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만의 무늬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각시와 함께 나만의 무늬를 쭈욱~~ 잘 그리며 살고 싶다.
- 최진석 지음 『인간이 그리는 무늬』중에서 -
최진석
1959년생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학부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중국 흑룡강대학교를 거쳐 북경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인간의 무늬를 그리는 철학자로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다.
지금, 자신만의 무늬를 그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까지 바람직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바라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우리'가 아닌 '나'로 살기 위한 인문학
"오직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
우리가 인문학을 배우는 목적은 무엇인가요? 바로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지요.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독립적으로 알아내기 위해서 인문학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인문학적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을 때 어떤 새로운 사태나 사건을 만나면 어떻게 반응하나요? 대개는 일단 좋다. 나쁘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이렇게 우선은 정치적 판단을 합니다. 이 정치적 판단을 해주게 하는 것, 이것은 뭡니까?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이념이나 신념들 때문이지요. 자기에게 있는 이념, 신념 그리고 가치관 등이 자기의 독립성보다 강하여 자기를 지배하면 지배할수록 인문적 통찰은 볼가능하고 더듬이는 없어져요. 그럼 도대체 인문적 통찰을 하는 관건은 뭐냐?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는 일'입니다. 이념이나 가치관이나 신념을 뚫고 이 세계에 자기 스스로 우뚝 서는 일, 이것이 바로 인문학적 통찰을 얻는 중요한 기반입니다.
대답만 잘하는 인간은 바보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을 똑똑한 사람이라고 하죠? 대개는 무엇을 물었을 때, 바로바로 답을 하는 사람을 똑똑하다고 합니다. 정답을 잘 아는 사람이죠. 심지어는 어른들의 말을 잘 들어도 똑똑하다고 해주죠? 그런데요, 대답 잘하는 것을 똑똑한 것으로 아는 분위기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바보들만 살게 될 거예요. 그런 사회에서 창의력이나 상상력은 발붙이기 어려울 겁니다.
대답이라는 게 뭔가요? 일단 자기와 관계없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 지식을 그대로 섭취하지요. 되도록 빨리 또 많이 섭취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고 나서 누군가가 요구할 때 그대로 뱉어 내는 것, 이것이 대답이에요. 이때는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그리고 손상시키지 않고 원형 그대로 뱉어내는가가 승부를 가릅니다. 대답의 과정 속에 주인 자리는 지식이 차지합니다. 자기는 다른 사람이 제작한 지식이 보관되는 창고나 지나가는 통로 혹은 중간역 정도로만 작용할 수 있을 뿐이죠.
이것저것을 많이 배운 사람이 대답만 할 줄 안다면, 이건 바보입니다. 왜 바보일까요? 자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자기는 언제 존재합니까? 바로 질문할 때 존재합니다. 질문을 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죠? 일단 문제가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생겨납니까? 호기심이 있어야 돼요. 호기심은 무엇이 만들어 냅니까? 이성이 만들어 내나요? 아니에요. 욕망이 만들어 내죠. 이 욕망이 무엇입니까? 우리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나에게만 고유하게 있는 것입니까? 나에게만 고유하게 있는 것이지요. 자기가 욕망의 주체로서 작동할 때, 호기심이 생깁니다. 그 호기심을 한번 내뱉어 보는 일, 이것이 질문이에요. 대답하는 곳에는 자기가 존재하지 않아요. 질문하는 곳에 자기가 존재합니다. 자기가 우리라는 집단 속에 용해되어 있으면 대답만 가능합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으로 살아 있을 때, 질문이 시작됩니다.
생각해 봅시다. 대한민국의 인재들이 대답하는 인재로 길러졌는지, 아니면 질문하는 인재로 질러졌는지, 우리 지식인들이 질문과 대답 사이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를 세계만방에 보여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2010년 11월 서울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렸죠.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11월 12일에 폐막 기자회견을 합니다. 근데 회견 초두에 미국 기자들이 자꾸만 중간선거 참패와 한미 FTA 회담 결렬을 거론하면서 마치 자신의 지도력 부족을 지적하듯 질문을 해댑니다. 그러니 오바마는 아마 이 곤혹스러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좀 바꾸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한국이 훌륭하게 호스트를 했으니 한국 언론의 질문을 하나 받겠습니다"라며,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줍니다. 세계 최강 국가의 대통령이 특정 국가의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준다는 것은 상당한 특혜 아니겠습니까?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도 하고요.
자,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들은 지금 머릿속에 어떤 풍경이 그러지십니까? 거의 모든 언론사에서 몰려든 한국 기자들끼리 서로 질문하려고 경쟁하듯 손을 들엇을 것 같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국이라는 국호를 거명하면서까지 질문을 하라는데도 손드는 한국 기자는 한 명도 없었어요. 오바마는 "정말 없어요?(anybody)" 하고 재차 묻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습니다. 그때 어떤 동양인 기자가 손을 들고 말합니다. "나는 사실 중국인이지만 아시아인을 대표해 질문하겠다." 그러자 오바마가 "한국 언론의 질문을 받겠다고 했으니 양해해 주길 바란다"며 거절합니다. 하지만 이 중국 기자는 "한국 기자들만 괜찮다면 꼭 질문을 하나 하고 싶다"며 집요하게 요구했고, 이 옥식각신 속에서도 질문하려는 한국 기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결국 오바마는 중국 기자에게 질문권을 줍니다. 회견이 끝날 때까지 질문하는 한국 기자는 없었습니다. 이 기자회견 장면을 보면서 얼굴이 화끈거리더군요. 질문을 하려는 한국 기자들이 나타나지 않자 오바마 대통령이 짓던 어색한 미소가 기억에 남습니다.
기자들은 우리나라에서 상위에 속하는 지식인들입니다. 또 기자들은 질문권을 차지하려고 서로 경쟁하는 구조 속에 있을 것 같은데, 단 한 명도 손을 들지 않은 것이 참 이상했습니다. 그것도 한 번만 물었던 게 아니었는데 말이죠. 반면 질문권을 따낸 중국 기자는, 최근 미국 정부가 내놓은 여러 정책들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를 희생시키는 것 아니냐는 등의 공격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왜 한국 기자들은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요? 매우 간단한 이유일 것입니다. 질문을 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질문하는 것이 훈련되지 못했습니다. 대답하는 인재로만 길러졌기 때문입니다. 대답만 하는 인재로 길러진 결과가 어떻습니까? 호기심도 문제의식도 생기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욕망이 사라지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 모호해질 때 상상력이 사라져 버립니다. 창의성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런 현상이 산업으로 연결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끔찍하지요? 대답 잘하는 일과 질문 잘하는 일 사이에는 엄청나게 큰 간극이 존재해요. 앞으로 대답하는 인재보다 질문하는 인재가 많아져야 비로소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와 정치와 산업이 서로 호융하는 발전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사례를 더 볼까요? 2011년 12월 12일자『조선일보』기사입니다. 기사 제목은 "질문도 못하는 대학생들이 어떻게 자본주의 혁신 이끌겠나"로 달려 있습니다. 기사는 한국 학생들이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더군요. 기사 말미에 폴 베르간 전前 노르웨이 공과대학 교수의 말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학생들이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그렇다면,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토론하는 문화를 어떻게 정착시킬 수 있을까요? 시스템을 갖추고 기술적인 배려를 하면 가능해질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걸요. 제가 보기에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토론하는 문화는 억지로 시도해서 정착시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 문화 속에서 살 학생들을 다르게 잘 배양하여, 문화 자체가 그런 식으로 드러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르게 배양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 토론이 되지 않을까요?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할 말이 없을까요?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문제의식이 없을까요? 세계에 대하여 호기심이나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호기심이 없을까요? 욕망이 발동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욕망이 발동되지 않을까요? '자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독립적 주체로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운 대로 움직이기만 하려고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주체가 독립적이지 못하면, 즉 주체가 덕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면 세계를 자신만의 맨 얼굴로 마주할 힘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질문이 왜 중요할까요? 질문하는 능력은 단순히 대답과 질문 사이의 문제에 한정되기 않습니다. 질문하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은 바로 독립적 주체를 회복했는지 못했는지 하는 문제와 곧장 연결됩니다. 덕이 드러났느냐 드러나지 못했느냐 하는 문제와도 직결됩니다.
덕이라고 하는 '터'를 가진 독립적 주체라야 지식을 지혜로 승화시킬 수 있지요.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건너갈 수도 있지요. 자신을 인격적으로 성숙시킵니다. 인문적 통찰과 미학적 승화를 완성합니다. 지식이나 이념을 뚫고 나온 독립적 주체라야 자신의 삶을 행복이라는 각도에서 영위합니다. 자유를 구가합니다.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합니다. 상상력도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서 싹을 틔웁니다. 튀어나오는 질문을 붙잡고 계속 꼬리를 연결시켜 추적하며 꿈을 꾸는 일, 이것이 바로 상상하는 일이죠. 창의성도 바로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질문도 없이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동선에 대한 질문이 없이 어떻게 그 동선이 나아가는 방향을 앞설 수 있겠습니까? 자신에 대한 질문이 없이 어떻게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대답은 그 사람의 성숙 정도를 표현하지 못해요. 질문이 표현합니다. 대답은 그 사람의 수준을 반영하지 못하지요. 질문이 반영합니다.
욕망, 장르를 만드는 힘
오늘날 한국이란 나라의 화두는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저는 현대 한국의 화두는 상상력, 창의성이라고 봅니다. 상상력과 창의성은 다양한 형태의 성취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들이기도 하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삶 자체를 행복으로 인도해 주는 길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계속 이야기했지만, 상상력과 창의성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질문은 욕망이 작동해야 가능하겠죠? 욕망은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는 터전이에요. 이 터전을 잡고 있는 삶은 주도적이고, 일류이며, 행복하며, 역동적입니다. 이 터전을 잡고 있는 개인들이 많이 모인 사회도 그러하고요.
이런 질문을 한번 해보죠. 여러분은 근대인입니까? 현대인입니까? 당연히 현대인이라고 대답하시겠죠? 여러분이 상대하는 고객이나 여러분들이 관리해야 하는 조직 구성원들은 현대인입니까? 근대인입니까? 역시 현대인이라고 대답하시겠죠? 그럼 여러분 자신이나 여러분이 상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현대인이라고 할 때, 어떤 점에서 근대인이 아니라 현대인이라고 합니까? 현대인은 근대인과 달리 무엇을 욕망합니까? 현대인은 어떻게 대우해 줘야 더 좋아하는 유형입니까?
사실 이런 질문에 답을 하는 분들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질문 자체를 시도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죠. 현대인의 욕구를 가장 민감하게 궁금해 하는 기업들의 임원들도 이런 질문은 하지 않더군요. 물론 이런 질문이 꼭 있어야 현대인에게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건 아닐 수도 있지요. 왜냐하면, 의식하지 않고도, 즉 질문하지 않고도 감각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또 그 감각적인 반응이 매우 제대로 된 경우가 많거든요. 세상살이는 어떻게 하다 보니 딱 들어맞았다고 하는 경우들이 더 많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개인 개인들의 경우에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겠지만, 이런 태도가 한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라면 좀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인을 상대로 일을 하면서, 그 상대들을 대상으로 전략을 세웁니다. 판매 전략이나 설득 전략 등등이 있을 테지요. 그런데 상대의 정체를 모르고 세운 전략이 정말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을까요? 사실 기업들의 많은 전략이 이러하더군요. 기업만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겠죠. 새로운 정책이 나올 때도 이것이 정말 현대적인가라는 의심이 들 때가 많습니다. 현대적인가라는 말은 바로 미래를 잘 준비한다는 뜻이겠지요? 미래를 준비한다고 하면서 현대의 정체를 모른다면, 미래를 정말 잘 준비할 수 있을까요? 현대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바로 미래 전략입니다.
그런데 현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실 미래를 어디로 갈 것인가, 문명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라는 질문들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까지 이런 질문에 명확히 대답하고 나서야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질문이 없이도 살 수 있는 수준의 나라였어요. 그런 수준의 질문이 굳이 필요 없는 나라였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이런 질문은 주로 선진국에서 하거든요. 선진국이 현대의 정체를 진단하고 미래의 방향을 예측하고, 거기에 맞는 제도나 물건을 만들죠. 그러면 그 다음 수준의 국가들은 그것을 따라서 합니다. 선진국에서 만든 문명의 비전을 수행해 주는 거지요.
이때 문명의 방향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수준이 되면 물건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를 개척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보다. '자동차'라는 장르를 개척하지요. 만년필을 생산하는 것보다는 '만년필'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욕망, 질문, 예민함 등등이 작동하는 데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대답만 하는 인재로 채워진 사회에서 장르의 개척은 불가능합니다. 모범생들은 할 수 없는 일들이에요. 파괴적이고 불만덩어리이며 비체계적인 인재들에게서나 기대되는 일들입니다. 흔히들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문화 민족이라고 합니다. 문화 민족은 문화적 분위기가 사회를 주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문화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문화라는 것이 바로 인문이 구체화된 현상입니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人文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문화이지요. 문화가 정치나 제도 혹은 산업들과 유리되어서, 다른 하나의 분야로 따로 존재하는 한 문화 민족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문화가 곧 산업이고 정치의 성숙화이고 제도의 선진화와 관련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는 수준, 이것이 바로 일류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새로 들어서서 '미래창조과학부'라는 부서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야심차게 미래를 준비하겠다고는 하지만, 여기에 '인문'이 빠져 있습니다. 새로 정부를 구성하면서, 인문에 관련된 발언을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더라고요. 지금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인데도 말이죠. '미래', '창조', '과학'이 '인간의 동선人文'에 대한 통찰이 없어도 정말 가능할까요? 혁명을 하더라도 문화를 등에 업고 혁명을 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시카고 대학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1890년 미국의 대부호 록펠러가 세운 시카고 대학은 1929년 로버트 허친스 총장이 취임하면서 일대 전환을 이루죠. 바로 인문 고전 독서를 내용으로 하는 '시카고 플랜The Great Book Program'을 세운 거예요. 어떤 분야의 학생이든지 졸업 때까지 100권의 인문 고전 도서를 읽어야 하는 것이죠. 이런 교육 결과 때문에 시카고 대학에서 그 많은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증론입니다. 사회나 세계의 흐름을 꿰뚫지 않고서 진정한 변화나 창조는 불가능하지요. 여기서 말하는 사회나 세계의 흐름이란 바로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방향입니다. 흐름을 모르면서 하는 변화의 시도는 그냥 수선피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 그러면 장르라는 것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볼까요? 힙합이라는 장르를 예로 들어 봅시다. 1970년대 뉴욕 빈민가 뒷골목에서 오갈 데 없는 흑인 청년들이 자기들의 리듬감과 자기들의 신체적 조건, 자기들의 경제적 조건에 맞춰서 그냥 자기들 맘대로 즐긴 거예요. 디제이들이 음악의 간주 부분만 반복해서 틀어 준달지, 그 반복된 간주 부분에 맞추어 독특한 춤을 춘달지 하면서 거기에 자신들의 감정을 실은 거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들만의 정서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어떤 외부적 간섭도 발을 들여 놓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놀면서 음악이란 것은 무엇이어야 한달지, 춤이란 것은 무엇이어야 한달지 하는 것을 고려해서 시작했다면, 절대 지금처럼 힙합이라는 장르는 탄생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은 "우리는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하지?", "우리는 어떻게 춤을 춰야 하지?", "논다는 건 어떤 거지?" 따위의 질문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놀고 싶은 대로, 욕망이 이끄는 대로 하였던 것, 이것이 힙합이라는 장르의 출생 인자입니다. 장르는 이렇게 탄생합니다.
개그맨 김병만 씨가 어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서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내가 이렇게 해도 사람들이 웃지 않고, 저렇게 해도 웃지 않더라.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리자. 그러니까 웃더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하는가? 대답만 할 줄 알기 때문이에 그래요. 또다시 말하면, 튼튼한 자기 검열 시스템에 의해서 자기가 관리받고 있기 때문이에요. 바로 체계, 이념, 지식, 가치관, 신념 등등 아니겠어요? 이러한 자기 검열 시스템에 의해 세계를 보면 인문적 더듬이는 성장할 수가 없죠. 인문적 통찰은 불가능해요. 인문적 통찰을 갖는 사람들은 어떤가요? 자기가 자기로 살아있는 사람들은 어떤가요? 예민함을 유지합니다. 욕망이 꿈틀거립니다. 그런 사람이 장르를 만듭니다.
장르는 나의 이야기에서 흘러나온다
앞에서 저는 욕망이 꿈틀대는 사람이 장르를 개척한다고 말했는데요. 어떠신지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나요? 아니면 그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 듯 멀게만 느껴지는 얘기인가요?
살아 있는 욕망과 질문하는 힘이 있어야 자신만의 장르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제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 보겠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지 못하면, 그건 모르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논증'이나 '웅변'이나 '주장'이 횡행하는 시대를 살아왔지, '이야기'의 시대를 살지 못했어요. 안타깝지만 사실이에요. 그럼, 왜 우리는 이야기의 시대를 살지 못했을까요? '내'가 아닌 '우리'의 시대, 집단의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이지요. 이야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할머니가 계시던 아랫목에 있고, 조그만 샛길에 있고, 저잣거리에 있고, 공원 벤치에 있지요. 학교와 광장과 조직 속에는 이야기 대신 논증과 주장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의 한편에는 지성과 이성, 또 한편에는 쾌락과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지성과 이성이 지배하는 곳은 집단이 지배하는 곳이지요. 즉 우리, 관념, 이념 따위가 지배하는 곳이었어요. 반면 쾌락과 즐거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요? 집단 또는 우리가 아니라 나에게서 확인됩니다.
이제 미래는 집단 속에 용해된 내가 아니라 나의 주도적 활동성이 우리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논증이나 설득 대신에 이야기가 개입되어야 해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 이야기를 하는 곳, 바로 그때와 그곳에 자기가 존재합니다.
이를테면, 거짓말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는 엄밀한 논문 한 편 읽게 한다고 거짓말쟁이를 고칠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피노키오 이야기 한 편 들려주는게 더 좋겠지요. 이야기로 들려주어야 훨씬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논문에는 감동이 없지만, 이야기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왜냐? 이야기에는 '내'가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나'로 존재하면, 거기에는 여백이 존재하여 다른 '나'들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나'들과 공존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이야기를 하는 활동 속에는 이야기 하는 사람이 '나'로 존재하여, 다른 '나'가 끼어들 수 있는 공간을 준비해 두기 때문이지요. 이야기하는 공간 속에서라야 '내'가 다른 '나'를 맞이하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에 감동의 힘이 있는 것은 이런 이유지요. 그런데 논문에는 혹은 주장에는 '내'가 있는 대신에 진리라는 얼굴을 한 보편적인 이념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가 심상이지요. 여기에는 주장하는 사람 외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거나 참여할 공간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백이 없는 것이지요. 노증이나 주장에서'여백'이란 치명적인 결함으로 읽히거든요. 논증이나 주장은 '우리' 것의 테두리 안에서 형성되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되풀이하건대. 우리는 나를 가두는 우리입니다. '나'는 '우리'를 이겨 내고 내가 되어서 자기만의 꿈, 자기만의 행복, 자기만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가끔 대학원 수업에서 리포트 숙제를 내준 다음, 학생들에게 자기가 쓴 리포트를 발표해 보라고 합니다. 이때 조건이 있어요. 준비된 리포트를 읽지 마라.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두지 말고 이야기를 해보라. 학생들 대개는 말문이 막히고 끙끙거립니다. 학생들이 저를 미워하는 제일큰 이유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중에는 순간의 막막함을 금세 떨쳐 내고 자유럽게 자기만의이야기로 술술 풀어내는 학생도 있습니다. 이야기로 할 수 없는 것, 그건 자기의 것이 아니에요. 이야기로 할 수 있는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자기가 제출한 리포트를 이야기로 전달할 수 있는 학생은 장르를 만들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런 사람이 리더로 성장합니다.
저는 여러분들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은 힘이 없습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면 아름답지도 창의적이지도 않습니다.
나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죠? 장르는 자기로부터 나온 이야기에서 흘러나옵니다.
욕망을 욕망하라
『월든Walden』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소로우Henry Davlid Thoreau는 말합니다.
내일 아침에 할 산책이 그리워서 잠을 설치지 못하고,
파랑새 우는 소리에 전율을 ㄴ느끼지 못하거든,
깨달아라.
너의 봄날이 가고 있다는 것을.
이 글은 박노해의 수필집『사람만이 희망이다』에 나오는 소로우의 글을 제가 조금 각색한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예민함이 살아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갈수록 이것을 봐도 시큰둥하고, 저것을 봐도 시큰둥하다면 내적 활동성이 이미 죽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침 산책이 그리워서 잠을 설칠 정도의 예민함, 파랑새 우는 소리에 전율을 느낄 정도의 예민함은 있어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예민함이 살아 있다는 것은 욕망이 살아 있다는 뜻이지요.
비 오는 날 오후에 소주 한잔 생각 안 나면 죽은 목숨이에요. 첫눈 내리는 날 아련한 옛사랑 생각 안 나면 죽은 목숨이에요. 비오면 옷 젖을 생각에 짜증나고, 눈 오면 미끄러질 생각에 근심만 하면 죽은 목숨이란 말이죠. 항상 예민함이 유지되어야 해요.
해마다 봄이 옵니다. 여러분은 여태 몇 번의 봄을 보내셨나요? 스무 번 이상의 봄을 맞이하고 보냈다 칩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스무 번의 봄 가운데 새싹이 돋아나려는 그 순간을 몇 번이나 보셨는지요? 새싹인 것도 아니고, 아직 새싹 아닌 것도 아닌 그 순간을 본 적이 있으신지요? 봄날이 다가오면 우리 주위에 지천으로 깔려 있지요. 예민함이 유지되는 사람은 이념이나 개념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바로 새싹 같은 구체적인 세계와 직접 접촉합니다.
우리는 춤고 눈 내리는 겨울이 지나고, 온기가 대지를 채워갈 때쯤, 흔히들 "봄이 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봄'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봄'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봄'은 없어요. 그냥 개념일 뿐이죠. 얼음이 풀리고 땅이 부드러워지고, 새싹이 돋고, 푸른 잎이 펼쳐지고, 처녀들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건들이 벌어지는 그쯤 어딘가에 그냥 두루뭉술하게 '봄'이라는 이름표를 달아 준 것에 불과한 거예요. "봄이 왔다!"라는 말은 진정한 의미에서 감탄의 언사가 될 수 없어요. 건성건성 얼버무리는 것 이상이 아니에요. 익숙한 개념을 그저 답습하여 대충 말해 놓고, 무슨 큰 느낌이나 받은 것처럼 착각하는 거지요. 사실은 자기기만입니다.
진정으로 봄을 느끼는 사람은 "봄이 왔다!"라고 대충 말하지 않아요. '봄'이라는 개념을 무책임하게 내뱉지 않아요. 대신 봄을 구성하는 구체적 사건을 접촉하려 하죠. 얼음이 풀리는 현장으로 다가가, 풀려 가는 얼음에 손을 대 봅니다. 새싹이 돋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찾아가 풀어지는 땅의 온기를 살갖이나 코로 직접 느낍니다. 봄을 거저 '봄'이라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사건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죠. 얼마나 품격 있는 삶입니까? 봄을 개념으로 말하는 사람과 봄에 일어나는 사건을 직접 경험하는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성숙과 인격의 깊이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벌어집니다.
만일 당신의 연인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봄이 왔다!"는 말로 시작한다고 합시다. 안타깝게도 당신을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사랑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좀 건성으로 말하고 있네요. 당신을 심연의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감정으로 사랑한다면, 아마 이렇게 대충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람을 최고도로 예민하게 만들죠. 고도의 예민함을 갖게 되면 개념이 보이지 않습니다. 개념 이전의 사건이 직접 경험되지요. 자기가 만졌던 풀려 가는 얼음을 얘기하거나 직접 관찰한 새싹 위에 맺힌 이슬에 대해서 말해 줄 것입니다. 혹은 당신을 데리고 직접 봄기운이 올라오는 흙냄새를 맡게 해주고 싶어 할지도 모르죠. 진실은 매우 구체적인 거거든요.
그렇지요? 예민함이 유지되는 사람은 "봄이 왔다!"고 말하지 않아요. 직접 새싹을 보지요. 예민함이 유지되는 사람은 보지 않아요. 문제를 봐요. 예민함이 유지되는 사람은 이성적 대답을 하지 않아요. 욕망에 기초한 질문을 해요. 문제에 집중하고, 일상에 집중하고, 구체에 집중하는, 이런 예민함이 유지되는 사람들은 유연해요. 욕망이 활동하기 때문이예요.
명사로는 계란 하나도 깰 수 없다
저는 어렸을 때, <톰과 제리>라는 만화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보곤 했습니다. 작고 어린 주 제리와 크고 못된 고양이 톰 사이에 옥신각신 벌어지는 다양한 얘기들이지요. 근데요, 자세히 보면 정작 못 된 놈은 제리일 때가 많아요. 이야기 구성이 대개는 제리가 톰을 약 올리고, 약이 오른 톰이 제리를 쫓다가 결국엔 당하는 식이거든요. 계속 골탕 먹는 톰이 불쌍했어요.
자, 그날도 제리가 톰을 깐죽깐죽 약 올립니다. 화가 난 톰이 죽어라 쫓아가지요. 쫓아가고 또 쫓아가는데 제리가 살짝 피합니다. 그러면 맹렬히 달려오던 톰이 벽에 부딪쳐서 찰싹 달라붙어요. 마치 종잇장처럼 벽에 달라붙습니다. 종잇장 모양으로 달라붙어서 잠시 머무르던 톰이 서서히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하지요. 이미 톰은 거의 사망의 경지인지라, 자신을 포기한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벽을 타고 흘러 내려오는데, 벽에 있는 굴곡과 모양을 모두 경험(!)하면서 내려오지요. 다 흘러 내려와 바닥에 종잇장처럼 쭉 뻗어 있던 톰이 1~2초 가량 그대로 있다가는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원래 모양을 회복합니다. 이것이 <톰과 제리>에 가장 자주 나오는 장면 같아요.
근데요, 이 이야기 속에서 만약 톰이 자기의 원래 모습인 고양이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벽에 있는 모든 굴곡과 세세한 틈새 등을 경험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그런 데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지만, 자기 모습 그대로는 접근도 할 수 없지요. 톰이 기절해서 자기 몸의 형태를 포기했기 때문에 비롯 그 모든 굴곡이나 세세하게 갈라진 틈새들을 다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대학 다닐 때 친구의 자취방을 찾아가 내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내기에는 그날 저녁의 식사와 술이 걸려 있습니다. 그 당시에 자취집은 마당에 수도가 있고, 그것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세수도 하고 빨래도 하고 그랬지요. 그런데 그 수돗가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세숫대야가 있습니다. 모양은 주둥이가 크게 밖으로 벌어졌고, 재질은 스테인리스로 된 거예요. 제가 말합니다.
"내가 계란을 이 방 어딘가에 놓을 텐데, 그러면 네가 저 세숫대야로 그 계란을 깰 수 있겠니, 없겠니? 네가 깨면 내가 밥도 사고, 술도 사 주마, 만약 못 깬다면 네가 다 사라."
친구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깰 수 있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 계란을 어디에다 놓을까요? 저는 계란을 두 벽과 방바닥이 만드는 바로 그 모서리의 구석에다가 얌전히 가져다 놓습니다. 그러면 그 친구가 세숫대야를 가지고 와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데 도저히 그 구석까지는 닿을 수가 없어요. 결국 제가 이깁니다.
그런데 계란을 깰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지요. 뭘까요? 그것은 세숫대야가 자기 모습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모습을 포기하고 찌그러지면 그 모서리에 닿을 수 있겠죠. '자기 포기!' 계란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세계는 잠시도 정지하지 않습니다. 항상 움직여요. 그런데 인간의 사유, 개념, 지식은 모두 정지되어 있어요. 틀이 갖추어져 있지요. 명사형이에요. 이 특정한 틀을 포기하는 유연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계란 하나도 깰 수 없어요. 지식과 이념의 틀로부터 벗어나서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힘'이에요. 바로 '주체력'이고 '덕'이에요. '욕망'의 친척들이지요. 거듭 강조하건대, 인문적 통찰은 명사 형태로 시멘트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어 가는 틀을 자기가 뚫고 나올 수 있을 때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대답하는 주체에서 질문하는 주체로 전변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성에서 욕망으로, 보편에서 개별로 회귀하라
우리의 인문학 산책이 어느덧 갈무리되고 있군요. 여러분과 제가 함께 인문의 숲을 거닐며 나눈 얘기를 간단히 곱씹어 보겠습니다.
인문학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 인간의 결 혹은 인간이 움직이는 동선을 파악하는 학문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그 무늬와 동선을 자신의 총체적인 능력으로 일거에 알아채는 능력을 통찰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통찰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인문적 통찰을 발휘하지 못할까요? 바로 자신을 지배하는 틀을 스스로 만들고, 거기에 자발적으로 지배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견고한 틀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추지는 새로운 사태나 흐름에 대하여 '좋다!' 또는 '나쁘다'와 같은 가치론적 판단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신은 충일해지기보다는 자발적으로 고갈됩니다. 감정적인 차원에서 만이 아니라 창의성이나 지성적인 측면에서까지 고갈은 연쇄적으로 일어납니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이지요.
인문적 통찰은 우리 앞에 등장하는 사태나 사건을 인간이 그리는 무늬 위에다가 올려놓고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 능력은 자신이 고갈되는 길목에 서 있지 않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럼 그 값진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성에서 오지 않습니다. 체계에 대한 습득에서 오지 않습니다. 본질에 대한 숭배에서도 오지 않습니다. 정치한 계산 능력에서 오지 않습니다. 이념에 대한 철저한 수행에서 오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종합적이며 근본적이며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능력에서 옵니다. 오히려 욕망에서 옵니다. '사유'에서가 아니라 '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덕'이라고 했습니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인류의 진보는 모험과 창의성과 역경의 감내로 이루어집니다. 바로 통합적인 힘이 발휘되는 것이지요. 이 힘이 우리를 대답에만 빠지지 않고 질문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지식을 지혜로 바꿔 줍니다. 지식의 양을 자유와 행복으로 바꿔 주기도 하지요. 인격적 완성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이 통합적인 힘이 바로 욕망입니다. 자신에게만 있는 비밀스런 충동입니다. 이 충동의 충격에 의해 자신이 비로소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보편과 집단과 이념에서 벗어나 개별적 자아의 욕망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가두는 우리입니다. 우리 속에 갇혀 자신이 우리의 일부로 녹아들면 안 됩니다.
제가 첫 번째 인문의 숲에서 읊었던 시를 한 번 더 들려 드리죠. 처음과는 다른 울림으로 다가올 겁니다.
춤춰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 없는 것처럼
살아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자, 이제 여러분들과 함께한 인문의 숲 산책이 끝나 가는군요. 제가 즐거웠던 만큼 여러분들도 즐거우셨나요? 아쉽지만 저와의 동행은 여기까지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여러분들과나눈 긴 이야기들은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각자 거니는 인문의 숲 속에 이 한마디 말이 메아리가 되어 울린다면 저는 더없이 기쁠 겁니다.
"오직 자신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오직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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