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

책을 읽는다는 것은

오키Oki 2010. 12. 3. 22:49

 

 

 

 

 

- 쇼펜하우어의인생에는 오직 하나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에서 -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지하면 인간의 인격은 떨어진다. 인격의 하락은 무지한 자가 부를 얻었을 때에 시작된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과 곤궁에 얽매여 일에 정진하기 때문에, 일이 그에게서는 지식을 대신하게 되고, 그의 사색을 대신하게 된다.

그러나 무지한 자가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을 경우, 그들의 생활은 정욕을 채우는 것에만 급급하며 가축과 별로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우리는 매일같이 그것을 목격하고 있다.

그들은 부귀와 영화를 이용하여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의무를 게을리했다고 비난을 받아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독서란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생각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그 사람의 마음 속의 과정을 반복하는 데에 그친다. 이것은 마치 학생이 글씨를 쓸 때, 선생이 써준 연필 자국 뒤를 펜으로 따라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독서를 하는 경우에는 생각하는 일은 우리에게 멀어진다. 자신이 사색을 포기하고 독서할 때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독서하고 있는 동안은 우리의 머리는 다른 사람의 사상의 운동장에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너무 많이 책을 읽는 사람, 거의 종일토록 독서에만 매달려 아무 것도 생가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점차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 버리게 된다. 그것은 언제나 말만 타고 다니는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을 점차 잊어 버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많은 학자의 경우가 이러하다.

그들은 독서를 함으로써 바보가 되었다. 왜냐하면 여자가 생기면 곧 또 책을 손에 쥐는 것처럼, 쉬지 않고 독서를 계속하는 것은 쉬지 않고 손을 놀리는 일을 하는 이상으로 정신을 불구로 만든다.

왜냐하면 손을 놀리는 것은 아직 자기의 생각에 열중할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스프링이 계속 다른 물체의 압력을 받게 되면 탄력을 잃게 되는 것처럼, 정신 또한 다른 사람의 사상을 받게 되면 그 탄력을 잃게 된다.

영양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위를 해치고, 그 때문에 몸 전체를 해치는 것처럼, 정신의 영양도 너무 많이 섭취하게 되면 정신은 질식해 버린다. 왜냐하면 책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읽는 것이 우리의 정신에 남기는 흔적이 그만큼 적어져 정신은 여러 가지가 차례로 겹쳐 씌어진 흑판처럼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추하는 것처럼 다시 생각하게 되지를 못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봄으로써 비로소 읽은 것이 자기 것이 된다. 그것은 음식을 먹었다고 해서 곧 영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화가 되어야 비로소 영양이 되는 이치와 같다. 쉬지 않고 책만 읽고 그뒤에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모처럼 읽은 것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대개는 잃어 버리고 만다.

일반적으로 정신적 음식도 육체적 음식과 마찬가지이다. 섭취한 것의 50분의 1정도만 동화되고 나머지는 증발작용이나 호흡작용 등에 의해 없어져 버린다.

뿐만 아니라 종이 위에 씌어진 사상은 일반적으로 모래 위에 남겨진 보행자의 발자취 이상의 것이 아니다. 보행자가 걸어간 길은 보이지만, 그가 길을 가는 도중에 무엇을 보았는가를 알려면 우리는 자신의 눈을 사용해야 한다.

 

 

책을 구입한다는 것이 그것을 읽는 시간도 함께 구입하는 것이라면, 이 이상 바랄 나위 없는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책의 구입을 그 내용의 체득과 혼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읽은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기를 희망하는 것은, 지금까지 먹은 것을 모두 몸 안에 간직하였으면 하고 소망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은 먹은 것을 통해 육체적으로 살았고, 읽은 것을 통해 정신생활을 영위해 와서 지금의 자기가 되었다.

그러나 육체가 자기의 몸과 동질의 것만을 동화하는 것과 같이 누구나 자기의 흥미를 끄는 것, 즉 자기의 사상체계나 자기의 목적에 합치되는 것만을 기억에 남겨 둔다. 물론 목적이 없는 사람은 없지만, 사상체계에 준하는 것을 소유하는 사람은 사실 적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어떤 것에도 객관적 관심이 없고, 그 때문에 읽은 것이 하나도 몸에 붙지 않는다. 즉 무엇 하나 기억에 간직하고 있지 못하다.

'반복은 학문의 어머니다'라는 말이 있다. 모든 중요한 책은 두번 읽어야 한다. 그것은 두 번째에는 그 문제의 관련이 더 한층 잘  파악되며 결론이 더 잘 알려지므로 처음 부분이 더 한층 올바르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또한 두 번째에는 어떤 부분에 대해서도 처음과는 다른 기분으로 임하게 되기 때문에, 인상도 달리 받고 같은 대상을 다른 각도로 보게 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자기의 에센스이다. 따라서 저자와 말을 나누는 것보다 그 작품을 읽는 쪽이 비교가 안 될 만큼 많은 내용을 부여 받게 된다. 그 저자가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 해도 이 점에는 변함없다. 대체로 작품은 회화를 대신할 수가 있다.

아니 훨씬 그것을 능가하며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 속된 두뇌의 소유자가 쓴 저서라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한 번 읽을 가치가 잇고 흥미를 끄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사람의 에센스이며, 그 사색과 연구의 모든 것이 열매를 맺은 성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과 교제해도 만족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관계로 교제한다고 해서 만족이 얻어지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책은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정신수준이 높은 사람의 경우에는 인간에 대한 흥미가 아니라. 책에 대한 흥미의 경지에로 점점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고전을 읽는 이상으로 정신을 상쾌하게 하는 것은 없다. 어떤 고전이든 한 권을 설사 반 시간만이라도 손에 쥐게 되면 정신은 곧 신선하고 경쾌해져 맑아지고 높아지고 강해지는 것은, 바위에서 솟아나오는 샘물로 원기가 회복되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