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오늘 이 순간, 이 시간이 좋으면...

오키Oki 2013. 11. 2. 19:24

 

 

 깊어가는 가을날 앞마당에선 차꽃과 들국화의 꽃가루를 운반하여 최선을 다해 짓고 있는 말벌집

 

 

 

- 강신주 지음강신주의 다~상담』중에서 -

사랑 · 몸 · 고독

 

 

지은이 강신주

사람을 사랑하고 시대와 호흡하는 철학자. 폐부를 찌르는 직구, 동서양 인문학을 종횡하며 끌어올린 인문정신으로 '지금, 여기'의 수많은 질문들에 답해 왔다. 삶의 고민과 불만족을 해소하기 위해 철학을 찾는 사람들과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나누고 공감하는 일을 즐긴다. 지은 책으로《철학, 삶을 만나다》,《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철학 VS 철학》,《김수영을 위하여》등이 있다.

 

 

 

철학자 강신주의 폐부를 찌르는 강렬한 직구,

동서양 인문학을 종횡무진하며 찾아낸 번뜩이는 삶의 공식!

 

 

 

 

고독, 어른의 증거

이번 테마는 '고독'입니다. 고독은 '홀로 있다'는 느낌이잖아요. '홀로 있다'는 느낌이 드신 분도, 안 드신 분도 있을 거예:요. 어떤 분이 제게 '고독으 느끼지 못하는 것도 병일까요? 왜 고독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까요? 라는 질문을 하셨는데 저는 이게 자랑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궁극적으로 고독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앟아요. 고독하지 않다는 건, 에덴동산에 있다는 거예요. 고독한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타락해서 내려온 거고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고독하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에덴동산의 아이가 아니라 세상의 풍파와 싸우는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지요. 고독하고 싶지 않죠? 고독이 뭐가 좋아요? 이 질문을 하신 분은 지금 상태가 좋은 거예요. 다만 고독이 뒤늦게 찾아올 겁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들은 비극적이기는 하지만 괜찮아요. 어른이 된 거니까. 더군다나 우리는 나름대로 고독에 적응이 됐잖아요. 좌우지간 고독은 힘든 겁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어떻게 행복한 일이겠어요. 충족감과 편안함이 사라지는 것이 바로 고독이잖아요. 고독이 반드시 찾아온다면 젊었을 때 찾아오는 것이 더 낫지요. 10대 후반에 고독을 느꼈다면 그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나름대로 견딜 수 있고, 또 그만큼 쉽게 면역이 되지요. 젊고 건강하니까요. 그렇지만 40대에 때늦게 찾아오는 고독은 거의 죽음처럼 힘들게 다가오죠. 실연의 비극과 똑같아요. 20대에 실연하면 죽을 것 같지만 안 죽거든요. 오히려 적당한 실연은 좋을 수도 있습니다. 식욕을 촉진하기도 하고 인생을 리셋해 보기도 하고 학원에 수강 신청을 하기도 하죠. 그런데 40대, 50대의 실연은 힘들어요. 20대 때 실연 안 했던 사람은 40대에 그게 와요.

그러니까 사실 인생에서 가장 성숙한 사람은 10대 때 그 모든 걸 다 겪은 사람이에요. 10대에 이혼까지 다 겪으면 거의 퍼펙트해요. 사람은 겪어야 할 것은 다 겪으면서 살게 되어 있거든요. 문제는 언제 겪느냐는 것이지요. 나이 들어서 겪으면 뭐해요? 자신이 뼈저리게 겪었던 것을 제대로 살아볼 시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압도적인 경험 때문에 잘못하면 건강마저 해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50대나 60대에 삶의 위기를 겪는다면, 그리고 힘들어한다면, 이유가 뭘까요? 처음 겪기 때문이고, 동시에 그것을 겪기에 너무나 약해져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항상 사람들한테 강조하는 게 젊었을 때 몸 사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젊었을 때는 더럽게 힘들어야 돼요. 그게 다 보험이나 연금 같은 거예요. 그러면 나중에 웬만큼 힘들어도 안 힘들어요. 제가 무슨 얘기하는지 아시겠죠?

정리를 한번 해 볼게요. 고독한 상태였다가 우리가 끝내 꿈꾸는 건, 고독 없는 상태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인생을 정리해도 되겠네요. 처음 어렸을 때는 고독을 모르다가, 고독을 알면서 우리는 어른이 됩니다. 그리고 고독이 힘들어서 우리는 다시 고독이 없는 상내를 꿈꾸게 됩니다. 물론 어린 시절의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나 아닌 누군가, 그러니까 타자를 필요로 하지요. 그것이 고독을 잠시나마 달래줄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요. 여자나 남자와 같은 이성이어도 되고, 고양이나 개와 같은 반려 동물이어도 좋습니다. 아니면 하루키의 책이나 신경숙의 책이어도 좋고, 슈베르트의 파아노 소나타나 베토벤의 교향곡이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잠시 위안을 믿을 뿐, 어린 시절 에덴동산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비극이지요.

 

 

 

 

몰입과 고독의 상관관계

우리가 꼬맹이 때는 몰입을 했어요. 기억나시나요? 몰입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집에 잘 안 들어갔던 거예요. 항상 가족들이 찾으러 나오죠. 부모님이 데리러 와서 '너 여기서 뭐하고 있냐'고 물으면, 아이는 가만히 앉아 개미굴을 보고 있죠. 부모님은 그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갈 거예요. 집에 들어와도 아이는 계속 생각을 하죠. '개미들은 뭐하고 있을까?' 기억나시죠? 누구나 경험했을 이 과거의 추억에서 우리는 고독을 피하거나, 아니면 완화시킬 수 있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몰입할 것을 찾으면 고독을 피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도 희망은 아직 남아 있는 거예요. 아이들을 떠올려 보면 됩니다. 아이들은 바깥에 나가서 못이라든가 닭 깃털, 솔방울 이런 것들을 가지고 와서 걔네들이랑 대화를 하죠. 아이들은 고독을 느끼지 않아요. 세상에 친구들 천지고 애인들 천지인데 무슨 고독이 있겠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어느 날, 솔방울이 떼구루루 굴려가는데도 혼자 가만히 있으면 아이는 어른이 된 거예요. 고독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거죠. 어른이 된다는 건 고독을 느낀다는 것과 같은 의미거든요.

최근에 나를 잊어버렸던 경험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셔야 돼요. 그게 거의 없다면 고독이라는 상태에 있는 겁니다. 몰입의 특징은 나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르는 겁니다. 나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르는 겁니다. 나를 잊어버리는 만큼 몰입하는 거예요. 길을 가다가 너무나 멋있는 걸 봤을 때, 가령 옷이나 단풍을 봤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시간이 흘러 있는 경험을 해 보신 적 있죠? 그게 몰입의 강도예요. 하지만 가령 '직장 가야 된다. 빨리 가야 된다'는 등 나를 찾고 있으면, 그건 몰입하고 있는 상태가 아닌 거예요. 아이들이 집에 가는 걸 잊어버리고 놀이터에서 노는 것처럼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야 해요. 그 사물에 빨려 들어가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인 겁니다. 이럴 때 우리는 외로움을 안 느끼죠. 외로움을 왜 느껴요? 내가 그것으로 건너갔는데요.

우리가 제일 슬픈 건, 나를 항상 의식한다는 거예요. 예를들어 이렇게 생각해 보면 돼요. 나를 만난 남자가 자꾸 시계를 봐요. 여러분을 만난 어떤 사람이 시계를 자꾸 본다면, 그건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고 객관적 위치가 어디인지를 파악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불쾌하지 않나요? 백화점도 그걸 알아요. 시계 안 갖다 놓죠. 상품에 몰입하라고요. 백화점은 절대로 창문을 만들지 않아요. 비가 쏟아지면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집으로 가니까요. 불문율이죠. 백화점은 그렇게 몰입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제가 요새 카페에 들어가 보면 커플이 각자 스마트폰을 들고 앉아 있어요. 왜 거기까지 나와서 구태여 그 사람 앞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럴 때 민감한 사람은 알아요. 이 사람이 나에게 몰입하지 않고 있다는 걸요. 몰입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 여기 온지 얼마나 됐니?'라고 물어볼 때, 민감한 사람은 알죠. 헤어져야 되겠다는 걸요. 몰입은 시간 가는지 모른다는 느낌인 거예요. 시간을 챙긴다는 건 일정을 관리한다는 거잖아요. 가기 싫은 모임에 갈 때는 사람들이 제시간에 잘 안 오잖아요. 어른이란 게 뭔가요? 내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어른은 몰입을 잘 못해요. 아이들은 좋아하거나 꽂히는 게 있으면 거기에 목숨을 걸잖아요. 고독이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지 아시겠죠? 몰입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몰입되었다는 느낌은, 내가 없다는 느낌이죠. 불행히도 이 세계가 우리는 밀어낼 수도 있어요. 다른 사람은 다 성적이 올랐는데 나만 성적이 떨어졌거나, 나만 입시에서 좌절했거나, 나만 취업에 실패했거나 할 때 세상이 나를 밀어낸다는 느낌이 들죠. 나를 밀어내는 대상에 몰입할 수는 없는 겁니다.

 

 

 

 

세계와의 관계가 붕괴되면, 고독이 찾아온다

여러분도 경험하는 거예요. 뭔가 너무나 좋고 매력적인 일을 하고 있으면 우리는 고독을 느끼지 않아요. 이건 하나의 공식이에요. 세계와의 관계가 붕괴되면 우리는 고독을 느낍니다. 나에 대한 몰입이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 세계에 대한 몰입도에 따라 고독을 느껴요. 그 몰입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게 나에게는 고독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세계와 불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거죠. 세계가 나를 밀쳐낼 수도 있고요. 거꾸로 내가 세계에 대한 관심이 없을 때도 있어오. 이럴 때 고독이라는 게 옵니다. 세계와 관련되어 있으면, 내 바깥에 있는 사람 · 사물 · 사건에 몰입을 하면 고독은 안 느껴져요. 번지점프를 하면서 고독을 느끼지 않잖아요. 절대 안 느껴요. 아주 재밌는 영화를 볼때도 우리는 고독을 느끼지 않죠. 어떤 매력적인 남자를 만나서 그 남자에게 몰입하는 순간 우리에게 고독은 없어요. 내가 몰입할 대상이 존재하면 고독은 없어요. 우리가 느끼는 고독의 정체는 바로 그거예요. 몰입할 게 없는 겁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죠. 사랑하는 게 없다고요. 밤새도록 함께 있어도 시간이 가는지 모르는, 그런 존재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왜 이렇게 고독하지'를 묻지 말고, 이렇게 되묻는 게 좋아요. '언제부터 세상에 대해서 몰입하지 않았을까?'라고요. 세상이 풍경으로 보일 때, 우리는 고독해요.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유리창이 있고, 바깥에는 폭풍우가 쳐요. 방안에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들고, 브람스 같은 음악을 듣고 있다면 느낌이 어떤가요? 고독해 보이죠. 그럴 때 저는 그 유리창을 깨 버리죠. 폭풍우가 들이치면 고독의 여지가 없어집니다. 돌이 막 날아오니까 집중해야 해요. 세계가 풍경으로 보일 때 우리는 고독한 거예요. 내가 있고, 나머진 다 그림인 거죠. 영화 화면처럼 보이는 겁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심지어 애인마저도 풍경으로 보일 때가 있을 거예요. 이 세상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처럼 느껴진다는 느낌이 들어요. 화면에 꽃이 있다고 우리가 화면의 그 꽃을 만지진 않잖아요. 우리는 고독을 느낄 때, 세상을 화면처럼 보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그 화면 안에 갇혀 있는 거죠. 작은 극장 안에 그렇게 있는 게 일종의 고독인 겁니다. 그리고 세계를 만지고 싶지 않죠. 그냥 앉아서 차 한잔 마시면서 보고 싶은 거예요. 보다가 졸리면 자고요. 풍경은 뭐예요? 만지거나 몰입하거나 하는 대상은 아니죠. 그냥 이렇게 내가 내 중심에 있는 거예요.

풍경의 특징은 하나의 풍경이 다른 풍경으로 바뀌어도 상관없다는 거죠. 하나의 영화가 다른 영화로 바뀌어도 크게 상관이 없는 것처럼요. 그래서 상대가 '아무래도 너는 날 사랑하지 않는 거 같아. 헤어져야 될 것 같아'라고 말하면, 상대를 풍경으로 보고 있는 사람은 이렇게 얘기하죠. '그래, 행복했으면 좋겠어'라고요. 쿨해요. 다음에 또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되니까요. 고독을 느낄 때 고독이라는 것이 일차적 징후는 바로 그런 거예요. 세상이 다 풍경으로 보여요. 세상이 다 죽어 있는 걸로 보이는 거예요. 몰입할 것이 없는 거죠.

그렇다면 고독을 해소하는 방법, 그러니까 세상을 풍경으로 보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어린아이처럼 세상 모든 것에 몰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풍경으로 보이지만 그것들 중 만지고 싶은 것이 있는지, 다시 말해 더 몰입하고 싶고 더 들어가고 싶은 것이 있는지 살펴보는 거예요. 반드시 있을 겁니다. 아니, 있어야만 합니다. 베토벤보다 슈베르트가 더 좋다거나. 짜장면보다 짬뽕이 더 좋다거나, 현지보다 희정이가 더 좋다거나. 뭐 이런 것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풍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독을 그나마 감소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겁니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올게요. 고독이라는 건 자의식이 강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고독을 이해할 때 제가 강조했던 게 있죠. 세계에 몰입하지 못한다는 거요. 몰입을 못 한다는 건 나 자신의 자의식이 강하다는 거예요. 자신에게 집중하는 거고, 긴장되어 있는 거예요. 이 세계를 풍경으로 보는 겁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해 몰입하지 못해요. 나에게만 몰입해요. 나에 대해서만 몰입하는 겁니다. 그런데 몰입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분열증에 빠져요. 우리의 문제가 그거죠.

 

 

 

 

전략으로서의 고독

그렇다고 고독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기억해야 할 게, 고독하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대응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세게를 다 풍경으로 보면 상처를 받지 않거든요. 직장에서 상사가 일을 왜 이 따위로 하냐면서 욕할 때 있죠? 그럴 때, 그 상황을 그림이나 영화로 보면 돼요. 부모님이 야단칠 때 순간적으로 부모님을 화면처럼 보면 편해져요. 저도 돌아가신 아버지께 야단을 맞을 때 생긴 버릇이 하나 있는데. 전 야단을 맞으면 하품이 나왔어요. 의식이 자꾸 끊으려는 거죠. 온전히 받아들이면 힘드니까요. 예를 들면 꼬맹이 입장에서 부모가 다투는 상황은 상당히 위기잖아요. 현실적인 고민도 해야 되고요. '아버지를 쫓아갈까, 어머니를 쫓아갈까?' 이런 고민에서부터 '이러다 이혼하는 거 아냐?', '어머니가 밥을 해 줄까?' 이런 고민까지, 저는 이런 생각이 들 때, 졸음이 왔어요.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죠. 세계를 풍경으로 만드는 방법이에요.

상대의 말을 이해하려고 하면 그 사람이 나에게 쳐들어오는 거거든요. 세계를 풍경으로 만드는 법을 하나 알려 드릴까요? 누군가 떠들 때 그 사람 이를 보는 거예요. 이가 몇 개 보이는지 빤히 보고 있으면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요. 말을 많이 듣지 않고 다른 걸 보는 겁니다. 개미가 지나가면 개미만 보는 거예요. 보호의 방식인 거죠. 누군가 나를 헤치려 하거나 공격하려고 할 때, 약간 멍 때리고 못 들은 것처럼 행동하죠? 누군가 나에게 이별을 고할 때, 이럴 때 있잖아요. '음, 뭐라고 했어?' 순간적으로 그럴 때가 있어요. 다 들어 놓고서는 차단을 하는 거죠. 헤어지자고 할 때 다른 걸 보거나 못 들은 것처럼 반응하죠. 고독의 보호막이 해야 할까요?

이렇게 세상에서 물러나 세계를 모조리 다 풍경으로 보는 것도 괜찮아요. 상처 받을 일이 많잖아요. 그런데 나를 야단치거나 뭐라고 하는 사람을 풍경으로 볼 때, 나는 어떻게 될까요? 저 창 바깥에 있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보호가 될 거예요. 그런데 동시에 그 안에 갇히죠. 고독이 좋다는 분들은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을 거에요. 대신 다시는 세상과 접촉하지 못해요. 지금 상처받은 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보호막을 치는 것은 괜찮아요. 한 번 정도면 되는데, 아예 그 안에 들어가서 사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건 갇힌 거죠. 언젠가는 그 풍경으로 보는 세상을 찢고 나와야 됩니다. 그러니까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독은 일회용 반창고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상처가 날까 봐 계속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요. 생살에 그렇게 반창고를 붙이고 있다가는 탄력이 있던 피부도 어느 사이엔가 쭈글쭈글해질 겁니다. 한마디로 아름답지 않게 된다는 거예요.

고독은 병에 비유하자면 자폐증과 같은 겁니다. 자폐 증상이 있는 아이들은 세계가 너무 큰 충격을 줬을 때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요. 가령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죽었다면 아이들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충격을 받으면 안으로 들어간단 말이에요. 나가기 무서우니까 잠근 거예요. 그렇게 아이처럼 잠가요. 보호받으려고요. 고독은 그런 거예요. 마치 방 안에서 문을 잠그고 있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가면 세상이 그림이 돼요. 아이는 바깥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죠. 안에 들어가 있으면, 평화가 오고 봄이 와도 몰라요. 그래서 그 안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돼요. 언젠가는 열고 나와야 합니다. 언제 열고 나가죠? 이게 고독한 사람이 가진 일종의 병폐인데요. 밖이 안 보이니까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죠. 물론 바깥의 소리는 들려요. 어머니가 혹은 누군가가 그리 해 준다면 좋겠죠. 괜찮다고 계속 안아 주고 따듯하게 대해 줄 때, 언젠가 한번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에요.

 

 

 

 

몰입이 어려운 이유:

몰입을 방해하는 시대

학창 시절에 책상 위에는 교과서가 있고 밑에는 자기가 보고 싶은 책이 깔려 있었던 것 기억나세요? 교과서를 보면 우리는 몰입이 안돼요. 교과서는 몰입이 안되는 메체거든요. 하긴 개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규칙을 익히도록 하는 것이 교과서의 본질이 아닌가요? 그러니 당연히 교과서는 몰입이 힘든 매체일 수밖에 없지요. 그렇지만 나를 끌어당기기보다 나를 밀치는데 나는 어떻게라도 거기 가 보겠다고 애를 쓰죠.

공동체의 규칙에 복종하게 하기 위해서 공동체는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할 테니까요. 그렇지만 교과서 밑에 깔려 있던 책, 내가 숨겨 놓은 책은 나를 빨아들이죠. 그래서 학교에서는 책 읽는 것을 통제해요. 교과서를 읽혀야 하니까요.

무언가에 몰입한 학생은 선생도 교칙도 심지어는 수업 시간마저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만큼 나를 매료시킨 책은 책은 나를 꼼짝 못하게 잡아 놓습니다. 심지어 학교도 못 가는 경우도 벌어지기도 하죠. 책에 몰입하느라 말입니다. 옛날에 문인들이 책을 읽느라고 학교에 못 갔다는 경험을 써 놓은 책도 있어요. 여러분도 그런 적 있나요? 연배가 높거나 정신적으로 성숙한 분들 빼고는이런 경험이 별로 없을 겁니다. 여러분은 너무 안 좋은 시대에서 사셨던 거예요. 몰입을 금지하는 시대, 저희 때보다 교재를 더 많이 봐야 하는 시절이요. 그러니까 주변에 몰입을 방해하는 교재들만 널려 있죠.

공부 잘하는 놈들은 독한 놈들이에요. 자기를 밀어내는 교재를 억지로 쑤시고 들어간 아이죠. 우리는 그냥 밀리면 밀리거든요. 밀리는 게 자연스럽죠. 몰입이 안 되는데, 무언가를 하는 건 불행한 일이지요. 교재에 억지로 들어가려는 아이는 부모가 평생의 반려자를 지정한 어느 아가씨와 같은 신세라고 할 수 있죠. 이 남자랑 결혼하라고 하니까 그 남자를 계속 쳐다보며 익숙해지려고 노력하죠. '내 남편이다. 내 남편이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이렇게 자기 최면을 시도하면서요. 어떻게 이 아가씨가 행복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성공한 아이가 될 수는 있지만, 행복한 아이가 되기는 힘든 법이죠. 그 아이들이 나중에 보면 다 망가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뭘까요? 돈은 잘 벌지만 망가져 있는 느낌이 든다고요.

반면 주변에 돈은 잘 못 벌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했던 친구들은 지금도 그 일에 몰입을 해요. 여러분은 그런 일을 하고 있나요? 직장 다니시는 분들은 몰입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괜찮아요. 외로울 틈이 없죠. 어때요? 몰입이 안 되죠. 억지로 회사에 가죠. 회사는 자꾸 나를 밀어내는데 굳이 문 열고 들어가서 출근부에 카드를 찍어요. 거기에 앉아서 생각을 하는 거죠. 조금만 기다리면 돼요. 12시면 점심시간이 다가와요. 그래서 우리의 몰입은 밥이죠.(웃음) 제 집필실이 광화문에 있는데 관찰을 해 보면 직장으로 들어갈 때 사람들의 표정들이 있어요. 사람들이 어느 때 제일 행복한지 아세요? 광화문에 사무실 많잖아요. 11시 45분부터 사람들이 사무실에서 나오기 시작해요. 광화문 근방은 12시부터 1시 10분까지 진짜 예쁘게 활짝 펴요. 너무 좋아요. 사람들이 행복해요. 카페에 앉아서 사람들 얼굴 표정을 보면, 저렇게 좋아하는 밥이나 계속 드시면 굳이 일하러 다시 들어가서 고생을 하는구나 싶어요.

권력은 여러분을 고독으로 몰고 갑니다. 무아지경에 이르지 못하게 하죠. 왜냐하면 CEO도, 자본도 여러분이 무아지경에 이르는 걸 싫어해요. 왜요? 일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가을에 낙엽 진다고 창가를 보면서, 저녁노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어요. 내일 발표할 자료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고 있어요. 그거 못 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은 나 자신이나 세상을 모두 '낭만화하는Romanticize' 겁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볼까요? 마음이 울적하거나 기쁠 때, 술을 많이 마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그만큼 낭만적으로 변할 겁니다. 당연히 출퇴근 시간이 왔다 갔다 하죠.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물으면 쿨하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제 노을이 너무 멋져 와인 좀 마셨어요. 언제 노을 보신 적이 있나요?' 물론 자본은 우리의 낭만적 삶을 부정할 겁니다. 낭만적인 사람은 세상에 대한 몰입도가 높은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자본의 입장에서는 하나씩 하나씩 몰입도를 줄이려고 할 거예요. 그러니 낭만을 위한 싸움을 시작하려면 우리가 먼저 되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죠? 고독을, 멋이라고 자랑하지 말자고요. 일차적으로 우리는 상처받았어요. 고독하도록 내밀린 겁니다. 이걸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삶의 행복을 찾으려면 우리가 저항해야 할 게 몰입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거예요. 몰입을 못 하면 죽은 거니까요.

 

 

 

 

몰입의 방법들

어떻게 하면 몰입을 할 수 있을까요? '몰입의 감각을 어떻게 키울까?' 라는 것이 문제인데요. 우리한테는 문화도 있고 예술도 있죠. 다시 한 번 몰입의 감각을 떠올려 보세요. '학창 시절 교재 밑에 깔아 놨었던 그 책의 감각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다시 한 번 몰입을 하는, 시간 가는지 모르는 세계를 조금씩 여는 거죠. 학창 시절에 여러분들이 자라면서 뺏긴 거예요. 제어머니께서 제가 문학 책을 읽으면 옆에서 그러셨어요. "그거 읽으면 돈이 나오니, 쌀이 나오니?" 그런데 돌아보니 그 당시에도 돈이랑 쌀은 안 나올 것 같았어요. 교과서를 공부하는 게 좋을 거 같았죠. 하지만 다시 제가 그 시절로 돌아가면 어머니께 "행복해요, 엄마"라고 했을 것 같아요. 그걸 찾는 거예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나에게 그게 뭘까요? 기다려야 될까요? 어떻게 할까요? 화면을 내가 찢을까요? 저 같은 사람이 와서 유리창에 돌을 던져서 폭풍우가 들어오도록 만들까요? 아니면 여러분들이 깰까요? 먼저 스크린부터 만지는 것도 방법이겠네요. '똑같네' 뭐 이런 자각을 하거나, '유리에 불과하네' 이런 자각도 하겠죠. 그건 제가 해결해 줄 수 없는 부분 같아요. 순간적으로 몰입하게 해 드릴 수는 있어요. 예를 들면 제가 강의하다 옷을 다 벗는 거죠. 그런데 그게 의미가 없는 것이 두 번째 벗으면, '병인가 보다, 쟤는 그냥 노출증인가 보다' 이러고 넘어가게 되잖아요. 문제는 지속적인 몰입이죠. 가면 항상 몰입이 되는 곳, 만나면 항상 몰입이 되는 사람, 먹으면 항상 몰입이 되는 그것, 그런 것들을 찾는 게 문제예요.

그래서 우리 인간이 고독을 느낄 때 몰입을 위해서 대대로 해 왔던 것들이 대마초, 마약, 술 이런 것들이에요. 니체가 아폴론이 아니라 디오니소스를 좋아했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아폴론이 세계에 거리를 두고 평가하는 이성을 상징한다면, 디오니소스는 세계에 몰입하는 감성을 상징하니까요. 한마디로 아폴론이 고독한 모범생이라면, 디오니소스는 무언가에 몰입하는 불량 학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고대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 축제가 있었잖아요. 그날은 내가 나로 있는 자리가 아니라 술 마시면서 사랑을 나누고, 축제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의 주변을 잘 살펴보시면 디오니소스 축제와 비슷한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죠. 물론 권력과 자본의 강한 개입으로 범죄나 일탈 혹은 정신 이상으로까지 치부되곤 하는 현상들입니다. 게임에 몰입하는 꼬맹이들도 있고요. 최근에 이상한 약들도 있잖아요. 그것들을 저는 그렇게 나쁘게 보진 않아요. 대마초 같은 것들도 괜찮거든요. 그러니까 타인을 파괴하지 않는 이상 모든 게 허락되어야 한다고 봐요. 대마초 피운다고 사람 안 죽이거든요. 연주를 잘 하려고 몰입하려고 그러는 거거든요.

젊은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리면 술이랑 담배를 한다를 통계 조사도 나오죠. 사회가 사람들을 우울증에 걸리지 않게 하면 그 사람들이 술이랑 담배를 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거라도 해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그건 개발한 거예요. 그래서 술도 있고, 춤도 있고, 예술도 있죠. 영화도 사실 우리를 몰입시키는 매체 아닌가요? 불록버스터 영화를 보면 기분 좋죠. 확빠져드니깐 좋잖아요. 김기덕 영화는 싫어하죠. 왜냐면 이 영화는 몰입이 안 되고 나를 빨아들이는 게 아니라 생각하도록 만들죠. 몰입을 거부하는, 몰입을 싫어하는 작가죠. 김기덕 감독은 제가 봤을 때 고독한 작가예요. 자기 세계로 못 들어오게 만들어요. 우리 매체들을 보세요. 음악에서부터 모든 것들에 해방적 기능이 존재해요. 이런 것들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고 있는 고독에서 빠져나오는 방법들인 거예요. '어떻게 하면 더 빠르게 몰입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수단이 뭘까?'라는 생각을 해본 거죠.

지금은 참한 부인이 되어 버린 제가가 한 명 있는데요. 그 제자가 남자 친구랑 동남아에 갔을 때 대마초를 피운 적이 있어요. 남자 친구는 평소에 담배를 피워서 대마초가 그다지 힘이 없었나 봐요. '기분 좋다' 뭐 이런 정도인데, 제 제자는 담배를 안 피우거든요. 이 제자는 항문이 다 열렸어요. 숙소에서 항문이 통제가 안되는 거예요. 완전히 녹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몰입이라 부르는데, 무아라는 게 별것 아니에요. 항문이 다 열리는 거예요. 근육이 다 이완되는 거죠. 사람은 죽을 때 근육이 이완되죠. 죽고 나서 경직이 됐다가 이틀 정도 염을 하고 경직이 풀리면 사람 몸이 처음으로 다 열려요. 잡아뒀던 게 이완되니까 오만 구멍에서 다 쏟아져 나와요. 산다는 건, 사는 것의 정의는 항문을 조이는 거예요. 몰입과 무아의 육체적인 경험은, 드러나는 건 다 열리는 겁니다. 이 경험이 매력적인 게, 완전히 어떤 것에 몰입한다는 거예요. 나를 떠나는 거죠.

생각을 해 봐야 돼요. 나를 놓을 수 있는 기술이 우리에게 필요한데, 그 방법들은 여러분이 찾아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어떻게 증진시킬까?'가 다음 문제인 거죠. 이거 굉장히 소중한 거예요. 예를 들어, 남자 친구에게 식스팩이 없을 때 불을 켜고 사랑을 나누는 건 상당히 위험한 짓이죠.(웃음) 몰입도를 낮출 수 있다고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불을 꺼야죠. 이런 방법들인 거예요. 있는 그대로 보겠다고 하지 마시고요. 봐야지 몰입도가 높을 때가 있고, 눈을 감아야 몰입도가 높아질 때도 있어요. 제가 지금 우스갯소리로 하지만 이건 여러분의 기술이에요. 고독에서 벗어나는 기술은 '고독의 상태니 여기서 건너뛰자'는 발버둥보다 일단은 '몰입도를 어떻게든 높여야 되는데 이 몰입의 방법이 나에게는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해 보는 거예요.

 

 

 

 

고독과의 싸움, 세상에의 몰입

남자와 여자 중에서 누가 변비가 많아요? 여자가 많죠. 억압이 그만큼 많은 거예요. 힘든 거죠. 몸은 자신의 바로미터예요. 변비가 많으면 사는 게 힘든 거예요. 변비가 줄어들면 여러분들은 슬슬 괜찮아지는 거예요. 힘없고 억압받는 자들이 더 항문을 조이고 살게 돼요.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에서 똥 잘 주시는 분들은 괜찮은 분들이에요. 행복하죠. 못 누시는 분들이 제일 힘든 분들이에요. 이것도 이제 마찬가지죠. 고독이 무엇인 거 같아요? 변비의 느낌과도 같아요. 변비에 걸려본 사람은 고독의 느낌과 같다는 걸 알아요.(읏음) 웃으시면 안 되고요. 제 얘긴 항상 철학적 근거가 있잖아요.

돌아보면 우리 인간에게는 항문을 꽉꽉 조이게 하는 제도가 있고요. 그것과 싸워 항문을 시원하게 열어 놓으려는 투쟁도 있습니다. 싸움이에요. 제대로 살아 있으려면 항문이 풀려야 돼요. 죽기 전에요. 완전히 열어 놓은 거예요. 완전한 개방, 그게 몰입이거든요. 이럴 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에게 세계가 힘든가요? 육체적이든 장소적이든 시간적이든 관념적으로라도 거리를 두세요. 세계를 풍경으로 보는 연습을 하세요. 진짜 편해요. 세계에 그냥 노출되서 마구 상처받는 것보다 고독으로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고 세계를 풍경으로 보는 게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어요. 슬픈 전략이죠. 하지만 우리의 보호막은 또한 우리의 감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독은 이중적이에요. 고독이란 감옥으로부터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을까요? 자폐증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방법이 힌트를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더 따듯하게 안아 주어야 합니다. '얘야! 엄마가 있는 이곳은 생각보다 따듯한 곳이야'라는 말을 계속 속삭여야 하지요. 그러면 어느 순간 아이는 자신이 잠갔던 문을 스스로 열고 조심스레 나올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도 아주 따듯한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이 바깥에서 계속 외쳤으면 좋겠어요. 괜찮다고, 나와도 된다고요. 그런 사람을 못 만나면 계속 그 안에 계시는 거예요.

고독해지는 내 모습과 계속 싸워야 할 겁니다. 세계를 풍경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세계에 몰입하는 걸 찾아야 해요. 그게 상처가 되는 건 맞아요. 촛불이 예쁘면 만지고 싶죠? 그래서 처음에는 그걸 만졌을 테지만 이제 그게 뜨거운 걸 아니까 다시는 안 만지죠. 그러면 촛불은 계속 풍경으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상처받았다고 바로 떨어져 나가면 나의 세상은 아무것도 못 만지는 세상으로 변해요. 따듯한 사람, 혹은 몰입할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래서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행운은 아무에게나 오지는 않지요. 스스로 고독을 깨기 위한 적극적인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춤도 춰 보고 노력은 해 볼 수 있어요. 해보는 데까진 해 봐야 되겠죠. 어쨌든 방법은 알았으니까요. 그렇게 하다 보면 나를 가두고 있는 그 감옥의 두께가 좀 얇아질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런 어머니 같은 존재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따듯한 사람이요. 어쨌든 따듯한 사람이 여러분을 나올 수 있게 괜찮다고, 여기는 괜찮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궁극적으로 보면 사회나 구조가 좋아져야 되겠죠.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와도 따듯하고 몰입할 수 있게요.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왜 좋을까요? 그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걸 긍정하게 해 줘요. '내가 살아 있으니 이런 걸 내가 보네' 이런 느낌이죠.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고독으로 물러나거나 심지어 자살을 시도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몰입할 것이 있고, 그 때문에 설레고 행복한데 말입니다.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좋은 영화나 소설, 음악도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요. 반면에 친구들이 싸우거나 가족이 서로 죽이려고 그럴 때는 어른들이 그러잫아요. 내가 오래 살아서 못 볼 꼴을 본다고요. 이럴 때 눈 감고 싶잖아요. 이 메커니즘은 중요한 거예요. 이걸 잘 생각해 보셔야 되죠.

 

 

 

【상담】  예쁜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스물아홉 살 여성입니다. 고향이 경남 금산인에 회사 생활을 하느라 서울에 올라와 있어요. 요즘 저는 저의 세상이 완전히 뒤집어진 느낌입니다. 저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회사에서도 착하게만 굴다 보니 회사 동료들은 제가 맡아서 하는 일들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회사에서 막내 생활만 3년을 하다 보니 안 그래도 낮은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더해 서울 생활에 적응하느라 힘들어서 잘 챙기지 못했던 친척 분들까지 저에게 서운함을 내비치십니다. 미리 잘 챙겨드렸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지만 너무 외롭고 힘듭니다.

 

 

 

일단 상처를 전혀 안 받으시려는 분이에요. 촛불을 안 만지려는 분이에요. 전형적인 캐릭터죠. 일종의 고독 상태에 들어가 있는데 가족, 회사 관계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아요. 일단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게 예쁜 사람 콤플렉스인데요. 나는 착하고 예쁜 사람이어야 하고,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여기는 겁니다. 여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돼요. 이건 아기와 같은 상태인 거예요. 이런 사람들은 주변 눈치를 보면서 일을 해요. 주위에서 예쁘다고 하면 일을 하죠.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는 행동을 하느라 자신이 욕망하는 건 전혀 안 하실 거예요. 그러니까 한 번도 스스로 촛불을 만졌거나 뭘 잡아 보거나 하지 않은 거예요. 자기가 욕망한 것에 몰입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만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회사에서도, 가족 관계에서도 눈치 보고 사는 겁니다. 눈치를 보는 건 괜찮아요. 압도적인 힘 앞에서 생존하려면 눈치를 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런데 회사 동료나 가족에게 예뻐 보이려고 그래요. 친척들도 나를 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꾸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미리 챙겼어야 했다면서요. 왜 친척들을 챙겨요? 안 해도 되거든요. 기본적으로 자꾸 예쁘다는 얘기를 들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힘든 거예요. 남 눈치를 보는 걸 넘어서 남에게서 예쁘다는 소리를 들으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일종의 고독 상태에 이르게 된 겁니다. 아무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그건 바로 본인이 초래한 것 아닌가요? 지금 자신의 욕망에 따라 당당하게 세상에 몰입하는 것이 무서운 겁니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면 다 상처로 자기에게 다가온다고 생각하니까요.

이런 문제는 고민을 토로하신 이분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에게도 있을 거예요. 어른이 된다는 게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죠. 예쁜 사람 콤플렉스를 버려야 어른이 되니까요. 그래야 스스로 욕망하고 스스로 행동할 수있습니다. 이럴 때 진정한 어른,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될 겁니다. 고독의 문제가 아니라 예쁜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돼요. 이 콤플렉스만 버리면 고독도 얼마 지나지 않아 씻은 듯이 사라질 테니까요.

삶을 잘 살려면 어떤 것을 결정하든 부모님에게 '이기적이다'는 말을 들어야 해요. 부모님이 여러분에게 이기적이라고 말씀하시면 무조건 자신감을 가지면 돼요. '드디어 내 삶을 사는구나'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명심하세요. 예쁜 사람 콤플렉스를 벗어난다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이기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라는 것을요.

내가 이타적으로 산다는 건, 엄마 말을 잘 듣는 거예요. 정신들 좀 차려요. 왜 이타적으로 살아요? 이기적으로 살아야죠. 여러분들이 어른이 된 지금 부모님이 그러실 수 있어요. '네가 내 배에서 낳은 아이인지 모르겠다. 넌 왜 이렇게 이기적이니?' 그러면 다른 사람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 시선이 자신의 입장보다 너무나 크게 작용한다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예쁜 사람 콤플렉스를 벗어나는 방법을 조언해 드릴까요? 방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금산도 보수적인 동네로 유명하잖아요 그러면 염색을 하세요. 빨간색으로요. 그러면 친척들이 욕을 할 겁니다. 뭐 어때요? 내가 하고 싶은 걸 했는데,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깨는 거예요. 친척이나 가족들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겁니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때가 되어서야 명확히 알게 되겠지요. 이들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요. 아니 어쩌면 그들이 나를 떠나게 될지도 모르지요. 자신들이 힘드니까. 어느 경우이든 마침내 더 이상 친척이나 가족들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삶이 시작되는 셈입니다.

 

 

 

 

'왜 사나?' 라는 질문이 들 때

 

저는 살면서 몰입을 경험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단 한 번의 몰입의 경험은 중학교 때 신해철의 광팬이어서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을 다 돌아다니며 콘서트를 따라다녔던 기억입니다. 성인이 된 지금 몰입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흥미진진하게 연애 이야기를 해도 심드렁해지고 맙니다. 그저 드는 생각은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라는 겁니다. '왜 사나?'라는 질문이 자꾸 듭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인생의 목적을 길게 보지 마세요. '왜 사냐?'라는 오만한 질문을 하지 마세요. '오늘 좋았나?', '지금 이 시간이 좋은가?' 그것에 집중하세요. 항상 헷갈리면 지금 감각에 집중해야 해요. '내가 이 모임이 좋은가?', '이 사람과 같이 있는 게 좋은가?'. '이 책이 좋은가?', 이것만 집중하세요. '이 책을 다 읽은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러지 말고, 지금 순간에 집중해요. 이 세상에서 제일 죽이고 싶은 인간이 삶의 의미를 안다고 하는 사람이에요.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요? 길게 보지 마세요. 오늘 마신 커피 맛이 좋았는지 별로 였는지 표현하는 거예요. 그건 말할 수 있잖아요.

'왜 사나?'라고 질문하지 말아요. 그런 막연한 질문들에 대해 사람들이 얘기를 하잖아요. 다 개소리예요. 우리에게 남는 건 오늘 이 순간, 이 시간이 좋았는지 안 좋았는지 이거예요. 길게 봐서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시죠?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그건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 막연한 질문들이 대개는 지금 내가 좋은지 내 느낌이 어떤지를 은폐하기 위해서 던져지는 질문이에요. 그러고 그 막연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사람,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무시할 때 써요.

'인생의 의미는 뭐지?' 같은 큰 질문들을 자제하시고요. 힘들면 감각을 믿으세요. 이게 나에게 어떤 느낌인지 이 커피 맛은 어떤지, 그리고 막연해질 때마다 맛있는 음식 드시는 것도 괜찮아요. '이 스파게티 맛은 이런 느낌인 것 같다.', 스파게티 맛을 묘사하는 데만 집중해도 기분이 금방 좋아져요. 몰입의 정도가 확 늘어요.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하다 보면, 헤어나지 못해요. '이 물 맛있네'라고 말하고, 음악이라도 하나 들어요. 그리고 묘사하기 시작하는 게 더 좋죠. 헷갈릴 때는 항상 여러분 감각을 믿으세요. 그리고 감각을 통해서 부정해서 행복한 사람은 지구상에서 본 적이 없어요.

 

 

이제 슬슬 정리를 해 보죠. 자신의 삶을 하나의 축복으로 생각하려면, 여러분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은 고독과 싸우는 것입니다. 고독해지는 내 모습과의 싸움입니다. 세계를 풍경으로 볼 게 아니라 세계에 몰입할 걸 찾아야 해요. 그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건 맞아요.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커다란 행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처를 받았다고 떨어져 나오면 아무것도 못 만지는 세상만 남아요. 그 순간 우리는 제대로 몰입할 대상을 만날 가능성마저도 잃게 되겠지요. 그러니 용기를 내야죠. 제대로 살려면, 행복하게 살려면, 우리에게는 몰입할 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하니까요. 모기에 물릴 각오로 낚싯대를 드리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물고기를 잡는 행운을 기대할 수 있겠어요?

고독에는 병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고독은 자기에 대해서 몰입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고독은 타인에 대해서 몰입하지 않기로 작정했을 때 쓰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결국 타인을 사랑할 수 없으니 나만을 사랑하기로 작정하는 것이 고독의 숨겨진 메커니즘입니다. 제가 안타까운 건 고독한 모습이란 타인과의 관계를 접기 위해서 쓰는 전략일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 혼자 관계를 맺으면 상처를 안 받잖아요. 타인은 자신에게 상처 줄 가능성이 많게 다가오는 거예요. 뜨겁단 말이에요. 촛불처럼, 어떡할래요? 그러니까 거기에 너무 많이 데면 나만을 소중히 여기게 되는 거예요. 그렇지만 타인은 절망의 원인이자 동시에 희망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불행의 원인이자 행복의 원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세계 때문에 고독해진 것이라면,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고독이 해소될 수 있는 겁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만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혼자 사시는 분들, 식사 잘 하세요? 식사라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애기하는 거예요. 혼자 지낼 때, 혼자 먹는 밥이 사료라고 느껴져야 나중에 타인을 만날 희망도 품을 수 있어요. 혼자서 밥 먹는데, 퍼펙트하게 레스토랑에서 먹는 것처럼 차려 먹으면 이제 끝나신 거예요. 영원히 혼자 드시는 거예요. 저는 혼자 밥 먹을 때 라면 끓이면요, 밥도 그릇에 안 퍼요. 라면에다 밥을 말고, 김치를 넣고, 계란을 풀어요. 그냥 먹습니다. 우린 이걸 사료라고 불러요. 이러면 나중에 추해져요. 그 냄비에 남아 있는 밥풀 몇 개와 배부른 나의 배를 보면서 드는 느낌은 이런 거죠. 돼지가 된 것 같은 느낌, 짐승이 된 듯한 느낌이 들죠. 후배가 오면, 라면을 끓여서 밥을 공기 그릇에 퍼요. 김치를 따로 담죠. 우린 이걸 식사라 불러요. 그런데 자기 혼자서도 식사가 되시는 분들은요. 영원히 그렇게 사시는 거예요. 못 견뎌야 해요. 혼자 먹는 게 사료라는 그 절절한 자각에 이르러야지만 우리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과 행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남자와 대화가 되는가?"  (0) 2013.11.08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  (0) 2013.11.03
관계  (0) 2013.10.21
담담하게  (0) 2013.10.18
공감  (0) 2013.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