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한국전쟁이후 급작스런 산업화로 우리나라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그들의 아버지로부터 진정한 남자가 뭔지를 배우질 못하고 자란 것 같다. 남편도 아버지의 무관심속에 성장했는데 대물림 되지 않기 위해 뒤늦게 시골살이에서 사랑이 뭔지를 배워나간다.
- 스티비 비덜프 지음『남자, 다시 찾은 진실』에서 -
지은이 스티브 비덜프(Steve Biddulph)
가족 문제 및 부모 역할에 관한 저명한 전문가이자 작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30년 동안 가족 문제를 다루어 온 심리학자이기도 한 저자는, 부모 역할에 관한 책을 쓰는 작가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쓴 책들은 단순하지만 강력한 힘이 있으며, 재미있으면서도 실제적이다. 또한 현대 생활의 광기와 그런 삶이 가져다주는 공동체의 상실과 외로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비판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는 현재, 전 세계의 부모들을 교육시키고 강연하는 일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사회 정의와 환경을 위한 일에 힘쓰고 있다.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
상처받고 쓰러진 아들을 만나러 오지 않을 건가요?
그러려고 했었소.
날 반긴다면 물론 그럴 생각이었지.
그런데 그들은 나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증오하고 있다오.
- 전통 민요
이십대 중반에서 오십대 초반에 이르는 100여 명의 아버지들이 하루 동안 열리는 내 세미나에 참석 중이다. 방이 이 정도 수의 남자들로 가득 차 있다면 표면적으로는 침착하고 견고한 어떤 에너지로 꽉차 있지만 그 아래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충돌하고 있기 마련이다. 아침나절 중반쯤 그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나는 그날의 세미나 주제와 관련된 질문을 하나 던진다. "여러분들은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여기에 오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자신의 경험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 계신가요?"
강의실 안에는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그런 질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 보인다. 강의실 안 여기저기에 찡그린 얼굴들과 번득이는 눈빛들이 보인다. 그럴 때 나는 손을 들어 보라고 시킨다.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
100여명 중 30명 정도가 가장 최악의 범주에 속한다. 그들은 자기 아버지와 이야기조차 나누지 않는 사람들이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경우도 거의 없으며, 어쩌다 한 번 가는 것도 마지못해 간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자기 아버지와 냉담한 관계를 유지한다. 손을 들어 올릴 때 이미 그들의 분노와 상처를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이다.
또 다른 30여 명은 두 번째 범주에 속한다. 그들은 생일 때나 명절, 가족들의 모임 때에만 아버지를 만난다. 겉으로 볼 때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들의 관계는 매끄럽지 않다. 서로 간의 대화가 기껏해야 잔디 깎는 기계에 관한 사소한 것이라 해도 둘의 의견은 시종일관 어긋난다. 둘 사이가 단절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관계는 '선인장' 과 같다.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기류에는 편안함이 없다. 만났다 헤어질 때마다 둘은 서로의 가시에 찔려 엄청난 상처를 입고 피를 철철 흘린다. 어머니나 아내는 화가 나서 한숨을 내쉬지만 누구를 탓해야 할지 잘 모른다.
또 다른 30여 명이 세 번째 범주에 속한다. 이들은 행동이 반듯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실버타운에 사는 부모를 방문하러 가거나 일주일에 몇 번씩 규칙적으로 부모에게 전화하여 안부를 묻는다.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늘 한결같을 수가 없고, 변덕이 죽끓듯 하다는 것을 잘 아는 우리로서는 그들이 부모를 찾는 동기가 간절함 때문이라거나 자연적으로 우러나는 온정 때문이 아니라는것을 금방 짐작해 낼 수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의무감 때문이다. 의무적으로도 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양로원에서 누군가가 방문해 주기를 기다리며 종일 문만 바라보고 있는 노인이라면 누군가가 의무 때문에라도 방문해 주기를 바랄 것이다. 의무 때문이라 해도 규칙적인 방문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런 동기에서 하는 일은 해야 할 일을 해치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기계적인 행위가 된다. 양자 모두에게 삶의 확신을 안겨 주지 못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쯤 당신은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감을 잡았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90퍼센트 정도의 남자들이 자기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상황과 맞닥뜨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 중에도 정상적이라고 할 만한 범주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주 소그룹이지만 위와는 다른 부류의 남자들이 있다. 그들은 나머지 남자들이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그러나 나는 강의실 앞에 서서도 그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의 눈과 얼굴이 밝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들 차례가 되자 그들은 부드럽지만 분명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들은 우선 훌륭한 아버지를 둔 남자들이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성인이 된 아들들의 삶 속에 감정적인 방어벽으로 우뚝 서 있으며, 아들들의 존경과 기쁨을 받고, 아들들에게 무한한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다. 친구보다 낫고, 죽는 순간까지 그들에게 가장 가까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소그룹의 남자들은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고 있으며 아버지의 자부심이 바로 자기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런 남자들은 기껏해야 그 강의실에서 10퍼센트뿐이다. 억세게 운이 좋은 남자들이다. 그런데 그런 남자가 10퍼센트밖에 없다니 얼마나 끔찍한 현실인가? 남녀를 떠나서 우리 모두가 아버지와 이런 관계를 맺고 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난 달라질 것인지 한번 상상해 보라.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다른 노인들과 당신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남자로서 당신의 행복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정한 나이가 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남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자가 된다는 것은 강물 같은 지식과 기능의 흐름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 강물 안에서 단련을 받은 뒤에 다음 세대에게 당신이 받은 지식과 기능을 전달해 주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앞 세대로부터 죽 이어져 온 남성성과 연결되지 못한다면 당신의 남성성은 번성할 수도 자랄 수도 없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남성성에 관한 지식을 놓쳐 버리는 셈이 된다.
좋든 나쁘든 이 지식의 첫 번째 전달자는 바로 당신의 아버지이다. 물론 삼촌이나 조부모, 교사들, 책, 영화, 친구들, 당신의 어머니뿐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당신에게 남성됨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러나 남성이 되는 데에는 아버지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또 당신이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당신의 남성성은 그의 남성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 아버지란 사람은 당신이 알고 있는 첫 번째 남자이기 때문에 당신은 그를 당신이 본받아야 할 사람으로 깊이 받아들인다. 그래서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을 떠나 있었거나 죽었거나 혹은 대부분의 성장기 동안 당신을 무시했다면 당신의 마음속에는 채워야 할 커다란 구멍ㅇ이 생기고 만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좋은 소식이 아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기들이 아버지의 매너리즘과 태도, 심지어는 말하는 방식까지 이어 받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봤던 모습들이 자기들한테도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버지와 불화를 겪고 있는 남자라면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남성성 그 자체와 불화를 겪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신이 아버지의 사랑이나 존중을 받지 못하면서 자랐다고 느낀다면 당신 자신을 존중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버지를 미워하고 있다면 당신은 사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당신 자신을 미워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문제들은 치유될 수 있다. 하지만 치유에 앞서 당신은 완전히 뿌리 뽑힌채 밝은 빛 아래서 자신을 돌아보는 고통스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문제들은 얼렁뚱땅 넘길 수가 없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다면 그 상태에서 온전하고 행복한 남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벗어났다 돌아오기
성장의 어느 단계에서 대부분의 아버지들과 아들들은 심각한 마찰을 경험한다. 역사상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늘 자연스런 주기를 거치면서 형성되어 왔다. 아들은 어린 소년일 때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십대에 이르면 아버지를 짜증내며 대한다. 이후 청년기에 접어든 아들은 삶의 방향을 정하기 위해 모험을 하면서 아버지와 멀어지는 것이 상례였다. 그 뒤 좀 더 나이가들어 아들이 자기 자아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면 부자 관계는 친구 같아지면서 동등한 수준에서 진정한 친밀성을 회복한다.
사춘기 중반쯤에 아버지와 아들의 마찰은 최고점에 이른다. 십대의 호르몬은 박차 오르는 '이단 로켓'과도 같다. 14살 정도가 되면 소년들의 남성 호르몬 수치는 엄청나게 치솟아 오르는데, 10살 때와 비교하면 무려 800퍼센트나 높아진다. 14살 먹은 사내 녀석이 거리의 표지판에 대고 시비를 건다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십대 소년의 안전과 성장을 위해 멘토나 다른 남자들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멘토나 다른 성인 남자들은 아버지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칫하면 격한 언쟁으로 돌변하기 마련인 아버지의 지나친 관심으로부터 소년들을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다. 어쨌든 어머니나 아버지를 떠났다가 어른이 되어 되돌아오는 것이 소년들의 자연스런 성장 주기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자연스런 주기가 엉망진창이 되더니 치명적인 균열이 생겼다. 어린 소년은 더 이상 자기 아버지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다. 십대 소년은 자기 아버지를 증오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도 남자는 이제 더 이상 아버지에게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내가 바라고 필요로 했던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용서하는 일은 남자가 성인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거쳐야 할 필수적인 단계이다.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다시 돌아오는' 단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작은 일도 쉬운 일도 아니다. 오히려 아주 끔찍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일이 제대로 되게 하려면 관심과 생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과 위험에도 불고하고, 우리 대부분이 안고 있는 불가피한 균열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삶의 어떤 단계에든 아버지와 진지하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이 당신은 아버지의 삶과 과거 행동의 이유, 그의 실패와 성공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단계를 거치기 전까지는 당신의 남성성을 물결에 휩쓸리는 모래 위에다, 즉 온전한 이야기라고 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인상과 추측 위에다 세우고 있는 셈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다른 어른들이 아버지에게서 얻을 수 없었던 것들을 대신 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 삶에 있는 아버지의 빈자리가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알코올 중독자였든 아내를 두들겨 패는 사람이었든 혹은 당신을 버리고 가 버린 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이었든 간에 당신을 낳아 준 아버지는 당신에게 여전히 중요하다. 아버지와 불화하는 한 당신의 아버지는 상징적으로 당신의 내부 어딘가에 살면서 간간히 출몰해서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의 '주변을 맴도는' 방식 중의 하나는 다른 어른들에 대한 당신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당신이 다른 노인들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그건 당신의 아버지를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신이 일반적으로 권위에 반항적인 사람이라면 그건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을 무정하고 가혹하게 대했기 때문일 수 있다. 당신이 어른들의 관심을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면 그건 아버지의 애정을 받지 못한 것에 한이 맺혔기 때문일 수 있다. 또 당신이 어른들을 보고 우월감을 느낀다면 아버지와 경쟁 관계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어른들을 보면 뭐든 그들 없이도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들보다 당신이 더 똑똑하다는 생각에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 사랑과 존경을 느끼고, 다른 어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지점에 이르지 않는다면 당신은 완전히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을 잠깐만 생각해 보라. 아버지에 대한 당신의 태도가 당신의 삶을 결정짓게 내버려 두는 것은 아버지가 한 말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순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롭지 못한 태도이다. 지나치게 종교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은 무신론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를 가진 아들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사람으로 자랄 가능성이 있다. 또 농부를 아버지로 둔 아들은 아주 번잡한 도시에서 사는 것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패배자 아버지를 둔 아들은 지나치게 성공에 집착할 수 있다. 혹은 위와는 완전히 반대의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아버지와 반대의 사람이 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당신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치유할 필요가 있는 상처
소년 시절의 어떤 단계에서 아버지가 당신의 필요를 채워 주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당신의 성장에 해를 끼쳤다고 하자, 그럴 경우 그 단계에서 성장이 멈출 위험이 있다. 당신은 그 지점에서 성장을 중지한 채 그 필요들이 채워져 다시 성장을 시작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최소한 두 가지 선택권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와 직접 해결을 하든가 아니면 아버지외에 다른 곳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나 아니면 어머니를 버리고 간 뒤로 얼굴 한번 비치지 않아서 아버지 없이 자란 남자들이 많다. 또 어렸을 때 아버지의 자살을 경험한 이들도 종종 있다. 이런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와 혼란을 준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어린아이들은 '내가 뭘 잘못해서 아버지가 떠난 걸까? 라고 생각하며 고통을 겪는다. 지나치게 일에 매달리거나 그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이 고통을 억누르려고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깊은 절망은 분노라는 옷을 입고 폭발하기 십상이다.
이런 일을 겪은 남자들 중 일부는 이 상처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나선다. 아버지의 과거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국내 혹은 해외를 여행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나는 유럽의 포로 수용소를 찾는 남자들과, 혹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아시아나 미국에 있는 아버지의 지인들을 찾아다니거나 자신들의 뿌리를 찾기 위해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살았던 친척들을 찾아 나선 남자들에게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버락 오바마 역시 그런 여행을 하고 나서『내 아버지의 꿈Dreams of My father』이라는 책을 썼다. 그 내용을 보면 그 여행이 그에게 얼마나 대단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이 남자들은 실제적인 여행을 함으로써 자기 삶이라는 그림 전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내적이며 개인적인 여행도 함께 한 셈이다. 그 여행을 통해 그들은 자기들뿐 아니라 자기 아버지들의 어깨에 얽혀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퍼즐 조각들이 어떤식으로 맞추어지는지 알아냄으로써 자기들 삶의 퍼즐을 제대로 끼워 맞출 수 있게 되었다.
그 여행은 실제적인 여행일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건이나 경험을 떠올리는 것처럼 단순히 당신 자신의 기억 창고로 떠나는 여행이 될 수도 있다. 꿈 때문에 기억이 되살아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남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기억에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청년 시절 나는 특히 사춘기 때 아버지가 못했던 일이나 내게 해 주지 못했던 일과 같은 아버지의 결점이나 결함들에 집착하고 있었다. 내가 받은 심리 훈련은 자연히 이런 사실을 더 부각시켰다. 당시 심리학에서는 부모를 비난하는 일이 엄청나게 유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내가 재미있어 할 것 같다고 아내가 영화를 하나 가져와서 시청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영화였는데, 영화 속에는 성인이 된 아들과 아버지가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들어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만든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가고 있을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내가 엉엉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이후 난 운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조용히 흐느낀 정도가 아니라 어깨를 들썩거리며 목을 놓아 울었다. 느닷없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내게 해 주었던 특별한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들 하나하나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아버지의 애정이 드러나 있었다. 축구 경기장에서 아버지가 코트로 나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던 일, 수두에 걸려 밤에 아파서 깼을 때 염증 부위에 시원한 로션을 발라 주었던 일, 여섯 살 때쯤 눈 내리던 밤에 아버지와 손을 잡고 함께 걸었던 일 등등, 나는 아버지와 친하지 않다는 내 머릿속의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동안 이 따뜻한 기억들을 지워 버리고 살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야 종종 무뚝뚝하고 말이 별로 없었던 아버지라는 남자의 부드러움과 애정에 대한 기억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진짜 이야기는 이처럼 훨씬 더 복잡하고, 풍성하고, 소중하다. 그때 나는 아버지에게서 부드럽게 사랑받았던 기억 때문에 흐느끼고 있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 남자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문제를 해결하기가 쉬운 편이다. 그들에게는 아직 살아 있는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의 삶은 베일이 벗겨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로버트 블라이는 아버지에게 장거리 전화를 건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사이에 벌어졌던 틈을 메우려는 뜻에서 큰맘 먹고 전화를 건다. 아버지와 아들은 몇 년 동안 만난 적이 거의 없었고,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해 오던 아들이 마침내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건 것이다. 아버지가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저예요."
"어! 잘 있었냐? 엄마 바꿔 주마…."
"아니오, 엄마 바꾸지 마세요. 아버지하고 얘기하고 싶어서 전화한거거든요."…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른다. 잠시 후,
"왜? 돈 떨어졌냐?"
"아니요. 돈 때문이 아니에요."
그 말 뒤에 아들은 미리 연습을 했는 데도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제가요. 아버지 생각을 하다 보니 기억하는 일들이 많이 있어서요. 아버지가 제게 해 주셨던 일들 말이에요. 절 대학에 보내시고 가족을 먹여 살리시느라고 그렇게 싫어하셨던 일인데 그만두지 못하셨던 게 생각나네요. 또 저희를 먹이고 재우고 입혀 주셨고, 제가 뭘 공부할지 그리고 어떤 직업을 가질지 저한테 선택하라고 맡겨 주셨잖아요. 지금 제가 잘 나가고 있는 건 다 아버지가 출발을 잘하게 해 주신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제가 한번도 이런 말씀 드린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감사하단 말 말이에요…."
아버지 쪽에서는 계속해서 말이 없다. 그러자 아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한테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고마워요. 아버지 그리고 사랑해요."
꽤 오랜 침묵이 흐른 뒤 아버지는 마침내 이렇게 대답한다.
"너 술 취했냐?"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청중들은 배꼽을 잡고 웃는다. 그러나 나는 많은 이들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반짝거리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존경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아버지와 화해하고 그에 관해 제대로 된 견해를 갖는 일은 당신이 아버지가 된 경우에도 아주 중요하지만 당신이 지도자의 역할을 해야 할 경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존경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당신도 존경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권위를 나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정치계나 경제계의 지도자들이 저지른 거짓말이나 속임수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존경할 만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절벽을 기어오르는 일과 같기 때문에 이미 그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나 그들이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택했던 길을 볼 수 있다면 훨씬 더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존경에 고나해서 널리 퍼져 있는 잘못된 인식이 하나 있다. 존경이 일종의 숭배처럼 그 대상자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이런 잘못된 인식이 여러 세대를 잘못된 길로 이끌어 갔고, 그 결과 그들의 삶을 박탈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우리는 존경의 대상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들을 존경한다. 그들을 존경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들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누군가를 무시하는 것은 눈이 먼 상태와 같다(존경respect이라는 말은 원래 다시 보는 것, 즉 두 번 다시 보는 것을 의미했는데, 두 번째 볼 때 사람들은 처음 보았을 때보다 훨씬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누구나 우리의 존경을 받을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살펴보면 누구에게나 존경할 점이 있다. 단점에도 불구하고 장점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사람을 착한 사람, 나쁜 사람 두 부류로 나누어서 본다. 약하고 몸집이 작은 아이들에게는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가 자기들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좋은 규칙이기 때문이다. 이를 초월해서 누구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성장에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존경할 부분을 선택할 수 있고, 무엇은 받아들이고 무엇은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면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우리가 져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이 전혀 없을 뿐더러 완전히 냉소적인 상태가 된다. 따라서 그런 상처를 치유하고 난 뒤에야 우리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좋은 것들을 선뜻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세상의 온갖 지저분한 것들에 눈을 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
겉으로는 아무리 비판적이고 무심한 척 해도 아버지라면 누구나 마음속으로 자기 아들(혹은 딸)이 자신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길 바라며 인생을 보낼 것이다. 이 사실을 명심하라. 당신의 아버지는 평생을 기다리며 살아갈 것이다.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신은 손안에 엄청난 권력을 쥐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자녀의 자부심을 깔아뭉개는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 부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로 그 엄청난 권력이 자녀에게로 옮겨 간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부모들은 방어적인 태도로 그저 자기 자녀들이 자신들을 비판하는 단계를 넘어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이것이 삶이다.
내가 아는 남자 중에 정말 '구제불능'인 아버지를 가진 이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누군가가 감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꺼낼 낌새만 보이면 집 밖으로 휙 나가 버리곤 했다. 이 노인네가 암에 걸려서 몸 여기저기에 주사 바늘을 주렁주렁 매단 채 병원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내 친구는 자기 아버지를 만나려고 대륙을 가로질러 와서 병원으로 직행한 다음 아버지 병실의 문을 닫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잡았네요. 아버지." 그런 다음에 그는 자기가 그동안 분노에 차서 살았던 일과 (시간이 좀 지난 뒤에) 감사했던 일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날 때 내 친구와 그의 아버지는 서로 손을 맞잡고 있었다.
성장 과정 중에 입었던 상처에 관해 이야기하고, 부모의 잘못에 대해서 정직하게 털어놓고, 부모가 잘한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는 것이 아들이건 딸이건 자녀로서 해야 할 의무이다. 속으로는 부모와 참된 관계를 맺는 일을 피하면서 그 일을 회피하거나 모든 것이 괜찮은 척하는 행동은 그만두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일이야말로 당신을 핵심으로 이끄는 도전이 될 수 있다. 당신은 문제를 더 악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제 당신에게는 당신이 남자고, 아버지와의 화해라는 거대한 괴물과 맞서지 않는다면 당신의 아버지가 상처를 안은 채 죽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신의 아버지와 함께 당신의 일부도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로버트 블라이는『무쇠 한스 이야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무수한 남자들이 자기들이 무능한 인간이었다고 확신하면서 무덤으로 간다." 그들이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된 이유는 사랑했던 아들이 자기에 대해서 고마워하는 마음도 없고, 남성으로서 삶의 첫 접촉점인 자기에 대해서 존경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아버지들이 겪는 고통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언젠가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가 화해할 목적으로 당신을 찾아 나설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가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기대하기 힘든 일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 세대의 통찰력이라는 혜택을 입은 사람은 당신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도 당신이다. 그의 어깨에 기대서 자라난 사람도 당신이다. 그러니 아버지와의 대화에 불모를 트는 첫 걸음을 떼는 사람도 당신이 되는 것이 맞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흔한 말이고,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그 말을 하는 것이 망설여지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이 말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게 하는 것도 이 책의 목표 중 하나다. 물론 말로 표현하는 것이 서로가 평안하고 믿을 만하고 정다운 친밀함에 이르렀다는 느낌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당신이 거대한 안도감과 엄청나게 자유로운 느낌을 안고 아버지와 마주 앉아 있으면 둘 모두에게 편안함과 친밀함이라는 감정이 찾아온다. 그리고 당신은 그런 감정을 느낄 때 당신이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마음속으로 아버지에 대한 편견을 품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편견을 가지게 된 이유가 아주 의외인 때가 있다. 나쁜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들을 아버지에게서 돌아서게 만드는 주범이 어머니인 경우도 꽤 있다. 아버지에 대해 당신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라, 혹시 당신 어머니의 생각과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게 이야기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가? 아버지 쪽의 이야기는 다르지 않을까? 이것만으로도 당신이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찾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성인 아들이 있는 아버지라면 왜 망설이는가? 살아 계신 아버지가 있는 아들이라면 뭘 해야 할지 분명하다. 자,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었는가? 처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은 고사하고, 그를 향한 사랑조차 없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어쩌면 그에 대한 증오만 가지고 여행을 시작할 수도 있다. 당신과 당신 아버지 간에 어떤 면에서건 차이가 있다면 간과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 마라. 그런 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뿐더러 당신 스스로 값어치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해결하는 것이 당연하다(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이야기하겠다).
상담할 목적으로 나를 찾아왔던 많은 남자들은 나와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나면 속에 감추어 두었던 절망을 드러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결함이 있으며, 그것이 유전적인 결함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자기 아버지의 선택과 고투 뒤에 있는 진짜 사연을 모른다면 실패 밖에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도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성분으로 만들어졌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를 저주하고, 또 자기들 스스로를 저주한다. 때때로 남성 전체를 저주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어쩌면 자기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자기 부정을 피하고, 자기 아버지가 왜 그런 선택들을 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다. 남자들의 영혼은 존경, 즉 찬사와 결합된 사랑을 먹고 자란다. 아들들은 자기 아버지를 향한 존경심을 '발견해야' 한다. 그건 존경하는 척하는 것과는 다르다. 또 반대로 자기 아버지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도 필요하다.
기억해 두라. 존경은 맹목적이거나 무조건적인 찬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위 세대들에게는 많은 결함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그건 우리 세대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또 존경은 생각이 같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존경이란 다시 보는 것을 말한다. 즉,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풍성한 경험, 고통, 용기를 들여다보고, 그들에게도 우리가 보고 배울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아들들이 갈망하는 인정
남자의 성장에 관해 기독교적 관점에서 쓴 책『남성의 영혼을 치유하기Healing the Masculine Soul』라는 책에서 고든 댈비Gordon Dalbey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20대 후반인 한 청년이 자기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그 젊은이는 일에 있어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십대 때 아버지와의 힘든 관계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는 편지에다 하고 싶은 말을 바로 쓴다. 아버지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그런 질문을 한늘 것은 굉장히 용기 있는 일이지만 자칫하면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아버지는 예의 바르지만 공식적인 답장을 보낸다. "난 내 자식들 모두를 사랑한다. 그리고 너도 그걸 알았으면 한다." 그 젊은이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자기 질문의 의도와는 전혀 맞지 않는 답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버지의 답변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모욕이나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인 질문에는 개인적인 답을 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 '못된 노친네'도 그 정도는 알았어야 했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 한편이 손해 봤다고 느끼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그리고 그는 어린 시절 내내 그런 느낌을 받으며 자랐다. "난 내 자식들 모두를 사랑한다…." 아버지는 직접적인 칭찬을 해 준 적이 없다. 그 청년의 아버지는 개인 대 개인으로 개별적인 관계를 맺는 데 필요한 감정적인 강렬함과 상처 받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댈비의 권고에 용기를 낸 그 청년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편지를 쓴다. 두려운 마음이 왜 없겠냐마는 다시 한번 모험을 해 보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 그의 아버지가 보낸 답장을 그대로 싣는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물어봐 줘서 고맙구나. 이제껏 그런 생각을 깊이 해 본 적이 없었다만 네 질문을 받고 생각하면서 내가 피터, 널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막상 하고 보니 네가 그 말을 그렇게 간절히 듣고 싶어 했던 것만큼이나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 말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어린아이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필요한 것은 없다. 만질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 아이는 물 없는 풀처럼 시들어 갈 것이다. 사랑과 인정을 준다는 것은 이렇게 기본적인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북유럽 혈통인 우리는 냉정한 북구 문화의 상속자이기도 하다. 나는 아주 작은 아이들이 캘거타의 축사 같은 집에서 가족들을 위해 춤추고 노래할 때 엄청난 박수와 환호를 받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비싼 사립 학교에 다니는 영국이나 호주의 어린아이들이 칭찬을 받을 거리라는 기대에 상기된 얼굴로 성적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성적에 연연하는 부모들의 차갑고 냉정한 평가뿐이다. 그렇게 되면 부모와 자식 간에 사랑과 단순한 기쁨을 누릴 기회는 영원히 사라진다.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결과,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사랑을 갈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에는 왜곡이 생길 것이다. 충분히 사랑을 받으면 사랑이 우리 내면의 토대에 자리 잡고 그 토대 위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사랑이 결핍되면 채워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욕구가 강박관념이 되어 우리를 몰아간다. 많은 남자들이 일에 미치거나 모든 의욕을 상실한 실패자가 되는 것도 알고 보면 다 채워지지 않은 사랑과 인정에 대한 욕구 때문인 경우가 많다.
"아빠, 이것 좀 봐요. 나 이런 것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예야, 그 정도 가지고 무슨 자랑이니?"
아버지와 아들 간의 마찰에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삶의 방향에 있어 두 세대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문제가 생길 것이 뻔하다. 평범한 아버지에게 동성애 아들이 있다거나 그 반대인 경우가 한 예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라도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문제는 동일하다. 내가 당신이 기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해도 그래도 당신은 날 사랑하나요? 내가 당신이 꿈꾸었던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해도 말인가요?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잭 톰슨과 러셀 크로가 열연했던 영화 "섬 오브 어스The sum of Us"는 모든 아버지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이다. 우습고도 감동적인 뉴질랜드의 토프가 쌍둥이 자매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탑 트윈스 : 천하무적 쌍두이 레즈비언Untoucbable Girls"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보수적인 부모라도 자기들과 다른 자녀들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기꺼이 풀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그려 낸다. (1950년대 낙농 농장에서 테어난 토프 가의 쌍둥이 자매들과 그들의 형제 모두가 동성애자인 것으로 드러난다. 그들은 종종 자기들이 마셨던 우유 속의 어떤 성분 때문에 자기들이 그렇게 된 것 아니냐고 농담을 하곤 한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기대와 희망을 품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 희망이 뜻한 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그것을 내려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아들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딸을 얻었다거나 운동선수가 되기를 바란 아들이 예술가가 되었다거나 음악가가 되기를 바란 아들이 일용직 노동자가 되었다거나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기를 바랏던 아들이 뇌성마비에 걸렸다면 그런 아들을 가진 아버지의 가슴은 상처투성이일 것이다. 하지만 끔찍한 결과는 그 문제 자체 때문에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건 당신이 슬픔에 주저앉아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거절하는 것에서, 그래서 아들에게서 원했던 모습이 아니라 아들의 현재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에서 온다.
자녀들을 향한 편협하고 이기적인 꿈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꿈구었던 자녀들의 모습보다 자녀들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넓은 가슴으로 자녀들의 차이를 포용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문제를 해결하기
분명한 것은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문제를 해결하기가 한결 더 쉽다는 점이다. 아버지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당신 자신의 자유를 위해 필수적인 단계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면 이제 그 일을 실천으로 옮길 일만이 남아 있다. 하지만 나오 상담을 했던 남자들은 종종 자기 아버지와 마음에 있는 대화를 나누는 일이 심한 싸움이 될까 봐 주저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일을 해결하려다 자칫 더 악화시킬까봐 두렵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버진 변하시기엔 너무 나이가 드셨어요."라든가 "그 일은 그냥 덮어 두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라고 이야기한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많은 아버지들도 자기 아들들이 자기들의 무능함에 대한 비난과 원망으로 가득 채운 보따리를 든 채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각자가 그런 생각을 품은 채 만나는 것이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일 수도 있다.
여기에 몇 가지 실제적인 제안을 하고자 한다.
아버지와 대화하는 방법
1. 늘 열린 마음으로 가라.
불끈 주니 주먹을 쳐든 채 "변명이라도 해 보시죠. 이 천하에 몹쓸 인간 같으니라고!" 라는 태도로 대화를 시도해선 안 된다.
2. 아버지가 혼자 있을 때 이야기를 시작하라.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서 대화를 시작하라. 그렇지 않을 경우 아버지가 전적으로 마음을 터놓기 어려울 것이다. 많은 남자들은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아내의 눈치를 보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기 어렵다. 아버지가 완전히 자기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 만한 장소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3. 환경을 조성하라.
카페 같은 공공장소는 안 된다. 그런 장소는 중요한 문제를 이야기하기겐 전혀 어울리지 않은 곳이다. 서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언성이 높아질 수도 있는데, 카페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그런 곳을 택하라.
4. 시간을 두고 생각하라.
서둘러서는 안 된다.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어렵다면 아버지를 여행에 초대하거나 최소한 드라이브를 하자고 제안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며칠을 비워서 캠핑이나 낚시를 가거나 음악회나 운동 경기를 관람하는 등 당신이나 당신의 아버지 둘 다 즐길 만한 일들을 생각해 보라.
5. 질문한다는 느낌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라.
아버지에게 아버지 삶의 진짜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를 물어보면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특히 당신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당신이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당신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물어보는 것도 좋겠다. 아버지가 하신 일, 그의 삶, 그가 왜 그런 결정들을 내렸는지에 대해 물어라. 비판적인 태도는 금물이다. 비판하지 않는 것이 어렵다면 언젠가 당신의 아들도 당신을 똑같은 저울에 올려놓고 무게를 잴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하면 도움이 되러 것이다. 이해하려는 마음 외에 다른 생각은 품지 마라.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이 언제 방아쇠를 당길까 마음 졸이고 있다 그런 태도를 감지하면 금방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릴 것이다. 당신 자신이 진심으로 마음을 열지 않고 대화에 임할 것이라면 진짜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는 것이 좋다.
6. 당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준비를 하라.
당신에게는 그 시절이 어땠는지 당신 입장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주어라. 이때 복수를 하겠다든지 아버지를 공격하려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화가 나 있을 수도 있고, 또 그렇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버지를 공격하거나 대들거나 해서는 안 된다. 전후 사정을 다 들을 필요가 있다. 진실은 (아버지 편의 진실은) 당신이 어린 시절에 막연히 품고 있던 인상과 사뭇 다를 수 있다. 당신은 아버지 편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마음속으로 아버지의 인간적인 면을 느끼고 그에게 가지고 있던 그림의 빈 부분을 채워 넣을 수 있으며, 아버지로 하여금 자녀들이라면 누구나 자기 부모에게 지우는 짐을 벗게 해 줄수 있다.
개중에는 대화를 시종일관 회피하다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대놓고 대화를 거부하는 아버지도 있을 수 있다. 둘 사이에 주먹다툼이 벌어진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면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무리이다. 대화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기억하라. 당신이 아버지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아버지와의 사이에 있었던 벽을, 그 위선을 무너뜨리는 것일 뿐 아버지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게는 독일에 사는 젊은 친구가 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2차 세계 대전에서 끔찍한 일을 겪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 군인들이 마을에 쳐들어왔을 때 자기 아버지가 겨우 11살이었다는 사실 외에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아버지가 단 한번도 그때 일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속으로 자기 자식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으면서도 평생 자식들과 소원하게 지냈으며 늘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내 친구는 자기 아버지가 도움을 요청하면 멀리서도 달려오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아파트 수리하는 일을 도와 달라고 했다. 내 친구와 그의 아버지는 페인트도 칠하고, 이것저것을 손보면서 함께 5일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아버지는 마침내 그 전쟁 대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그는 끔찍한 일을 목격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아버지는 울음을 터트렸고, 그 바람에 둘은 페인트 붓을 내려놓고 서로를 끌어 안았다. 그 노인네는 오랜 세월 자신의 마음을 닫게 만들었던 그 끔찍했던 일을 자기 아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그에게는 그게 절실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온 것이었다.
내 젊은 친구가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고 인내심을 발휘했기 때문에 부자간에 이런 좋은 결과가 맺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화해의 시간을 가진 뒤에야 비로소 두 사람은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문제가 병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것인 경우도 있다. 트레버(지금은 오십대 초반)의 경우가 그렇다.
트레버가 소년이던 시절 그의 아버지는 매일 아침 신문 돌리는 일에 트레버를 데리고 갔다. 그들은 신문을 돌리는 평화로운 리듬의 공동 작업 속에서 매일 두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들이 신문을 돌리는 사이에 조용히 해가 뜨고 서리고 녹았다. 그때가 트레버에게는 하루일과 중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매일 아침 그는 아버지와의 친밀함과 남자들의 세상에서 뭔가 유용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직장(아버지가 낮에 했던 일, 아버지는 그 일을 몹시 싫어했다.)을 그만두고 신문 배달을 책임지는 배달 지국 일에 투자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트레버에게 실망스러운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배달 사업은 다른 사람에게 팔렸고, 그렇게 해서 그들의 신문 배달 일도 끝났다.
트레버는 그 일로 30년 동안이나 아버지한테 화가 나 있었다. 아버지가 자기랑 함께 있는 것을 원치 않아서 그 일을 거절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늙어서 병으로 드러누웠을 때 가서야 트레버는 그 일에 관해 물었다.
"아버지는 그때 왜 신문 배달소를 인수하자는 제안을 거절하셨던 거예요?"
"함께 투자하자고 제안했던 파트너에게 도박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그 일을 시작했다면 우린 아마 망했을 것다."
실제로는 이렇게 간단한 문제였는데 30여 년을 원망으로 끙끙댔던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황 전체를 잘 모른다. 부모로서 우리는 그들에게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말한다 해도 언제가 적당할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아 망설이지 마련이다. 그런데 자녀들은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뒤 평생 그 결론을 마음에 품고 부모를 원망하며 살지도 모른다. 이런 일은 분명히 밝히고 지나가는 것이 좋겠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난 뒤 당신은 그제야 의문스러웠던 일들의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때 해야 할 가장 큰일 중 하나는 아주 간단하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성장하는 중에 아름다운 부분으로 기억되는 특별한 기억이나 사건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의 아버지는 자신이 '제대로 해 낸 일'이 있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자기들은 늘 행복하며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 왔다고 믿는 가족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환상적인 믿음이 진짜 문제의 원인일 수도 있다. 가족의 실제 모습을 보지 않으려는 것이 신뢰를 막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당신이 싫어했던 일, 당신이 끔찍하다고 생각했던 일, 혹은 당신이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얼마나 슬프고 외로웠는가를 이야기해도 괜찮다. 그때 아버지가 격분할 수도 있다. 또 다시 당신을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기하지 마라. 당신은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다. 머릿속에 엉킨 생각들을 정리하라. 그때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물어라. 의문을 품었던 일들에 관해 질문을 던져라. 그러고 나면 종내에는 당신들 사이로 용서나. 이해, 생각 혹은 어떤 관점 같은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놀랄지도 모른다.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20세기 심리학의 몇 가지 강조점 가운데 하나는 끝내지 못한 일은 끝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도 힘든 삶을 살았다거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거나, 이제 늙었는데 새삼스럽게 그들을 뒤흔들어 놓을 이유가 없다거나 하면서 용서하고 끝내 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게 넘겨 버리는 것으로는 진실을 알 수도 없을뿐더러, 인정 받아야 할 깊은 상처를 입은 당신 속의 어린아이를 달랠 수도 없다. 인정하지도 않은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일을 회피하는 것이야말로 당신의 아버지를 업신여기며, 당신을 값싸게 취급하는 것이다. 당신이나 아버지 모두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당신들 두 사람이 더 멀어질 수도 있다. 용서는 목표 지점이다. 그 목표에 이르려면 당신은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지름길이 아니 정상적인 길로 가야 한다.
당신들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표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에게서 받은 고통을 되돌려 주겠다거나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고통의 수레바퀴를 한 번 더 돌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바퀴를 한 번 더 돌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바르고 완전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 목표이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옛말을 기억하라. 이것은 당신에게도 당신의 부모가 자라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녀가 부모의 삶에 성장과 치유를 가져다주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흔한 일이다. 너무 늦기 전에 당신들 두 사람 모두를 치유하는 것, 그것이 부자간 대화의 목적이다.
당신 자신과 화해하기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기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아주 불편해 한다. 그래서인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남자들은 아버지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참 안된 일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기들 자신의 뿌리를 자르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민간 전승에서는 우리가 우리 부모들과 화해해야 영적 치유를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고대의 전통적인 방식은 수치심이 덜한 접근 방식을 취한다.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와 같다. 당신의 개별성은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에게 준 것의 꼭대기에다 당신 자신의 것을 쌓은 것에 불과하다.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는 당신이 알아야 하고, 고려해야 하고, 이해해야 할 온갖 기초가 이미 있는데 그것은 당신의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우리들 대다수는 몸짓이나 습관 혹은 뭔가를 하는 방식이 아버지의 것을 고스란히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적잖이 당황스러워 한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뿌리 뽑으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의 마음은 그 어떤 것도 그냥 던져 버리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은 "당신 안에 있는 당신의 아버지"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 스스로와 불화를 겪는 자신을 자주 목격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런 남자들을 본 적이 없는가? 장작을 패거나 차를 고치다가 혹은 편지를 쓰다가 혼잣말로 오래 죽어 있던 유령과 언쟁을 벌이고 있다면 그가 바로 그런 남자이다.
"그걸 그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면 어떡하냐. 아들아!"
"그만 좀 꺼져 주실래요. 아버지?"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삶을 이해하여 당신의 아버지를 용서하는 일은 당신을 가장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이다.
어떤 남자들은 내가 제안하는 대로 하고 싶어도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신 뒤라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깊은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그들은 자기 아버지와의 화해할 기회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당신 안에 있으므로 그런 경우에도 화해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 상상 속에서 꿈속에서 그의 묘비에 대고 이야기를 하거나 죽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씀으로써 당신은 그 슬픔을 전환시키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어색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다. 아버지를 찾는 실제적인 모험을 떠날 수도 있다. 아버지가 태어났던 곳이나 아버지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더 곳, 혹은 그의 지인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에 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은 뒤 잃어버렸던 세세한 내용들로 전체 그림을 완성해 갈 수 있다. 그러는 중에 비슷한 여행을 떠난 다른 남자들과 그 문제를 함께 토론할 기회도 얻게 되는데. 그 일이 당신에게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런 남자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아주 많기 때문에 서로가 다른 이들의 슬픔을 해소시키고 마음이 정화되게 도울 수 있다. 당신은 이런 중에 엄청난 고통이 해소되고, 고통이 사라진 자리를 건강과 에너지가 대신 채우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과거로부터 달아나지 마라. 과거는 늘 끝내는 우리의 보물 창고가 된다.
요약 - In a nutshell
* 100명의 남자들 가운데 자기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는 남자는 단 10명뿐이다.
* 소년들의 성장 과정에는 일정한 주기가 있다. 어릴 때는 자기 아버지와 친밀함을 유지하다 십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가시처럼 꺼끌꺼끌한 관계가 되고, 독립성을 찾은 후 성인이 되어서는 다시 돌아와 친밀해진다.
* 오늘날 대부분의 남자들은 아버지와 멀어졌거나 소원하게 지낸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자연스러운 주기는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는 실제로 남자들의 행복과 성장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다.
*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종종 남자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남성성이라는 강의 물꼬를 트는 열쇠 역할을 할 수 있다.
* 많은 남자들이 아버지와의 화해를 위한 여행을 떠나고 있고, 쉽진 않지만 이 여행이 남자들을 해방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