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사는 동안 꽃처럼

오키Oki 2015. 2. 1. 18:32

한겨울 정든 1월을 다 보내기가 아쉽다고 비온 뒤 눈 내려 얕은 눈을 보는 행운을 얻었다. 겨울이 떠날 갈 채비를 하고 봄을 기다리는 2월은 땅속을 뚫고 돋아나는 새싹, 풀 한 포기도 자연의 소중함을 가르쳐 줄 것인데

건성으로 보아온 것들 자세히, 오래 보면서 우리 모두 사랑 받아요.~^^

 

 

 

 

 

 

 

 

 

 

 

 

 

-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꽃의 지혜』에서 -

 

모리스 마테를링크

(1862~1949)는 벨기에 출신으로 유일하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지 극작이며 수필가다.

 

 

 

꽃을 향한 시선

이 책에서 나는 모든 식물학자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몇 가지 사실을 되새기고 싶을 뿐입니다. 나 자신이 어떤 새로운 발견을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소박하나마 내가 한 일이라곤 몇몇 기본적인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물론 여러 식물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지혜의 증거를 죄다 검토해보겠다는 의도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증거는 무수히 많고 또 지속적으로 드러나는데, 특히 빛과 정신을 향한 식물적 생장의 노력이 집중되는 꽃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사 조잡하고 시원찮은 꽃이나 초목이라 해도, 거기서 지혜와 재치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경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노동의 완결을 목표로 혼신의 힘을 쏟고 있기 때문이지요. 제각기 대표하고 있는 생존 형태를 무한히 증식시킴으로써 지구의 표면을 잠식하고 점거하려는 원대한 야망을 그 모두가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을 흙에 묶어 놓는 자연의 법칙으로 인해, 그들은 동물과도 비교할 수도 없이 막대한 난관들을 헤쳐 나가야만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 대부분은 각종 계략과 술책, 정치와 함정을 적절히 활용하는데, 이를테면 곤충들을 관측하는 능력이랄지 비행술, 탄도학 혹은 공학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지식과 발명에 종종 월등히 앞서는 면모를 보여 주기도 합니다.

 

 

 

숙명

꽃을 수정시키는 거창한 체계를 이 자리에서 다시 그려 볼 필요가 있을까요? 수술과 암술의 유희, 향기의 유혹, 조화로우면서 화려한 색의 호소, 꽃 자신한테는 전혀 쓸모없지만 벌 · 파리 · 나비 · 나방처럼, 외계에서 날아든 해방자들을 붙들어 놓기 위해 공들여 만드는 꿀 등 말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고요히 서 있는 연인에게서 입맞춤을 배달해 오는 사랑의 전령들이니…….

그토록 평화롭고 다소곳해서 모든 것이 인고忍苦요, 침묵이요, 복종이요, 묵상으로 보이는 이 식물의 세계는 그러나 사실 숙명에 대한 저항이 가장 격렬하고 집요하게 펼쳐지는 곳입니다.

식물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근본적인 기관인 뿌리는 그 식물의 몸체를 돌이킬 수 없어 땅에 붙들어 매놓습니다. 지금 당신을 괴롭히는 거대한 법칙들 가운데 무엇이 어깨를 가장 무겁게 짓누르는가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요? 식물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쉬운 질문일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한자리에만 붙박여 있게끔 만드는 바로 그 대자연의 법칙일 테니까요. 아울러, 노력을 이리저리 낭비하는 우리 인간보다 식물은 무엇에 대해 먼저 저항할지 훨씬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뒤엉킨 뿌리의 어둠으로부터 거슬러 올라 스스로를 형성하고 꽃의 광채로 활짝 피어나는 일편단심의 에너지는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합니다. 오로지 하나의 의지, 아래로 끌어 내리는 숙명에서 벗어나 위로 솟아오르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요.

무겁고 어두운 법칙을 어기고 우회하여 자신을 해방하고 비좁은 공간을 깨뜨려, 스스로 만들든 어디서 구하든 날개를 달아, 가능한 한 멀리 도망쳐, 숙명으로 갇힌 공간을 극복하고 또 다른 영역으로 다가가, 살아 움직이는 세계로 파고든다는 것…… 식물로서 그런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운명적으로 부과된 시간을 벗어나 살고, 물질의 가장 버거운 법칙에서 해방된 우주로 진입하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 아닐까요?

이제 우리는 꽃이 인간에게 불굴의 용기와 굳은 심지, 기발한 재치의 경이로운 모범이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볼 것입니다. 누구든 정원에 핀 작은 꽃 한 송이가 발휘하는 에너지의 절반반이라도 자신을 괴롭히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는 데 투여한다면, 지금과는 아주 다른 운명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도 좋습니다.

 

 

 

씨앗의 욕망

대부분의 식물에서 이처럼 움직이려는 욕망, 공간을 향유하려는 욕구는 꽃과 열매를 통해 동시에 발현됩니다. 그중에서도 열매는 살펴보는 것이 우선 쉽겠군요. 거기엔 오직 하나의 체험, 보다 덜 복잡한 예지력이 작용하니 말입니다.

동물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정반대로, 절대적인 부동성不動性의 끔찍한 법칙에 얽매여 있는 식물의 씨앗에게 가장 큰 적은 다름 아닌 그 모태母胎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몸을 움직일 수 없기에 자식들이 숨을 못 쉬거나 굶주릴 수밖에 없는 기이한 세계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나무나 풀꽃의 발치에 떨어진 모든 씨앗은 그대로 죽어 없어지거나 보잘것없는 싹을 틔우기 마련입니다. 그 사실을 나무도 잘 알기에, 속박을 떨쳐 버리고 공간을 정복하려는 식물의 엄청난 노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숲과 들판 구석구석에서 살포와 추진, 비해의 경이로운 체계가 가동되는 것이지요.

특별히 흥미로운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이렇습니다. 단풍나무 시과翅果의 공기처럼 가벼운 프로펠러, 보리수 꽃자루에 달린 커다란 포엽, 엉겅퀴와 민들레의 멋진 활공 장치, 속수자의 놀라운 탄력, 비터멜론의 아주 특이한 분무주머니, 도꼬마리의 솜털갈고리…… 그밖에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기상천외한 장치가 수없이 많습니다. 세상 모든 씨앗이 어떻게든 모태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제각각 고안해 두고 있다는 뜻이지요.

아마 식물학을 어느 정도 공부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그 모든 초목의 푸름 속에서 얼마나 풍부한 상상력과 재능이 활약하고 있는지 짐작도 못할 것입니다. 뚜껑별꽃의 앙증맞은 씨앗냄비라든가 봉선화가 가진 다섯 개의 밸브, 제라늄의 다섯 캡슐 등을 살펴보십시오.

혹시 약초 판매점에 들를 기회가 있으면, 잊지 말고 양귀비의 우스꽝스러운 머리통을 유심히 관찰해 보세요. 그 퉁퉁한 머리 속에야말로 최고의 찬사가 아깝지 않은 신중함과 선견지명이 도사리고 있으니까요. 그 안에 수천 개의 엄청나게 작고 새까만 씨앗이 바글거리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제 그 씨앗들을 최대한 멀리, 맵시 있게 살포하는 것이 문제겠지요. 만약 씨를 머금은 캡슐이 쩍 갈라져 떨어지거나 아래로 벌어진다면, 소중한 까만 씨앗들은 꽃줄기 발치에 우수수 쌓여 쓸모없는 알갱이더미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덮개 꼭대기에 뚫린 수많은 구멍을 통해 씨앗들이 힘차게 솟구쳐 나가도록 되어 있지요. 일단 무르익은 주머니는 꽃자루 쪽으로 기울어지고, 미세한 바람 한 점에도 향로를 흔들듯 이리저리 머리를 흔들어, 그야말로 씨 뿌리는 사람처럼 드넓은 공간을 향해 파종을 합니다.

새들의 힘을 빌려 살포되기를 기다리며 암중모색하는 씨앗 이야기도 해볼까요? 새들을 유인하기 위해 달짝지근한 주머니 속에 꽁꽁 웅크리고 있는 겨우살이나 노간주나무, 마가목의 씨앗들 말입니다. 벌들을 유인하는 꿀이 꽃한테는 아무 쓸모가 없는 물질인 것처럼, 씨앗주머니의 달콤함도 씨앗 자체에 쓸모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새는 달디단 열매를 먹으면서 그 속에 웅크린 '소화되지 않는' 씨앗들까지 함께 삼킵니다. 이제 새가 훌쩍 날아올라, 껍질을 벗어 던진 채 언제라도 싹틔울 준비가 된 뱃속 씨앗들을 되도록 멀리 떨이진 곳에 고스란히 배설해 주는 일만 남은 셈이지요.

 

 

 

잡초는 연구 중

조금 더 단순한 수단들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길가에 흔하게 자리 잡은 덤불에서 아무 풀이든 한 줄기만 뽑아 보십시오. 당신은 지칠 줄 모르는 뜻밖의 작은 지혜가 혼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 산책을 하다가 수없이 마주쳤던 보잘것없는 풀 두어 포기가 땅을 기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사방 어느 곳에서든, 심지어 제아무리 황량한 구석이라도 부식토 한 줌만 뿌려져 있으면 볼 수 있는 그런 흔한 풀입니다. 이름하여 '개자리속'에 속한 야생풀들인데, 가장 소박한 의미로 소위 '잡초'라 부르는 것들이지요. 그중 하나는 자줏빛 꽃을, 다른 하나는 완두콩만 한 크기의 노란 꽃다발을 품고 있습니다.

도도한 화본과禾本科 식물이 즐비한 풀밭에 몸을 숨긴 채 기어다니는 꼴만 본다면, 과연 이들이 시라쿠사의 저 유명한 기하학자이자 물리학자(아르키메데스ㅡ옮긴이)보다 훨씬 먼저 나선 펌프의 놀라운 원리를 발견하여, 물을 끌어 올리는 일 정도가 아니라 공중을 나는 일에 교묘히 활용하고 있을 거라 그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그들은 서너 바퀴 감아 돌도록 고안된 나선형 꼬투리 속에 씨앗을 담아 두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씨앗이 떨어지는 시간을 연장하고, 결과적으로는 바람의 도움을 얻어 허공을 가르는 체공 시간을 늘리는 것입니다.

특히 노란색을 띠는 녀석들은 나선의 가장자리에 두 줄로 돋아난 까칠한 털이 산채하는 사람의 옷이나 지나가는 짐승의 모피에 매달리도록 하여, 자줏빛을 띠는 녀석들의 장비를 더욱 완벽하게 보완하고 있습니다. 즉 바람을 이용한 씨앗 살포를 넘어 양이나 염소, 토끼 같은 짐승을 매개로 한 파종에까지 욕심을 내고 있는 셈이지요.

말이 나온 김에, 토끼풀은 제쳐 두고라도 개자리속의 다른 종류들에 대해서도 좀 살펴볼까 합니다. 예를 들어, 나비꼴 꽃을 피우는 다른 콩과 식물의 경우는 앞서 이야기한 종류와 자칫 혼동하기 쉽지만, 그런 비행 장비에 전혀 기대지 않고 꼬투리의 기본 기능에만 전직으로 의존합니다. 그들 중 오렌짓빛 개자리는 꼬투리가 나선형으로 배배 꼬이는 양상이 매우 두드러지고, 또 다른 변종인 달팽이꼴 개자리는 이 나선형이 아예 공처럼 동글동글 말려 있는데도 말이죠.

그런 걸 보면, 아직 운명이 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최선책을 찾아 지금도 연구와 개발에 여념이 없는 어떤 종을 목격하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해지지요.

짐작컨대 나선형 조직으로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 노랑개자리풀 역시, 문득 자신의 잎사귀가 암양의 구미를 끌어당기는 걸 보고, 그 짐승에게 자기 자손의 번식을 맡겨야겠다고 판단해, 열심히 연구한 끝에 모피에 잘 달라붙는 갈고리형 털을 개발해 낸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그런 기발한 아이디어와 노력 덕분에, 노란 꽃이 피는 개자리풀이 자줏빛 꽃을 피우는 보다 건장한 사촌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 삶을 영위하는 것 아닐까요?

 

 

 

자연에 빚진 소중한 것들

어쩌면 특별한 상황에서 무언가를 계산하고, 조작하고, 치장하고, 발명하고, 추론하는 것은 개개의 꽃이 아니라 대자연 그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긴 우리 인간의 열띤 관심은 항상 그 모든 개체를 능가하는, 보다 중요하고 드높은 문제에 치중되기 마련이지요.

그렇다면, 꽃의 세계 곳곳에 깃든 대자연의 지혜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정작 무엇을 깨닫게 되는지요? 한두 가지가 아니겠거니와 워낙 방대한 연구를 요하는 주제이니만큼, 일단 이 점 하나 짚어 보는 것으로 만족할까 합니다.

꽃을 통해 자연이 보여 주는 아름다움이라든가 행복의 상태, 유혹의 방법과 미학적인 취향 등은 우리 인간의 그것들과 무척 유사하다는 깨달음 말입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우리 인간 쪽에서 자연의 그런 요소들에 부응해 왔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군요.

사실 인간이 스스로 고유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다는 것만큼 부실한 주장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건축학적 · 음악적 모티프들, 색과 빛에 관한 그 모든 조화의식이란 바다, 산, 하늘, 밤, 황혼 등과 같은 대자연의 품에서 직접 빌려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 우리 내면에 나무의 아름다움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나는 지금 땅의 권능이 됐든, 우리 본능의 중요한 근원이 됐든, 우주에 대한 감각이 됐든, 숲 속 명상거리로서의 나무 이야기를 넘어 나무 그 자체, 숱한 세월을 푸름으로 지탱해 온 한 그루의 고독한 나무까지 더불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 존재 안에 평정과 행복의 심연을, 그 투명한 동공洞空을 구성해 온 무의식적인 이미지들 중에서 아름다운 나무의 기억에 빚지지 않은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삶의 절정을 지나, 인생이라는 경이의 시간이 그 마지막을 고해올 때, 그리하여 인류와 지대의 온갖 풍요와 정기와 예술이 제공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장관을 맛보았다고 자부한 다음, 우리가 회귀하는 곳은 아주 단순한 추억의 세계입니다. 거기, 정화된 지평선을 배경으로 서 있는 순수하고 변함없는 이미지 두세 개쯤은 아마도 마지막 잠 속으로까지 가져가고 싶을 것입니다. 인간의 둘로 쪼개진 세계,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문턱을 이미지가 넘을 수 있다면 말이지요…….

내 이야기를 하자면, 제아무리 휘황찬란한 사후세계로 건너간다해도, 프로방스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본 너도밤나무라든지 이탈리아의 한 도시에서 만난 사이프러스나무, 그것도 아니면 내 오두막 바로 옆에 은자隱者처럼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없는 낙원은 상상조차 못하겠습니다. 장엄한 저항의 몸짓과 평화로운 용기, 도약과 중력의 기개, 고요한 승리와 굳은 심지를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말없이 가르쳐 주던…… 네, 바로 그 나무들 말입니다!

 

 

 

예찬

이야기가 조금 빗나갔습니다. 나는 단지 꽃과 관련해서 대자연이 스스로 아름답고 즐겁고 또 행복하길 원할 때 취하는 행동이란, 우리 인간이 그런 경우 취했을 법한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내가, 큰 강을 항상 큰 도시 가까이 흐르게 만들어 주는 것이 신의 섭리라며 찬탄해 마지않던 어느 주교와 하나 다를 것 없다는 사실을 나 자신도 잘 압니다. 그만큼 우리는 인간의 관점에서 벗어나 자연만물을 바라보기가 어려운 것이겠지요. 같은 뜻에서, 우리가 꽃을 모르고는 우리 자신의 행복이 어떻게 표출되고 어떤 징표로 드러나는지 역시 제대로 알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합시다.

꽃의 아름다움과 희열을 제대로 판별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프로방스의 어느 한적한 구석처럼, 흐드러진 꽃의 제국에서 살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진정 꽃이야말로 계곡과 언덕을 다스리는 유일한 여왕입니다.

농부들도 이곳에서만은 밀을 경작하던 예전의 습속을 훌훌 털어버리고, 마치 그윽한 향기와 기막힌 음식을 향한 보다 섬세한 인간의 욕구에 충실할 뿐인 존재들처럼 처신합니다. 들판은 그 자체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하나의 꽃다발이 되고, 그 하염없는 향기는 짙푸른 세월 따라 끝없는 원무圓舞를 추는 듯하지요.

아네모네, 비단향꽃무, 미모사, 제비꽃, 패랭이꽃, 수선화, 히아신스, 황수선, 목서, 재스민, 월하향 등이 봄, 여름, 가을, 겨울,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범람합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최고의 자리는 5월의 장미꽃에게 양보해야 할 것입니다. 비탈진 언덕에서부터 들판의 분지에 이르기까지, 둑처럼 늘어선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 사이사이로, 5월의 장미는 끝 간데 없는 꽃잎의 물결을 펼쳐 놓습니다. 드문드문 머리 내민 집과 나무들을 휘감으며 도도히 흐르는 색채의 강이야말로 우리가 흔히 젊음과 건강, 기쁨의 상태에 부여하는 바로 그 빛깔 아니겠습니까?

훈훈하면서도 상큼하고, 특히 하늘을 방긋 열어젖힐 만큼 널리 퍼지는 향기는 혹시 지복至福의 근원에서 직접 길어 오는 것이 아닐까요? 꽃들의 살점을 비집고 뻗어 나간 도로와 오솔길들은, 글자 그대로 천국의 품속에 길을 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생애 처음으로 행복의 충만한 비전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환상과 희망

여전히 우리 인간의 시각에서, 설사 그로 인해 불가피한 환상이 생기더라도 당당히 보듬어 안으면서, 이제 보다 광범위하고 약간은 묵직한 의미가 담긴 이야기를 하나 덧붙여 보겠습니다. 이 자연의 정수, 세계의 본질이 생의 투쟁에 임할 때는 정확히 우리 인간과 일치하는 행동을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와 똑같은 방법, 똑같은 논리를 활용합니다. 우리라도 마찬가지로 채택했을 법한 수단을 동원해 목적을 이룹니다. 우리처럼 더듬대고, 주저하고, 때론 보태고, 때론 덜어 내며, 누차 동일한 짓을 반복하는 가운데, 오류와 실수를 가늠하고 수정해 갑니다.

세계는 작업실의 기술자나 공사장의 일꾼들처럼 끙끙 고민하면서, 고통스럽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새로운 것을 고안해 냅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기 존재의 거대하고 어둡고 무거운 몸집과의 투쟁을 매순간 이어 갑니다.

우리가 때론 어디로 갈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우리 자신을 찾아 헤매고 또 차츰차츰 발견해 가듯이, 세계 또한 그렇게 자신의 본질을 찾아갑니다. 종종 이상理想의 혼란을 경험하지만, 그 와중에도 보다 열정적이고 다부진, 그리하여 더더욱 영감 넘치는 삶을 향해 고개 드는 희망의 지침들을 얼마든지 거두어 올리면서 말입니다.

물리적으로 볼 때, 세계가 운용하는 어마어마한 힘의 비밀이라든지 무한정한 자원의 활용도를 인간의 역량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신적인 차원에서 세계의 움직임이란 우리 인간이 설정하는 궤도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 반경을 이탈한 경우를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

세계가 인간의 정신적인 반경을 넘어서지 않고 있다면, 이는 곧 그 반경 너머에 딱히 길어 올 만한 보물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요? 다시 말해서 인간의 정신이야말로 유일한 가능성이요, 가능성에 대한 인간의 신뢰에 결코 오류란 없다는 것, 결국 우리는 우주의 위대한 욕망과 의지가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발현될 수 있는 존재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위대한 자각

인간은 또 다른 세계로부터 난데없이 뚝 떨어져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이 지상의 삶을 그저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과도 같은 우연의 존재로 스스로를 단정함으로써, 참으로 오랜 세월 어리석은 자만심을 키워 왔습니다. 자연의 정상적인 진화과정 속에 결국은 묻혀 버리는 것이 기적과 우연이기에, 그러한 존재로서 자만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 위대한 세상의 영혼이 가는 길을 우리 역시 따르고 있으며, 그 희망과 사고, 시련과 감정을 함께한다는 걸 직시하는 편이 우리 인간에게 더욱 위로가 되는 일일 것입니다.

나아가 운명을 개선하고 물질에 내재된 힘과 법칙과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우리가 기대는 방법들이, 다름 아닌 그 물질이 스스로 진화해 온 방법들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리하여 미지의 물질들로 뭉뚱그려진 이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는 공고할 수밖에 없고 소박하나마 진실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한다면, 더더욱 마음 든든해지지 않을까요!

만약 자연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결코 실수하는 법이 없으며, 도처에서 벌이는 일마다 단연 완벽한 경지를 보여 주어, 인간의 수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지혜를 과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는 두려워하고 의기소침해질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희생제물이 된 듯한 느낌일 것이고, 어떤 동떨어진 힘의 포로로 연명하는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무얼 깨달아 알거나 치밀하게 계산해 나갈 희망 또한 가질 수 없겠지요.

그보다는 자연을 움직이는 힘이, 적어도 지적인 차원에서만큼은, 우리 인간의 힘과 밀접하게 맞물려 돌아간다고 믿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자연과 더불어 같은 우물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은 같은 세계에 속해 있으며, 서로 거의 닮은 꼴입니다. 우리는 범접헐 수 없는 신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처지가 결코 아닙니다. 우호적이되 아직은 적잖은 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는 자연의 뜻과 더불어 공존해 나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밝혀내고 이롭도록 유도하는 일에 인간의 지혜가 모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

어떤 지적인 개체들이 있는 게 아니라 일종의 보편적인 지성, 우주적인 기운이 이런저런 유기체를 관류하며 그 지혜를 나눈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무모한 주장일까요?

인간의 지혜는, 종교에서 흔히 신과 결부시키는 그 우주적인 기운에 가장 덜 저항하는 삶의 형식을 따를 때 비로소 온전한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 몸의 신경은 보다 섬세하게 전류가 퍼져 나갈 수 있는 회로가 되어 주고, 우리 뇌의 회전 장치는 그 전력을 배가시키는 감응코일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돌과 별과 꽃과 동물에게도 똑같이 관류하는 전류와 전력이, 인간의 유기체를 통해 좀 더 증폭되는 정도라고나 할까요.

반대로, 미처 수용할 준비가 되지 못한 기관을 가지고 있다면, 신비한 에너지를 구하는 일은 허무맹랑한 바람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일단 인간 말고도 그에 버금가는 지혜의 숱한 증거를 확인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할지 모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안에서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의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자신만의 세상을 대단한 환상과 희망으로 치장하는 일에 지나친 이해관계를 갖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니까요.

이제는 한낱 미물이 우리에게 소중하고 귀함을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지금까지 꽃들이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은, 고산준령이라든가 드넓은 태양, 아득한 별들의 이야기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만물을 살아 숨쉬게 만드는 기운이 우리 인간을 살아가게 해주는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좀 더 확신할 수 있게 해줍니다.

꽃과 우리가 서로 닮았고, 꽃이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 역시 가지고 있으며, 꽃의 방법과 습성과 관심과 성향과 욕망이 우리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때, 우리가 억누를 수 없는 본능으로 희구하는 모든 것은 저절로 그 당위성을 확보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삶의 곳곳에 꽃의 지혜가 만개할진대, 어떻게 그 삶이 악과 죽음, 어둠과 허무에 대한 승리의 몸짓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