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내가 머무는 곳이 나를 움직인다

오키Oki 2014. 2. 19. 19:02

 

 

내가 머무는 곳이 나를 움직인다

집, 정원, 연구실, 병원, 미술관, 놀이동산, 도시……

우리가 머무는 크고 작은 공간이

우리 몸과 마음의 행복을 좌우한다!

 

우리는 모두 작은 규모로든 큰 규모로든 주변 장소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장소에 대한 감각은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이나 비 온 뒤의 젖은 흙냄새. 또는 인도 위를 날쌔게 날아가는 참새 소리처럼 작은 것에서 올 수도 있다. 발밑에 닿는 자갈의 느낌이나 맨살에 닿는 따뜻한 햇볕에서 올 수도 있다. 아니면 깜깜하고 고요한 진공상태의 우주공간에 떠 있는 지구의 이미지처럼 거창한 것에서 올 수도 있다. 장소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우리가 보고 느끼고 냄새 맡고 듣는 것, 즉 우리의 모든 감각을 거쳐 만들어진다. 우리가 그 장소를 한  번 경험하고, 다시 경험할 때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진다.

 

같은 장소에 있는 사람들도 그 장소가 건강에 끼치는 영향을 좌우한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공간이 부족하고 전염병이 쉽게 생길 수 있는 반면, 사람이 너무 적으면 고립감을 느끼고 우울해질 수 있다. 그러나 적당히 있으면 우리가 아프거나 힘들 때 이겨내도록 도와줄 안전한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다. 질병 역시 장소에 대한 감각에 영향을 주어 우리의 감정에 색을 입힐 수 있고, 기억을 희미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일부다. 우리를 둘러싼 공간에서 우리는 그 공간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형성하기도 한다. 우리는 환경을 집어삼키고 파괴하며, 결과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파괴하는 장소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 정반대도 가능하다.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게 하고 건강을 지키는 데 도움을 주는 장소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서던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의 어빙 비더먼 교수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선호하는 아름다운 경치나 노을, 숲 같은 풍경을 볼 때 엔도르핀이 분비되는 경로의 신경세포들이 활성화되는 것을 발견했다. 따라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것은 뇌가 많은 양의 모르핀을 투여해 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풍경에 색·깊이·움직임이 더해지면 그 경로를 따라 더 많은 신경세포들이 활성화된다.

- 에스더 M. 스턴버그,  《공간이 마음을 살린다》

 

 

 

 

- 이수영 지음 니체를 읽는 아홉가지 키워드명랑철학에서 -

명랑하지 않은 삶은 유죄다!

삶의 명랑함을 되찾을 수 있는 철학, 예술가적인 쾌활함을 가득한 철학, 이것이 니체의 철학이다.

 

 

이수영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1920년대 문학을 푸코의 사유로 읽어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삶은 우연의 주사위를 던지는 필연의 손이라고 했던가. 자유롭게 공부하며 살고 싶어 대학을 떠나 연구공동체에 들어갔고, 삶의 길을 찾기 위해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니체, 들뢰즈, 푸코, 스피노자, 베르그송, 블랑쇼에 오랫동안 매혹됐고 푸고의 성-주체 담론으로 한국근대문학을 분석한《섹슈얼리티와 광기》, 니체의 철학을 청소년들에게 전하는《미래를 창조하는 나-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푸코의 권력론을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해석한《권력이란 무엇인가》등을 쓰기도 했다. '수유+너머'와 '수유너머 길'을 거쳐 2011년 봄에는 현장 연구자들과 함께 '인문팩토리 길'을 꾸렸다. 이곳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는 현장인문학의 산실이다. 삶의 변방에 몰린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며 느끼는 날카로운 긴장감을 어떻게 갈무리할지 늘 고민하고 있다.

《명랑철학》은 삶의 근본을 짚고, 살아 가야 할 길을 고민할 때쯤 만난 니체의 철학을 한 권에 정리한 책이다. 니체의 주요 키워드 아홉가지를 우리의 삶 속에 녹여내, 니체 철학의 명랑성과 긍정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특히 이 책을 삶에 환멸을 느끼며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반시대적이고 반국가적인 니체에게는 이상하게도 따뜻함과 극복의 철학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읽고 공부한 것들을 사람들과 나누며 살고 싶다. 그 과정에서 현장에서 실험한 인문학적인 경험을 책에 담을 수 있으면 좋겠고, 스피노자와 들뢰즈에 대한 책도 쓰면 좋겠다.

 

 

 

니체를 보라  배우는 법마저 가르치는 스승 니체

이 장에서 인용한 것들은 모두 니체의《이 사람을 보라》에서 가져온 것이라 따로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나를 혼동하지 마시오"

니체Friedrich William Nietzche, 1844~1900 가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졸도한 해(1889년)에 출판된《이 사람을 보라》는 니체가 직접 자신에 대해 분석한 자서전이다. 자서전을 직접 쓰는 철학자라니! 그만큼 니체는 엉뚱한 구석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다. 이 책을 '철학적 자서전'이라고 이름 붙이면 어떨까. 아니 그보다 '자전적 철학서'가 더 낫겠다. 우리는 철학서 같지 않은 이 책에서도 감당하기 벅찬 니체의 개념들과 만나는 스릴을 마음껏 누리게 된다. 니체를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까. 니체가 살아왔던 생애를 중심으로 사건을 나열하는, 연보 중심의 소개는 얻을 게 별로 없는 일이자 재미없는 일이다. 편두통이나 구토에 시달렸다거나 매독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은 병리학자들의 흥미만 자극할 뿐이며, 연인 살로메에게 실연을 당했다는 사실은 연애에 관심 있는 독자들의 흥미만 자극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병이 아니라 그가 병을 겪는 방식이다. 바그너Wihelm Richard Wagner, 1813~1883 와의 친분이나 결별과 같은 시대적인 사건도 니체가 그 경험 속에서 추출해낸 철학적 개념과 관련해서만 중요할 뿐이다. 우리는 이런 맥락 속에서 니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고 싶다. 니체가 직접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을 따라가면서 그를 이해하는 방법, 이런 방법에서 훨씬 얻을 게 많은 것 같다. 혹여나 누구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겟다. 그가 진짜로 정신병적 상황에 있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따라서 과대망상광의 망상적 진술을 사실적 진술과 혼동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가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나는 그런 염려를 하지 않는다. 니체의 진술은 언제나 신중하고 엄정하게 느껴졌으며,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일관된 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전적 철학서'에 값하는 철학적 지혜들, 철학적 개념들이 탄생하게 된 삶의 경험들이 이처럼 멋지게 녹아들어간 책은 이제껏 본 적이 없다. 단연 압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을 중심으로 니체에 대해 알아도 충분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니체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알려주고자 했던 현명해지고 영리해지고 운명적인 존재가 되는 비법을 아는 게 목표다. 니체는 언제나 다른 스승을 능가하는 스승이다.

서문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조만간 인류에게 역사상 가장 어려운 요구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기에 내가 누구인지를 밝혀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역사상 가장 어려운 요구"는 아마도 인류의 가치 전체를 전환Umwerthung 하는 일일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가치롭다고 여겨왔던 모든 것들의 가치를 재검토하고 근본적인 가치전환을 이루는 일, 이것처럼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 이건 언제나 니체의 작업 내용이었다. 그런데 왜 니체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혀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동안 출판한 책들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충분히 알렸을 테고, 또한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주지 않은 채 놔둔 적도 없으므로 니체가 직접 나서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왜? 그는 아무래도 자신에 대한 오용誤用을 예감하고 있었나보다. 히틀러 치하에서 전쟁에 나섰던 독일 군인들이 배낭 속에《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한 권씩 넣고 다녔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지 않은가. 자신의 위버멘쉬(초인)의 철학이 그렇게 오용될 수도 있음을 니체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것같다. 왜냐? 바로 자기 "과제의 위대함과 동시대인의 비소함 사이에서 오는 오해"를 이미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니체의 말을 듣지도 않고 니체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니, 듣고 있어도 듣지 못하고, 쳐다보고 있어도 보지 못한다. 왜 그럴까? 바로 니체가 제시했던 철학을 들을 만한 귀와 볼 만한 눈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아들을 수는 없는 법이다.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다."

가령 독일의 한 학자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말을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니체를 그의 정반대되는 경향인 "이상주의자"로 이해하기도 했다. "도덕과 파괴자"인 차라투수트라를 반은 '성자'고 반은 '천재'인, 좀 고급한 인간의 이상적 유형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위버멘쉬' 는 선함에 있어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라고 간주되었고, 니체를 다윈주의자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며(그러나 니체는 인간 사회에서는 적자생존이 통하지 않는다며, 자주 다윈주의를 비판했다), 차라투스트라나 위버멘쉬라는 개념 속에는 영웅을 숭배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동시대인의 비소함'은 모든 위대한 철학도 오해하고 오용할 준비를 한다. 언제나 니체는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니체는 무엇이 자신의 철학이고, 무엇이 자신의 철학이 아닌지 얘기해주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니체가 동시대 독자들의 호응에 안달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만인이 원하는 것에서는 늘 악취가 난다고 말해왔다. 니체는 이렇게 자신을 직접 알려주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신용에 의거해서만 살아간다"고 했다. 즉 스스로 자신의 신뢰를 측정하고, 스스로 약속하고, 스스로 심판하는 자였던 것이다. 그런 인간이 어찌 자신이 대단하다고 대중들에게 직접 얘기하겠는가. 자신의 책이 읽히지 않는다며 절망했던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와 달리 니체는 자신이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오히려 승리감을 느꼈다. "나는 읽히지 않는다. 나는 읽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전하고자 했던 철학적 메시지가 담고 있는 어려운 역사적 요구가 동시대인의 비소함에 의해 계속 오해되고, 미래에도 오해될 것이기에 직접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자기소개는 니체의 "본능적 긍지"에 위배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니체는 말한다. "내 말을 들으시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기 때문이오. 무엇보다도 나를 혼동하지 마시오!"

 

 

 

사건운명이 되는 법

니체는 자신을 "운명"이라고 불렀다. 인류사의 운명! 인류사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자, 그의 등장과 함께 인류의 운명이 커다란 변전 속에 휘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 이 운명적 존재의 등장과 함께 세계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왜 니체는 인류사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니체, 그리고 니체의 철학이 인류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이기 때문이다. 사건, 다시 말해 가장 위대한 사건은 뭘 뜻하는 것일까? 야생 동식물을 가축화하고 작물화했으며 문자를 발명했던 신석기혁명? 아니면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칸 핵폭탄의 발명? 물론 이런 혁명이나 발명도 중차대한 일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위대한 사건이란 가장 위대한 사상이라고. 위대한 사상과 더불어 우리는 세계의 인류사를 바라보는 방법을 터득하며, 위대한 사상과 더불어 지금까지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꿈꾸는 법을 알게 된다. 인류의 삶과 꿈을 지배하는 사상이야말로 인류사의 절대적 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니체는 자신을 사건이자 운명이라고 생각한 것인가. 니체 이전에는 그런 사상이 없었던 것인가. 아니다. 물론 존재했다. 그것을 니체는 "기독교적 도덕"이라고 부른다. 기독교와 관련이 있지만 꼭 기독교에만 한정되지 않는 도덕과 가치와 규범. 이 기독교적 도덕이 니체 이전의 인류사를 지배한 사상이었다. 이 사상도 인류사의 사건이고 운명이다. 그런데 니체가 이 도덕과 다른 철학을 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도 하나의 사건이고 진정 새로운 사상이며 운명인 것이다. 인류 수천 년의 의지와 사상과 꿈을 지배해왔던 도덕의 정체를 파악한다는 것. 이것이 정녕 얼마나 가공할 일인지 우리는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 도덕의 명령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류사의 사명을 제시했다는 것은 정체에 대한 파악보다 수천 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또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새로운 사명을 제시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 전체를 걸어야 하는 일이고, 자신이 그렇게 살고 확신하고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며, 인류 역사 전체의 감각과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고 확정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니체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새로운 사명에 대한 니체의 긍지를 알아야 한다. "나를 구별짓고, 나를 나머지 인류 전체에 대한 예의로 만드는 것은 바로 내가 기독교적 도덕을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비도덕주의자", 이것이 니체가 인류사 전체에 새로운 사건을 일으킨 사상인 것이다. 그는 이 사상을 찾아냈고, 이 사상대로 살았으며, 이 사상을 인류의 새로운 과제로 제시했다. 우리가 만약 비도덕주의자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미 또 다른 니체가 되는 셈이다. 그 순간 우리는 인류 전체와 우리 자신을 구별짓고, 자신을 인류의 예외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는 왜 기독교적 도덕을 기소하고 사형판결을 내렸던 것인가.

기독교적 도덕의 핵심은 "탈아脫我, Entselb-stung"를 주장한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을 버릴 것, 자신을 돌보고 자신을 위하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것, 자신보다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보다 국가를 사랑하고, 자신보다 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니체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라는 말과 같다. 탈아는 나의 자연스런 본능을 부정하라고 말한다. "삶의 전체인 성에서 어떤 불결한 것을 느끼도록 가르쳤다는 것", "성장을 위해 가장 필요불가결한 강력한 이기심(이 말이 벌써 비방적이다!)에서 악의 원칙을 찾는 것", 이 모든 것이 기독교적 도덕의 핵심이다. 나를 부정하지 않으면 신의 사랑을 얻을 수도 없고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 그래서 니체는 말한다. "지금까지 가르쳐진 유일한 도덕인 탈아의 도덕은 종말의지를 누설하고 있다. 이것은 가장 심층적으로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신이든 저편의 세계든 참된 세계든, 자신의 신체와 본능과 힘을 거부하도록 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이 세상을 탈가치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현존이 무가치하다고, 나의 육체와 자연적 본능이 죄악이라고, 이 지상의 현실이 무의미하다고 만드는 것이다. "영혼", "영혼의 불멸" 개념도 마찬가지다. "몸을 경멸하고, 몸을 병들게 ― '성스럽게' ― 만들기 위해" 날조된 것들이다. 니체가 만들어낸 대쌍개념으로 보면, "건강 대신" '영혼의 구원'"을 택한 셈이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사상, 저 기독교적 도덕의 정체를 '해명하는 자는 하나의 불가항력이자 하나의 운명이다." 저 도덕이 "범죄중의 범죄", "삶에 대한 범죄"인 이상, 삶의 긍정성을 부정해버린 이상, 그러면서도 그것이 참된 진리라고 "악의에 찬 형식의 거짓"으로 인류 역사 전체를 기만한 이상, 이 도덕과 일전을 벌이고 새로운 사상을 견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저 "인류에 대한 진정한 키르케"의 정체를 알아버린 자의 숙명인 것이다. 만약 이를 운명으로 껴안지 않으면 그는 저 기독교적 도덕이라는 키르케의 정체를 알 수도 없었다. 그리고 정체를 파악했다면 인류를 키르케에서 구출하는 것을 자신의 철학으로 삼지 않을 수도 없다. 이제 니체는 "인류 역사를 둘로 나눈다. 그의 존재 이전과 그의 존재 이후로."

저편의 세계와 참된 세계, 신에 의한 구원을 외치는 자가 결코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 자신의 존재와 세계를 감당할 수 없는 무능력이 저편의 세계를 꿈꾼다는 사실, 오로지 퇴화해버린 본능과 무력無力이 데카탕스의 본질이라는 사실, 이런 사실을 포착한 니체는 그런 점에서 참으로 건강한 존재였다. 병든 자가 어떻게 병든 자가 어떻게 병든 자들의 본성을 깨닫겠는가. 인류의 이상이었고 도덕 교사였던 기독교적 도덕을 알아차렸다는 점에서 니체는 "기독교적 도덕을 자기 밑에 있는 것을고 깨닫"는다. 비도덕주의자 니체, 그만이 "지금까지 믿어져왔고 요구되어 왔으며 신성시되어왔던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결단", 즉 "모든 가치의 전환"이라는 정식을 인류 앞에 하나의 심대한 사명으로 제시할 수 있다.

니체는 일종의 "다이너마이트"다. 니체와 함께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병든 본성을 깨닫는다. 우리의 삶이 어떤 점에서 조금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삶 자체가 병든 것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니체의 폭발력은 무시무시하다. 이걸 다 감당하기란 정말 역부족이다. 하지만, "수천 년간의 거짓"에 맞서는 대립자 니체와 함께 우리는 "비로소 희망이 다시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참으로 건강한가. 참으로 이 삶을 사랑하는가. 참으로 이 실존을 긍정하는가. 참으로 이 세계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가. 이런 말들이 저 다이너마이트 니체의 언명들과 함께 우리의 삶을 휘돌고, 우리에게 용기를 발휘하게 한다. 병들 것인가. 건강할 것인가.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이것이 정치의 진정한 주체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이 앞으로 우리 삶의 리트머스 시험지이자 시금석이 될 것이다. "지상에 한 번도 멀어지지 않았던 전대미문의 전쟁이 멀어질 것이다. 나와 함께 지상에 비로소 위대한 정치가 펼쳐지게 된다."

 

 

 

건강하게 병드는 법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인간은 병든 존재일 것이고, 다이너마이트는 병에서 회복하려는 건강 지향의 존재일 것이다. 니체는 우상을 숭배하는 신도들과 같은 "신자"를 원하지 않았다. 우리도 니체를 믿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니체를 읽어야 한다. 그럴 때 니체는 진정 지혜로운 스승이 된다. 모든 가치의 전환이라는 충격적인 사상을 역설하는 니체라고 해서 불친절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 하나의 운명이라고 말하는 저 교만함 때문에 우리는 니체에 대해 더 궁금해지고 니체를 더 배우고 싶어진다.

니체의 특기는 뭘까? 바로 "상승과 하강에 대한 예민한 후각"이다. 니체는 냄새를 잘 맡는다. 그 앞에 누군가 서 있거나 책을 내보이면 니체는 우선 냄새로 그 인간이나 책의 건강을 판단하다. 병든 척하는 건강한 인간인지, 아니면 사이비 건강의 대표인 데카당스인지, 그 어떤 것이든 니체의 후각을 피할 도리가 없다. 그는 "섬뜩할 정도로 완벽하게 민감한 순수에 대한 본능"을 갖고 있기에 영혼의 내장이 어떤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즉각 알아채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거기에 대고 니체는 '왜?' 하고 반문할 것이다. 그건 자신에 대한 사랑의 결핍에서 나온 대리 만족이 아니냐고 힐난할 것이다. 이웃을 도와주고 얻는 뿌듯함이 있어야만 볼품이 생기는 그런 존재들이나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니체는 이웃사랑 대신 자신을 사랑할 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면 거기서 덕이 자연스럽게 흘러넘쳐 이웃사랑으로까지 옮겨갈 것이라고.

"완벽하게 투명하고도 빛나는 요소들" 안에서만 숨쉬는, 극도로 순순한 존재인 니체, 그렇다고 그가 순진무구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 문장에 니체의 장기인 후각의 정체가 숨어 있다. 우리는 어찌하여 니체의 후각을 믿어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아무 후각이나 믿을 수는 없다. 병인지 건강인지 정확히 판별할 수 있는, 완벽한 의사에게만 병(건강)에 대한 진단을 요청할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그런 의사에 해당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1879년 니체는 건강이 너무 악화되어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의 강의를 그만두고 퇴직 의사를 밝힌 후 제네바로 휴양을 떠났다. 그의 말대로 "생명력의 가장 낮은 지점"에 이른 해였다. 그런데 이 무렵 니체는《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의 한 편인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를 쓰고, 또 《아침놀》을 집필했다. 아니, 대학강의까지 그만두고 요양을 떠날 정도로 병든 사람이 어떻게 글을 써낼 수가 있단 말인가. 백 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해보자. 그래도 이런 상태에서 나온 글을 신뢰하기란 어렵지 않겠는가. 이런 의심이 늘 니체에 대한 평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니체는 여기에 대해 자상하게 말해준다. 고통스럽다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힘들게 위액을 토하게 하는 사흘 동안 지속되던 편두통의 고문에 시달리던 와중" 에도 "변증론자의 탁월한 명석함을 갖추고 있었으며, 사물에 대해 아주 냉정하게 수고했다"고. 이럴 수 있을까?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정신의 완벽한 명철, 명랑" 과 "풍부함" 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란 도대체 얼마나 건강한 자인가. 병들었다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자, 신체 전체의 생리적 부조화에 따라 정신조차 위안의 마취제를 갈구하는 자가 어떻게 병에 대해. 그리고 건강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마취제와 혼합되어 있는 존재가 어떻게 병과 건강의 정확한 경계를 확정해줄 수 있겠는가.

병든 상태에서 병들었음을 파악할 수 있으려면, 역설적이지만 아프더라도 건강해야 한다. 신체의 질병과 함께 정신마저 혼미해지면 자신이 병들었는지 건강한지 판별할 수 없다. 건강하게 아픈 자와 병들게 아픈 자는 완전히 다른 법이다. 참으로 건강하기에 병든 자들(데카당스)의 본능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작업을 간파할 수 있다. 또한 병들었어도 정신의 완벽한 명철, 명랑을 유지할 수 있기에 병자의 관점에서 건강의 가치와 건강의 개념들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푸코Michel Paul Foucault, 1926~1984 식으로 말한다면, 정상에 숨어 있는 비정상을 파악하고, 비정상에 숨어 있는 건강함을 파악할 수 있는 후각은 니체의 후각이고, 니체의 건강이자 니체의 병이다.

그래서 오로지 니체에게서만 가치의 전환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를 지배해온 가치가 건강한지 병들었는지를 평가하는 것도 니체이기에 가능하며, 병든 가치들을 건강한 가치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니체이기에 가능하다. 애초부터 병든 자가 말하는 건강(즉 대안으로부터의 인류의 미래)은 병자의 도피본능과 마취제 갈구본능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기에 신뢰할 수가 없다. 니체만의 독보적인 영역이 있다. 바로 가치의 전환을 사유하고 판단하고 제시하는 일, "역사상 가장 어려운 요구" 를 인류에게 제안하는 일 말이다. 오로지 이 영역에서는 니체만이 대가大家다. 니체가 가장 오래 연습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고, 니체가 진정 경험한 것도 이것이었다. 병든 자들인 데카당스들을 판별하고, 데카당스들의 본능을 밝히고, 데카당스로부터 벗어나도록 촉구하는 일.

 

 

 

원한에 빠지지 않고

"러시아적 숙명론" 으로 버티기

어렸을 때부터 병을 달고 살았던 니체는 그럼에도 타고나게 건강했다. 니체만큼 건강에 대한 의지를 강력하게 보여주는 존재도 없다. 그의 철학이 무엇인가. 바로 자신의 "건강에의 의지와 삶에의 의지"를 언어화한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지 않는가. 철학이 건강학이라고? 그렇다. 삶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철학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잘 살기 위한 것. 그리고 잘 살기 위해서라도 남과 적합한 관계를 맺고, 그런 관계를 위해 자신도 적합하게 변화하는 것(관계의 적합에 대해서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대표적이다). 이것이 니체의 철학이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생리학이자 의학이다.

"생명력이 가장 낮았던 그해는 바로 내가 염세주의자임을 그만두었던 때였다." 정녕 우리와는 반대다. 병들고 지칠 때 삶을 비관하는 게 당연한 법인데 니체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니체의 "자기 재건 본능" 이 "비참과 낙담의 철학을 금지해버렸던 것" 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자신을 "데카당스의 반대" 라고 지칭하는 이유다.  데카당은 무엇인가. "항상 자신에게 불리한 수단을 선택" 하는 존재다. 반면 니체는 "불행한 사태에 대해 항상 적합한 수단을 본능적으로 선택" 한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는 아프고 괴로워도 총체적으로는 건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존재는 항상 "해로운 것에 대한 치유책" 을 찾아낸다. 아주 나쁜 상황에서도 그것들을 자신에게 유용하게 만들 줄 안다. 그래서 "그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병든다는 것. 이것이 삶을 낙담으로 몰아가게 하기보다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은 이렇게 천성적으로 건강하고 강한 본성의 소유자에게만 가능한 법이다. 모든 것이, 자신을 건강하게 하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관점에서만 본능적으로 선별된다. 오직 선택의 원칙과 척도는 그 자신이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시대적 소명이나 국가를 위해서도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극에 대해 바로 반응하지 않는다. 대신 검사해본다. 그것이 자신의 건강에 유용한 것인지 물으면서. "오랫동안의 신중함과 의욕된 긍지가 그를 그렇게 양육" 시킨 것이다.

그런 니체였기에 병들어서도 원한resentiment 에 사로잡히지 않았고, 오히려 원한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었다. 생리적으로 교란된 자. 생리적으로 퇴화한 자. 심각하게 질병에 걸린 자는 자신이 겪는 상황을 적절히 처리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것에서 상처를 입는 특징이 있다. 늘 화가 나 있는 자, 늘 불평하는 자, 이런 자들이 전형적으로 병든 자다. 이들은 화를 풀 대상이 필요하고, 화를 풀 기회가 필요하다. 엄청나게 화를 내는 것, 이것만으로도 생리적 불편함이 해소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경에너지의 급격한 소모" 자체가 병든 자들에게 가장 위험하고 해롭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모른다. 왜냐하면 "일단 반응을 하게 되면 너무 빨리 소모되어 버리기에." 그런데 병든 자들은 "원한이라는 격정에 의해 가장 신속히 자기 자신을 불살라버린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불리한 반응양식" 인 셈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러시아적 숙명론" 이다. 이것은 "행군이 너무 혹독하면 결국 눈 위에 쓰러지고야 마는 러시아 군인의 무저항의 숙명론" 으로,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차라리 반응하지 않아버리는 태도를 의미한다. 신진대사를 감소시키거나 완만하게 이끌어 겨울잠을 자듯이 신체의 에너지를 보존하는 방법이다. "가장 치명적인 상황" 에서는 오히려 삶을 유지하는 "위대한 이성" 이다. 니체가 말하듯이 부처도 "영혼을 원한으로부터 아예 해방" 하는 것을 가르침의 첫 번째로 삼고 있다. 도덕이 아니라 생리학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인도하는 것이다.

살다보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상황과 장소와 집과 사회 속에서 몇 년간을 끈질기게 버티고 있을 때" 가 있다. 이때 이런 우연적인 상황들을 바꾸려고 하다가는 원한의 생리학처럼 자신의 에너지를 급격하게 소진해버리고 만다. 이럴 때는 차라리 러시아적 숙명론으로 버텨야 한다. 삶이 다시 풍부해질 때까지. 대개 질병은 이렇게 찾아온다. 익숙하고 반복적인 삶이 어느 순간 굴레로 작용할 때, 내가 미처 바꿀 틈도 없이 상황이 견고하게 들이닥칠 때, 내 삶이 위태해지는 그 순간이 바로 질병의 순간이다. 이때는 결코 "다른 자기" 를 원하지 말아야 한다. 잘못하다가는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한 책임을 다른 존재나 삶에 돌리는 수가 있으니 말이다(이것이 바로 원한이다). 그럴 때마다 니체처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지 따져보면 우리도 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데캉당스 시기를 겪고 있을 때 나는 그것들이 내게 해롭기에 금했다. 삶이 다시 풍부해지고 충분히 긍지를 갖게 됨과 동시에 나는 그것이 내 밑에 있는 것이기에 금했다."

 

 

 

싸움달인이 되는 법

타고나게 건강했으므로 병들어서도 건강할 수 있었고, 그래서 건강하게만 아플 수 있었던 니체야말로 그 오랜 병에 얼마나 감사해야만 하는지를 아는 철학자였다. 병들 때 빠져들 수 있는 원한에서 벗어나 오히려 원한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었기에 니체에게 병은 자신과 인간의 본성을 통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비난하고 원망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병자라는 징후다. 니체는 결코 비난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나쁜 경험을 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마저도 내 경험은 예외 없이 그것들에 유리한 말을 한다." 그래서 바젤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7년 동안 니체는 학생들에게 벌을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가장 게으른 학생도 니체의 수업에서는 열성적이었다. 설령 인간이라는 "악기가 제 소리를 잃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게서 귀 기울일 무언가" 를 찾아내려고 했던 게 니체였다.

크고 작은 무례한 행위들을 겪으면서도 니체는 그 원인을 그 사람의 악의로 돌리지 않았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악한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대신 그럴 수밖에 없었음. 그런 필연성을 포착하려고 했다. 악의도 없기에 사실 없음도 없다. 그 존재의 필연적 본성에서 나오는 행위이기 때문에 악한 의도가 있다거나 의도 자체가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돕는 자들이 말하는 사심 없음을 니체는 믿지 않는다. 사심 없음의 가장 숭고한 형태로서 연민이나 동정을 차라투스트라가 겪어야 하는 가장 위험한 시험으로 작품화했다. 순전히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한다거나 국가를 위해서 아무런 사심 없이 자신을 바친다는 생각이 시대의 미덕이 되고 시대적 이념이 될 때 가장 위험하다는 뜻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니체의 척도는 오직 그 자신이다. 즉 자신의 건강과 삶의 풍요로움에 척도가 놓여있는 것이지. 공동체나 국가의 풍요를 위한 사심 없음은 아닌 것이다, "사심 없는 행동들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훨씬 더 비천하고 단견적인 충동들" 에서 자신을 순수하게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존재들만이 가장 건강하고 가장 풍요로우며 힘과 자유로움으로 넘쳐나는 삶을 산다는 증거일 수 있다.

니체는 공격을 하지, 결코 복수를 하지는 않는다. 강한 본성을 갖고 있는 자는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저항을 찾는다." 즉 대등한 적수를 찾는 것이다. 니체는 이것을 "적과의 대등함, 정직한 결투를 위한 첫 번째 전제" 라고 말했다. 적을 경멸하고 있다면 싸움을 할 수 없다. 얕잡아보는데 그것이 어찌 결투가 되겠는가. 싸우면서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대등한 적수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싸움의 달인 니체는 어떤 방식으로 싸울까? 니체는 네 가지 명제로 요약해준다.

첫째, "승리하고 있는 것들만 공격한다." 대등한 적수를 찾는 니체이기에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만약 승리하고 있지 못하는 적이라면? "승리할 때까지 기다린다." 둘째, "우군이 없을 만한 것, 나 홀로 싸우는 것, 내가 오로지 나만을 위태롭게 하는 것만을 공격한다." 그래서 니체에게 싸움은 자신을 위태롭게 만들고 자신을 더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다. "나는 위태롭게 하지 않는 일은 한 번도 공공연하게 해본 적이 없다. 이것이 옳은 행위에 대한 내 기준이다." 셋째, "결코 개인을 공격하지 않는다. 다만 개인을 강력한 확대경처럼 사용할 뿐이다." 니체는 왜 바그너를 공격했을까? 교활한 자가 풍요로운 자로, 뒤쳐진 자가 위대한 자로 혼동되는 "우리 문명의 허위와 본능의 불완전함" 이 바그너에게서 확대경을 쓴 것처럼 잘 보이기 때문이다. 넷째, 결코 개인적인 악감정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그래서 니체에게 공격은 "호의에 대한 증거" 이자, "감사함에 대한 증거" 다. 기독교를 지독히 공격했지만 "가장 진지한 기독교인들은 내게 항상 호의적이었다" 고 말하기도 했다. 니체는 기독교라는 "수천 년간의 숙명" 을 어찌 한 개인의 탓으로 돌려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이상이 니체의 싸움법이다.

 

 

 

진정 중요한 문제 선별하는 법

영리함이란 무엇인가. 그건 진짜 문제와 가짜 문제를 선별할 수 있는 감식안에 있지 않을까. 가짜 문제와 씨름하는 것은 낭비다. 니체는 이렇게 자신의 영리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대체 왜 나는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결코 문젯거리가 아닌 것에 대해 숙고한 적이 없으며, 나는 내 자신을 허비하지 않았다." 즉 문젯거리가 아닌 것을 붙잡고 숙고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바보같은 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가짜 문제들은 무엇인가. 니체의 표현에 따르면, "인류가 이제껏 진지하게 숙고해왔던 것" 들로, 실상 실재도 아니고 한갓 상상이며, "엄밀하게 말하자면 병들고 가장 심층적인 의미에서 해로운 본성의 나쁜 본능들에서 나온 거짓들" 이다. 신, 영혼불멸, 구원, 피안彼岸과 같은 문제들이 바로 가짜들이다.

'신은 존재하는가?', '영혼은 불멸하는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저편의 천국은 존재하는가?' 바로 이런 질문들을 중심으로 "인간 본성의 위대함과 '신성'" 이 찾아졌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철학자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일이었으며, 영혼불멸과 영생이 보장될 때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니체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자신이 "어린아이였을 때조자도 주목하지도, 시간을 투자하지도 않았던 개념들" 이라고 이죽거린다. 이렇게 인류의 역사에서 중요한 문제라고 간주했던 것들은 실상 중요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았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니체는 이것을 아주 "사소한 사항" 들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뭐냐면, 바로 자기보존의 문제다. 니체에게 항상 중요한 것은 인간 그 자신이 자신의 능력을 더 우월하고 고귀하게 끌어올리는 일이다. 사실 이것처럼 중요한 문제는 없다!

내가 나를 보존하고, 나의 능력을 더 위대하게 만드는 데 있어 신의 존재가 왜 중요하단 말인가. 피안의 세계가 있어야 내 영혼이 구원되는가? 영혼이 불멸이든 아니면 소멸이든 그게 내 삶의 풍요로운 성장을 위해 왜 중요하단 말인가. 그런데도 중요하다고 여겨져온 이 사이비 문제들은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 자체를 경멸하라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위험하고 나쁜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왜 니체는 '신은 죽었다' 고 말하고, <구원에 대하여>와 같은 글을 쓰고,《안티크리스트》에서는 기독교 문제를 다뤘냐고, 그것은 이 사이비 문제들의 위대함을 북돋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초라함과 무가치함을 증명하기 위한 일이었고, 그런 거창한 문제들의 거짓됨을 드러내야만 우리는 진정 중요한 문제들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우리에게 닥친 사건은 왜 꼭 불행한 사건이어야만 하는가. 인간은 이 대답하기 힘든 물음에 대해 해답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론은 '신' 이 된다. 신에 의해 존재하고, 신의 뜻을 배반했기에 불행과 고통이 생의 징벌이 되었다고. 모든 해답은 신으로 귀결괴고, 모든 대안도 신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이런 아이가 있다고 해보자. "나는 너무 호기심이 많고, 의문이 많으며, 오만하여 조야한 대답에 만족하지 않는다" 고 말하는 아이가. 이 아이에게 신이란 "하나의 조야한 대답" 에 불과할 것이다. 이 아이가 바로 어린 시절의 니체다. 신이라는 대답은 다른 생각을 막는 "조야한 금지" 다. 더 이상 사유를 계속하지 못하는 불성실함. 여기서 신이라는 대답이 나오며, 이것은 더 창조적인 사유, 모든 것을 회의에 붙이는 성실한 사유를 가로막는다. 그래서 니체와 같은 "사유가들의 구미에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당연히 무신론일 수밖에 없다.

무신론은 단순히 신을 믿지 않는다는 뜻에 한정될 수가 없다. 만약 무신론이 이런 뜻에 불과하다면 그건 무신론이 아니다. 신을 믿지 않을 뿐 다른 우상을 섬길 준비가 항상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정 무신론자라면 완전히 다른 문제에 흥미를 느껴야 한다. 진정 중요한 문제에. 바로 "네 힘의 극대화" 에, "허위도덕으로부터 자유로운 덕의 극대화" 에 어떻게 이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나의 능력과 에너지를 불필요한 곳에 허비하게 놔두지 않는 것. 그리하여 축적된 에너지로 나의 고양과 우월함을 낳을 수 있도록 사소한 일상적 삶을 챙겨가는 것. 어쨌든 척도는 자기 시간이고, 자기 자신의 상승이다. 자기 자신을 망각할 때 우리는 신이나 영혼불멸이라는 가짜 문제들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니체가 삶 속에서 찾아냈고 실천했던 "자기보존 기술의 걸작" 을 만나보도록 하자.

 

 

 

나쁜 식사를 금하라

정신은 "내장內臟"에서 나온다. 즉 먹는 것이 정신을 규정한다. 따라서 나쁜 식사는 나쁜 정신을 유발한다. 니체는 독일 요리 전반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식사 전이 수프, 푹 익은 고기. 기름과 밀가루가 범벅된 야채. (…) 여기에 옛 독일인들의 동물적인 알코올 마셔대기." 그래서 "독일 정신은 암담해진 내장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독일 정신은 소화불량이다." 니체의 독일 비판은 가차없다. 그런데도 니체의 철학이 독일의 파시스트들에 의해 오용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어떤 식사가 좋은 식사인가.

누구든 "자기 위의 크기를 알고 있어야만 한다." 너무 적은 식사는 적절하게 든든한 식사보다 못하다. 위 전체가 활동해야 소화도 잘 되는 법이다. "간식도 하지 말고, 커피도 마시지 말라." 왜냐. "커피는 우울하게 만든다." 그리고 차를 마시고 싶다면 아침에 약간, 그것도 강하게 마셔라. 어느 정도의 차를 마셔야 자신에게 좋은지 그 "경계는 종종 아주 좁고도 미묘하다." 그러니 자신의 몸을 늘 체크하면서 음식을 먹을 줄 알아야 한다. 나아가 정신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니체는 이보다 더 엄격한 식사법을 제안한다. 알코올을 무조건 금해야 한다. "물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서인지 니체는 흐르는 샘에서 물을 길어올릴 수 있는 곳을 선호했다고 한다. 니스나 토리노, 실스 마리아 같은 곳. 이것을 니체는 유머러스하게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개 한 마리가 내 뒤를 따르듯, 컵 하나가 내 뒤를 따라다닌다."

뭘 먹고 사느냐, 혹은 어떻게 먹고 사느냐. 이것은 신체의 건강뿐만이 아니라 정신의 건강에도 엄청난 영향을 준다. 그런데 나쁜 식사를 경과하는 니체도 이런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고 스스로 한탄했다. 왜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뒤늦게 알게 되었을까. 바로 가짜 문제들만이 중요한 것이라고 교육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니체의 표현으로는 "완벽하게 무가치한 우리네 독일적 교육만이, 독일 교육의 '이상주의'"가 주범이다. "이 교육은 총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소위 '이상적인' 목표들을 추구하기 위해서 애당초 현실을 보지 못하게끔 가르쳤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실 내 가장 성숙한 시기에 이를 때까지 언제나 나쁜 식사를 해왔다."

그런 점에서 나쁜 식사는 음식의 문제만이 아니다. 동물적으로 알코올을 마셔대는 것만이 나쁜 식사가 아니라 영혼에 나쁜 식사도 있는 것이다. 개인의 삶을 방기하게 하는 모든 이념들, 다시 말해 비개인적이어야 하고, 사사로움이 없어야 한다고 학, 이타적이어야 한다고 하는 것들도 영혼에는 나쁜 식사다. 한때 니체도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에게 매료되어 삶에의 의지를 부인하라는 언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먹고자하는 의지. 행복해지고자 하는 의지가 동일한 대상을 두고 다투기 때문에 세계에 고통이 생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의지를 철회하는 것만이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길이라 했던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영혼에 치명적인 식사인 셈이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 식으로 말하자면 신체의 능동은 영혼의 능동이며, 신체의 수동은 영혼의 수동이다. 영혼의 나쁜 식사는 신체의 나쁜 식사이기도 하다. 신체가 가볍고 발랄해지면 정신도 발랄해진다. "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신체를 발랄하게 만들라. 동시에 신체를 방기하게 하는 이상주의적인 개념들을 멀리해야 한다. 따라서 니체만의 식사법을 결론은 이렇다. "가능한 한 앉아 있지 말라. 야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생겨나지 않은 생각은 무엇이든 믿지 말라. 근육이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생각이 아닌 것도 믿지 말라."

 

 

 

 

좋은 풍토를 선택하라

어떤 점에서 니체는 풍수지리의 대가였다. 물론 풍수지리를 이론적으로 쫙 꿰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대기상의 습도의 변화를 측정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게 맞는 풍토에 대해 자신의 신체를 대상으로 오랫동안 연구했다. 풍토는 신진대사를 촉진할 수도 있고 방해할 수도 있다. 인간이 "어디서든지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소와 풍토를 잘못 선택하면, 아무리 좋은 성과를 내고자 해도 실패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특히 "자기의 전역량을 요청하는 위대한 과제를 풀어야 하는 자" 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훨씬 더 제한적일 것이다. 만약 풍토 선택에서 실패하면 "자기 자신의 과제에서 멀어지게 될 뿐 아니라, 아예 과제가 억류당하게" 될 수도 있다.

좋은 풍토는 인간의 동물적 활력을 활성화하고, 이에 따라 "가장 정신적인 것으로 밀려들어오는 자유"를 낳는다. 나쁜 풍토에서 나쁜 습관이 형성되고, 이에 따라 "내장의 태만"이 발생하면 "천재 한 명을 평균적인 자"러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니체의 독일 비판식으로 말하자면, 천재를 한 명의 "독일적인 자"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강하고 심지어는 영웅적으로 타고난 내장의 기를 꺾어버리는 데는 독일 풍토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서 니체는 독일을 떠나 "건조한 대기와 맑은 하늘"이 있는 곳으로 유목하는 철학자가 된다. 니체가 추천하는 곳을 보자. 파리, 프로방스, 플로렌스, 예루살렘. 아테네. 이곳의 공통점은 뭘까. "명민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또 존재했던 곳, 위트와 예민함과 악의가 행복을 이루었던 곳, 천재가 거의 필연적으로 자기의 안식처로 삼았던 곳" 이다. 이런 곳은 신진대사의 속도를 높여주고, 그래서 정신의 발을 활기 있게 만들어준다. 어마어마한 양의 힘을 늘 재공급해주는 곳이라 정신적인 일을 하는 자에겐 안성맞춤의 공간이다.

"정신의 발"이 무기력하다는 것은 정신의 신진대사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고, 이는 신체의 신진대사에도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이럴 때는 재빨리 풍토를 바꿔야 한다. 니체는 정신과 신체의 신진대사가 엉망이었던 곳으로 바젤을 꼽는다. 여기서 그는 "탁월한 역량을 완벽하게 무의미하게" 소모해버리고, "그 소모를 충당해주는 힘의 공급 없이" 계속해서 소모해버렸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바로 자신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신체와 영혼만이 독특한 섭생법이 필요한 법이다. 우리는 누구나 독특한 신체와 영혼을 갖고 있으므로, 그런데도 "누군가와 나 자신을 동일하게 설정해버리고, '이기적이지 않았으며', 나 자신의 차별점을 망각해버렸다는 것", 이것을 그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고 말한다.

니체는 바젤 대학을 그만둘 정도로 건강에 치명적인 상태가 도래했을 때 비로소 이성이 싹트기 시작했다. 자신이 얼마나 자신에게 해로운 방식으로 살았는지 깨달았던 것이다. 지금의 신체와 영혼으로 이 세계 속에서 구체적인 존재로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을 무시하고 오로지 남을 위해, 국가를 위해, 저편의 세상을 위해, 추상적인 다수를 위해 살아가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배우면 우리는 모두 병들게 된다. 바로 그런 이상주의 때문에, 자기 신체가 당하는 손상을 망각해버리고 살았던 시간, 그로 인해 "거의 종말에 처했을 때" 니체는 삶의 "근본적인 비이성성" 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병이 나를 비로소 이성으로 인도했던 것이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휴식을 취하라

노동이 축복이 된 시대. 그리하여 휴식이 오직 피로회복의 시간으로 전락한 시대에 사는 우리는 어떻게 휴식을 취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인지 대중매체와 자본의 유도에 의해 휴식은 일사분란하다. 차를 몰고 시외곽이나 먼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가족을 데리고 막히는 도로에서 놀이공원에서의 스릴을 떠올리는 것, 아니면 집에서 그냥 늘어져 있는 것,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휴식의 대표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휴식해보면 알겠지만 휴식도 마냥 쉬운 건 아니다. 지치기는 평일의 노동 만큼이다. 남과 똑같이 살아도 안 되지만 똑같이 휴식해도 안 된다. 휴식은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중요한 시간으로 삶의 여유를 확보해서 우리의 능력을 확장하게 하는 데 중요하다. 그렇다면 니체는 어떻게 쉬는 게 영리하다고 말하는가. 정신의 독특성마다 허락되는 유용한 휴식이 다르듯이 니체에게 휴식은 독서다. 그에게 독서는 "나를 내게서 떠나게 하고, 나를 낯선 학문과 영혼들 앞으로 산책하게 하는 것" 이다. 그런 점에서 독서는 여행이자 유목이다. 그렇다면 독서가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우리 시대의 계몽가들이나 니체나 모두 독서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는 것일까. 아니다. 니체는 독서를 휴식으로 여기지 본업으로 여기지 않는다. 본업처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니체는 "열심히 이에 몰두하는 동안에는" "어떤 책도 곁에 두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 독서라고 불릴 만한 것이리라."

아니, 독서하지 않는데 어찌 그것이 독서란 말인가. 니체의 참된 독서는 자기 자신의 신체와 영혼, 습속을 통해 자신의 병리적 요소와 건강한 요소, 자신의 한계와 능력, 존재의 변신 가능성 등을 탐색하는 고독한 일이다. 다시 말해 니체가 읽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 남의 책이 아니다. 자기 자신 속에서 탄생한 고유의 것만을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면 니체는 분명 명함을 내밀 수 있으리라. 자기 자신을 재료로 실험하고 연구하고 비전을 탐색하는 일, 이것이 니체의 철학이다. 그래서 니체는 일할 때 결코 책을 보거나 다른 사람과 얘기하지 않는다. "잉태 시에 정신과 모든 기관은 극도로 긴장해야 하는데, 여기에 우연과 온갖 종류의 외적인 자극이 격렬하게 영향을 미치고, 아주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것을 관찰해본 적이 있는가? 그래서 우연이나 외적인 자극은 가능한 한 많이 없애버려야 한다." 그러나 니체가 뭔가를 산출하는 시간은 얼마나 첨예한 긴장 속에서 이뤄지겠는가. 이 시간이 지나면 독서라는 휴식의 시간이 온다. "내게 오라, 너희 편안하고 영민하며 수줍어하는 책들이여!"

그렇다면 여기서 잠깐, 니체가 어떤 책들을 좋아했는지 알아보자. 그는 독일을 늘 비판했듯이, 독일 책들도 읽지 않았다. 대신 프랑스인들의 저서를 좋아했다. "나는 거의 항상 몇 권 안 되는 똑같은 책들로 도피하는데, 이 책들은 내게 합당하다고 입증된 것들이다." 그는 잡다한 종류의 책을 다독하는 것은 자신과 맞지 않았다고 말한다. 소설가 중에는 "진정한 라틴인"인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1893 과 니체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연에 속하는" 스탕달Stendhal(Marie Henri Beyle, 1783~1842 을 좋아했다. 특히 스탕달을 좋아한 이유는 "사실에 대한 파악력을 지닌 진정 귀중한 존재" 였기 때문이라고 한다.(참고로 니체가 질투한 스탕달의 위트가 있다. "신의 유일한 사과謝過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니체처럼 독일어를 예술적으로 구사하고 "신적인 악의"를 지니고 있었다는 서정시인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 도 있다. 또한 《파우스트》보다는 바이런의《만프레드》를 훨씬 더 높이 평가했다.(파우스트 운운하는 자들에게 니체는 해줄 말이 없고 단지 힐끗 쳐다볼 뿐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오로지 자신의 실재성만을 퍼내어 이용한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 오로지 사실을 보려고 한 "최초의 실재론자"인 베이컨Francis Bacon, 1651~1626 도 있다.

 

 

 

낭비하지 말라

"많은 것을 보지 말고, 듣지 말며, 자기에게 접근하게 놔두지 말것." 이것이 니체가, "자기보존 본능"이 내리는 명령이다. 인간의 삶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다시 말해 내가 섭취하는 게 나를 만들고, 내가 사는 곳이 나를 만드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나의 삶을 결정한다. 이 필연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힘을 낭비하지 않도록 삶의 조건을 배치해야 한다. 자기 보존 본능을 니체의 표현으로 바꾸면 "취향" 이 된다. 취향에 따라 보는 것이 다르고, 보는 양이 달라진다.

힘을 지출하지 않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주 작은 방어적 지출이라 하더라도 규칙적이 되고 습관적이 되면 엄청나면서도 전적으로 불필요한 빈곤을 유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한 번에 잃지 않는다. "지극히 자주 거듭되는 작은 지출들" 이 모여 "중대한 지출" 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를 방어한다는 것은 이미 지출이다. 시끄러운 음악을 싫어하는 데도 그런 장소에 계속 머무르고 있다면 그 음악소리를 저지하기 위해 내 신경에너지의 많은 부분이 소모될 것이다. 이렇게 "너무 부정적인 목적들을 위해 낭비되는 힘" 은 긍정적인 일을 위한 에너지까지 고갈시켜 버린다.

독일의 대도시와 같은 "축조된 악습이며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불모의 도시를 발견했다고 하자. 그곳에 있으면 "내가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시를 갖는다는 것도 일종의 낭비" 라는 사실이다. 부정적인 공간에 있으면 그 부정적인 것과 싸우느라 내 신체와 영혼의 능력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가시를 세우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 순간 축조된 악습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말테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아주 작은 방어적 지출이라도 피하기 위해서는 그런 공간에서 가능한 서둘러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취향을 더 고귀하게 만들 수 있는 공간으로 이동하거나 그런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너무 자주 반응해도 안 된다. 예를 들어 책을 읽는게 생각하는 일이라는 학자가 있다. 그는 "책을 뒤적거리지 않으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생각' 이란 뭔가. 바로 읽어가는 구절에 대한 반응에 다름 아니다. "그는 반응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지 못한다. 오직 "자기의 전 힘을 기존의 사고들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데에 다 쏟아 붓는다." 이때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자기 방어본능이 약할 대로 약해져버리고 만다." 반응하는 기계가 될 뿐 창조적인 사유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독서만 하는 사람은 "성냥개비" 다.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 즉 생각을 주기 위해서 누군가가 그어주어야먄 하는 성냥개비." 반응적인 생각들을 자기 고유의 생각이라 착각하는 성냥개비, 마찰 없이는 불꽃을 일으키지 못하는 성냥개비.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아침 일찍 날이 밝을 때, 모든 것이 신선할 때, 자기 자신의 힘이 아침놀을 맞을 때,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것, 이것을 나는 못된 습관이라고 부른다!"

영양섭취, 풍토, 휴식, 힘의 보존과 지출과 같은 것들은 사소하다면 아주 사소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제껏 중요하다고 받아들여졌던 모든 것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니체를 통해 "다시 배우는 일" 을 시작해야 한다. 지금까지 배웠던 것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해로운 것은 아닌지 다시 배워야 한다.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배워야 한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배우는 법' 마저 잘못 배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다시,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배우는 법마저 니체에게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