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에...
엄마는 26살이고 아가는 백일을 앞두고서 울산 H자동차출고앞 셋집에 살면서...
- 버트런드 러셀 지음 『러셀의 교육론 』에서 -
지은이 버트런드 러셀(1872~1970)
위대한 현대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철학자이며, 수학자, 교육 개혁자. 그리고 최고의 지성인인 동시에 사회적, 성적 자유의 주창자이자, 인류평화와 인권운동의 선구자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대중을 위한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여러 주제를 다룬 강연과 에세이 집필로 활약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논쟁적인 인물로 간주되는 버트런드 러셀은 그의 도전적인 저술로 광범위한 명성을 얻었다. 이와 같은 결정적 업적은 점진적인 변화를 형성하는 서구사회에 미래지향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심오한 통찰력을 제공하였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쇠퇴한 대영제국주의에 도덕적 전망을 도출한 점이다.
러셀의 교육철학의 본질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성격교육과 지식교육이다. 그는 특히 인간형성의 기초가 되는 이상적인 성격을 형성하기 위해 어린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루었다. 다음으로 지식교육은 성격교육과 더불어 러셀의 교육철학이 도달하고자 하는 교육목적이며, 행복한 세상을 여는 열쇠는 바로 다름아닌 지식교육의 완성으로 이는 러셀교육이 지향하는 이상(理想)이다.
생후 첫해
아기가 태어난 후 첫해는 형식적 교육의 영역 밖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어도 아기가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더 이상 길지 않다면 교육은 전적으로 엄마나 유모의 손에 의존하게 된다. 엄마나 유모는 본능적으로 아기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몰랐다. 상당수의 아기들이 일 년 안에 사망했고 살아남은 아기들도 다수가 건강을 해쳤다. 잘못된 양육 때문에 해로운 마음의 습관이 이미 그 시기에 터를 잡은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극히 최근에 알려진 것이다. 과학이 육아 문제에 개입하자 꽤 많은 비난을 받았다. 왜냐하면 어머니와 아기의 감상적인 관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상과 사랑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아기를 사랑하는 부모들은 아기가 살아남기를 원한다. 그 목적을 위해 지성을 적용할 필요가 생긴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이가 없는 사람들이나 루소처럼 자기 아이를 고아원에 맡기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강한 감상주의를 보게 된다. 최고의 교육을 받은 부모들은 과학이 언급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한다. 교육을 받지 못한 부모들 또한 임산부 상담소에서 배우고 있다. 그 결과, 영아 사망률은 놀랄 정도로 감소되었다. 여기에 적절한 보호와 기술이 있다면 영아기에 사망하는 어린이는 극소수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어린이들이 심신 양면으로 보다 더 건강할 수 있다.
신체적 건강의 문제는 엄밀히 말해서 이 책에서 다루는 범위 밖에 있는 것이며 당연히 의사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다. 나는 단지 이 문제가 심지학적 중요성을 가질 때만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생후 첫해 동안은 신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구별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교육자가 유아를 다룰 때 순전히 신체적인 실수 때문에 생긴 잘못을 나중에 알게 되면 고치기는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본래 우리가 취급하는 범위 밖에 있다고 해서 전혀 이문제를 다루지 않고 넘길 수는 없다.
신생아는 몇몇 반사운동과 본능을 갖고 태어나며 습관은 없다. 자궁 안에 있을 때 어떤 습관이 생겼다 해도 새로운 환경에서는 쓸모가 없다. 숨 쉬는 것조차 때로는 배워야 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아기들은 빨리 이 학습을 하지 못해서 죽는 경우도 있다. 출생 시 충분히 발달된 본능이 있는데, 빨아들이는 본능이다. 아기가 이 본능에 충실히 따를 때 아기는 새로운 환경에서 편안한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그 외에 눈을 뜨고 있을 때는 희미한 혼미 속에서 보내게 된다. 아기는 24시간 거의 대부분 잠을 잘 때, 이 상태에서 휴식을 취한다. 생후 2주가 지나면 모든 것은 달라진다. 아기는 규칙적으로 일어난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여러 가지 기대를 하게 된다. 아기는 마침내 이미 하나의 보수주의자가 되고 어쩌면 그 후의 어떤 시기보다도 더 완전히 보수적일 수 있다. 어떤 새로운 것도 분노의 대상이 된다. 만일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지금 내 일생 동안의 여러 습관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신생아가 획득하는 습관의 속도는 놀랄 만하다. 생후에 얻은 모든 나쁜 습관은 나중에 좋은 습관을 얻는 데 방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영아기 첫 습관의 형성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만일 첫 습관이 좋으면 나중에 수많은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다. 게다가 유아기에 몸에 배인 습관은 커서 마치 본능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습관은 본능과 같은 뿌리 깊은 근본적인 힘이 있다. 그 후에 생긴 새로운 대립된 습관은 그 같은 근본적인 힘을 가질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최초의 습관은 충분히 신중함을 기해야 한다.
유아기의 습관형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두 가지 고찰을 하게 된다. 최초의 그리고 최대의 고찰은 건강이고, 다른 하나는 성격이다. 우리가 어린이에게 바라는 것은 어른의 귀여움을 받고 삶을 성공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다행히 건강과 성격은 동일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즉 하나에게 좋은 것이 다른 하나에게도 좋은 것이다. 이 책에서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은 성격이다. 그러나 건강에 대해서도 이에 못지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건강한 악한이냐 아니면 병약한 성자냐 하는 양자택일의 곤란을 겪을 필요는 없다.
오늘날 교육받은 어머니는 아기에게 울 때마다 젖을 주는 게 아니라 규칙적인 시간에 줘야 한다고 알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은 본래 아이의 소화작용에 좋기 때문이지만 이렇게 하는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것은 또한 도덕교육의 관점에서도 바람직한 것이다. 아기는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약삭빠르다(미국식으로 귀엽다는 뜻이 아니라). 만일 아기가 울 때마다 좋은 결실을 얻게 된다면 아기는 운다. 나중에 커서 불평불만의 습관이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싫어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이는 놀라게 되고 부모를 원망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세상은 냉담하고 인정이 없는 것으로 비친다. 그러나 만일 매력적인 여성으로 성장한 경우, 그녀가 불평불만을 쏟을 때도 귀여움을 받을 수 있다면 아동기 때부터 생긴 나쁜 습관은 더욱 굳어질 것이다. 비슷한 경우는 부자에게도 해당된다. 어렸을 때 올바른 방법으로 자라지 못하면 다 큰 다음에 그 능력에 따라 불평분자가 되거나 아니면 탐욕적인 사람이 된다. 필요한 도덕적 훈련을 시작하는 적절한 시기는 태어나는 순간부터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는 도덕적 훈련을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란 다음에는 이런 도덕적 훈련이 이와 대립되는 여러 습관과 부딪히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성을 내고 분개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기를 다룰 때는 무시하는 것과 응석을 받아 주는 두 가지의 방법에 미묘한 균형이 필요하다. 건강에 필요한 모든 일은 해야 한다. 아기의 바람막이가 되어 주고 마른 기저귀로 따뜻하게 해줘야 한다. 그러나 정당한 신체적 이유 없이 울 때는 그냥 울게 내버려 둬야 한다. 아니면 아이는 즉시 폭군으로 자라게 된다. 아이를 돌볼 때는 너무 야단스럽게 허풍을 떨지 말아야 한다. 필요한 것은 해야겠지만 그러나 지나친 동정의 표현은 하지 말아야 한다. 유년기의 어떠 시기에도 아기를 애완용 개보다 더 재미있는 노리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기는 처음부터 어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야 한다. 어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습관도 아기에게는 매우 즐거운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아기는 실제로 어른의 습관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아이들이 지녀야 할 여러 가지 습관을 몸에 배게 하는 데 장애가 되는 일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극복해야 할 자만심을 심어 주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도 그런 자만심과 사실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아기 어린이교육이 어려운 것은 대부분 부모들의 세심한 균형감각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보살펴야하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런 일은 부모의 애정이 유난히 강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 그러나 애정이 있다 해도 현명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아이에게 헌신적인 부모에게 어린이는 한없이 귀중한 것이다. 여기서 잘못하면 아이는 어른의 이 같은 애정을 눈치채고 자기 자신을 그 부모들이 느끼는 것과 동일하게 귀중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가 어른이 되었을 때 사회 환경이 그를 그만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아이의 이 같은 습관은 실망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후 일 년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부모들은 아이가 아프더라도 편안하게, 즐겁게 또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해야 한다. 예전에는 아기들을 응석받이로 가두어 놓고 동시에 팔다리는 묶어 언제나 덥게 입혀 길렀다. 아기들은 자발적인 활동이 저지당했다. 그 대신 아기들은 귀여움을 받고 노래도 불러 주며 안고 어르고 야단스럽게 자랐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하는 기생충과 같은 인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올바른 규율은 다음과 같다. 즉 자발적인 활동을 장려할 것과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해 주고 있는지 또는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지를 아이에게 알려 주지 말아야 한다. 가능하면 아이 자신의 힘으로 해냈다는 성공의 기쁨, 즉 어른들에게 폭군적인 행동으로 얻어 낸 것이 아닌 성공의 기쁨을 맛보게 하는 게 좋다. 현대 교육의 목적은 외적인 훈련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어린이 자신의 내부로부터 자아훈련이다. 이와 같은 훈련은 다른 어떤 시기보다 생후 첫해 동안에 가장 쉽게 몸에 배게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아기를 잠재우기 위해 유모차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 혹은 안아 주거나 어른이 보이는 곳에 아기를 두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한 번 그렇게 하면 아기는 다음에도 그허게 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면 거의 믿을 수 없는 정도로 짧은 시간 내에 아기를 잠재운다는 게 보통 겁나는 일이 아닌 게 된다. 아기를 따뜻하게, 기저귀가 젖지 않게 하고 편안하게 해 주라. 그리고 자리에 내려놓고 잠시 내버려 두어라. 아기는 몇 분 동안 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픈 데가 없다면 곧 울음을 그칠 것이다. 그리고 곧 깊은 잠을 잘 것이다. 더욱이 이런 방법은 달래고 어르고 하는 것보다 더 깊은 잠을 자게 한다.
신생아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습관이 없다. 다만 반사작용과 본능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은 아기의 세상은 '사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개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복되는 경험이 필요하다. 침대의 감촉, 엄마 품의 냄새 혹은 우유병의 냄새, 엄마나 유모의 목소리는 금세 친숙하게 느껴진다. 엄마나 침대의 형태를 눈으로 보는 것은 시간이 좀 지나야 한다. 왜냐하면 신생아는 사물의 이것은 촉각과 시각과 후각 그리고 청각이 합쳐져 사물에 대한 상식적인 의미로 통합되었을 때 서서히 자란다. 또한 사물의 개념은 다른 사물의 개념을 기대하게 되는 것인데, 즉 여러 개념의 연합을 통한 습관의 형성을 통해 천천히 습득된다. 그렇다고 해도 한동안 사람과 사물의 차이를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떤 때는 엄마 젖을, 그리고 다른 때는 우유병으로 먹일 때 아기는 엄마 젖과 우유병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이 시기의 교육은 전적으로 순전히 신체적 수단에 의존한다. 아기의 쾌감은 신체적인 것 ― 주로 따뜻함과 먹을 것 ― 이고 그리고 아기의 불쾌감 역시 신체적인 것이다. 행동의 여러 가지 습관은 유쾌한 것과 관련된 것이 무엇인지를 찾거나 아니면 불쾌한 것과 관련된 것을 피하는 것으로 형성된다. 아기가 우는 것은 때로는 불쾌한 것과 결합된 반사작용이며 어느 때는 유쾌한 것을 추구하는 행동이다. 처음에는 물론 전자에 한한 것이다. 더구나 설령 아기가 고통을 받는다 해도 가능한 한 빨리 제거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우는 행위는 즐거운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기는 신체적인 고통을 느껴 우는 것이 아니라 유쾌한 것을 바라고 울기 시작한다. 최초의 지적 승리가 이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해 봐도 정작 아플 때처럼 울수는 없다. 엄마의 귀는 이 울음소리를 구별한다. 만일 현명한 엄마라면 신체적인 고통의 표현이 아닌 울음은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아기를 어르거나 노래를 들려주며 즐겁게 해 주는 것은 쉬운 일이고 또한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아기는 놀랄 만큼 빨리 이런 즐거움을 더 많이 요구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즐거움은 곧 필요한 수면에 방해가 된다. 아기는 먹는 시간 외에는 거의 종일 자는 게 일이어야 한다. 이런 교훈은 아기에게 가혹한 것 같지만 사실 아기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좋다는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준비한 즐거움은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어야 하고 한편, 아기가 혼자서 즐기는 것은 최대한으로 즐길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처음부터 아기에게는 근육운동을 위해 걷어차는 기회를 줘여 한다. 우리의 조상들이 해 온대로 포대기로 아기를 감싸는 일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 왔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아무리 애정을 쏟는 부모라도 게으름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말해 준다. 왜냐하면 아기의 손발이 자유롭게 되면 어른의 일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아기가 눈을 맞추게 되면 곧 움직이는 것, 그중에서도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을 지켜보며 즐거워한다.
아기가 눈에 보이는 물건을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때까지 아기가 즐기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즐거운 일들이 엄청나게 많아진다. 얼마 동안은 물건을 잡는 동작이 아기가 깨어 있는 동안의 행복이 될 것이다. 딸랑이를 좋아하는 것도 이 시기이다. 이보다 조금 앞서 발가락과 손가락을 자유롭게 움직인다. 처음에는 발가락의 움직임은 순전히 반사적인 것이다. 다음으로 아기는 스스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이 일은 마치 외국을 정복하는 제국주의자의 기쁨과 같은 것이다. 발가락은 육체의 다른 부분이 아니라 자아와 통합된 것이 된다. 이때부터 아기는 손이 닿는 곳에 물건이 있는 한 많은 즐거움을 찾게 된다. 더욱이 아기가 재미있어 하는 것은 대부분 유아교육이 요구하는 바 바로 그것이다. 물론 넘어지거나, 핀을 삼키거나, 다른 걸로 몸을 해치는 일이 허용되 않아야 한다.
생후 첫 3개월은 대부분 먹는 시간을 빼고는 좀 지루하게 시간을 보낸다. 편안하면 잠을 잔다. 잠이 깰 때는 항상 뭔지 불편해서다. 인간의 행복은 정신능력에 달려 있지만 생후 3개월의 아기에게는 거의 배출구를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경험도 없고 근육통제력도 없기 때문이다. 어린 동물은 갓 태어났을 때를 훨씬 더 즐긴다. 왜냐하면 동물은 더 많이 본능에 의존하고 경험에 의존하는 일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기는 본능으로 하는 일이 너무 적어 최소한의 즐거움이나 재미밖에 없다. 대체로 처음 3개월은 대단히 지루하게 산다. 그러나 이렇게 지루한 것 때문에 아기는 충분한 잠을 잘 수 있다. 만일 재미있는 일이 많다면 아기는 충분한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생후 두 달 혹은 석 달째가 되면 아기는 웃게 된다. 그리고 사람에 대해 사물을 대할 때와는 다른 느낌을 느끼게 된다. 이때 엄마와 아기의 사회적 관계가 가능하게 된다. 아기는 엄마를 보면 즐거움을 표현할 수 있다. 또한 동물이 표현하는 반응이 아닌 여러 가지 반응이 발달한다. 그러면 곧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내 아들의 경우, 생후 5개월이 되었을 때 탁상 위에 놓인 좀 무거운 종을 쳐들려고 여러 번 시도한 끝에 성공하면서 아주 자랑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순간부터 교육자는 새로운 무기 즉 칭찬과 비난을 갖게 된다. 이 무기는 유년기를 통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지만 그만큼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생후 첫해 동안은 전혀 야단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고 그 후에도 자주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칭찬은 해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 쉽게, 자주 해 주면 그 가치를 잃게 된다. 또한 아기에게 지나친 자극을 주기 위해 칭찬해서도 안 된다. 처음으로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또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할 때 아무리 침착한 부모들이라 해도 칭찬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기가 애를 쓰면 한 가지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 칭찬을 해 주는 것은 적절한 보답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아기가 배우려고 하는 욕구에 부모가 공감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도 좋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어린이는 배우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부모는 단지 기회를 제공하기만 하면 된다. 아이에게 기회를 주면 그의 노력으로 남은 모든 걸 다 해낼 수 있다. 아기에게 기어 다니는 것, 걸음마 하는 것, 그 밖에 근육을 자유롭게 쓰는 다른 요소를 가르칠 필요는 없다. 물론 우리는 아기에게 말을 걸어 말하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말을 가르치기 위해 일부러 용의주도한 어떤 계획을 짤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아이들은 그들 눈높이에 맞추어 배우기 때문에 강제로 시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노력을 장려하는 가장 큰 동기는 일생을 통해 보면 최초의 어려운 일을 해낸 성공의 경험이다. 어려움의 정도가 너무 커서 아이가 실망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한편, 너무 작아 자극이 되지 못해서도 안 된다. 이는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이어지는 근본적인 원리다. 배운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을 배우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어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어떤 간단한 동작을 해 보여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딸랑이를 흔들어 주거나 하는 것이다. 그 후의 것은 아이 자신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발견하도록 하면 된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은 단순히 욕심이 생기게 하는 자극일 뿐이다. 그것 자체는 전혀 교육과 상관이 없다.
유년기나 특히 생후 첫해 동안은 규칙적이고 일상적인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잠자는 것, 먹는 것, 대소변 보는 것 등 처음부터 규칙적인 습관이 되어 있어야 한다. 더욱이 주변 환경과 친밀해지는 것은 정신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배우게 해 주고 긴장을 풀어 주고 안정감을 준다. 나는 때때로 과학의 기초가 되는 자연의 획일성에 대한 신념은 전적으로 안정감에 대한 열망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우리는 예상했던 것을 해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자연법칙이 갑자기 바뀌어 버린다면 우리는 멸망할 수 밖에 없다. 아기는 약하기 때문에 안전을 요구한다. 따라서 모든 일이 불변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면, 또한 그렇게 되어 예견이 가능하더면 훨씬 더 행복할 수 있다. 좀 더 자라서 아동기에 들어서면 모험에 대한 애착이 발달하지만 생후 첫해 동안은 모든 것이 생소해 쉽게 놀라게 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이들이 공포를 느끼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 만일 아이가 아파하면 걱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걱정이 암시에 의해 아이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흥분할 만한 것은 피해야 한다. 그리고 아기기 해야 할 일상적인 것, 즉 먹는 것, 잠자는 것, 대소변 보는 것 등이 안 될 때 당신이 걱정하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아기가 자기 중심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것은 생후 첫해 동안만 유용한 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적용된다. 가령 먹는 것과 같은 일상적이고 필요한 일 ― 당연히 즐거운 일이 되어야 하지만 ― 이 당신이 바라는 일이고, 그뿐만 아니라 당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바라는 일인 것처럼 알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아이는 즉시 자기의 새로운 권력을 행사하는 원천을 쥐고 있는 것처럼 알고, 따라서 당연히 자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어른들이 어르고 달래 주고 해 주기를 기대한다. 설마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할 정도의 지능은 없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아이가 지닌 힘은 약하고 지식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제한이 작용하지 않을 때는 그의 지능은 어른과 같은 것으로 본다. 실제 아기는 생후 12개월 동안에 그 후 같은 기간 동안 배운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운다. 아기의 활발한 지능이 없다면 이런 것은 불가능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
결론으로, 아기는 아직은 어리지만, 커서 이 세상에 한몫을 담당하게 될 한 인간으로 존중해야 한다. 당신의 현재의 편의를 위해 또는 아기가 주는 즐거움을 위해 아기의 미래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이 두가지는 똑같이 해롭다. 따라서 올바른 방법으로 기르기 위해서는 생후 첫해에도 다른 시기에서와 같이 사랑과 지식의 결합이 필요하다.
교육에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그러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끔 쓸만하다. 공포가 불합리하고 강하면 아이는 혼자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것이 두려울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경험을 앞으로도 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어떤 상황이 아무런 위험이 없는 상태로 반복될 때는 친숙해지는 것만이 공포를 제거하게 된다. 무서운 경험을 꼭 한 번만 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무서운 경험은 전혀 무섭지 않을 때까지 자주 반복해야 한다. 만일 이처럼 필요한 경험을 강제성 없이 경험하게 해 준다면 더 이상 좋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라면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공포를 지니는 것보다 강제성이 더 나을 수가 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내 아들의 경우도 그렇고 또 다른 경우도 그렇지만 공포를 극복하는 경험을 갖는 것이 대단한 즐거움이 된다. 사내아이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즉 그의 용기를 칭찬해 주면 아이는 하루 종일 최고의 기분이 든다. 겁쟁이는 나중에 다른 아이들의 놀림을 받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때 가서 새로운 습관을 들인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포에 대한 자기 통제를 어려서부터 몸에 익히고 또한 신체적 모험을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기 위해 얼마간의 강제적 방법을 쓰더라도 말이다.
부모는 그들의 잘못을 통해 배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는 어른이 된 후에야 어떻게 교육을 받아야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지나치게 응성받이로 기르는 것이 하나의 올가미가 된다는 예를 하나 들겠다. 두발 반이 된 아들이 자기 방에서 혼자 잠을 자게 되었다. 아이는 유모 방에서 한 걸음 승진한 것을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처음 아이는 밤새 조용히 잘 잤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무섭게 바람이 불어 귀가 멍해지는 것처럼 큰 소리에 담장이 무너져 버렸다. 아이는 놀래서 깨어 울고 말았다. 나는 즉시 아이에게 달려갔다. 아이는 악몽에서 깨어나 내게 달라붙었는데 그의 가슴은 심하게 뛰고 있었다. 곧 그의 공포는 가라앉았다. 그러나 아이는 깜깜하다고 투정을 부렸다. 그동안 어두운 밤 내내 잘 잤으면서도 말이다. 내가 아이 방을 나오자 다시 가벼운 형태의 공포가 되돌아오는 듯해 나는 야간 전등을 켜 놓았다. 그 후로 거의 매일 밤 아이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결국 어른들을 달려오게 하고 자기를 달래 주는 기쁨을 얻기 위해 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이 전혀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일러 주었다. 그리고 잠이 깨면 돌아누어 다시 자도록 일러 주었다. 정말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는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중요한 원인이 있는 경우 외에는 아이는 두 번 다시 큰 소리로 울지 않았다. 물론 야간 전등도 꺼 버렸다. 우리가 만일 응석받이를 더 계속햇더라면 아이는 아마 당분간 더 길게 혹은 일생 동안 잠을 설칠 뻔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공포를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 더 많은 일반적인 고찰에 들어가야 한다.
생후 첫해가 지난 다음, 신체적 용기를 가르쳐 주는 적절한 교사는 다른 아이들이다. 만일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오빠나 언니가 있다면 그들이 보여 주거나 가르쳐 주는 방법으로 용기를 자극하게 된다. 그래서 형들이 하는 것은 무엇이나 해 보고 싶어 한다. 학교에 가서 신체적으로 겁쟁이가 된다면 멸시를 당하기 때문에 교사가 이 일을 따로 역설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사내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렇다고 본다. 여자아이의 경우도 남자아이와 같은 수준의 용기를 가져야 한다. 다행히 신체적인 면에서 '여자다워야' 한다는 가르침은 더 이상 없어졌다. 신체적으로 용감한 행위에 대한 자연적인 충동은 상당히 넓게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 면에서 남녀의 차이는 여전히 남아 있다. 나는 이런 차별은 당연히 없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용기를 바람직하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행동주의 학자들의 정의에 따른 것이다. 다른 사람이 공포에 사로잡혀 일에 실패할 때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이다. 만일 그가 아무런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만큼 좋은 거다. 나는 의지력으로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 유일한 참된 용기라고 보지 않는다. 또한 최고의 용기로 보지도 않는다. 현대 도덕교육의 비결은 본래 자제력과 의지력에 와해 시도된 좋은 습관의 결과로 나와야 한다. 의지력으로 생긴 용기는 여러 신경질환을 초래할 수 있고 '탄환 충격에 의한 신경질환' 등 많은 실례를 보여 준다. 즉 억압된 공포가 내적 성찰에 의해 납득되지 않고 강제로 표출되는 경우이다. 나는 자제력이 전혀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자제력 없이는 아무도 견실한 삶을 살 수 없다고 본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교육이 미리 대비해 주지 못한 불투명한 상황에서만 자제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 전쟁에서 요구되는 용기를 전 국민에게 훈련을 받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가능성이 있다 해도 말이다. 이 같은 용기는 예외적, 일시적인 요구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참호 속에서나 필요한 습관을 젊은이에게 주입했을 경우, 그 외의 교육은 전부 엉망이 되는 그런 예외적인 것이다.
작고한 리버스(Rivers) 박사는 그의 저서『본능과 무의식』(Instinct and the Unconscious)에서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공포에 대해 최고의 심리학적 분석을 전개했다. 그가 지적하는 바에 의하면 위험한 상황에 대처하는 한 가지 방법은 교묘한 조작적 활동이다. 이 방법을 적절히 사용하는 사람은 적어도 의식적으로 공포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공포심에서 서서히 벗어나 기술을 잘 부리게 되면 결국 자존심과 노력 양쪽을 자극하는 값진 경험이 될 것이다. 자전거 타는 것을 배우는 것처럼 아주 간단한 것이지만, 이 또한 하나의 쉬운 방법으로 얻는 경험이다. 근대사회에서 기계가 발달함에 따라 이런 종류의 기술은 점점 더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신체적 용기를 위한 훈련은 다른 사람과 육체적 경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능한 한 넓게 사물을 조작하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용기는 등산이나 항공기의 조종 혹은 강풍 속세서 조각배를 저어 간다든지 하는 것인데 전쟁에서 필요한 용기보다 훨씬 권장할 만한 것이다. 따라서 가능한 한 아이에게 축구 같은 것보다 오히려 다소 위험할 수도 있는 능란한 기술을 훈련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정복해야 할 적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닌 물건이기를 바란다. 내가 뜻하는 것은 이런 원리를 현학적인 데 응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운동경기에서 이 원리에 무게를 더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신제적인 용기에는 더 수동적인 면이 있다. 상처를 입었을 때 소란을 떨지 말고 참을 줄 알아야 한다. 즉 아이가 대단치 않은 재난을 당했을 때 지나치게 과장된 동정을 보여 주지 말아야 아이가 배울 수 있다. 어른이 된 후, 신경질 증후가 보이는 대부분의 경우는 주로 동정받으려는 지나친 욕구 때문이다. 사람은 귀여움을 받고 싶어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러 가지 병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보통 어린이가 간단한 상처를 입었을 때 큰 소리로 울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는 유아원 교육이 아직도 남자아이보다 여자아이에게 더 나쁘다고 본다. 남자아이와 마찬가지로 여자아이에게도 지나치게 부드러운 것은 좋지 않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해야 한다면 엄격한 덕목에서도 밀리면 안 될 것이다.
아이들은 옳은 것을 가르치면 그것을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좀 저 어린 단계에서, 먹는 일이나 잠자는 일을 잘못 가르치면 지식을 전달할 때에도 동일한 잘못을 한다. 즉 아이에게 실제로 유익한 것이 마치 어른에게 어떤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아이에게 보이게 하는 것디다. 아기는 먹고 자는 것이 단지 어른이 바라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하는 것으로 쉽게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은 소화불량에 시달리게 되며 불면증에 걸리게 된다. 어린이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먹을 것은 주지 말고 배고프게 놔두어야 한다. 내 아들은 유모가 달래 가며 먹였기 때문에 점점 더 어렵게 되었다. 어느 날 우리는 점심 때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그때 아이는 푸딩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는 푸딩을 내보냈다. 얼마 안 있다가 아이는 다시 푸딩을 먹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요리사가 먹은 후였다. 그는 놀라서 어리둥절하더니 두 번 다시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