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내 인생의 행복발전소! - 가와기타 요시노리 지음 『 중년수업』중에서 - 나이에 지지 않고 진짜 인생을 사는 법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재미있어진다 또 한 살 나이를 먹는다. 어느새 '중년'이란 말이 실감나게 다가오고, 그 이후의 시간들이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미리부터 정년퇴직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둘씩 늘어가는 흰머리를 보며 한숨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마음인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먼저 중년을 경험하고 젊음보다 더 멋진 노년을 즐기고 있는 사람으로서 분명히 해둘 말이 있다. "앞으로 당신은 지금껏 맛보지 못한 알짜배기 시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당신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 시간들은 순전히 당신 것이며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껏 쓸 수 있다. '중년 이후의 시간들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조언 따위는 잊어버려도 좋다. 사실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부터가 문제다. 우리는 지금껏 시간을 너무 혹사시켜 오지 않았던가? 하루 24시간, 한정된 시간 안에 엄청난 내용물을 담으려고만 했다. 이제 '시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라는 질문을 '시간과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로 바꿔 놓고 생각해 보자. 중년 이후 당신은 자유인으로서 시간을 맞이하게 되고 그때부터 진짜 재미있는 인생이 시작된다. 무엇을 해도 좋다. 나잇값 못하고 노는 데 정신이 팔려도 좋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떨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구태여 전속력으로 내달릴 필요도 없지 않은가? 나이는 우리에게 흰머리와 주름살만 주는 게 아니다. 그 나이가 되어야만 비로소 어울리는 깊이 있는 멋도 함께 준다. 막연한 불안감 따위는 훌훌 털어내고 이제 선물을 받듯이 나이를 받아들이자. 30~40년 일해 온 시간과 그 이후 80세까지의 자유시간의 양은 거의 맞먹는다. 남에게 폐만 끼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든 자유로운 시간은 가득하다. 괜히 허둥대며 중년 이후의 인생 설계 따위를 세울 필요도 없다. 서점에 가면 나이 든 사람의 생활방식을 조언하는 책들이 무수히 꽃혀 있지만, 하루 24시간과 일주일치 스케줄을 적으라고 해도 도통 적을 게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당연하지 않은가. 예정 따윈 아무것도 없는, 그것이야말로 나이 든 사람들의 특권이며 나이 듦의 매력이니까. 어떤 이는 중년 이후 '너무 한 곳에 열중하여 정신을 빼앗기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하는데, 정말 쓸데없는 참견이다. 논을 매든, 밭을 갈든, 배낭여행을 떠나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알면 그만이다. 뭘 하든 본인 마음이며 그게 바로 나이 든 자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중년 이후, 그때야말로 남 눈치 볼 것 없이 그저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시기다. 지금껏 당신에게 그런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 곧 당신은 누구의 간섭도 없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오랫동안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나만의 재미를 위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인생의 하프라인을 넘기 전까지는 목표가 보이지만, 절반을 지나고 난 뒤부터는 목적이 보인다. 목표를 향한 걸음은 비록 성급할지라도 목적을 향한 걸음은 느릴수록, 그리고 즐거울수록 좋다. '무능한 도둑은 금고만 보지만 유능한 도둑은 퇴로부터 본다'라는 말이 있다. 베테랑 산악인들도 정상 정복보다는 하산에 대한 준비를 더욱 철저히 한다. '계획'이란 지금 이 순간의 성공뿐만 아니라 훗날의 안정까지를 계산해야 비로소 완벽해진다. 누구나 중년을 맞게 되고 누구나 회사를 떠나는 날이 오지만, 그 이후의 삶은 30~40대 때 어떻게 준비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하고 싶은 게 없다! 그럼 또 어떠한가?
정년퇴직을 앞둔 어느 회사 간부에게 잡지사 기자가 '은퇴 후의 계획'을 물었다. 받아 적을 준비를 하고 있는 기자에게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더 이상 계획을 세우지 않을 계획입니다."
지금도 당신의 수첩에는 업무 스케줄이 빽빽이 적혀 있을 것이다. 한 페이지의 빈 공간도 없이 당신은 줄곧 그렇게 일을 해왔고, 지금도 앞으로도 열심히 해나갈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더 이상 스케줄을 적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온다. 그것이 바로 은퇴다. 은퇴란 그때까지 수첩을 빼곡히 채워왔던 스케줄이 모두 사라지고 갑자기 텅 비어 버리는 것이다. '이제 회사와는 영원히 작별이다.. 나는 자유다!"라는 생각과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도 몰려온다. 유난히 걱정이 많은 사람이거나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일수록 불안은 더 심할 것이다.
하지만 불안가마을 키우는 주범은 따로 있다. 바로 은퇴 계획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이다.
이제 곧 50세가 되는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나이 든 후의 '목표'다 , '삶의 보람'이다 흔히들 말하는데요, 대체 뭘 어쩌라는 겁니까? 인생의 2막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해야만 한다는 둥, 진짜 자기다운 삶을 찾아야 한다는 둥, 엄청난 말들만 쏟아내지 않습니까? 저는 아무 생각 없이 빈둥빈둥 보낼 작정인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꾸짖는 것만 같아 문득 뭐라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자원봉사요? 말은 좋죠. 하지만 도통 무슨 소린지 감이 와야 말이죠. 저는 그런 것보다는 그저 내킬 때 영화나 연극, 콘서트를 보거나 가끔 친구들과 골프나 테니스로 땀을 뺀 뒤 기분 좋게 술 한 잔 걸치는 게 좋습니다. 1년에 몇 차려 국내여행을 하고 가끔 해외여행도 하면서 말이죠. 또 사진 찍기를 좋아하니까 슬렁슬렁 여행이나 다니면서 풍경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 말에 100% 동감이다.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사로잡혀 원하지도 않는 일들을 할 바에야 담담하고 태연하게 무료한 날들을 받아들여 빈둥빈둥 보내는 편이 낫다. '더 이상 계획을 세우지 않을 계획'이라는 어느 회사 간부의 말처럼, 인생의 새로운 한 시기에는 '아무것도 안 할 자유'도 한 번쯤 누려봐야 하지 않을까?
나이가 들어서도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은 비단 정년 퇴직을 앞둔 세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은퇴라는 키워드를 강조하는 매스미디어의 영향으로 인해 40대는 무론 3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나이 듦'에 대한 불안이 전파되고 있다.
대형 서점에 가면 중년 이후의 생활 지침서가 산처럼 쌓여 있고 잡지를 펼치면 '취미로 살아가기', '성공적인 전원생활을 위한 팀', '자원봉사는 인생의 보람' 같은 내용으로 온갖 부채질을 하고 있다.
또 최근 일본에는 중년 이후 보람을 찾겠다는 사람들을 타킷으로 한 학원까지 등장했다. 청소하는 법, 세련되고 맵시 나게 캐주얼을 입는 법, 아내가 기뻐하는 여행 계획 세우는 법을 가르쳐 주는 곳이 있는가 하면, 낚시나 골프, 밭농사, 숲속 산책 등 중년 이후를 즐기는 방법까지 전수해 주는 곳도 있다.
오랜 샐러리맨 생활로 '지시를 기다리는 생활방식'에 완전히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고마운 서비스일지 몰라도, 굳이 '돈을 들여서까지 배워야 하나?'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온다. 현명한 독자들은 벌써 눈치 챘겠지만, 이 쓸데없는 간섭은 은퇴세대의 주머니를 털려는 얄팍한 술수 냄새가 팍팍 풍긴다.
분명히 해두자. 나이 들어서 어떻게 살든 그건 순전히 본인 마음이다. 취미를 살리든, 자원봉사를 하든, 아니면 나이 따위와는 상관없이 계속 일을 하든, 남들이 왈가왈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건 큰 실례다.
'인생의 보람'이란 말에 너무 기죽을 필요도 없다. 매스미디어의 선동에 휩쓸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보람을 찾는 일이 보람이 되고 말았다'는 식의 본말이 전도된 상황만큼 우스꽝스러운 일도 없지 않은가?
지금까지 제대로 이뤄놓은 게 없다는 생각에 초조해하거나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인생 80시대, 앞으로 살아갈 날은 창창하다.
느긋하게 마음먹고 나름의 즐길 거리를 차분히 키워 숙성시키면 된다. '그때 가서 준비하면 늦습니다'라는 말 따위에 현혹되지 말자. 도대체 뭐가 늦었단 말인가?
세상이 아무리 욕망을 부추겨도 나 홀로 만족한다?
서부영화 <자니 기타>에서 주인공 자니 기타는 자신을 둘러싼 총잡이들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금과 은을 갖고 싶어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소떼가 가득한 넓은 땅을 갖고 싶어 하지, 그리고 위스키와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중에 하나를 고른다면 남자한테 진짜 필요한게 뭐겠소? 그저 한 잔의 커피와 담배 한 모금이지."
거친 황야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본 방랑자에게 행복이란 '한 잔의 커피와 담배 한 모금, 그리고 낡은 기타 하나'가 전부였던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무제한의 욕망이 질주하던 서부시대에 자니 기타라는 주인공은 참으로 별난 인물로 부각된다.
교토 료안지 경내의 약수터에는 유오지족(唯吾知足 : 오로지 스스로 만족을 안다)이란 글귀가 적혀 있다. 뜻을 새겨보면, 부족한 것을 더 좇지 않고 욕망을 다스리며 이미 있는 것으로 만족하라는 얘기일 것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스스로 만족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고 인생의 모든 순간에 '적당함이 좋다'고 하면 인생은 저절로 즐거워진다. 원래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고 주위의 작은 행복에서 기쁨을 찾아왔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전혀 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서부시대의 총잡이들처럼 모두가 끝없는 욕망과 비대한 행복을 갈구하고 있다. 이것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말할 것도 없고 '열심히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식의 근거 없는 행복관이 미디어를 통해 마구잡이로 소비되어 온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분명 있는데도 '무조건 열심히만 하면 뮤지션이 될 수 있다' 혹은 '당신도 얼마든지 해외에서 장기체류할 수 있다' 같은 말들이 수없이 쏟아져 아온다. 그러다 보니 결국 자신도 모르게 행복의 수준을 대폭 끌어올리거나 욕망의 크기를 무작정 확대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큰 행복을 꿈꾸다 깨지고 나면 이전보다 훨씬 불행해지고 만다. 또한 행복을 지나치게 좇다 보면 도대체 행복이 무엇인지 그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되기도 한다.
대도시의 아파트를 사기 위해 밤에 불도 켜지 않고 전기료를 아껴 가며 눈물겨운 구두쇠 생활을 하는 가족을 생각해 보라. 10년이나 20년 뒤에는 꿈을 이룰지도 모르겠지만 그런것들이 과연 행복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아무런 꿈도 꾸지 말라'는 게 아니다. 기업의 마케팅에 부추겨져 정말 자신이 바라는 게 뭔지도 모른 채 '당치도 않은 꿈'을 좇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얘길 하려는 것이다.
요즘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경제 상황 등의 사회적 배경 탓이라 할 수도 있지만, 행복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 비대해진 나머지 그 꿈이 깨어졌을 때 느끼는 슬픔과 절망을 감당하지 못해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고 싶은 일, 피하고 싶은 일, 이루지 못한 일, 포기해야만 하는 일, 그 모든 행복의 수준이나 크기는 아마 그 사람의 역량과 비슷할 것이다. 40대에 접어들면 나중을 내다보며 자신의 역량에 맞는 행복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족'이란 진정 원하는 것과 자신의 역량이 딱 들어맞는 순간을 뜻한다. 그래서 만족을 알면 인생은 즐겁다.
브랜드 물건을 갖지 않아도, 해외여행을 가지 않아도, 마트에서 산 폴로셔츠를 입고 가까운 곳을 산책하며 벤치에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이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내 인생도 나름 즐거운 인생이었어!"
이렇게 말하고 막을 내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는가.
다 버리고나면 인생의 '진짜 자원'만 남는다
20~30년 동안 인기를 누려온 여배우가 있었다. 51세에 접어들자 그녀는 문득 '앞으로 얼마나 아름답게 나이 들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55세에 은퇴를 하고 61세에는 자택을 세 칸짜리 집으로 개축한 뒤, 부부가 쓸 만큼만 남기고 가재도구를 포함하여 모든 물건을 전부 남에게 주거나 팔아치웠다. 남편이 "나도 갖다 버릴 셈인가?"라고 할 만큼 모조리 처분한 것이다.
그렇게 불필요한 것들을 철저히 버림으로써 그녀는 전에 없던 자유와 산뜻한 기분을 얻었다. 그리고 그 홀가분한 기분과 새로운 행복을 글로 써서 '버림 예찬'이란 제목으로 잡지에 기고했다.
마음을 어지럽혀 왔던 온갖 부질없는 것, 가령 그때까지의 체면이나 허영 따위도 싹둑 베어 버린 대신 남은 인생의 자원을 소중하게 사용하기 위해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느 날 갑자기 "지금부터 체면 따위는 무시한다"라고 선언한 친구도 있다.
"체면치레로 보냈던 연하장이나 안부 인사는 이제 그만둘까 싶어, 명절 선물도 생략해야겠어. 그 대신 친한 사람들한데 마음을 담은 전화나 편지를 쓸까 해. 경조사 때도 얼굴만 슬쩍 내밀고 나머지는 그냥 넘어갈까 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뭐 대수겠어? 세 간의 정에 얽매여 친척이다, 모임이다 그런 식으로 번거로워지는 거 이제 질렸어."
그렇게 하여 '체면 단절 선언'을 하는 한편 , "불필요한 것들은 죄다 없애고 단순하게 살겠다"며 집 안의 불필요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버리기 시작했다. 그는 독서광이라 상당한 장서가 있었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서화와 골동품도 꽤 있었지만 그것들을 대부분 팔아 후련하게 처분했다.
"미련을 버려야 해. 안 그러면 집 안이 금세 창고로 변하거든, 버려야 할 때 못 버리면 다시 책과 서화들, 골동품이 쌓여 산이 되고 말아, 집 안에 물건이 쌓여 있으면 그게 바로 스트레스야, 스트레스를 없애려면 공간을 최대한 쾌적하게 만들어야 해, 그러자면 눈 질끈 감고 버릴 수 있어야 하지, 책을 꼭 가까이에 둘 필요도 없잖아.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도서관에 가면 되지, 사실 서화나 골동품은 남한테 보이겠다고 소중히 품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럴바엔 차라리 처분하는 게 나아, 훌륭한 예술품을 접하고 싶으면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 가면 되는 거지."
물건을 버리면 사람은 휑뎅그렁한 공간에서 자신의 진실한 마음과 마주하게 되낟. 초가삼간과도 같은 간소한 공간을 손에 넣은 친구는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진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쓸데없는 것을 죄다 없앤 단순한 삶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암자에서 좌선을 하는 수행승 같지만 친구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자신의 본거지는 텅 비었어도 삶에 리듬이 생겨 간혹 클래식 콘서트에도 가고, 편지를 쓸 때는 좋은 만년필로 쓰고 싶다며 명품 만년필에 거금을 쓰며, 1년에 한 달 정도는 좋아하는 말레이시아로 여행을 떠나는 등 자신에게 가치가 있는 것에는 아낌없이 돈을 쓴다.
물건에 집착하지 않고 버리는 것과, 가지 있는 것에는 사치를 하는 마음은 얼핏 모순인 듯해도 그렇지 않다. 부질없는 것을 가볍게 떨쳐내고 자신에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직시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의 사치도 생기는 법이다.
부질없는 것을 가볍게 떨쳐낼 수 있다면 진정한 자신을 만날 수 있고 가장 자신답게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됐을 때 당신 앞에는 새로운 인생이 펼쳐진다.
흰머리가 어울리는 사람은 흰머리가 된다는 법칙
나이가 든다는 것.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까지는 아직 가슴에 크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40대 중반을 넘어서고 나면 어느 날 난데없이 등골이 오싹해지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거울을 보면 머리카락도 많이 빠진 것 같고, 어느새 흰머리도 부쩍 는 것 같다. 그렇다.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책에서 '대머리를 걱정하는 것은 나이와 외모의 조화가 맞지 않는 동안의 일이며, 머리가 벗겨질 나이가 되면 저절로 머리숱이 줄어드는 것에 대해 잊게 된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언젠가 은사님 댁에서 무슨 말 끝에 대머리 이야기가 나왔다. 그랬더니 은사님이 "대머리가 어울리는 사람은 대머리고 되고 흰머리가 어울리는 사람은 흰머리가 된다. 마지막 종착역은 모두 같다"고 해서 크게 웃은 적이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고 늙어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노화'에 대해 지나친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다. 여기에는 '젊음'을 비정상적일 정도로 찬양하는 미디어의 영향도 한몫 한다. 인터넷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인기 여배우의 주름살에 대해, 그리고 나이를 초월한 S라인과 동안 외모에 대해 호들갑을 떤다 온갖 헬스 제품이나 화장품 광고들은 입에 거품을 물며 '노화'를 악의 축으로 물아댄다.
세상은 이렇게 영원한 젊음을 부추기는데 나만 홀로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우리른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진다. 만일 세상의 모든 미디어가 노년의 멋과 아름다움을 찬양하게 된다면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다.
강이 역류할 수는 있어도 시간이 되돌아가는 법은 없다. 지나간 젊음을 한탄하거나 마음 아파할수록 노화는 빨리 온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초조함에 떠밀려 뭔가를 해야겠다고 서두르는 것도 좋지 않다. 시간은 상대적이라 서두르는 사람에게 더 빨리 지나가기 때문이다. '여전히 하루는 24시간이지 않은가!' 하고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를 소중하게 살아가면 그만이다.
나이를 의식하게 되는 시기의 모든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늙는다는 것'과 '나이가 드는 것'을 구분하라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생물학적인 노화가 찾아온다는 뜻이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젊은이에게는 없는 것들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사람을 다루는 법이나 관계를 보는 눈, 풍부하고 다채로운 경험, 세월이 가르쳐준 직감, 그리고 욕망을 컨트롤할 수 있는 지혜 등은 나이를 먹을수록 빛나는 인생의 진리품들이다.
나이가 들면서부터 갈수록 스코어가 늘어가는 친구가 있었다.
비결을 묻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말했다.
"글쎄, 예전에는 이겨야겠다는 생각에 욕심을 부리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의욕들을 다 버리고 나니까 이상하게 편안해지더군, 그때부터 스윙이 자연스러원진 것 같아."
또 한 친구는 췌장암과 위암 수술을 받고 내장을 네 군데나 도려냈지만, 수술 후 건강을 되찾아 친목 골프대회에 출전하여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 역시 스윙에 힘을 뺐더니 이전보다 공이 더 잘 날게 되었다고 한다. 역시 자연스러운 게 좋은 법이다.
뭔가를 잃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럴 때는 그 대신 뭔가를 얻고 있을 거라 생각하자.
뭔가를 잃는 것은 뭔가를 얻는 것이다.
잃기만 하는 일방통행은 없다. 분명 뭔가 얻는 게 있다.
그것을 소중히 하면 저절로 길은 열릴 것이다.
적당히 좀 하자
"설탕은 얼마나 넣을까?" "응, 적당히."
"맛이 어때?" "응, 간이 적당한 것 같아."
"물 차갑니?" "아니 적당해."
도대에 어느 정도가 적당하단 말인가? 그럼에도 적당하다는 말은 너무도 요긴하게 쓰인다. 적당함이란 넘치지 않고 모자라지도 않다는 뜻이다. 짠맛과 신맛을 조화시켜 간을 맞추는 것을 '염매(鹽梅)'라고 하는데, 적당함이란 간이 '알맞은 상태', 즉 '좋은 염매' 상태를 뜻하며 플러스나 마이너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적당히 좋은' 균형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적당함'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백만의 사람이 있으면 백만의 진실이 있고 백만의 '적당함'이 있다"라는 말처럼 A에게는 적당한 온도가 B에게는 너무 뜨겁거나, C에게는 너무 미지근할지도 모른다.
어디쯤을 '적당함'으로 볼 것인가는 그야말로 천차만별, 백인백색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맞는 '적당한' 생활방식이 필요하지만 이것을 분명히 규정하기가 의외로 어렵다. 살다 보면 누구나 남의 이목을 살펴가며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기 때문이다.
인생을 긍정적인 플러스 발상으로 살아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지만, 지나치면 어느 순간 적당함의 균형이 깨져 버리고 만다.
플러스 발상을 하지 못하면 형편없는 사람처럼 취급되는 오늘날의 풍조는 급기야 마이너스 사고에 대한 공포심마저 심어 준다.
"내 인생은 이런 게 아니야" 하며 뒤를 돌아보지 않고 플러스 발상만으로 계속해서 산을 오르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역량을 잘못 판단하면 자기만의 봉우리에 오르기도 전에 발을 헛디뎌 반대편 골짜기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
일본 속담에 '게는 자기 등딱지에 맞는 구멍을 판다'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자신의 몸에 맞는 생활방식을 궁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무리하지 않고, 허세 부리지 않고, 너무 열심히 일하지도 않는 것이다.
어느 신문에서 '나이 든 남성들 중에는 젊은 리더의 말을 듣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많다'라고 지적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글을 쓴 등산가는 또한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원칙'으로 ①자신의 체중과 배낭을 무겁게 하지 않는다. ②경쟁하지 않는다. ③자만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이며, 자신의 역량에 맞는 '적당한' 등산을 권유했다.
그 조언은 중년층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가령 '체중과 배낭을 무겁게 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이 들어 떠맡게 되는 짐'으로 바꿀 수 있다. 대출금은 빨리 갚아 버리는 것이 좋고, 프리터(자유free와 아르바이터arbeiter를 합성한 신조어) 자식은 하루빨리 취직시키는 게 상책이다. 경쟁이나 자만을 삼가는 것도 중요하다.
등산이 취미인 40대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정년퇴직하고 모처럼 자유를 얻었는데, 마치 누군가와 경쟁하듯 전국 명산 100선을 제패를 목표로 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진짜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산에 여러 번 오르는 법이죠. 한 번 오르면 끝이라는 도장 찍기식 등산은 진짜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이 얼마나 명언인가.
'적당함'의 균형는 자신의 허용량을 초과하면 금세 무너진다. 지나치게 성실한 사람은 한계를 초월하여 너무 열심인 경향이 있으므로 특히 주의를 요한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과하면 반드시 몸에 무리가 온다. 지나치게 성실한 사람들에게 우울증이나 혈관계통의 병이 더 많다는 점을 고려하여 무리하지 않는 '적당한' 생활방식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잘 놀아 보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인생이 달라진다
60세가 넘어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 여성이 있다.
드라마 <겨울연가>에 푹 빠진 나머지 욘사마(배용준)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고 싶다며 한국말을 익힌 것이다. 지금은 한국에서 사귄 비슷한 연배의 친구들과 1년에 몇 차례씩 만나곤 한다.
한국어든 영어든 30~40대 때는 그렇게도 하기 싫든 외국어공부를 나이 들어서 새롭게 시작하는 중년들이 부쩍 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힘들게 느껴졌던 외국어가 신기할 정도로 쏙쏙 들어온단다. 어째서 그럴까?
사람들은 대부분 '공부'하면 취직이나 사업 등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여길 뿐, 그 자체의 즐거움을 누릴 여유가 없다. 힘들고 지겨운 시간을 억지로 참아 가며 공부를 해야 하니 지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공부의 순수한 목적이 다시 살아난다. '즐기기 위한 공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당연히 학습효과도 뛰어나다. <겨울연가>의 촬영지를 여행하겠다는 즐거운 목적을 품는 순간 1년 만에 한국말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60대의 여성처럼 말이다.
실제로 나이가 들수록 공부의 참맛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만일 전문적인 공부가 하고 싶다면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방법도 있다. 오랜 기간의 실무 경험을 무기로 제2의 인생을 학문의 길에 거는 것도 꽤 훌륭한 일이다.
몇 해 전에 한 여배우가 와세다대학원에 합격한 적이 있다. 비록 고졸이지만 논문심사에서 대학 졸업자에 필적할 만한 실력을 인정받아 선발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50대 중반이었다. 그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하고, 2009년에는 당당히 학생 대표로서 졸업식 연설까지 했다.
그런가 하면, 60세의 나이에 런던의 한 대학에 천문학 박사 논문을 제출하여 보란 듯이 심사를 통과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아티스트도 있다. 유명 록밴드 '퀸'의 기타리스트인 브라이언 메이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71년 초에 박사 논문 연구에도 참여했었지만, 밴드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결국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35년이 흐른 뒤에야 오래전에 접었던 그 꿈을 이룬 것이다.
어느 유전학자의 말에 의하면 원래 인간에게 '노동, 학습, 놀이' 이 세 가지는 생활의 기본이자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한 덩어리와도 같다.
자연스럽게 작용하여 생활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기 위한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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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 필요한 노하우를 전하기 위한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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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받는 동안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는 놀이
그러다가 근대화와 함께 사회제도가 생겨나 부모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아이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식으로 점차 분리가 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샐러리맨들은 일에만 매달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원래대로라면 일과 세트가 되었어야 할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학습이나 놀이'를 완전히 딴 세상으로 추방해 버린 셈이다.
서로 붙어 있어야 할 세 가지 요소가 따로따로 갈라져 버림으로 인해 아마도 중년 이후의 긴 인생을 보잘것없게 만드는, 혹은 사람에 따라서는 뼈저릴 만큼 아프게 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40대를 지나고 있는 사람일수록 죽자고 일만해서는 곤란하다. 한창 현역에 있을 때 오히려 더 배우고 더 놀아야만 한다. "업무가 산더미철머 쌓였는데 무슨 소리야?" 하고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배움과 놀이를 배제하고 일에만 매달리다 보면 결국 생산성도 크게 떨어진다.
하루 중 자투리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되돌아보고 그 시간을 배움과 놀이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라.
그 시간이 꼭 길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루 10분, 15분의 시간이라도 즐겁게 보낼 수 있다면 당신의 인생은 점점 풍요로워질 것이다.
즐거움이란 원래 마음속에 들어 있다. 하루의 바쁜 생활 속에서도 꽃을 사랑하고 독서와 여행의 풍류를 즐길 수 있느냐 없느냐는 본인의 지성과 감성에 달렸다는 것이다. 즐길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 살랑대는 바람에도, 가로로 길게 늘어진 구름의 작은 변화에도 한없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그런 건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은가?
내 친구들 중에는 신문을 갖고 노는 사람도 있다. 이젠 인터넷세상이 되어 컴퓨터나 휴대전화로 뉴스를 읽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신문사에서 근무했던 사람으로서 나는 종이 신문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신문을 바닥에 쫙 펼쳐 놓고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려 가며 읽어 보라. 모니터로 읽을 때보다 훨씬 생동감이 넘친다. 때로는 종이의 질감과 인쇄된 글자의 냄새로 인해 수준 높은 칼럼의 구절들이 오랫동안 기억에 저장되기도 한다.
보기 싫은 기사들은 벅벅 찢어도 좋다. 만일을 위해 필요하다싶은 기사를 스크랩해 둘 생각 따윈 집어치우는 게 좋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신문과 함께 즐길 생각만 하라.
내 친구는 서평란을 최고의 독서 길잡이로 활용한다. 그리고 매일 세 종류의 신문과 석간지 하나를 구독하고, 업계 신문도 자주 읽는다. 특히 주간지나 여성지 광고는 꼭 훑어본다.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는 최고이기 때문이다.
신문이 싫다면 책을 가까이 해보자. 신간 베스트셀러도 좋지만 고전과 같은 검증된 책들을 하나하나 독파해 나가는 것도 좋다. 인생의 절반을 지나 다시 고전을 읽으면 또 다른 멋과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다.
어쩌면 당신은 지금까지 순수한 놀이로서 공부를 접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외국어공부든 독서든 무거운 목적의식과 당위성으로 인해 늘 괴롭게만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부가 곧 놀이요, 놀이가 곧 공부라는 사실을 깨닫게되면 당신의 인생은 훨씬 풍요롭게 변할 것이다.
돈 때문에 불안해하지는 마라, 단, 계산은 해두자
나이를 의식하면서부터 생겨나는 불안 중에는 뭐니 뭐니 해도 '돈 걱정'만한 게 없다. 그럼 이제 돈 이야기를 좀 해보자.
50대에 접어들게 되면 누구나 은퇴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기가 되면 사회나 일 쪽에 세워져 있던 중심축을 '나 자신'으로 옮겨와 , 보다 큰 청사진을 그려 봐야 한다.
'계속 일을 할 것인가, 완전히 은퇴할 것인가? 계속 활동하겠다면 그 회사에서 정년 후에도 촉탁 형식으로 일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회사로 취직할 것인가? 완전히 은퇴할 거라면 매일 매일 어떻게 시간을 보낼 것인가, 혼자서 유유자적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나 회사와 관계를 맺어 가며 보낼 것인가?'
이 모든 생각의 대전제가 되는 것은 역시 '돈'이다. 내노라하는 부자가 아닌 이상 아무리 즐거워지려고 마음먹어도 돈 생각만 하면 금세 맥이 탁 풀리고 두근두근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불안'이란 제대로 계산해 보지 않은 데에서 오는 막연한 허상이기 쉽다. 그러니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용기를 내어 계산을 해볼 필요가 있다.
잠시 은퇴 후를 생각해 보자. 당신의 통장엔 어느 정도의 퇴직금이 들어 있을 것이다.여행사의 '퇴직기념여행' 등 당신의 통장을 노리는 '퇴직 비즈니스'가 기승을 부리지만, 그런 것에 일일이 대응하다 보면 그야말로 밑 빠진 독이 되어 금방 바닥이 나고 만다.
최근에는 '노후자금을 넉넉하게 갖고 싶다'는 서민 정서를 악용한 불법 선물거래 등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 그저 돈을 불려 준다는 말에 현혹되어 알토란 같은 퇴직금을 날려 버리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2010년 한국의 경우, 국민연금 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적정 노후 생활비는 월 174만 6천 원이라고 한다. 그 외에 새 차 구입이나 집수리, 집짓기 등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더 큰돈이 있어야 하고 노부모의 부양이나 간병 등을 생각한다면 비용을 좀 더 넉넉하게 계산해 두어야 한다.
거기에 아직 독립하지 않고 얹혀살거나 결혼에 실패하고 돌아온 자식이라도 있다면, 식비 부담은 물론이고 자식 걱정에 마음놓고 즐길 여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은퇴 전까지는 어떻게든 자식은 독립시켜야만 한다.
내가 아는 어느 부부는 60세가 되었을 때 80세까지 산다는 것을 전제로 '연금+저축+퇴직금'으로 노후자금 설계를 세웠지만, 70세가된 지금도 여전히 건강하고 정정하기 때문에 더 절약하는 쪽으로 설계를 수정해야 한다며 불평하고 있다.
인생 80이라지만, 오늘날 여성의 평균수명은 83세를 넘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앞으로 90세까지 산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제반 비용을 조달할 만큼의 생활자금 확보는 50대 중반 정도가 되면 연금, 저축, 퇴직금 등을 총 점검하여 대략적인 계산을 해두어야 한다.
그 결과 '이 정도면 유유자적한 제2의 인생을 보낼 수 있겠구나'하며 다행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연금과 저축, 퇴직금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 이제 일은 그만 접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일할 생각은 없었는데 지금 같아서는 노후 생활이 걱정이다. 아무래도 다시 일을 해야겠다'며 계획을 수정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른다.
'일은 이제 그만, 즐기면서 생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도 돈이 없으면 말짱 헛일이다 일단은 자산을 맞춰 주판을 정확히 튕겨 봐야 한다.
중년 이후의 삶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그 다음 문제다.
나를 위한 돈, 어떻게 쓸 것인가?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두는 '저축형 인간'이 있다. 저축을 하면서 때로 지혜롭게 소비하거나 투자할 줄도 알면 문제될 게 전혀 없다. 하지만 나이 지긋하게 들어서까지 예금통장의 잔고를 보며 뿌듯해하다가 생을 마친다면 그만큼 허망한 일도 없을 것이다.
명장프랑크 카프라 감독의 영화 <우리들의 낙원>(1938)을 보면, 부자 사업가와 가난한 자유인이 등장한다.
극중에서 가난한 자유인은 부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돈 따윈 아무리 많아도 천국까지 갖고 갈 수는 없잖소."
나이가 웬만큼 들어서도 모은 돈에 손대지 않고 구두쇠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항상 이 대사가 떠오르곤 한다.
여윳돈이 바닥난 상태라면 몰라도, 나름 저축도 있고 목돈이 퇴직금도 받았다면 그렇게까지 아등바등 살 필요가 있을까? '인생을 즐기는 데 있어서는 세계 제일'이라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유산을 남기지 않고 죽는 것이 최고의 멋진 인생'이라고 한다.
그걸 꼭 따라할 필요는 없겠지만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 돈을 모으기보다는 '어떻게 잘 쓸 것인가'로 발상을 전환하는 게 현명하다. 후회 없이 즐긴 뒤 인생의 마지막 기력이 다하는 날, 예금 잔고도 '제로'가 되도록 미련 없이 써 버리면 된다.
물론 그렇다고 기껏 고생해서 모은 돈을 도박이나 술 등 방탕한 생활로 터무니없이 탕진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 정도 나이가 되도록 '돈 잘 쓰는 방법'이 어떤 건지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한다면 그것도 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이를 먹으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생의 자원' 즉 기력이나 체력, 부모, 형제, 친구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시간과 예금 잔고도 차차 고갈되어 간다. 따라서 남은 인생의 자원은 소중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불필요한 생활의 허례허식을 들어내고, 정말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야 한다. 그런 뒤에는 가장 자기답게 돈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물건이나 일은 최대한 아끼고, 중요한 물건이나 일에는 조금 사치를 부려도 좋다. 나은 인생의 자원을 소중하게 사용하면 저절로 이처럼 씀씀이를 조절할 수 있게 된다. 그 씀씀이를 얼마나 능숙하게 즐길 수 있느냐에 따라 노후 생활은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평소 근검절약이 몸에 밴 생활을 하다가 1년에 한 번은 호화롭운 해외여행을 즐기는 부부가 있다 올해는 오리엔트 특급으로 베네치아에서 런던까지 우아하게 여행을 만끽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린 둘 다 생선 한 조각에 채소와 된장국만 있으면 충분히 행복해요, 프랑스 요리 따윈 전혀 먹고 싶지 않거든요. 하지만 1년에 한 번쯤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치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건강할 때 돈이 들더라도 부지런히 다니는 게 최고가 아닐까요."
그런 식으로 자기 나름의 강약을 조절해 가며 지혜롭게 인생을 즐기면 된다.
지금 30~40대의 혈기왕성한 직장인들은 아직 '돈을 어떻게 쓸지'에 대한 생각보다는 '얼마나 더 많이 벌어 둬야 할까'에 대한 생각이 더 클 것이다. 하지만 돈이란 원래 쓰기 위한 도구였지 모으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일단은 많이 벌고 많이 모을수록 좋다'는 생각에만 파묻혀 있다보면, 오히려 돈에 대한 유연한 사고가 부족해진다.
장사에 수완이 좋은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벌기 위한 고민보다 잘 쓰기 위한 고민을 더 많이 한다. 당장의 이익보다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에 투자하는 것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지출이기 때문이다. 즉 '버는 것'과 '쓰는 것'이라는 돈의 양면적 가치를 두루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더 이상 '돈을 버는 일'보다는 '보람되고 즐거운 인생'이라는 기회를 위해 지갑을 열어야 할 것이다.
저축은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이 최고!
이솝 우화의<농부와 두 아들> 이야기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임종을 앞둔 농부가 두 아들을 불러 놓고 말한다.
"얘들아, 실은 포도밭에 보물을 숨겨 뒀단다. 내가 죽거든 찾아서 똑같이 나누어라."
아버지가 숨을 거두자 두 아들은 재빨리 포도밭으로 달려가 샅샅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두 아들은 실망했다. 하지만 가을이 되자 두 아들은 놀랄 만한 광경을 목격한다. 가지가 휠 정도로 많은 포도가 열린 것이다. 밭을 파혜지다 보니 밭이 아주 제대로 일궈졌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아버지가 노리던 바였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였던 것처럼 두 아들도 밭일에 정성을 다하기를 바라며, 노력은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인생 최고의 연극을 펼쳤던 것이다. 두 아들에게 아버지의 유언은 그 자체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멋진 보물이었던 셈이다.
예전보다 의식이 많이 변하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줘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재산을 물려주면 자식들이 과연 행복해질까? 천만에! 얼토당토않은 착각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거금을 손에 넣고 인생이 황폐해지는 경우도 많고, 자식이나 친척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작은 집 한 칸 때문에 혈육들이 민망할 정도로 다툼을 벌이다가 평생 절연하는 일 역시 흔하다. TV을 보면 재산 다툼이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사건이 심심치 않게 보도되곤 한다. 정말이지 어설프게 재산을 넘겼다가는 오히려 자식들이 불행해진다.
그러니 자식들이나 친척들에게 분쟁의 씨앗을 남길 바에야 세상을 뜰 때까지 원 없이 써버리고, 마지막에는 예금 잔고를 한 푼도 남기지 않는 편이 훨씬 낫다.
인생 80시대인 지금은 옛날과 달라서 부모가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자식 역시 상당히 나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경우, 현행 상속세법에 의하면 5억 원까지는 배우자가 전부 상속해도 상속세를 물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남편이 사망하면 대부분 아내가 상속한다. 자식에게 재산이 넘어가는 것은 그 아내가 사망했을 때다.
여성이 평균 수명 83세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자식의 나이도 대략 60세 전후가 된다. 개중에는 완전히 은퇴하여 제2의 인생을 즐기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구태여 자식들에게 재산을 남겨 줄 필요가 있을까?
물론 저축해 놓은 돈도 없고,그저 마지막 생을 보낼 집 한 채만 남기는 사람도 있다. '따로 재산을 남길 생각은 없지만, 사는 동안에는 집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 '주택연금'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주택연금이란 주택을 담보로 노후 생활자금을 연금 형태로 지급받다가 사망하면 금융기관이 그 주택을 처분하여 그동안의 대출금과 이자를 상환하는 방식이다. 빌린 돈을 갚는 게 보통이지만, 이 방법이라면 자신이 마지막을 보낸 후 자택을 처분하여 정산하면 되기 때문에 차입금이 일체 남지 않는다.
따라서 자식들도 마음을 놓을 수 있으며 정든 내 집을 놓치지 않고도 필요한 자금을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현금 수입이 없는 실버세대의 생활을 지탱하는 유력한 수단의 하나로 보급되어 있다.
부모 자식 관계를 떠나 삶이란 궁극적으로 '각자의 몫'이다. 자식을 제대로 사랑하는 것도 부모가 자신의 삶을 당당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노후에 대한 계획에 있어 자식들에게 물려줄 유산을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자식들 고생시키기 싫어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부모에게서 받은 돈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식들은 드물다. 어설프게 재산을 물려줌으로 인해 부모는 부모대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대로 나약한 인생을 살게 된다면 결국 모두가 손해인 셈이다.
원칙적으로 인생은 스스로 고생을 경험하면서 헤쳐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진정 자식을 위한다면 '인생이라는 밭을 열심히 일구면 반드시 행복해진다'는 진리를 몸으로 터득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할것이다.
나이 들어서는 돈 불릴 생각 마라
"앞으로 몇 살까지 살게 될지 모른다. 혹시 큰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저축은 많을수록 좋다."
이런 생각에 나이 들어서도 살림을 쪼개가며 조금이라도 돈을 남기려는 사람이 있다.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일단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게 된다.
인생은 무상하다. 아무리 미래를 걱정해도 다음 날 덜컥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5년 앞, 10년 앞을 걱정하기보다는 오늘 하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 낫다.
행복은 산 정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슭에도 분명 있다. 그러니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며 내 신세를 한탄할 필요 따윈 없다. 돈이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나름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다.
물론 없는 것도 어느 정도까지다. 가난은 사람의 마음을 왜곡시키기 때문에 당장 먹을 쌀이나 빵도 못 살 정도라면 마음에 상처를 입고 삐딱해지기 십상이다. 흔히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는가?'라는 명제를 논하곤 하지만, 사람의 도리를 잃지 않는 것이 행복의 전제 조건이라고 한다면 행복은 분명 돈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남들만큼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 없으면 곤란하다. 그저 없는 것을 무리하게 탐하지 않고, 없으면 없는 대로 행복을 찾는 것이 현명한 노후의 생활방식이 아닐까?
이처럼 만족을 아는 생활이 가능하다면 돈을 더 불리고 싶다는 등의 헛된 욕심은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나이 들어서도 계속해서 돈을 늘리고자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정년퇴직자 대상의 지침서만 봐도 '정년 후 머니 플랜', '퇴직금의 현명한 운용법'등 은퇴 후의 자금 운용 페이지가 빠짐없이 실려 있다. 더구나 그런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은 주식을 비롯하여 투자 신탁, 외화투자 상품 등 원금이 보장되지 않는 것들도 적지 않다. 잘 굴리면 은행예금보다 훨씬 벌이가 낫겠지만, 손실을 입었을 때의 타격은 막심하여 순식간에 노후자금을 날릴 수도 있다.
일전에 선물거래를 하던 60대 여성이 운용자금을 착복한 금융기관 직원에게 살해당한 비통한 사건이 있었다. 나는 그녀가 퇴직금을 선물에 투자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가정주부가 투자하기에는 너무나 리스크가 큰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선물거래처럼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투자 세계에서는 실패하면 먼지까지 죄다 털리고 빈털터리가 된다. 집 날리고 빚만 잔뜩지게 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용돈 정도의 자금으로 치매 예방을 위한 머리 운동이라 생각한다면 상관없지만, 제대로 공부도 하지 않고 피 같은 퇴직금을 선물거래에 던지는 것은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다. 진짜 대박으로 이어질 만한 주요 정보는 그 나름의 정보원이나 네트워크를 갖고 있지 않는 한 좀처럼 입수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정보는 유감스럽지만 부자들에게 집중되어 있어 웬만해선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흘러오지 않는다. 그것이 투자 세계의 현실이다.
그러니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투자 상품으로 단번에 타격을 입는 어리석은 일은 아예 생각지도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도 안 되는 사기나 악덕 상법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다. 욕심이란 괴물은 마음의 열쇠를 헐겁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은퇴자들은 표적이 되기 쉽다. 현역세대에 비해 정보 감각이 떨어지니 상담하기도 수월한 데다, 모아 둔 노후자금도 만만치 않다. 더없이 좋은 타킷이다.
실제로 "꼭 돈을 벌게 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며 가공의 미공개주 이야기로 돈을 갈취하거나 "외화 예금 같은 것"이라며 말도 안되는 고위험 상품인 외환파생상품 거래에 꿀어들여 상당한 노후자금을 날리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다.
사기꾼이나 악덕 상법을 이용하는 영업사원은 기가 막힐 정도의 능수능란한 화술을 구사한다.그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나이들어 돈을 더 불리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노 리스크 노 리턴'을 기본으로 돈을 불리기보다는 쓰는 데 유의하도록 한다.
보편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람이 속기 쉬운 경향이 있다.
① 남의 밀을 곧이곧대로 믿어 버리는 사람
②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
③ 자기 통제가 서툰 사람
④ 남의 처지를 쉽게 동정하는 사람
⑤ 매사를 진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
⑥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
⑦ 조급하고 지레짐작을 잘해 실수하기 쉬운 사람
⑧ 남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
이 중에서도 가장 당하기 쉬운 사람은 '남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만족을 아는 사람은 없으면 없는 대로 생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존심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은 무조건 산의 정상만 바라보며 기슭에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게다가 퇴직금 같은 목돈을 만지게 되면 그만큼 통도 커진다. 사기꾼들은 바로 그런 점을 부추겨 자극을 한다.
나이 들어 욕심을 부려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아무쪼록 조심 또 조심이다.
아내로부터 '남편이 스트레스'란 말을 듣지 않으려면
한창 일할 나이에는 부부가 집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다. 남편의 삶은 주로 직장이나 프로젝트, 동료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맞벌이 부부가 아니라면 아내의 삶은 집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중년 이후 어느 날부터는 집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난다. 그리고 이때부터 전혀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최근 남편이 정년퇴직하면서부터 심신의 피로를 호소하는 아내가 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한 심리연구소 발표에 의하면 남편이 집에 있는 것 자체가 질병의 원인이 되며, 이것을 '남편 재택 스트레스 증후군'이라 명명한 바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같기도 하다. 남편이 현역에 있는 동안 집안의 주역은 아내였다. 어쨌거나 남편은 아침에 집을 나가면 밤에 귀가하여 잠만 잘 뿐이다. 낮 동안 아내는 집에서 친구들과 전화로 수다를 떨거나 어딘가에서 차를 마시고 연극등을 보러 다니는 등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은퇴하고 종일 집에 있게 되면서 그런 자유가 사라져 버린다.
청소를 할 때조차 남편이 거치적거려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집안일을 가르치려 해도 도통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시도 때도 없이 "출출한걸" 하며 그때까지 아내의 공간이었던 부엌을 휘젓고 다닌다. 요리나 잘하면 모를까, 아까운 재료만 날릴 뿐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게다가 제대로 치우지도 않는다.
남편이 하는 모든 일이 완전 눈엣가시 같다. 아내는 점점 스트레스를 받다가 결국 심신의 균형이 깨져 버린다. 그 결과 스트레스와 관계 깊은 고혈압이나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기관지 천식, 과민성 대장증후군 외에 무력감이나 냉증, 땀, 오한 등이 일어나는 저혈당증, 만성간염 등 다양한 질병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된다
일반적으로 아침에 나가면 밤늦게 돌아오는 일벌레 남편일수록 정년퇴직 후 아내의 스트레스가 더 심한 편이다. 야근도 적고 저녁도 꼬박꼬박 집에서 먹던 남편은 퇴직 후라도 점심 한 끼만 늘어날 뿐이기 때문에 아내의 부담도 상대적으로 덜하다. 그 점심도 일주일에 반만 밖에서 해결해 준다면, 아내는 이전과 별반 다름없는 일상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남편이 항상 일에 치여 있던 열혈 샐러리맨이었다면 정년 후에는 점심, 저녁 두 끼 분이 단번에 늘어난다. 아내의 입에서 한숨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젊어서 일벌레였던 남편이 이제는 쓸어도 잘 쓸리지 않는 '젖은 낙엽'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아내가 전과 같은 생활을 유지하려면 가능한 한 남편은 집에 없어져 줘야 한다. 금전적인 불안 때문에 정년 후에도 일하는 사람이 많은데, 아내 입장에서 보면 남편이 종일 집에 있는 것보다는 단연 그쪽이 편하니 '일석이조'일 것이다.
남편들에게 섭섭한 얘기지만 중년 이후 거의 모든 아내들의 로망은 '남편은 건강하되 집에는 없는 것'이다.
자치단체나 대학 등에서 주최하는 무료 세미나에 가보면, 이래저래 집에서 떠밀려 나온 전직 샐러리맨들을 꽤 만날 수 있다. 돈 안 들이고도 강의를 들을 수 있고 시간도 때울 수 있으니 그럴듯한 피난처가 아닌가?
남편들은 '누구 덕에 지금껏 잘 먹고 잘 살았는데?'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내들은 아내들대로 '누구 덕에 집안일 걱정 안 하고 회사 다닐 수 있었는데?', '애들은 누가 키웠고?'라며 물러서지 않는다.
사실 오늘날의 부부는 중년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함께 살아가는 셈이다. 신혼 때부터 중년부부가 될 때까지 남편은 바깥에서 일을 하고, 아내는 집에서 전업주부로 살아오다가 이제 정말로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싫든 좋든 부부의 삶에 굉장한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정년 후 가정생활을 원만히 하려면 우선 아내의 노고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내 역시 정년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당신 지금까지 정말 수고 많았어. 고마워."
그리고 앞으로 집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남편도 당연히 집안일을 시작해야 한다. 종일 집에서 빈둥거릴바에야 조금씩 집안일을 분담하는 편이 정신적으로도 훨씬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 아내들이 정말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남편이 집안에 있어서가아니라 남편이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편들이여, 집안일을 시작해 보자.
뭐 그렇다고 갑작스레 식사 준비까지 할 필요는 없다. 아애 역시 그런 것까지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일단 식사 후의 정리나 빨래, 청소를 도와준다. 매일매일이 아니어도 괜찮다.일주일에 두 세 번 정도는 외식을 하고, 때론 멋진 레스토랑에서 고급 요리도 즐긴다. 그런 식으로 생활에 리듬을 주면 그것만으로도 아내의 부담은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낮 동안은 가능한 한 집을 비워 아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갖도록 해준다. 자신의 일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 아내가 외출할 때도 이것저것 참견 말고 "재미있게 놀다 와, 잘 다녀와" 하고 기분 좋게 배웅해 준다. 그런 배려 하나로 아내의 마음은 누그러진다.
권위적이거나 남성우월주의에 빠져 있던 남편들일수록 이런 사소한 배려에 서툴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내는 평생 남편을 위해 그런 배려를 하며 살아왔다. 이제 그 역할을 동등하게 서로 나눠야 할 시기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년 이후 원만한 가정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다.
행복한 공존을 위해 부부간의 거리를 창조하라
"남편은 아내와 여행을 가고 싶어 하지만, 아내는 친구들과 여행을 가고 싶어 한다."
중년 이후의 부부 관계를 그대로 대변해 주는 말이다.
40대까지는 이 말이 크게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여전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집 밖에 나와도 만날 사람이 넘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는 회사를 떠나면 인간관계가 눈에 띄게 좁아진다. 현역시절부터 틈틈이 회사 이외의 벗들을 만들어 두지 않으면 그야말로 놀 상대가 하나도 없게 된다.
반대로 아내는 그동안 이웃이나 취미를 함께하는 친구 등과 상당한 교류를 맺어 왔다. 그러니 여행을 갈 때도 새삼 남편과 갈 바에야 마음 맞는 친구들과 가는 게 훨씬 재미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남편은 뭔가를 함께할 대상이 아내 이외에는 별로 없다. 그래서 아내가 어디라도 갈라치면 자기도 모르게 "나도, 나도"하면서 젖은 낙엽처럼 따라붙게 된다. 서글프지만 이것이 '준비 없이 정년을 맞은' 남자들의 자화상이다.
아내 입장에서도 그렇게 활동적으로 일하던 남편이 눈물겹도록 처량한 신세가 되어 자기뒤만 따라다니는 모습이 가엾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시간이 갈수록 측은함을 넘어 그저 멀리하고 싶은 심정만 커질 뿐이다. 이런 관계가 심해지면 결국 부부관계에 적신호가 켜질수밖에 없다. 이래서는 정말 곤란하다.
인생이 마라톤 코스라면 구간 별로 변화를 줘야 하는 시기가 있게 마련이다. 신혼 대의 부부관계가 40대, 50대, 그리고 정년 이후에도 변화 없이 자동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라 여긴다면 너무 안일한 생각이다. '일하는 시기'를 지나 '함께 노년을 맞이하는 시기'로 접어드는 부부일수록 상대방을 대하는 자세도 새롭게 조정되어야 한다.
정년 후 부부관계의 기본은 각자의 행동에 토를 달지 않고 서로를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붙지도 떨어지지도 않은' 독립된 부부로서 항상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라는 뜻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공통된 취미 한두 개, 서로 다른 취미 한두개를 갖고 때론 함께, 때론 각자 자신의 취미를 즐기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세계를 가지고 서로를 존중해 가며 흥미가 일치하는 것은 함께 즐기고 아니면 따로 행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기는 연극에 흥미가 없는데 아내가 연극광이라면 아내는 연극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가도록 하면 된다. 그것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다.
독립된 부부관계를 구축하려면 '부창부수(夫唱婦隨)'에서 '부창부수(婦唱夫隨)', 즉 아내가 주장하고 남편이 따르는 생활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중년 이후의 부부관계는 전쟁이 끝낸 뒤의 전후 같은 관계다. 아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때까지 집안 대소사를 야무지게 치러 온 아내를 존중하여 뭔가를 이루도록 배려한다.
동네에 대한 일은 아내 쪽이 단연 베테랑이므로 다양하게 배울것도 많다. 그리고 웬만하면 거실에도 눌러앉지 않도록 한다. 그곳은 오랜 기간 아내의 왕좌였던 곳이다. 남편이 정년을 맞자마자 그 공간을 위협받는다면 좋아할 아내는 없다. 가정의 주역은 아내이므로 그 자리를 위협하는 행동은 가급적 삼가야 한다.
그럼 남편의 자리는 어디인가? 남편 역시 자기만의 왕국을 구축해야 한다. 집에 빈방이나 창고가 있다면 그 공간을 자신의 성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크고 화려할 필요도 없다. 혼자 신문을 읽거나 편안히 사색을 할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취침이나 기상 시간 등 생활주기가 다른 부부라면 침실을 따로 쓰는 것만으로도 수면의 질이 상당히 개선된다.
'부부란 모름지기 딱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라는 생각은 서로를 힘들게 할 뿐이다. 서로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지혜로운 가정내 별거'를 모색해야 한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각자의 영역을 가진 상태에서 자기만의 취미와 사색을 향유해가며 공존하는 것이 평온하고 이상적인 부부 생활이다.
사람은 중년 이후 나이가 들수록 외부의 자극에 둔감해지거나 정신활동에 있어 다소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다. '나이 들면 다 그런 거지, 뭐' 하면서 당연시할 일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생활의자극이 될 만한 요소들을 함께 발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남편은 아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내는 남편을 들뜨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어 서로에게 자극을 주도록 한다.
'은퇴 설계'라는 거창한 계획 속에는 집안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기류에 대한 대처법이 자세히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모든 것들을 그때 가서 닥친 뒤에 실행하려 한다면 아무래도 과부하가 걸릴 것이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더라도 40대부터 조금씩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 의지하지 않고 당당하게 독립하기
지금 당신의 자녀는 어떻게 크고 있는가?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부모의 과도한 사랑과 보호 속에 웅크린 채 현실과의 만남을 끝없이 미뤄가고 있는가?
제2의 인생을 설계할 때 자식의 독립 여부는 굉장히 큰 의미를 갖는다. 자식이 이미 독립된 상태라면 은퇴 후의 생활비는 오롯이 부부 둘만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 집에 얹혀사는 싱글 아들이나 딸이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식 때문에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삶도 점점 잠식당하게 된다.
다 큰 자식을 품고 사는 50대 후반의 남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드님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하나도 변한 게 없어요. 나이 서른인데 아직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밤이면 역 앞에서 라이브랍시고 기타 치고 노래나 부르고 있으니."
"독립시키는 건 어떨까요?"
"그야 뭐. 우린 대출금도 없고 먹는 거야 숟가락 하나 더 얹으면 그만인 걸요. 독립시미려 해도 편의점 아르바이트로는 어차피 혼자 살기도 힘들잖습니까? 뾰족한 수가 없네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아, 이 사람은 진짜로 아들을 독립시킬 마음이 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대기업에서 꽤 높은 지위에 있었던 그는 모아둔 돈도 많고 퇴직금도 상당한 액수일 것이다. 그래서 아들 하나 얹혀사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일수록 엄하게 자란 탓에 자식들에게는 개인 방에 텔레비전, 컴퓨터, 오디오 등 뭐든지 넣어 주고, 하고 싶은 건 뭐든지 들어 주는 등 지나친 풍요와 자유를 누리게 한다. 그렇게 자란 자식들이 스스로 독립해서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갈 의지가 있을까? 프리터(자유free와 아르바이터arbeiter를 합성한 신조어로 일본에서 처음 사용 됨)는 불황이 만들어낸 것이라지만, 한편으로는 자식을 오래도록 품안에 두고 싶어 하는 부모의 게으른 방임도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생각지도 않은 큰 병이나 늙은 부모의 간병 등으로 막대한 지출을 필요로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게다가 요즘은 은퇴 후에도 양친이 건재한 사람이 적지 않다. 더구나 남편과 아내 둘 다 노부모가 있기 때문에 간병의 대상은 4명이 된다. 그런데도 "자식 한 명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무사태평한 말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집안이 경제적으로 빠듯한 상황이 아닌 다음에야 나이 먹고도 얹혀사는 자식이 있다면 밥만 먹여 주고 밤이슬만 피하게 해달라는 응석 따윈 단칼에 잘라야 한다. 부모가 다 알아서 해주니 편이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다른 일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부모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꿈을 이루기 위해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이들도 많다. 하지만 얹혀사는 프리터들은 상대적으로 팔자가 좋다. 그래서 한 번 그 맛을 들이면 좀처럼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버릇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떻게든 나쁜 버릇을 끊지 않으면 언젠간 부모는 자식이든 뼈아픈 되갚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일단은 부모가 자식의 응석을 받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식비와 방값을 요구한다. 건실한 자식이라면 이 정도에서 '슬슬 집을 나갈 때가 됐는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벌이로는 독립할 수가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규직으로 취직할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 때론 직함이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 아직 현역에 있다면 거래처에 연줄로라도 밀어 넣어야 한다. 기회는 그때뿐이다.
꿈을 버리지 않으려는 자식에게는 "회사 근무를 하면서도 얼마든지 꿈을 좇을 수 있다.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단정 짓는 것은 너의 핑계"라고 설득한다. 얹혀사는 자식들은 그렇게 후딱후딱 독립시켜 내쫓는 게 상책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 아이들은 살림을 차려 독립했으니 걱정을 덜었다"며 자기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자식 부부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면 괜찮지만, 간섭이 지나치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이혼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자식들이 이혼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이렇게 되면 겨우 짐을 내려놓았는데 또다시 일이 번거로워진다. 거기다 손자손녀들까지 데리고 들어오면 일은 더 커진다.
세상에는 자식을 '노후 보험'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서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는 "그러니까 집도 돈도 물려주는 것 아니냐"는 고리타분한 말들도 여전히 자주 들려온다.
그러나 그것은 염치업는 부모의 응석에 불과하다. 자식에게 일방적으로 부모의 가치관을 들이미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자식에게는 자식의 인생이 있다. 자식에게 가능한 한 좋은 교육을 시키고 원하는 일을 하게끔 지원하는 것은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지, 결코 자신의 노후를 보장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언제까지나 부모에게 손을 벌리는 캥거루족이 적지 않은 현실에서 정규직으로 취업하여 제 밥벌이를 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효도가 아닐까. 그러니 자식에게 의지하겠다는 기대는 버리고 마음 편히 노후를 즐기는게 최고다. 어설프게 기댈 생각을 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의 비참함은 말할 것도 없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그 기대가 깨졌을 때의 충격도 크다.
'고생고생하며 대학까지 보내 놨더니 지금은 며느리 눈치에 아들 집도 마음대로 못 드나든다. 부모 봉양할 기미는 보이지도 않는다. 대체 뭐하는 녀석이란 말인가!'
그런 식으로 자식에게 기대며 한탄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한 번 되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입 아프게 효도란 말을 꺼내지 않아도 제대로 부모를 봉양하는 자식들도 있다. 자식은 대부분 부모가 교육시킨 대로 자란다. 과연 자식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편안한 노후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부모는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자식 교육에 대한 답을 얻게 될 것이다.
직함이 아닌 '자기만의 명함'을 따로 만들어라
지금 주변을 둘러보라. 친구가 보이는가? 얼마나 있는가? 어떤 친구인가? 그 친구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현역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30~40대의 직장인이라면 주변에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휴대전화의 단축키도 수백 개나 되고, 성탄절이나 연말연시가 되면 카드와 연하장도 심심찮게 주고받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정년을 맞아 회사를 떠나고 나면 연하장도, 명절선물도 격감한다. 단축키의 웬만한 번호는 아예 누를 일도 없게 된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런 타이틀이 없어도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다.
"친구 따위 없어도 얼마든지 즐거운 노후를 보낼 수 있어. 혼자 즐길 수 있는 취미도 있는데 뭘."
이렇게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괜찮다. 그러나 농경민족은 대체로 고독에 약하다. 막상 정년을 맞게 되자 "친구가 없어 외롭다"면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호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나이가 들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늘 만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필요한데 그게 좀처럼 쉽지 않다.
학창시절 동창들과 서로 연락을 하거나 취미가 같은 친구를 찾는 등 직함을 던지고 사귈 수 있는 인간관계는 현역생활 때부터 미리 구축해 두어야 한다. 일 외의 네트워크는 현역생활의 윤활유가 되어 정년 후 생활도 풍요롭게 해주기도 한다.
친구는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결코 생기지 않는다. 스스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환경을 만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혼자 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취미를 가져 본다. 여행이나 취미는 새로운 만남의 보고다. 그런 경우 사적인 명함이 한몫을 하기도 한다.
40대 샐러리맨인 한 지인은 길고양이 사진 찍기가 취미라서 틈만 나면 이 거리 저 거리로 나가 산책을 즐긴다. 그러다가 고양이를 발견하ㅏ면 바로 카메라를 들이댄다. 사적인 명함에는 이름 위에 직접 그린 고양이 일러스트와 함께 '길고양이 사진가'라고 새겨 놓았다. 명함을 받은 사람은 감탄과 함께 누구랄 것 없이 먼저 흥미를 보인다고 한다.
현역이든 정년 후든 일 이외의 명함을 만들어 두면 좋다. 직함이 없는 명함도 좋지만 개성적인 직함이 붙은 명함이 상대의 기억에 남기도 쉽다. 그렇게 해서 친구를 사귈 때 다음 여섯 가지를 염두에둘 필요가 있다.
무시하거나 과시하지 말라
간혹 현역 시절 자신의 레벨(?)을 의식하여 상대방의 지위나 직함, 학력 등으로 친구를 가려 사귀려는 사람이 있다. 나이 들어서 그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이제는 사회적 조건이나 편견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으로 사람을 사귈 나이다. 편견을 갖고 상대를 은근히 무시하거나 자신을 과시하려는 행동은 절대 금물이다.
가능한 한 밝게 행동하라
'유쾌함이란 사람이 사교계에서 걸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신구 중 하나'라는 말이 있다. 발고 명랑한 살마 곁에는 자연히 사람도 운도 모여들게 마련이다. 어둡고 침울하게 앉아서 푸념만 늘어놓는 사람 곁에는 파리만 꼬인다.
입을 닫고 귀를 열어라
자신의 관심 분야에 상대를 끌어들여 일방적으로 마구 떠들어대는 사람이 있다. 좋지 않은 습관이다. 들어 주는 쪽은 정말 고역이다. 결국 그 사람 주변에는 하나둘 빈 자리만 늘어날 것이다. '현자는 긴 귀와 짧은 혀를 갖고 있다'라는 서양 속담도 있지 않은가? '말하기 3분, 듣기 7분'에 유의하도록 하자.
겸손해져라
자만하지 않는다. 상대가 멋지다고 생각하면 솔직하게 칭찬한다. 칭찬받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면 바로 사과한다. 머리를 숙인다고 평판이 내려가지는 않는다.
남들보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여 상대방 흠잡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좋은 면을 보며 사귀는 것도 중요하다.
가능한 한 젊은 친구를 사귀어라
사람의 만남에 나이 제한은 없다. 가능한 한 젊은 친구를 사귀면 좋다. 그들은 정보감각이 뛰어나 다양한 자극을 받을 수 잇으므로 기분이 젊어지고 노화방지도 된다.
친구는 돈으로 살 수 없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렇다. 친구란 인생에 있어서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존재이며 엄청난 재산이다. 테니스나 골프같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운동도 친구가 있으면 "다음에 한 판 어때?" 하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여러 명의 친구를 사귀어야 할 필요는 없다. 맞지 않는 사람과도 억지로 사귈 필요도 없다. 이제 겨우 회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았는가? 사귀고 싶은 사람의 스트라이크 존이 좁은 것은 당연하다. 그다지 원하지도 않으면서 필요 이상으로 타인과 잘 지내려는 생각은 하지 않도록 한다.
사실 고만고만한 관계의 여러 명보다 진실한 단 한 명이 더 소중하며, 그런 친구가 바로 평생 친구인 것이다. 그런 진실한 관계를 원한다면 상대를 위해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하고, 결코 보답을 바라지 않는 'give and give'의 정신이 있어야만 한다. '이만큼 해주었으니 상대도 이 정도는 해주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을 품는다면 두 사람의 관게는 오래갈 수 없다.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상대에 대한 불만이 쌓여 끝내 폭발하리란 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친구와는 진심어린 연락으로 교류가 끊어지지 않도록 한다. 특별히 자주 얼굴을 볼 필요는 없다. 편지나 전화, 메일이라도 좋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상대의 건강을 염려하는 정도만으로도 서로 마음이 통할 것이다
나에겐 1 년에 한두 번은 꼭 자필로 쓴 편지를 보내오는 친구가 있다. 오래된 만년필에 잉크는 블루블랙을 쓴다. 풍취 있는 필체에 유머가 깃든 문장을 시원시원하게 잘 쓰는 친구다. 나는 20여 년 전 폐가 좋지 않아 잠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맺음말은 늘 똑같다.
"어이, 친구 무리하지 말게나."
그 한마디 맺음말을 20년 넘게 봐오지만 늘 고맙다.
친구란 그런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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