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삶을 만나는 배움

오키Oki 2013. 4. 21. 18:11

 

일년만에 녹차건조 온돌방에 불들어 간다. 차덖기전  먼저 불을 지펴 뽀송뽀송하게...

 

 

 

- 강신주 지음철학, 삶을 만나다중에서 -

2007년 문화관광부 선정 교양도서

 

 

 

지은이 강신주

연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장자철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연세대, 경원대, 인천대 등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있고, 태학사 중국철학총서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프롤로그

1. 햇살이 따사롭지만 그리 덥지는 않은 초가을 날입니다. 한 쌍의 남녀가 카페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부드러운 카푸치노를 마시며, 그들은 잠시 감미롭게 흘러나오는 음악에 취해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가 진지한 얼굴로 남자에게 이야기합니다. "도대체 사랑이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모르겠어. 그런데도 나는 전화를 끊기 전에, 집앞에서 헤어질 때 너한테 사랑한다고 말하거든, 내 생각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너도 그런 것 같아. 사랑이 뭔지 잘 모르면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음악에 취해 있던 남자는 갑작스런 애인의 의문에 얼굴을 붉히며 대답합니다. "아니, 너 왜 그래?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혹시 이제 나한테 싫증이 나서 그런 소릴 하는 거야?"
여러분의 애인이 혹 진지한 얼굴로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었나요? 이럴 때 우리의 반응은 대개 방금 살펴본 이 남자의 경우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왜 우리는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는 애인의 말에 이런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절까요? 그건 아마도 우리가 자명한다고 생각한 것을 애인이 문제 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이란 친숙하고 밀접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문제 삼고 있는 애인은 지금 나와의 친숙한 관계를 의심하는 것, 다시 말해 나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애인이 나를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사실 별개의 문제입니다. 분명 애인은 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단지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음미하고 싶을 뿐입니다. 어떤 것을 제대로 보려면, 그것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보아야 사물도 제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애인이 "사랑이 뭘까?"라고 질문할 때, 우리는 마치 신성불가침한 사랑이 침해되는 것처럼 느끼게 되고, 이어서 곧 불편함의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사랑은 맹목적인 사랑에 불과할 것입니다. 결국 맹목적인 사랑, 일순간의 열정과도 같은 사랑을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사랑에 거리를 두고 사랑을 낯설게 만들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자명한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자명한 것에 '거리를 두는' 작업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낯설게 만드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철학적 사유란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삶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자명한 것들을 낯설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음미하려는 애인에게서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는 철학적 사유 앞에서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즉 어떤 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그것에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처럼,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삶을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2.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많은 자명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간단히 나열해보도록 하죠. 부모님께 효도하기, 부모님께 혼나기, 피곤해서 일찍 귀가하기, 외출하기 전에 화장하기, 설거지하기. 홈페이지 관리하기, 메일 확인하기, 친구와 전화하기, 영어 공부하기. 스포츠에 열광하기. 유명 연예인 좋아하기. 이별에 슬퍼하기, 친구들과 술 마시기, 외박하기, 친구들과 여행하기, 산에 오르기, 나이든 사람에게 자리 양보하기, 영화 보기, 음악 듣기, 독서하기, 시험공부하기, 시험 보기, 직장 다니기, 아르바이트하기, 월급 하기, 쇼핑하기, 저축하기, 휴가 떠나기, 군대 가기, 예비군 훈련받기, 결혼하기, 아이 낳기, 아이 야단치기, 투표에 참여하기, 반상회에 나가기, 친구 결혼식 가기, 돌잔치 가기, 문상 가기, 유해 화장하기, 제사에 참여하기, 명절에 친지들 방문하기 등등, 철학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런 모든 자명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고 그 의미를 다시 물어보는 것입니다.
음미되지 않은 삶은 맹목적인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철학은 풍성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낯설게 만들어야만' 할까요? 그냥 살던 대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요? 그냥 살기도 바쁜데 삶에 거리를 두고 또 삶을 음미한다는 것은 너무 사치스러운 일이 아닐까요? 사실 삶을 낯설게 만든다고 해도 별 뾰족한 해법이 나오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런 의문을 갖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고 해서, 뭐 별다른 대답이 나올 리 만무하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구성하는 많은 자명한 것들을 우리가 문제 삼아야만 한다면 그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 자체가 항상 '낯설어지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삶을 '낯설게 만들어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우리로부터 '낯설어지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경우가 우리를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서, 아니면 그가 먼 곳으로 불가피하게 떠나게 되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 사람이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먼저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사랑이란 무엇일까?' 혹은 '그 사람은 나에게 어떤 사람일까?'라고 미리 반문해보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후 회한에 가득 차서 사랑에 대해 반문해보는 것은 너무 때늦은 일이 아닐까요? 우리는 사랑의 가치와 그 의미에 대해 한번쯤 반문해보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점이 바로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철학적 사유란 미리 삶을 낯설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인의 책 제목이 생각나는군요.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이별할 경우 보통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쓰라리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막상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는데 우리의 마음에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를 사랑했다는 나의 생각이 하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역으로 단순히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이별했는데 놀랍게도 나의 마음이 깊은 비탄에 잠길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헤어진 사람이 단순히 내가 알던 많은 사람들 중의 한 명이 아니라,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한탄에 젖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 말처럼 철학과 삶의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3. 작지만 많은 자명한 것들로 우리의 삶은 영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삶은 항상 예기치 않은 사건들로 인해 낯설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철학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삶을 낯설게 돌아보도록 만드는 불가피한 사태가 도래하기 전에, 철학적 사유를 통해 우리는 '미리 삶에 낯설어지는 방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우리에게 '내가 나중에 알게 될 것을 지금 알 수 있게' 해주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철학적 사유가 우리에게 불편함과 당혹감을 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불편함을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훗날 직면하게 될 불편함과 당혹감에 비한다면, 철학적 사유가 주는 불편함과 당혹감은 사실 매우 적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철학적 사유란, 다시 반복되지 않을 소중한 삶을 후회 없이 살겠다는 우리의 의지와 결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삶을 너무 평범하고 가벼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또 우리는 철학을 너무 현학적이고 어려운 학문, 나의 삶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이상적인 이야기 정도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현재 우리는 삶을 철학적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있고, 철학을 삶에 입각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은 철학으로부터, 혹은 철학은 삶으로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 삶의 대부분에서 삶과 철학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기만 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자체는 본성상 철학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으로 철학이란 것 역시 우리의 삶 자체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칸트(1724~1804)의 용어를 빌려서 말해봅시다. 철학이 없는 삶이 맹목이라면 삶이 없는 철학은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라는 가장 오래된 신화

 

국가를 문제 삼기가 어려운 이유
여러분은 '스톡홀름 증후군'이란 말을 들어 보았나요? 이것은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어떤 은행에서 일어났던 인질·강도 사건에서 생긴 용어입니다. 당시 강도들에게 잡힌 인질들이 오히려 강도들에게 협조하고, 반대로 자신들을 구하려는 경찰들에게 극도의 적대감을 보였었지요. 경찰에 포위된 인질범들이 인질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줌으로써 이와 같은 병적인 심리 상태가 더욱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강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자기 나름대로 그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인질로 잡힌다는 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심각한 스트레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인질범들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결국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이런 위험 상황을 통제해줄 수 있는 힘이 경찰에게 없다면, 인질들의 스트레스는 더욱 가중될 것이 분명합니다.
인질범들에게 잡힌 이런 위기 상황에서 인질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인질들은 자신들을 도울 수 없는 경찰이나 사회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을 억류하고 있는 인질범들의 편을 들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질들이 빠지게 되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매커니즘은 다음과 같은 세 단계로 진행됩니다. 우선 인질들은 자신들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인질범들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는 것을 고마워하며, 결국 그들에게 온정을 느끼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인질들은 자신들을 구출하려고 하는 인질범들 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파괴함으로써 오히려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 인질범들도 인질들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억류시킨 인질들이 자신들이 아니라 오히려 경찰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질들과 인질범들은 함께 고립되어 비슷한 두려움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인질들과 인질범들 사이에 '우리'라는 기묘한 믿음의 공간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모든 국가는 위기에 빠지면 항상 전쟁을 통해서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했습니다. 왜 그랬던 것일까요? 그것은 국민을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뜨리려는 책략이 작동했기 때문이지요. 통치 계층에게 불만을 가진 국민도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통치 계층과 자신들이 동일한 운명 공동체, 즉 '우리'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국가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파헤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일정 정도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국가는 분명 자신이 지배하는 국민에 대해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가지고 있는 기구입니다. 다시 말해 공권력이라는 명분으로 폭력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기구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 국가는 우리는 모조리 죽일 수 있는 잠재적 폭력 자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왜 우리는 죽이지 않을까요? 아니 죽이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를 위해 많은 정책적 배려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생각해보면 고마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인질들이 인질범들에게 동질감을 갖듯이 국가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갖게 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국가를 문제 삼으면, 우리의 마음은 무척 불편해집니다. 인질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경찰들의 인질범들을 자극하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결국 이런 메커니즘으로 국가는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 즉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착각이 발생하게 됩니다. 인질범들에게 향해진 총구를 스스로 막고서 인질범들을 변호하는 어느 인질들의 경우처럼 말이지요. 국가와 관련해서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박정희 (1917~1979)로부터 시작되는 군사독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19 민주혁명을 와해시키고 출현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은 사실 우리 모두를 불모로 잡은 인질범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인질들처럼 박정희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자행했던 억압과 탄압의 요소들은 대부분 잊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를 보릿고개를 없애준 사람,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우리 민족을 고질적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사람으로 기억하려고만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박정희에게 인질로 사로잡혔던 아련한 기억을 스스로 미화하기에 여념이 없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박정희란 인물은 도대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작용을 했던 사람일까요? 최근에 불치의 병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정치학자 전인권(1957~2005)은 박정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자 합니다.

 

 

박정희와 국가사상은 궁극적으로 국가주의 사상으로 귀결된다. 그의 국가주의는 자신의 목가적인 정치적 이상을 국가기구를 중심으로, 폭력성과 지도성을 가미하여 조직화된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민족의 생존은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박정희의 국가주의적 신념들은 민족개조, 국민 도의 함양, 국민 도의 확립 등과 같이 교육적·계몽적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국민교육헌장」이다.「국민교육헌장」은 전체적으로 개인을 국가의 목표에 종속시키는 사고의 전형을 보여준다. 새마을운동 역시 일견 목가적이고 계몽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만, 그 내면으로 들어가면 국가 총력주의와 같은 사상이 근원적인 동기를 이루고 있다. 또한 '체력은 국력'이라는 표어가 유행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개인의 체력은 국가의 국력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민족중흥과 같은 근대화 담론도 결국 국려거 배양이란 국가주의적 사상의 실천 방향이 된다.(『박정희 평전』)

 

 

전인권은 박정희의 정치사상을 "국가주의" 사상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여기서 국가주의는 그의 말대로 "개인을 국가의 목표에 종속시키는" 생각, 즉 개인은 국가의 수단이며 국가는 개인의 목적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박정희에게서 우리는 단지 국가 발전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 이상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국가 혹은 민족이야말로 절대적인 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 권위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박정희의 생각이 옳다면 누구도 국가를 문제 삼고, 국가에 대해 회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지상 최대의 순수한 목적인 국가 자체에 대해 왈가불가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박정희의 국가주의를 맹목적으로 따라도 괜찮을까요? 아니면 국가에 대해 스스로 사유하기 시작해야 할까요? 박정희가 우리에게 각인시킨 국가주의라는 망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혹은 국가에 대한 스톡홀름 증후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국가를 사유할 때 발생하는 불편함과 불쾌함을 견딜 필요가 있습니다.

 

 


수탈과 재분배의 논리
사실 국가주의는 박정희만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국가가 생긴 이래 국가가 국민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강요해온 것은 너무나 오래되고 익숙한 일입니다.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만고불면의 진리라고 선전하기않은 문명은 없었으니까요. 이 점에서 국가주의는 인류의 문명만큼이나 오래된 사유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도 인간을 편들기보다는 국가를 편들었던 사람이니까요. 그럼 이제 그의 말을 직접 경청해보도록 하지요.

 

 

국가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개인에 선행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명제의 증거는, 국가는 전체이며 개인은 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개인은 고립되어서는 자족적일 수 없으므로 전체에 모두 같이 의존해야만 한다. 그리고 국가만이 자족적인 상태에 이를 수 있다. 고립된 개인은 정치적 결사의 혜택을 타인과 더불어 누릴 수 없거나 혹은 이미 자족해 있으므로 국가의 일부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고립된 개인은 짐승이 아니라면 선일 것이다.(『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에 대해 사유했던 걸까요? 이것은 그가 국가를 하나의 낯선 탐구 대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느냐는 물음과 같습니다. 그는 "국가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개인에 선행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그가 국가를 사유하지 못했다는 것, 아니 문제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단지 국가를 절대화하거나 혹은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지요. 오히려 그는 국가로부터 벗어나려는 개인에게 협박까지 하고 있는 셈입니다. 국가를 벗어난 "고립된 개인은 짐승이 아니라면 신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신이 될 수 없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는 결국 인간은 국가를 떠나서는 짐승과 별반 차이가 없어진다는 의미이지요. 짐승은 분명 약육강식이라는 야만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도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존재하는 야만이 아닐까요?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는 달리 국가로부터 벗어나려는 고립된 개인은 사실 야만의 세계로 전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문명의 세계로 상승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배와 복종이라는 가장 지독한 야만의 고리를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국가를 벗어나려는 개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짐승'이 아닌 '신'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에 대해 진정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그것을 단지 자명한 것으로 방치했습니다. 그러나『슬픈 열대』에서 레비스트로스(1908~1991)가 이미 지적했던 것처럼 국가는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3000년 내지는 4000년 전부터 지중해 동쪽, 중국, 아메리카 등지에서 문자의 출현과 함께 발생한 것이니까요. 그러니 그 이전에는 아주 오랫동안 국가가 없는 사회도 충분히 있었던 셈이지요.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우리는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국가를 최상의 목적인 것처럼 사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가라타니 고진(1941~)의 도움을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유형의 교환은 강탈하는 것이다. 하여튼 교환하기보다는 강탈하는 편이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이것을 교환이라고 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강탈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다른 적으로부터 보호한다거나 산업을 육성해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원형이다. 국가는 더 많이 그리고 계속해서 수탈하기 위해 재분배해줌으로써 토지나 노동력의 재생산을 보장하고 관개 등 공공사업을 통해 농업생산력을 높이려고 한다. 그 결과 국가는 수탈의 기관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농민이 영주의 보호에 대한 답례로 연공年貢을 지불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면적으로 국가는 초계급적이고 '이성적'인 것처럼 표상된다. 예컨대 유교가 그러한데, 치세자治世者의 '덕'이 설파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강탈과 재분배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교환'으로 간주될 수 있다.(『일본정신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국가를 하나의 신적인 실체가 아니라 교환관계로 숙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기본적으로 약탈을 통해 힘의 우월성을 확보한 것, 그리고 약탈의 연속성과 지속성을 위해 재분배를 작동시키는 폭력적 기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국가의 교환 논리는 표면적으로는 은혜와 보호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조세를 거둬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서는 마치 등가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국가를 규정하는 주종 관계는 분명히 등가교환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도 말이지요. 세금을 낼 때 피통치자는 자신이 국가에 의해 보호받는 대가를 동등하게 지불할 뿐이라고 착각합니다. 마치 서비스를 받으면 팁을 내는 손님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만약 피통치자가 보호가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세금을 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것을 흔히 조세저항이라고 말하지요. 예전이라면 그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저항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현재도 국가는 법의 권력을 통해 그 대가를 톡톡히 묻고 있지 않습니까? 이 점에서 루소의 통찰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타자와 차이라는 문제를 숙고하고 있는 현대 일본의 탁월한 사상가이다. 부러운 것은 그가 숙고하고 있는 타자와 차이의 문제가, 서양의 데리다나 들뢰즈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깊이가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 그는 어떻게 하면 타자와 공존하는 사회, 즉 차이를 동일성으로 환원시키지 않는 사회를 구성할 것인지를 이론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트랜스크리틱』,『일본정신의 기원』등이 있다.

 

 

 

주종 관계란 사람들의 상호 의존과 그들을 결합시키는 서로의 욕구가 있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미리 그를 다른 사람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인간불평등기원론』)

 


중요한 것은 통치자가 이미 피통치자가 자신에게 종속될 수박에 없는 조건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이로부터 국가의 교환 논리는 기본적으로는 우월한 힘을 가진 통치자와 그렇지 못한 피통치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부등가교환이 됩니다. 다만 '국가는 더 많이 그리고 계속해서 수탈하기 위해 재분해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점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가 국가의 교환 논리가 수반하는 피통치자의 환상 혹은 전도된 의식에 대해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피통치자는 국가가 자신을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국가를 위해 세금을 내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바로 여기에 피통치자가 부등가교환을 착각하게 되는 이유가 있지요. 사실 국가가 피통치자에게 재화를 재분배하거나 혹은 관개 사업 등의 공공사업을 일으키는 이유는, 사실 더 효율적으로 구성원을 수탈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점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은 박정희의 독재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줍니다. 그는 경제개발을 해서 국민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독재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피통치자, 즉 우리의 착각일 뿐이지요.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이 옳다면,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 통치를 영구히 하기 위해 경제개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루소는 제네바의 칼뱅파 집안에서 태어난 사상가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연주의자였다. 자연 상태와 자연인이라는 가설적 테마를 통해서, 그는 인간의 기본적인 관심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통찰했으며, 또한 이런 이기적 본성이 사회의 산물이라는 것도 발견했다. 정치와 사회를 숙고하기 위해서, 현재 그 누구도 루소를 우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요 저서로 『에밀』,『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등이 있다.

 

 

 


덕의 논리와 자발적 복종
여러분은 이제 국가가 국민을 위해 온갖 정책을 펼치는 이유를 알았을 겁니다. 국가는 국민에게 마치 선물인 것처럼 온갖 정책을 시행한다고 자랑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위해 존재할 뿐이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국가와 국민 간의 관계는 마치 축산업자와 소 사이의 관계와도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를 기르고 있는 한 축산업자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정성을 다해서 소들에게 음식을 공급하고, 그들의 잠자리를 청결하게 유지합니다. 가끔 그는 소들의 정서 안정을 위해서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음악도 자장가처럼 들려줄 수 있습니다. 그의 소 사랑은 너무나 지극해서, 어떤 소가 병이라도 나면 밤새도록 간호해줄 정도지요. 자!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떤 소가 주인의 정성에 감동해서 주인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각오를 다지는 장면을 말입니다.
그러나 만약 소들이 축산업자 주인의 음흉한 속내를 알게 된다면,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까요? 그들은 주인의 목적이 결국 자신들을 살찌우고 마침내는 도살하여 팔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이런 사실을 의식적으로 안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은 주인의 사랑을 단호하게 거부할 것입니다. 그의 사랑을 받으면, 자신들은 결국 죽게 된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다면 축산업자가 기르던 소들은 점점 말라갈 것이고, 주인 자신도 끝내는 파산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들을 살찌우기 위해서, 그는 소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진짜 이유를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될 겁니다. 노자가 간파했던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사실 국가의 논리를 숙고하는 데 있어서는 동서양의 구분이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두 문명권 모두 국가 형식을 근본으로 해서 출현했기 때문이지요.

 


오르마들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펴주어야만 한다.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어야만 한다. 제거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높여주어야만 한다.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만 한다. 이것을 '은미한 밝음〔微明〕'이라고 말한다. 유연하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되고, 국가의 이로운 도구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도덕경』)

 


노자의 생각은 다음 한 구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만 한다. " 만일 가축업자가 노자의 말을 들었다면, 그는 충분히 고개를 끄덕였을 겁니다. 좋은 육질의 소고기를 얻기 위해서, 그도 정성과 사랑으로 소들을 돌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노자는 이 원리가 '은미한 밝음', 즉 미명微明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은미함〔微〕'은 국가가 국민에게 시혜하는 목적이 국민에게는 은미해야 한다는 것, 즉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밝음〔明〕'은 통치자나 통치 계층이 자신이 국민에게 시혜하는 목적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국가가 재분배하는 이유를 국민이 알게 된다면 국가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노자는 "국가의 이로운 도구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런 정치철학을 통해서 노자는 국가나 통치자들에게 일종의 우민愚民 정책을 제안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흥미로운 것은 노자의 정치철학적 통찰로부터 동양 특유의 논리, 즉 덕의 논리가 파생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보통 주변에서 어떤 사람이 덕이 있다거나 혹은 덕이 없다고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덕이 있다 혹은 덕이 없다'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도덕성을 갖추고 있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는 말일까요? 자세한 내막을 알기 위한 실마리는 사실 '덕'이라는 글자 자체에 있습니다. 이 한자는 두 글자로 구성되어 있지요. 그것은 '얻는다'는 의미의 '득得'이라는 글자와 '마음'을 의미하는 '심心'이란 글자입니다. 그렇다면 '덕'이란 글자의 의미는 '마음을 얻는다'는 뜻이 될 겁니다. 그래서 이미 한비자(?~BC 223)라는 사상가도 '덕은 얻는 것'을 말한다고 이야기했던 것이지요. 이 점에서 '덕'이란 개념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도덕성을 의마하는 'virtue'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마음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동양에서는 덕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로 흔히 누구를 떠올릴까요? 이를테면『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라는 대하 역사소설의 주인공 유비(161~223)를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타인의 마음을 얻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삼국지연의』의 한 장면을 보도록 합시다. 

 

 

"저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미 부인께서는 중상을 입으셨는데, 제가 아무리 청해도 말에 오르지 않으시더니 그만 우물 속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저는 겨우 토담으로 우물을 메운 다음 공자公子를 갑옷 속에 품고서 간신히 포위를 뚫고 달려왔습니다."
말을 마치고 조자룡이 급히 갑옷을 끌러 품 안에서 아두〔유비의 아들〕를 꺼내보니, 아두는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두 손으로 아두를 받들어 유비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유비는 자신의 아들을 받아들자마자 땅바닥에 내던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까짓 어린 자식 하나 때문에 하마터면 나의 큰 장수를 잃을 뻔 했구나!"
조자룡은 황망히 허리를 굽히고 팽개쳐져 우는 아두를 끌어 안고서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였다.
"제가 이제 간뇌도지肝腦塗地하더라도 주공〔유비〕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삼국지연의』)

 

 

유비는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을 통해서 이미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린 군주이다.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덕이 있는 인물로 평가되며 아직도 외적인 통치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이자 상징으로 남아 있다. 역사적으로 유비는 삼국 시대를 연 주역 중의 한 명이다. 그는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마침내 삼고초려를 통해서 제갈량이라는 뛰어난 재상을 얻음으로써 촉나라를 창건하여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여러분은 방금 유비가 어떻게 조자룡이란 용맹한 무장의 마음을 얻었는지 보았을 겁니다. 유비는 조자룡에게 자신의 부인과 아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조자룡은 엄청난 적병 속에서 유비의 부인과 아들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만약 그들을 구하지 못한다면, 그는 유비의 어떤 책망도 감수해야 할 판입니다. 그러나 운 좋게도 그는 유비의 아들, 즉 유선劉禪을 구하는 데는 성공합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지요. '아두'라는 아명으로 불리는 유선은 훗날 촉나라의 황제가 되는 유비의 장남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주군主君인 유비의 부인을 지미지 못한 죄 때문에 조자룡의 마음은 조금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죽음의 형벌을 면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유비는 조자룡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의 죄를 따지기라도 했습니까? 유비는 오히려 자신이 사랑하는 장남을 바닥에 내팽개치면서 조자룡에게 이야기합니다. "이까짓 어린 자식 하나 때문에 하마터면 나의 큰 장수를 잃을 뻔 했구나!" 이로써 유비는 조자룡의 마음을 확실하게 얻는 데 성공한 셈입니다. 자신의 대권을 물려받을 장남보다 조자룡을 아낀다는 마음을 그에게 분명히 보여주었으니까요. 유비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은헤를 베풀었던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오직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도움을 줄 만한 사람에게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아마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방금 살펴본 조자룡과 제갈량(181~234) 정도일 것입니다. 유비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시혜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마치 자본가가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에만 투자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유비는 조자룡에게 뜻밖의 은혜를 베풂으로써, 그가 평생 동안 유비와 그의 아들에게 충성하도록 만들어버립니다. 이제 유비는 조자룡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자바은 것이지요. 조자룡은 자신의 충성이 외적인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유비의 은혜는 조자룡으로 하여금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빼앗기 위해서는 먼저 주어야만 한다'는 노자의 원리, 즉 수탈하기 위해서는 재분재해야 한다는 국가의 원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비는 아마 이 원리를 가장 성공적으로 실행에 옮긴 정치가였을 겁니다. 이 점에서 볼 때 유비의 자가 '현덕玄德'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현덕'이란 말은 노자가 지은 『도덕경』에 등장하는 유명한 말로, '검은 덕'은 다른 사람이 그 속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서 일견 어두워 보이는 덕을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유비만큼 스스로 '은미한 밝음'의 논리를 잘 실현시킨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전인권은 정치학자이며 동시에 미술평론가, 저술가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박정희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주로 그의 외적인 주장이나 행동들에 매몰되어, 그를 극도로 찬양하거나 아니면 폄하하는 양극단에 처해 있다. 반면 전인권의 연구는 어떤 가치 평가도 전제하지 않고 박정희와 그의 내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박정희 평전』, 『남자의 탄생』,『아름다운 사람 이중섭』등이 있다.

 

 

 

세계화와 국가
국가는 기본적으로 약탈의 역사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약탈만으로는 효과적으로 이윤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곧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국가는 피약탈자 위에 군림하면서 영속적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이제 피약탈자는 국민으로 변하게 된 것이지요. 지속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국가는 국민에게 여러 시혜적인 정책들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모든 국민에게 똑같이 그렇게 해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효율적으로 수탈할 수 있는 계층에게만 국가의 시혜가 집중됩니다. 다시 말해 세금을 가장 많이 걷을 수 있는 계층에 대해 국가의 정책적 시혜가 이루어진다는 말이지요. 결국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누가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는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을 우선적인 보호 대상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이전에는 국가가 보호하는 일차적인 대상이 농민이었습니다. 국가의 힘과 부는 무엇보다도 농민의 농업생산력과 농민이 구성하는 힘과 부는 무엇보다도 농민의 농업생산력과 농민이 구성하는 무력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업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국가는 자신의 보호 대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국가의 일차적인 보호 대상에서 농민은 제외되고, 오히려 자본가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산업자본주의 이전 시대에는 공공사업의 대부분이 농민을 위한 사업, 예를 들면 토지 정비와 농법 개선, 혹은 관개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과연 어떻습니까? 산업자본주의 경제하에서 대부분의 공공사업은, 산업자본이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데 유리하도록 그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 이제 국가의 논리는 자본의 논리와 결합됩니다. 이 말은 결국 국가가 수탈과 재분배의 대상을 농민이 아닌 자본가와 노동자로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중세의 봉건사회가 붕괴된 이유를 흔히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상인자본의 발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 시대의 봉건적 토대가 무너지고 상업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한 이유는, 절대국가absolurist state가 상인자본을 보다 유력한 세금 공급원으로 보고 보호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절대 국가가 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상인자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봉건적 사회 체계가 과연 붕괴될 수 있었을까요? 이렇게 절대 국가에 의해 보호되고 성장한 상인자본이 비약적인 과학의 발전을 등에 업고 이제 산업자본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절대국가는 16세기 유럽에서 종교가 가졌던 세속적 권력이 군주에게로 이행되면서 출현한 국가 형식이다. 이러한 절대 국가는 왕권신수설과 중상주의를 토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왕권신수설만으로는 절대 국가가 현실적으로 유지될 수 없었다. 군주는 피통치자에게 복종의 대가를 제공해야 했다. 따라서 군주는 재원 마련을 위해서 무역이나 상업을 장려했고, 이것이 중상주의가 대두된 중요한 이유였다.

 

 

이 점에서 볼 때 농업생산력이 결코 미칠 수 없는 엄청난 이익을 낳게 해주는 상인자본 그리고 무한한 생산력을 자랑하는 산업자본의 잉여가치 창출 능력을 국가가 새로운 수탈 대상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어쩌면 매우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국가는 재분배의 대상, 즉 보호와 육성의 대상을 달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자본가와 임금노동자가 농민이 차지하고 잇던 자리를 대신하게 된것이지요. 이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즉 "농사가 천하의 가장 큰 근본이다"라는 국가의 슬로건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우리 주변에서 어럽지 않게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그 예로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 비준 과정이나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미군과의 자유무역협정 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농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구의 국회의원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정부와 국회뿐만 아니라 언론까지도 산업자본 편을 들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 아닌가요?
흔히들 지금은 세계화의 시대 신자유주의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세계화를 지지하는 세력은 세계와의 신자유주의의 취지를, 자본의 세계적 흐름을 방해하는 국가의 간섭을 줄이는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세계화의 시대에는 국가의 역할과 기능이 축소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 더욱 자유롭게 된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윌리엄 탭(1942~)의 생각은 이들의 생각과 확연히 다릅니다.『부도덕한 코끼리에 실려 있는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봅시다.

 

 

자유무역협정(FTA)은 국가 간의 상품의 이동을 자유화시키는 협정을 말한다. 이것은 특정 국가나 특정 지역 간의 관세 또는 비관세 장벽을 철폐하고 통일된 자본주의 시장을 확립하려는 시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협정을 맺은 두 국가는 불가피하게 하나의 경제블록은 형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북중미 경제블록, 유럽의 경제블록 등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에서 썼듯이, '부르주아지는 언제나 생산도구를 끊임없이 혁명하고 따라서 전체 사회관계도 혁명한다.' 그 글에서 그들이 정확하게 묘사했듯이 세계화는 지리적 확장을 통해 값싼 임금노동자를 찾는 과정이다. 〔……〕시애틀과 다른 여러 곳의 시위에서 시위대의 분노는, 세계적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복무하는 WTO와 같은 국제기구에 주로 맞추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국가의 역할이 점점 더 작아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세계 경제에서 국가를 무능력한 존재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국가권력은 약해졌다기보다는, 시민이 아닌 기업의 이해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의도적으로 재구성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배적이었던 사회민주주의적인 '국민적 케인즈주의'는, 이제 '세계적 신자유주의'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부도덕한 코끼리』)

 

 

산업자본이 남기는 이윤은 제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화폐량과 제품을 팔아서 생긴 화폐량 사이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 하나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10만 원이고 그것을 팔아서 얻는 값이 12만 원이라면, 이 산업자본은 2만 원의 이윤을 남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폐쇄된 지역 경제에만 머물게 되면, 산업자본은 이윤율이 점점 떨어지는 경향을 감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가 이미 소비자에게 충분히 공급 되었다면, 이전처럼 높은 가격에 휴대전화가 팔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물론 기술혁신과 조직 혁신으로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이윤율의 하락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임금이 쌀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든 제품의 희소성이 높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만 있다면, 산업자본은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하는 어려움 없이 아주 쉽게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세계화로의 충동이 불가피하게 발생했던 것이지요.


 

● 윌리엄 탭은 퀸스칼리지의 경제학과 교수이자 뉴욕시립대학 대학원 정치학과 교수인데, 자본주의의 세계화 경향에 대한 심도 높은 연구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제3세계 국가에서 세계화가 어떤 효과를 낳는지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주요 저서로 『부도덕한 코끼리』, 『전후 일본 체제』, 『정치경제의 구조 조정』등이 있다. 


●『부도덕한 코끼리』는 국내에 『반세계화의 논리』(이강국 옮김, 서울: 월간말 2001)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21세기 세계화의 사회정의를 위한 논쟁과 투쟁'이란 부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옮긴이는 한국 사회의 시민들이 이 책을 통해서 세계화의 논리에 대항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를 얻기를 바라고 있다. 세계화의 신자유주의의 폭풍이 거센 지금,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전망을 꿈꾸어볼 수 있을 것이다.

● 국민적 케인즈주의는 규제받지 않는 시장 자본주의가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결국 대공한이란 사태를 발생시키자, 국민적 케인즈주의자들은 정부를 통해서 공평하고 안정된 성장을 추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정부의 개입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국민적 케인즈주의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하나의 낡은 경제 이념으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선진 산업자본, 즉 다국적기업이 많은 미국의 경우 이들의 세계화로의 충동을 막을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권장해야만 합니다. 그들로부터 미국은 막대한 세금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지요. 결국 미국이란 국가의 역할은 압도적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다른 국가의 관세장벽을 부수는 것에 모아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만약 다른 국가에서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이 만든 제품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가한다면, 이 기업들의 이윤은 현저히 줄어들 테니가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유무역협정이란 것이 대두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FTA에 참여하는 것일까요? 미국이 FTA에 참여함으로써 이윤을 얻는 것은 당연한데, 우리나라는 이로부터 어떤 이윤을 얻게 될까요? 그것은 FTA를 통해서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몇몇 거대 산업자본으로부터 국가가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국민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FTA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국가기구와 몇몇 거대 산업자본을 제외한 나머지 시민의 삶은 이전과는 달리 전혀 보호받지 못하게 될 겁니다. 국가는 오직 자신의 주요 세금원인 거대 산업 자본의 이해관계만을 보호해주기 때문이지요. 이 때문에 우리는 윌리엄 탭의 지적을 경청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말처럼 "국가권력은 약해졌다기보다는, 시민이 아닌 기업의 이해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의도적으로 재구성되었떤 것"입니다. 세계화의 시대에 국가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모습을 더 효율적으로 바꾸고 있을 뿐이지요. 

 

 

국가가 아닌 사회를 꿈꾸며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라는 역동적 교환관계로 유지되는 기구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핵심은 재분배라기보다 압도적 폭력을 바탕으로 하는 수탈이라고 말해야겠지요. 문제는 이렇게 수탈되고 있는 대다수 국민이 스스로 국가 없는 사회를 꿈꾸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아마 우리는 너무나 길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환자인 셈이지요. 국가의 폭력을 두려워하다가 어느 사이엔가 국가의 폭력이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맑스는『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깊이 통탄했던 것이지요.

  

어떤 인간이 왕이라는 것은 다만 다른 인간들이 신하로서 그를 상대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왕이기 때문에 이제 자기들이 신하가 아니면 안 된다고까지 믿고 있다. (『자본론』)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스스로 왕이 되라고 충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왕이나 신하라는 차별 구조, 즉 수탈자와 피수탈자의 원초적 차별 구조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그런 차별적 위계 관계를 벗어난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 강해져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자유를 양도해버리고 국가권력에 복종하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그런 메커니즘에 완전히 적응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될 겁니다. 여러분이 또 하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국가가 자유인을 죽일 수는 있어도, 그 자유인으로부터 자유를 빼앗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 클라스트르(1934~1977)라는 인류학자처럼 인디언들의 삶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주인과 하인, 왕과 신하라는 차별 구조를 막기 위해 삶을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지를 이해했던 소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적 사회, 각인의 사회는 국가가 없는 사회,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다. 모든 신체에 똑같이 새겨진 각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즉 "너희들은 권력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고 복종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라고 . 우리와 분리되지 않는 이 법은, 분리되지 않는 공간, 즉 신체 그 자체 이외의 어느 곳에도 새기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끔찍한 참혹함을 대가로 그보다 더 끔찍한 참혹함이 출현하는 것을 막고자 한 이 야생인들(인디언들)의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심오함, 그것은 바로 그 신체에 새겨진 법은 망각할 수 없는 기억이라는 점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클라스트르는 젊었을 때 철학을 공부했지만, 뒤에 남아메리카 인디언의 사회와 문화를 연구하는 인류학자가 되었다. 그는 인디언 사회가 결코 야만 사회가 아니라 문명사회였으며, 오히려 진정한 야만 사회는 우리가 살고 잇는 국가라고 주장한다. 클라스트르의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국가나 권력의 문제, 그리고 인간 자유의 문제를 숙고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된다. 주요 저서로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폭력의 고고학』등이 있다.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인디언들은 사회에서 독립적인 자유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아주 잔혹한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거의 고문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부족에서는 의례를 집행하는 사람이 의례를 거치는 사람의 어깨나 가슴의 살을 1인치 이상 잡아당겨 칼로 그 살을 뚫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 당사자는 결코 어떤 소리도 내서는 안 됩니다.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용기 없는 행위로 간주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디언 사회에서 독립적인 성원으로 인정받은 모든 사람이 이런 상처를 예외 없이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 칼로 뚫린 상처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가하는 고문은 아닌 셈이지요. 그렇다면 인디언들은 외 이런 고통을 서로에게 주었던 것일까요? 왜 그들은 사회의 모든 성원의 육체에 동일한 흉터를 각인시켜놓으려고 했던 것일까요?
인디언들은 국가로 대표되는 권력관계나 차별 관계를 '문명'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국가라는 것은 억압되어야 할 '자연', 눌러서 억제해야 할 인간의 탐욕스런 '권력욕'을 나타내는 것이었지요. 그들에게 있어 진정한 '문명'이란 어떤 차별도 존재하는 않는 독립적인 자유인들의 공동체였습니다. 이 점에서 그들의 통과의례라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문명'으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살 속으로 칼이 깊숙이 뚫고 들어올 때 어떤 신음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은 '문명인'으로서 살아가겠다는 데 대한 동의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몸에 권력욕이 배어들지 않게 하려면, 타인을 얕보고 무시하며 궁극적으로는 노예로 삼고자 하는 야만스런 심성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누구나 반드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삶은 그들과 어떻게 다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자신보다 힘이 약하다고, 자신보다 지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차별을 다른 사람에게 가하고 있습니까? 처음에는 인디언들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욕구가 들 때마다 자신의 살에 새겨진 흉터, 그리고 각인된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진정한 문명인으로 남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을 겁니다. "나는 권력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고, 복종의 욕망도 지니지 않을 것이다!"
인디언들에게는 약하다고 해서 강한 자에게 복종하고, 강하다고 해서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은 문명이 아니라 자연, 혹은 야만이었습니다. 사실 약육강식의 논리는 동물의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인간이 다른 동물과 차이가 나는 이유는 그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강한 사람에게 복종하지도 않고 약한 사람을 지배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유인의 의지일 것입니다. 자신을 죽일 수는 있어도 자신의 자유를 빼앗지는 못할 것이라는 용기와 확고한 자유정신 말입니다. 이 점에서 클라스트르가 찾아가 보았던 인디언들의 사회는, 아주 오래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문명이 발달했던 사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만적인 지배와 복종의 욕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회였으니까요.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떤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까? 약자 앞에서는 한없이 강해지고,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직 많은 사람이 이런 야만의 상태를 문명의 상태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익숙한 것이라고 해서 항상 올바른 것은 결코 아니겠지요.


 

에필로그
1. "여러분의 집에는 혹시 가훈이 있습니까?" 강의 시간에 저는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어느 학생은 자기 집의 가훈이 "정직과 인내"라고 말하고, 이어서 다른 학생도 자기 집의 가훈을 소개해주더군요. "하면 된다!"라고요. 저는 속으로 웃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자에서는 칸트식의 금욕주의가 느껴졌고, 후자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가주의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정직과 인내"는 좋은 가훈이지만, 무엇인가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습니까? 가족 성원 하나하나보다 가족이란 조직 자체를 위한 규율 같으니까요. 그러나 가훈은 가족 성원 각자의 행복한 삶을 위한 조언이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 학생에게 도대체 누구에 대한 정직이고, 무엇을 위한 인내인지를 되물어보았습니다. 학생은 대답을 못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웃음과 즐거움"이라는 가훈이 어떠냐고 그에게 제안을 해보았습니다.
반면 "하면 된다!"라는 가훈에는 인문학적 섬세함이나 배려가 결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가훈이 정치적이고 심지어는 전투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은 저만이 느끼는 것일까요? 만약 이 가훈에 입각해서 살아간다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의도하지 않은 폭력을 행사하기 쉬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사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강요하면, 이것은 옛날에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로 미화되던 것이지만 사실 남에게 고통을 주는 스토킹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두 번째 학생에게 차라리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자!"라는 가훈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학생들의 가훈을 어느 정도 경청한 뒤, 저는 가훈이 아직 없다고 말한 학생들에게 이런 가훈 하나를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죽을 수도 있다." 학생들이 모두 까르르 웃더군요. 가훈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저주나 죽음의 냄새가 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 저는 정색을 하고 이 가훈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만약 이 가훈대로 여러분의 가족을 한번 만나보세요. 그럼 여러분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어머니가 오늘 음식을 맛없게 만들었다고 해봅시다. 오늘 저녁쯤 어머니가 사고로 갑자기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조금이라도 반찬 투정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먹는 음식이 어머니가 해주시는 마지막 음식이 될 수도 있을 텐데요. 또 자신의 아이가 공부를 못하다고 걱정하는 어머니가 있다고 해보지요. 오늘 낮에 그 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아이가 등교할 때 과연 어머니는 "공부 열심히 해, 절대 졸면 안돼"라고 훈계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보는 아이의 얼굴이 마지막 보는 얼굴일 수도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죽을 수도 있다"라는 교훈은 삶에 지쳐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묘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철학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2. 여러분이 지금까지 읽어보았던 이 책은 제가 소개한 가훈과 같은 역할을 하려는 의도하에 쓰여진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이 어느 정도는 여러분의 삶에 신선한 자극이 되었으리라고 믿습니다. 아니 어쩌면 많은 분들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느낌, 심지어는 불쾌한 느낌까지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아마도 여러분이 편안하게 여기고 있던 삶을 제가 낯설게 만들었기 때문일 테지요. 그러나 여러분의 낯선 느낌은 사실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연유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지금까지 여러분이 가족, 국가, 자본주의로 요약되는 삶의 환경에 길들여져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물에 사는 것에 편안해지면 물고기는 자신이 물에 산다는 사실을 낯설게 여길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항상 친숙한 삶의 조건들을 낯설게 만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뿐인 우리의 삶을 소중하게 여길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우리의 삶이 처한 환경은 심한 악취가 풍기는 곳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악취에 너무 노출되어 있어서 우리의 후각이 이미 상당히 마비되어버렸다는 점입니다.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말이 떠오르는군요.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야만 한다"고 그 스님은 늘상 강조했거든요. 결국 우리에게는 코를 막고 달아날 곳이 달이 없다는 이야기이지요. 지금 바로 여기, 악취가 풍기는 곳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유일한 터전이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악취가 풍기는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겁니다. 그것은 악취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영원히 좋은 향내만 풍기는 다른 곳을 꿈꾸기만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스님들은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네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연꽃에 비유하길 좋아하지요. 그런데 연꽃은 깨끗하고 맑은 물에서는 향내를 풍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직 썩어가는 시궁창 같은 물에서 피어날 때에만 그윽한 향기를 낸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보조국사 지눌이 말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우리가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야먄 하듯이, 악취가 풍기는 곳에서만 그윽한 향기가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낯설게 보아야만 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금 넘어져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자신이 넘어져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에는 분명 우리의 삶을 낯설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철학은 우리가 넘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철학은 불편하고 불쾌한 학문이라고 느끼기도 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넘어져 있는 자신을 서 있다고, 그리고 서 있는 사람을 넘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지요. 자신이 넘어져 있다는 것을 끝내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누구도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없을 겁니다. 물론 그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워줄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에게서 팔을 떼는 순간,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다시 드러눕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철학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의지'의 문제일 것입니다.

 

 

3. 여러분은 거미가 어떻게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옮겨 가는지 압니까? 우선 거미는 자신의 거미줄을 힘이 닿는 대로 허공속에 뿜어냅니다. 간혹 바람이 전혀 불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의 거미줄은 허무하게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미가 실망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다시 한번 힘을 내어 허공 속으로 거미줄을 뿜어냅니다. 다행히도 이때 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럼 이제 그 바람을 타고 거미줄은 다른 나뭇가지에 금방 들러붙습니다. 그런데 거미는 몹시 신중한 동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발을 그렇게 걸린 거미줄에 조용히 갖다대고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불행히도 어떤 사람이 거미줄을 찢고서 걸어갑니다. 다시 거미줄은 땅바닥으로 추락합니다. (……) 마침내 거미는 이제 자신의 줄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유히 곡예를 하듯이 자신이 있던 나무에서 또 다른 나무로 건너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신의 삶이 어디로 향해 가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과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최종적인 결말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죽을 것인데, 왜 우리는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분명히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은 항상 새로운 사건과 마주치고, 우리의 경로는 예상치 못한 일탈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우리의 삶은 거미가 이동하는 것을 닮아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항상 우발성에 노출되어 있고, 항상 낯선 사건과 마주치기 때문이지요. 이 때문에 우리의 삶은 자신의 의지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불행한 일로 보이겠지만, 우리는 이것이 우리 삶에 주어진 축복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수많은 사건이 여러분의 삶을 다채롭고 특이하게 물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글라이더를 타본 적이 있나요? 산 정상이 출발 지점이고, 산 밑에 있는 저 초원이 도착 지점입니다. 행글라이더에 몸을 싣고 산 정상을 박차고 달려가보세요. 여러분은 너무나 많은 바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바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동쪽에서 부는 바람, 서쪽에서 부는 바람, 미세하게 진동하듯이 부는 바람, 회오리치듯이 여러분을 휘감는 바람 등등, 그 바람 하나하나를 타게 되면서 여러분의 비행경로는 예전에는 미쳐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비행입니까? 비록 우리 모두가 죽음이란 종착역에 도착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 삶은 그 종착역이 아니라 그곳까지 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단숨에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우리가 오늘 다시 힘차게 일어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미가 다시 힘을 내어 거미줄을 뿜어내듯이 말이지요. 우리의 삶은 예상치 못한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은 과연 어떤 바람을 타게 될까?" 저는 이 한 권의 책이 여러분에게 근사한 바람이 되어줄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더 높이, 그리고 더 멀리 날아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하루가 새로움으로 가득하길 진심을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