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은 딸들이 대학교생활로 돌아갈 시기가 되었기에
부산의 도시문화속에 하숙생활을 시작하게 될 작은딸의
짐들을 챙겨들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딸들의 하숙집에 짐을 풀어놓고
친정엄마가 해주시는 보름밥과 나물로 정월대보름을 맞았다.
제법 볕이 따가운 정월대보름날의 햇살아래 용두산공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광복동 용두산공원아래 위치한 내가 다녔던 동주여상을 자랑하며
일제시대에 지어진 학교건물이라서 아직도 건재한 모습이였고
계속 새로운 학생들이 많이 졸업하는 모양이였다.
겉으로 보기엔 운동장도 없는 작은 학교건물이지만
12학급씩을 소화해낸 학교 그 많은 졸업생들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들 있는지...
여고 3년동안을 안락동에서 버스를 타고
복잡한 버스간에서 한 시간동안 서서있다가
중앙동에서 내리자마자 지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거운 책가방들고 용두산공원길을
뛰었다가 걸었다가 ㅋㅋ
아침밥숟갈 놓자마자 버스와 씨름했더니
차를 오랫동안 타는게 체질에 맞지않아서
잘 체하는 날이면 실과 바늘을 준비해 다녀
공원벤치에 앉아 손끝도 많이 땄었다.
결혼해 살면서 속이 체했을때 급하니까
혼자 손끝을 따는 모습을 보고
남편은 날 독하다고 놀려대기도 했었다.
때론 손끝따는 솜씨가 급할땐
딸들에게 약손이 되기도 했는데 말이다.
내가 용두산공원 시계탑에서의
두번째 사진이 찍혔던 날이다.
우리 딸들이 6살과 4살때로 기억되는데
추석명절을 지내려 거제도 시댁에 가기위해
울산에서 버스타고 내려와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기전 시간이 좀 남아
용두산공원을 둘러 보고 갔었다.
예정에 없었던 일이여서
공원사진사 아저씨가 찍어 준
즉석 사진이 남아있어
딸들이 기억을 떠올리려나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이 너희들과는 두번째란다.
예전에도 많았던 공원비둘기들은 지금도 여전히 많이 있었다.
산(멧)비둘기만 숱하게 보고 사는데
또 비둘기 구경을 하고 있으니 그래도 즐거웠다.
딸들을 부산에 떨구어놓고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지만
집에가서도 이렇게 즐겁게 살거란다.
사교육이 이렇다 저렇다
고3 수능시험이 이렇다 저렇다
이젠 이런 것들로부터 우리와 영원히 멀어졌으니 얼마나 좋은가.
여보 맞죠?
하모~~~ 억수로 마음편타.
지난 목요일, 금요일에 내렸던 비에
여름철에나 봄직한 개울물이 콸콸 흘러가는데
새벽부터 또 화개골에 비가 내린다.
엄마, 아빠 뭐해요?
뭐하긴...
집생각나면 울적거리지 말라고
우산 쓰고 사진 찍고 왔지롱.
부산으로 내려갈땐 하동에 매화꽃이 피지않아었지
돌아오는 길에 하동에도
하루사이에 매화꽃이 피지 시작했던걸
우리집에도 곧 필거같구나.
딸들의 빈자리가 쓸쓸하지 않도록
빗속에 새들은 노래해준다.
내리는 비에 웅덩이에 물이 고이자 개구리가 또 두무더기의 알을 놓았다.
언제나 변함없는 큰바위
밥을 짓다가도 딸들이 보고 싶을때면
큰바위를 쳐다보며 위안 삼을 수 있다.
너희들이 7살 5살때 불일폭포에 처음 올라갔었단다.
불일폭포에 오를때를 생각하며
언니는 동생을 챙겨주고
동생은 언니를 잘 따르고...
서로의 가치를 높일수 있도록 어깨동무길이 되어주렴.
아빠는 20살까진 거제도의 농경사회에서
40살까지는 울산의 산업사회에서
41살부턴 시골의 정보화사회에서 살고 있단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농촌에 사니까
농촌생활이 행복하다는 걸 절실히 아는데
농촌생활을 하면서 이웃분들을 지켜보니
몇몇분은 처음부터 농촌에서 태어나
도시생활의 경험을 못해보고
줄곧 농촌생활했던 사람들은 사는 게 억울하고
농촌의 즐거움을 잘 모르고 사는 것 같아 보였다.
너희들은 농촌생활도 해보았고
이제 도시에서 공부도 해보면
집이 더 좋다는 걸 피부적으로 느껴질게다.
아빠가 지어 준 농산물이 고맙고
엄마가 지어 준 밥이 더 맛있다고...
내가 용두산공원에서 사진 찍힌 게 세번 뿐인데
그 첫번째 사진으로 찍혔던 게
아마도 10살때쯤인것 같다.(가운데)
할머니가 부산에 놀러 오셨다고
가족들과 용두산공원으로 놀러를 갔었던 것 같다.
그때 얼핏 기억난게 있는데
용두산공원에서는 다리가 다섯개로 태어난
진귀한 송아지라며 전시해 두고 있었다.
친정아버지가 살아계실때인데
아버지는 왜 사진속에 안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