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어른아이에게

오키Oki 2012. 10. 30. 17:00

 

 

 

 

 

- 김난도 지음『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에서 -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어른아이에게

  

 

 

지은이 김난도

한국 출판역사상 최단기 밀리언셀러에 오른『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저자. 1979년부터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제, 흔들리며, 어른의 문턱에 선 그대에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 어른이 아니라,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그래, 조금 흔들려도 괜찮다.

나와 당신의 흔들림은

지극히 당연한 '어른 되기'의 여정이기에.

 

 

올봄엔 매화, 개나리, 진달래, 목련, 철쭉 벚꽃이 제 순서를 지키지 못하고 한꺼번에 터져나왔습니다. 겨울이 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초여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봄을 잃고 있습니다.

 

사회도 자연을 흉내내는 것일까요? 자연이 느긋한 봄을 상실한 것처럼, 사회도 싱싱한 청춘을 잃고 있습니다. 청소년기를 치열한 입시경쟁 속에서 겨우 마치고, 푸른 꿈 높이 세워야 할 청춘들이 한층 더 엄흑해진 스펙 싸움에 내몰리다가 어느 날 확, 어른으로 내쳐집니다. 돈 벌고 세금 내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내키지 않는 어른 역할에 맞닥뜨립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는데, 어른 시늉을 해야 합니다.

 

계절은 봄을 거너뛰고, 인생은 청춘을 건너뜁니다.

 

일단 취직만 되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커져버린 책임들 속에서 좌충우돌 부딪히며 길을 잃고 나서야, 어른이 된다는 것이 거저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습니다. 청춘은 젊음이 자연스레 가져다주었는지 모르지만 어른은 다릅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학교를 졸업한다고, 절로 어른이 되진 않습니다.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고 흔들리며 조금씩 삶을 배워나가면서, 꼭 그만큼씩만 어른이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겨우, 어른이 되어갑니다.

 

좌절의 시대입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경쟁이 혹독해졌습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답답한 어둠 속에서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는 채 모두가 무작정 달리고 있씁니다. 이 이상한 경주에서, 이겼다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이념과 빈부와 계층과 세대와 지역의 격차가 넓어지면서, 사회는 구심력을 잃고 원심력만 커졌습니다. 갈등을 봉합해야 할 사람들이 갈등을 조장하고 이용하는 사이, 보통 사람에게는 패배의 계절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경제가 침체되고 정치는 무기력하며 미래마저 불확실합니다. 사회는 더욱 개방되고 있다는데 질식할 것처럼 답답해지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회사와 정부가 우리를 보호해준다는데 숨 막히도록 불안해지기만 하니 참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동요 속에서 가장 흔들리는 것은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디디려는 '어른아이'들입니다. 어른아이, 아직 어른이랄 수도 그렇다고 아이랄 수도 없는 '새내기 사회인'들을 어른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학생으로 보호받는 시기는 끝나버렸지만, 그렇다고 어른으로 대접받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어른아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들은 아직 어른 세상의 주변을 머뭇머뭇 서성입니다. 호기롭게 학교 문을 나서 세상에 발을 내디뎠지만 맞닥뜨린 사회의 새로운 규칙에 서툴고 가진 것도 많지 않으니 경쟁이 쉽지 않습니다. 이 차가운 사회는 초심자들에게 쉽게 관용을 베풀지 않습니다. 청춘의 요람인 학교의 울타리가 주는 너그러움에 익숙해진 어른아이들이 냉혹한 기성의 논리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아직도 더 먾은 시행착오가 필요할 것입니다.

 

세상이 외로워졌습니다. 다들 자기 일에 바쁩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요? 휴대폰이나 인터넷처럼 편리한 의사소통 수단은 급속도로 발달했는데, 정작 대화와 공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매체는 없었지만, 대신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족끼리 대화하고 친구와 만났습니다. 서로 관심을 가져주고 함께 아파했습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청춘의 시기가 아프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어른이 된 지금보다는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자면 수족관 속의 행복입니다. 한결같은 조명, 따뜻한 온도, 함께 생활하는 친구와 가족, 때맞춰 주어지는 먹이…… 그렇지만 그 평안의 대가는 두꺼운 유리벽입니다. 나름대로 세상을 경험했다고 생각했지만, 적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어쩌면 그것은 가족과 학교라는 보호막 안쪽에서 '바라본 세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어른이 됩니다. 유리벽이 깨졌습니다. 수족관 밖으로 던져진 헐떡이는 물고기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따뜻한 물도, 밝은 조명도, 주어지는 먹이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혼자입니다. 수족관 안에서 함께 지내던 가족과 친구가 이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삶의 갖가지 고민들은 여전히 해결된 것이 없는데, 어른이 되었다는 이유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가슴속에서 삭여야만 합니다. 아픔 중에 가장 큰 아픔은, 아픈데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회생활의 타성에 젖어 분주하게 살다보면 그 아픔을 당연시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좌절의 상처에 시간의 딱지가 내려앉으면서 이제는 그것이 아픔이라고 느껴지도 못합니다. 아프다고 말하는 순간 어리광이 될까봐 입을 꾹 다문채 홀로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종종 청춘을 보며 불만을 토로합니다. "옛날에는 안그랬는데, 요즘 애들은 도대체 왜 이래?" 하지만 요즘 어른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엣날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 어른들은 도대체 왜 이래?' 요즘엔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자꾸 실수하고 자꾸 아파합니다. 왜 그럴까요?

 

청춘의 아픔이 불안함에서 온다면, 어른의 아픔은 흔들림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학생이었을 때 어른들을 바라보면 너무나 확고해 보였습니다. 길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어른들의 굳은 표정에서 우리도 직장을 갖고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면, 저렇게 확고한 삶의 태도를 갖출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나이가 되어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겠습니다. 그들도 남몰래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간섭이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생활과 공부를 지도할 선생님은 이제 없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자립할 수 있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도 많아집니다. 자유롭지요. 하지만 자유롭다는 것은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면 걷잡을수 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흔들립니다. 제법 세워왔던 삶의 원칙이 흔들리고, 사회라는 무대에서 새로 인연을 만들어야 하는 인간관계가 흔들리고, 수입과 지출의 끝을 스스로 맞춰나가야 하는데 소비의 원칙이 흔들립니다. 학생 때 잘한다고 칭찬받았던 일들이 어른사회에서는 더이상 잘하는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게도 갈망했던 직장에 들어가고 보니 오히려 더 막막해지기만 합니다. 이성관계도 더이상 풋사랑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섹스를 고민해야 하고 결혼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인생의 아픔과 좌절 앞에서 과연 내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자존감마저 흔들립니다.

 

거리에 나가면 약도가 있습니다. 길을 찾을 때 당신은 지도에서 무엇부터 찾나요? 당신이 가장 먼저 주시해야 할 것은 'You are here'라고 쓰인 현재위치입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각 건물의 위치를 표시해놓았더라도, 지금 여기의 좌표를 알려주지 않으면 지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 'I am here'를 찾지 못하면 목표도 실행계획도 무의미합니다.

 

이 책을 쓰면서 어른이란 인간발달의 특정 '시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삶의 흔들림을 스스로 잡아나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엉망으로 흔들리면서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며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라고요. 바로 내가 그렇게 어른이 되어왔다고요.

 

 

 

당신의 가치

당신은 중요하다.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형편없는 지경에 놓여 있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가치 있다.

인간은 가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 있다.

 

대학 3학년 때다. 학과동아리에서 학술제를 위해 '성공'한 선배를 만나 인터뷰하고 기금을 모금한 적이 있었다. 우리 조에서 만난 분은 어느 부장판사님, 대학교 재학중에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연수를 마친 후 동기 중에 항상 1등으로 승진해서, 누구나 인정하는 대법관 후보 1순위가 되신 분, 이를테면 전국 법과 대학생들의 롤모델 같은 분이었다.

 

늦은 오후 그분 집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어렵게 찾아온 젊은 후배들이 반가웠는디 저녁을 사겠다고 하셨다. 반주를 곁들여 불고기를 먹은 후, 작은 맥줏집에서 조촐한 술자리가 이어졌다. 다들 조금씩 취했고 집무실에서보다는 훨씬 솔지갛고 개인적인 이야기가 오고갔다. 왁자지껄하다가 아주 잠시 침묵이 흐른 순간, 내 친구가 물었다.

"판사님은 왜 사세요?"

정적 속에서 불쑥, 그것도 아무 맥락 없이 던진 약간은 무례한 질문이라,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우리는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해서, 일제히 판사님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에 나온 그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죽지 못해 사는 거지, 뭐."

자조도 아니고 농담도 아닌, 비장한 것오 아니고 비아냥도 아닌,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담긴 듯한 말투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선망받는 삶을 살고 계신 분이 사는 이유가 고작 '죽지 못해' 서라니? 그러면 저분처럼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우리는 뭐가 되는가.

'대한민국의 사법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같은 거창한 대의라든가. 하다못해 "꼭 대법관이 한번 되어보고 싶어서'같이 속되더라도 개인적인 이유를 꼽았다면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스물둘이던 나는 어렴풋이 느꼈다.

'인생에는 성공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가 있구나…'

그리고 이제 내가 그 부장판사님의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왜 사는가? 나의 삶은 왜 의미 있는가?

사람들은 세상이 인정할 만한 뛰어난 실적과 성취를 이뤄야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의 모든 법대생들이 가장 본받고 싶어하는 판사님이라 해도 자신의 삶에 대한 존중이 빠져 있다면 그 성취란 백사장의 모래성처럼 부질없다.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존귀함에 대해 인정할 수 있어야 자신을 존중할 수 있고, 그래야만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어른의 성찰이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는 일이다.

나는 왜 중요한가? 심지어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형편없는 지경에 있더라도, 나는 왜 여전히 가치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시킬 수 잇는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당신이 사랑하고 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버린 친구의 장례식을 다녀오면서, 다음은 내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공연히 감상적이 되어서 그런 게 아니다.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따. 그런 일이 내게는 닥치지 말란 법이 있는가. 운전중 아슬아슬한 순간을 넘길 때마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오늘은 깨끗한 팬티를 입었는지 생각해본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키로미터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오규원,「죽고 난 뒤의 팬티」중에서

 

 

어떤 팬피를 입고 죽은들 누가 상관하랴만, 그래도 궁금하다. 나는 어떤 팬티를 입은 채 죽을 것인가?

팬티 대신 수의를 입고 누워 있을 나의 장례식장을 상상해본다. 어느 병원의 장례식장 13호실 복판에 확대한 내 사진 위로 검은 띠가 둘러져 있고, 그 오른편으로 집사람과 두 아이가 상복을 입고 서 있을 게다. 사람들은 봉투를 내고 들어와 향을 올리거나 국화 한 송이를 놓고 상주와 맞절을 한 후 옆방에 가서 육개장을 한 그릇씩 먹을 것이다. 어떤 이는 생전의 내 얘기를 하며 안타까워하겠지만, 어떤 이는 이내 누구 장례식이었는지도 잊은 채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 사는 애기를 나누느라 바쁠 것이다.

 

 

생을 다한 마지막 순간, 내 영결식장에서 드러날 나의 가치는 과연 얼마만큼일까? 내가 헤어져서 슬픈 사람들, 나를 잃어서 슬픈 사람들, 그 합이 아닐까? 지금 내가 죽는다면 가장 아까운 것은 벌어놓은 돈이나 놓고 가야 하는 직위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누군가가 나와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간단한 사실에 진심으로 마음 아파할 때. 그것이 나의 가치를 말해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이 나의 가치다. 그것은 내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고 얼마나 지위가 높아졌느냐와 무관하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내가 아무리 형편없는 것만 남겼더라도 나와 사랑을 나눈 사람들이 있는 한, 나는 그만큼의 값어치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사랑과 우정을 나눈 사람들의 수도 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 인생의 값어치를 알아줄 사람은 한둘이어도 충분하다.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다면 그 인생은 이미 가치 있는 것이다. 인생이 본질적으로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소망이, 그들이 사랑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이 나를 더 열심히 살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당신의 삶은 가치 있다. 비록 형편없는 지경에 놓여 있더라도, 사랑한 사람이 있는 한.

 

 

둘째, 당신은 아직 세상을 더 낫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조금씩 좋아지고 누군가가 행복해지는 데 기여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꼭 세계평화를 지키는 거창한 일일 필요도 없다. 아들 녀석이 레고를 조립하는 것을 도와 성채가 하나 완성됐을 때, 커다란 기쁜을 느낀다. 무언가 근사한 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작은 화분을 가꾸고 내 집 앞길을 청소하는 일은 지구의 한 귀퉁이를 아름답게 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기쁘게 했고 편리하게 해준 것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들 수 있다면 나는 적어도 그만큼은 가치 있다.

꼭 돈이나 재능을 기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종사하는 직업과 맡은 역할에 충실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세상에 기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사람이지만 선생으로서 내가 가진 지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고 그들이 좀 더 나은 품성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 데 최선을 다한다면, 학생들은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사람이 될 테고 세상도 그만큼 더 좋아질 게다. 비단 선생만 그러하겠는가? 무역회사에 다니는 이는 좋은 제품을 수출하는 것으로, 빵집을 차린 이는 맛있는 빵을 만드는 것으로, 도둑이나 사기꾼이 아닌 한, 제 일을 충실히 하는 것만으로 세상은 조금씩 아름다워진다.

내가 한 일로 실제로 몇 명이 영향을 받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단출한 가족의 어머니, 아내도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중요한 사람이다. 대리석과 황금으로 지어진 궁전에 누워도, 지친 몸을 감싸줄 수 있는 담요 한 장이 없다면 인간은 편히 잠들 수 없다. 주부란 이 담요 같은 존재다. 빛나지는 않아도 없어서는 안 될, 빛나지 않기에 더욱 소중한, 한 인간의 행복을 포근히 감싸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달그락달그락 설저기하는 아내의 좁은 어깨 사이에서 지구보다 더 큰 나의 우주를 본다.

그러므로 당신의 삶은 가치 있다. 비록 알아주는 사람이 많지 않아도, 이 세상 누군가를 조금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한.

 

 

셋째, 당신은 조금씩 더 새로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강연에서 삶을 스마트폰에 비유한 적이 있다. 다양한 에플리케이션을 깔수록 활용 가능성도 무궁무진해지는 스마트폰 말이다. 그런데 많은 젊은이들이 손 안의 스마트폰은 자유자재로 스면서, 정작 '삶'이라는 스마트폰으로는 통화만 하려 든다고 야단치면 뜨끔해하는 눈치다. 개인적을 이 스마트폰의 비유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 아이디어는 실은 니체의 책을 읽다가 떠올린 것이다.

니체식으로 표현하자면, 모든 인간은 어떤 초월적인 가치를 지닌 완성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니체는 초인사상으로 유명한데, 초인은 산에서 득도하고 내려온 도인이나 하느님 같은 절대자라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품고 있는 '개별적 가능성'을 말한다. 니체가 보기에 "간은 그 초월적 가치를 완성하기 위해서 매순간 자신의 삶을 부단히 극복하려는 실존적 결단을 내리고 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가장 아름다운 궁극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 모습에 조금씩 다가가다 위해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와 싸우며 노력하고 있다. 뜻은 무척 좋은데 표현이 너무 어려워서,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스마트폰을 예로 든 것이다. 스마트폰이든 니체든, 내가 전하고 싶은 메세지는 하나다. "자신이 될 수 있는 최선의 자기가 되도록 노력하라."

그러므로 당신의 삶은 가치 있다. 비록 세상을 뒤집어놓을 큰 변화를 만들어내진 못하더라도, 조금씩 더 새로운 '나'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최선의 '나'가 될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초인의 모습은 어느 순간 한 방에 이룰 수 있는 성취가 아니다. 초인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극복하려고 시도하는 노력들 속에 있다. 남들의 인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핵심은 나다. 그러니까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연봉이나 직위, 혹은 자식이나 배우자의 성공이 아니라, 내가 조금씩 배우고 성장하면서 더 풍요한 존재가 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평판이 아니라. 나라는 이름의 초인에 끊임없이 다가가려는 시도들이 나의 가치를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시도하는 그 무엇이다.

그 시도는 항상 '조금씩'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매일'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간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행복은 절대치가 아니라 점증분으로 결정된다. 어떤 절대적 기준치만큼 가져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제;보다 조금 더, 기대보다 조금 더 가질 수 있을 때 행복하다.

 

 

어떻게 하면 더 풍요한 나를 만들 수 있을꺼? 풍요는 '가지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소유보다는 경험이 중요하다. 소유물은 언제든지 잃어버릴 수 있지만 경험은 내 존재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누구도 빼앗지 못한다. 많이 체험하고 배우면서 성장해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풍요다.

 

 

당신의 삶은 가치 있다,

조금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수 있는, 당신은 가치 있다. 당신의 사명에 다가가며 남들을 돕고 세상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는, 당신은 가치 있다. 좀더 완성된 자신을 위해 조금씩 배우고 경험해가는, 당신은 가치 있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떠나느냐 남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에잇, 사표…… 내자, 사표 내자!"

직장인 둘이 포장마차에서 울분을 토하고 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장면을 지켜보던 '백수'는 사표를 쓸 수 있는 직장인이 부럽고, 또 누워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백수를 지켜보는 갓 입대한 이등병은 그렇게 뒹굴뒹굴 누워 있는 백수가 부럽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던 직장인들은 오히려 제대만 생각하면 되는 이등병을 부러워한다. 화제가 되었던 어느 자양강장제 광고.

아니 광고뿐이겠는가. 현실에선 더 많은 사람들이 지금부터라도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삶을 살겠노라는 결단 앞에서 고민한다. 요즘처럼 직장생활 빡빡한 사회에서 마음속에 사표 한 장 품고 출근하지 않는 사람, 누가 있으랴!

 

 

처음 취직이 되었을 때는 그래도 한숨 돌렸다고 생각했다. 학창시절 목표하던 '꿈의 직장'은 아닐지라도, 그래도 내게 돈을 주는 곳이 생겼다는 사실이 얼마나 대견했던가! 첫 출근날 입을 옷을 고르던 새 아침에 솟구치던 희열과 팽팽한 긴장감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신입사원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회사가 적응하기 어렵고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요즘처럼 취업이 어려운 시기에 그래도 다닐 회사가 있다는 게 어디냐고 스스로를 위안해보지만 자꾸 다른 생각이 든다. 일단 취업하는 데 급급해서 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고민을 비로소 시작하게 된다. 지처 퇴근하다가 혼자 들른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비울 때, 차라리 이등병이 부러워지는 것이다.

 

 

이 시대의 청춘이 아픈 이유 중 하나는 원하는 곳에 취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건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이다. 많은 취업준비생들이 대기업에 입사하기를 희망하는데, 자리는 제한돼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취업에 성공한 신입사원들 중에 조기퇴사하는 비율이 적지 않다. 한국의 간판 대기업 10곳을 조사한 결과, 대졸 신입사원들이의 입사 3년 이내 퇴사율은 10개 회사의 절반가량이 10% 내외였고 20%를 넘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

 

 

한 회사에서 강연을 마치고 CEO와 커피 한잔을 마셨다. 내가 젊은 직장인들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니까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 젊은 사원들은 학교에서 했어야 할 고민을, 회사 들어와서 시작하는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요즘 청춘이 힘든 이유가 사춘기 시절인 중고등학교 때 했어야 할 고민들이 대입 준비 때문에 유보되다가, 대학생 때 비로소 터져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해온 탓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학생 때 했어야 할 고민들을 취업준비 때문에 유보하다가 직장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제때 제 고민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어쨌든 대한민국의 직장생활은 누구에게나 녹록지 않다. 그래서 수많은 젊은 직장인들이 입사와 더불어 학생 때 이미 끝냈어야 할 고민을 새로 시작한다. 더구나 크게 내키지 않는 상태에서 너무 늦기 전에 취직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입사한 회사라면 더욱 그렇다. 직장인을 위한 자기계발서나 직장상사들은 '입사했으면 일단 3년, 아니 적어도 1년이라도 버텨보라'고 권하지만, 그만두려는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퇴직해야 더 빨리 새 직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적당한 시기에 직장을 옮겨줘야 몸값을 올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른바 '직테크職tech'다.

 

 

사장님들은 '요즘 젊은 직원들은 인내심과 적응력이 부족하다'고 개탄하지만, 퇴사자들은 '요즘 회사는 업무가 과다하고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준다'고 분노한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직장문화는 문제가 좀 있다고 생각한다. 세 사람이 해야 적정한 일을 둘이서 해내야 하니, 한 사람은 취직을 못 해서 불평하고, 두 사람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불행하다. 어떻게든 개선되어야 한다.

게다가 시대도 변했다. 불과 수십 년 전에는 배우자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상태에서 중매결혼을 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살아야 했다. 결혼생활뿐만 아니라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였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강해서 회사는 가족과 같고, 그것을 떠나는 것은 거의 배신으로 취급받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 팔자가 그런 것'이라고 위안하며 참아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평생을 참고 살던 노인들도 황혼이혼을 감행하고, 새내기 직장인들은 여차하면 사직서를 날린다.

심지어는 기회가 닿는 대로 '더 이름 있는 회사'를 찾는 경우도 있다. 사실 우리나라의 혹독한 취업현실에서는 1순위로 희망하던 '바로 그곳'에 취직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선택으로 문을 두드린 곳에 입사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많은 고등학생과 재수생 들이 자가만의 꿈과 적성이 아니라 입시학원에서 만든 배치표를 보고 대학을 지원하고, 좀더 위 칸에 있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에 절망한다. 이 '배차표 사고'를 버리지 못한 많은 대학생과 취업준비생들이 같은 마인드로 매출액 순위에 따라 기업을 한 줄로 세운 후, 더 위에 있는 대기업에 취직하지 못하면 다시 절망한다. 참으로 소모적인 열패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직장은 첫 직장이 아니라 마지막 직장이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남고 언제 떠날 것인가? 물론 상황마다 다를 것이다. 직장마다 환경이 다르고, 각자의 열망이 다른데, 일률적으로 '이것이 답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일반론을 이야기하자면, '지금 다니는 직장은 도저히 안 되겠다'는 이유라면 좀더 참고, '새로 시작하고픈 일에 대한 열망으로 가슴이 뛴다'면 용기를 내라는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큰지는 자기 자신만 알 수 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진실로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자신의 영혼이 더 높은 차원을 향하도록 이끌어준 것은 무엇이었는가? 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기쁨을 안겨주었는가? 지금까지 자신은 어떠한 것에 몰입하였는가? 이들 질문에 대답하였을 때 자신의 본질이 뚜렷해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다.

 

 

'자신이 진실로 사랑하고, 영혼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주는 일'이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탑을 쌓듯이 계속 쌓아올려야 한다. 그러므로 단지 '못해먹겠다'는 이유로 사직서를 던지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무책임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또 가보지 않은 새로운 직장에서는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갖는다. 학창 시절의 자유로움을 뒤로하고 처음 맞닥뜨린 빡빡한 직무환경과 새로운 직장에 대한 동경이 만나면, 이직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커진다.

사실 이것은 취업 준비를 할 때부터 고민해야 한다. 요즘 취업이 워낙 힘들다보니, 일단 뽑아만 준다면 어디든 좋다는 식의 '묻지 마 지원'이 많다. 그러나 '묻지 마 퇴사'도 자연스럽게 많아진다. 절박한 심정이야 십분 이해하지만, 전 생애를 놓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큰 손해다.

 

 

'천천히 서두르라'는 말이 있다. 내 꿈의 크기를 객관적으로 재봐야 한다. 막연한 도피가 아니라 명확한 도약이라는 자기 확신이 있을 때 '결정적 순간'은 만들어진다. 그 순간을 위해 천천히 서두르며 준비해야 한다.

그 시점까지는 이 말 한마디가 등대다.

"사랑하지 않을 것이면 떠나고, 떠나지 않을 것이면 사랑하라."

마음에 사표를 품은 직장인은 누구나 선택의 기로 앞에서 고민하는 햄릿이다. 그 유명한 고뇌의 대사가 바로 당신의 번민이었던 것이다.

 

 

떠나느냐 남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참혹한 스트레스의 화살을 맞고도 참아야 하느냐,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실직자의 고난에 맞서 용감히 싸워 그것을 다시 극복해야 하느냐, 어느 쪽이 더 현명한 일일까?

 

세익스피어,『햄릿』3막 1장 (강조는 필자가 바꾼 표현)

 

 

 

 

일이냐, 돈이냐

 

 

매일 아침 당신 앞에 돈을 벌어야 할 24시간이 아닌,

살아야 할 24시간이 펼쳐진다.

달아나고 싶은 유혹에 지지 말고,

지금을 생생히 살아야 하는 이유다.

당신이 투자할 것은 돈이 아니라 당신의 삶 자체다.

틱낫한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서 직업을 갖고 일을 한다. 이 사실은 자못 분명한 것 같다. 돈을 바라지 않고 하는 일은 '자원봉사'나 '재능기부'라고 부르지 직업이라고 하지 않는다.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 전업주부의 가사노동도 현물의 화폐가 오가지 않을 뿐, 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 계산한다.

많은 이들이 더 많은 보수를 주는 직업을 흔히 더 '좋은 일'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여기에 역설이 있다. 인생 선배들은 돈 때문에 일하지 말라고 한다. 큰돈을 번 사람일수록 "나는 돈 벌려고 열심히 일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을 하다보니까 큰돈이 생겼다"고 말한다. 자수성가한 분들의 인터뷰를 보면 모두 같은 취지의 말을 한다. 왜 그럴까? 그냥 겸손일까? 아니면 가식일까? 돈을 벌기 위해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을 가장 경멸했다는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 대학 졸업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을 찾으십시오."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일을 찾는다는 것, 말은 좋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우선 스스로에게 진솔하게 묻자. "나는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가?"

 

 

일본 도쿄 대학 강상중 교수의『고민하는 힘』이라는 책을 읽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과연 사랑하는지를 판별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떠올려보았다.

"한 30억원 정도의 로또에 당첨이 된다고 해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할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되는 것이다. "야! 그런 큰돈이 있는데 이런 일을 뭐하러 해?"라고 답한다면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이고, "아니야, 그래도 이 일은 계속할 것 같아, 지금처럼 아등바등하진 않더라도 즐기면서, 그냥 재미로라도 …"라고 답한다면 당신은 그 일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로또에 당첨되더라도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는 사람은 대단한 행운아다. 실제로 그런 비율은 대단히 적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로또만 된다면, 좀 쉬거나 놀면서 다른 일을 찾아보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로또에 당첨되고 나서 오히려 불행해지는 사람이 많다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일을 그만두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에는 돈벌이 이상의 의미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문제는 우리가 로또에 당첨될 확률도 매우 낮고, 진정 사랑하는 일을 찾아 변신을 모색하기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진정 사랑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을 찾기가 쉽지 않고, 찾는다고 해도 그 일을 실행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는 현실이 문제다. 예를 들어 '의사가 되고 싶다. 의사만 될 수 있다면 정말 내 일을 사랑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국가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아예 의사가 될 수 없다. 마음먹었다고 거저 되는쉬운 일이 아니다.

 

 

일본의 100세 최고령 게이샤 고킨 씨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천직은 무슨, 달리 먹고살 게 없으니까 한 거지. 인생은 이상해. 싫다고 싫다고 울면 더 그 일을 하게 돼. 난 100살까지."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할 수 없다면? 그 어떤 재미도 찾을 수 없다면?

 

 

그렇다면 일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은 뭘까? 그대는 궁금하지 않은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성장하는 것이다.

 

 

이 구절을 읽고 실망하는 당신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성장? 그게 뭐, 재밌다고? 역시 천생 '선생님'다운 틀에 박힌 모범답안이군,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평범한 답 속에 비밀이 있다.

사람은 자기가 조금씩 성장하는 것을 느낄 때 희열을 느낀다. 중독성 강한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게임회사에 다니는 이가 말하기를, 게임을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레벨이든, 계급이든, 아이템이든, 어딘가에 게이머가 '성장'하는 설정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야 게이머들이 더 깊이 게임에 빠져들 수 있다고 한다.

운동 가운데서는 골프, 당구, 마라톤이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든데, 이들의 공통점은 성장의 요소가 강하다는 것이다. 이 운동들은 자기 레벨이 정해진다는 점에서 다른 운동과 확연히 다르다.

'오늘 드디어 싱글을 기록했다' '200을 놓고 이겼다' '마의 네 시간 벽을 깼다'는 식으로 실력 향상을 객관적인 지표로서 보여주기 때문에, 한번 맛을 들이면 헤어나기 힘들다. 배우고 자라는 일은 경쟁에서 이기는 일보다 재미있다.

동화나 애니메이션에도 성장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포켓몬스터>가 아이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것은 '진화'라는 개념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성장하고 변화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아이들의 본능을 정확히 꿰뚫어본 것이다.

 

 

자, 이제 동의하는가? 인간의 기쁨 중에 가장 큰 즐거움은 성장하는 것이다.

성장하는 것이 오락이나 취미에서조차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라면, 일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니, 더 본질적일 것이다. 일하면서 성장하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그 일이 재미있고 또 사랑할 만한 것이라고 여긴다.

예컨대 편의점에서 하루 종일 바코드를 찍으며 다리가 퉁퉁 붓도록 아르바이트하는 일은 전혀 재미있지도 않고, 큰돈이 되는 일도 아니다. 편의점 알바를 평생직업으로 생각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시간을 때우며 일당을 번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편의점 알바에서도 시급보다 훨씬 소중한 것을 얻을 수 있다. 소비자의 매장 내 행동을 학습하고, 매장 입지에 관한 노하우를 터득하며, 본사의 납품을 받으면서 재고관리의 기법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래서 매일매일 '나는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그 일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성장 과정은 언젠가 펼쳐나갈 자기 사업을 큰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밑바탕이 될 것이다.

세계 최고의 투자가로 불리는 워런 버핏은 여덟 살 때 동네 쓰레기통에서 병뚜껑을 모으며 음료의 수요를 짐작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자기 관심사에 대한 집중과 사소한 일들에서도 경험을 쌓으며 배우겠다는 열정이다.

 

 

자신의 일이 시시해 보이는 것은 자꾸 다른 직업과 자신의 직업을 비교하기 때문이다. 경영기법에 벤치마킹bench-marking이라는 용어가 있다. 강물의 깊이를 재기 위해 세워둔 막대를 '벤치마크'라고 하는데,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상대를 정해 자신과 비교하고 모자란 점을 찾아 배우는 것을 말한다. 기업을 경영할 때뿐만 아니라 인생을 설계할 때에도 벤치마킹은 필요하다.

하지만 일을 시작하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벤치마킹보다는 '퓨터마킹future-marking'이 아닐까 생각한다. 톰 피터스라는 학자가 "2010년을 살지만 2020년의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퓨처마킹이라고 불렀다. 미래사회를 내다보고 그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퓨처마킹을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싶다. 즉, 자신의 일을 현재 다른 사람의 일과 비교하지 말고, '미래의 자기상'을 세우고 그 모습을 위해 차근차근 배우고 성장해나가라는 것이다. 타인을 벤치마킹하려 하지 말고 자신의 미래를 퓨처마킹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자꾸 남이 하는 일만 선망하는가? 오스카 와일드의 표현을 빌리면, "당신 자신이 되어라, 다른 사람의 자리는 모두 찼다."

 

 

물론 돈은 세상 속에서 내 일의 쓸모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어주기도 한다.

일본의 만화각 사이바라 리에코는 '돈이 되지 않더라도 나만 만족하면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현실에 잘 착지시킬 수 없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뜬구름 같은 덧없는 꿈으로 끌나고 만다. 그러나 '내 재능으로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를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현실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돈을 벌고 자기 자신과 가족의 삶을 책임지다보면 일에 대한 절실함이 생기고 더 잘해야겠다는 자극을 받는다.

하지만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에 생각이 갇히면 우리는 일의 수인囚人이 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수입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일에 대한 사랑이고 성장의 재미다.

그렇게 자신의 '퓨처'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을 때, 돈은 자연히 따라온다. 그래서 수많은 성공담이 돈을 목표로 했을 때가 아니라 자기 성장을 목표로 했을 때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일은 나의 정체성이며 본질이다. 영어식 표현으로 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 자체We are what we work on"인 것이다. 그런 나의 존재 가치를 고작 돈으로 환산한다면, 그러한 행위야말로 모욕적이지 않은가?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을 찾아라. 하지만 찾기가 쉽지 않거나 그 일을 당장 시작하기 힘들다면,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꾸준히 성장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아무리 하찮게 여겨진다고 하더라도, 지금 여기서 하는 일에서부터 끊임없이 배울 것을 찾아 배워나가야 한다. 그것이 로또에 당첨되더라도 지금 하는 일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소비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어릴 때 경주용 모형자동차를 무척 가지고 싶었다.

경주로를 8자로 조립하고 그 위에 작은 모형차를 놓은 후 리모컨을 누르면 쌩하고 트랙을 도는 그 장난감 세트가 목매게 갖고 싶었다. 친구네 집에서 처음 봤는데 어찌나 멋있던지! 탐이 나서 몇 달 동안 생떼를 부리다시피 졸랐는데, 이게 값이 꽤 비싸서 어머니는 끝내 사주지 않았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 큰애를 낳고 장난감 전문점에 갔다가 바로 그 경주용 자동차 세트를 봤다. 그때도 살림이 어려울 때라, 아이의 지능 발달과 정서 함양에 꼭 필요한 거라고 아내를 설득해서 겨우 샀다. 돌도 안 된 애한테 웬 모형자동차? 실은 어릴 때 못 갖고 놀았던 내 한을 푼 것이었다. 아마 아내도 눈치챘으리라.

집에 돌아와서 열심히 트랙을 조립하고 시험운전을 해봤는데, 잘 달렸다. 잠시 동심으로 돌아간 듯 흐뭇했다, 다시 분해해서 상자에 잘 넣으면서 생각했다. 자주 갖고 놀다가 아들이 크면 물려주리라고.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시 꺼내볼 생각도 나지 않았고, 이사할 때마다 천덕꾸러기 노릇만 할 뿐이었다. 차일피일 아이에게도 물러주지 않다가 결국 버리고 귀국했다.

 

 

우리는 사고 싶은 물건이 참 많다. 백화점에 가면 반짝반짝 빛나는 상품들이 자기를 데려가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다. 신용카드 끝을 손톱으로 톡톡 튕기면서 '지를까 말까'를 고민하며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소비의 성전'을 거닌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정말 없으면 못 살 만큼 꼭 필요하다고 믿었던 물건들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별로 쓰지 않는 물건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사할 때마다 물건을 한 보따리씩 내다버리며 나는 중얼거린다. "그때는 저게 왜 그렇게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탐내는 많은 상품들이 그 모형자동차 같은 거리고 생각한다. 한때는 눈이 뒤집힐 만큼 가지고 싶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한순간에 시시해 보이는, 어릴 때는 누가 사주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가질 방법이 없다. 매우 절망스러운 상황이지만 장점도 있다. 부모님이나 어른들이 그 물건이 정말 필요한지 판단해주고 구매를 통제 해준다. 하지만 소득이 생기고 지출이 자유로워지는 어른이 되면서, 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큰맘먹고 할부로라도 살 수 있는 여건이 된다. 바로 그 점이 양날의 칼이다. 소비를 조절해줄 사람이 곁에 없다. 스스로 통제해야 한다. 어른이 되면서 직면하는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 중 하나는 단연 소비다.

 

 

현대를 소비사회라고 한다. 구매욕망에 확 불을 지르는 멋진 제품이 많아졌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세계 각국의 눈부신 브랜드가 눈앞에서 넘실댄다. '소비 권하는 사회'를 살며 소비의 맛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게 되었다.

어느덧 소비는 우리의 종교가 됐다. 물신物神을 섬기고, 브랜드를 경배하고, 쇼핑몰을 순례하고, 소비의 주기도문을 암송한다.

 

 

랜드마크(홍콩의 거대 쇼핑몰)에 계신 아르마니여.

아버지의 구두가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프라다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쇼핑이 파리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센트럴(홍콩의 거대 쇼핑몰)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저희에게 남편의 비자카드를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수수료를 떼어간 자들을 용서하여준 것같이,

우리의 바닥난 은행 잔고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미쓰코시 백화점에 빠지지 말게 하시며,

윙온(홍콩의 최대 여행사)에서 구하소서,

샤넬과 고티에와 베르사체, D&G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멕스~

 

소비자학을 연구하는 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당면하는 수많은 문제가 소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옛날보다 요즘의 청춘이 경제적인 여건은 더 좋아졌는데도 더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요즘 젊은이들이 '소비의 맛'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는 것이다.

옛날 젊은이들은 소비를 잘 알지 못했다. 더 근검하고 착해서가 아니다. 워낙 전체 소득도 낮았고 좋은 상품과 유명한 브랜드가 별로 없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소비의 재미를 몰랐던 것뿐이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물질보다는 의미를 먼저 생각할 수 있었다. 옛날 사람들이 더 어려운 시기를 살았음에도 덜 빈한하고 덜 아프게 느꼈던 이유다. 다 같이 소비를 몰랐으니까.

반면에 요즘의 청춘들은 어릴때부터 TV나 영화를 통해 화려한 소비생활을 너무 생생하게 보면서 자란다. TV속의 인물들이 당연하다는 듯 누리는 넓은 집 , 큰 차, 멋진 핸드백, 예쁜 옷, 아름다운 구두를 나도 빨리 갖고 싶은데, 현실에선 너무 힘드니 자꾸 조바심이 나고 소외감을 느낀다. 이것이 아픔의 한 원인이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환경오염, 범죄, 인성파괴 등 여러 사회문제도 실은 이러한 소비주의와 관계가 깊다. 그래서 소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조금만 바꾸면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 사회도, 당신도.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소비는 어떠한가? 그 물건을 왜 원했는가? 브랜드 때문인가, 유행 때문인가, 누군가를 의식했기 때문인가? 당신은 꼭 필요해서 구매했다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실은 뒤처지는 것이 싫어서, 혹은 단지 새것을 사는 기쁨에, 혹은 누군가 자기를 다르게 보아주기를 바라면서 카드를 꺼내들었는지도 모른다. 계산대 앞에서, 우리는 모두 거짓말쟁이다.

 

 

어떻게 하면 이 소비의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물론 우리 모두 철저하게 금욕주의자가 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좋은 물건이 좋다. 기분이 좋아지고 생활도 편리해진다. 흔히 '행복과 소비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연구에 따르면 소득과 소비가 개선되면 행복도 증가한다. 나라를 막론하고 그렇다. 그렇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일정 수준까지만 그렇다는 점이다. 대략 월 400만원까지는 소득이 증가할수록 행복도가 비례해서 올라가지만 그 이상은 큰 상관관계가 없다. 또 잘사는 나라의 국민이 못사는 나라의 국민보다 행복의 수준이 더 높지도 않다. 이를 '이스틸린의 역설 Easterlin's paradox'이라고 한다.

이스틸린의 역설이 의미하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어느 수준부터는 물질로 인해 별로 더 행복해지지 않는데도, 더 좋은 물건을 갖고 싶다고 스스로를 들볶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소비가 우리를 편리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도구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소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남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새로 유행하는 '신상'을 산다.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려고 쇼핑몰을 돌아다닌다. 무리해서 구입한 소위 명품이란 결국 남들의 무시를 막아주는 갑옷이고, 자기가 취향 있는 계층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훈장이며, '나는 멋지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가면이다.

무언가를 구매하는 행위 자체가 좋아서 충동적으로 또는 그냥 재미로 지갑을 열기도 한다. 이런 잉여분의 소비가 바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도 못하면서, '지르게' 만드는 중독형 소비다.

마시면 마실수록 목마르게 하는 바닷물처럼 오히려 더 큰 소비의 갈증으로 몰아넣어 되레 더 불행하다고 느끼게 하는 역설의 소비다.

 

 

어른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교육을 들라면 나는 '소비자교육'이라고 말하고 싶다. 경제교육이 아니다. 소비자교육이다.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올바른 소비자가 되어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서 제일 좋은 점 중의 하나는 누군가에게 돈을 타내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도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소비는 우리가 어른이 됐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징표의 하나다. 하지만 반대로 소비는 우리가 행복한 어른이 되기 위해 넘어야 하는 가장 확실한 장애물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간섭하는 사람이 줄어들어 오히려 소비의 욕망을 통제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무욕無慾이 위엄을 만든다'고 했다. 필요한 게 없는 사람이 무서운 이유는 무엇에든 당당하게 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심을 가지지 않고 본질적인 즐거움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의 욕망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강렬한 것이 소비이다. 따라서 소비에 대한 욕망을 조금만 줄이면 위엄 있게 살 수 있다. 인생 앞에 비겁해지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 물건 살 돈을 조금만 더 아끼면 자기 자신에게 투자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생긴다. '무엇이 인생에서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실천이 가능해진다.

"이거 주세요"하고 쿨하게 말하기 직전에 스스로에게 딱 세 가지만 묻자.

하나, 이것은 정말로 내게 필요한 물건인가?

둘, 이것은 합리적인 가격인가?

셋, 한 달 후에도 나는 이것을 지금처럼 간절하게 원 할 것인가?

셋 중 하나라도 자신 있게 예라고 답할 수 없다면, 과감히 돌아서라.

 

 

소비의 중용 속에 성장과 행복의 답이 있다. 당신은 어떻게 살賣 것인가, 또 어떻게 살生 것인가?

 

 

 

남의 눈

유학할 때와 연구교수로 일할 때, 미국에서 산 적이 있다. 두 번 모두 아내와 함께 머물렀다. 한 가지 공통된 기억은 집사람이 외출할 때의 차림이 미국에선 사뭇 달랐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통이 넓은 치마에 티셔츠 하나 걸치고서 슈퍼마켓에도 가고 애들 데리러 학교에도 갔다. 아주 특별한 일이 있지 않으면 화장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는 집 앞 편의점에 갈 때에도 정성스럽게 화장하고 옷도 잘 차려입는다.

집사람만 그런 것 같지도 않다. 한번은 연구교수 시절 알고 지내던 유학생 부부를 동네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 부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늘 보았던 펑퍼짐한 트레이닝복 차림이 아니라, 그냥 산책 나오는 길이라는 데 아주 멋지게 정장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 유학생이 새 부인을 얻은 줄 알았을 정도였다.

 

 

며칠 전 둘째아이 학교에 간다고 열심히 얼굴에 그림을 그리고 있던 아내에게 물었다.

"왜 미국에서 애들 학교 갈 때는 안 하던 화장을 여기서는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아내의 너무나도 간명한 대답.

"여기는 보는 눈이 많잖아."

재미있다. 미국 사람의 눈은 보는 눈이 아니고, 한국 사람의 눈만 보는 눈인가? 집사람만 탓할 일도 아니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런다. 미국에서는 아들의 모양새에 전혀 상관하지 않던 나도, 한국에서는 꼭 잔소리를 하게 된다.

"머리 꼴이 그게 뭐냐? 창피하게."

그러고 보니 누군가를 책망할 때, 꼭 누군가를 의식하는 말이 꼬리에 붙는다.

"이걸 성적이라고 받아왔냐? 남부끄럽게."

"제발 옷 좀 그렇게 입지 마, 남사스럽게."

"역시 명품으로 사길 잘했어. 다들 보는 눈이 다르더라니까?"

집 근처 우면산에 가보면 다들 옷차람이 무척 화려하다. 요즘 아웃도어 의류는 무척 비싸다.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첨단 소재를 써서 그렇단다. 다들 히말라야에 올라도 될 만한 복장으로 동산에 오른다. 5월에 동네 뒷산에서 조난이라도 당할까봐 그런 기능성 등산복을 장만한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남의 눈' 때문이다. 꿀리기 싫으니까.

 

 

확실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의 눈'에 민감하다. 아니 외국에서는 별로 타인에게 신경쓰지 않다가도 우리나라에만 돌아오면 도로 예민해진다. 마치 스포라이트를 받는 연극배우처럼 관객들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자세히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을 조명효과spotlight efect라고 한다.

이 조명효과에 대한 심리실험이 있었다. 젊은 대학생이 입기는 민망한 티셔츠를 실험대상 학생에게 입히고, 그가 만난 동료 대학생 중 몇 퍼센트 정도가 자신이 어떤 셔츠를 입었는지 기억할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본인은 절반가량인 48% 정도가 자기 옷을 기억할 것이라고 응답했지만, 실제로 학생들에게 물으니 그 티셔츠를 기억한 친구는 8%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실험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은 남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남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당신에게 별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거기에 맟추려고 혼자 그렇게 안달하며 살고 있다. 우리가 그 '남의 눈'에서 조금만 자유로울 수 있다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우리나라는 소득 수준에 비해 행복도가 무척 낮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행복의 척도를 자기 기준이 아니라 남의 시선에 두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 아닐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철학'이다. 사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성장과 성취가 중요한 젊은 시절에는 목표가 확실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그 목표를 따르는 것으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면 됐다. 하지만 그 목표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거나 흐려지고 난 이후에는 '왜 사는가'에 대한 대답이 오히려 궁색해진다. 그러니까 자꾸만 다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른 사람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처럼 끊임없이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사회에서 남의 눈만 의식하고 살다보면 뫼비우스의 띠를 걷듯이 무의미한 자기과시를 반복하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것은 자기만의 확고한 주관과 철학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최근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와 심리기획자인 이명수 '마인드프리즘' 대표의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요즘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는 남성적인 매력의 상징 '식스팩'이 별로라는 정혜신 박사의 말에 눈길이 갔다. 아니, 대체 왜?

'요즘 식스팩 애기들을 하는데, 저는 물리적으로 완벽하거나 근육질인 남자를 보면 섹시함을 느끼지 못해요. 그걸 유지하기 위해 일상의 몇 시간을 쓰는 게 한심한 거예요. 그런데 얘기하고 생각을 나누다보면 쾌감을 느껴요. 저는 화를 잘 내는 남자가 좋은데요. 사람이 자기 경계를 침범당했을 때 본능적으로 감정적 반응을 하거든요. 누가 나를 침범하면 화를 내야 하는데, 그걸 못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맨날 성격파탄자같이 울뚝불뚝 화를 낸다는 게 아니라, 화를 낼 수 있는 기능이 살아 있는, 그러니까 자기 경계에 대한 인식이 분명한, 그런 사람이 섹시한 것 같아요."

식스팩이 남들의 시선에 따른 가치라면, 자기 경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개인의 철학과 주관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어른에게 식스팩을 키우는 것보다 좀더 급하고 중요한 건 자기 경계를  명료하게 인식하는 일이 아닐까? 자기만의 주관과 철학으로 단단한 세계를 건축한 사람은 그 누구보다 섹시하고 당당하다.

 

 

세계를 정복했던 나폴레옹은 "내가 진정 행복했던 날은 일주일도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3중장애를 안고 살았던 헬렌 켈러는 "행복하지 않았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함부로 타인의 행복과 가치관을 평가할 수 없다. 남의 평가나 동정에 연연하지 않는 자기만의 주관이 만족과 감사를 낳고 그것이 행복감과 이어진다.

 

 

혹시 스스로는 만족스럽고 좋은데, 그 실체도 알 수 없는 '제3자'의 시선에 맞추느라 주위를 두리번거린 적은 없는가? 지금 자라나고 있는 당신의 불만이 혹시 누군가를 지나치게 의식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닌가?

물론 현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분발하게 하는 것은 자기 성장을 위한 매우 소중한 덕목이다. 또 우리의 자아개념이란 본래 타인의 시선과 인정으로 구성되는 거울 같은 것이라는 이론도 있다. 하지만 삶의 방식을 믿고 좀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특히, 이 땅에서는, 그때 비로소 타인의 눈치를 보며 애먼 곳에 쏟아부었던 돈과 시간과 노력을, 오롯이 진정한 자기 행복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묻는다.

당신은 오늘, 자기 행복의 주인인가, 남의 시선의 노예인가? 당신의 철학은 무엇인가? 그것을 실행해나갈 충분한 용기를 지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