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아름다운 '앎의 무늬'

오키Oki 2013. 6. 10. 17:42

그동안 우리는 화개골에서 농약을 안치고 산매실 따내었다. 2011년과 2012년은 수확기를 앞두고 한달간의 가뭄으로 산매실이 역병에 아파도 3분의 1이라도 건져냈지만, 올해는 5월 중순부터 고온현상으로  산매실 수확기 코앞에 역병이 돌아 너무 많이 아프다고 한다. 그래서 올해는 산매실의 향기를 여러님들의 가정에 하나도 나눠줄 수 없게 되어 가슴이 아프다.(남들처럼 일찍 따면 괜찮지 않냐고요? 굵기도 작지만 가장 큰 이유는 덜 익은 것은 효소 맛이 떨어진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매실을 딸때는 힘들어도 택배를 받고서 행복해하는 그분들의 산매실효소 담그기 1년 행사를 우리땜에 망친것 같아서...너무  죄송합니다.

미안미안

 

 

- 유영만 지음 『체인지CHANGE』중에서 -

 

 

 

체험적 느낌 없는 앎은 상대방의 심장을 움직일 수 없다. 심장을 움직이려면 내 심장이 먼저 뛰어본 체험이 있어야 한다. 체험적 느낌 없는 앎으로는 상대를 감동시킬 수 없다.

 

책상머리 지식만 가득한

밥 맛 없는 천재Book Smart보다

거리에서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살아 있는 지식을 갖춘

따뜻한 지식인Street Smart이 돼라!

 

앎은 개인 차원의 깨달음이기도 하지만 개인 차원의 깨달음은 항상 어떤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나와 주어진 환경과의 관계, 나와 제도나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인식이 개인 차원에 머물러 자신의 전문성 심화에만 몰두할 경우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회적 이슈에 눈을 감는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살인사건을 보고 마치 나의 아픔인양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공자가 이야기하는 '마비된 사회'가 되어버린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낄 줄 모르는 마비된 사회가 다른 사람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가슴으로 느낄 줄 아는 아름다운 사회로 바뀌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많이 아파봐야 한다.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아파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픈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 수 없다. 아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슴으로 느껴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머리만 쓰게 만드는 건 교육 아닌 사육

초중교 12년을 치열하게 준비해서 S대학교에 입학한다. S대학교는 서울 시내에 존재하는 대학이다. S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단 1시간도 딴생각과 딴짓을 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공부만 해야 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교과서와 참고서를 파고, 학원 강의를 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대학입학에 필요한 점수 따기 방법을 익히고, 짜인 각본에 따라 정해진 논리를 펴는 논술고사 준비도 쉬지 않고 해야 한다.

점수를 높이려면 몸은 가급적 많이 움직이지 않고 머리를 많이 써야 한다. 그런데 몸을 움직이지 않고 머리만 쓰면 골치가 아파지고 머리에 김이 나면서 열이 오른다. 몸을 쓰지 않고 머리만 쓰면 머리는 돌아가지 않는다. 몸을 움직여줘야 열이 났던 머리가 식으면서 생각이 말끔하게 정리된다. 한침 몸을 움직여 신체 발달을 촉진시켜야 할 학창 시절에, 몸을 쓰지 않고 머리만 쓰면 신체는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심각한 두통이 오거나 정신적 이상 증후군이 나타나기도 한다.

교육의 본질은 자기 몸을 움직여 체험적 깨달음을 스스로 체득體得하는 과정에 있다. 몸이 따르지 않는 머리만의 공부는 관념적 파편만을 쌓는다. 몸을 움직여 부딫혀보고 넘어져봐야 머릿속에 담긴 생각이나 느낌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사육된 닭이 낳은 달걀을 깨서 노른자위를 슬쩍 눌러보면 아무런 힘도 없이 금방 터져버린다. 그런데 밭에서 뛰어놀면서 자란 닭이 낳은 달걀은 노른자를 눌러보면 쑤욱 들어갔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 그만큼 외부의 시련과 역경에 견딜 수 있는 회복탄력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뛰어놀지 못하고 좁은 공간에서 머리만 쓰게 만드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사육이다. 사육된 아이는 외부의 시련과 역경을 견뎌 낼 내공이 없다. 온실 속의 화초가 조금만 추워도 얼어 죽듯이, 온실 속에서 사육된 아이는 보호 장막을 걷어내면 작은 어려움조차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나약한 사람으로 자란다.

단언하건대 시행착오와 우여곡절, 파란만장과 절치부심의 체험이 어느 순간 비약적인 성장을 보장해주는 가장 확실한 교육이다. 당신이 부모라면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당신은 지금 아이를 어떻게 기르고 있는가? 당신은 사육된 사람인다. 아니면 교육받은 사람인가? 아이에게 체험적 깨달음을 주는 교육을 하고 있는가?" 사육되듯 자란 사람은 자신의 아이도 사육시킬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교육받은 사람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자신의 아이를 교육하고 올바른 길로 안내할 것이다.

 

 

 

남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 살기

오로지 공부만해서 힘겹게 S대학교―서울 시내의 대학―에 입학하면, 다음 관문은 S기업―서울 시내나 서울 근교에 있는 기업―에 취업하는 것이다. S기업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치열한 학점관리와 스펙 쌓기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딴생각과 딴짓을 하면 학점관리에 실패하고 스펙 쌓기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 이런 걱정에 빠지게 되면 내가 하면 신나는 일이 무엇인지,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나에게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체험해볼 시간이 없다. 오로지 남보다 잘되기 위해서 대학 4년을 보낸다.

하지만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나의 재능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한다. 재능을 찾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방법밖에 없다. 이곳저곳을 시추해야 어느 순간 치솟는 물줄기를 발견할 수 있듯, 내 안의 꿈틀거리는 욕망의 물줄기를 찾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시도를 해봐야 한다.

이런 실험과 모색을 하지 않고 오로지 기업이 원하는 스펙에 맞춰 대학 4년을 보내면, S기업에 취업하자마자 들이닥치는 새로운 난관에 그만 지쳐버리게 된다. 직장이라는 도 다른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이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S기업에 취업하면 그때부터 임원이 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실적을 올려야 한다. 직장에서 실적은 그 사람의 인격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실적 없는 임원은 좌불안석이다. 언제 자리에서 쫓겨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기업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마흔 살 전후에 임원으로 승진한다. '임원'은 '임시 직원'의 약자라서 언제 옷을 벗고 조직 밖으로 나와야 될지 모르는 불안한 사람이다. 평균적으로 대기업에서 임원이 될 확률은 입사 직원의 1퍼센트 내외다. 100명이 입사하면 그중 한 명 정도가 임원이 되는 것이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한 명의 '임시 직원'이 되기 위해 앞만 보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나머지 99명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떠나야 한다.

문제는 내 삶을 살아오지 않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살면,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을 때 과거의 삶을 후회한다는 것이다. 그때부터라도 지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삶을 시작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S대학교에 입학하고 S기업에 취업하려고 앞만 보고 달리지는 말자, S자형으로 이런저런 시행착오도 겪어보고 우여곡절의 인생을 살아도 늦지 않다. 앞만 보고 직선으로 질주하다 질식 할 수 있다. 한 박자 늦추고 곡선형 S자 인생을 살아보자.

 

 

 

이력서와 추천서

이력서履歷書는 과거를 보고 추천서推薦書는 미래를 본다. 이력서는 그 사람이 발로 뛰어온 인생에 대한 역사적적 기록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무엇을 성취했는지보다 어떤 시련과 역경을 넘어서 지금에 이르렀는지가 더 중요하다. 지금의 성취는 또 다른 성취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중간 결과물일 분이기 때문이다.

'끄트머리'라는 말이 있다. '끝'과 '머리'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끝'에 '시작'이 있고 '시작'에 '끝'이 함께 있다는 말이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새로운 출발점에서 또 다른 시작을 하게 되는, 시작과 함께 끝을 지향하는 표현이다.

이력서는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 기록이고, 시작해서 끝을 맺은 성취의 역사다. 이력서에는 한 줄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 한 줄에는 한 인간이 체험한 고뇌와 고통의 산 역사가 담겨 있다. 이력서는 하나의 성취를 얻기까지 어떤 역경을 겪고, 그 속에서 어던 고뇌와 행동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체험적 역사가 기록된 나의 이야기다. 그래서 '내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하고 남의 이야기를 듣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이력서는 텅비어 있게 마련이다.

이에 반해서 추천서는 한 사람의 미래 가능성과 잠재력을 평가하는 보고서다. 추천서는 그 사람이 갖고 있지만 아직 발휘하지 않은 잠재성을 간파하고,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는 격려문이자 장려문이기도 하다. 추천서 속에 담긴 칭찬의 말이 추천받은 사람의 도전 의욕을 높이기 때문이다. 이력서만 보고 추천서를 보지 않으면, 과거 경력은 알 수 있지만 미래의 꿈과 비전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력서 없는 추천서는 허무맹랑한 꿈의 기록이 되고, 추천서 없는 이력서는 꿈이 없는 과거 이력에 그치게 된다. 이력서와 추천서를 함께 읽을 때 그 사람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오늘의 나는 과거의 이력이 만들어준 것이고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내가 꿈꾸는 비전이 실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장을 얻고 싶은 백수에겐 이력서와 추천서가 필수다.

 

 

 

IQ, EQ, SQ 그리고 JQ

잘 알다시피 'IQIntelligence Quotient'는 지능지수, 'EQEmotional Quotient'는 감성지수, 'SQSocial Quotient'는 사회적 관계지수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상대의 마음을 먼저 배려하고 아픔을 이해하는 감성지수가 높고,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통해 이상적인 사회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성공은 한 개인의 외로운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에 더해진 주변 사람들의 덕택이자 덕분이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말이 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이다. 당장 옆에 있을 때는 모르지만, 막상 없어지면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나 혼자 노력해서 성공한 것 같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나의 성공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이 많다. 덕택德澤이라는 말도 '누구의 덕으로 그 은혜가 저수지 연못처럼 가득 차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덕분德分이라는 말 역시 '누구의 덕을 나누어준다'는 뜻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덕택과 덕분으로 오늘의 내가 존재하고 승승장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감성지수나 사회적 관계지수가 높은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감성지수나 사회적 관계지수가 현격하게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가슴으로 상대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머리로 자신의 이익을 먼절 계산해본다는 점이다. 소위 잔머리를 굴리는 경우가 많다.

JQ는 '잔머리 큐'가 아니라 '주변머리 큐'다. 주변을 둘러보라. 머리의 존재 이유는 잔머리를 굴리는 데 있지 않다. 머리는 더 크게, 더 멀리 생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잔머리 굴려가면서 계산적으로 생각할수록, 인간관계는 소원해지고 영원한 불통에 빠질 수 있다.

'적자생존'은 '적는 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의미와 더불어, '적자를 봐야 생존'이 가능한 대인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말이다. 손해를 감수하는 마음이 장기적으로는 이득이 된다. 상대가 더 많이 이득을 보도록 배려하면 궁극적으로 나에게 이익이 돌아온다.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마음으로 대인관계를 유지하고 내가 우선 손해를 본다는 자세로 인간관계를 맺자, 그것이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유일한 비결이다.

 

 

인연을 연인으로 변화시키기

나를 바꾸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필자가 추천한 방법은 내가 읽은 책과 만나는 사람을 바꾸는 것이다. 책과의 만남도 책을 쓴 저자와의 만남이니, 결국 사람과의 만남이 바뀌면 내가 바뀐다. 한 사람의 인성도 그가 만난 사람들과의 인간적 교류와 관계 속에서 쌓인 역사적 산물이다. 오늘의 나는 개인으로서의 내가 아니라 내가 만난 사람과 맺어진 인간적 관계 속의 나다. 그만큼 사람과의 만남은 나를 만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관계가 된다.

어떤 만남은 운명이라고 한다. 필자도 지금까지 겪었던 몇 번의 운명적인 만남이 없었다면, 오늘의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학부와 대학원 시절 스승과의 만남, 미국 유학 시절 지도 교수와의 운명적 만남 등이 없었다면 내 운명은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법정 스님은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때의 마주침이다."라고 말했다.

당구공처럼 스쳐 지나가는 찰나적 만남은 한때으 마주침이자 기억도 나지 않는 만남이다. "세상을 보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는 모든 만남을 우연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모든 만남을 기적으로 보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사실 우연한 만남이 운명을 바꾸는 기적이 되는 경우도 많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만남을 만나 생각지도 못한 관계로 발전하는 만남, 그런 만남은 정말 운명을 바꾸는 만남이다.

오랜 기간의 만남은 인연의 폭과 골을 넓고 깊게 만든다. 그런 만남의 인연因聯은 아름다운 연인戀人으로 바뀐다. 여기서 말하는 연인은 사랑하는 남녀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형성되는 끈끈한 신뢰와 굳건한 인간관계를 지칭한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만남도 가식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될 미덕이다. 인간은 인간관계의 약자다. 관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면, 세상 사람 모두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연인으로 다가올 것이다.

 

 

 

상처가 아물면 아름다운 '앎의 무늬'가 생긴다

앎이 깊어질수록 기존의 앎에 새겨지는 상처는 깊을 수밖에 없다. 알아갈수록 상처는 더욱 깊어져 아픔의 강도는 심해진다. 그 아픔이 두렵다면 앎의 행로를 지금 여기서 빨리 멈춰야 한다. 반면 알아감으로 인하여 생기는 상처를 견디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앎으로 인해 생기는 상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상처는 아물게 마련이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숱한 상처의 흔적에 기억과 추억이 새겨지면 아름다운 앎의 무늬가 재탄생한다. 아픈 앎의 뒤안길에 생긴 숱한 얼룩이 아름다운 앎의 무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알면 알수록 기존의 앎이 잘못되었다는 깨달음의 무늬는 심한 고통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적 충격이 주는 즐거운 고통이다.

삶이 공부이고 공부가 삶이라면, 공부와 삶 모두 상처받고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다. 상처의 골이 깊을수록 깨달음의 깊이도 깊어진다. 깨트리면 얼룩이 생기고, 깨달으면 무늬가 생긴다. 깨달음의 무늬는 깨뜨림의 얼룩 없이 생기지 않는다.

뭔가를 깨달으려면 스스로를 먼저 깨뜨려야 한다. 스스로를 먼저 깨뜨리지 않으면 깨진다. 깨지면 원상회복이 불가능하다. 깨지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한계와 굴레, 속박과 타성의 틀을 깨부숴야 한다. 그래서 깨달음의 여정은 아픔의 연속이다.

앎의 무늬는 아름답지만, 앎의 얼룩은 아프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는 것은 앎의 무늬이지 아픔의 얼룩이 아니다. 대부분 앎의 무늬에만 주목하기 때문에 앎의 얼룩은 쉽게 보지 못한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알면 알수록 아프다. 그 아픔의 진면목을 맏고 부단히 정진해야 아픔을 아픔으로 치유할 수는 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처럼 이통치통以痛治痛의 원리로 과거의 아픔을 미래의 아픔으로 치유하는 것이다.

앎은 앓음이다. 앎이 성장하고 성숙할수록, 몰랐던 사실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기존의 앎이 깨지는 심각한 통증이 수반된다. 그 통증을 감내하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앎의 행로를 찾고 그 행로를 부단히 전개하는 것이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배움은 새로운 것을 아는 과정인 동시에 모르는 것을 새롭게 아는 과정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을 알면 알수록 기존의 앎이 허술하고 부실함을 깨닫게 된다. 그럴수록 앎에는 더욱 큰 생채기가 생긴다. 그래서 앎은 기존의 앎에 심한 생채기를 내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