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삶을 선택하자

오키Oki 2011. 6. 25. 20:05

 

데이비스대의 봄학기 기말고사를 끝마치고 보름동안 자유여행길에 올랐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자전거여행을 하며 큰 딸의 생존소식 사진을

마지막으로 부쳐놓고 태풍 메아리가 북상중인 주말저녁에 도착한다.

 

 

 

- 레오 버스카글리아 지음의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중에서 -

 

 

 

삶을 선택하자

제가 보기에는,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삶 자체입니다. 여러 격언에도 나와 있듯이, 삶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생각만큼 힘들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삶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일전에 한 학생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주 의기소침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학생 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삶 어쩌고 하는 말씀을 들으면 넌더리가 납니다. 선생님은 '삶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시죠.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씀이시죠? 삶이 저를 선택했어요. 전 태어나고 싶지도 않았단 말입니다. 어쩌다 보니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건데, 제가 선택하지도 않은 삶을 왜 책임져야 한다는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일년에도 수천 명이 정신병원을 찾고, 의사와 심리치료사의 손에 자신의 삶을 맡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인생을 포기한 채 이렇게 말하죠.

"제 대신 살아 주세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놀라운 선물인 삶 자체를 마음껏 누릴 생각은 하지 않고, 이렇게 무책임한 말을 내뱉는 사람에게 희망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삶의 고통에 대한 질문들

여러분은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동 학대 증후군'이라는 게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상상도 못할 만큼 심하게 구타하는 현상입니다.

최근 로스앤젤레스에서만 하더라도 한 소녀가 눈알이 빠지는 일을 겪었습니다. 이렇게 믿어지지 않는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죠.

여기다 또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현상이 있는데, 바로 노인학대입니다. 말 그대로 노인을 구타하는 거죠. 자녀들이 나이가 든 어머니 아버지에게 손찌검을 한답니다.

65세 이상의 노인 수천 명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한 결과, 고작 20%만이 자신이 행복하다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자신을 피해자로 여긴다는 거죠.

우리의 목적지가 고작 그곳이란 말입니까? 결국엔 피해자로 전락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최종 목적지란 말입니까?

요즘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절망,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도처에서 이런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신문을 읽어 보십시오. 텔레비전을 켜 보십시오.

하지만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삶은 좋은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라고, 삶을 찬양하지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삶이란 단어의 정의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사전을 찾아볼 생각을 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제가 발견한 멋진 정의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삶이란 죽음의 반대 의미로, 생생하고 제 역할을 다하는 상태를 말한다.'

멋있지 않습니까? 또 하나 제가 아주 좋아하는 정의가 있습니다.

'삶이란 뭔가 쓸모가 있는 시기를 일컫는다.'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가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를 결정짓는 요소라고 한다면, 우리 주변에는 죽은 채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정의는 세 번째입니다.

'목숨을 이어 나가는 것.'

우리들은 대부분 목숨을 이어 나갑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완전하게 살아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내 삶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기는 한, 그 사람은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내 삶을 선택하고 정의를 내려야 할 사람은 바로 내 자신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삶을 두려워하는데, 왜 그러는 것인지 저로선 이해가 안 됩니다.

우리는 신기하고 엉뚱한 생각이 들어도 그걸 행동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아주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여러분은 이런 생각이 들 겁니다.

당장 달려가서 '정말로 아름다우시군요' 고 말을 해야지,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냐,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러면 그 여자는 자신이 아름답다는 걸 모른 채 살아갑니다. 부끄러운 노릇이죠. 내가 완전하게 살아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조차 완전하게 살아 있지 못하게 방해를 하는 셈이니까요.

우리는 사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경험조차 해보지 않고 눈을 감습니다. 느끼지도 않습니다. 모험도 하지 않습니다. 관심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지 않은 것입니다. 삶이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삶이란 구슬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삶이란 한가운데로 풍덩 뛰어드는 것입니다. 삶이란 쿵 하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삶이란 나를 뛰어넘어서 저 별로 날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삶이란 내게 어떤 것일까?' 매일 뭘 먹을 까 고민하는 시간의 1/4만 인생과 삶과 사랑을 생각하는 데 투자하면 우리는 모두 놀라운 인간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삶은 나름대로의 해결 방식이 있습니다. 완전하게 살아 주지 않으면 안에서 폭발해 버리는 삶을 볼 때마다 저는 몹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을 완전하게 살아 주지 않는 건 끓고 있는 냄비 뚜껑을 누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일인가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죠.

그런 삶은 극단적인 공포나 두려움이나 외로움이나 편집증이나 무관심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게 바로 살아 있지 않다는 표시이며,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신호입니다.

따라서 이런 신호가 보일 때면 팔을 걷어붙이고 말을 해야 합니다. '어디 한번 살아 보자' 고 말입니다.

삶에 뛰어드는 순간 끓고 있던 냄비는 가라앉고, 여러분은 이제 안심해도 됩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삶이 방향을 알려 줍니다. 사람들은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은 모든 해답을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삶이 그렇게 위대한 것이라면, 왜 죽음이며 고통이며 불행이며, 이런 나쁜 것들이 있는 겁니까? 왜 아이들이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살인과 강간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뭡니까? 도대체 왜 그런 겁니까?"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저보다 위대한 사람들도 오래전부터 이런 질문들을 던져 왔죠. 하지만 저는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질문을 그만두고 해답을 묻은 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인간이 왜 죽느냐고요? 저는 인간이 왜 죽는지 모릅니다. 고통이 왜 존재하느냐고요? 저도 이 세상에서 고통이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만, 고통이 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평생 이에 대한 해답만 찾으며 돌아다녔다가는 완전히 살아 있을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삶에 대해서 아주 조금은 알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삶에는 기쁨이라는 게 있다고 대답합니다. 제가 그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저는 또한 우리 모두의 삶에는 놀라운 광기라는 게 있다고 대답합니다. 제가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삶에는 사랑이라는 게 있다고 대답합니다. 제가 사랑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삶에는 환희라는 게 있다고 대답합니다. 제가 환희가 어떤 건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 저는 삶에는 황홀경이라는 게 있다고 대답합니다. 제 주변에 황홀경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아무튼 저는 여러분도 이런 모든 것들을 맛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런 걸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평생 동안 여러분은 주입된 대로 살아왔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살아왔습니다. 배운 대로 살아왔습니다. 한 사람의 교육자로서 장담하건대, 배운 건 얼마든지 잊어버릴 수 있고 새롭게 다시 배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다시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구슬땀을 흘리고 약간 고생을 하고 약간 몸부림을 치고 약간 노력을 기울일 각오만 되어 있다면 말입니다.

그것은 거저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이 세상을 선물받은 셈입니다. 예쁜 리본으로 묶은 눈부신 상자를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자를 열어 볼 생각은커녕 리본을 풀 생각도 안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상자를 열자마자 아름다움과 놀라움과 환희만 가득 들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고통과 절망과 외로움과 혼란스러움도 삶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랍니다.

저는 삶을 대충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걸 알고 싶습니다.

이 작은 상자는 고통이라고 돼 있구나. 이것도 내가 받은 선물이니까 열어서 고통을 경험해야지. 그리고 이 작은 상자는 외로움이라고 돼 있구나. 외로움이라고 적혀 있는 상자를 열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외로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외로워' 하고 말을 할 때 저도 여러분의 외로움을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고, 그러면 우리는 서로의 외로운 손을 붙잡고 하나가 될 수 있겠죠.

저는 이 모든 걸 알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황홀경이 어떤 건지도 깨달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 상자 안에 들어 있다면 언젠가는 찾을 수 있겠죠.

그리고 저는 고통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여러분도 그럴 수 있습니다. 저는 갈망을 현실로 돌변시킨 적도 있습니다. 저만 할 수 있고, 여러분은 할 수 없는 일이란 없습니다.

저는 슈퍼맨이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저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분도 계실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껏 그러지 못했다면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은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우리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마술입니다. 우리는 눈물을 닦아 내고 미소를 지을 수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혜들

이 세상을 다스리는 힘에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있습니다. 폭풍이나 지진, 홍수, 사고, 질병, 고통 등 외적인 힘은 우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내적인 힘입니다. 이런 재앙이 닥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하는 게 문제입니다.

몇 년 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큰 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새벽 무렵이었죠.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실이 폭삭 주저앉고 현관 쪽에서 사나운 먼지 바람이 일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겠지만, 그 순간 저는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이런 반응을 보였죠.

"버스카글리아, 어서 여길 빠져나가!"

문밖으로 달려 나오면서 저는 의기소침한 얼굴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집이 완전히 무너지고, 지금까지 모아온 것들이 깡그리 사라져버리다니.

그러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자, 저는 뒤쪽 베란다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먼지 바람은 끊이질 않았고, 작은 진동이 계속 느껴지는 가운데 저는 담 너머로 이웃 사람들이 서 있는 걸 보고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집이……"

"네, 알아요. 뭔가 잘못된 모양인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네요. 기다려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는 서로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우리집에는 전기며 가스가 완전히 끊겼지만, 이웃집에는 가스가 들어와서 커피를 끓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해가 뜰 때까지 나무 옆에 앉아 있다가 집으로 들어와서 피해상황을 살폈습니다. 상황을 살펴봤자 손을 쓸 방법은 없었죠. 저는 화를내는 대신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늘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어쩌다 사랑하는 삶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네팔의 산꼭대기에서 위대한 영감을 얻었다는 대답을 기대하고 계셨다면 실망시켜서 죄송합니다. 저도 그렇게 대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거짓말이거든요.

언제 그런 삶이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훌륭한 모범을 보이셨던 저희 부모님에게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엉뚱한 분들이셨습니다. 여러분께도 저희 부모님을 정말로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데, 이 세상에 안 계시다는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두 분은 유별나셨습니다. 아름답고 유별나게 사셨습니다. 저희는 태어나면서 부모님을로부터 엉뚱해지는 법을 배운 것 같습니다. 세상 모든 게 유별나게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 혼자서 광기를 유지할 수 있는 법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모두들 이렇게 말하죠. 버스카글리아라는 사람은 미쳤어! 대학교에서 제 별명이 뭔지 아십니까? '괴짜'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별명이 좋습니다. 덕분에 행동의 반경이 넓어지니까요.

괴짜는 어떤 일을 해도 벌을 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경찰을 불렀을 일을 해도 말이죠.

아버지는 5, 6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샌프란시스코에 갈 때마다 엄청난 향수를 느낍니다. 아버지가 무척 사랑하셨던 도시였거든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특히 노스 비치를 자주 찾으셨는데, 두 분이 보시기에 그곳이 이탈리아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두 분은 그곳에서 배가 터질 때까지 파스타를 먹고 이탈리아어로 이야기하면서 이탈리아의 분위기를 맘껏 느끼다가 로스앤젤레스라는 불모지로 다시 돌아오시곤 했습니다.

저희들로서도 정말이지 신나는 시간이었습니다. 두 분은 자식들을 언제나 함께 데리고 다니셨거든요. 두 분만 여행하는 법은 없었습니다.

저희는 한 사람씩 작고 낡은 자동차에 차곡차곡 몸을 싣습니다. 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야 할 정도였죠. 어머니는 휴게실이라고 쓰여 있는 곳이 보이면 어김없이 차를 세우게 했습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뇨키(밀가루나 감자로 만든 이탈리아 파스타의 일종)를 만드셨습니다. 휴대용 레인지, 소형 냉장고, 파스타 만드는 기계등을 차곡차곡 자동차에서 내려 파티 준비를 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데 며칠이 걸렸죠. 저는 어머니 덕분에 샌프란시스코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3,000km는 되는 줄 알았다니까요.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아버지, 어머니, 형제, 남매, 사랑하는 사람들이 눈을 감기 전에 화해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제가 찾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렸죠.

"아버지, 살아 계시는 동안 제가 뭔가 해드리고 싶어요. 그동안만이라도 항상 아버지 곁에 있고 싶어요. 어디 가고 싶으신 데 있으세요?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아니다. 이젠 여기가 내 고향이야. 하지만 샌프란시스코에는 꼭 한번 가고 싶구나."

그래서 우리는 자동차에 몸을 싣고 샌프란시스코로 떠났습니다. 황금같은 5일 동안 거리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습니다. 하루에 다섯 끼씩 식사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또 뭘 원하셨는지 아십니까? 이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도 저희 아버지가 얼마나 엉뚱한 분인지를 느끼실 겁니다.

라스베가스와 도박장을 좋아하셨던 분이라 라스베가스에 가서 5센트짜리 슬롯머신을 하고 싶으시다는 겁니다. 큰돈을 걸고 하는 게 아니라 5센트짜리를 말입니다. 제가 그곳 직원한테 미리 말을 해놓았죠.

"저기 5센트자리 슬롯머신 앞에 심각한 얼굴로 앉아 계신 분 보이죠? 돈이 떨어지는 일이 없게 해주세요."

이 말과 함께 저는 돈을 건넸고, 그 직원은 부지런히 오가면서 5달러씩 기계 안에 넣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죠.

"또 땄다! 오늘 밤새도록 따기만 하는 걸!"

저희 아버지가 진상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분이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요. 하지만 신나는 일이었죠. 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소리로 웃으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눈을 감으셨을 때는 견디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겠지만, 사랑하던 사람과 작별하기란 참으로 힘겨운 일이죠.

장례식을 마치고 나서 저는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현관 쪽을로 걸어가는데 대형 꽃다발과 커다란 초콜릿 케이크가 보이는 겁니다. 그 속엔 친구가 보낸 쪽지가 있었습니다.

'레오,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과 맛있는 음식들이 아직도 많다는 걸 알려 주려고 보내는 걸세.'

아버지가 눈을 감으시는 순간 저는 견딜 수가 없었지만 내적인 힘 덕분에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 괜찮아."

저희 아버지는 모든 걸 나눠 주는 분이었습니다. 말 그래로 모든 걸 말입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가지고 계시려 들지 않았습니다. 집안 사정이 좀 나아져서 신발이며 여러 가지 물건들을 살 형편이 되면 어떻게든 돈을 쓸 일만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저희 식구는 부자와 가난뱅이 사이를 계속 왔다갔다했던 거죠. 하지만 어머니는 별 것 아닌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저희 집엔 고정 식단이라는 게 있었는데, 바로 빵과 죽과 양배추였습니다. 그걸 오븐에 구워서 먹으면 뱃속에서 엄청나게 불어나기 때문에 허기를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된답니다. 때문에 집안 사정이 나빠지면 늘 고정 식단이 등장했죠.

한번은 아버지가 정말 우울한 표정을 지으신 적이 있습니다. 부모님은 저희들에게 숨기는 게 아무것도 없으셨죠. 우울하다거나 슬프다거나 무서우실 때면 늘 저희들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모님이라고 해서 늘 든든한 요새일 수만은 없다는 점을 그렇게 일깨워 주셨죠. 부모님도 인간이라는 점을 알게 해주신 게 저는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완벽함의 상징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상징이셨던 게 말입니다.

그날 아버지는 자리에 앉으시더니 동업자가 공금을 가지고 달아나는 바람에 당장 오는 저녁을 해결할 돈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정말 웃음이 많은 분이셨는데, 아버지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고 어머니가 터질 듯이 웃음을 터트리신 겁니다.

아버지가 노발대발하셨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웃음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날 어머니가 어떤 일을 벌이셨는지 아십니까?

그날 저녁에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봤더니 세례식이나 결혼식에 어울림직한 만찬을 준비하신 겁니다. 전채 요리에서부터 파스타, 송아지 고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갖춰진 만찬을 말입니다. 아버지가 입을 여셨습니다.

"맙소사, 이게 무슨 짓이지?"

"저녁 내내 준비한 거예요."

"당신 미쳤군!"

"기쁨은 나중이 아니라 지금 즐겨야 하는 거예요. 지금은 우리가 행복해야 할 시간이라구요. 그러니까 입다물고 드시기나 하세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같이 식탁에 앉았습니다. 수십 년 전 일이지만, 어머니가 준비하셨던 그 만찬을 저는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정말 엉뚱한 일 아닙니까? 보세요. 제가 여기 이렇게 서 있지 않습니까? 완전히 주저앉았던 아버지는 여든여섯 살까지 장수하셨습니다.

 

 

나 자신의 삶을 선택하자

우리는 분명 외적인 힘에 좌우되기는 하지만, 중요한 건 이걸 여러분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극히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제 말을 믿으십시요. 직접 한번 실험해 보십시오.

저는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는 말을 믿습니다. 아니,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 게 아니라 꼭 누굴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여러분도 불행하게 만들려고 듭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감히 너만 행복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저한테 시도를 했다가는 실패할 겁니다. 그가 저까지 불행에 동참시키려 들면 기꺼이 따라나설 겁니다.

하지만 저는 불행의 동반자가 아니라 기쁨의 동반자가 될 겁니다. 이럻게 되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 중 첫번째가 '나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나를 헐뜯지 마십시오. 나를 감싸안으며 이렇게 말을 하십시오.

"넌 참으로 괜찮은 놈이야! 대머리가 되가고 있긴 하지만, 나한테는 너 뿐이라구!"

내 약점까지 사랑하게 되면 성공한 셈입니다. 약점은 대단한 게 아니라, 내 작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죽은 채로 사는 사람이란 기본적으로 자기를 아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이 말을 들은 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다시 한번 강조를 하죠. 여러분은 기적과도 같은 존재라고 말입니다.

저는 늘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각기 다른 얼굴들을 보면 언제나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눈도 다르고, 코도 다르고, 입도 다르고, 다들 어찌나 다른지 지문으로 신원을 알 수 있을 정도니까요. 비록 지문이 인간의 독특함을 모두 말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인간은 왜 독특하게 태어났을까요? 남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일까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그런 것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독특하게 태어난 이유는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입니다. 그 목소리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내는 데 여러분의 삶을 바치십시오. 그 목소리를 계발해서 제게 들려 주십시오.

그렇게 서로 들러 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모두 발전을 할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본래의 모습을 모두 계발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나를 잃으면 모든 걸 잃는 겁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존엄성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고결함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뿐입니다. 그렇게 특별한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십시오.

아름다운 비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메데아가 한 말, 기억나십니까? '메데아, 무엇이 남았느냐?'고 물었을 때 메데아는 '무엇이 남았느냐고요? 제가 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대사죠. 나는 그만큼 커다란 존재라는 걸 메데아는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역사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번 연구가 되어왔던 대상입니다만, 같은 어머니 같은 아버지 밑에서 함께 자란 형제가 한 사람은 성인(聖人)이 되고 한 사람은 악당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인간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역사는 저마다 다릅니다. 자상하고 다정하고 사랑이 넘치는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분들도 있을 겁니다. 좋은 부모가 되려고 노력은 했지만 실패로 끝났던 부모 밑에서 자란 분들도 있을 겁니다.

중간이 듬성듬성 빠져 있는, 불완전한 역사를 갖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 반면에 완벽하고 흥미진진한 역사를 갖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모두 오늘 이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그게 또 하나의 커다란 의문입니다. 어떻게 모이게 됐을까요? 어떤 공통점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이게 된 걸까요?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뭔가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각자가 여러분만의 독특한 역사를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 여러분만의 감정의 역사도 갖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 아주 외롭고 슬픈 분들도 계실 겁니다. 지금 이 순간 혼란스러운 분들도 계실 겁니다. 고통스러운 분들도 계실 겁니다. 즐거운 분들도 계실 겁니다. 환희에 젖은 분들도 계실 겁니다. 온몸으로 영혼의 떨림을 발산하고 있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 모두가 정당합니다. 이 모두가 소중합니다. 이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이 모든 걸 끌어안으십시오. 모두가 여러분의 일부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한자리에 모였다는 게 신비로운 겁니다.  우리, 이유는 묻지 맙시다.

우리 사회는 모든 걸 분석합니다. 누가 '사랑해' 하고 말하면 여러분은 '사랑이라는 게 뭔데?' 하고 말합니다. 이 세상을 완전하게 경험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고는 모든 자극을 이상한 검열기구를 통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검열기구를 통과한 자극은 원래의 모습을 잃고 우리가 바라는 모습으로 바뀌기 때문에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발전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합니다. 날이면 날마다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만의 독특하고 놀라운 역사입니다. 하지만 역사란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지나간 과거를 말합니다.

사랑하고 끌어안으십시오. 용서하는 마음을 되찾으십시오. 용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삶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는 법을 배워서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말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상처를 짐처럼 짊어지고 다니게 될 테고, 그 무게에 눌려서 숨을 쉴 수 없을 겁니다. 용서를 배우면 자비를 알게 되고, 그러면 비로소 이런 짐을 내려놓을 수가 있습니다.

짐을 짊어지고 다니느라 허비했던 에너지를 아름다운 인간으로 발전하는 데 쓸 수 있습니다. 과거를 짐처럼 짊어지고 다니지 마십시오. 이제 모든 걸 떠나 보내십시오.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은 다음에 떠나 보내십시오.

유진 오닐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삶이 우리에게 던진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우리에게 가해진 이 상처는 내가 바라는 나와 지금의 나 사이를 끊임없이 파고든다.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평생 나를 찾을 수가 없다.

 

여러분은 과거이기도 하지만, 미래이기도 합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합니까?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돈을 벌 수있는 사람은 보험회사 직원들밖에 없습니다.

보험을 들어놓고 우리는 안심을 합니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지만, 보험만큼은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보험회사가 어찌나 해괴망측한 발상을 퍼트렸는지, 우리는 이제 걱정을 놓고 걱정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현재이기도 합니다. 바로 지금이기도 합니다. 의지와 지성과 희망과 환희만 가지고 있으면, 지금부터 여러분은 원하는 대로 될 수가 있습니다.

 

 

삶에 대해 '좋다'고 말하자

무척이나 순진한 발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오늘밤 여러분이 달라지기로 결심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삶을 사랑하는 게 어떤 건지 깨닫고 말겠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깨닫고 말겠어. 오늘밤부터 사랑할 줄 아는 사람처럼 살겠어. 부정적인 단어가 입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입을 틀어막겠어."

오늘밤 강당을 빠져나가면서 이렇게 결심을 한다면 앞으로 3, 4주만에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겁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질 겁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니코스 카잔자키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고른 붓, 내가 고른 색깔을 가지고 내 손으로 직접 그린 낙우너 속으로 뛰어들자.'

지옥을 그리고 싶은 분은 지옥을 그리십시오. 하지만 저나 부모님이나 사회를 원망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지옥을 만든 건 모두 여러분 자신의 책임이니까요.

우리는 과거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미래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념하고 선택해야 할 삶은 현재입니다. 바로 지금의 삶입니다. 중요한 건 현재니까요.

우리는 누구나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잠재력을 계발하려면 먼저 '못된 나' 를 버려야 합니다. 폴 랩스의 표현대로 '자아에 반하는 쓰레기' 를 말입니다.

이런 쓰레기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하지 마' 라는 말을 치워야 합니다. '절대' 라는 말을 치워야 합니다. '난 못해' 라는 말을 치워야 합니다. '안 돼' 라는 말을 치워야 합니다.

이 얼마나 부정적인 표현입니까? '불가능해' 라는 말을 치워야 합니다.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란 없으니까요. '절망' 이라는 말을 치워야 합니다. 세상에 절망적인 상황이란 없으니까요.

이런 것들은 바보들이나 쓰는 말이지, 현명한 사람들이 쓰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세요. 절대라는 말을 결코 하지마세요. 불가능하다고요? 당연히 가능합니다.

인류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꿈들은 모두가 한때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서서 불가능한 게 가능하다는 걸 입증한 거죠.

시한부 인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벌떡 일어나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죽지 않아!' 하고 말했고, 정말로 병을 이겨 낸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노만 커즌스의 『질병의 해부』를 읽어 보십시오. 그는 죽음을 선고받았던 사람입니다. 살 날이 두 달 남짓밖에 안 남았다는 말을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현재 『 새터데이 리뷰』에 기고를 하고 있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책까지 발표했고, 전임교수로 활발하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음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제 삶을 향해서 '좋다' 고 말하십시오. 놀라움, 기쁨, 절망을 향해서 '좋다' 고 말하십시오. 고통을 향해서 '좋다' 고, 이해하지 못할 일에 대해서 '좋다' 고 말하십시오.

'항상' 이라고 말을 해보십시오. '가능하다'고 말을 해보십시오. '희망적' 이라고 말을 해보십시오. '하겠다'고 말을 해보십시오. '할 수 있따'고 말을 해보십시오.

여러분은 불완전하게 살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안의 모든 걸 있는 그대로 표현하십시오. 여러분 안의 모든 걸 끌어안으십시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표현하고 끌어안는 데 집착하십시오. 그게 바로 인생이니까요.

새로운 깨달음과 새로운 능력과 새로운 창의력을 끊임없이 계발하십시오. 500살이 될 때까지 미친 듯이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면서 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좀더 빠르고 획기적인 변화를 원한다면 '나' 를 변화시키고 '나' 를 '우리' 로 확대해야 합니다. '우리' 에는 저도 포함시켜 주십시오. 저는 '나' 를 주장하는 세대에 신물이 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제 삶에 초대하려면 저를 조금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도 저는 좋습니다. 그럼으로써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으니까요.

저는 나무와 나뭇잎을 아주 좋아합니다. 한번은 뉴잉글랜드에 사는 학생 한 명이 가을 낙엽을 감상하라며 저를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밤 집으로 돌아가시거든 일기에 이렇게 적으십시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뉴잉글랜드의 가을을 놓치지 말아야지. 직장을 결근하는 일이 있더라도 뉴잉글랜드의 가을을 내게 선물해야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감상해야지!'

그 학생과 돌아다니면서 저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아, 자동차를 잠깐 세워 보게! 세상에! 저것 좀 봐!"

저는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거든요. 로스앤젤레스에서는 그런 광경을 볼 수가 없지만 뉴잉글랜드에서는 빨간색 잎, 노란색 잎, 자주색 잎, 갈색 잎, 주홍색 잎, 검은 색 잎 모두 한 나무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믿어지십니까?

저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그 총명한 학생에게 고개를 돌렸습니다. 대학원생이라서 총명하다는 게 아닙니다. 저는 교육이라는 게 아무 효과가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에 터득한 사람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들 중에는 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박사학위를 하나 가지고 있죠. 아무튼 이 총명한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이유가 뭘까? 왜 어떤 이파리는 검게 물들고, 어떤 이파리는 노랗게 물드는 걸까?"

"잘 모르겠는데요. 원래 그런 거 아닐까요?"

"원래 그런 게 어디 있나?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이유가 뭔지 알아야겠어. 도서관으로 안내해 주게."

"선생님, 하나도 안 변하셨군요."

그래서 우리는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책을 뒤진 결과, 저는 그것이 자연의 마술이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어떤 마술인지는 저만 알고 있으렵니다.

이파리의 색깔이 변하는 과학적인 이유를 알게 됐다고 해서 단풍의 감동이 더하거나 덜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마술이고 그래도 여전히 장관이죠.

삶을 선택하려면 위험들 거듭해야 하고, 사랑을 거듭해야 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합니까? 무엇 때문에 땀을 흘립니까? 무엇 때문에 고생을 합니까?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그렇게 합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을 위해서입니다. 삶을 위해서입니다. 그걸 놓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손실입니다.

하지만 모험과 상처와 고통을 감내하면 진정한 사랑이 뭔지 보다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반 고흐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최선의 길은 많은 걸 사랑하는 것이다'

멋있지 않습니까? 삶을 사랑하는 최선의 길은 많은 걸 사랑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얼마나 삶을 사랑하는지 알고 싶으시면 하루에 몇 번이나 '싫다' 는 말을 쓰는지 세어 보십시오.

"이건 싫어, 저리 치워. 보기 싫어. 난 저런 사람들 정말 싫어. 난 이런 거 정말 싫어."

삶을 사랑하신다고요? 그럼 '너무 좋아, 이거 너무 좋아, 나는 꽃이 너무 좋아! 나는 아이들이 너무 좋아' 같은 말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하십니까?

그리고 또 하나 맞닥뜨리고 선택해야 할 게 있다면 바로 죽음입니다. 삶을 선택하려면 죽음을 편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죽음은 우리가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알려 주는 아주 좋은 친구니까요.

삶을 제대로 살고 싶으시다면 꿈꾸는 일을 지금 당장 시작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우리 삶이 언제 마감될지 모르니까요.

죽음이 또 공평한 점은, 언제 찾아올 지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음이 바로 곁에서 '내가 기다리고 있어. 내기 기다리고 있어. 내가 기다리고 있어' 하고 중얼 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매순간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죽음이라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제대로 살아 보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살았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한 매순간을 열심히 보낸 사람은 눈을 감을 때 비명을 지르거나 고함을 치지 않습니다. 죽음을 연구한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들이 행복하게 눈을 감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삶을 알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할 겁니다.

죽음은 일종의 도전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발전하라고, 달라지라고 재촉합니다. 지금 당장 사랑한다고 표현하라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 나누어 주라고 말합니다.

『표범』이라는 아름다운 소설이 있습니다. 참으로 열심히 살았던 시칠리아 남자가 주인공인 작품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는 바로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아름다움,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도 삶이 펼치는 마술과 모든 여성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줄 알았습니다.

그가 보기에 이 세상에 못생긴 여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서 몸져 눕게 됐습니다. 시칠리아처럼 이탈리아 남부지방 사람은 북부에서 눈을 감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향으로 보내 주세요. 고향으로 보내 달라구요.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족들 품에서 눈을 감고 싶어요!"

그래서 이 노인은 기차를 타고 남부로 향합니다. 아름다운 여행이 펼쳐지는 와중에도 그의 고통과 절망은 깊어갑니다.

그런데 로마에 도착했을 때, 정거장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커튼을 열고 창밖을 내다보니, 그곳에 이 세상에서 가장 황홀하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커다란 갈색 모자, 커다란 갈색 깃털, 길다란 갈색 장갑까지, 그녀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가 갈색이었습니다. 그녀는 그가 이 세상에서 본 가장 우아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보고 소리쳤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이여!"

아픈 와중에도 그렇게 외칠 수 있는 여유가 부럽지 않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돌리면서 미소를 지었고, 곧바로 기차는 출발했습니다. 그는 그 여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장에서 그가 눈을 감습니다. 가족들이 그를 에워싼 채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가 마지막 의식을 거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그 갈색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걸음걸이로 가족들을 헤치고 침대 옆으로 다가갑니다. 그리고는 갈색 장갑을 낀 손을 그에게 내밉니다. 그는 그 여인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군요."

아름답지 않습니까? 죽음은 두려운 게 아닙니다. 두려울 게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모험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아시는 분이라면 지금 당장 옆 사람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당신은 참 훌륭한 사람이군요. 당신이 있어 줘서 고마워요."

전화기를 들고 이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여보세요. 엄마, 지금까지 엄마랑 수도 없이 싸웠지만, 사랑해요."

그리고는 끊는 겁니다. 삶을 사는 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삶은 (거꾸로) 회상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이 말도 좋지만 여러분은 앞을 향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럼 삶을 이해할 수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삶을 꼭 이해할 필요가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삶을 살 필요는 있습니다. 선물 상자를 헤집으면서 상자를 하나씩 모두 열어보십시오.

"이건 다 내거야, 내가 가진 특권이야. 내가 가진 권리야."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조안 앳워터의 『소박한 삶』중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오늘 강연을 마무리지으려 합니다. 삶의 모든 지혜를 짧고 멋있게 모아 놓은 이 책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네 삶은 짐이 너무 많아서 사는 게 너무 복잡한 일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세상이 너무 복잡해서 단순한 해답이 없는 게 문제다. 복잡할수록 우리는 무기력하고 무능한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좀더 단순한 것, 좀더 의미 있는 것을 소망하면서도 우리는 놀랍게도 하루하루를 계속 살아간다. 때문에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점점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진정으로, 단순하게, 솔직하게, 곁가지 없이 명료하게 사느냐의 여부는 우리에게 달린 문제이다. 삶을 온전하게 사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삶에 대해서 배우고 삶을 사는 건 그 사람이 할 나름이다.

 

함께 이야기하고  함깨 노력하고 함께 배울 수는 있지만 결국 자신의 삶을 정의 내리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닌, 바로 여러분의 삶이기 때문이죠.

각자의 정의 내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삶.

삶을 선택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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