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사랑은 끝없는 이해의 여정

오키Oki 2013. 2. 14. 16:43

발렌타인데이를 맞아 짝인 까꿍아저씨를 사랑하는 까꿍아줌마의 情  ㅋㅋ 

 

 

 

설 명절을 쇠러 온 딸들하고 함께 만들어 본 발렌타인데이의 초콜릿

 

 

 

 

- 강상중 지음『 살아야 하는 이유 』에서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지은이 강상중

1950년 일본 규슈 구마모토 현에서 제일교포 2세로 태어났다. 현재 도쿄대학 대학원 정보학환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청년 시절 제일 한국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고, 1972년 첫 한국 방문을 계기로 "나는 해방되었다"고 할 만큼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였다. 이후 일본 이름을 버리고 '강상중'이라는 본명을 쓰기 시작했다.

독일 뉘른베르크대학에서 정치학과 정치사상사를 전공하고, 1998년 재일 한국인 최초로 도쿄대학 정교수가 되었다. 일본 근대화 과정과 전후 일본 사회, 동북아 문제에 대한 비판적이고 날카로운 분석으로 일본 지식인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고,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냉정한 분석과 세련되고 지적인 분위기, 호소력 강한 목소리로 많은 팬을 가지고 있다.

그의 대표 저서『고민하는 힘』은 고도성장의 시대가 끝나고 경제 위기가 심화되고 갈수록 살기가 팍팍해지는 사회 속에서 불안과 고민에 휩싸여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힘든 고민의 시간이 곧 살아갈 힘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밀리언셀러가 되었고 한국에서도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며 화제이 책이 되었다.

 

 

 

나는 과거로소이다

인간은 누구라도 '일회성'과 '유일성' 안에서 살고 있다고 프랑클은 말합니다. '일회성'이란 그 사람의 인생이 한 번밖에 없다는 것을, '유일성'이란 그 사람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생의 탄생과 죽음에도 중대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은 한 번뿐이고, 따라서 사람은 둘도 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이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그 당연함이 상당히 오랫동안 망각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잘 살려고 한다면, 인간다움의 근본인 이 '일회성'과 '유일성'을 되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망각된 가장 큰 이유는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사람을 상품화하는 요상한 시장경제지상주의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일회성'에 대해 말하자면, 의료나 과학이나 안전 기술 등이 발달하여 우리가 '죽음'에서 점차 멀어져 간 것과 크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건대 60여 년 전까지 일본 사회는 전쟁으로 인해 죽음과 서로 이웃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죽음에서 아주 멀어져 세계 유수의 장수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그와 동시에 삶의 존엄함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있었을 때는 목숨이 더할나위 없이 소중하다고 생각되었고, 그 때문에 죽음을 멀리 쫓아 버리는 데 열심이었는데, 죽음을 멀리 쫓아 버렸더니 이번에는 삶의 소중함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뿐인 인생을 소중히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인생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구체적인 내용은 사람에 따라 제각각입니다. 다만 제가 특별히 말하고 싶은 것은, 과거를 소중히 하며 살아서 좋은 과거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고, '과거'를 그리워하건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소극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쪽으로만 시선을 향하고 마는 것인데, 인간에게 정말 귀중한 것은 사실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아닐까요.

과거의 축적만이 그 사람의 인생이고, 이에 비해 미래라는 것은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제로 상태입니다. 미래는 어디까지나 아직 없는 것이고 일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과거는 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내 인생'이란 '내 과거'이니, '나는 과거로소이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중요시하는 것은 인생을 중요시하는 것일 수 밖에 없고, 역으로 '가능성'이라든가 '꿈'이라는 말만 연발하며 미래만 보려고 하는 것은 인생에 무책임한, 또는 그저 불안을 뒤로 미루기만 할 뿐인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로, '미래'로, 우리가 앞쪽으로만 시선을 향하고 싶어지는 것 또한 시장경제의 특성과 무척 잘 어울립니다. 시장경제에서는 소비의 신진대사를 가속하기 위해 철저하게 미래만을 문제 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장 안에 푹 잠겨 있는 우리도 무심결에 그런 시장의 가치관에 끌려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겠지요.

 

 

 

둘도 없는 당신

인간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유일성'입니다. 인간은 단순한 상품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절대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이는 어느 시대,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누구라도 괜찮다'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장경제 안에서는 그런 일이 당연하게 이루어집니다. 누구로도 대체 가능한, 사람이 상품화된 경제 시스템이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어, 사람의 존엄함을 현저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유일성의 상실은 직접 접근형 사회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직접 접근형 사회라는 것은 얼굴도 없고 이름도 없는 불특정 다수의 개인이 마치 원자(아톰) 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군주()의 한 사람으로 살고, 아무런 매개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직접 목표와 이어진 세계를 말합니다.

이러한 사회가 이미 현실인데, 여기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유일무이'라는 것이야말로 가장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군중 안에서는 모두가 같지 않으면 군중의 균형을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으므로 우리는 좀처럼 자신이 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할 수 없고, 타인에 대해서도 그 사람이 둘도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좀처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개중에는 오히려 군중의 탁한 늪 안에 자신을 가라앉히는 것을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인터넷 등 여론이 발생하는 장소이거나 하기 때문에 한층 더 그 장소에 잠겨 버리고, 결과적으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폐해는 '3·11'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지진 피해 지역을 응원하는 말이 대부분 '힘내라 일본' 일색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국민이 떠들어 대거나 노는 것을 '자숙'이라는 이름하에 일제히 삼갔습니다. 균질 감각의 언어나 태도는 바로 '유일무이'의 대극에 있는 '군주의 균질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 그런 면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입니다. 둘도 없는 생명을 갖고 있고, 주장을 가진 개인입니다. 중요한 것은 둘도 없는, 대체할 수 없는 바로 당신인 것입니다. 누구라도 좋은 것이 아니라 대체할 수 없는 당신, 그것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5장에서도 말했듯이 자신의 독창성을 탐구하는 '진짜'나 '자기다움'에 대한 지향은 확실히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강요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이처럼 군중의 늪이 전 세계를 뒤덮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 늪에서 모래알 하나로 가라앉고 있는 가운데 그것에 저항하며 필사적으로 떠오르려고 하는 개성의 비명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우리의 '본래적인'(진짜의/자기다운) 존재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깊이 파고들어 생각하고, 받아들이거나 극복해야 할 사회의 모습이 무엇인지 다시 물을 필요가 있는 아닐까요.

 

 

 

인간의 세 가지 가치

8장에서는 우리의 존재 양상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장에서는 우리가 인간의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디에서 행복을 찾으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프랑클(빅토르 에밀 프랑클: 유대인 정신의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상상을 초월하는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위기에서 살아남아 빠져나왔고, 세계대전 후에는 자신의 가혹한 경험을 살려 인간 마음의 어둠과 삶의 의미를 해명하는 일에 사력을 다합니다)은 인간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풍부하기 때문에 이를 실마리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기로 하겠습니다.

인간의 진가 그 하나,

그것은 뭔가를 만들어 내는 '창조'입니다. 이 말에서 곧바로 인상되는 것은 회화나 조각 등 이른바 예술적인 창조일 것입니다. 물론 그것만이 아닙니다. 과학에서 이루어지는 발명이나 기업 활동에서 이루어지는 기술 개발, 상품이나 서비스의 창조, 뭔가 업적을 쌓는 것도 창조입니다.

요즘 사회에서는 이 '창조'가 인간의 가치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확실히 우리는 특별한 의미를 담아 '크리에이티브creative'라는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가치의 획득에 성공하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공'이고, 이것이 현재의 능력주의나 성과주의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진가 그 둘,

그것은 '경험'입니다. 원래 자신만의 독창적인 뭔가를 '창조'하는 것이 멋지겠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적어도 '경험'이라도 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뭐나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낯선 나라를 여행해 보고, 뭔가를 배우는 모임에 가입해 보고, 자원봉사 활동을 해보는 것입니다. '창조'보다는 못하다고 해도 '해보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경험만으로는 인생에 무게가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진가 그 셋,

그것은 '태도'입니다.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며, 그저 마음속으로 빌고 기도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칫하면 소극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프랑클은 인간의 가치로서 이 '태도'를 가장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지금 가장 중요하게 재검토해야 하는 것은 '태도'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트워크 사회 또는 시장 원리 앞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이 '태도'를 획득하는 일일 것입니다.

'태도'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프랑클은 어느 말기 악성종양 환자를 예로 들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환자는, 회진 때 의사가 죽기 몇 시간 전에 통증을 완화해 주는 모르핀으 주사하도록 지시한 사실을 알고 그날 밤 죽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그 환자는 프랑클에게 "지금 그 주사를 놓아 주세요. 그러면 선생님은 저 때문에 밤중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까요" 하고 말했습니다. 프랑클은 이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비할 데 없이 인간다운 업적"이라며 칭송했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프랑클이 말하는 '태도'가 그려진 소설로 톨스토이의『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인간의 진가를 생각하는 데 매우 훌륭한 사례입니다.

이반 일리치는 마흔다섯 살의 재판관으로, 그런대로 지위와 명성을 쌓아 온 인물입니다. 하지만 속물이고 허영심이 강하며, 그런 만큼 호감도 얻지 못합니다. 아내와의 관계도 파탄까지 나지 않았지만 결코 사이가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불치병에 걸립니다. 병의 진행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지만, 의사도 식구들도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으므로 그는 육체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정신적 공포라는 이중고에 시달립니다.

믿을 데라고는 가족밖에 없지만 병으로 인한 고통 탓에 그는 예전보다 더 지겨운 사람이 되어 아내와 딸에게 미움만 사고 있습니다. 그는 냉정한 태도의 아내와 딸을 원망합니다. 그러자 아내와 딸도 지긋지긋해하고, 일리치의 마음도 점차 거칠어지고 육체의 고통도 배가됩니다.

그런데 드디어 병이 악화되어 죽기 한 시간 전이 되었을 때 일리치는 침대 옆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며 울고 있는 중학생 아들의 모습을 보고 갑자기 자신의 태도가 가족들을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지 않으면 가여울 뿐이고, 자신 또한 구원받지 못한다는 데 생각이 미칩니다.

그 마음은 전조도 없이 돌연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그는 고통과 공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끝났다!'라는 생각과 함께 빛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삶은 끝났다'가 아니라 '죽음은 끝났다!'라는 안도와 함께 말이지요.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인생을 멋지게 좋은 것으로 바꾼 것이 재판관으로서 해낸 업적이나 지위 또는 재산을 축적한 수십 년의 사회적인 '창조'가 아니라 채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가족에게 배려의 마음을 보여 준 '태도'였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톨스토이 역시 인간의 가치는 '창조'보다는 '태도'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야기는 6장에서 말한 '거듭나기'라는 것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가족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것이 바로 거듭나기입니다. 또 그것을 얻는 것은 인생의 최후이므로, 인간의 인생은 최후의 최후까지 좋은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람만의 둘도 없는 인생'이라는 것으로도 연결됩니다.

'3·11'에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의 마음을 가장 울린 것은 적극적인 활동보다는, 그리고 웅변 같은 말보다는 그저 기도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창조'나 '체험'은 평상시나 건강할 때가 아니면 실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태도'는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언제 어느 때나 마음만 있으면 발휘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늘 진가를 묻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렇다 할 단련이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 이반 일리치처럼 그야말로 죽음 직전에 누워만 있던 상황에서도 실현할 수 있습니다.

태도라는 가치는 이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성공인가 실패인가, 효율적인가 비효율적인가, 유효한가 무효한가 하는 것 너머에 있고 또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이나 교환가치와는 대극의 위치에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종교적인 것'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이 가치는 한없이 인간의 본질에 가까운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

이번에는 '존엄dignity'의 중요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존엄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이반 일리치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 칭찬을 받으며 즐거운 인생을 보낸 것이 아닙니다. 이렇다 할 화려함도 없이 평범한, 오히려 미움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존엄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소하다고 해도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을 소중히 하는 사회가 바람직할 것입니다. 쓸데없이 뭔가를 시기하거나 선망하거나 원한에 빠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각자 자기 안에서 '이걸로 됐어'라는 자기 나름의 살아가는 의미 같은 것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일도 그렇습니다. 저는 전작『고민하는 힘』에서 인간이 일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타자로부터의 관심'(누군가에게 치하를 듣고 위로의 시선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거기에는 또 하나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병 때문에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직업만이 인간의 존엄이 있는 곳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 안에서 일을 함으로써 뭔가 생산물을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하는 것만이 인간이 가진 인격의 모든 원천은 아닙니다. 직업 이외의 것을 통해서도 충분히 자신답게 살 수 있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어 일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라도, 그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을 열심히 바라면 존엄은 충분히 유지할 수 있습니다.

8장에서도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일회성과 유일성 안에서 살아가는 동물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한 순간 한 순간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예컨대 국정을 담당하는 정치가와 마을 귀퉁이에서 자질구레한 것을 만드는 직인이 있다고 합시다. 직인이 자신의 일은 이렇게 보잘것없는 것이니까 높은 정치가에 비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면, 그건 분명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지만 나라의 키를 잡고 있다고 해도 중동무이하거나 부정을 저지른다면, 눈에 띄지 않아도 매일 꾸준히 물건을 만드는 직인이 인간의 태도로서는 훨씬 훌륭합니다.

 

 

 

사랑은 상대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

또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에서도 '태도'와 '존엄'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랑'의 이상적인 모습은 상대가 뭘 하든, 뭘 갖고 있든,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상대의 존엄을 소중히 하는 것이고, '태도의 가치'에 한없이 가까운 것입니다.

 

어느 커플이든 상대의 존재 자체를 통째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불신도 회의도 질투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어서 비극이 생깁니다. 만약 그들이 그럴 수만 있었다면, 격렬한 연애를 할 수는 없었을지 모르지만 평온한 마음으로 따뜻한 신뢰 관계를 쌓을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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