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기쁨
보통 찔레꽃은 5월에 핀다. 올해는 유독 더 늦게 바위에서 뜨거운 열기도 견디며 하지부터 핀 찔레꽃
"고정된 정답은 아무것도 없다" 것 처럼 주변의 모든 것들은 공부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내일은 우리가 어제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웠기를 바란다 - 존 웨인
30년간 공부한 어느 지식인의 자기 성찰
- 김병완 지음 『 공부의 기쁨이란 무엇인가 LEARN 』에서-
"끝까지 공부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즐기는 것뿐이다."
김병완
저자는 1970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대건고등학교와 성균관대학교를 졸업. 삼성전자 연구원으로 11년 동안 재직했다. 현재는 부산에서 집필과 공부하는 삶에 전념하고 있다. '자신을 뛰어넘는 참된 공부의 길'을 묵묵히 걷고자 실패를 즐기고 한계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자는 '세상에 가치 있는 책을 많이 내놓는 것'이 소바한 목표이자 최종 꿈이라고 한다.
공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던지다
공부의 어원은 어디서부터였을까
'공부'라는 말은 인류 역사상 누가 가장 먼저 사용했을까? 공부의 유래와 어원은 사실 여러 가지다.
먼저 한자어를 기초로 하는 중국에서의 어원을 살펴보면, 현재 사용하는 공부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중국에서는 '공부工夫'가 노동자들을 지칭하는 대명사였다. 즉 임시 고용 노동자를 공부라고 부른 것이다. 광산에서 광물을 캐는 사람을 '광부鑛夫'라고 쓰는 것이나 막일꾼 같은 인부들을 '잡부雜夫'라고 칭하는 것과 비슷했다. 또 다른 의미로 공부들에게 허용된 시간이나 짬을 가리키기도 했다.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사내 부夫자를 사용한 것을 보면 일꾼을 지칭하는 용어였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 그러다가 점차 단어의 뜻이 변하여 송나라 이후부터는 솜씨나 노력 등을 의미하는 말로 굳어져서 사용되었다. '수마공부水磨工夫' 의 의미는 '세밀하고 정교한 솜씨'를 말하며, '용공부用工夫' 혹은 비공부費工夫'라고 하면 '시간과 노력을 들이다' 등의 의미로 현재 중국에서 사용하고 있다. 공工자는 지금도 견습공見習工, 인쇄공印刷工 등으로 사용한다.
좀더 확장해 '노력하다' '수고하다' 같은 뜻에 한자 '공功'을 쓰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그 단어의 의미가 우리나라에서 정의하는 '학문의 기술을 배우고 익힘' 과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중국의 오랜 서책에는 공功이나 공工을 모두 사용해 비슷한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꽤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예기》의 <학기>편에는 "학문을 잘하는 사람은 마치 목수가 견고한 나무를 다듬듯 먼저 쉬운 부분부터 했다가 점차 어려운 부분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학문을 잘한다는 의미로 '공견功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가난한 처지와 형편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공부해 이룸을 뜻하는데 이 역시 공功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용》에는 '백천지공百千之工'이라는 말이 나온다. "남이 한 번에 능히 하면 나는 열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능히 하면 나는 천 번을 한다. 그러므로 배우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만일 능하지 못하다면 절대 배움을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의미다. 여기서도 역시 공부의 공工자와 같은 뜻을 사용하고 있다.
정확히 어떤 견해와 글자가 더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선례들이 모두 사용했음을 잘 알려준다.
어떤 학자들은 '쿵후功夫'라는 단어를 공부와 연관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현재는 중국식 무술을 지칭하는 말로, 우리가 알고 있고 또 알고자 하는 공부와는 별로 관련 없어 보인다. 사실 다양한 의미가 있다. 중국에서는 무술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숙달된 기술' '재능' '기량' '수완' 등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인다. 백과사전에는 이 말을 '중국에서 유래되어 세계 각지로 전파된 무술'이라고 정의한다. 이것만 봐도 한국에서의 공부는 쿵후와 다름을 알 수 있다.
이제 다른 관점에서 어원적 유래를 찾아보자. 공부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종교는 어디일까? 꼽으라면 단연 불교가 으뜸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수련에 전력을 다한다'는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요즘 흔히 언급하는 '마음공부' '인생공부'라는 뜻에서 시작되었다. 불교에서 현재의 의미와 가장 비슷하게 사용하는 '주공부做工夫'라는 용어 때문이다. 이 말은 '불도를 열심히 닦는다'는 뜻인데 특히 '참선參禪'에 진력盡力하다'는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 사력을 다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대충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불교에서의 주공부는 모든 힘을 다 기울여서 해야만 하는 것이다. 공부승工夫僧이라는 말은 지금도 사용하는데, 이는 '불경을 배우는 승려'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런 점에서 비춰볼 때 현대적 의미의 어원은 불교라는 것이다.
또 다른 견해는 주자학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 쓰이는 공부라는 단어의 의미를 맨 처음 주자학에서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주자의 현답을 집대성한《주자어류朱子語類》를 살펴보면 지금과 가장 근접하게 사용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배우는 자가 공부를 하는 데에만 마땅히 자고 먹는 것도 잊어야 한 단계 오른 공부를 할 수 있다"라고 했으며, "요즘 사람들은 공부할 때 당장 시작하려 들지 않고, 꼭 내일까지 기다렸다가 하겠다고 한다"라고 했다.
조선의 성리학자 조식이 엮은《학기유편學記類編》에도 "부귀하면 부귀한 대로 공부할 것이요, 빈천하다면 빈천한 대로 공부할 일이다"와 같은 대목을 통해서 공부에 대해 누누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공부를 '쿠후'로 읽는다. 흔히 아는 의미와는 조금 차원이 다른데 '무언가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즉 도통하기 위해 요리조리 이모저모 살피고 궁리한다'는 의미로서 사용한다. 실제 공부와 비슷한 의미에는 '면강勉强'이 있다. '공부벌레勉强蟲' 등으로 쓰인다.
한준상 박사의《생의 가痂 : 배움》이라는 저서에는 공부의 워원을 일본 검객의 수련에서 찾는다. 이야긴즉슨 이렇다.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가 수련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기름장수의 기름 따르는 솜씨를 보고 자기 검술의 부족함을 깨닫고서 "내 공부는 고작 기름장수의 공부에도 미치지 못하는구나" 한탄하며 다시 산에 올라갔다는 일화다. 이때부터 '공부가(검술 또는 기술 등을) 연마하고 익힘'이라는 듯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처음 살펴보았던 '공功'의 의미와 무관하지않을 것이다.
학습과 배움, 그리고 공부의 차이
공부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부와 가장 비슷한 개념들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개념들을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으면 그만큼 더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부와 비슷한 개념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학습'과 '배움'이다.
먼저 학습이란, 학교나 학원이라는 제한된 장소에서 학생들이 정형화되어 있거나 이미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교육과정과 교재를 통해 정해놓은 특정 교과목의 지식 혹은 기술을 습득하는 수동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반면 배움은 학습보다 좀더 자율적인 의미를 갖는다. 자료나 과목, 장소 등에 제한받지 않고 스스로 체득하는 능동적인 지식의 축적 활동을 뜻한다.
다시 말해, 학습은 어느 정도 고정적으로 일어난다. 반드시 가르치는 사람이 정해져 있어야 하고 장소가 있어야 하며 교육 교제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활동이 끝나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학습자의 신분이 아니다. 이것이 학습의 한계이며 제한적인 특성이다. 이러한 점에서 학습은 가장 협소한 의미의 일이다. 제한된 장소, 제한된 내용, 제한된 사람에 의해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움은 주체가 스스로 능동적으로 무엇인가를 배워나간다는 의미에서 학습보다는 좀더 광의적이며 외부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학습과 배움은 지식의 축적이라는 점에서는 다소 공통 분모를 보인다.
언어학적 측면에서는 교육학 용어로 학습을 패다고지Pedagogy, 배움을 안드라고지Andragogy라고 한다. 패다고지란 희랍어에서 '아동'을 뜻하는 paid와 '지도하다'를 뜻하는 agogy의 합성어로 아동교육을 의미하는 데 반해, 안드라고지란 '성인'을 뜻하는 andros에서 유래되어 성인교육을 의미한다. 전자는 미시적 측면, 즉 학과목 중심, 학교 중심, 교사 중심, 전일체 중심의 학습 특징을 가지지만 후자는 비구조적 측면, 즉 자율성, 능동성, 자기주도성, 경험과 현장 중심의 학습 특징을 띤다. 그렇다고 두 가지를 완전히 이분법적 개념으로 나누어 대립시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절충하면서 혼용하는 것이 현대 서양교육의 패러다임이다.
그러므로 학습과 배움을 학문이나 지식 혹은 기술의 습득 과정이라고 크게 정의한다면, 공부는 이 의미를 모두 아우르면서도 좀더 본질적인 삶의 양식으로 확장된 개념이라고 정의해야 한다. 학습과 배움은 교육 중심, 지식 중심, 개인 중심이며 공부는 인간 중심, 삶 중심, 관계 중심이다.
공부는 체계 중심의 학습과 습득 중심의 배움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변화와 성장, 그리고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와 세상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지식 습득은 절대 공부라고 일컬어서는 안 되는 첫 번째 이유다.
선인들은 공부하는 과정을 소위 '마음 수양'이라고 생각하며 삶의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여기까지를 공부의 전부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모든 것에는 쓰임새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실낙원》의 시인 밀턴의 말대로, 자연은 이미 자신의 몫을 다했다. 이제 여러분이 스스로의 몫을 해야 한다. 자연은 태어난 모습 그대로 자기 능력을 해낼 수 있는 만능한 존재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몫을 제대로 해낼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태어났다. 이는 곧 우리에게 공부의 이유와 목적이 되기도 한다. 본질적으로 부단히 항상시키고 종국에는 자신마저 뛰어넘어야 하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공부는 인간의 삶과 불가분의 관게가 형성되어 있다. 책이 없던 인류에도 지혜자들은 다양한 도구와 경험을 통해 어제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이것이 바로 공부의 모습이다. 이제는 놀라운 문자의 발명, 시시각각 쏟아지는 책들, 수많은 시청각 자료 등을 통해 더욱 쉽고 편하고 효율적으로 지식이 이어지고 있다. 시대의 변화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었고 삶의 모습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공부 역시 다양한 삶의 형태로 녹아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입학이나 승진, 자격증 취득과 같은 개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 의미가 전략해버렸다. 소기의 목적을 이루면 그것으로 공부의 이유도, 의미도 끝난다는 의식이 팽배해져 있다.
공부는 철저히 삶과 관계 중심이다
공부할수록 지식과 실력과 직위가 높아지는 게 아니라, 공부할수록 교만과 아집과 편견이 비워져서 인간관계가 좋아지고 삶의 가치들이 향상되어야 바람직한 공부다. 상처와 아픔은 저절로 치유되며 건강해진다. 공부할수록 이웃과 세상이 나와 하나 되는 관계를 경험해야 한다. 이것이 공부의 본질이다.
자연히 진짜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따스함이 느껴지고 인간다움이 느껴진다. 에리히 프롬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엇인가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은 갖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꼭 비움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찾고, 관계를 형성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활동을 계속해서 할 수 있다. 공부할수록 낮춰지고 겸손해지는 현상은 당연한 것이다.
독일의 언어철학가 홈볼트는 "모든 인간의 목표는 개인의 능력을 가장 고귀하고 조화롭게 발전시켜 모순이 없고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드높일 수 없다면 얼마나 가련한 인간이냐는 말이다. 공부는 고차원의 존재로 나아갈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활동이다.
또 공부는 철저하게 삶과 관계 중심이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과 소통하는 일이 필연적이다. 내가 아닌 우리여야 하고, 내가 먼저가 아닌 당신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공부할수록 많은 소통과 관계의 맺음이 이루어진다.
이제 대학만 보고, 승진만 보고, 성공만 보고, 물질만 보고, 권력만 보고 따라가는 공부는 공부라고 말할 수 없다. 이는 개인 중심이기 때문이다. 할수록 자신만 보이고 타인은 보이지 않는다.
참된 공부를 하는 사람은 결코 역경 앞에서 좌절하지 않는다. 나와 함께 관게 맺은 소중한 이들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참된 공부를 하는 사람은 결코 성공 앞에서 으쓱대지 않는다. 애초 성공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 자체도 관계 맺은 사람들의 도움 때문에 가능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참된 공부를 하는 사람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해야 할 일인지 하지 않아야 할 일인지 분별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참된 공부를 하는 사람은 어제나 행복하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소중함과 혼자가 아닌 공생의 관계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부는 자신과 타인의 관계 맺음을 통한 총체적인 활동이다.
공부의 시작은 쌓음과 비움
지식의 쌓음이 공부의 기초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기초가 없다면 망망대해 위에서 정처 없이 방황을 잃고 표류하는 배와 같은 신세나 다르지 않다. 아무리 빠른 속도로 달려도 도달할 곳이 없는 배는 떠도는 악순환만 거듭될 뿐이다.
하지만 지식의 쌓음이나 채움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비움이다. 왜 중요할까? 인간의 본질, 즉 본성은 부족함이고 비뚤어짐이고 연약함이고 어리석음이고 무지함이고 고집이고 편견이다. 이를 비워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을 비우지 않으면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는 존재다. 자신 안에 있는 상처와 아픔을 온전히 비움을 통해 치유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지식은 그 주체인 자신과 타자를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무지와 편견을 버리지 않으면 한쪽을 치우친 지식인밖에 될 수 없다. 곧 타인에 무관심하고 사회를 품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공부와 비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관계다. 상처가 아물어지고 비워져야 온전한 공부가 성립된다. 슬픔을 치유함으로써 쏟아내지 않으면 공부로 인한 성취감과 기쁨과 보람이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산지식으로 채워져야 할 내면에 아픔과 편견과 아집과 무지와 악함과 이기심 같은 것으로만 채워져 있으면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아직까지는 확실히 알 수 없는 존재의 참된 목적, 삶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도, 좋은 것들로 채울 수도 없다.
진정 이웃을 사랑하고 영혼을 품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상처부터 다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공부의 중요한 과정이며 진짜 공부의 첫 단계다. 단순히 지식의 쌓음과 채움을 공부라고 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므로 시험 치는 기술과 요령을 익혀 성적만 좋으면 공부도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생각이다. 다만 출세와 명예와 간판을 위해서 매진하는 공부는 가짜 공부다.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소유나 쟁취가 아닌 나눔과 베풂의 참 공부를 해야 한다. 선물을 받기만 하는 사람은 주는 사람의 더 큰 기쁨을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진짜 공부의 깨달음을 아는 사람은 선순환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개인이 평생 동안 쌓을 수 있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 뉴턴은 "저 넓은 바다의 모래사장에 한 알의 모래알 크기보다 작은 것이 2천 년 동안 전 인류가 쌓아온 지식의 총체"라고 했다. 하물며 한 사람의 지식은 어떠하겠는가? 천재와 바보가 종이 한 장 차이듯 개인의지식이 전 우주를 놓고 볼때 얼마나 미약하겠는가? 우리는 많이 공부할수록 겸손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라고 고백했다. 지식을 뽐내는 것은 도토리 키 재기나 다름없다.
채움을 강요하는 사회 풍조는 허세나 허영만 좇는 출세 지상주의를 만든다. 지금의 학교 교육은 자꾸 쌓음만 강조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이다. 얼마만큼 채웠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얼마나 쌓았느냐보다 얼마나 많이 비워냈는지를 잣대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핵심은 자신을 이기고 넘어서는 데 있다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는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이고 좌절하는 자신을 넘어서서 결단력 있고 적극적이며 도전할 수 있는 자신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
공부는 닫힌 생각과 마음까지도 여는 소통이다. 상처가 치유된다. 나약했던 데서 강해질 수 있다. 비뚤었던 자신이 바르게 될 수 있다. 중심을 잡지 못한 인생에 목표가 생긴다. 세상 안에서 소통하는 것이 공부다. 어제의 나를 뛰어넘게 하는 것이 공부다. 교만하던 자신을 낮추게 만드는 것이 공부다. 성장과 변화는 덤으로 따라오는 것이 공부다.
하지만 이것이 공부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공부의 완성이 되어서도 안 된다. 나를 넘어서는 과정을 겪어야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제 몫의 쓸모를 발견하고 묵묵히 해내는 것이 공부의 핵심이다.
배리 스미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에 대한 지식이 인간을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을 우리는 잘 알기 때문에 단순히 그 자체를 공부라고 명명할 수 없다. 공부는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배워나감으로써 그 본질을 알아가고 스스로의 존재 이유와 의미와 목적을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소통이 반드시 필요하다. 공부를 통해 인류는 문화와 문명의 발달을 추구할 수 있었다. 내가 나를 넘어섬으로써 참된 나와 만나는 것, 그리고 스스로 세상과 만나고 경험하고 기여하는 것이 또한 공부의 핵심이다.
공부는 자신을 재창조하는 과정이다. 무의미한 존재를 유의미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단계다. 타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돕는다. 세상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우리는 공부를 통해 자신의 존재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미처 몰랐던 내적 자아와 소명을 찾을 수 있다. 자기 몫을 감당해내는 모습을 겪으면서 변화를 완성해간다. 공부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채움과 비움을 통해 강하고 의롭고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창조된 자신을 찾았다면 진짜 공부를 했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물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공부의 재구성
과학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의식도 필연적으로 변화한다. 기술의 발달은 사회 환경의 변화를 초래하고, 사회 환경의 변화는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때 패러다임의 전환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 결과 새로운 견해와 시각의 재형성을 가져온다. 인류는 알게 모르게 지식의 총합을 키우는 사명을 공동으로 수행해왔다. 지식과 기술의 발달이 인류의 역사이며 노력의 부산물이다. 그리고 주로 '교육'이 그 기능을 도맡아왔다. 교육의 매카인 대학에서 지금까지 많은 기능을 묵묵히 해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개인이 본격적으로 참여해야만 하는 시대가 왔다. 지식 폭증의 시대인 것이다. 인류는 사회학적으로 지구 공동체와 자신의 지식을 연결시켜 새로운 자아를 재창조하고 다채로운 지식 창출이 가능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어느 때보다 개인이 찾아서 공부하는 시대인 것이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때문일까? 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단 몇 년만 흘러도 모두 사용해버리거나 더 이상 활용할 수 없는 죽은 지식이 되고 만다. 이른바 학습은 다만 연습 과정 밖에 되지 않는다. 평생을 계획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 동안 스스로 연구하고 공부해가야 한다. 졸업하고 나서 공부는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이는 MBA대학의 교육 시스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과거의 산업화 시대를 중심으로 만들어놓은 사업 모델과 분석 위주의 교과과정을 배운 우수한 인재들이 소위 증명된 최고 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로 기업체의 높은 자리만 앉지만, 80퍼센트 이상이 회사를 망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결국 대학 교육이 복잡한 변화의 흐름과 속도를 이제는 뒤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는 학문의 분야가 세분화 · 분업화 · 전문화되어 왔고, 또 그러한 전문가를 세상이 원했다. 하지만 학문 간에 서로 조화를 이루는 지식의 융합과 통섭을 원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문명의 충돌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지식의 충돌도 인류의 안전과 평안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성이나 도덕, 철학이 개발되지 않고 뇌과학과 생물학과 유전자 공학만 발달한다면 오히려 인류는 자폭할 수도 있다. '지知/智의 총체'는 커지고 있지만 서로 다른 학문의 분야를 저해시키는 상황이 발생하고, 더 나아가서는 스스로 인류의 붕괴를 자초하기 때문이다. 지들이 서로 충돌하는 동시성, 다양성, 카오스적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여러 학자들이 일제히 경고했다. 그러므로 모든 지식을 아우르는 새로운 공부가 병행되지 않으면, 제한적으로 아는 것이 도리어 해가 될 것이다.
단지 공부study, 학습learning, 교육education의 의미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스스로 찾는 지적 축적과 수양을 통해 자신과 세계, 나아가 미래에 기여하는 것까지 모두 포함하는 새로운 공부의 패러다임을 시작해야 한다. 다가오는 시대에 교육을 대체할 수 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기능과 역할을 해낼 공부를 재정립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시대는 시시각각 변해가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패러다임은 변할 수 있음을 미국의 철학가 토마스 쿤이 최초로 시사했다.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공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이론물리학자의 관점에서 새로운 정의를 내려보면 공부는 의미, 즉 내용에 실제 쓰임새의 자승을 곱한 갑(E=ms²)이다. 이 공식은 이미 여러 책에서서 언급한 바 있는데 그중《생의 가 : 배움》을 참고해서 재해석해봤다.
E[Erudition]=M[Meaning]×S[Singificance]²
이 공식은 '배움erudition'에 나름대로 '의미meaning'를 만들어서 '쓰임새significance'를 확장시킨 것이다. 일단 배움에 단순히 지식 축적이 아닌 의미를 내려주었다. 그러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배움이라 할 수 없다. 의미를 의미답게 할 수 있는 쓰임새, 즉 활용을 곱해줘야 한다. 쓰임새에 자승이 붙은 이유는 의미보다 더욱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뛰어넘어 타인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사회를 위해 쓰일 때 진정한 배움이라 말할 수 있다.
인류와 미래를 위한다는 의미가 없이 악용되는 것은 배움이 아니라 살상 무기밖에 되지 않는다. 곧 잘못된 배움이라는 뜻이다. 아울러 아무리 의미가 좋아도 탁상공론, 공리공론일 뿐 쓰임새가 없다면 이 또한 참된 배움이 아니다.
이처럼 배움이란 의미와 쓰임새가 모두 선해야 한다. 특히 쓰임새는 성격에 따라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고 크기에 따라 작게는 생활의 개선이나 개인의 만족, 크게는 희망적인 사회와 미래 건설까지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만든 공식인 '에너지는 질량이다'의 참된 의미는 물질, 즉 질량이 있는 모든 물질은 그것이 에너지로 증폭하거나 폭발해 사용 가능하다는 뜻이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이 한 장도, 물 한 컵도, 작은 꽃 한 송이도 엄청난 에너지가 될 수 있다. 다만 지금 기술의 한계로 실제 구현하지 못했을 뿐이다. 뒷받침만 된다면 상상 그 이상의 에너지로 재탄생할 수 있는 것처럼, 아주 작은 지식일지라도 참된 의미와 쓰임새가 더해진다면 크게 가치 있는 공부가 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주변의 모든 것들은 공부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어제의 공부는 더 이상 오늘의 공부가 아니다. 조선 시대의 서당 공부를 현대 교육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지금까지의 교육이 미래의 공부가 되리라고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새로운 공부의 재구성은 각자 스스로 정립해나가야만 한다. 위대한 철학가들이 하나같이 인정하는 하나의 명제는 "고정된 정답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