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인생
2013년 11월 28일에 내린 눈
우주의 모든 운행에는 차서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사계절의 차서다. 우주는 매년 어김없이 이 차서를 밟는다. 하지만 동일한 반복은 아니다. 돌아오되 늘 다르게 돌아온다. 차이 속의 반복! 이 '생생불식'하는 활동을 일러 순환이라고 한다. 순환이야말로 생명의 원동력이다.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에서
- 김형석 전 연세대학교 교수『인생 사랑의 나무를 키워가는 것』에서 -
산다는 것의 의미
김형석 우리 시대의 진정한 원로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평남 대동군 출신으로 일본 상지대학 철학과를 졸어바고 1954년부터 1985년까지 30여 년간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동안 미국 시카고 대학과 하버드 대학의 연구교수를 지냈고 국내 여러 대학에 출강했다.
저자는 전공인 철학분야의 저서 외에도 <영혼과 사랑의 대화>, <인생, 소나무 숲이 있는 고향>,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 <한 사람의 이야기> 등의 인생의 지혜를 담아 낸 주옥같은 저서를 통해 독자들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고 많은 교훈을 남겨주었다.
저자는 "나는 다른 사라들에 비해 오랜 세월을 넓게 살아오는 동안에 많이 배우기도 했고 깨닫기도 하였다. 그런 우리 모두의 인생의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적어 본 삶의 기록들" 이라고 이 책을 표현하였다. 이 책에는 "인생의 자각을 갖기 시작해서부터 앞으로의 인생의 완성을 기약하기까지 우리 생애의 과제들이 모두 담겨져 있다."면서 독자들이 소중한 자신의 인생을 한층 더 귀하게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책을 쓸 때 독자들과 대화하듯 썼다는 김형석 교수는 책을 통해서 진실 되고 보람 있는 대화의 장이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결혼은 왜 하는가
사랑을 완성시키려는 인간애,
결혼은 그런 사랑의 결합인 것이다.
그 사랑에는 아름다움이 있고
연애의 꽃을 열매 맺게 하는 축복이 주어진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성년이 되면 누구나 결혼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결혼을 못 하는 사람은 있어도 안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늙도록 결혼을 못 하면 무슨 문제가 있거나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결혼이 하나의 선택 사항으로 바뀌었다. 여성들은 특히 직업이 확실하고 자립해서 살 수 있는 여건이 되면 결혼을 원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또 남성들도 가정의 책임을 감당하기 어렵거나 자유로운 생활을 위해서는 구태여 결혼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이런 추세대로 간다면 독신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자녀의 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인구의 증가도 감소될지 모른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한국은 2018년부터 인구 감소로 부동산 수요가 줄어들 거라는 일부 전문가들의 의견이 나오고 있다.
지금도 인구가 늘고 있는 나라들은 교육수준이 낮고 가난한 지역에 속한다. 교육수준이 높고 정신적 자유를 원하는 개성이 강한 사회일수록 결혼과 인구는 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감퇴되거나 이성 간의 연정이 약화되지는 않는다. 전통적 인습에서 본다면 본래부터의 결혼 관념에서 변질된 사랑의 공동체가 늘어나는 것이다. 이를테면 동거생활은 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는다든지, 우정을 포함한 애정은 갖고 있으나 부부가 아닌 동거 또는 별거를 하는 사람이 늘어날 추세이다. 대표적인 지성인들이 이성 친구로 사랑하며 사는 예는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또 반드시 부부 사이에 태어난 아기가 아니더라도 입양하여 키우는 일이 하나의 방법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그러나 유구한 세월에 걸쳐 결혼과 부부생활을 이어 온 전통적 위치에서 보았을 때 이런 사고와 변천 과정이 정당한 것일까.
아직도 그것이 차선의 길일 수는 있으나 최선의 방향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영국 왕실의 이야기들 자주 듣는다. 옛날 같으면 용납되기 어려운 사태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고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을 어떻게 하느냐고 인정은 하면서도 그것들이 최선의 길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더 좋은 가정에서 행복할 수도 있는데 그 정도(正道)에서 이탈하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보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변한다고 해도 결혼을 하여 해옥한 가정을 꾸며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것이 최선의 길이며 최선의 길은 다수가 선택해서 좋은 것이다.
일찍부터 '나는 독신주의자'라고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자유와 행복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혼할 필요는 없다든지 가정은 사라져 버릴 과도적 존재라고 공언하는 것은 더욱 마땅치 못하다. 더 많은 사람이 그 길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결혼과 가정으로 이어지는 사랑과 행복을 의도적으로 깨뜨리는 애정 행각이나 행위를 긍정하거나 예찬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자유로운 연애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혼과 가정에서 유지되는 자유, 사랑, 행복을 가볍게 보거나 의미가 적은 것으로 볼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 있는 결혼과 행복한 가정은 인류의 가장 값진 전통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결혼해 보라. 후회할 것이다. 하지 말아 보라. 그래도 후회할 것이다.'는 셰익스피어의 말이다.
한때는 우리 주변에서도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다.'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연애론자의 말이었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결혼은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며 가정적인 부담은 행복을 빼앗아 간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 그렇다고 결혼을 안 하게 되면 어떤가? 남들이 누리는 행복과 사랑의 보금자리 밖에서 사는 것 같은 아쉬움이 평생 뒤따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유롭고 행복할 수만 있다면 결혼해도 좋다는 결론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노력이나 사랑의 봉사가 없이 자유와 행복을 원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사랑은 더 많은 자유와 행복을 만들어준다는 믿음으로 더 많이 노력하는 사람만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결혼 때문에 자유로운 연애생활이 깨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꽃을 즐기기 위해 열매를 맺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연애가 진정한 인간적 사랑을 동반한다면 결혼은 자연스러운 과정이 된다. 문제는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결혼의 중심 조건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결혼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결혼으로 이어지는 사랑이 어떤 것인가가 문제이다. 원시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결혼의 전제조건이 되는 사랑은 애욕과 연정이 그 원천이 되어 왔다. 그리스 신화의 뜻을 따른다면 인간은 본래 양성(兩性)을 갖춘 완전한 존재였는데 신들이 인간의 우수성을 질투해서 완전한 인간을 반으로 쪼개 한쪽은 남자, 한쪽은 여성으로 만들어 분리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매는 동안은 신들보다 앞서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그리움과 연모의 정, 그것이 결혼의 원동력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 반쪽과 결합하지 못하는 동안은 방황, 갈등, 고독, 애모의 정을 갖고 산다고 한다.
그런 욕망과 기대를 채우기 위해 결혼을 하고 나면 오히려 후회와 고통이 뒤따르는 경우가 있고 결혼하기 이전보다는 부자유와 피로의 짐을 져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결혼에 대한 회의도 갖게 되며 이혼의 길을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혼 자체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결혼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결합한 부작용이다. 마치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등산복을 입고 산 밑에 서게 되면 정상에 오르는 행복과 정상에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혼은 등산을 하는 동안 부부의 애정이 더욱 돈독해지며 그 수고와 인내와 노력의 대가로 행복과 자유, 그리고 영광의 정상까지 오르게 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때의 사랑은 남녀이기 때문에 갖는 연정보다는 애정이며, 결혼 후의 애정은 인간적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혼은 정의 결합이다. 이때의 정은 애정이면서 우정이기도 하며 인간적 삶의 정인 것이다. 그 속에는 아름다움이 있고 위해 주려는 의지가 있고 사랑을 완성시키려는 인간애가 포함되어 있다.
결혼은 그런 사랑의 결합이다. 그 사랑에는 후회가 없고 연애의 꽃을 열매 맺게 해준다.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보자. 우리 주변에서 어떤 사람들이 결혼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는가.
옛날에는 철들기 전에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결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10대 중반이나 후반에 결혼한 이들이 있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혼을 했다. 사랑의 책임과 의무를 모르면서 결혼을 했고 사랑을 키워 갈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조건으로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가정을 모범적으로 이끌어 간 부부도 있다. 결혼 후부터 사랑을 깨달았고 쌓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구라고 얘기하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널리 알려졌고 존경받는 목사님이 있다. 그분은 열세 살에 결혼했고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20년을 홀로 지내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가정을 영위했다.
우리 주변에는 연예인들의 결혼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이들이 있다. 지명도가 있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연예인들의 이혼이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까닭이다.
그들에게 비교적 이혼이 많다는 것은 연예인들은 직업상 일과 생활의 많은 부분을 정서적이며 감정적인 분야에 쏟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은 연예인들은 그 감정이 연정 즉 연모 및 연애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그때 감정을 잘 조정하지 못하거나 더 놓은 이성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면 감정의 갈등이 애정파탄을 초래한다. 감정은 언제나 기복이 심하며 지적을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그런 상황은 연예인이나 예술가들에게 있어 공통점이 많다.
그래서 예술인들의 이혼율도 다른 사람들보다 높다. 감정의 갈등을 극복할 만한 인간적 여유가 적은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또한 이혼까지는 안 가더라도 부담스럽고 어려움이 맣은 결혼생활을 하기 쉽다.
그러나 감정과 더불어 이성적인 사랑을 갖추면서 그 사랑을 인격적인 면까지 승화시킬 수 있는 결혼은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행복과 건설적인 사랑의 가정을 만들어 가게 되어 있다.
자녀들을 사랑으로 키워 가는 행복은 물론 이웃과 사회에 이바지하며 그 대가로 존경과 영광을 누리는 가정을 육성할 수 있다.
그 행복과 영광은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깨닫지 못하는 사랑과 행복의 길이다. 이때 무엇보다도 잘못된 것은 사랑과 결혼을 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일이다. 상대방의 재산을 탐낸다든지, 사랑보다도 상대방의 명예나 명성을 차지하려는 욕심은 삼가야 한다. 한 남성이 갖고 있는 지위나 능력을 인격 이상으로 평가하는 일, 어떤 여성이 갖고 있는 미모와 인기에 편승하는 결혼 등은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비록 그렇게 시작된 결혼이라고 해도 그 이상의 인간성이나 인격의 평가를 높여 가는 일이 병행되어야 한다. 사랑은 제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항상 더 선하고 값있는 위치로 승화될 수 있어야 행복과 감사의 터전이 될 수 있다.
이것들과 마찬가지로 옳지 못한 결혼은 사랑과 결혼을 즐거움의 수단으로 삼는 일이다. 만족과 쾌락의 수단으로 결혼을 한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보았을 때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실재에 있어서는 그런 사레가 적이 않다. 성을 즐긴다든지,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이고 싶은 욕망, 우리도 남 못지않게 행복하다는 꾸밈 등은 결혼으 조건도 못 되며 그런 결혼은 행복과 환희의 결실을 얻지 못한다.
결혼은 깊은 사랑과 더불어 인간적 성실성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라야 한다.
나의 선배교수 한 사람은 제자들의 주례를 맡게 되면 목욕을 하고 마음의 정리는 물론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결혼식에 임한다. 결혼 당사자들보다도 더 엄숙한 자세를 갖춘다.
우리 모두가 그런 심정과 자세로 결혼에 임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신랑은 내 아내가 부모와 가족 친지들의 극진한 사랑과 보호를 받으면서 지금에 이르렀고 이제부터는 그 사랑과 보호의 책임을 평생 동안 내가 맡게 된다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신부도 그런 기대와 사랑을 물려받아 훌륭한 남편과 가장으로 섬기겠다는 지성스러운 마음으로 결혼에 임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오랜 기간을 연애했다고 해도 결혼의 기간만큼은 길지 못하다. 그 길고 긴 세월을 동반자로서 서로 도우며 성장하고, 원만한 인품과 건설적인 사랑과 희생정신으로 자랑스러운 가정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 결혼이다. 결혼은 인생에서 가장 엄숙하고 유구한 인생의 출발이다.
아내의 행복은 남편을 믿고 존경할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높은 존경심이 신뢰와 행복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남편은 선한 의지와 신념 있는 자세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가야 한다. 아내의 믿음과 존경을 저버리는 남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남편의 행복은 아내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감정에서 나온다. 여성다움은 물론 사랑받는 아내의 길도 아름다운 감정에 있다. 아름다운 감정은 남편과 가정의 즐거움과 행복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감정이 아름다운 여성은 생활 자체가 아름다워지기 때문에 평생 동안 남편의 사랑과 아낌을 받는다.
젊은 남녀들은 결혼을 하게 되면 한동안은 둘만의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 가정의 문을 닫는 폐쇄적인 사랑을 원하게 된다.
그러나 그 기간이 길지 않아야 한다. 양가의 부모 및 가족들과 사랑을 나누며 기쁨을 주고받는 개방적인 가정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게 되면 이웃과 사회에 대해서도 개방적이며 더불어 살고 일하는 자세를 넓혀 가야 한다.
그것이 연애에서 결혼을 거쳐 사회로 향하는 가정의 길이다.
처음에는 사랑과 행복이 무엇보다도 그리워진다. 그러나 자녀들이 태어나고 이웃과 더불어 살게 되면 행복과 더불어 영광스러운 가정으로 발전하기를 바라게 된다. 주변에서 그런 실례를 항상 보게 되는 것이 사회에 대한 가정적 의미로 느껴지지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성공한 가정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 영광스러운 결혼과 가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무엇으로 이웃과 사회에 봉사했는가에 따르는 대가이다.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는 가정이 안으로는 기쁨과 밖으로는 영예스러움을 누리는 법이다.
이름 없이 자란 아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든지. 각고의 노력 끝에 세상에 널리 알려진 연주가의 딸을 갖게 되었다면 그 부모의 행복과 영광은 비할 바 없이 클 것이다. 물론 부부 중의 한쪽이 그런 인물이 되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지 않을까.
나는 어렸을 때 부친께서 남겨 주신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사람이 나와 내 가족만을 생각하면서 산다면 그 사람은 그 가정만큼 커질 수 있다. 같은 사람이 직장과 이웃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직장과 지역사회의 지도자만큼 자라게 된다. 그러나 항상 민족과 국가를 위해 애쓰는 사람은 그 민족과 국가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의문을 갖게 된다.
결혼에도 어떤 목적이 있는가 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모두 결혼을 하니까 나도 하게 되고, 또 결혼하고 싶은 욕망이 있으니까 결혼을 한 것뿐이지 결혼에 무슨 목적이 있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할 것이다.
작은 일에도 목적은 있게 마련인데 결혼은 같이 중대한 일에 목적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오직 그 목적이 너무 당연하고 큰 것이기 때문에 잊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를 들면 행복도 그 하나의 목적이며, 사랑 자체의 성장이 곧 목적일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홀로 있던 남녀가 결혼을 한다는 것은 가정을 가진 사회인으로 인생에 주어진 값있는 일을 하겠다는 출발을 뜻한다. 결혼을 하기 전에도 주어진 일이 있었지만 결혼을 한 후에는 가정적인 책임과 더불어 그 주어진 임무에서 성공과 영광을 누리겠다는 것이 더 확고해졌음을 누구나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결혼은 할 자격을 갖춘다는 것 자체가 그런 일과 일에 따르는 보수로 가정적 생활을 책임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의 협조와 조언을 얻어 더 값있고 보람 있는 일에 헌신하게 되고 아내는 남편의 뒷받침을 받아 더 많은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선진사회에 가면 부부 모두가 일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단지 사회에서 남자의 일과 책임의 비중이 더 크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가정에 있어서는 그 비중이 반대로 여성에게 더 많다. 그러나 자녀교육이 여성만의 책임이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도 지금 선진사회와 같은 시스템으로 발전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일의 범위가 넓어졌을 때를 생각해 보자. 국제적으로 활동하면서 돌아다니다가도 가정으로 돌아와 안식을 얻고 온 가족들이 멀고 가까운 곳에 흩어져 일하다가도 집에 돌아와 재출발의 힘과 의지를 다짐하게 된다. 곧 밖에 나가서는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안식을 취하는 것이 결혼과 가정의 일이다.
동양에서는 가정(家庭)이라는 한자를 써왔다. 집은 머무는 곳이고 뜰은 일하는 곳이다. 농경사회의 결혼은 함께 살면서 일하는 성인 자격을 갖추는 것이었다. 지금은 집의 공간은 마찬가지이지만 일터로서의 뜰은 크게 넓어졌다. 직장과 사회가 일을 위한 공간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일터를 찾아 집을 옮기거나 일이 다르기 때문에 한 집에 살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주말부부라는 말도 있으나 남편과 아내가 다른 나라에서 일하는 가정도 있다. 남편은 미국에서 아내는 한국에서 일하는 가정들도 있고 남편은 한국에 아내와 가족은 미국에 있는 가정도 많이 있다.
결혼은 더 보람 있는 일을 위한 사랑의 결합이었던 셈이다. 일의 대가는 사회적인 보람을 안겨다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혼의 가장 큰 목적의 하나는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는 일이다. 그것을 결혼의 열매이면서 가정의 발전인 것이다.
간혹 자녀를 갖지 못하는 부부가 있더라도 자녀를 입양하여 키우는 것이 가정의 행복과 결혼의 목적을 성취시키는 길이었다.
우리는 혈연사회를 이어 왔기 때문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고 있지만 앞으로는 자녀를 키움으로써 부모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곧 결혼의 의무임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는 때가 올 것이다.
그것은 결혼의 뜻을 성공으로 이어가는 필수적인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인생의 6가지 단계
어려서 남달리 고생을 하면서 자랐다.
심한 가난, 병약한 체질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축복의 선물이 되었던 것이다.
대나무가 자랄 때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알차고 단단하게 자라야 한다. 여러 마디 중의 한 마디가 병들거나 약하게 자라면 후에 그 마디 때문에 대나무가 부러지고 결국은 나무 구실을 못 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과 젊은이들이 한두가지 실수 때문에 인생 전체를 불행으로 이끄는 예가 많이 있다.
나는 오래전에 훌륭한 교육자로 존경받는 지도자가 '우리 얘는 군에 가기는 했지만 고생은 하지 않고 있어요. 사단장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가르치는 일도 하고, 전방에 가도 관사에서 살림을 하기 때문에 집에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없어요. 원하면 휴가를 얻을 수도 있고…….'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내 아들을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 마음을 썼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교육의 뜻은 어떻게 되며 그 아들의 장래에 손해가 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한 여대생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사내가 군에 갔으면 군인답게 씩씩한 능력을 발휘해야지 파출부 노릇을 할 바에야 무엇 때문에 군대에 가나…… 사내답지 못하게……,'라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우리 모두 이런 상식 밖의 과오를 범할 수가 있다. 아버지와 본인 모두가.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성장 과정에 따르는 최선의 선택과 노력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물어보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그 젊은이는 좋은 부모 밑에서 잘 자랐고 학교 성적도 양호했지만 가장 소중한 군대생활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인생 전체를 실패로 이끌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학생 때는 최선의 학생이 되고, 군에서는 가장 모범적인 군인이 되며, 직장에서는 누구보다도 성실한 일꾼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어갈 확률 또한 높다.
이 경우에 선행되는 필수적인 과제는 자녀보다는 부모가, 제자보다는 스승이 본인들보다 먼저 지녀야 할 교육적 책임이다. 우리 모두가 자녀와 제자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모든 부모의 선생들은 자녀 및 제자들을 대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두 가지 책임이 있다.
그 첫째는 유년기 및 소년기에 있는 어린이들에게는 절대 정직을 요청하는 일이다. 다른 일에 있어서는 모르지만 정직에 있어서는 절대적이어야 한다. 정직은 사회적 신뢰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겠다.
오래전 청소년들을 위한 역사책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로마와 카르타고가 그 당시 세계 지배권을 놓고 패권을 가리던 때의 일이다. 로마의 군인들 중 소년병들이 포로가 되어 적군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때 안 로마의 소년군이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적군의 감시장교를 찾아와 간청을 했다.
'여기 있는 제 친구의 어머니가 병중에 계시던 중 점차 병세가 악화되어 위독하신 상태라 합니다. 3일간의 휴가를 허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카르타고의 책임장교는, '너희가 나를 조롱하는 모양인데 내가 휴가를 준다면 네 친구는 필시 탈출해버리고 말 터인데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 허락할 바보가 어디 있겠느냐.'며 한마디로 일축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 소년은 '저희는 어떤 약속이든 한번 한 약속은 목숨을 걸고 지킵니다. 제 친구는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거짓말을 한 적도 없습니다. 제가 대신 책임을 지겠습니다.' 하고 간청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장교는 '그렇다면 내가 3일간의 휴가를 내주도록 하마. 대신 3일째 되는 날 해가 질 때까지 네 친구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대신 네가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교의 말을 들은 두 소년병은 서로 얼싸안으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교는 '내가 너희의 얄팍한 간계를 모를 줄 아느냐.'며 비웃으면서도 휴가를 내주었다.
이윽고 소년병의 친구가 떠나고 나서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오후가 되고 땅거미가 질 무렵이 되어도 그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드디어 해가 서산에 기울자 그 책임장교는 '이제 곧 너희가 약속한 시간이다. 네가 말한 대로 네 친구가 돌아오지 않으면 너는 마땅히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다.'라며 소년병을 교수형틀에 세워놓았다. 그러자 그 소년병은 '제 친구는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만일 시간이 늦어 제가 죽은 후에라도 제 친구가 돌아온다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며 담담하게 장교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때 저 멀리 언덕 밑에서 한 소년병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곧 형장에 다다른 소년병이 말했다.
"뱃길에 풍랑을 만나 조금 늦었습니다. 약속한 시간까지 도착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뛰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장교는 처연하게 말했다.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너희가 한 것이다."
고맙다는 말을 남기며 두 소년병이 막사로 돌아가자 장교는 발걸음을 뒤로 하며 말했다.
"로마는 영원히 흥할 것이다. 저런 소년들이 자라 이끄는 로마가 어찌 망할 수 있단 말인가?"
옛날 어느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그런 청소년들을 키워나갔던 로마가 영원할 수밖에 없었다는 부러움 때문이었다.
또 하나 우리도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잘못이 있다. 폭력이 악이라는 생각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학교교육에서 그 잘못을 추방해야 한다.
우리는 학생 및 청소년들의 폭력 사건을 크게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먼저 반성해야 할 사람은 우리들 자신이다. 언젠가 신문에서 학교장이 교사를 폭행했다는 보도를 접한 일이 있다. 그 매 맞은 교사는 제자들에게 폭력을 가하기 쉬워진다. 언제나 맞고 자란 사람이 때리면서 살도록 되어 있다.
매 맞는 아내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더니 매 맞는 남편도 있다고 한다. 하기야 부모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심지어는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세상이 아닌가.
사랑의 매는 교육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사랑의 권고와 노력이 한계에 이르렀을 대의 일이기 때문에 사랑의 매가 정당화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리고 그때에도 최선의 방법으로 택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간혹 TV에서 보면 선생은 무조건 학생들에게 책망에 가까운 '하라, 하지 말라'는 말을 쓴다. 개인적으로는 용납될 수 있고 친밀감이 생길지 모르나 교사는 전체 학생들에게는 존댓말을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존댓말은 폭력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나 자신도 평생을 교육계에서 보냈지만 감정적인 책망이나 폭력은 대개 학생들의 잘못보다는 나 자신의 부족에 기인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때의 자괴감은 큰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폭력배가 사회적으로 죄악의 존재이듯이 국회에서의 폭력 사태와 정치적인 폭력도 죄악이라는 관념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인권운동이 강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 핵심이 되는 것은 폭력의 추방이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개인과 사회에 있어 폭력은 죄악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M. 간디의 정신을 '모든 거짓과 폭력은 사라지나 진실과 사랑은 영원히 남는다.'는 뜻으로 대신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자라고 살기 위한 기본적인 가치관의 하나는 거짓과 폭력을 배제하는 것이다.
건전한 인생과 성공적인 생애를 위해서는 젊어서 고생을 할 필요가 있다. 비교적 일찍부터 고생했다고 해서 손해될 것이 없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녀들은 여행을 시키라는 말이 있고, 젊었을 때의 고생은 금을 주고도 사지 못한다는 격언이 있다.
우리 시대의 많은 청소년들이 그러했겠지만 나는 어려서 남달리 고생을 하면서 자랐다. 심한 가난도 겪었고 병약한 체질로 어려움도 겪었다. 일제시대의 사회적 여건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축복의 선물이 되었다. 간난했기메 빈곤에 동참할 수 있었고 경제적 가치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병약했기 때문에 무리 없이 조심할 수 있어 오늘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시대적 역경을 치렀기 때문에 민족에 대한 공감과 사회의식과 역사관을 갖출 수 있게 된 셈이다.
나는 지금도 이런 고통과 시련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었다.
사람은 일생에 걸쳐 한 번은 고생을 해야 인간다운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다. 늙어서 고생하면 인생이 비참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장년기에 고생하는 사람은 한창 일할 나이에 일을 못 하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그래서 고생을 할 바에는 젊어서 고생하는 것이 귀하다. 그렇다고 일부러 고생을 위한 고생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가장 적은 돈을 갖고 가장 어려운 일에 도전해보라는 뜻이다. 돈도 내 손과 땀으로 벌어보는 습관을 가지며 육체적인 노동과 기술에 전념해 보기도 하며, 어려운 인간관계를 극복하면서 여행도 해 보고 땀 흘리는 봉사생활에도 임해 보는 것은 참으로 귀하다.
이런 고생과 어려움을 겪고 극복한다는 것은 일생 동안 인내와 용기를 갖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또 한 가지 청소년기에 겪어야 할 과제는 봉사의 경험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정신적 선진사회로 가기에는 어려운 과업이 한둘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는 윤리성의 회복이며 도덕적 가치의 확립이다. 가치관의 혼란과 실종이 온갖 사회부조리와 모순을 만들고 있다. 건설적인 가치관을 창출해 내지 못한다면 정신적 혼란을 극복할 수가 없다.
이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 목적관을 확립하는 일이다. 생명의 존엄성은 물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궁극적 목적은 인격과 인간성에 있음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으뜸가는 정신적 가치는 홍익인간의 정신이다.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섬기는 일보다 귀한 것은 없다.
우리나라에세도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을 끝낼 때까지 모든 교과서에 인간애와 인간 목적의 정신을 깔아 주어야 한다. 그보다 더 고귀한 가치관의 설정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온갖 도덕과 종교의 목표이기도 하다.
이러한 뜻을 위해 구체적인 교육의 하나가 되는 것이 봉사의 실천이다. 특히 청소년기의 봉사 체험은 일생 동안 잊을 수 없는 선한 생활의 원동력이 된다.
봉사의 체험을 한 사람은 남을 돕거나 위해 주는 일은 못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는다. 한때 국방 관게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기 특히 중고등학교 때 봉사 경험을 한 젊은이는 군에 와서 부도덕한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통계를 본 일이 있다.
선진사회의 가정과 학교에서는 청소년기 동안에 봉사생활을 체험하도록 이끌어주어 대학 입학에 중요한 조건의 하나로 삼고 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는 사람은 자기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불행한 친구와 이웃을 위해 봉사했을 때 얻는 기쁨은 다른 데 비할 바가 아니다. 봉사는 윤리와 도덕심을 바로잡아 주는 가장 중요한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최근 우리 주변의 한 회사에서 중견 사원들에게 불행한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는 기관에서 봉사 체험을 실시한 일이 있었다.
거기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게 직장에서 일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삶의 보람을 느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노조나 근로자들도 투쟁에 앞서 봉사의 경험을 할 수 있다면 더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평생 동안 봉사의 기쁨과 행복을 모르고 살았다면 그들은 인생의 소중한 알맹이를 놓치고 산 결과가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젊었을 때 겪어야 할 또 하나의 과제가 있다면 여성에게 있어서는 아름다운 감정과 정서이며, 남성은 용기와 희망을 갖는 일이다. 남자라고 해서 세련되고 조화로운 정서가 불필요한 것도 아니며 여자이기 때문에 용기와 희망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성의 구별을 가릴 필요 없이 이 모두는 필요하다. 그러나 여성들의 아름다운 삶과 남성들의 성공적인 장래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가려 보아도 좋을 것이다.
여성들의 인생을 통해 가장 값있고 소망스러운 것은 아름다운 삶이다. 그러기 위해서 아름다운 감정은 필수적이다. 감정이 아름다운 여성은 생활 자체가 아름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생활이 가정의 행복과 사회의 조화로움을 더해 줄 수 있다.
용기가 없는 젊은이가 있다면 그의 삶과 장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마치 심장이 멎은 생명체를 연상케 할 정도이다. 용기는 희망을 낳고 희망은 용기를 일깨워 준다. 희망이 없는 곳에는 용기가 자라지 못하며 용기가 없는 희망은 망상이나 공상에 그친다. 그래서 젊음과 용기는 인간적인 삶의 본래적인 것이다. 희망과 목표가 없는 용기는 욕망은 될 수 있으나 용기가 아니다.
욕망의 발로를 우리는 만용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용기를 갖고, 동물은 욕망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인간다운 용기는 결코 만용이어서는 안 된다. 만용이 용기가 되기 위해서는 사고가 공존해야 하며 생각이 동반하는 의욕을 진정한 용기라고 부른다. 모든 젊은이들은 욕망 위에 지적 사고를 곁들이며 그 용기를 갖고 희망에 도전해야 한다.
사업가, 정치가, 군의 지휘관, 혁명적인 인물들은 남다른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 용기에 지적 판단을 더했기 때문에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대신 학자, 사상가, 예술가 등은 지적 신념이 남보다 강해야 한다. 그 위에 용기를 가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신적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 둘을 적절히 갖출 수 있을 대 우리는 만용에서 진정한 용기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우리 시대에서 가장 용기다운 용기를 갖추었던 인물은 영국의 W. 처질이었을 것 같다. 그런 용기를 모방하고 따르는 젊은 시절을 보내자는 권고인 것이다.
만용이 없는 젊은이는 적지만 진정한 용기를 지닌 젊은이는 더욱 드문 것이 현실이다.
용기를 주축을 삼는 젊은 시절이 끝나면 장년기가 찾아온다. 언제부터를 장년기로 보는 것이 옳은가. 넓은 은 의미의 학습과 성장기를 장년기로 보기는 이르다. 사회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해서 그 일이 어떤 질적 한계에 도달하는 기간을 장년기로 보자. 장년기는 일의 기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년기는 30대에 시작해서 50대 말까지 계속되는 비교적 긴 기간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어떤 이는 60세를 넘을 때까지 같은 일에 열중할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30세부터 30년이면 현대인의 대부분이 일의 기간인 장년기를 산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장년기는 길면 길수록 바람직하다. 그만큼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일을 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면 장년기는 일을 통한 성공과 영광의 기간이어야 하며 60세를 넘기는 사람의 대부분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보다는 장년기의 일을 연장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장년기에 갖추어야 할 가장 소중한 과제는 무엇인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생에 대한 신념이다. 이때의 신념은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사회적 활동에 대한 신념이어야 한다. 적어도 뜻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역사 및 사회적 신념을 갖출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의식과 역사관도 배제할 수 없다.
신념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사는 사회와 역사적 현실 속에서 어떤 가치판단을 갖고 살며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 신념에 따라 삶의 방향과 일의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이때의 신념은 본인 및 사회적 윤리관과도 통하는 것이다.
여기에 모든 사람은 두 가지 확신을 갖고 장년기를 보내야 한다. 그 하나는 삶과 일에 대한 도덕적 신념이며 다른 하나는 내가 하는 일의 사회적 가치와 의미이다. 일의 목적관인 것이다.
도덕적 신념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과 사업을 통해 좀 더 가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간다는 뜻이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구현하는 일이며 불의를 배제하면서 정의로운 삶을 넓혀가는 노력이다. 언제나 진실을 추구해 가는 정신이다. 상황적이며 일시적인 것들을 멀리하면서 본질적이며 영구한 가치를 높여 가는 삶을 개척하는 일이다.
좀 더 묶어서 간단히 표현한다면 온갖 무가치하며 덜 필요한 것들을 멀리하고 새롭고 근원적인 가치를 창출해 내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그런 선택과 정진이 이어지는 동안 역사는 발전하며 사회는 새로운 건설을 계승해 갈 수가 있다.
만일 우리들 가운데 진실을 허위로 둔갑시키고 정의보다 불의를 따르며 선을 악으로 후퇴시키는 생활이나 일을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인격은 물론 그에 따르는 사회악의 책임을 모면할 길이 없어진다. 그가 정치에서 권력을 장악했고 기업에서 성공했다고 해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삶을 살았을 뿐이다. 작은 선은 큰 악보다 귀하며 고통스러워도 진실을 택하는 것이 허위를 즐기는 것보다 존경받아야 할 삶이다. 성공이란 선의 실천이지 악의 승리가 아니다.
장년기에 갖추어야 하는 두 번째 신념은 일과 사업의 목적의식을 뚜렷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모든 일의 목적은 나를 위한 소유와 향락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면 된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사회에서 버림받는 이기주의자로 그치고 만다. 사회에서 버림받는다는 것은 역사적 의미를 거역한다는 뜻이다. 일을 이기적 목적으로 돌리는 사람은 사회와 역사에 오명을 남길 뿐이다.
일은 왜 하는가. 이웃과 사회에 값있는 유산과 유업을 남겨 주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하는 일 때문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며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일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이때 조심해야 하는 것은 선한 방법에 따르는 목적이다.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쓰더라도 성공만 하면 된다는 사고는 대단히 위험하다. 그 수단과 방법이 또 하나의 악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어떻게 수단과 방법을 앞세우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겨 나갈 수 있는가?' 함은 존경받을 만한 정신적 자세와 신념이 될 수 있다.
언제부터가 노년기라고 일률적으로 지적할 수 없다. 그러나 장년기가 끝나면 우리 모두는 노년이 된다.
노년이 된다는 것은 가정에서는 윗사람이 되는 것이며 직장과 이웃 사이에서는 선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어른이 되는 책임이 있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많은 노인들은 주어진 윗사람, 선배, 어른의 책임을 도외시하거나 멀리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주어진 인생의 의무와 권리를 포기하는 또 하나의 무책임이다. 사회는 여러 연륜과 성장 단계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노인들에게 주어진 역할은 중요하다. 노령인구는 많아지고 그 노인들이 주어진 책임을 소홀히 한다면 어떻게 좋은 사회로 발전할 수 있겠는가.
가정에서는 하는 일 없이 보호와 존경을 받기 바라며 후배로부처는 도움과 존대를 기대하면서 주는 바 없이 산다면 노년기의 본분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더욱 우려되는 것은 청소년들과 젊은 세대들이 효도도 하지 않으며 어른들을 공경하지도 않는다고 불만과 불평은 털어놓는 것이다. 그들에게 선한 모범을 보여주지도 못하며 정신적 도움도 베푸는 바가 없다면 우리 사회의 건설적인 성장에 지장을 주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노년다운 노년기, 존경받는 노인들이 되기 위해 자성과 책임감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대나무의 마디마디가 자기 구실을 해야 한다면 노인들에게는 노인들이기 때문에 갖추어야 할 과제와 덕목이 있다.
우리는 그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을 지혜라고 생각한다. 젊은이에게는 용기가 있고 장년에게는 신념이 있어야 하듯이 노인에게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여러 사람들을 대해 보았고 일을 통해 사리를 깨달은 바가 있다면 거기에서 얻은 유산으로서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 지혜를 보여주며 나누어 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소망스러운 것이다.
가정에 있어서는 내가 살아보았더니 그런 경우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되더라는 교훈이 필요하며, 후배들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이 가장 귀한 것같이 생각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값있는 일들은 사회가 공정히 평가해주는 것이라는 식의 지혜를 알려 주어야 한다.
젊은 세대들이 예절이 없고 어른을 위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앞서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예절 바르게 대하며 모두의 직업과 맡은 책임을 통해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생활이 중요하다고 일깨워 주며 가능하다면 그런 모범을 보여주는 지혜가 아쉽다. 어른들의 존대와 칭찬과 감사를 체험하는 사람들은 선배와 후배에 대해서도 같은 존경과 감사의 뜻을 느끼며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보통이다. 욕을 먹는 사람은 남을 욕하지만 칭찬을 받는 사람은 남을 칭찬하는 것이 사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노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로운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 노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노인은 존경을 받게 되며 백발이 영광이 된다는 뜻이 채워지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유종의 미가 있어야 하며 인생에도 유종의 미와 값이 있어야 한다. 그 유종의 뜻을 지혜로운 생각과 행위에서 보여 줄 수 있다면 우리는 노년기의 사회적 삶까지 책임질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