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인생의 감식가

오키Oki 2013. 2. 19. 17:45

 

가을날에도 단풍들지 않는 차나무가 겨울 추위를 이겨내느라 차나무는 단풍이 들었다. 그래도 봄은 온다.

 

 

 

- 탈 벤_샤하르 지음 하버드대 행복학 강의해피어에서 -

 

 

 

지은이 탈 벤_샤하르

하버드대학에 '행복학 열풍'을 불러일으킨 '긍정심리학' 강사. 하버드대학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하버드생의 약 20퍼센트인 1,400여 명의 멘토가 되어 치열한 경쟁과 스트레스에 갇혀 있던 그들의 삶을 의미 있게 변화시키고 있다.

종신직 교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코스를 밟는 일이 '행복하지 않아서' 강사로 남기로 결심한 그는 행복 전도사를 자처하며 '행복하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또한 미국 국영방송, CNN, CBS등에 출연하고『뉴욕타임스』, 『보스톤 글로브』등에 글을 기고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좀더 행복해지는 법을 전파하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 수준이 증가하는 동안 우울증 정도도 증가하고 있다. 대부분 서구 국가들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점점 더 많은 국가의 국민이 이전 세대보다 부유해졌지만 더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긍정심리학자의 선구적인 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단순하지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고 있다.

"왜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족해졌지만 행복하지 못한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위해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믿었을 때는 불행의 원인을 설명하기가쉬웠다. 하지만 많은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지금은 더 이상 불행을 설명할 수 있는 준비된 답이 없다. 풍요가 오히려 불행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이는 모순을 해명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긍정심리학에서 그 답을 찾고 있다. 

 

 

 

 

궁극적 가치를 지닌 행복

마바 콜린스는 범죄와 마약이 들끓고 희망과 낙관주의가 실종된 시카고의 도심 지역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 지역의 많은 교육자들은 학생들이 빈곤의 대물림과 절망에서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1975년 콜린스는 이웃에 사는 아이들을 위해 웨스트사이드 예비학교를 세웠다. 모두 태도가 불량하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어서 퇴학당한 아이들이었다. 웨스트사이드는 그들이 거리로 나가기 전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의 장소였다.

한때 '교육 불가' 판정을 받았던 바로 그 아이들이 웨스트사이드에서 4학년이 되자 세익스피어와 에머슨, 에우리피데스를 읽었다. 한때 구제불능으로 낙인 찍혔던 아이들이 이제 대학에 들어갔다.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콜린스의 비전을 학생들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감을 키우고 희망찬 미래를 꿈꾸었으며 그것을 실현시켰다.

콜린스는 아주 적은 돈으로 학교를 설립했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집을 교실로 이용했다. 그 후 20년 동안 재정의 어려움을 겪고 때로는 폐교 위기에 내몰리곤 했다. 지금은 몇 개 주에 걸쳐 마바콜린스의 학교가 있다. 세계 각지의 교육자들이 시카고에 찾아와 콜린스의 교육법을 배우고 영감을 얻어간다.

콜린스의 경험은 행복을 궁극적 목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게 해준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수십억 달러의 기업을 운영하고 엄청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저에게 왜 교사 일을 하는지 묻곤 합니다."

그럴 때 그녀는 자신이 가르친 학생 이야기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한다.

"자폐아인 티파니는 말을 하지 않았고, 전문가들로부터 사랑을 줄 수도, 가르칠 수도 없는 아이라는 판정을 받았죠. 그런 티파니를 끝없는 인내와 기도와 사랑과 의지로 보살피던 어느 날, 티파니는 내게 처음으로 말을 했어요. '사랑해요. 올린스 부인' 이라고 말이죠. 발음은 정확하지 않았지만 티파니의 말에 나는 눈물을 흘렸고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작 된 것 같았어요. 지금 티파니는 숫자를 쓰고, 말을 하고, 단어를 읽을 수 있어요. 그 아이의 빛나는 눈은 '나는 특별해요. 나도 배울 수 있어요' 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것은 내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금덩이를 얻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입니다."

웨스트사이드 예비학교에서 삶의 변화를 맞이하는 또 다른 학생에 대해서도 콜린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 아이의 빛나는 눈이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을 보게 될 때까지 과연 학교를 운영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숱한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보람이 있었다."

마바 콜린스는 어쩌면 큰돈을 벌 수도 있었다. 학교 폐쇄와 적자를 걱정하지 않고 살 수도 있었다. 1980년대에 레이건과 부시행정부에서 제안한 교육부 장관직에 취임해 모든 영광과 명예를 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르치는 일을 사랑하는 그녀는 교실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교육은 그녀에게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의미를 주었으며,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정서적 만족을 주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 라고 여기며 '이 세상 금덩이를 모두 합친 것' 보다 더 큰 가치를 교육에서 찾았다. 궁극적인 가치는 돈이나 지위가 아닌 행복이기 때문이다.

 

Think about!

이 세상 금덩이를 모두 준다고 해도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은 궁극적인 가치이다

우리는 사업의 가치를 평가할 때 돈으로 환산한다. 그 사업의 자신과 부채, 수익과 손실의 가치를 계산한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은 그 사업의 가치를 높이거나 줄일 수 없다. 사업의 가치를 측정할 때는 돈이 궁극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사람도 사업과 마찬가지로 이익을 보기도 하고 손실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에게 궁극적인 가치는 돈, 지위, 권력과 같은 외부 수단이 아니라 바로 행복이다. 돈과 지위는 행복보다 하위에 있으며 내재하는 가치가 없다. 돈과 지위가 바람직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것을 갖고 있거나 갖겠다는 생각이 긍정적인 감정이나 의미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돈과 지위는 그 자체만으로는 가치가 없다. 만일 지위와 재산이 어떤 식으로든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추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사업에서 상품 가치가 돈으로 평가된다는 점에서 상품보다 돈이 우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 행복은 부와 지위보다 우위에 있다.

행복을 궁극적인 가치로 이해하면 어떤 일의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만약 1백만 달러와 친구와의 대화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며 우리는 우리의 삶에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을 고를 것이다. 친구와의 대화가 1백만 달러보다 더 큰 정서적 만족과 의미를 준다면 친구와의 대화를 선택해야 한다. 궁극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친구와의 대화에서 더 크 이익을 얻을 것이다.

친구와의 대화를 돈과 비교하는 것은 사과를 연필과 비교하는 것처럼 터무니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행복의 가치로 환상하면, 즉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해주는가로 평가하면 돈과 친구와의 대화처럼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것들을 비교할 수 있다.

사실 1백만 달러와 친구와의 대화 중 어느 하나를 고르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단지 친구와의 대화가 즐겁다는 이유로 1백만 달러를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다. 돈은 미래의 안정을 가져다주므로 부정적인 감정을 예방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1백만 달러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자유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고려한 뒤에도 친구와의 대화가 즐거움과 의미를 더 준다고 생각한다면 궁극적으로 1백만 달러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 정신분석학자인 칼 융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의미가 있다면 의미 없는 큰일보다 더 가치가 있다."

다음 에피소드를 생각해보자. 금성에서 온 외계인이 어느 가게에 들어가 1천 달러짜리 물건을 샀다. 그리고 가게 주인에게 1천 달러와 지구 돈으로 환산하면 1백만 달러 가치가 있는 금성 돈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가게 주인은 자신이 금성에 갈 일이 없으며 금성의 돈은 지구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 돈을 기념으로 보관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는 분명 1천 달러의 지구 돈을 고를 것이다.

금성 돈은 지구에서 인정하는 통화로 환산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또한 1백만 달러라는 큰돈이라 해도 궁극적인 가치로 환산될 수 있어야만 쓸모가 있는 것이다. 행복 역시 마찬가지이다. 행복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가치 중에서 가장 궁극적인 가치이다. 따라서 행복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이며 다른 모든 목적들이 지향하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

 

 

 

행복의 가치는 셀 수 없다

기본적인 의식주를 위해 필요한 수준을 넘어서면 돈은 더 이상 목적이 될 수 없으며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수단을 목적과 혼동하고 돈(수단)을 위해 행복(목적)을 희생할 때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종종 물질적인 부가 궁극적인 목적의 자리로 승격하기도 한다. 물론 부의 축적과 생산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질적 풍요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에 도움이 되고 행복 수준을 높여줄 수 있다. 경제적 안정은 무료한 일이나 다음 달 생계비 걱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렇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돈 자체가 아니다. 돈은 다만 긍정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줄 뿐이다. 물질적인 부가 반드시 삶의 의미나 정서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부와 행복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보면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마이어스는 행복에 대해 장기간에 걸쳐 실시한 평범위한 연구에서 "극도의 빈곤으로 기본적인 의식주가 충족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물질적인 부와 행복 사이에는 거의 상관관계를 찾을 수 없다" 고 주장했다. 게다가 지난 50년 동안 많은 나라의 국민이 더 부유해졌지만 행복 수준은 증가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몇 년전부터 행복 연구로 관심을 돌렸는데, 카너먼과 그의 동료들은 부와 행복의 상관관계르 보여주는 근거를 찾지 못했다.

우리 사회에는 소득이 많아지면 더 행복해 질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지만 이는 대부분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소득 수준이 평균 이상인 사람들은 비교적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만 매순간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며, 좋아하는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도 못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나 다른 사람의 삶을 평가할 때 의례적인 업적에 초점을 맞추므로 소득이 행복에 기여하는 효과가 두드러져 보일 뿐, 소득이 삶에 만족에 주는 효과는 잠시뿐이다.

놀랍게도 어떤 사람들은 그토록 원하던 물질적인 부를 얻고 나서 오히려 우울함을 느낀다. 성취주의자는 자신의 행동이 미래의 이익을 가져올 거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한 희망이 부정적인 감정을 참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목적지에 도착해서 물질적인 부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진다. 그 무엇도 미래에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좌절과 실망에 빠진다.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 절망감에 휘말려 알코올과 마약에 의지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성공이 오히려 그들을 불행하게 만든 것이다.

그들은 꿈을 좇는 동안 힘이 들었지만 일단 그곳에 도착하면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으로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기대했던 '그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물질적인 부와 지위가 지속적인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환상이 깨지지 허무감에 사로잡힌다. 모든 노력과 희생이 궁극적인 가치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학습된 무기력에 빠져든다. 허무주의자가 되고 그 무엇도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자포자기하고 때로는 불행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파괴적인 대안에 의지하게 된다.

물질적인 부가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왜 그것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왜 삶의 의미를 찾는 일보다 부자가 되는 일에 매달리는 것일까? 우리는 어쩌다가 정서적 기준보다 물질적 기준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을까?

진화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우리의 먼 과거에서 비롯되었다. 원시시대에 인간이 수립 채취를 하면서 살았을 때는 부(식량)의 축적으로 오랜 가뭄이나 겨울의 혹한을 견디고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축적이 우리 본성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물질적으로 풍족한 세계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더 많이 축적하려고 전전긍긍한다. 부의 축적은 이제 생존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축적하기 위해 살고 있다.

또한 우리가 어떤 결정이나 판단을 내릴 때 감정보다 물질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측정 가능한 것들이 평가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측정할 수 없는 감정이나 의미보다 측정할 수 있는 물질적 부나 지위에 가치를 둔다.

물질적 세계에서는 부자를 숭배한다. 마치 재산이 사람의 가치를 측정하는 수단인 것처럼 물질적 소유로 평가하는 것이다. 대학에서는 교수들이 논문을 발표한 숫자를 승진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하루나 일주일의 가치는 우리가 얼마나 생산적으로 일했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어냈는지에 따라 측정된다.

하지만 로렌스 G, 볼트는『선과 생존의 기술』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회는 우리에게 셀 수 있는 것들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주택의 가격은 셀 수 있지만 가정의 행복은 셀 수 없다. 세익스피어의『햄릿』은 서점에서 10달러를 주고 살 수 있지만 그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측정이 불가능하다."

 

Think about!

부와 지위에 대한 집착이 당신을 행복한 삶에서 멀어지게 하지는 않는가?

 

 

 

 

물질만능이 부른 정서적 파산

우리가 물질적인 부를 축적하는 동안 정말 중요한 가치는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사업이 파산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그럴 수 있다.

사업이 건재하려면 수익을 내야 한다. 즉, 수입이 지출보다 많아야 한다. 우리 삶에서 긍정적인 경험을 수입으로, 부정적인 경험을 지출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긍정적인 경험이 부정적인 경험보다 많으면 궁극적인 가치에서 이익을 내게 된다. 그러나 부정적인 경험(손실)이 긍정적인 경험(수입)을 압도하는 장기적인 불황이 계속되면 정서적으로 파산하게 된다.

만일 개인의 파산 비율이 계속 증가하면 전체 사회가 파산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불안과 우울 정도가 계속 증가하면 사회는 정서적 파산을 향해 치닫게 된다. 우리는 과학과 기술, 즉 물질적인 복지 면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고 있는 반면, 정서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점점 더 후퇴하고 있다.

게다가 불행히도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미국 10대 아이들의 약 3분의 1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 유럽, 호주, 아시아에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요즘 아이들이 이전 세대보다 훨씬 더 심각한 불안과 우울증을 겪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인종과 사회경제적 노선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로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대니얼 골먼은『감성지능』이라는 책에서 "20세기 이후 지금 세대는 전 세계적으로 그들의 부모 세대보다 심각한 우울증(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무기력함, 낙담, 자기 연민, 압도적인 절망)에 시달릴 위험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골먼이 지적한 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 정서적인 파산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골먼이 말하는 '압도적인 절망', 즉 허무주의는 개인적으로나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메마른 정서 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는 의식에서 비롯된다. 골먼에 따르면 20세기의 특징이었던 '불안이 시대'는 이제 '우울의 시대'로 발전하고 있다.

빅터 프랭클도『죽음의 수용소』에서 "실존적 공허는 20세기에 만연한 현상" 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유럽 학생의 25퍼센트와 미국 학생의 60퍼센트가 '내면의 공허' 또는 '실존적 공허'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오늘날의 상황은 1950년 프랭클이 책을 썼을 당시보다 훨씬 악화되었으며, 미국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1968년 대학 신입생들에게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41퍼센트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대답했고, 83퍼센트는 의미있는 삶의 철학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후 1997년에 조사한 결과에서는 신입생의 75퍼센트가 부자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대답했고, 41퍼센트가 의미 있는 삶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싶다고 대답했다(복수 응답).

이처럼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물질적인 부를 목적 자체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결과 점점 더 많은 개인이 불행해지면서 전체 사회가 정서적 파산 상태로 치닫고 있다.

정서적 파산은 마약과 알코올 남용, 종교적인 광신과 같은 불온한 사회 문제를 일으킨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무의미한 현실에서 일시적으로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마약에 빠지거나 영원한 행복을 약속하는 사이비 교주에게 넘어가는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행복은 이러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병폐를 모두 해결하고 난 뒤에야 추구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그 무엇이 아니다. 궁극적인 가치 수준이 증가하면 개인의 삶의 질은 높아지고 세상은 더 훌륭하고 안전한 장소가 될 수 있다.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

현대 자기계발 운동의 아버지 새뮤얼 스마일스는 1858년에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청소년들이 인생의 행복과 복리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나 보호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성장하도록 도와야 한다."

자녀가 해야 할 몫을 부모가 '도와주는' 것이 결국은 불행을 가져올 수 있다. 스마일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고 아무런 희망이나 욕망, 투쟁 없이 사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큰 저주는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도전을 받을 때 자신의 성취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을 즐기게 된다.

'가진 자의 궁핍'은 우리 사회가 갈수록 우울증이 증가하고, 우울증에 걸리는 청소년의 나이가 점점 더 낮아지는 이유는 어느정도 설명해준다. 그들에게 삶이란, 말 그대로 땅 짚고 헤엄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력과 어려움과 도전은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다.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 하지만 부모들은 자녀가 어려움에 부딪히면 지름길을 찾아주고 싶어 한다. 쉬운 방법이 있는데도 아이가 고생하는 것을 어떻게 그냥 두느냐며 마치 죄를 짓는 일인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도와주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아이들에게도 투쟁할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해야 한다.

부자들이 불행한 또 다른 이유는 행복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특권층의 가정에서 자란 많은 학생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학생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제가 무슨 권리로 불행을 느낄 수 있겠어요?"

그들은 자신이 인생에서 가진 것에 충분히 감사할 줄 모른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불행한 이유를 찾지 못해서 자책하고 스스로 결함이 있다고 느낀다. 행복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데 대한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더욱 불행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물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대체로 물질적인 부와 무관하다.

 

 

지속적인 행복을 얻으려면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행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행복은 산의 정상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고 산  주위를 목적 없이 배회하는 것도 아니다 .  행복이란 산의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과정이다.

 

 

 

 

인간의 감정은 평등하다

우리는 누구나 고통과 기쁨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감정을 경험할 수 있고 경험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가질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극적인 가치에 똑같이 접근할 수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극도의 빈곤이나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상황에서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행복과 불행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분배된다.

선도적인 심리학자 데이비드 마이어스와 에드디너는「누가 행복한가?Who is Happy?」라는 논문에서 주관적인 행복에 대한 연구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행복과 삶의 만족은 남녀노소, 흑인과 백인, 부자와 노동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비슷하게 느낀다."

궁극적인 가치는 위대한 평형장치다. 18세기 경제학자이며 철학가인 애덤 스미스는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면에서 볼 때 빈곤 계층이 부유층 사람들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특권 계급이었던 애덤 스미스가 겸손하게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가난한 사람이 느끼는 고통이나 기쁨이 부자가 느끼는 감정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다르다고 볼 만한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는 맞는 말이다. 일단 기본적인 욕구, 즉 의식주와 적절한 교육이 해결되면 감정의 영역에서 소득 수준이 차이는 별다른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부자의 불행은 가난한 사람이 경험하는 것만큼 현실적이고 자연스럽고 만연하다. 사람들은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인생의 매순간 희로애락을 경험한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거나 궁핍하거나 그러한 감정들을 피해가는 것은 궁극적인가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상의 어떤 특권도 감정적인 고통을 겪거나 때로는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만일 그런 기대를 건다면 더욱 불행해질 뿐이다. 우리는 소득 수준과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인간적인 감정을 경험해야 한다.

 

Think about

당신은 부정적인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거부하는가?

당신은 자신에게 인간적인 감정을 허락하는가?

 

 

 

 

행복과 즐거움을 가르치는 교육

칙센트미하이의 연구에 따르면 아이가 12세가 되면 이미 일과 놀이를 분명히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후 계속해서 평생동안 우리는 일과 놀이를 구분한다.

아이들은 공부를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부를 일로 인식하면 학습의 경험을 즐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일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편견은 우리의 정신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데, 이를 증명하기 위해 가장 영향력 있는 성경 구절로 거슬러갈 수 있다.

아담과 이브는 전형적으로 한가로운 삶을 살았다. 그들은 일하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지 않았다. 그러나 금단의 열매를 먹고 그 벌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는 바람에 자신들은 물론 후손까지 노역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이처럼 노역을 처벌로 생각하는 인식은 우리 문화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혀 있다. 그리고 이상적인 삶을 사는 이상적인 장소인 천국은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칙센트미하이와 주디스 르페브르는「일과 여가활동에서 얻는 최적의 경험Optimal Experience in Work and Leisure」이라는 논문에서 사람들이 일보다 여가활동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또 다른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실제로 집보다 직장에서 몰입을 더 자주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 즉 우리가 일보다 여가활동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직장에서 최상의 경험을 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노력을 고통과 연결하고 여가를 즐거움과 연결한다는 편견이 너무 뿌리 깊어서 현실을 왜곡해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학습된 반응에 따라 자동적으로, 그리고 수시로 직장에서 얻는 긍정적인 경험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때 행복의 가능성은 심각하게 제한된다. 왜냐하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감정을 경험할 뿐 아니라 긍정적인 감정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직장은 우리가 긍정적인 감정을 경험하는 장소가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교육자 파커 파머는 그의 저서『가르칠 수 있는 용기』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일을 고통과 동일시하는 문화에서 어떤 일이 우리의 천지인지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혁명적이지만 진실이다."

많은 사람이 일과 노력을 고통이나 시련과 동일하게 여기므로 학교와 일터에서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와 직장에서 더 많은 기쁨을 얻으려면 의식적으로 우리의 경험을 재구성함으로써 일에 대해 갖고 있는 부정적인 편견을 없애야 한다. 1930년 도널드 해브가 실시한 연구는 이러한 재구성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헤브는 6세~15세의 학생 600명에게 더 이상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교실에서 행동을 잘못하면 벌로 밖에 나가서 놀도록 하고, 행동을 잘하면 상으로 교실에서 공부하도록 시켰다. 그 결과는 이러했다.

"그러한 환경에서 하루 이틀이 지나지 않아 모든 학생이 노는 것보다 공부를 택했다. 그리고 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만약 우리가 일과 교육을 의무가 아니라 특권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면, 그리고 자녀를 위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궁극적인 가치면에서 훨씬 더 풍족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더 많이 배우고 더 성공하게 될 것이다.

 

Think about

공부나 일을 특권으로 느낄 수 있는가? 그렇게 느낀다면 공부나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겠는가?

 

 

노력과 투쟁이 궁극적인 가치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외하는 것은 충만한 삶을 창조하기 위해 우리가 갖고 있는 가능성 일부를 그저 보아 넘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학교 또는 직장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쉽다. 그리고 학교와 직장 밖에서는 노력과 도전과 의미를 피해서 '여가'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그러면서 행복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교육은 학생들이 물질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번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의 기술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아이들에게 쓰기, 읽기, 셈하기(3R) 외에 네 번째로 즐기는 법을 가르치자고 제안한다. 교사들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움과 성장과 삶 자체를 즐길 수 있는 환경으 만들어주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실에서 성장기를 보내면서 기대와 습관을 만들어간다. 만약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행복을 추구하고 궁극적인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에 초점을 맞추도록 격려한다면 그들은 평생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반면 쫓기듯이 한 학년에서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는 것이 전부라면 졸업한 후에도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많은 교육자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얻어서 의미 있고 도전적인 목표와 활동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보다 시험 성적을 잘 받게 하는 데 관심을 둔다. 칙센트미하이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부모나 학교는 아이들이 적절한 활동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도록 가르치지 못한다. 때로는 어른들 자신이 허깨비에 홀려 엉터리 음모를 꾸민다. 정작 중요한 과제는 지루하고 어려워 보이도록 만들고, 하찮은 과제는 흥미롭고 쉬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과학이나 수학이 얼마나 재미있고, 황홀하게 아름다운 학문인지 가르치지 못한다. 그들은 모험보다 딱딱한 이론을 가르친다."

배움에 대한 사랑은 내재적이다. 어린 아이들은 항상 질문하고 주변 세상에 대히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한다. 아이들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추구하고 몰입 경험을 하도록 도와준다면 학습에 대한 사랑을 더욱 키워줄 수 있다. 학습을 황홀하게 아름다운 모험, 평생에 걸친 궁극적인 가치의 추구로 바꿔줄 수 있다.

 

 

가장 성공한 사람은 평생 배우는 사람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묻고 경이로운 세상을 탐험한다. 나이가 15세이든 115세이든, 지금 시련을 겪고 있든 한창 전성기에 있든, 당신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있든 상관없이 자신을 위한 교육 과정을 창조해야 한다.

그 교육 과정에는 개인적 발전과 직업적 발전이라는 두 가지 과목을 포함시킬 수 있다. 각 과목은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을 즐기는 현재의 이익뿐 아니라 우리의 전반적인 성장에 기여하는 미래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학습을 한다.

매주 시간을 정해서 규칙적으로 자기계발을 하라. 예를 들어 지역 대학에서 긍정심리학 수업을 듣거나 일기 쓰기를 할 수도 있다. 직업적인 발전을 위해서 믿을 만한 멘토를 찾아보고 당신이 일하는 직종의 최근 상황에 대해 배울 수도 있다.

 

 

 

 

사랑은 끝없는 이해의 여정

미국에서는 결혼한 부부의 약 40퍼센트가 이혼한다는 통계가 있다. 이는 장기적인 연인이 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의문을 갖게 한다. 게다가 나머지 60퍼센트도 반드시 행복하게 산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을 장기적인 일부일처제가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는 뜻일까? 그건 안다. 우울증에 대한 통계가 우리가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부부가 화목하게 지낼 가능성이 없다면 이혼이 때로는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종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에 수반되는 것이 무엇인지 잘못 알고 있는 탓에 이혼에 이르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성적 욕망(정욕)을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한다. 성적인 매력은 로맨틱한 사랑에 필요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정욕에 바탕을 둔 관계는 오래 지속되기 힘들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매력적이라고 해도, 또는 서로에게 '주관적인' 매력을 느낀다고 해도 처음에 느끼는 흥분은 점점 시들어간다. 이그조틱exotic이 에로틱erotic이 된다는 말처럼 새로움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익숙해진다.

익숙함은 육체적인 흥분을 가라앉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상대방을 진정으로 알게 하고 더욱 친밀해지면서 사랑이 깊어질 뿐 아니라 더 나은 섹스로 이어질 수 있다.

성심리치료사인 데이비드 슈타크는 그의 저서『정열적인 부부관계』에서 섹스와 정열을 단지 생물학적 욕망의 일종으로 치부하는 통념에 도전한다. 만일 섹스가 단순히 생물학적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면 지속적이면서 정열적인 관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슈나크의 주장이다. 수십 년간 부부들을 상담해 온 슈나크는 두 사람이 상대방을 알고 자신을 알리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섹스가 더욱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한다.

슈나크는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려면 상대방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고 자신을 증명해 보이기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관계에서 시간이 갈수록 사랑과 정열을 자라나게 하려면 상대방에게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야 하며, 그러려면 마음속 깊은 곳의 바람과 두려움, 환상, 꿈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부는 상대방의 가치관, 열정, 관심, 희망을 점점 더 깊이 이해하고 상대방의 세계를 자세하게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리는 과정은 끝이 없다. 언제나 더 많이 알 수 있고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런 관계는 흥미롭고 재미있고 자극적이 될 수 있다. 나를 증명해 보이려는 것보다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리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 즉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거나 아이들을 돌보거나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 더욱 의미 있고 즐거워진다.

 

 

 

 

행복을 위한 재충전

누구나 마음 같아서는 하루를 행복한 경험으로 가득 채우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은 가능하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녁시간이나 주말이 되어야 현재와 미래의 이익을 주는 활동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여가시간에 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수동적인 즐거움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힘든 하루를 보내고 나면 즐겁고 의미 있는 활동을 하기보다 텔레비전 앞에서 빈둥거리곤 한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잠을 청한다. 그런 날이 계속되다 보니 하루 일을 끝내고 나면 너무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생각이 점점 더 굳어진다.

만약 퇴근 후에 도전적이고 흥미로운 활동이나 취미를 즐긴다며 기분전환이 되고 감정적으로 재충전을 할 수 있다. 교육학자인 마리아 몬테소리는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행복촉진제는 우리의 힘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활력을 더해준다.

 

 

 

 

행복하게 살기 위한 매일의 노력

많은 사람들의 성공적 관계의 열쇠는 천생연분을 만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 행복한 관계를 위해 가장 중요한 요인은 만남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보살피는 것이다.

만남을 교제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릇된 믿음은 영화에도 책임을 돌릴 수 있다. 많은 영화의 줄거리가 사랑을 찾는 두 사람이 서로 만날 때까지 겪는 시련과 고난을 그리고 있다. 그러다 마침내 두 연인이 만나서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것으로 막이 내리며 우리는 그들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믿는다. 이처럼 영화는 사랑의 시작으로 끝나지만 현실에서 가장 큰 도전은 그 후에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해가 지면 어둠이 찾아오는 법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는 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사람들은 그 이후의 여행, 다시 말해 매일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소홀하게 된다.

꿈에 그리던 직장에 취직되었다고 해서 이제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게으름을 피우면 직장에서 쫓겨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관계에서도 진짜 어려운 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후에 시작된다. 관계에서 어려운 일은 친밀함을 키워가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알아가면서 친밀함을 키운다. 그 다음에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에게 의미 있고 즐거운 활동을 함께하면서 친밀함을 더욱 깊게 한다. 서로를 알고 공통의 관심사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불가피한 폭풍우를 견딜 수 있고, 사랑과 행복을 위한 비옥한 땅을 제공하고 꽃을 피울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된다.

 

 

 

우리는 언제나 좀더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의 깊이가 정해져 있다고 주장하는 심리학자들은 '평균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미네소타 쌍둥이 연구소에서조차 모든 일란성 쌍둥이의 행복 수준이 같지 않았으며, 다른 연구에서도 모든 사람이, 즉 연구 대상자들의 100퍼센트가 기본적인 행복 수준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평균은 필연적이거나 보편적인 진리가 아닌 추세에 불과하다. 종종 우리에게 가능한 진실을 보여주는 것은 평균 밖에 있는 예외적인 사람들이다. 일부 사람들의 행복 수준이 평생에 걸쳐 점점 높아진다는 사실은 자동온도조절장치의 눈금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는 더 행복해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느냐이다.

이 책에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돈과 지위에서 궁극적인 가치로 초점을 돌리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행복 수준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현재와 미래의 이익을 찾는 사람들은 결국 좀더 행복하게 될 것이다.

행복의 깊이가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해로울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지 궁극적인 가치의 몫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면 주어진 상황을 좀더 개선해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 수준이 정해져 있으며 바뀔 수 없다는 믿음은 결국 자기달성 예언이 된다. 설상가상으로 운명을 고칠 수 없다는 믿음은 그릇된 가정에 근거한 것이라 하더라도 무기력과 의기소침 혹은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낙천주의자에서 비관론자까지 어떤 자연적인 성향을 타고나며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있지만, 시간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심리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니먼은 이렇게 말했다.

'시간 사용은 행복을 개선하는 가장 큰 결정 요인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 가능성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귀중한 시간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다.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리거나 아무 생각 없이 쾌락을 추구하거나 허무주의에 빠져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 안에 무기력한 삶이나 충만한 삶의 가능성이 있다. 시간을 적절히 사용하면 우리의 궁극적인 보물을 지킬 수 있다.

궁극적인 가치 추구는 성공과 성장을 향해 가는 과정이다.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행복에는 제한이 없다. 의미와 즐거움을 함께 주는 일과 교육, 그리고 사랑을 추구한다면 좀더 행복해질 수 있다. 나뭇잎과 함께 시들어버리는 덧없는 기쁨이 아니라 깊고 튼튼한 뿌리를 가진 지속적인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 우리는 물질이 주는 즐거움은 대체로 질이 낮으며 생각보다 양도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올리버 웬들 홈스

 

 

* 부처는 "하나의 양초로 수천 개의 양초를 밝힐 수 있고, 그래도 그 양초의 수명은 짧아지지 않는다. 행

  복은 나누어주는 것으로 줄어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처럼 대부분 물질은 유한하지만 행복은 무한

  다.

 

 

 

 

우리 삶은 행복을 향해 움직인다

행복 인식은 행복이 궁극적인 가치이며 모든 다른 목표들의 지향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행복 인식은 물질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맨 꼭대기에 있는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삶의 의미이며 목적이고 인간 존재의 온전한 목표이며 목적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달라이 라마는 "종교를 믿든 아니든, 이 종교를 믿든 저 종교를 믿든 우리 삶의 목적은 행복이며 우리 삶은 행복을 향해 움직인다"라고 말했다.

우리 삶을 평가하는 가치, 즉 중요한 것에 대한 인식은 개인의 삶과 사회 전체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삶에 대해 던지는 질문들은 더 많은 돈가 더 많은 소유물을 얻을 수 있는 방법(물질 인식)보다 더 많은 의미와 즐거움(행복 인식)을 발견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목적지뿐 아니라 여행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도 물질 인식이 널리 퍼져 있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다. 학생들은 대부분 대학 교육이 돈을 버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를 계산한다. 일을 선택할 때는 주로 지위와 출세를 먼저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울증이 증가하는 것이 당연하다.

반면 행복 인식은 "무엇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해줄 것인가?" 라는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 답을 알려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무엇이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가?" "나는 무엇을 잘하는가?" 라는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에서 공통분모를 찾으면 된다.

스스로 "무엇이 나의 소명인가?" 라고 물으라 그리고 학교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평생에 걸쳐서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하면 궁극적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진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철학 교수인 오하드 카민은 이렇게 조언했다.

"인생은 짧다. 진로를 선택할 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보라. 그중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선택하라. 그리고 다시 그중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일들로 선택의 폭을 좀더 줄여라. 마지막으로 그중에서 정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서 그 일을 하라."

 

 

 

 

명상, 내면 들여다보기

당신은 어느덧 110세가 되었다. 방금 타임머신이 발명되었고 당신은 최초로 그것을 사용할 사람으로 선택되었다. 나사의 과학자이 발명가는 당신이 처음 이 책을 읽은 날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터득한 많은 지혜를 갖고 있는 당신은 젊고 아직은 미숙한 자신과 만나서 15분을 함께 보낼 수 있다. 자, 이제 당신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젊은 당신에게 어떤 조언을 할 것인가?

나는 정신분석학자인 어빈 얄롬이 말기 암환자들에 대해서 쓴 이야기를 읽고 나서 이 사고실험을 떠올렸다

 

 

많은 환자가 죽음을 똑바로 직시함으로써 병이 들기 전보다 더 풍부한 존재 방식을 갖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관이 확연히 바뀌었다고 말한다.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고, 자제력이 생기고, 원하지 않는 일을 그만두고,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와 좀더 솔직하게 대화하고, 미래나 과거가 아닌 현재에 충실하게 살기로 한다. 삶이 하찮은 일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계절, 낙엽, 지난봄, 특히 다른 사람들 사랑하기와 같은 존재의 기본적인 요인들을 좀더 풍부하게 이해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왜 암에 걸리고 나서야 비로소 삶을 평가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걸까요?"

 

 

얄롬과 다른 사람들이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들에 쓴 글을 읽으면서 특히 놀라웠던 점은 그들이 여전히 그전과 같은 인생의 문제르 갖고 있으며 인지 능력과 감성 능력에도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시나이 산에서 내려와 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계시를 내린 것은 아니었다. 중국이나 인도, 그리스의 현자가 그들에게 훌륭한 삶에 대한 비밀을 가르쳐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삶을 변화시킬 만한 혁명적인 자기계발서를 읽은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항상 갖고 있었지만 전에는 모르고 있었던 능력으로 스스롤 자신의 삶을 바꾸었다. 어떤 새로운 지식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항상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인식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전에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무시했거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시간여행 실험은 우리에게 인생의 덧없음과 소중함을 동시에 일깨워준다. 당연히 110세이 노인은 많은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아서 110세까지 산다고 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일부는 스무 살에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인식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조지 버나드 쇼는 "젊음은 젊을 때 낭비가 된다"고 말했다. 그의 경구를 빌려서 표현한다면 젊음을 젊을 때 낭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철학이나 심리학 책, 자기계발서가 우리에게 궁극적인 가치를 얻는 것에 대해 새롭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책이나 교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우리의 인식 수준을 높여주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인식하게 해줄 뿐이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발전과 성장과 행복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중요한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에서 온다.

 

 

 

단순하게 그리고 천천히

너무 많은 사람이 과로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니얼 카너먼과 그의 동료들이 실시한 연구에서 드러난 놀라운 결과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여성들에게 전날 했던 활동을 열거하고 각각의 활동을 하면서 어떻게 느꼈는지 설명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여성들은 음식 만들기, 일하기, 자녀 돌보기, 쇼핑하기, 통근하기, 교제하기, 친밀한 관계 맺기, 가사 등등을 열거했다. 가장 뜻밖의 사실은 많은 어머니들이 자녀를 돌보는 시간을 특별히 즐겁게 여기지는 않는다고 보고한 것이다.

카너먼의 논문 공저자인 노버트 슈워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나타난 그 연구 결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에게 자녀들과 보내는 시간을 즐기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동물원에 데리고 가는 것처럼 좋은 일만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다른 일을 할 때는 아이들이 방해가 된다."

대부분 부모가 육아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평생 가장 의미 있는 경험으로 생각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행복의 즐거움 부분은 크게 줄어든다. 점점 복잡해지는 현대사회에서 휴대전화, 이메일, 인터넷 등이 즐거워햐 하는 활동들을 끊임없이 시간에 쫓기면서 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많은 일에 시간과 관심을 쏟으면 현재에 충실할 수 있는 능력과 경험을 평가하고 즐기는 능력이 감소된다."

시간 부족은 우리 사회 전반에서 우울증이 늘어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나는 대학원을 다니던 6년 동안 조교로 일했는데, 그때 학부생들의 이력서 쓰는 것을 도와주는 일도 했다. 매년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는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선배들보다 크게 높아졌다. 처음에 나는 그들의 놀라운 성취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다가 그들이 이력서를 빽빽하게 채우려고 감정적인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언급했듯 우울증이 있는 것으로 드러난 45퍼센트의 대학생 가운데 94퍼센트가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우리는 부족한 시간 안에 점점 더 많은 일을 채워넣으려 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 주벼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가치의 원천들, 즉 음악이나 아름다운 경치, 영혼의 동반자, 소중한 자녀와 보내는 시간 등을 평가하고 즐길 여유가 없다.

 

Think about

당신은 어떤 분야나 활동에서 시간 부족 때문에 행복할 수 없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좀더 즐기면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대답에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나쁜 소식은 불행히도 마법의 탄환은 없다는 것이다. 좋은 소식은 우리 삶을 단순화하고 활동을 적게 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 없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단순하게 살라

19세기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단순하게 살라고 권유했다.

"단순함, 단순함, 단순함! 당신이 하는 일을 백 가지나 천 가지가 아니라 두세 가지로 줄이고, 백만이 아니라 여섯을 세라."

소로의 말은 세상이 점점 복잡해지고 중압감은 시시각각 증가하는 오늘날에 더욱 적절하게 들린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해야 하는 일은 너무나 많다. 이런저런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상황은 여러 부분에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연구원 수전과 클라이드 헨드릭은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 단순한 삶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만약 우리가 단순하게 살면서 스트레스 수준을 줄일 수 있다면 사랑과 성을 포함해서 대인관계가 풍요로워질 것이다. 더불어 삶의 긍정적이측면도 증가할 것이다."

심리학자 팀 카세는 시간의 풍요가 물질의 풍요보다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말한다. 시간의 풍요는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반성하고 여가생활을 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반대로 시간이 부족하면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고 쫓기고 과로하고 뒤떨어져 있다고 느끼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거나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시간에 쫓기면서 살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단순한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보호하고 일에서나 사람에게서나 좀더 자주 "아니요"라고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말처러 쉽지는 않다. 우선순위를 정해서 정말 원하는 활동을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 버려야 한다. 다행히 우릭 하는 활동을 줄인다고 해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와인 감식가는 한 번에 잔을 비우지 않는다. 풍부한 맛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 향기를 맡고 맛을 보고 음미하면서 시간을 갖는다. 인생의 감식가가 되기 위해서는 삶이 주는 풍요로움을 즐기는 시간 여유가 필요하다.

 

 

 

 

매일을 행복한 삶으로 사는 약속

행복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걸림돌은 어떤 한 가지, 예를 들어 어떤 책이나 스승, 공주나 기사,어떤 성취나 수상, 계시가 우리를 영원한 행복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그릇된 기대를 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우리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지만 행복한 삶의 모자이크에서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행복에 대한 동화적인 개념, 즉 어떤 미리 일어나면 영원히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은 불가피하게 실망으로 이어진다. 행복한 또는 더 행복한 삶은 어떤 일생일대의 사건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꾸준히 경험이 쌓이면서 조금씩 더 행복해지는 것이다.

궁극적인 가치를 위한 삶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일상의 평범한 작은 부분들이 모여서 인생이라는 모자이크가 만들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거나 직장에서 어떤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즐거움과 의미를 느낄 때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매일이 그러한 경험들로 채워질 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벤_샤하르 교수의 행복 6계명

 

 

1. 인간적인 감정을 허락하라

   두려움, 슬픔 , 불안 등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극복하기가 쉬워진다. 자신의 감

   정을 부정하면 좌절과 불행으로 이어진다

 

 

 

2. 행복은 즐거움과 의미가 만나는 곳에 있다

   직장과 가정에서 삶에 의미를 주면서 즐거움도 느낄 수 있는 활동을 하라.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행복

   촉진제'를 만들어서 실천에 옮겨보라. 

  

 

3. 행복은 사회적 지위나 통장잔고가 아닌 마음먹기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라

   행복은 우리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실패를 재앙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배움의 기회로 생각할 수도 있다.   

 

 

 

4. 단순하게 살라

   우리는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데 일은 점점 더 많이 하려고 욕심을 부리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

   고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일을 하다 보면 행복을 놓칠 수 있다.

 

 

 

5.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가 몸으로 하는 것, 또는 하지 않는 것은 마음에도 영향을 준다.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충분히 자고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하며 몸도 마음도 건강해진다.

  

 

6.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감사를 표현하라

   우리는 종종 우리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사랑에서 음식까지, 자연에서 미소까지, 우리 인생의

   좋은 것들을 음미하고 감사하는 법을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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