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사는 이야기

느린 삶의 겨울 풍경

오키Oki 2013. 12. 10. 17:16

지난 5일은 포근한 날씨속에 메주쑤기를 했다.

 

 

 

 

 

아침 7시부터 마른 나뭇잎에 불을 지펴 불길을 살린 후

불린 메주콩에 서린 맞은 뽕잎을 달인 물로 삶기로 한다.

 

 

 

 

 

아침 안개가 걷히기 전이여서 비파나무

 

 

 

 

 

콩이 삶기는동안 자주 앞산을 쳐다보는데

비파나무에도 눈길이 자꾸 간다. 

 

 

 

 

한 그루 자라고 있는

비파나무의 열매를 아직 한번도 못 봤다.

늦가을 서리 내릴 때 꽃봉오리는 볼 수 있는데

곧 겨울 추위가 닥쳐와 활짝 핀

비파꽃은 이제 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런 탓에 다음해에 열매를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궁이앞에서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지만

남편이 어질러 놓는 소품도 재밌다.

 

 

 

 

 

산에서 옮겨와 줄 맞춰 쭉쭉 세워진 땔감나무

 

 

 

 

 

20kg의 메주콩은 센불에서 두 시간을 삶고

불길을 줄여서 두 시간을 더 삶아서

뜸들이기를 두세 시간하여 마무리한다.

 

 

 

 

 

산밤을 잿불에 묻고

 

 

 

 

 

노르스름하게 익히면 구수하다.

농사꾼으로 살다보면 곱던 손도 거칠고

손마디도 굵어지고 자연히 손이 커진다.

 

 

 

 

 

노란색에서 황금색(똥색)으로 콩알이 뭉개지면 잘 삶아진 것이다.

 

 

 

 

 

잘 삶아지면 으깨는 것도 수월해서 남편이 도와준다.

 

 

 

 

 

둥근냄비에 담아 꾹꾹 눌러서

 

 

 

 

 

냄비를 엎어서 빼면 동그란 메주로 만들어지면

바람통하는 그늘에서 말린다.

 

 

 

 

 

6일은 서리가 없는 아침을 맞아 

겨우내 먹기위해 김장을 하기로 했다.

 

 

 

 

 

남편이 배추벌레를 잡아주면서 정성으로 키워 낸 배추다.

배추를 다듬는데 추위와 따뜻한 날이 헷갈린 탓에

미처 겨울잠을 자러 못 간 참개구리 한 마리가

배추속에서 숨었다가 동사한 채 발견되었는데

여태껏 배추다듬기에서 처음있는 일이다.

올해는 비리가 든 배추도 있어 

절인 배추 씻기는 다른 때보다 두배로 걸렸는데

김장날을 잘 잡은 탓에 날씨가 포근해서 다행이였다.

 

 

 

 

 

꾸덕꾸덕해진 메주는

 

 

 

 

 

망사주머니에 넣어 처마밑에서 겨우내 말린다.

우리집 메주는 띄우지 않고 그냥 간장을 담그는데

그렇게 담그어진 간장은 메주를 꺼내 된장도 만들고

간장물은 끓이지 않아도 햇빛이 잘 달여준다.

 

 

 

 

 

어제 찬비가 내린 후 밤바람이 쌩쌩 불더니

오늘은 추위도 함께 왔다.

 

12월이 되면 겨울 추위와 함께 말벌들도 사라진다.

다래넝쿨을 걸쳐서 나뭇잎을 덮고 있는 재미난 말벌집에

지난주 며칠 우리집 김장하기 좋은 날

따뜻해진 날씨에 큰새와 작은 새들도 많이 날아왔다.

주린 새들이 영양덩어리인 말벌집 입구를 조금 파먹었는데

꼭꼭 숨은 말벌집이 조금 드러나자 

맛있는 건 새들이 기막히게 먼저 알아챈다.

 

 

 

 

 

10년 전에 난 다산 정약용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번역한 적이 있었다.

정약용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실학자다. 그에 대해 어떤 이는 수원 화성의 기중기를 떠올릴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천주교 박해로 유배생활을 하던 야인을 떠올릴 것이다. 또 그의《흠흠신서》를 읽은 이라면 '조선의 셜록 홈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정말 다양한 모습을 가진 인물이다.

나는 다산에게서 사대부가의 선비 모습이 먼저 보인다.

 

 

1801년, 그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한 대목을 보자.

 

 

너희들의 편지를 받으니 마음이 놓인다. 둘째의 글씨체가 다소 좋아졌고 문리(文理)도 향상되었는데, 나이 덕분인지 아니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덕분인지 모르겠구나. 부디 스스로 포기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 부지런히 책 읽는 데 힘쓰거라. … 내 귀양살이 고생이 몹시 크긴 하다만, 너흐들이 독서에 정진하고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아무 근심이 없겠구나….

 

 

다산은 부인이 보내온 치마폭에 이렇게 글을 적어 보냈다. 그의 글에는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다산은 18년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40대와 50대를 남쪽 끝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보낸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폐족'(廢族)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난 그 유배지가 그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위대했던 시기로 본다. 그가 남긴 수백 권의 저서와 학문적 업적이 그때 탄생했던 것이다. 그것이 18년이란 긴 세월을 고립된 환경에서 버텨오게 한 힘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로서 자식들에게 항상 당부했던 것이 바로 '독서'였다. 독서가 가장 청렴하고 중요한 일임을 거듭 강조했다. 그것이 비단 호사스런 집안 자식만의 일도 아니고 뛰어난 머리를 가진 이들을 위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진정한 독서의 방법을 말하고 있다. 지금의 현대인들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기도 하다. 내 일본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일본인과 한국인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독서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일본인들의 독서가 '일상'이라면 한국인들은 '필요성'이었다. 일본인들의 손은 항상 책과 붙어 있다. 그같은 문화적인 풍토는 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큰 힘이 되기도 한다. 전쟁의 패망국, 일본이 단기간 내에 우뚝 일어설 수 있었던 힘도 어쩌면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느낌은 그들과 상당히 달랐다. 한국의 한 인문학 교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데, 그의 한숨소리와 긴 푸념이 떠오른다.

"우리 한국인들이 독서에 인색한 건 아마 축제가 너무 많아서인지도 몰라요. 날마다 축제이니까요. 퇴근하면 직장 전체회식과 부서회식, 초중고 동창회와 동기회, 대학 동문회와 대학 동아리회, 향우회, 군대모임, 집안모임, 종교모임, 조기축구회, 당구회, 등산회, 낚시회, 동네 친구들 모임, 반상회, 영화미술 감상, 스포츠경기들 관람, 유유상종 주당회, 주말 가족여행, 각종 M.T 등등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지요.

그러니까 혼자 조용히 사색하며 고독해질 시간을 가져야 책이 읽히는데, 삶이 너무 각박해진 탓인지 그걸 모두 기피하는 것 같아요. 간혹 집에 혼자 있다고 하더라도 TV시청이나 컴퓨터게임에 유혹당하고 말아요. 더구나 청소년들은 입시전쟁이고 대학생들은 취업전쟁이니 언제 한가하게 책다운 책을 읽고 즐기겠어요? 독서삼매경이란 말도 들어본 지가 까마득하군요. 에휴~."

이 교수의 말이 아니더라도 과연 한국은 각종 모임들의 천국이었다. 또 그 모임들의 필수메뉴는 술이고 마지막 코스는 노래방이라는 게 내 한국생활의 결론이다. 나도 여러 번 그 코스를 답사했다. 그러고 보니 퇴근 시간 무렵만 되면 여기저기 전화하는 동료 교수들의 바쁜 손놀림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내가 본 한국인들은 바빴다. 업무로 바빴고 술로 바빴고 또 피곤한 몸을 쉰다고 바빴다. 아마 그동안 한국인들이 술 마시듯 책을 읽었다면, 한국은 지금쯤 세계 최고의 인문국가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렇게 바쁘고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을 위한 독서를 권하기란 참으로 민망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사회는 '왜(Why) 사는가?'의 문제보다 '어떻게(How) 사는가?'의 문제가 더 긴급했다. '왜?'는 인문학적 질문이어서 밥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어떻게?'는 실용적 질문이어서 밥을 직접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당장 회사에 들어가 컴퓨터로 회계처리를 해야 하고, 기술적인 조작으로 업무처리를 해야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학교는 인문학을 포기한다. 철학보다는 경영학을, 사회학보다는 경제학을, 역사학보다는 기술을, 문학보다는 외국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워야 한다. 그런 실용학문을 오랫동안 한국사회가 요구했다. 물론 그 평가도 경제적 성과와 수치로 평가해버렸다.

하지만 21세기로 넘어와 한국경제는 세계 10위권 너머까지 도달했다. 한마디로 일정하게 먹고 살만한 살림살이가 된 것이다. 그때서야 문득 가슴속이 크게 뚫려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 '텅  빈 구멍'의 실체를 알기 위해 자신한테 자문을 한다. 바로 '왜?'라는 자기정체성의 질문이다. 그런데 그 해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난 당연히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은 책에서 찾지 않았다. 1970년대 이전의 그 어려웠던 시절에도 책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책에서 떠나버린 것일까? 아마도 책을 대체할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싶다. '왜?'라는 질문과 '어떻게?'라는 질문을 동시에 연결해 주는 곳, 바로 종교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종교는 명쾌한 답을 준다.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니까!"

또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도 역시 명쾌한 답을 준다.

"열심히 기도하면 저 위에 계신 분이 다 해결해 주시느니라!"

실용학문에 밀려난 인문학은 이제 종교에 밀려난 것이다. 종교가 인문학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이런 현실을 감안한다면, 내가 요즘의 한국인들에게 바라는 건 인문학을 위한 독서 이전에 선비정신부터 갖추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다산의 편지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는 큰아들 학연과 둘째 아들 학유, 그리고 조카 학초에게 당부한다.

 

 

너희들은 폐족(廢族)이다. 과거시험도 볼 수 없고, 남들로부터 무시도 당할 것이다. 그러나 폐족은 인생막장을 가리키는 불명예가 아니다. 폐족이란 참다운 독서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권리의 다른 이름이다. 폐족은 고급 공무원은 될 수 없지만, 성인이 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열심히 공부하여라. 너희가 아니면 내 저서는 누가 읽어 주겠느냐. 내 저서가 쓸모없다면 난 정말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얘들아, 얘들아….

 

 

다산은 독서를 통해 성인, 즉 깨닫는 자가 되기를 권하고 있다.

 

 

내가 밤낮으로 빌고 원하는 것은 오직 문장을 열심히 독서하는 일뿐이다. 문장이 능히 선비으 마음씨를 갖게 된다면야 내가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느냐?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책을 읽어 이 아비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임마누엘 페스트라아쉬(이만열) 하버드 박사의 한국표류기,『인생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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