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인생무상

오키Oki 2011. 1. 5. 16:55

 

30대는 내몸을 위하여 체질식. 생채식, 자연식, 건강식등...

40대엔 내몸 밖을 위해 터닦고 집짓고 등...

50대줄에 접어들고보니 앗차!  마음도 챙겨야 함을 알았다.

 

 

매일 읽는 린포체의 명상일기

- 소걀 린포체지음 『죽음으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중에서 -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느냐를 배우는 것은 이 삶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삶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를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무엇을 행하든지 우리의 행적 모두는 죽음의 순간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해 줍니다. 모든 것, 그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감안됩니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전 세계 모든 교육 기관에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에 대한 보다 계몽된 비전을 소개할 때입니다. 어린이라고 해서 죽음으로부터 무조건 '보호'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어린이에게도 죽음이 참된 의미와 죽음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왜 이러한 비전이 아주 단순한 형태로나마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지 않습니까?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을 보살피는 방법, 그리고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의 영적인 의미에 대한 가르침을 사회의 전 구성원이 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온갖 종류의 학교와 단과 대학, 종합 대학에서 깊이 있게, 풍부한 상상력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의대 부속 병원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보는, 그들을 보살필 책임이 있는 의사와 간호사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불자로서 나는 죽음이 삶의 일상적인 전개 과정이요, 지상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가 수용해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죽음에 대해 걱정할 이유도 없습니다.

나는 죽음이 궁극적인 종말 같은 것이라기보다 낡아서 해졌을 때 갈아입는 옷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찾아들날은 결코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찾아들기 전에 미리 준비하는 것만이 현명한 처사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폭력으로 가득 차 있거나 우리의 마음이 노여움이나 집착, 공포 같은 감정으로 크게 혼란스럽다면, 우리는 정녕 평화롭게 죽기를 희망할 수 없습니다. 올바른 죽음을 맞이하고자 한다면 올바르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평온한 죽음을 희망한다면 우리 마음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사는 방식 안에서 평화를 일구어야만 합니다.  -달라이 라마

 

 

집착은 우리가 지닌 모든 문제의 근원입니다.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곧 고통이므로, 우리는 무언가에 결사적으로 집착합니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인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내려놓기를 두려워합니다. 삶을 배운다는 것은 곧 내려놓기를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사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지 모르지요. 이는 계속해서 무언가에 집착하려는 우리의 몸부림에서 비롯된 비극이자 아이러니입니다. 무언가를 영원히 붙잡아 둘 수도 없을 뿐더러 그 같은 집착욕은 우리가 그렇게도 피하고 싶어하는 고통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집착 이면에 깔린 의도가 그 자체로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행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나쁠 것은 없지만, 우리가 집착하려고 애쓰는 그 무엇이란 게 본래 붙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쉴 새 없이 흐르는 강물에 같은 손을 두 번 씻을 수는 없다."

그리고 "한 줌의 모래를 아무리 쥐어짜도 기름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죽는 순간 우리의 마음 상태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긍정적인 마음으로 죽는다면, 우리의 부정적 카르마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다음 삶은 보다 개선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혼란스럽고 근심에 빠진 상태로 죽는다면, 우리가 그간의 삶을 잘 꾸려 왔을지라도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기 직전 지녔던 마지막 생각과 감정이 곧바로 이어질 미래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이런 연유로 스승들은 죽어가는 순간의 주위 분위기가 몹시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가족이나 친구와 더불어 사랑과 자비, 헌신 등의 긍정적인 감정과 성스러운 분위기를 고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죽어가는 사람이 집착과 갈망, 애착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젊음과 섹스, 권력에 사로잡혀 늙음과 병약함을 멀리하려 합니다.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어 쓸모없어진 노인들이 버림받는다는 사실은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지 않습니까? 노인을 양로원 같은 곳에 외롭게 방치한 채 죽어가게 한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습니까?

 

 

죽음은 엄청난 신비입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입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과 우리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불확실한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언제 죽을지 잘 모른다는 이유로 죽음과 직접 대면할 순간을 지연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술래잡기 놀이를 하는 어린애가 자기 눈을 가리면 아무도 자신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일 죽음이 오로지 한 번만 찾아온다면 죽음에 대해 알 기회가 도무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삶이란 탄생과 죽음 사이에 놓인 끊임없는 춤판, 쉴 새 없는 변화의 춤판입니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소리나 해변가에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 혹은 내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덧없음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와 작은 죽음들을 통해 우리의 삶이 죽음과 연계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소리들은 죽음의 맥박이자 죽음의 고동 소리로, 집착하고 있는 일체를 내려놓으라고 우리를 재촉합니다.

 

태어난 것은 죽고

모인 것은 흩어지며

축적된 것은 소진되고

쌓아올린 것은 무너지며

높이 올라간 것은 아래로 떨어진다.  - 불교 경전 중에서

 

 

스승들은 우리 마음에 그 기본적인 바탕, 즉 '일상적인 마음의 근저'라고 불리는 상태가 있다고 말합니다. 일상적인 마음의 근저는 창고 같은 기능을 하는데,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에서 말미암은 과거 행적의 흔적들은 모두 씨앗의 형태로 일상적인 마음의 근저에 저장됩니다. 적절한 조건이 조성될 때, 그 씨앗은 우리 삶의 환경과 상황 속에서 싹을 틔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우리에게 특별한 패턴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으면, 이런 성향은 쉽게 촉발되고 계속해서 다시 반복됩니다. 우리의 성향과 습관은 이런 식으로 계속 반복되면서 우리가 잠잘 때조차도 서서히 우리를 잠식해 나가고 계속해서 그 힘을 결집시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삶, 우리의 죽음, 그리고 우리의 환생이 결정됩니다.

 

 

티베트 사람들에게 1년 중 가장 큰 축제는 신년 축제입니다. 신년 축제는 서양의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추수 감사절, 생일을 모두 합친 것과 같습니다. 파툴 린포체는 일생 동안 기이한 행적을 통해 가르침을 제시했던 위대한 스승이였습니다. 여느 사람들처럼 새해를 축하하고 '행복한 새해'를 축원하는 대신 파툴 린포체는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면, 그는 많은 사람이 죽음에 대해 아직 아무런 준비도 못했는데 또 다시 한 해가 지나가고, 그 결과 죽음에 1년 더 바짝 다가섰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죽어가는 바로 그 순간에 임박해서야 대다수 사람들이 삶의 진가를 인정하려 드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티베트 불교의 위대한 스승, 파드마삼바바의 말씀을 종종 생각하곤 합니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죽음에 임박해서야 비로소 준비하기 시작한다. 죽음이 닥치면 그들은 회한으로 인해 날뛰게 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지 않았는가?

 

 

우리 존재는 가을 구름처럼 덧없고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것은

춤의 움직임을 보는 것 같구나.

인생의 시간은 순간적으로 스치는 하늘의 번갯불

가파른 산 아래로 흐르는 급류와 같아라.   - 붓다 -

 

 

바로 지금, 이 삶에서 변화를 모색해 봅시다. 그것이야말로 죽음을 실제적으로 준비하는 길입니다. 삶은 고통과 괴로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죽음을 정서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입니다. 우리가 변화로부터 배울 가능성이 막히는 것은 사물이 영속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젼을 켜거나 신문을 읽어 보십시오. 당신은 도처에서 죽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비행기 추락 사고나 자동차 사고로 죽으리라는 사실을 예측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산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나 친구가 예기치 않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들었던가요? 꼭 아파서 죽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은 마치 자동차와 같아서 어느 날 갑자기 부서져 고장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소엔 매우 건강하지만 병이 나서 다음날 바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궁금해합니다.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크게 변하지 않는 한, 지금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지금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점이 죽는 순간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지금 이 삶에서 마음의 흐름을 정화하고, 내 자신과 그 성격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당신이 튼튼하고 건강할 때에는

질병이 찾아오리라 생각 않겠지.

그러나 병은 갑자기 찾아온다네.

벼락이 치는 것처럼.

 

이 세상에 함께 있을 때에는

죽음이 도래하리라 생각 않겠지.

그러나 죽음은 천둥처럼 갑자기 찾아온다네.

머리 위에 떨어지는 우레처럼.   - 밀라레파 -

 

 

우리는 수시로 자기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내가 오늘밤에 죽는다면?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가 내일 아침에 일어날 수 잇을지, 또 어디에 있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숨이 멎어서 다시 숨 쉴 수 없다면 당신은 죽은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이처럼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티베트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일과 내생(來生) 중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 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한다.

 

 

붓다가 말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당신의 모습은 과거 당신의 행동에서 말미암은 것이며, 미래의 당신 모습은 지금 당신이 행하는 것에 달려 있다.

 

파드마삼바바는 한 걸음 더 나아걌습니다.

그대가 전생을 알고자 한다면 그대의 현재 상태를 면밀하게 관찰하라. 그대가 내세의 삶을 알고자 한다면 현재 그대의 행위를 면밀하게 관찰하라.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이든지 지난날의 카르마를 반영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고통과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그것을 재난이나 실패로 보지 않을 것이고, 형벌로 간주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질책하지도, 증오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과거 카르마의 인과응보로 보아야 합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고통을 '온갖 부정적인 카르마를 쓸어 내는 빗자루'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카르마가 종결된다는 것은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좋은 카르마의 과보(果報)인 '행복'은 잘 활용하지 못하면 곧 지나가 버릴지도 모르고, 나쁜 카르마의 과보인 '불행'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진전시키는 놀라운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카르마를 작동하는 것을 보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단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기만 해도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분명하게 볼 수 있지 않은가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해쳤을 때, 그것이 곧바로 자신에게 되돌아오지 않던가요? 비참하고 어두운 기억이나 자기 기만의 어두운 그림자가 아직까지 남아 있지 않은가요?

그러한 기억이나 그림자가 바로 카르마입니다. 우리의 습관과 두려움도 과거에 우리가 행했던 말과 행위, 생각의 결과인 카르마에서 비롯합니다. 만일 우리의 행위를 면밀히 살펴보고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 행위 가운데 계속 반복되는 패턴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부정적으로 행동할 때마다 고통과 괴로움이 야기되고 긍정적으로 행동할 때마다 행복을 불러들입니다.

 

 

사람의 탄생은 슬픔의 탄생이다. 사람이 오래 살수록 어리석음도 늘어난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갈망이 더욱더 격렬해지기 때문이다.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것을 위해 살지 않는가! 미래에도 계속 살아남으려는 열망 때문에 사람들은 현재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없다.   - 장자

 

 

자비는 놀라운 것이지만, 우리의 행위가 자비롭지 못하여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좌절과 고뇌로 이끕니다. 그 결과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행복을 얻지 못한다고 말하며 또 반 정도는 그러하다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토록 행복을 갈망하지만, 우리의 행동과 감정의 대부분은 우리를 되려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교활함, 자기 일신만을 도모하는 마음, 꾀 많은 이기심, 자아의 이기적인 방어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를 때때로 매우 잔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실 정반대로 보면 됩니다. 당신이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그것들은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해치는 근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란 실재하는 것이고 아무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온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조용히 숙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티베트 속담에 나오는 비둘기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비둘기는 잠자리를 만들기 위해 밤새도록 부산을 떨다가 잠을 자기도 전에 밝은 새벽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부지런히 오가며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춤을 추기도 하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그들에게, 그들의 아내에게, 그들의 아이들에게, 그들의 친구에게 찾아왔을 때, 그들은 죽음을 의식하지도, 준비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감정이 폭풍우처럼 몰려와 그들을 압도하면 울부짖고 분노하면서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죽음이 우리에게서 가장 좋은 것을 빼앗아 가기 시작할 때,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것과는 달리 올바른 방식을 취하도록 합시다. 죽음을 낯설게 여기지 마십시오. 죽음과 자주 접촉해야 합니다. 죽음에 익숙해지도록 합시다. 다른 어떤 것도바도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해 봅시다. ‥‥‥ 죽음이 어디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디에서든지 죽음을 기다려야 합니다.

 

죽음을 몸에 익히는 것은 자유를 실습하는 것이다.

죽는 방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지 않는 방법을 배운 셈이다.  - 몽테뉴 -

 

 

옮긴이의 말

오늘날 우리는 사실상 죽음을 부인하게끔 교육받았으며 죽음은 상실과 소멸을 뜻할 뿐이라고 배웠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을 인정하지 않거나 죽음의 공포 아래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불건전한 것으로 여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이란 모든 권리를 다 써 버리는 것이고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는 상태가 된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그가 죽을 때까지만 통용될 뿐입니다. 아직 살아 있는 지금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을 통해, 죽는 순간에, 그리고 죽은 이후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지금의 삶과 앞으로 다가올 모든 삶은 황폐해지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죽어야만 하는 우리 자신, 바로 그 상태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죽음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합니다. 둘째, 우리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아직 불확실합니다. 넷째, 언제 죽을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우리는 죽음에 직면하는 일을 자꾸 뒤로 넘겨 버립니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아직 불확실하므로, 언제나 죽을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죽음, 그것은 바로 삶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하고 궁금해하기보다 지금 나의 삶은 어떠한지 자기 자신에게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온전히 반영되는 거울이므로 누구나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 그래도 죽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살아 있는 바로 지금 이 삶에서 변하지 않는다면 죽음의 순간에, 죽음 이후에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 오진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