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가 익어 맛을 보는 데 고맙게도 큰딸이 한컷 찍어주네요.
울집 딸들이 고등학생때까지는 지인한테 부탁하여 헌옷을 얻어 입혔다.
부탁했던 옷이 도착하면 먼저 두딸들이 맘에 드는 것을 골라가고
남는 것이 있으면 나와 남편(남자 옷이 있을 땐)이 입었다.
누군가가 유치원 행사때 받았던 옷 같은데
5년전에 내곁으로 온 예쁜 문구가 들어간 여름티는
"엄마가 입으면 잘 어울리겠다"고 하여 여름에 자주 입었다.
올여름 울집에 온 이란인 부부한테 티에 새겨진 예쁜 문구를 얘기했더니
재밌다면서 곧바로 폰카로 찍더니 본국으로 전송한다고하여
child, kid(어린이)를 경상도 말로 '얼라'를 배워갔다.ㅋㅋㅋ
- 울리히 슈나벨지음 행복의 중심 『휴식』속에서 -
현명한 포기가 선물하는 기쁨
본능적인 충동에만 끌려다닐 게 아니라, 때로는 버리고 비울 줄도 알아야 한다.
무거운 짐을 버릴 때 풍선은 비로소 날아오른다.
부유할수록 불행해진다는 슈워츠의 주장에 좀 지나친 부분이 없진 않다. 무엇보다도 어느 정도의 부유함은 만족스러운 인생을 위해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아주 기본적인 욕구조차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기쁜 얼굴을 하는 것은 힘든 노릇 아니겠는가. "가난한지만 행복하게!" 하는 구호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거짓말에 가까운 상투적 외침일 따름이다. 게다가 개인의 행복이라는 것은 가족, 친구의 수 그리고 안정적인 사회 등 많은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슈워츠의 논의는 휴식이라는 주제에 비추어볼 때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에 쫓기는 듯한 느낌은 우리가 지나치게 많은 상품과 선택 가능성을 누리느라 치르는 대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일반적으로 부유할수록 왜 시간 부족에 시달리는가 하는 역설도 설명될 수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대니얼 해머메쉬 역시 네 개 대륙에 걸친 인생 만족도 비교 조사를 통해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해머메쉬는 독일, 미국, 한국, 호주 등지에서 얻어낸 자료를 토대로 부의 증가와 더불어 시간 부족으로 인한 고통도 늘어남을 확인했다. 물론 근무와 가사에 들어가는 시간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아무래도 벌이가 늘어날수록 시간은 귀해지는 모양이라고 해머메쉬는 썼다. "갈수록 시간이 점점 더 부족하다는 사람들의 불평은 부분적으로 볼 때 쓸 수 있는 시간에 비해 너무 많은 돈을 가졌기 때문에 비롯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 수입의 증가와 더불어 갖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도 늘어나는데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킬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사람들은 시간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이다. "이런 불평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여피족의 배부른 푸념쯤으로 폄하할지 하는 것은 태도에 달린 문제다." 헤머메쉬의 신랄한 지적이다.
이런 고통은 인간 본질의 또 다른 측면에 의해 더욱 강해진다. 인간은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탐하며 기존의 것을 얕잡아보곤 한다. 새로운 사치가 아무리 흥분될지라도, 일단 성공으로 마감한 도전이 주는 감격이 어마어마할지라도, 새롭게 빠진 사랑이 제아무리 설렐지라도, 그 어떤 행복이든 시간이 흐르면서 심드렁해진다. 우리의 상태를 끊임없이 새롭게 바꾸어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다.
그동안 신경생리학과 행태심리학의 연구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성향이 어떤 성격적 약점이 아니라, 생리현상의 기본 원리임을 밝혀냈다. 생물체는 그게 어떤 종이든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먹이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장소와 가장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는 것이야말로 생존 기회를 극대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이런 욕구는 단순히 생존 욕구를 달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으로 확장된다. 말 그대로 '호모 사피엔스'야말로 늘 새로운 희망과 만족의 길을 찾는 종으로 정의되지 않던가.
신경생리학적으로 볼 때 이런 욕구는 이른바 '보상체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일군의 두뇌 영역이 모여 이루는 보상체계는 뭔가 특별히 기쁜 것을 가시거리 안에 둘 때 작동한다. 두뇌 안에서 일어나는 긍정적인 감정은 무엇보다도 도파민이라는 전달 물질의 활발한 분비로 이루어진다. 도파민은 새로운 보상자극에 직면해 특히 활발히 분비된다. 그 이유를 신경생리학자들은 저 근원적인 반사 신경으로 설명한다. "진화를 거치면서 익히 알고 있는 먹이와 잘 모르는 것, 그리고 적을 가장 빨리 구별해낼 줄 아는 생명체만이 살아남았다. 새로운 신호는 언제나 변화를 뜻하며, 이를 빨리 알아차림으로써 반응도 신속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마그데부르크의 신경생리학자 에므라 뒤첼의 설명이다. 바로 그래서 두뇌는 새로운 것을 지각할 때 특히 많은 도파민을 분비하며, 이런 발견을 보상이라는 느낌과 결부 짓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동굴을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며, 콜럼버스는 결코 새 항로를 찾아 나서지 않았을 것이고, 화성으로의 우주비행은 꿈도 못 꿀 일이었을 것이다." 뒤첼의 말이다. 한편 인간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도파민 신경세포가 점차 쇠퇴하며, 이 전달 물질의 농도가 떨어진다. 노인이 새로운 것을 보며 느끼는 즐거움이 어째서 확연히 줄어드는지 수긍이 가는 설명이다.
'보상체계'라는 개념은 사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기대체계'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해당 신경 뉴런은 보상 그 자체보다는 보상에 대한 기대감에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원숭이에게 먹이를 주는 실험을 통해서도 확인된 사실이다. 원숭이의 보상체계 신경세포들은 반짝이는 램프 불빛 등 곧 먹이를 줄 것이라는 신호에 활발히 활동했다. 몇 분 뒤 실제로 사과를 얻은 원숭이의 뉴런은 그 흥분작용을 다시금 가라앉혔다.
고객의 주의력을 이끌어내야만 하는 경제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기대감의 원리는 아주 흥미로운 것이다. 램프와 사과를 연결 지어 기대감을 자극하는 덕에 원숭이는 남은 힘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른 일에도 신경을 쓰는 탓에 경우에 따라 나타나는 적을 쉽사리 알아치리기도 하는 것이다. 먹이를 주며 보상체계가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고자 과학자들은 동물에게 아주 특별히 맛난 것을 주어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원숭이들이 기대하고 있던 사과 대신 돌연 건포도를 준 것이다. 신경세포는 그 야말로 화들짝 깨어나며 활발히 활동했다. 물론 이런 효과는 어느정도 시간만 지나면 다시 사라진다. 매번 건포도를 주면, 동물은 이내 그것에 익숙해져서 보상체계의 활동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이런 반응이 인간에게서도 일어난다는 사실은 누구나 자신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관찰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멋진 전망을 자랑하는 새 아파트에 입주한 첫날 우리는 기적과도 같은 행복감을 맛본다. 그러나 불과 몇 주만 지나면 이내 시들해지고 매일 고층 아파트를 오르내리는 일을 두고 투덜대기 시작한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새 옷, 봉급인상, 새로 장만한 자동차 따위는 그저 잠시 동안 도파민 분비로 인한 행복감을 줄 뿐이며, 이내 뭐 더 즐거운 일은 없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이성과의 관계에서도 이런 법칙은 예외가 아니다. 제아무리 멋진 짝일지라도 어는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매력은 시들해지고 새로운 이성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쿨리지 효과'라 부른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캘빈 쿨리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어느 날 부인과 함께 양계농장을 방문한 쿨리지는 교미에 열중하고 있는 수탉을 보았다. 그러자 쿨리지 부인은 저 수탉이 암탉과 얼마나 자주 저런 짓을 하느냐고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하루에 족히 열두 번은 넘는다는 대답에 그녀는 "부디 그걸 제 남편에게 똑똑히 말씀해주세세요!"라고 말했다. 그 애길 들은 대통령은 농부에게 수탉이 매번 같은 암탉과 교미를 하느냐고 물었다. "아니죠, 무슨 말씀이세요. 늘 다른 암컷과 한답니다." 농부는 멋쩍은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이에 쿨리지는 "부디 그걸 제 아내에게 똑똑히 말씀해주세요!" 라고 말했다.
새로움의 자극은 거역하기 힘든 게 분명하다. 오죽하면 어떤 광고는 "새롭다!"는 말만 강조하며 나설까. 이처럼 소비 사회는 항상 새로움을 향한 욕구를 일깨우는 것으로 살아간다. 심지어 소비자가 지금껏 전혀 의식하지 못한 욕구까지 지어낼 정도다. 2010년 초 애플이 아이패드를 시장에 선보였을 때 마침내 노트북과 스마트폰 사이의 구멍을 메울 수 있게 되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하물며 그런 결함으로 힘들어한 소비자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길고 긴 줄에 서서 기다린 끝에 마침내 손에 넣은 이 전자 석판을 자랑스레 텔레비전 카메라를 향해 흔들어대는 구매자의 얼굴을 본 세상은 화들짝 놀라며 이 신제품을 자신도 구입해 '전자기기의 구멍'을 메우겠다는 절박한 욕구를 갖게 되었다. 초기의 열광이 지나자 이내 아이패드를 두고 트집을 잡으며 불평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 역시 과정의 일부다. 그저 이런 식으로 새로운 것, 더 나은 것에 욕구가 일깨워질 따름이다.
시간에 쫓기며 허덕이는 일상의 느낌은 상당 부분 끊임없이 더 나아지기를 원하는 갈망과, 이미 주어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무능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바로 그래서 에피쿠로스와 같은 철학자와 불교의 스승은 언제나 행복에 이르는 길은 욕심을 채우는 게 아니라 비우는 데에서 열린다고 거듭 강조한 것이리라. 끝없는 욕심을 채우려 도파민의 물결의 휩쓸리다 보면 평안함에는 결코 이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 허리에 천 쪼가리나 두르고 한 줌의 쌀로 하루를 연명하는 금욕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항상 더 많은 것을 지향하는 치명적인 주장을 꿰뚫어보고 다양한 조건을 내건 사회의 기만적인 자유 약속에 기대지 않는 게 많은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새겨두자. 다시 말해 자발적인 것이든 설득당한 것이든 우리 욕심의 꽁무니를 끊임없이 쫓아다니기만 할 게 아니라, 때로는 멈추어 서서 순간의 행복을 즐길 줄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휴식은 연습을 필요로 한다. 언제나 본능적인 충동에만 끌려다닐 게 아니라, 때로는 버리고 비울 줄도 알아야 한다. 온전히 의식적으로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포기라는 단어가 위선적으로 들리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풍선을 하늘로 날아오르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기 바란다. 무거운 짐을 버릴 때 풍선은 비로소 날아오른다. 지혜롭게 진입로의 포장을 포기한 알자스의 산장 주인처럼 우리도 종종 선택 가능한 것의 가짓수를 줄임으로써 어떤 만남이나 활동의 순간을 오룻이 완전하게 맛볼 줄 알아야만 한다.
이 장에서 보여줬듯 휴식은 두 가지 핵심 조건으로 정의할 수 있다. 우선, 자신이 시간의 주인이 되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둘째, 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더 나은 대안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현명한 포기야말로 바로 '지금'이라는 유일한 순간에 온전히 주의를 모으고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현재를 온전하게 맛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믿었듯, 순간의 기쁨을 통해 신의 경지에 근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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