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책은 곧 내 삶 자체다. 내 인생 전체다'라는 대목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런데 고 이사장은 어릴 적에는 마치 책이 '고문'의 대상 같았다고 한다. 시골 교회 목사였던 아버지가 강제로 책을 읽게 하고 밑줄을 긋게 했다는 것이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회초리를 들 만큼 엄한 아버지였기에, 고 이사장은 아버지에 대해 반항심을 갖는 건 물론 원망도 수없이 했다고 한다. 심지어 책을 볼 때마다 '원수'처럼 여길 정도였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고문과 같았던 책읽기와 밑줄 긋기가 어느덧 그의 평생 습관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강제 독서가 그를 글쟁이로, 언론인으로, 대통령 연설자로 만들었고,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든《고도원의 아침편지》를 쓰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과다한 자녀 교육비 때문에 정작 자신의 노후는 준비도 못했는데, 도움을 받기는커녕 자식들을 챙기느라 노후에 고생하는 이들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비슷한 나이의 친구나 동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오죽 못났으면 부모에게 손을 벌리느냐며 그 자식들을 탓하곤 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어려서부터 경제적으로 해줄 수 있는 여건 이상으로 무리해서 무엇이든 해주는 부모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노후 대비가 그러하겠지만, 자녀 리스크에서는 더더욱 의식 개혁에 가까운 각오가 필요하다. 건전한 경제교육을 통해 자녀의 자립심과 경쟁력을 키우는 한편, 교육비를 과감하게 구조조정해 노후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나는 30~40대 기혼 직장인들을 상대로 자녀 리스크와 관련된 강의를 할 때면, 반드시 다음과 같은 당부를 빼놓지 않는다. 가급적 부부가 함께 강의를 들으러 오라는 것이다. 이제는 부모도 '부모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녀들을 소신 있게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부부가 자녀교육에 대해 공통된 인식과 소신을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앞에 등장한 목사님의 사례와 고도원 이사장의 경험은 그러한 측면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자녀의 인생을 디자인하지 마라
하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자녀문제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강의를 들을 때는 과도한 사교육비가 노후준비의 걸림돌이라는 사실에 많은 분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다가도, 막상 강의가 끝나면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냐는 결론으로 돌아간다. 취지야 알겠지만, 그래도 우리 아이만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이처럼 지극정성으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많은 반면, 요즘 아이들은 왜 그렇게 나약한지 모르겠다며 푸념을 늘어놓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 회사에서도 새내기 직장인들을 두고 요즘 젊은이들은 과거보다 패기가 없다느니, 고생을 안 해봐서 조금만 힘들어도 못 참는다느니 하는 식의 평가를 자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자녀 혹은 후배들이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이 그들만의 잘못일까? 평가를 내리는 부모나 선배들은 본인들이 출중해서 지금처럼 자녀와 후배둘을 평가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들이 유독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런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들은 고생을 해서 성공했고 또 자녀가 고생하지 않아서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자기 자식만은 고생을 안 시키겠다는 이중적인 잣대다.
그런데 아리러니하게도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는 부모의 결심이 오히려 자녀들에게 독이 된다. 한국전쟁 이후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에서 단기간에 압축 성장을 한 우리나라와 달리, 부富의 역사가 오래된 사람들은 이런 점을 잘 알고 있기에, 부자일수록 자녀를 엄격하게 키우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환경에 따라 자녀교육의 트렌드도 바뀌는 법, 중국의 경우 인구정책상 아이를 적게 낳다 보니 한 명만 낳아서 그 아이에게 모든 걸 해주는 식으로 자녀교육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다. 우리나라 일은 아니지만 참으로 걱정스러운 사고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자녀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젊은 시절 강의를 들었던 대만의 석학 임어당 선생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임어당 선생이 쓴《생활의 발견》이라는 책은, 내가 학생이었을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필독서로 널리 읽혔던 책 중 하나다. 나 역시 책으로는 부족해 세계적 석학의 육성을 듣기 위해 시간을 내서 직접 강연장을 찾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중국에 어느 유명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청빈한 삶을 산 명재상이었습니디. 그런데 그 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사치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아무리 뛰어난 명재상도 아들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며 수군거렸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명재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농민의 아들이고, 내 아들은 재상의 아들이다. 농민의 아들인 나는 근검절약이 몸에 밴 게 당연하다. 그러나 내 아들은 재상의 아들이라 물질적으로 풍요하니 사치스러운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임어당 선생의얘기를 떠올릴 때마다 기성세대의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를 두고 편한 일만 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어려움에 맞서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과연 이런 지적이 타당한 것일까? 임어당 선생의 얘기처럼 지금의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보다 운 좋게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태어났고 자라났다. 기성세대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것이다. 따라서 무조건 자기 세대의 모든 것이 용서되는 교육방식으로는 명재상의 아들밖에 키워낼 수 없지 않은가.
어렵긴 하겠지만 부모들이 먼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잘 살아왔는데, 애들은 그렇지 못한다고 탓해선 안 된다. 자신을 열심히 살게 해준 어려운 환경에 대해 먼저 고마워하자. 임어당 선생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자녀들에게 자립심을 키워볼 기획조차 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이들이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정하기 전에, 먼저 자녀의 인생을 디자인하진 않았는가? 아이들에게 한번이라도 도전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한 적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이제는 돈으로 자식을 키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사회도 서서히 알아가고 있는 듯하다. 어렵지만 이런 생각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개인적으로도 아들이 취업 때문에 고민할 때, 도와줄까 말까 밤새 고민한 적이 있다. 조금만 도와주면 금세 해결될 수 있기에, 나 역시 고민 하나를 덜고 싶었다. 문제가 생기면 빨리 해결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데, 더구나 그게 자기 자식의 문제라면 오죽할 것인가, 자식문제에 관한 한 부모가 인내심을 갖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우스갯소리로 아이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려면, 할아버지의 경제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이렇게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자녀교육을 위해서는 부부가 공통된 소신을 가져야 하는데, 교육은 대부분 엄마가 맡고 아빠는 돈만 벌어오면 된다는 분업적 구조를 비꼬는 말일 것이다.
사실 나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베이비부머세대는 자식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 어떤 철학을 가져야 한는지 등에 대해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앞으로는 자녀교육에 대해 부모가 공통된 철학과 소신을 갖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성적순으로 줄을 세워서 1등을 가리는 시대가 아니라, '너도 1등 나도 1등'으로 사는 방법을 찾아 각자의 개성과 창의성을 키워주어야 하는 시대다.
아이를 적게 낳는 것도 자녀 리스크와 무관하지 않다. 얼핏 생각하면 자녀의 수가 적을수록 경제적으로 부담이 덜하고 할 수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과거에는 자식들이 많아서 서로 추렴하면 부모의 병원비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지만, 자식이 하나밖에 없으면 직접적인 부담이 크기 때문에 쉽사리 기댈 수도 없다. 그럼에도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라는 이유로 능력을 뛰어넘어 무엇이든 다 해주는 부모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녀교육에 대해서는 의식 개혁에 가까운 각오가 필요하다. 사회가 급변하는 시기에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희생자가 될 수 있기에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녀교육도 마찬가지다. 지금이야말로 과거의 패러다임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을 가져야 할 때다.
진정한 경제적 자립이란?
주로 하는 일이 투자자 교육이나 은퇴 교육이다 보니, 강의를 듣는 분들로부터 흔히 듣는 질문이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가?'와 관련된 것이다. 재테크가 됐든 재취업이 됐든, 많은 이들이 '돈 버는 법'에 초지일관 안테나를 세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진정한 경제적 자립이란 돈 버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경제 상황에 맞춰어 사는 능력을 키우는 거라고 강조한다.
자녀 리스크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경제적 자립의 의미에 대해 한번쯤 진지한 고민을 해봐야 한다. 나는 돈 버는 법에 관한 질문을 받을 대마다 감명 깊게 들은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예로 드는데,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경제력 자립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면 평생 누군가에에 얹혀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때 오해하지 말아햐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경제적 자립이란, 흔히 말하듯 경제적 욕구를 스스로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의 배양이나 확립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경제적 자립이란 주어진 경제적 상황에 자기 자신을 맞추어 넣는 능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구를 스스로 채울 수 있다며 돈 버는 능력을 절대시하는 사람은, 반드시 돈의 노예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욕구의 충족은 항상 더 큰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 목사님은 경제적 자립을 설명하면서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를 소재로 삼았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나오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니라'가 바로 그것이다. 회사의 사장들이 이 구절을 액자에 넣어 사무실에 걸어두기도 하고, 입시생들의 공부방에 붙어 있는 것도 자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목사님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구미에 딱 맞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자신이 믿는 신이나 종교 안에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만큼 매력적인 말이 어디 있겟는가. 목사님의 설교는 다음과 같이 계속 이어진다.
"이 구절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신약성서의 1/3 정도를 기록한 사도바울이 무슨 사연 끝에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먼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즉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함과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빌립보서 4장 13절의 바로 앞에 나오는 내용이다. 바울은 경제적으로 풍부할 때도 있었고 말할 수 없이 궁핍할 때도 있었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교만함이나 비굴함에 빠지지 않고 주어진 경제적 상황에 자신을 적응하는 능력을 길렀던 것이다.
경제적 자립에 관해 성경 말씀을 인용했지만, 이는 엣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상식의 지혜이기도 하다. '분수에 맞게 살아라', '중용을 지켜라' 등등 선인들의 말씀은 모두 주어진 경제적 상황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혜를 담고 있다.
미국 최고의 부자 중 한 명이었던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의 자서전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백만장자임을 나타내는 표시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수입이 항상 지출을 초과하는 것이다. 백만장자들은 일찍부터 저축을 시작한다. 돈을 벌기 시작할 무렵부터 말이다."
우리는 현대를 신용사회라 부른다. 하지만 이 '신용'이라는 단어에는 '믿음'이라는 뜻 외에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 자신의 신용을 담보로 한 무분별한 신용카드 사용, 수입의범위를 넘어서는 소비, 무리한 주택 마련 등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넘어선 행동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저축도 투자도 소비도 주어진 경제적 상황에 맞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경제적 자립이라고 믿는다. 무리해서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과외비를 내고, 힘이 부치는데도 엄청난 대출을 받아 집을 사고, 신용카드로 빚을 지며 소비하는 삶에서 과연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금융교육, 수학교육만큼 중요하다
자녀 리스크를 줄이는 데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앞서 언급했듯이 자녀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된 금융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돈을 관리하는 법을 제대로 배운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 큰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2003년에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신용불량자 문제'다. 당시 신용불량자 300만 명의 평균연령은 32세, 젊은 세대 중 상당수가 신용불량자가 된 셈이다. 놀랍게도 신용카드 연체자의 절반은 20~30대였다. 자신의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소득을 넘어선 무분별한 과소비가 초래한 침통한 결과였다. 금융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젊은 나이에 평생 후회할 일을 저지른 것이다. 평소 돈을 관리하는 습관을 들이지도 못한 상황에서 카드를 발급받자,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저 보이는 대로 쓰기에 바빴던 것이다.
미국 중앙은행 총재를 다섯 번이나 역임한 앨런 그리스펀 역시 "청소년들이 돈에 대한 잘못된 행동으로 평생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어릴 때부터 금융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 금융교육은 수학교육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리스펀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금융교육을 철저히 받았던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다섯 살 때부터 금융기관을 견학시켜주며 급여 관리와 투자 등에 대한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이러한 경험이 그가 세계적인 금융 전문가가 되는 데 큰 힘이 됐을 것임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국내의 금융교육 현실을 보면 아직도 걸음마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아껴 쓰고 저축하라'는 말만 할 뿐, 이를 실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점검조차 하지 않는다. 주위를 보면 아이들에게 장기적으로 용돈을 주며 스스로 책임지고 관리해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 부모들이 아직도 많다. 용돈 기입장을 쓸 시간에 영어단어 하나 더 외우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모들이 태반일 것이다. 심지어 아이들이 받은 세뱃돈으로 모자란 학원비를 보충하기 바쁜 엄마들도 있다.
부모 자신이 제대로 된 금융교육을 받지 못한 것 또한 문제다. 실제 물어봐도 '저축과 투자의 차이'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부모들이 많지 않다. 이자 개념인 '단리와 복리'의 차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이들도 생각 외로 드물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자녀에게 금융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막상 하려고 하면 막막할 뿐이다. 주식이니 부동산이니 하는 어른들의 재테크 방법을 가르치기도 그렇고, 수요니 공급이니 하는 경제적 교과서를 갖다놓고 가르치기도 마땅치 않다.
따라서 부모가 먼저 제대로 된 금융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가있다. 각종 금융기관이나 관련 협회에서 개최한 금융교육에 참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고 있는 어린이 펀드에 가입해 자녀 학자금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부모와 자녀가 같이 금융교육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린이 펀드란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설계한 펀드를 말한다. 주로 우량주식 또는 채권 등에 운용하는 펀드로, 어린이들에게 투자마인드를 길러주면서 대학 학자금을 마련하는 데 목적을 둔다. 대부분 적립식 투자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경제교육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어린이 펀드,'가 가장 많이 보급된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의 증권회사나 은행에 가면 어린이나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투자신탁펀드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칠드런 펀드Childen Fund' 또는 '영인베스터 펀드Young Investor Fund'라고 부르는데, 가입자격에 연령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14세 미만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주된 가입자라고 한다.
이들 펀드는 운용성적도 성적이지만, 학생 투자가들에게 한 달에 한 번씩 발송하는 팸플릿의 내용이 매우 흥미롭다. 가입한 펀드가 투자하고 있는 기업, 예를 들어 코카콜라나 맥도날드, 디즈니랜드와 같은 유명 회사에 대한 소개, 사장 인터뷰, 퍼즐, 에세이 경시대회 등 유익하고 재미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학생들은 이 자료를 통해 증권시장과 펀드상품에 대해 자연스럽게 공부할 수 있으며, 때로는 펀드가 투자하고 있는 기업을 직접 방문하는 행사에도 참여할 수 있다. 펀드가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를 설명하늘 운용 보고서 역시 학생 독자들을 의식해서 '어느 기업이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는가?', '지난 몇 달 동안 펀드의 가격이 오른 이유는 무엇인가?' 등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아이들은 어린이 펀드투자를 통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돈이란 무엇인가, 투자란 무엇인가, 기업이란 무엇인가, 펀드란 무엇인가 등에 대해 자연스럽게 공부하게 된다.
펀드 구입자금은 부모나 조부모들이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녀 또는 손자손녀의 출생을 기념해 증여세가 부과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입시켜 주는 것이다. 따라서 거액의 자금보다는 수만 원, 수십만 원씩 적립식으로 투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펀드에 장기 투자하여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는 한편, 자녀들에게 올바른 금융교육을 시키겠다는 생각으로 구입자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펀드 운용사나 판매하는 금융회사들도 이런 펀드를 통해 회사수익을 올리기보다. 미래의 고객을 발굴하고 교육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펀드투자를 통해 투자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사회에 나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장기적인 금융계획을 세워 노후 대비를 위한 본격적인 투자에 뛰어들 거라고 보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어릴 적부터 저축과 투자를 생활화하는 교육에 정부가 직접 나설 만큼 적극적이다. 2005년에는 어린이들을 미래의 투자가로 육성한다는 취지 아래, 차일드트러스트펀드(CTF, Child Trust Fund0)를 도입하기도 했다. 영국 어린이들은 만 10세가 되면 이 펀드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데, 정부가 연간 250파운드(약 45만 원)를 무상으로 지원한다고 한다. 정기적금은 투자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지만 주식에만 치중하지 않으며, 특정 시기까지 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18세 이전에는 출금이 불가능하다. 250파운드라는 종자돈으로 어린이의 장래를 대비해 목돈 마련을 돕는 동시에, 금융투자교육을 시키겠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투자자 우대정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부모가 무상지원금만 적립한 데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낮은 효과와 재정 들을 이유로 폐지되었다. 현재는 비과세 혜택만 제공하는 청소년개인저축Junior ISA제도를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금융회사들이 어린이 펀드를 출시하면서 다양한 경제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어린이 펀드 사이트를 이용한 교육, 집합교육, 기업방문, 해외체험 등 방법도 다양하고 내용도 충실한 편이다. 이런 내용을 충분히 살펴본 후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적당한 펀드에 가입하여, 자녀들에게 경제교육을 시키는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학자금을 마련해나가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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