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오랜만에 놀러 온 울산 직장후배에게 책 한권을 선물로 주었더니
형님! 제 나이가 45세가 되도록 책을 선물 받기는 난생 처음이라며 감격해 한다.
긴 장마끝에 모처럼 햇볕이 쨍쨍난 주말저녁 바깥에서 행복한 저녁식사를...
- 푸페이룽지음의 『 장자교양강의 』中에서 -
책은 어떻게 읽는가
독서와 배움은 인생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다. 그러나 독서와 배움이 똑같지는 않다. 간단히 말하면 배움은 평생에 걸친 일이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어떻게 깨닫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독서는 비교적 단순하다. 학교에서의 독서는 계획적이며 목적 지향적이고 어떤 단계에 이르면 졸업을 하게 된다. 졸업한 후 학교에서 읽었던 책이 유용한지 아닌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리고 누구라도 책을 펴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마천의 묘사에 의하면 장자는 '그 학문이 넓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독서를 많이 했다는 말은 없다. 그렇다면 장자는 독서에 대해 어떤 특별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환공桓公의 독서'라는 장자의 우화로 독서에 관한 문제를 한번쯤 생각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환공의 독서
제나라 환공은 춘추오패春秋五覇 가운데 처음 꼽히는 인물로, 관중管仲의 보좌를 받아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하며 춘추시대 초기에 천하의 안정을 이룬 사람입니다. 공자는 그가 '정도正道를 따르고 권도權道를 쓰지 않는' 사람이라고 칭찬했습니다. 또한 그를 도운 관중의 공헌을 높이 평가하면서 "백성이 지금까지도 관중의 은혜를 입고 있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 제나라 환공은 명색이 제후의 맹주盟主인데 장자의 붓끝에서는 뜻밖에도 독서 중인 모습으로 등장하여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장자의 유머입니다. 이 이야기는 『장자』「천도」天道 편에 나옵니다.
제나라 환공이 마루 위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그때 수레를 만드는 장인인 편扁이 마루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몽치와 끌을 놓고는 마루에 올라가 환공에게 물었다.
"나으리께 묻겠습니다. 나으리께서 읽고 있는 것은 누구의 말입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의 말이다."
다시 편이 물었다.
"성인께서는 살아 계십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벌써 돌아가셨지."
편이 말했다.
"그렇다면 나으리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환공이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감히 수레 만드는 놈이 어찌 함부로 지껄이는가. 합당한 이유를 말한다면 괜찮지만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죽여버리겠다."
편이 대답했다.
"저는 제가 하는 일을 통해 알았을 뿐입니다. 수레바퀴 구멍을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렁해서 견고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해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너무 깎지도 덜 깎지도 않는 일은 손으로 터득하여 마음에서 느껴질 뿐입니다. 입으로 말할 수 없지만 그 사이에 오묘한 점이 있지요. 제가 자식에게 전해줄 수도 없고 제 자식도 저에게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흔이나 되었는데도 아직도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사람도 그들이 전해줄 수 없는 것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니 나으리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환공은 이 말을 다 듣고 난 후에 수레 장인 편을 죽였을까요?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장자가 이 이야기를 빌려 하려던 말은 무엇일까요? 책은 지혜를 담고 있지만 지혜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책들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장자는 「양생주」편 첫머리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지식은 무한하다.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추구하면 분명 매우 피로해진다. 이런데도 앎을 구하려고 급급해한다면 그 피로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노자는 일찍부터 이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지식을 추구한다면 매일 하나씩 늘려야 하고 도를 추구한다면 매일 하나씩 버려야 한다. 버리고 또 버려서 하려고 하는 바가 없는 경지에 이른다. 하려고 하는 바가 없지만 무엇이라도 이룰 수가 있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도가의 지혜가 이루어지는 토대입니다. 이는 언어문자로 구성된 지식을 사용하여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수련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어야 합니다.
수레 장인 편은 자신이 수레바퀴를 깎은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술이 예술로 전환되는 계기를 언급하고 있지요. 바로 "손으로 터득하여 마음에서 느껴질 뿐"이라는 말입니다. 이 구절을 간단하게 '득수응심'得手應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손이 본능적인 감각을 드러내고 마음속에서는 명령하지 않아도 딱 들어맞습니다. 손놀림이 빨라야 할지 느려야 할지, 가벼워야 할지 무거워야 할지, 늦어야 할지 앞서야 할지를 마음속에서는 계산하지만 언어로 전할 방법은 없습니다. 수레 장인 편이 언어로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면 자식에게 벌써 그 기술을 전수하고 자신은 말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겠지요.
중국인은 보통 습관적으로 '더신잉서우'得心應手(중국어로 '마음먹은 대로 되다', '순조롭게 진행되다'라는 뜻이다.)라는 말을 씁니다. 먼저 마음속에서 요령을 깨닫고 다시 손놀림을 익숙하게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도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독서와 지혜는 별개의 문제이지요. 예를 들어 한 아이가 자전거를 배우고 싶어 한다고 해봅시다. 자전거의 구조와 자전거를 타는 방법이 적힌 책을 열심히 읽거나 다른 사람에게 자전거 타는 비결을 들었다고 해서 이 아이가 자전거 타는 법을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필요한 것은 실전 경험에 의한 터득입니다. 자신이 직접 손과 발을 써서 몸으로 평형감각을 느끼면서 적어도 반나절 정도는 타야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기술을 배울때는 "실천 속에서 배우는 것"과 "실수를 하는 것" 두 가지 단계를 넘어 뛸 수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어려운 것은 성인이 처세하는 지혜입니다. 공자는 장자의 붓끝에서 항상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시종일관 도를 깨닫지는 못합니다. 이런 묘사는 분명히 공자에게 불공평한 측면이 있습니다. 공자는 스스로 자신의 행위가 가진 유연성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가可한 것도 없고 불가不可한 것도 없다." (『논어』「미자」)
이 말의 의미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것도 없고 또 반드시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것도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행위할 때는 '타이밍'과 '시의적절함'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표현입니다. 유가와 도가는 지혜를 보는 관점이 다르지만 완벽하게 다른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한번 깊이 토론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교육법
좋은 교육은 지식과 도덕을 모두 고려한 것이어야 합니다. 물론 전부가 사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선 지식의 전수에 대해 말해보지요. 대학을 예로 들면, 지식을 전달하고 그 지식에 대해 시험을 보는 일은 그 효과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1개월 후 각 반에서 시험 성적이 가장 좋은 학생을 긴급히 소집해서 기말 시험을 다시 한번 보았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전교에서 응시한 학생들 가운데 합격한 사람은 뜻밖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학생들은 시험을 보기 전에 뭔지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암기를 하지만 시험이 끝난 후에는 그 내용을 대부분 잊어버리고 맙니다. 미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1861~1947)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머릿속에 기억한 세세한 것들을 모두 잊어버렸을 때라야, 배운 것이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비유하자면 여러분이『장자』를 읽은 휴 책을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닐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장자의 사상에 관해 얘기해달라고 할 때에야, 장자에 대해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얻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험 성적이 어떠한지. 필기한 내용이 상세한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왕 화이트헤드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그가 교육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그는 교육이 학생의 성장 단계와 일치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은 주로 체육이나 예술 교육에 집중하게 해서 아이의 신체의 건강과 영혼의 조화를 길러주어야 하고, 중학생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원칙으로 삼도록 해야 하는데, 지능이 처음 계발될 때 튼튼한 기초를 닦지 않으면 평생 어학과 수학에 흥미를 갖기가 힘들다는 겁니다. 이때도 사회성을 기르는 교육에 힘써서 합리적으로 상호관계를 맺는 능력을 키워주고 앞으로의 사회생활을 준비하게 해야 하며, 덕을 기르는 교육은 구체적인 사례로 이치를 설명해주는 것이 가장 좋다고 그는 말합니다. 사회적인 사건을 도덕 교육의 사례로 삼고 학생들이 마음의 모범을 택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대학게 가면 멀리 앞을 내다보아야 합니다. 삶의 영역을 점차 넓혀 사회와 역사, 문화와 우주의 맥락에서 인생을 바라봐야 하바니다. 이 시기에 민주적 시민의식과 책임감을 길러서 졸업 후 사회로 진출해야 역량 있는 인재로 성숙하게 되며, 역사의식을 갖고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설계된 학교 교육을 통해 사회적 역량은 더욱 공고해지리라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도덕 교육을 생각해보지요. 명나라 때 왕수인王守仁(1472~1528)은 「고동교에게 답하는 글」에서 유가의 입장을 드러내는 말을 합니다.
"학교에서는 덕을 이루는 것을 위주로 한다. 재능에는 차이가 있어 예악에 뛰어난 사람이 있고 정치에 뛰어난 사람이 있으며 농사에 뛰어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먼저 덕을 이루어주면 학교에서 그 재능을 더욱 정밀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지금 우리 시대의 문제를 일깨웁니다. 대학은 각 분과 및 학과별로 나뉘어 사회에서 요구하는 전문가를 양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은 도덕 교육입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어떤 인재의 인격이 좋지 못할 경우 그 사람의 능력이 좋으면 좋을수록 오히려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더 클 수 있으니까요. 그런 경우 교육은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도 모두 해로운 것이 되지요.
이어서 왕수인은, 사회에 발을 내딛은 학생에게 갖는 자신의 기대를 말합니다.
"덕이 있는 사람을 임용할 경우 한평생 그 직분에 있게 하고 바꾸지 않도록 한다. 그를 임용한 사람은 그와 마음을 합치고 덕을 함께하여 천하의 백성을 안정케 하기만을 생각한다. 재능의 차이는 유심히 보지만 지위의 상하로 차별하지 않고 업무가 바쁘고 한가한 것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임용된 사람 또한 그와 마음을 합치고 덕을 함께하여 천하의 백성을 안정케 하기만을 생각한다. 자신의 재능에 맞는 일이 있으면 종신토록 번거로운 일이 뒤따르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낮은 지위에 있더라도 자신을 비하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은 공자의 생각에 부합합니다. 공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서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그와 더불어 말할 것이 없다." (『논어』「이인」)
지식인이 자신의 품성을 수양하는 것은 사회를 위한 것이지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계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는 매우 고상한 이상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장자가 비판한 것은 유가의 교육적 이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가의 교육 방식입니다. 지식의 추구와 덕의 완성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요? 또 학교에서 배우는 덕성이 사회의 냉혹한 시험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유가의 교육 방식은 지식추구를 우선으로 하는 교육에 비해 사람의 덕을 완성시키는 데 훨씬 뛰어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덕을 완성하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허장성세를 부리고 인의仁義를 가장하여 거짓된 도학道學을 이루게 되지요. 공자도 이런 점을 의식했기에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옛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배웠고, 지금 배우는 사람은 남을 위해서 배운다.(『논어』「헌문」)
공자는 당시의 학자들이 '남을 위해서' 배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남을 위한다는 말은 결코 타인을 위해 선행을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인에게 뽐내기 위해 지식을 구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자신의 언어와 행위를 개선하기 위해서 배우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학자들을 장자는 날카롭게 비판했던 것입니다.
장자는 독서를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염려했던 것은 사람들이 책 자체를 지혜로 여긴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고 경중이 뒤바뀐 것이지요. 장자는 도덕적 수양을 반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걱정했던 것은 입으로는 인의도덕을 달고 살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는 진정성이 없다는 점이었지요. 이로 인해 천하에서 선악이 구분되지 못하고 흑백이 분명하지 않게 되어 수많은 번뇌와 고통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환공의 독서'라는 우화를 통해 학습 방식을 올바로 볼 수 있게 해주었을 뿐아니라 쓸데없는 것에 현혹되어 진정한 가치와 지혜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정보, 지식 그리고 지혜
사람들은 무엇을 얻기 위해 독서를 할까요? 영국의 유명한 시인인 엘리엇(18888~1965)은 「바위」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정보 안에서 잃어버렸던 지식은 어디 있는가? 우리가 지식 안에서 잃어버렸던 지혜는 어디 있는가?"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정말로 얻고자 했던 것은 '정보, 지식, 지혜'라고 할 수 있을 겁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매일 인터넷을 하고 TV를 보고 여러 잡지를 보면서 정보를 얻지만 정신이 복잡하고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정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오히려 지식을 잃게 되고 조리와 맥락을 놓쳐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설명하기도 어려워집니다.
복잡한 정보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대학의 전공 분야처럼 어떤 영역에서 계통을 잡아 연구하면 분명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대학에는 여러 가지 전공이 있지요? 그래서 한 분야를 정밀하게 분석할 수는 있지만 전체를 종합할 수는 없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게 합니다. 결국 박사 학위를 받더라도 넓을 박博이 아니라 얇을 박薄으 박사가 되고 말지요. 아는 지식의 범위는 매우 한정되 있는 데다,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늘어놓기 일쑤입니다. 사회의 각 영역에서는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데 전문가 자신은 오히려 '지식만 있고 지혜는 없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아인슈타인(1879~1955)은 그래서 "전문가는 잘 훈련된 온순한 개일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분명 전문가를 꾸짖는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요. 공자는 이를 우아하게 표현했습니다. 공자도 학생들이 단지 한 가지에만 유용한 그릇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군자는 (한 가지 용도로만 사용되는) 그릇이 아니다"(『논어』「위정」)라는 공자의 유명한 말은 어떤 기술에 전문적이 되는 것만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인격을 전체적으로 배양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혜란 인생에 대해 '총체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이해'를 이루는 것입니다. '총체적'이란 말은 자아에 대한 인식과 나와 타인의 상호관계 방식,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 우주와 인간의 관계 등을 포함합니다. '근본적'인 것이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입니다. '철학'으로 번역되는 '필로소피'philosophy는 서양의 고대 그리스 시대 이래로 사용된 말입니다. 그 의미는 원래 '지혜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이라고 했지 획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혜란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이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해는 반드시 구체적인 행위의 실천을 통해서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적 변화는 죽을 때까지 계속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단히 말하면, 철학은 한 사람의 인생 태도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철학이 있다"는 말도 바로 이런 의미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의 철학을 공자가 '일이관지'一以寬之라고 말했던 것처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장기적인 실천과 생사를 건 결심이 없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위는 지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 '지혜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겠지요.
불교가 융성했던 당나라 때에, 선종의 5대 조사 홍인弘忍이 의발을 전수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수제자였던 신수神秀가 게송偈頌을 한 수 올립니다.
"몸은 보리수 같고, 마음은 명경대 같아,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 티끌 먼지 없게 하리라."
이것은 점수漸修의 수양 방법을 말합니다. 때때로 깨우침의 노력을 하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의 본체가 곧 공空임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때 잡일을 하던 혜능 스님이 이 게송을 보고 나서 즉시 또 게송을 하나를 씁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도 받침대가 없으니,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에 티끌 먼지가 끼겠는가."
이것은 불법의 진리가 모두 공이라는 지혜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은 허무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지요.
이는 모든 것이 인연因緣에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어떤 사물의 본체든 구체적인 실체 없이 항상 변화한다는 말입니다. 혜능은 훗날 선종의 6대 조사가 됩니다.
독서에 대한 장자의 태도는 선종과 방법상의 차이가 있으면서도 오묘한 효과를 내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장자는 '득어망전'得魚忘筌(『장자』「외물」)이라는 비유를 말하지요. 대나무 통발로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물고기이지요. 통발은 단지 수단일 뿐입니다. 수단을 제아무리 정교하게 만들고 중시한다 해도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즉 물고기를 잡지 못한다면) 어디에 쓸 수 있겠습니까. 정보화 시대의 미흑과 지식의 한계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장자의 이러한 관점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