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딱새 중 제일 늦게 둥지를 떠나 땅에 두발을 딛기 시작하여 먹이를 받아 먹기 위해 기다린다.
보송보송한 털로 봄날의 인연으로 잠깐이나마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허락해준 것에 감사해야지
이걸 잘 길러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방송프로그램에 한번 나와봐야 겠다고
아기 딱새를 내가 욕심을 내어 기르면 나를 제 어미인양 잘 따를 것이지만
날마다 마주치는 어미 딱새가 그런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며
어미 딱새가 자연에 잘 적응하도록 훈련시켜 보내는 게 제일 좋은 일이다.
- 프레드릭 르누아르『행복을 철학하다』에서 -
인생의 사계절에 누리는 행복의 비결
프레데릭 르누아르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이자 세계적인 종교사학자, 철학자다. 그리고 문학적 글쓰기로 가장 인기 있는 현대 작가다. 스위스 프리부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며 도미니크회 수사인 마리 도미니크 필립과 세계적인 철학자인 에마뉘엘 레비나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인도와 이스라엘에서 정신세계를 탐구하며 수도자로 지내다가 파야르 출판사의 총서 책임자로 일했다. 피에르 신부, 움베르토 에코 등과 다수의 대담집과 연구서를 펴냈고, '국경 없는 환경'이라는 단체를 창립하는 데에도 참여했다. 현재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종교 간행물 <종교의 세계> 편집인이다.
소설《천사의 약속》《루나의 신탁》은 20여 개국에서 출간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프레데릭 르누아르 신드롬'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 밖에도《오직, 사랑》《네오르네상스가 온다》《서양과 불교의 만남》《이중설계》《신의 탄생》《예수, 소크라테스, 붓다》《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등의 저서가 있다.
행복이란…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행복하다는 것은
인생의 사계절을
…전부 사랑하는 것이다.
옛날에 한 노인이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에 앉아 있었다. 외지인 한 명이 노인에게 다가와 물었다.
"나는 이 도시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노인은 그 외지인에게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자네가 떠나온 곳의 사람들은 어떻던가?"
"이기적이고 고약합니다. 사실 그 때문에 저는 그곳을 떠나왔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자넨 이곳에서도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걸세."
얼마 후, 다른 외지인이 다가와 노인에게 물었다.
"저는 방금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지 말씀해 주십시오."
노인이 대답했다.
"이보게, 자네가 떠나온 곳의 사람들은 어땠는지 나한테 말해 주겠나?"
"그 사람들은 착하고 호의적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떠나오기 힘들었죠."
"자넨 이곳에서도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걸세." 노인이 대답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낙타에게 물을 먹이던 상인이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 두 번째 외지인이 발걸음을 돌리기 무섭게 상인은 노인에게 와서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아니, 노인장께서는 어떻게 똑같은 질문에 완전히 다른 두 가지 대답을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노인이 대답했다.
"그야 저 두 사람 각자가 마음속에 자기 세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이 짧은 수피 우화는 전 세계와 현자들이 이 책을 통해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려 준 내용을 더할 나위 없이 간결하게 요약해 준다. 모든 걸 따지고 보면 행복은, 불행도 마찬가지지만, 결국 우리 안에 있다. 불행한 사람은 어디를 가든 불행할 것이고, 자기 안에서 행복을 찾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 어떤 환경에 놓이든 행복할 것이다. 인간이 지닌 욕망의 무한함 때문에 완전하고 지속적인 행복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는 칸트, 쇼펜하우어, 프로이트 식의 염세주의에 대항해서, 동서양의 현자들은 우리의 욕망에 세상을 맞추려 들지만 않는다면 완전하고 지속적인 행복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맞선다. 지혜는 우리에게 욕망하라고,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또, 삶에 적극적으로 '예'라고 대답하라고도 가르친다. 진정하고 지속적인 행복은 우리가 세계를 향한 시선을 바꾸는 즉시 가능해진다. 그렇게만 하면 행복과 불행은 외적 요인보다 우리의 존재 상태에 더 많이 좌우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이 되는 법
가장 큰 행복은 개성이다.
괴테
인간 본성에 관한 예리한 관찰자로서, 인간 개개인으로 하여금 타고난 본성에 맞는 행동을 하도록 이끄는 가장 깊은 동기를 탐구한 작가 퀴스타브 플로베르는 우리가 각자의 열망을 추구하며 이를 행동으로 실현하는 데는 이기주의가 핵심적인 역할은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한 푼도 쓰지 않는 바보 멍청이로부터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얼음물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모두, 각자 다양한 본능에 따라 자신의 본성을 만족시키려고 그토록 기를 쓰는게 아닐까요? 성 빈첸시오 드 폴은 자신을 향한 욕심에 복종했으며, 칼리굴라 황제는 잔인함이라는 본성에 복종했습니다. 각자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오직 자신만을 위해 즐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행동을 하며 자기 자신만이 모든 행위의 이유이자 중심이며 목적이라고 여기는가 하면, 세상 사람 모두를 자신의 영혼의 축제에 끌어들이는 사람들도 있죠. 어쨌거나 양자 모두 각자의 방식이겠죠. 헤픈 낭비와 인색함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헤픈 사람들은 남에게 주는 데서, 인색한 사람들은 받는 데서 쾌감을 느낍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 존재가 필요로 하는 것 또는 갈망하는 것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사람은 고독을 추구할 것이며, 수다스러운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어울림을 추구할 것이다. 새들이 하늘에서 살고 물고기들이 물에서 사는 것처럼, 우리들 각자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분위기 속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도시의 소음 속에서 살도록 태어났으며, 어떤 사람들은 시골의 한적함 속에서 살도록,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두 가지가 다 필요하도록 그렇게 생겼다. 어떤 사람들은 손으로 하는 일을 잘 하고, 어떤 사람들은 머리를 쓰는 일에 능하며, 어떤 사람들은 관계 맺기에 재능을 보이고, 어떤 사람들은 예술 활동에 두각을 나타낸다. 가정을 세우며 지속적인 부부 관계를 유지해 나가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는 동안 내내 다양한 부류의 관계 맺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깊은 속내,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게 될 때도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육과 문화는 소중하다. 우리에게 넘지 말아야 할 한계, 지켜야 할 법, 타인을 존중해야 할 필요성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각자의 강점과 약점을 체득하고 우리 안에 있는 것 중에서 고칠 것이나 개선할 것은 찾아 고치고 개선하되, 우리의 진정한 존재 자체를 뒤틀거나 거부하려 하지 않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교육과 문화는 때로 우리의 감성 발휘를 방해할 수 있으며, 우리를 소명 또는 정당한 갈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문화적 · 교육적 체계를 뛰어넘어 우리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이 바로 스위스 출신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이 "개인화 과정"이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 우리는 대개 40대에 접어들 무렵, 즉 인생의 전반 대단원을 정리하는 시기에 이 과정을 격게 된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이상적인 또는 위선적인 이미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충분히 자기 자신으로 살지 않았음을, 자신을 존중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살아왔음을, 정서적인 면에서나 직업적인 면에서 우리의 실재와는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아왔음을 깨닫게 된다. 그제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개별성을 더 잘 알려고 하고, 우리 자신의 고유한 감성을 고려하고자 몰두하게 된다.
"가장 큰 행복은 개성"이라고 괴테는 말했다. 외적 사건들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그 사건들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중요한 것이다. 자신만의 감정을 계발하고, 자신의 특성을 단단하게 다지며, 자신의 재능과 취향을 주장하는 일이 외부 대상들이 주는 쾌감보다 훨씬 중요하다. 세상에서 제일 맛잇다는 포도주를 마신다 한들, 우리가 포도주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체질이거나 미각과 후각을 수준급으로 단련시켜 놓지 않았다면, 아무런 쾌감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행복은 우리의 삶과 외부의 세계를 가장 풍부한 감정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개성을 키워 가며 진솔한 본성에 따라 살 때 찿아온다.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줄 아는 어린아이는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장난감 하나만 가지고도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행복할 수 있다. 반면 새로운 물건을 손에 넣었을 때만 쾌감을 느끼는 아이는 복잡한 장난감 백 개를 주어도 심심하고 따분하다고 떼를 쓸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만든다
내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우디 앨런
현대 심리학은 정동情動(정서, 감정)과 사유思惟와 믿음 사이의 관게에 대한 해묵은 철학적 논쟁에 다시금 불을 지피고 있다. 이를테면, 감정이 먼저 나타나고 사유가 그것을 조절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우리의 정서나 감정은 사유와 믿음의 결과물인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보자. 자신의 능력에 회의가 들어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은 자신이 무능하다는 생각 혹은 믿음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린 시절에 그를 슬프게 만드는 외상성 정서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의 내면에 열등감이 형성된 것일까?
고대 사람들은 사유가 정서에 앞선다는 가설을 신봉하는 경향을 보였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만든다"고 붓다는 설파했다. 스피노자 이후, 프로이트를 필두로 하는 현대인들은 그와 반대로 정동이 사유의 내용을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20세기 말부터 실증 심리학의 발달과 더불어 요즘 사람들은 사유와 믿음이 정서적 삶에 끼치는 결정적인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문제 제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정동과 사유 사이에는 끊임없이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들은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때로는 감정이 사유에 선행한다. 언젠가 개에게 물린 적이 있기 때문에 나는 개를 무서워하며 개들은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가하면 때로는 사유가 감정에 선행한다. 어머니가 개들은 위험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개가 나에게 다가올 때마다 두려움에 벌벌 떤다. 어찌되었든, 이 두 경우 모두 중요한 것은 사유와 믿음을 변화시기키 위해 감정을 움직일 수도 있고, 사유와 믿음을 움직여 감정을 효과적으로 조절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비교적 고무적인 결과를 얻고 있는 새로운 행동주의적 치료법 대다수는 긍정적인 프로그래밍을 통해 정서 치료와 사유 치료를 결합하고 있다. 신체와 정신, 정서와 사유가 외상 또는 병적 공포증, 과거의 상처 등을 치료하기 위해 동시다발적으로 동원된다. 사유 작용과 정서에 집중하게 되면 치료 효과는 물론 그에 못지않은 예방 효과도 거둘 수 있다. 특정 생각이나 정서가 표출될 때 그로 인한 동요를 방지하기 위해 경계심을 일깨우는 것이다. 내면적 삶에 주의력을 집중하다 보면, 점점 더 빨리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느낄 수 있으며, 따라서 사유나 감정이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우리를 동요시키기 전에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명상의 여러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일상에서 우리의 사유와 감정에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함으로써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 떠오르는 감정을 우리와 동일시한다거나 사소한 생각들이 우리를 온통 차지하도록 방치하지 않는 방법을 체득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나는 화가 났어" 또는 "나는 슬퍼"라고 말하지 않고 "화(또는 슬픔)가 내게 다가오는군"이라고 말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이 같은 거리 두기를 통해 우리는 보다 효과적으로 우리의 감정을 제어할 수 있으며,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생각을 보다 신중하게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좀 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사유와 믿음을 수련할 수 있다. 외부 세계란 결국 우리들 각자의 고유한 내면세계를 비추는 거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이러한 수련이 훨씬 수월해진다.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사업가는 개발할 장소로, 시인은 '성장의 숲'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또는 여자를 생각하면서 그와 함께 거닐 수 있는 산책 장소로 간주할 것이다. 또, 우수에 잠긴 사람은 그와 비슷한 자연 환경 속에서 아득한 과거 어느 시점에 일어났던 일들을 반추할 것이며, 명랑한 사람은 풍경이 빚어 내는 색채와 형태의 조화로움을 즐길 것이고, 우울한 사람은 서글픈 장면을 연상할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믿음은 우리의 심리 상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를 결정한다. 남을 잘 믿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이를 좋은 기회로 생각할 것이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심한 사람은 잠재적인 위험 요소에 온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평가에 대해 대수롭게 여기지 않지만, 자존감을 잃은 사람은 사소한 비판 기미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경향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고대 사람들은 이 점 또한 완벽하게 이해했다. 붓다의 뒤를 이어, 스토아학파의 현자인 에픽테토스는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너에게 해를 가할 수 없다. 너는 네가 해를 입을 것이라고 판단할 경우에만 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불교와 스토아학파에서 말하는 지혜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언급할 예정이다. 이 장에서는 우리의 사유와 믿음을 대상으로 하는 훈련이 행복한 삶을 구축하는 데 얼마나 본질적인 요소인지를 아는 일이 중요하다. 이 점을 일찌감치 간파한 쇼펜하우어는 해북은 부정적인 믿음을 떨쳐내고 긍정적인 사고를 발전시켜 나가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논문 <행복의 기술>에서 "우리가 소유한 것을 누군가가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경우에 갖게 될 시선으로 바라보라" (물질적 재화와, 건강, 사회적 지위, 사랑 등)고 충고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행운을 잃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것이 행운이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가 저걸 가질 수 있다면?'에서 '내가 저절 잃게 된다면?'으로 생각을 바꿔 보라는 것이다. 나보다 더 잘 나가는 사람들보다는 더 힘든 사람들을 바라보라. 요즘 시대에 나온 사회학적 연구 결과가 뒷받침해 주듯이, 비교야말로 행복과 불행의 문을 열어 주는 결정적인 열쇠다. 쇼펜하우어는 또한 가능한 한 희망과 두려움을 늘려 나가는 일을 피하라고 조언한다. 한편, 우리 시대의 철학자 앙드레 콩트 스퐁빌은 절망의 지혜라는 토대 위에 행복 철학을 정립했다. "현자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완전히 행복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다.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그는 완전히 행복하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마틴 샐리그만 교수는 필라델피아에서 긍정심리학 센터를 운영한다. 지난 40여 년 동안 그는 인간의 최적화된 기능에 관심을 갖고 각 개인의 계발을 가능히게 해 주는 요소들을 찾아내어 이를 극대화하는 학문인 긍정심리학의 선구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해 왔다. 긍정심리학은 질병이나 불행을 찾아내기보다 심리적 건강 상태의 근원을 찾아내는 데 집중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셀리그만 교수는 건강 또는 질병, 행복 또는 불행을 가져오는 요소들을 찾아내기 위한 많은 연구를 진행했다. 수십 년 동안 수천 명의 개인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려져 있던, 사물의 긍정적인 면을 보면서 신뢰감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는 '낙천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면을 보는 경향이 강해서 불안한 마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염세적인' 사람의 구분을 새삼스럽게 부각시켰다. 다른 연구자들의 작업으로 한층 충실하게 보완된 그의 연구 작업은 전반적으로 '낙천주의자들'이 '염세주의자들'에 비해 모든 분야에서 훨씬 더 성공을 거두며 행복해지기 쉽다는 결론을 보여 준다. 이들은 삶에 대해 신뢰감을 가지고 있으므로 편안한 마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결과적으로 염세주의자들에 비해 긍정적 사건이나 만남을 더 많이 이끌어 낸다. 이들은 또 염세주의자들에 비해 건강도 훨씬 좋고,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여덟 배나 낮으며, 평균 기대 수명도 길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낙천주의자들은 당면한 문제를 풀 해결책을 강구하는 반면, 염세주의자들은 해결책은 없다고 확신하거나 어려운 상황이 언제까지고 지속될 것이라고 믿는다. 요컨대, 염세주의자들은 행복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이들은 우디 앨런의 명언 "네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를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은 보다 낙천적인 반면, 어떤 사람들은 염세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셀리그만은 몇 가지 요인을 제시하는데, 그중에서 제일 핵심적인 요인은 유전자에 의해 전달된 개인의 감수성이다. 부모나 교사의 영향도 결코 무시할 수 없으며, 전반적인 환경 요인과 종교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국민성 차원에서 볼 때도 어떤 국민은 다른 국민에 비해 낙천적이다. 이를테면 미국인들은 낙천적인 반면, 프랑스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염세적이기고 유명하다. 미디어도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미디어는 삐걱거리는 모든 일을 대서특필함으로써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 전형적인 '염세주의자' 기질을 가진 어떤 사람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낙천주의자'가 되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지만, 신뢰하는 태도로 삶을 대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이나 사유가 지닌 부정적인 특성을 얼마든지 완화할 수 있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 자신은 보다 행복해질 것이다. 설사 행복해지지는 않더라도, 분명 덜 불행하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살아가는 시간
아, 아무도 끝장내 버릴 수 없는 이 일,
산다는 일이 주느 기쁨이여!
크리스티앙 보뱅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이렇듯 다짜고짜 던지는 질문은 나를 언제나 불편하게 만든다. 현재 나의 마음 상태를 묻기 위한 질문이라면, 이 질문은 어떠한 진정한 의미도 결여된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나는 내 삶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는 행복하지만, 그 같은 질문을 받은 TV 촬영장에서는 완전히 불편한 상태여서 그 일시적인 불편함을 표현하기 위해 "행복하지 않다"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또는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질문이 일정한 지속성을 고려한 총체적 상태를 묻는 것이라면, 지나치게 이분법적인 질문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사람이 전적으로 행복하거나, 반대로 전적으로 불행하다는 투의 질문이 아닌가. 사실 우리는 거의 누구나 '다소 행복하며', 우리가 갖는 행복이라는 인상은 시간과 더불어 시시각각 변한다. 나는 오늘은 대체로 행복하다. 즉 내 삶에 대해 그럭저럭 만족하며, 지금보다 10년 혹은 20년 전에 비하면 훨씬 만족한다고 대답할 수 있지만, 10년 후엔 어쩌면 덜 만족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삶이 허락하는 한 점점 더 깊이 있게, 지속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이다.
주관적인 충족감의 여러 요인을 분석한 연구자들은 개인의 인격과 연결된 일종의 행복 '고정점'이 있음에 주목했다. 개인은 자연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역량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고통스러운 상황(질병, 직업적 혹은 정서적 면에서의 좌절이나 실패)에 처하게 되면 그 역량이 고정점 아래로 떨어지게 되며, 반대로 긍정적인 경험(결혼, 승진)을 하게 될 때는 고정점 위로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이처럼 특수한 상황이 지나고 나면 거의 언제나 고정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몇몇 연구들은 로또 복권에 당첨된 대다수 사람들이 당첨 이후 몇 달 동안 행복의 최고점을 찍고는 차츰 이전 수준으로 내려온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반대로, 심각한 사고로 장애인이 된 사람들 대다수는 한동안 극심하게 불행하도 느끼면서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상태에 도달했다가, 점차 삶과 행복에의 의욕을 되찾으면서, 평균 2년 정도 시간이 지나면 대개 '고정점', 즉 사고를 당하기 이전에 지니고 있었던 행복 역량의 상수 값을 회복한다.
자아 수련, 지혜 추구 등과 관련한 연구의 본질은 만족의 '고정점'을 높여 줌으로써 점점 더 행복의 밀도를 높이고 깊이를 더하며 지속적으로 만들어 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나 자신이 행복해지려는 역량의 '층계참'을 넘어서는 일이 가능함을 직접 체험했다. 말하자면 우리가 기왕에 지니고 있던 행복해지려는 역량을 단계별로 높여 가는 새로운 도전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각 개인의 내적 수행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와 같은 주관적인 진화 가능성에 평생을 두고 이어지는 만족 지수의 점진적 변화가 더해지는데, 이 점진적 변화는 대다수 개인들에게 매우 유사하게 나타난다. 통계학적 연구 자료에 따르면, 대다수 사람들의 만족 지수는 나이에 따라 비슷한 형태로 진화한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경우, 1973년 이후 해마다 실시하고 있는 삶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 여론조사를 통해서 통계 전문가들은 조사 대상자의 소속 세대와는 상관없이 나이에 따른 효과가 있음을 확인했다. 대략적으로, 삶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도는 20세부터 50세까지는 지속적으로 감소한다. 50세를 넘어서면서 70세까지는 뚜렷한 증가세를 보이다가 그 후 다시금 감소세로 돌아선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 현상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은 제시하지 못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50세까지 전반적인 만족도가 감소하는 것은 , 35세부터 50세 사이는 대다수 사람들이 삶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면서 성인으로서 맞닥뜨려야 하는 삶의 난관을 직시하게 되는 현실로 미루어 설명이 된다고 본다. 그 후 50세부터 70세까지 뚜렷하게 만족도가 상승하는 현상은 그 무렵 인간적인 성숙함이 활짝 꽃핀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직업적인 면에서도 점점 만족하고, 그간 누적된 경험을 통해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지식도 상당히 얻은 상태이므로 점점 더 잘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 나이쯤이면 이따금씩 새로운 가치관이나 새로운 욕망에 입각해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삶을 완전히 바꾼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반면, 70세를 넘어서게 되면서 만족 지수가 다시금 점진적인 하강 국면에 접어드는 현상은, 노화에 따른 불안과 고통(건강으로 인한 걱정, 신체적 · 지적 역량의 저하에 다른 상실감,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실제로도 친구들이나 배우자의 사망이라는 비극을 겪을 수 있다.
사실상 우리의 행복은, 아직 이 점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는데, 상당 부분 우리가 타인과 맺는 관계에 좌우된다.
행복의 전염성
모든 남자와 여자는 항상 이 점을, 즉 행복이란,
스스로를 위해 쟁취하는 그 행복이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너그러운 봉헌물이라는 점을 늘 생각해야 한다.
알랭
2013년 봄, 나는 모로코의 페스에서 파우지 스칼리(모로코 출신 인류학자, 민속학자, 종교학자, 이슬람의 수피즘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과 동양의 인적 · 문화적 교류 전문가로 활동한다)가 주최한 원탁회의에 참석했다. 토론의 주제는 행복이였다. 나의 발제가 끝나자 모로코 국왕의 자문인 앙드레 이줄레가 발언했다. 앙드레 아줄레라는 정의로운 인물은 유대인으로, 언제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그런 그가 요즘처럼 고통과 비극으로 얼룩진 세계에서는 개인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데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 고백했다. 정확한 표현은 다르지만, 그가 던진 "불행한 세계에서 개인은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화두는 오래도록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망설일 것도 없이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백 번을 물어도 내 대답은 똑같다. 행복이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할수록 우리를 에워싼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공감이나 연민 때문에 개인적인 모든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그렇게 포기한다 해도 정작 그들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행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짓밟아 가며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이를테면 거대한 금융 제국을 건설하고서도 다른 사람과는 재산을 전혀, 아니 거의 나누려하지 않는다면 이는 파렴치한 일이다. 그것은 남의 불행 위에 자신의 성공을 쌓는 것이다. 공동선 따위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성공이나 부를 남을 위해 사용한다면, 우리의 행복으로 다른 사람들도 행복해지도록 행동할 경우, 행복해지는 것은 도덕적 의무라고 말할 수 있다. 앙드레 지드는《지상의 양식》에서 이 점을 매우 처절하게 표현했다. "지상에는 너무도 거대한 비참함과 절망, 빈곤과 침혹함이 존재하므로 행복한 사람은 그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행복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내 안에서 행복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의무감을 느낀다. 하지만 행복이란 행복은 모두 나에게 증오해야 할 대상으로 보인다. 그 행복이란 것이 다른 사람의 희생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결여된 것들을 소유함으로써 얻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연구 결과들은 행복이 강한 전염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행복은 마치 충격과 같다"고 하버드 대학의 사회학 교수 니콜라스 크리스타키가 말했다. 그는 20년 동안 5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관찰하는 장기 연구를 진행했다. "사람들의 행복은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달려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행복을 집단적인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그는 역설한다. 그는 심지어, 솔직히 이 대목에서는 듣는 사람에 따라 애매한 미소를 보일 수도 있겠으나, "행복한 친구 한 명은 우리가 행복해질 확률은 각각 9퍼센트씩 높여 주는 반면, 불행한 친구는 우리의 행복 잠재력을 7퍼센트씩 감소시킨다."고 꼭 집어 말한다. 우리의 행복이 다른 사람들이 행복에 일조한다면, 그 역도 역시 참이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면 우리도 행복하다. 한편, 불행 역시 전염성을 지니고 있다.
행복의 전염성은 우리 모두 영화 또는 미디어라는 프리즘을 통해 자주 경험한다. 이를테면, TV에서 운동선수가 근사한 트로피를 손에 쥐고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을 보면, 그 선수와 딱히 관련이 없는 우리도 감격스럽지 않는가. 나는 1998년 월드컵 축구 결승전이 끝나고 프랑스 전역에 몰아친 환희의 물결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누구든 거리에서 만나는 모르는 사람들과도 얼싸안았고, 모든 사회적 장벽은 모두가 함께 나누는 도도한 기쁨의 쓰나미에 떠밀려, 불과 몇 시간 동안일망정,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우리는 또 오랫동안 소식을 모르던 자식이나 친지를 되찾은 아버지나 어머니, 여러 해 동안 인질이 되어 고생하다 석방된 남편이나 아내를 다시 만나 포옹하는 이들, 중병을 앓다가 갑자기 완쾌된 아이를 보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감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다른 사람, 특히 경쟁 관계인 사람이 행복해지면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직업적인 차원에서나 감정적인 차원에서 경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시련을 당하거나 실패하면 즐거워한다. 생물학자들은, 우리가 얼핏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관찰되는 이 같은 태도가 진화에서 적응력을 키웠다고 추측한다. 경쟁자의 탈락은 자신이 생존 가능성을 높여 주거나 집단 내부에서 보다 우월한 자리를 차지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경쟁심이 독이 된다고 가르친다. 행복이 다른 사람들 손에 달리게 되는 부정적인 나선구조 속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들이 실패하면 행복하고 성공하면 불행해진다는 말이다. 이 가르침은 비교하지 않으며, 경쟁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모든 형태의 질투심을 극복하는 것이 평정심을 얻는 한 열쇠임을 알려 준다. 그렇게 되기 위한 가장 좋은 해독제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함께 기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