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잘 물든 단풍이 예쁘다

오키Oki 2013. 6. 28. 18:39

잘 물든 단풍이 봄꽃보다 예쁘다 -법륜 스님

육월을 이틀 남겨두고 매미가 올여름 처음으로 울기 시작했다.

나와 남편은 이제는 봄꽃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하지만 잘 물든 단풍이 되기위해 즐공은 할 수 있다.

 

 

 

30년간 공부한 어느 지식인의 자기 성찰

- 김병완 지음 공부의 기쁨이란 무엇인가 LEARN 』에서-

"끝까지 공부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즐기는 것뿐이다." 

 

 

삶은 배움이고, 배움을 통해서만 창조적인 삶에 도달하며, 창조적인 삶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을 안겨준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우리가 지금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 가까운 미래는 어떠한 모습이고 사회인지 예측할 수 없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앞을 내다보기 위해 공부는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인간이 이상과 가치를 위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반대로 이상과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삶은 동물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지금보다 나은 세계를 꿈꾸고 건설하려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기에 가능하다. 

 

 

국가의 성장동력, 바로 당신이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우리의 삶을 너무나 급격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유비쿼터스ubiquitous의 시대를 넘어, 이제는 전 세계 모든 개인을 하나의 시스템에 연결시키는 것이 가능한 시대가 오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사회가 다가오고 있다. 지금 우리가 이용하는 웹2.0, 웹3.0이 자동차와 같은 수준의 네트워크라고 한다면, 비행기에 비유될 수 있는 '메가 네트워크'가 가까운 미래에 온다. 도로 위에서의 자동차가 시속 200킬로미터 이상 달리기에는 역부족이듯 하늘에서 자유로이 나는 비행기와는 속도와 성질 면에서 차원이 다른 것이다. 과거 우리 시대를 이끌어온 교육이라는 패러다임이 아니라 그 교육을 대체할 수 있고 시대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이는 지금까지 인류 지식의 총체를 향상시킨 대학의 기능과 역할을 대신할 것이다.

2006년 놀랍게도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로 'You'를 선정, 발표했다. 특정 유명인이 아닌 그냥 일반인 '당신'인 것이다. 디지털로 무장한 네티즌을 지칭한다고 보이는 'You'를 선정한 점에서 특이할 만하다. 현재 우리의 위치와 영향력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시대가 바뀌면서 높아졌다. 이제 권력과 부의 원천은 지식이 아니라, 바로 공부하는 '당신'자신이다.

세계적인 석학 레이 키즈와일이 그의 저서《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 특이점이 온다》에서 제시한 개념을 필자도 상당히 동감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사회경제적으로 '너머를 알 수 없는 커다란 단속적 변화가 이뤄지는 지점'인 싱큘래리티singularity가 오고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는 게 가능한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 성장동력은 더 이상 과학도, 기술도, 예술도, 스포츠도, 학문도, 물질도 아니다. 이제 인간 스스로가 되어야 하고, 인간 자체에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더 키우고 향상시키는 것이 바로 공부하는 인간이다. 바로 당신이다.

 

 

 

시대의 흐름에 꼭 맞는 공부를 하라

《유엔미래보고서》라는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이 미래 예측을 하고 있다.

"미래를 예측하는 자만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으며, 더불어 제대로 준비할 수 있다. 준비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크게 공감 가는 이야기다. 미래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채 준비하는 당연히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예측하는 것이 준비하는 것보다는 더 선결 과제며, 더 중요하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새로운 개념의 공부를 해야 한다. 미래 사회는 지식조차도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다. 어제 배운 지식은 하룻밤 자고 나면 더 이상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시대다. 교과서에나 있는 지식은 지식 본연으로서의 가치가 희소한 시대다. 이제는 밤사이 업데이트된 새로운 지식들을 날마다 평생 익히고 주기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것이 시대에 맞는 공부다.

《메가 트랜드》시리즈로 잘 알려진 존 나이스비트도 이와같은 견해를 저서에서 밝힌 바 있다. 지금까지 인류 지식의 증가에 가장 많은 공헌을 해왔던 고전들이 결국 설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새로운 매체에 내놓고 마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글자가 아닌 영상의 시대가 온다. 문맹이라도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시대다. 이른바 '글로벌 네트워크'시대다. 개인의 지식이 스승도 되고 교과서도 된다. '융합'이라는 시점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개인용 컴퓨터는 대중화되어 이제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컴퓨터, 인터넷, 핸드폰이 없는 세상을 우리는 상상이나 해볼 수 있을까? 초보 수준이던 환경이 이만큼의 변화를 이끌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차원이 다른 '메가 네트워크' '글로벌 연결망'은 어떠한 시대로 이끌지 선뜻 짐작하기 어렵다. 전 인류의 지식들, 개인과 집단과 학교에 흩어져 있던 모든 지식들이 그야말로 하나로 집결되는 것이다. 지식이 지식을 창출하는 시대가 온다.

 

 

 

미래 사회에서 공부가 꼭 필요한 3가지 이유

농경 시대에는 종교가 권력을 가졌다. 그리고 산업 시대에는 국가가, 그 이후 정보화 시대에는 기업이 권력을 가졌다. 후기정보화 시대인 지금에는 개개인이 권력을 가진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농경 시대에는 땅이 많으면 그야말로 권력가였다. 이를 신께 감사해했다. 산업 시대에는 자본이 많으면 부자였다. 누가 많이 가졌겠는가? 당연히 국가였다. 정보화 시대에 들어오면서 아이디어, 지식, 정보 등의 이른바 소프트웨어가 부의 대명사로 바뀌었다. 이것이 밀집된 곳은 기업이었다. 이제 이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후기정보화 시대, 인지 기술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시대를 이끌고 갈까? 새로운 지식을 창출해나가더라도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창조적인 공부를 하는 당신의 가치 그 자체가 핵심 키워드화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들이 인구 증가 추세를 보이지만 한국은 약 3천만 명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최하위임을 감안해보면 무조건 아니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미래학자들의 여러 견해들을 통찰해볼 때 저출산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의 미래는 그리 밝지만은 않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하지만 인구수가 결코 단순히 국력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1인당 생산 에너지가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공부를 통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나오면 1인당 활용 에너지, 적용 에너지, 창조 에너지 등은 그 양과 질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미래에는 공부하는 당신이 가장 큰 국가 경쟁력이다.  이것이 미래 사회에서 공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첫 번째 이유다.

기술과 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지식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잘못된 지식을 사장시켜버린다. 어제까지는 옳다고 여겼던 지식이 융합되고 변화되면서 하룻밤사이에 다른 상식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작년과 올해가 다를 것이고, 올해와 내년이 또 다를 것이다. 다시 공부해야 하고 다시 습득해야 한다. 직장에서 몇 년 동안 일을 배우고 해왔던 것들이 이직하면서 일을 다시 배우고 가야 한다. 이러한 반복은 계속될 것이고 주기는 점점 짧아질 것이다. 지금도 넘쳐나는 '샐리던트'들을 보면 감이 오지 않는가?

제2, 제3의 황혼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사실 그전의 전공이나 직업과는 무관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대학 교육의 기능과 역할이 갈수록 축소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셈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 스스로는 그 변화를 느끼고 있으며 자각하고 있다. 학습과 배움, 그리고 활용과 공헌의 사이클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수백 년 동안 인류 문명의 발달과 지적 총체의 향상을 이끌어왔던 '교육'이라는 패러다임은 지금까지 그 기능과 역할을 충실히 다 해왔다. 특히 한국은 교육열이 높아서 문맹이 적을뿐더러 교육의 혜택을 충분히 누려왔다. 오히려 과열된 교육열 때문에 지금의 한국이 가능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을 정도로 교육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제 교육이 그 역할과 기능을 다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시대는 더욱더 효율적인 경제성을 추구한다. 앎의 접근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날 것이다. 기업의 패러다임, 국가의 패러다임, 가족의 패러다임, 문화의 패러다임, 인간의 패러다임 등 수많은 전환을 겪을 것이다. 학창시절 배운 것만으로 생존할 수는 없다. 바로 이것이 미래 사회에서 참된 공부를 꼭 해야만 하는 두 번째 이유다.

'프로슈머'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제품이나 상품, 작품 등에 직접 접촉해 경험하고 누리고 이용하고 만드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제 더 이상 소비자는 물건을 사는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 개념이 확장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생 역시 단순히 배우는 사람이 아니다. 지식이나 경험, 기술 등을 네트워크상에서 직접 만들고 경험해보고 활용해보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수동적인 학습자가 아니라 주도적으로 이용하며 체험하고 창출해내는 능동적 지식의 창조자인 것이다. 이때 창조적 배움의 패러다임이 시작된다. 누가 교사이고 누가 학생인지 경계가 모호해지낟. 교사도 없고 학생도 없고 다만 스스로 배우고 익히려는 공부하는 사람만 남는다.

미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사회다. 변화를 예측하는 지표는 수도 없이 많다. 일례로 비디오와 DVD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신문도 다르지 않다. 구독률과 인쇄량을 보면 확실히 줄었다고 보고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거대한 네트워크 안으로 흡수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재미있는 한 가지 사실은 유독 '책'만이 지식 흡수 수단으로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예측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굳이 종이책이 아니라도 시청각 기능이 있는 전자책도 포함될 것이다. 지금은 다소 초보적인 단계지만 책 속에 하나의 등장인물로서 직접 이야기를 체험할 수 있다거나 책 내용을 자신의 질병에 적용시킬 경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시뮬레이션까지 동시에 해볼 수 있다거나 전문가의 자문이 내제돼 있어 확인하는 기능이 있다거나 하는 등의 고차원적인 책이 앞으로 개발되고 유행될 것이다. 정보가 난무하는 이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공부다. 이것이 우리가 미래 사회에서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다.

 

 

 

보이티우스 ; 독방의 사형수에게도 공부는 희망이다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책은 무엇일까? 바로 6세기경 나온 보이티우스의 저서《철학의 위안》이다.

이 책은 세계적인 거장들, 특히 단테와 초서, 아퀴나스 등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오랫동안 대중을 계몽시켰다. 행복의 본질에 대해 다룬 가장 심오한 책이다.

보이티우스는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최고 교육을 받으며 문학, 철학, 산술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 등 다양한 학문의 혜택을 받은 당시 상당한 특권층의 인물이었다. 20대 후반쯤 젊은 나이에 집정관으로 임명되기까지 했다. 그는 정치가이자 철학가이자 신학자였다. 로마 원로원과 사회의 중심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존경받는 학자였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국 시대로 접어들었을 때도 보이티우스는 그대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최고 행정사법관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왕실의 음모로 반역죄를 뒤집어썼고 결국 그의 화려했던 삶도 사형 선고를 받음으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좋은 집안과 좋은 교육, 그리고 좋은 평판까지 받으며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리던 사람이였으나 하루아침에 완전히 몰락했다. 두려움과 절망과 분노로 가득한 독방의 사형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억울한 현실과 희망이 없는 비극적인 운명이 그를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었다.

그 상황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불행히 생을 마감하는 것이 보통이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보이티우스는 달랐다.

육체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도 자유로운 마음의 소유자가 되고자 했다. 마침내 감옥 안에서 수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감동과 행복과 위로의 본질을 일깨워줄 위대한 책을 저술하기에 이르렀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긍정하게 했을까?

스스로 이겨내려는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바로 마음공부였다. 두려운 곤경에 처했음에도 특별히 철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내다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마음을 통찰했다. 잃어버릴 뻔 했던 자신을 찾을 수 있었고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이는 결국 후대에 길이 남을 걸작을 탄생시켰다. 이것이 진정 공부하는 이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참된 공부를 하는 사람은, 성공과 실패에 좌지우지하거나 날뛰지 않고 절망적인 상황이 닥칠지라도 요동하지 않으며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인이 된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대조하며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히 깊이 질문하고 고민했다. 무엇보다 악이 선을 이기는 데 대해 많은 사색을 했다. 악은 결코 선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에서 비롯된 모든 시작은 인간을 더욱 고귀하게 만들지만, 악의 성공은 인간을 그 어느 곳으로도 이끌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악한 목적을 이룬 사람은 동물 그 자체에서 머물지만, 선한 목적을 이룬 사람은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어 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악을 멀리하고 덕을 키워라 너의 정신을 올바른 희망에 끌어올리고 높은 곳을 향해 겸손하게 기도를 올려라. 만일 네 자신에 대해 정직해지기를 바란다면 너에게 커다란 필연성, 즉 선해져야 한다는 동기가 부여된 것이니 이는 네가 만물을 살피는 한 심판관의 시신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운은 선택에 의해 오고 가는 것이므로 의존할 만한 거이 못 된다. 계절이 오가듯 운이란 건 올 때처럼 떠날 것도 예상해야 한다. 행복의 원천은 높은 지위와 대중의 존경, 부귀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몸소 증명한 셈이다.

권력을 비롯한 외적인 것들의 추구는 진정한 행복을 얻는 데 있어 현실상의 욕심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우주의 질서는 신을 알고자 하는 그것이 되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자기 성찰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운은 변하지만, 신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신에게 더욱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신의 섭리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내면을 찾을 수 있었다. 또 인간의 자유의지란 것은 신의 놀라운 능력 아래 있으므로, 인간이 어떠한 선택을 한다 해도 신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인도를 구하지 않는 선택에 대해서는 신이 간섭하지 않는다. 우주를 구성하는 것은 신의 섭리며, 운은 다만 인간의 개인적인 삶에만 관여한다.

따라서 섭리에 근접한 삶을 사는 사람은 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개인의 인생이 오로지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운명에 완전히 묶인 채로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영혼의 평온과 위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은 스스로 신에게 다가가야 하며 그때야 섭리를 깨우친다. 대신 혼란과 불안으로 가득한 사람은 운명의 가혹함만을 겪는다. 자기 의지대로만 누리고 통제하는 사람은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삶이다. 다음과 같은 말 속에서 그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거대한 우주는 하느님의 선한 세계며, 저 아래 지구 한 모퉁이에 나를 유배시킨 앙과 간신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유배지는 내가 아니라 이 선한 하느님의 세계에서 쫓겨난 바로 그들임을 깨닫고, 고요한 평화에 이른다."

타인을 지배하기 위해 자신을 담금질하는 잘못된 공부를 해왔던 과거를 깨닫고 감옥에서부터는 공부의 이유와 목적을 선하게 바꾼 것이다.

결국 보이티우스에게 공부란 무엇이었을까? 군림하기 위한 공부가 아닌 자신을 더더욱 낮추는 공부, 신의 섭리와 절대자의 선함을 알고 스스로 성숙해가기 위한 공부가 그에게는 진짜 공부였다.

 

 

 

링컨 : 수많은 좌절에도 공부만은 포기할 수 없다

누구나 알고 있는 에이브리햄 링컨을 굳이 짚고 넘어가는 것은 그를 한 대국의 대통령으로서가 아닌, 평생 우울증으로 고통받은 한 인간으로서 소개하고자 함이다.

그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미국의 총수가 되기 전까지 그의 삶은 시련과 아픔 그 자체였다. 인정받지 못하는 남편으로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왔고, 자신보다 먼저 떠나는 두 아들을 망연히 바라봐야 했던 아버지였고, 연이는 정치 실패로 자실 충동에 시달렸던 불운한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두 번의 사업 실패로 인해 큰 빚을 떠안았다가 그것을 갚는 데만 족히 17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24세에 주 의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고, 30세에 의회의장직에서 낙선했고, 32세에 대통령 선거위원에서 낙선했고, 36세에 하원의원 공천에서 탈락했고, 47세에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했고, 48세에 부통령 선거에서 낙선했고, 50세에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하지만 마지막, 그는 미합중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해답이 보인다. 15세가 될 때까지 링컨은 글을 쓰는 법을 배울 수도 없을 만큼 당시 환경이 열악했다. 그러나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그의 강연에서 느낄 수 있다.

"저는 아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 가지, 읽고 쓰고 외우는 것은 계속해왔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어릴 적 학교에 다닌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조금이라도 계속해서 지식을 쌓은 것은 제게 공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링컨은 사실 초등학교를 겨우 9개월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스스로 책을 통해, 사람을 통해 공부를 계속해나갔다. 그가 얼마나 지독하게 공부했는지, 또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는지 자필 이력서의 일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나는 계속 배우면서 나를 갖춰간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교육의 기회로 삼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쓰기, 산술 정도가 전부였다. 학교에는 거의 다닌 적 없지만 일기는 쓸 수 있었다. (중략) 그다음에는 선거 운동에 참여했고, 그해에 주 하원의원 후보로 지명됐지만 패배했다. 그 후 주 의회에서 활동하는 기간 동안 나는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링컨은 읽고 쓰는 것을 가장 적합한 공부라고 생각했다. 평생 동안 그것을 놓지 않았다. 매일 성경을 읽으며 지혜를 구했고, 위인들의 필체를 그대로 옮겨 쓰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의 필체는 누구 못지않게 훌륭했다고 평가받는다. 링컨이 책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는 책을 선물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변호사 시험에 막 합격했던 시절, 그의 친구는 그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보면, 종종 링컨은 그때까지도 잠을 자지 않고서 책과 씨름하고 있었다. 그는 보기 드문 책벌레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은 학교나 선생님이 아니라 스스로 학습했다는 데 있다. 그는 태만을 혐오하고 근면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다.

"사람이 지켜야 할 최고의 법칙은 근면함이다. 내일이 오기 전에 오늘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자."

누군가 그에게 성공의 비밀을 묻자 그는 "노력, 노력, 노력, 오로지 노력밖에 없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기질에 잠재된 우울증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자살과 광기를 노래한 시들을 많이 지었다. 그 괴로움을 사람들에게 호소하기도 했고, 때로는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병에 그저 굴복하지 않는 한 사람으로 성장해갈 수 있었다.

정신의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우울증은 조금 회복되었다가 재발할 때가 가장 감당하기 힘들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단 회복이 되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온 기분이 들기 때문에 다시는 그러한 상태를 겪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기대하지만, 또다시 발병하면 이제는 더 이상 견뎌낼 수 없다고 생각하며 무너져 내리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다. 링컨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며 가치 없는 삶, 의미 없는 삶으로 살아가다가 생을 마감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중을 덜어내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짐을 짊어졌다. 온몸으로, 정면으로 부딪혀 이겨내고자 했다. 그 방법이 바로 공부였다. 비전을 가지고 전진하는 삶이었다. 목표와 비전이 있었기에 그토록 많은 시련과 아픔과 실패 속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럼 링컨의 비전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쓸모 있는 삶' '존경 받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면서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다른 우울증 환자들처럼 자살을 선택했거나 최소한 비참한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우울증을 공부로 이겨낸 것이다. 좌절과 시련 앞에서도 공부는 그가 지탱할 힘이 되었다. 앞으로의 목표와 비전이 우울증을 견뎌낼 계기가 되었다.

심리학자 앤서니 스토는 조용히 혼자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고립'이 치료 효과가 높다고 말했다. 세상에서 떨어져 자신을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게 의외로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지속적인 질문도 던질 수 있으며 자신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관용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의미 있게 연결해주는 시간이며 그 속에서 철저히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된다. 고립은 또 다른 공부 방법이다. 세속을 잠시 떠나 깊은 산속에서 수양하는 것과 어쩌면 같은 이치다. 링컨 역시 바로 고립을 통해 자신을 이겨낸 경우다. 우울증으로 인해 야기되는 무기려과 패닉 현상, 두려움 등을 극복하고 목표 추구와 의미 부여에 더 강력히 의지했다.

외모나 물질이나 출세보다 인간다운 인간에 되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링컨은 그것을 일찌감치 알았다.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긴장 없는 상태가 아니라 보람 있는 목표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고민을 제거해야 하는 대상으로만 여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고민하는 시간조차 통찰함으로써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라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링컨은 삶 속에서 '무슨' 일을 '왜' 하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자문하고 또 자문하면서 자신을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았다. 꼭 도서관에서, 또는 학교에서 공부해야 공부가 아니다.

링컨처럼, 정신적 고통과 환경 속에서 벗어나 끝없이 자신을 담금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 성찰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짐으로써 삶의 의미와 목표를 되찾고, 그것을 달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의 참된 공부로 인해 미국이 바뀌었고 세계가 변화되었다. 톨스토이는 "역사상 위대한 영웅과 위인이 많았지만 진정한 거인은 링컨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라고 그를 회고하기도 했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유지시켜주는 원동력

공부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그것을 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몰랐던 것을 알았을 때 순간 뇌에서는 놀라운 화학 반응이 일어난다. 쾌감 물질이 분비되고 이로 인해 기분이 좋아진다. 인간은 심리학적으로 욕망의 존재이기도 하다. 가장 수준이 높은 욕망이 지적 충족과 욕망의 존재이기도 하다. 가장 수준이 높은 욕망이 지적 충족과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했다. 공부를 통해 이것들이 충족된다면 인간은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이것이 진리다.

공부는 사람을 장수하게도 한다.《근사록》<위학>편에서는 "배우지 않으면 빨리 늙고 쇠약해진다"라고 기록했다. 기업인 스티븐 코비 역시 "많이 배울수록 오래 산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성경 속 <잠언>에는 "그(지혜) 우편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에는 부귀가 있다 (중략) 그것을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라는 진리가 숨어 있다.

사람에 따라 일도 일종의 공부가 될 수 있다. 퇴직한 직후에 갑자기 많이 늙고 건강도, 기력도 쇠해지는 경우을 종종 본다. 일을 관둔 후에라도 새로운 분야, 색다른 배움을 찾아서 해야 한다. 지적 충족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삶이 이제 모두 끝나버렸다고 생각하기만 해도 벌써 십수 년은 더 늙을 수 있는 일이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모든 일이 끝았다 싶어도 열정을 쏟을 곳은 아직 많다. 거시적 시야를 가져야 창조성이 발휘된다. 이는 온전히 공부를 통해 가능하다.

공부는 인간의 마음을 맑게 해주고, 욕심과 두려움으로부터 마음을 비워준다. 또 마음의 내적 평화를 얻을 수 있게 해준다. 몸과 마음이 오랜 철학의 담론에서는 구별되어 나뉘었지만, 이제는 많은 과학자들이 하나로 보거나 최소한 밀접한 통합체라는 것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마음이 아프고 불행하면 몸도 그대로 따라간다. 마음이 괴로우면 살아도 행복할 수 없다. 반대로 몸이 힘들다면 마음먹기에 따라서 이겨내고 완치하는 경우가 많다.

행복 추구는 결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윈윈 게임'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더 잘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제 몫을 다해야 한다. 그럴 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며 참된 공부가 가능하다.

이러한 주장을 증명하는 사례는 많다. 미국 켄터키 대학의 알츠하이머병 전문가인 데이비드 스노던 박사는 100세가 넘는 수도자가 무려 일곱 명이나 되는 미네소타 주에 소재한 만카토 수녀원을 대상으로 관찰을 했다. 이들은 일반인들보다 현저히 낮은 수치를 보였으며 평균 수명보다 약 4년은 더 오래, 그리고 건강하게 살았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장수 비법은 딱 두 가지였다고 한다. 바로 '일(공부)'과 '명상'이었다. 단순히 절제된 삶과 정신적 안정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정확한 원인을 찾기 위해 사망 후 자신의 뇌를 기증한 500여 명을 연구해본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녀들의 뇌신경 연결이 어마어마하게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뇌는 보통 천억 개의 뇌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들은 뇌세포들 사이의 회로들, 즉 축색돌기의 가지들도 그 간격도 좁고 개수도 많은 뇌신경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장수하면서도 질환에 잘 걸리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삶을 단조롭고 재미없게 설계해가는 사람은 뇌 역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하면서 명상을 통해 정신적으로 뇌가 지루하지 않도록 꾸준히 관리해왔다. 정기적인 일과 공부를 통해 뇌를 끊임없이 훈련시켰다. 또 특이했던 점은 매일 일기를 써왔다. 알게 모르게 뇌에 좋은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있었고 결국 건강한 장수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근육을 사용하지 않으면 약해지듯이 뇌를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건강해지는 이치다.

최근 어느 신문에서 "배우자의 학위가 높을수록 상대적으로 장수한다"라는 재미있는 기사가 났다. 다시 말해 고학력자 아내를 뒀다면 남편 역시 학위가 높은 경우가 많거나, 혹은 그러한 아내의 학식에 자극을 받아 더욱 공부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어쩌면 습관적으로 책을 가까이 하고 자주 공부하는 모습을 통해 자연히 더 좋은 방향으로 서로 개선되어가는 게 당연하다. 누군가 한 사람이 이끌어가면 다른 한 사람도 유익한 습관을 가진다. 이것도 일종의 '공부의 선순환'이 되는 셈이다.

마약류들은 하나같이 도파민을 과잉 분비하도록 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약물 중독은 더 많은 약물을 지속적으로 필요로 하기 때문에 결국 몸이 견디지 못하게 되는 단계까지 이르러 위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약물이 아닌, 일반적인 활동을 통한 쾌감 반응은 약물보다 당연히 덜 위험하고 적절히 조절 가능하기 때문에 몸에 치명적이지 않다. 조깅 등 일종의 쾌감을 느끼게 하는 모든 활동이 중독으로 연결될 수 있지만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공부는 하면 할수록 지적 호기심이라는 본능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쾌감 신경물질이 분비되어 빈번하게 몰입의 경지로 들어가게 되면, 그때는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말이 자신도 모르게 나올 것이다.

《몰입flow》의 저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우주를 질서와 혼돈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 가운데서 행복 창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식에 질서를 부여하는 '마인드 컨트롤'이 행복으로 향하는 열쇠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최상의 경험, 즉 '몰입'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언제 가장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을 찾기 위해, 그는 일주일간 피험자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면서 그 순간의 마음 상태와 활동을 조사했다. 그리고 인간의 염려와 시시콜콜한 잡념을 모두 떨쳐버릴 수 있는 최상의 경험, 즉 몰입 시에 가장 행복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몰입의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공부하면서 가장 행복을 느낀다. 사실 일반적인 쾌락은 수동적이다. 영화, 텔레비전, 약물, 수면 등은 단순한 기쁨과 즐거움을 줄지 몰라도 참된 몰입의 경지에 이르기는 어렵다. 의식적인 의지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겪고 있을 때,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해진다고 한다. 여기서 통제권은 수동적인 것이 아닌, 능동적인 의지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정돈된 마음은 몰입의 순간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행복의 원천이 된다. 몰입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은 스스로 통제권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또 일을 하기 위해 무언가에 노력하는 과정이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다. 이 경험으로 인해 인간은 전보다 더욱 성숙해진다. 또한 흡수된 지식의 파편과 새로 정제된 기술이 자아를 확장시키며 점점 비범한 개인을 만들어낸다. 저절로 깨달을 수 있다는 점에서 몰입 중심의 문화는 시간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만약 여러분이 창조적인 삶과 나은 미래를 위해 자신을 수양하고 있다면 공부를 통한 몰입이 그 어떤 몰입보다도 좋다. 이는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지속적이다.

"질병은 마음의 상태를 반영한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은 만병의 근원이다"라는 루이스 헤이의 말처럼,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 상태를 건강하게 다 잡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최상으로 드높일 수 있을까? 바로 통찰과 반성과 비움과 몰입이다.

 

 

 

선택의 연속인 인생에서 올바른 길을 걷는 현명함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하지만 탄생과 죽음이 우리의 손에 달여 있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주어진 삶의 모든 과정은 우리에 의해 좌우된다. 우리가 선택한다. 성공도, 실패도 우리가 만들어간다. 적성과 분야와 사람을 잘 선택하면 그만큼 성공에 가까워진다. 순간 잘못된 판단을 해서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공부 속에 질문의 모든 해답이 숨어 있다. 우리는 인생길에서 행운도 만나고, 역경도 만나고, 숙제도 만난다. 그때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180도 바뀔 수 있다. 이러한 선택들의 집합이 곧 인생이다. 올바른 선택은 그래서 중요하다.

시중에는 10분, 10개월, 10년 후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준비하고 선택하라는 흔하디흔한 자기계발서가 많이 나와 있다. 어떤 면에서는 필자도 동감하지만, 과연 단순히 시간 차를 두고 선택했다고 해서 올바른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원리원론에 치중해 살아갈 수 없는 복잡한 세상임을 감안하면, 10년 후 내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해본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미래학에 대해서 공부해야 하고, 사고력과 판단력도 더 길러야 한다. 삶의 참된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어떤 삶이 가장 가치 있는지 단지 미래지향적인 사고만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좀더 깊은 마음공부를 통해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세계 곳곳의 역사들을 간접 경험하고 통찰력을 키워야 한다. 인성과 감성과 지성을 완성시켜야 한다. 눈앞의 이익이나 물질, 권력 등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 만큼 탐욕과 이기심을 이겨낼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 모두를 다 완벽히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살아 있는 한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재능도 있고 실력도 있지만 순간의 실수로 넘어져 평생 쌓아 올린 성공탑에 손가락질 받으며 무너지는 것을 수없이 봐았다. 우리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세상의 시류의 편승하는 길을 택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스스로의 삶은 스스로 올바르게 선택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랠프 월도 에머슨은 그이 수필《자신에 대한 믿음》에서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는 저서에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쉬운 방법, 편한 방법, 시류에 따라가는 방법을 선택하는데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따라서 해보려는 것보다 직접 선택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무심코 했던 작은 선택된 행동들이며, 이것을 반복하면 습관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의 결과 그 자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라고 역설했다.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행동의시작도 우리의 선택이다. 이것들이 모여 미래의 나를 만든다.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 공부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 셈이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삶의 정점에서 잘못된 선택을 했다가 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 우리는 용서를 선택하지 않고 대부분 분노와 복수를 선택한다. 분노와 복수 대신 용서를 택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문제다. 용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수련과 공부를 통해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용서를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을 진정 낮추게 하는 것이 공부다. 눈앞의 이익과 뇌물에 눈이 멀어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그로인해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지 않은가? 그러므로 부디 자신을 낮추고 내려놓을 줄 아는 공부를 하기 바란다. 욕심을 버리는 공부를 하지 바란다.

지금의 우리는 바로 우리가 과거에 선택한 결과다. 얼마나 올바른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삶은 고난의 연속이다. 어떤 사람도 고난의 삶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왜 인간의 삶은 고난의 연속인지 그 이유를 명확하게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고난을 딛고 일어섰을 때 비로소 만나게 될 기쁨과 가치는 매우 크다는 점이다. 역경을 이겨낸 사람은 그보다 더 큰 삶을 꿈꿀 수 있다. 대나무가 곧을 수 있는 이유는 또다시 역경이 찾아와도 이겨낼 현명함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인류에게 고난과 시련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인류의 문명이 발달할 수 없었다. 때로는 실패하고 부서지지만, 때로는 딛고 올라서는 과정에서 계속 진일보할 수가 있었다.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가 주장한 역경설에서 표현을 비릴자면 "모든 문명, 모든 문화는 역경과 고난을 딛고 올라서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돛단배가 강풍으로 인해 더 빨리 갈수도, 혹은 침몰할 수도 있다. 인생 또한 항해와 같다. 공부를 통해 자신을 성장시킨 사람은 위기를 기회로 본다. 그대로 침몰하지 않고 더 빨리 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는다. 실패를 통한 교훈은 또 다른 공부다. 더 큰 그릇이 되기 위한 재료다. 공기의 저항이 있다면 그것이 비행기의 전진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공중에 상승하는 밑거름이 되기도 하낟. 우리를 힘들게 했던 순간들이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때 반드시 필요한 장치가 공부다. 날개가 없는 비행기를 상상할 수 없듯이. 공부하지 않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다.

농경 시대는 3천여 년 동안 우리의 삶을 이끌어왔다. 산업 시대는 200년 동안 인류의 삶을 지배했다. 산업 시대 이후의 정보화 시대는 겨우 50년 만에 지나갔다. 이제 그다음에 오는 시대는 10년이면 바뀔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급변하는 시대, 과도기에 살고 있다. 앞으로는 더욱 심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야 한다. 날마다 변화의 물결을 피부로 느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대로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끝날 줄 알았지"라고 말하는 신세가 돼버릴 수 있다. 아직 못다 한 인생에 대한 미련이 있어 남긴 말을 아닐 것이다. 외려 후회가 없기에 자신처럼 살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경종을 울리는 한 마디 아닐까.

유엔미래포럼의 박영숙 대표는 그의 저서《유엔미래보고서》에서 미래에 일어날 매우 흥미 있는 변화들을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살펴보면, 신문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더불어 국회의원과 정당도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너무나 당연한 것들의 소멸과 변화는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빛의 속도로 급변하는 어지러운 시대에 중심을 우뚝 잡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공부다.

공부로 단지 세상의 중심이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 속에서 중심을 바로잡으라는 이야기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된다는 말은 결국 위험한 말이다. 스스로 최고가 되는 것이며 타인은 변두리에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 매진하는 공부는 성공, 출세, 권력지향주의를 부른다. 즉 자신만을 위한 공부를 하므로 모조리 가짜에 가깝다.

반면 세상에서 중심을 잡는 공부는 소유하는 게 안 존재하는 공부다. 내세우는 게 아닌 공존하는 공부다.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과 세상에서 중심을 잡는 것은 너무나 다른 것이며 너무나 다른 삶을 초래한다. 세상 안에서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바른 공부가 필요하다. 공부를 하지 않고 세상에서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써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신을 알 수 없고 세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도, 변화할 수도 없다.

심리학에서 대상조회라는 용어가 있다. 참자아가 아닌 외부 대상의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대상조회에 빠져 있으면 언제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며 그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한다. 즉 초점이 타인의 시선에 머무른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기도 한다. 자신의 주장이나 소신을 굽히기도 한다. 타인을 너무 의식하므로 소문에 얽매여 살 수 있다. 이러한 삶이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반면 자기조회는 대상조회의 반대 개념으로 외부 대상이 아닌 자아에게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삶이다. 우리의 삶이 흔들리는 돛단배와 같지 않으려면 세상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야 한다. 타인의 시선에 너무 많은 초점을 맞추는 대상조회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가치와 목표에 초점을 맞추는 자기조회의 삶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공부가 꼭 필요하다.

세상 안에서 중심을 잡고 사는 사람은 큰 성공 앞에서도 교만하지 않는다. 타인을 깔보지 않는다. 설사 실패하더라도 결코 기죽지 않고 의연하게 역경을 헤쳐나간다. 이것이 바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 한곳에 머무를 만한 참을성이 하나 없이 가벼운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작은 파도에는 잘 요동하지 않는 수송선과 같은 삶을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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